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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pad> | |
| <colbgcolor=#702963><colcolor=#FCE774,#FCE774> 이름 | 안드로니코스 두카스 앙겔로스 콤니노스 팔레올로고스 Ἀνδρόνικος Δούκας Ἄγγελος Κομνηνός Παλαιολόγος |
| 출생 | 1297년 3월 25일 |
| 동로마 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 | |
| 사망 | 1341년 6월 15일 (향년 44세) |
| 동로마 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 |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 1328년 5월 24일 ~ 1341년 6월 15일 (13년) | |
| 전임자 | 안드로니코스 2세 |
| 후임자 | 요안니스 5세 |
| 부모 | 아버지: 미하일 9세 어머니: 아르메니아의 마리아 |
| 배우자 | 브라운슈바이크의 이리니 사보이아의 안나 |
| 자식 | 요안니스 5세 |
| 종교 | 정교회 |
1. 개요
로마 제국 제123대 황제이자 동로마 제국 팔레올로고스 왕조 제4대 황제.2. 생애
2.1. 즉위 이전
안드로니코스 3세는 1297년 3월 25일, 그의 할아버지 안드로니코스 2세의 38번째 생일날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1295년 공동황제로 즉위한 미하일 9세 팔레올로고스였고, 어머니는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의 왕 레본 2세의 딸 아르메니아의 마리아였다.1318년 5월, 안드로니코스는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 하인리히 1세의 딸, 브라운슈바이크의 이리니와 결혼했다. 1321년 즈음 그녀는 아들을 낳았지만 유아기에 사망한다.
1320년, 안드로니코스는 그의 형제 마누일을 살해한다. 이런 살인 행위와 함께 귀족 출신의 무리들과 방탕하게 어울려 지냈고 거기다 안드로니코스의 아버지인 미하일 9세는 이 소식을 듣고 충격으로 앓다가 사망한다. 방탕+혈육 살해와 그 충격으로 아버지를 쓰러트린 사실상의 패륜이라는 더블 크라운을 달성한 안드로니코스 3세의 행위는 당시까지 황제였던 그의 할아버지인 안드로니코스 2세와의 불화로 이어졌다.
1321년, 손자의 위와 같은 대형 사고에 화가 난 안드로니코스 2세는 그를 후계자에서 내친다. 이후 안드로니코스 3세는 수도를 떠나 그의 지지자들을 모아 트라키아에서 황제를 참칭하였고, 대립황제가 되어 반란을 일으켰다.
2.2. 할아버지와의 내전
내전이 벌어지기 14년 전이자 룸술탄국이 멸망한 직후인 1307년 상황 -
1320년, 안드로니코스는 그의 형제였던 마누일을 죽였다. 이 살인과 방탕하고 불성실한 행동으로 할아버지 안드로니코스 2세의 분노를 산 안드로니코스 3세는 후계자 자리를 박탈당했다.[1]
1321년, 부활절 안드로니코스는 수도를 빠져나와 그의 할아버지에 대항하기 위해 아드리아노폴리스로 도망쳤고 그곳에서 지지자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후 요안니스 6세가 되는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 그리고 시르얀니스 팔레올로고스 등이 이 부름에 호응했고 이중 시르얀니스가 안드로니코스 2세를 협박해 협상을 끌어내려고 대군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플로 향했다.
대군이 접근하자 안드로니코스 2세측이 백기를 들었고 1321년 6월 6일, 양측은 평화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으로 안드로니코스 3세는 안드로니코스 2세와 공동황제에 오르며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를 다스리고 콘스탄티노플을 포함한 아카이아, 아나톨리아의 나머지 영지들은 안드로니코스 2세가 다스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말만 공동황제였지 다른 나라와 조약을 맺을 때 별개로 맺는 모습을 보이는 등 사실상 나라가 둘로 갈라진 것과 진배없었다.
1321년의 평화는 안드로니코스 3세 진영에서의 권력 다툼으로 깨지게 된다. 시르얀니스는 자신이 받은 보상이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의 것보다 더 작다고 판단해 불만을 품기 시작했고 거기에 안드로니코스 3세와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의 깊은 관계를 시샘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안드로니코스 3세가 그의 부인을 탐하자 완전히 폭발하여 1321년 12월에 안드로니코스 2세의 세력으로 완전히 갈아타버린 것이다.
시르얀니스는 진영을 갈아탄 대가로 안드로니코스 2세로부터 메가스 둑스(μέγας δούξ, 수군도총관, 水軍都摠管)라는 작위를 받아 늙은 황제에게 내전을 재개하라고 부추겼고 다시 내전이 벌어지지만 콘스탄티노플 인근 도시들이 순식간에 안드로니코스 3세의 손아귀에 들어가 버렸고 결국 안드로니코스 2세가 다시 백기를 들며 1322년 6월 영토를 2차 내전 이후로 원상복귀하는 것을 조건으로 다시금 평화 조약을 맺는다.
이 조약으로 낙동강 오리알이 되어버린 시르얀니스는 분노하여 안드로니코스 2세를 죽이고 자신이 황제가 되기로 결심하고 행동에 옮겼지만 실패했고 시르얀니스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내전을 부추기던 이가 감옥에 들어가자 제국은 농노들의 지속적 반란을 제외하면 한동안 평화가 지속되었다. 그러나 이 평화는 1327년 2월 다시 깨지게 되고 불가리아와 세르비아 같은 다른 발칸반도의 나라들 역시 내전에 참여하며 그 구조가 더 커진다.[2]
여러 전투 이후 테살로니키를 포함한 마케도니아의 도시들을 손아귀에 넣은 안드로니코스 3세는 이 기세를 몰아 콘스탄티노플 공격을 계획했고 1328년 5월 드디어 그는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했다. 콘스탄티노플 입성 이후 그는 그의 할아버지를 자진 퇴위하게 압박했고 안드로니코스 2세는 자진 퇴위할 수밖에 없었다.
할아버지를 몰아낸 안드로니코스 3세는 1328년 단독황제로 즉위했으며 그의 조력자였던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는 새로운 권력자로 등극한다. 이후 요안니스는 안드로니코스가 군대를 이끌때 내정을 담당하는 등 제국의 요직을 맡게 되었다.
이 내전은 늙은 제국을 더욱더 지치게 만들었다. 내전으로 화폐의 가치가 떨어졌으며 재정은 악화되었다. 다만 이후 새 정부는 법과 제도를 재편하여 이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한편 내전 도중 그의 아내였던 이리니가 아이를 낳지 못하고 1324년 8월 16/17일에 죽었다. 1326년 그는 사보이아의 안나와 결혼하였다. 그리고 1327년 딸을 낳는다. 딸의 이름은 마리아(나중에 이리니로 개명함) 팔레올로고나였다.
2.3. 니케아 상실
팔레올로고스 내전이 한창이던 1326년, 오스만 베이국이 동로마 제국의 아나톨리아 주요 영토 중 하나인 부르사를 점령하였다. 거기다 니케아와 니코메디아도 지속적으로 공격당하며 서서히 무너지는 중이었다. 이 중 니케아는 니케아 제국과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발원지 격이며 제국 제2의 수도였기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켜야 할 도시였다. 이에 안드로니코스 3세는 니케아와 니코메디아를 포위로부터 구원하고 아나톨리아의 국경을 안정화 하는 것을 목표로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후일 요안니스 6세)와 함께 최대한도로 징집할수 있는 4천 명의 병력(최소 2천 명)을 이끌고 니코메디아로 향하였다.한편 제국군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오르한 1세는 약 8천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펠레카논 언덕을 차지해 니코미디아로 향하는 길을 차단했다. 6월 10일, 양측의 군대가 조우했고 오르한은 300명의 궁기병대를 보내 언덕을 올라오려는 동로마군을 저지하려고 했지만 이들은 더 이상 진격하지 않은 동로마 군에게 격퇴되었다. 두 군대는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지만 승자는 결정되지 않았다. 밤이 되자 동로마군은 후퇴를 준비하였지만 오스만 군은 동로마군이 후퇴할 기회를 주지 않고 곧바로 야습을 개시했다.
오스만 군의 습격으로 안드로니코스와 요안니스는 경미한 부상을 당했다는데 진중에는 황제가 죽었다는 헛소문이 퍼졌고, 동로마군은 단체로 패닉 상태에 빠져 붕괴되었고 이는 막대한 손실로 이어졌다. 이에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와 안드로니코스 3세는 남은 군대를 이끌고 마르마라 해를 건너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할 수밖에 없었다.
동로마 제국은 펠레카논 전투 패전 후 아나톨리아에 군대를 보낼 여력이 없었고, 결국 니케아는 1331년 오스만 베이국에게 항복하였다.[3]
안드로니코스는 니코미디아를 포함한 다른 아나톨리아 영토도 상실할 수는 없었고 결국 그는 오스만 베이국에 공물을 바치는 대가로 휴전을 맺었지만 니코미디아도 1337년에 결국 함락 당하고 만다.
한편 1329년에 키오스 섬은 마르티노 자카리아의 활약으로 수복되었다. 재정 악화로 해체되었던 해군을 이끌고 이룬 성과였다. 히오스 섬을 해군의 힘으로 수복한 이후 안드로니코스는 재정 악화로 약해진, 사실상 해체된 제국의 해군을 더욱 증강하려고 노력하였다. 그 결과 1332년, 동로마 제국의 해군은 자체적으로는 10척의 배로만 구성되어 있었지만 비상 시 100척의 상선을 징집해 규모를 늘릴 수 있을 정도로는 회복할 수 있었다.[4]
2.4. 세르비아와의 관계
1327년 이후, 지속되었던 불가리아와의 동맹은 동로마 제국에 어떠한 이득을 가져주지 못했고 1330년, 벨부즈 전투에서 불가리아군이 세르비아에게 박살났을 때 동로마군은 뚜렷한 지원을 하지 않았다.테살로니키의 지배자였던 시르얀니스 팔레올로고스[5]는 이후로도 안드로니코스 3세에 반하는 공작을 하다가 발각되어 세르비아로 망명했고 당시 세르비아의 군주였던 스테판 우로쉬 4세에게 몸을 의탁하고 그의 마케도니아 공격을 도왔다. 테살로니카의 유력자가 돕는 만큼 세르비아군의 진격은 순조로웠고 카스토리아(Kastoria), 오흐리드(Ohrid), 프릴레페(Prilep), 스트룸니카(Strumica), 그리고 아마도 에데사를 점령했으며 1334년 즈음에는 테살로니키까지 진격했다. 그렇게 마케도니아 유실은 기정사실화 되고있었다.
하지만 동로마 제국의 장군이었던 스프란체스 팔레올로고스가 배신자로 위장하여 세르비아군 진영으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시르얀니스 팔레올로고스를 암살하는데 성공하는데 성공하며 세르비아군의 혼란을 불러왔고 결국 전세는 완벽히 뒤집힌다.
결국 군내의 혼란을 수습하지 못한 스테판 우로쉬 4세는 1334년 8월에 안드로니코스 3세에게 평화 협정을 제안했고, 동로마 제국은 마케도니아를 되찾을 수 있었다.
2.5. 대 불가리아 외교
세르비아에게서 별로 이득을 얻지 못하자 안드로니코스 3세는 때마침 차르가 세르비아와의 전쟁으로 전사해 혼란에 빠져있던 불가리아로 시선을 돌려 불가리아령 트라키아를 합병하려고 시도했다.하지만 이런 시도는 불가리아의 새로운 차르, 이반 알렉산더르에게 저지당한다. 동로마 제국군은 1332년 7월 18일 루소카스트로 전투에서 패배했고 이로 인해 트라키아 재정복의 꿈은 날아갔다.
이후 안드로니코스는 그의 딸 마리아(훗날의 이리니) 팔레올로고나를 이반 알렉산드르의 아들 미카일 아센 4세에게 시집을 보내며 평화 조약을 맺었다.
2.6. 니코미디아 상실
안드로니코스 3세는 포키아를 마지막 제노바인 지배자였던 도메니코 카타네오로부터 빼았았다. 이처럼 안드로니코스는 차례차례 이오니아 일대에서 연전연승했다.하지만 이 승리는 오스만의 서진에 별 영향을 주지 못했다. 제국은 공물로 오스만의 베이 오르한을 달래지 못하였고, 이로 인해 오스만 베이국은 계속해서 아나톨리아를 공격했다. 아나톨리아의 영토는 조금씩 튀르크에게 정복당했다.
그리고 마침내 1337년 니코미디아가 오스만의 손에 떨어졌다. 이후 니코미디아는 이즈미트로 개명되었다. 이제 아나톨리아에는 필라델피아와 포키아를 제외하곤 동로마 제국의 영토가 남아있지 않았다.
2.7. 이피로스 수복
테살리아의 지배자였던 스테파노스 가비를로플로스가 1333년 즈음에 죽자 안드로니코스는 이때를 노려 테살리아를 제국의 통제하에 두었다. 아나톨리아에서는 실패를 거듭했지만 그리스에서는 나름의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1337년, 니코메디아가 오스만 베이국에 떨어졌지만, 그리스에서는 좋은 소식이 있었다. 안드로니코스는 니키포로스 2세 오르시니를 이용해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을 병합했던 것이다. 1204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후 이피로스는 150여년 만에 동로마 중앙정부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2.8.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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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드로니코스 3세 사망 1년 전 동로마 제국 제국은 서방영토를 수복했으나 불과 80년만에 제국 재건의 토대 아나톨리아를 거의 다 상실하고 말았다. |
안드로니코스 3세는 1341년 6월 15일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죽었다. 그의 사망 원인은 말라리아로 추정된다.
그의 치세 도중 제국은 불가리아에게 루소카스트로에서 패배했으며 오스만 베이국의 서진으로 인한 아나톨리아의 상실을 막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히오스, 레스보스, 포카이아, 테살리아, 그리고 이피로스를 수복했다. 그렇기에 회복한 서방 영토를 기반으로 국력을 회복해 아나톨리아의 수복을 충분히 노려볼만한 상황을 만들었지만 병으로 요절하면서 위의 그림은 if로 남게 된다. 거기다 그의 요절은 이후 요안니스 5세와 요안니스 6세의 내전의 원인이 되었고, 결과적으로 이 내전은 동로마 제국을 멸망으로 이끌게 된다.[6]
다만 그의 지도력 문제보다는 주변 상황이 너무 안 좋았고 무엇보다도 그의 후계자가 성년이 되기 전에 사망했으며, 이는 비참한 내전으로 이어졌다.
3. 평가
안드로니코스 3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제국 소생의 마지막 희망을 붙들고 있었던 비운의 명군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할아버지가 물려준 파산직전의 제국을 가지고 안드로니코스 3세는 제국을 다시 되살려놓기 직전까지 갔다.안드로니코스 3세의 최대 업적은 제국의 체질 개선이었다. 1329년 펠레가논 전투 패배 후, 그는 더 이상 아나톨리아 수복에 집착하지 않았다. 이게 얼핏보면 팔레올로고스 제국의 본진인 니케아를 비롯 아나톨리아 서부를 포기하는 뼈아픈 실책처럼 보일지는 모르겠으나 이미 증조부 미카일 8세부터 누적된 실책으로 인해 동방이 무너진 제국의 당대 상황을 감안했을 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목표에 국력을 낭비하는 것을 멈춘 냉철한 현실 인식이었다. 대신 그는 병력을 돌려 그리스 본토의 에페이로스와 테살리아를 병합했다. 이는 흩어져 있던 그리스어권 영토를 하나로 묶어, 제국을 소아시아의 로마에서 발칸의 강국으로 성공적으로 리모델링한 것이다. 위에 나온 1340년의 지도가 바로 안드로니코스 3세의 걸작으로, 보스포루스 해협과 마르마라해를 경계로 삼아 제국이 생존할 수 있는 현실적이고 방어 가능한 국경선을 완성했다.
또 그는 할아버지 안드로니코스 2세가 저지른 가장 큰 실책인 해군 해체를 즉각 바로잡았다. 안드로니코스 3세는 사비까지 털어가며 70척 이상의 전함을 건조했는데, 전성기에 비하면 초라하지, 제국 동방 최후의 방어선인 에게해의 해적들을 소탕하고 제노바 공화국에게 빼앗겼던 히오스섬을 탈환하는 데 성공하기까지 앴다. 해군 재건은 단순히 배만 만든 게 아니라 제국의 주권과 무역로, 이를 통한 관세 주권을 되찾아온 것이다. 그가 살아있는 동안 오스만은 감히 바다를 건널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안드로니코스 3세는 할아버지와 달리 역동적인 리더십과 2인자 활용을 통해 제국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그는 하루 종일 말 안장 위에 있었던 전사 황제였다. 마치 고전기 로마의 황제들이 분주하게 몸소 제국을 돌아다닌 것처럼 그 역시 국경 분쟁이 생기면 즉시 군대를 이끌고 달려가 해결했다. 이는 군대와 백성들에게 황제가 우리를 지켜준다는 신뢰를 회복시켰다. 거기에 그는 자신의 부족한 점인 행정, 외교적 디테일을 친구이자 재상인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에게 일임했다. 이 황제-재상 콤비는 비잔티움 역사상 가장 효율적인 팀워크를 보여주며 제국을 빠르게 안정시켰다.
때문에 안드로니코스 3세가 수십년 정도는 더 살아 아들 요안니스 5세가 성인이 될 때까지 재위를 유지했다면, 동로마 제국의 역사는 물론이고 발칸 반도를 중심으로 한 세계사는 바뀌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비잔티움을 연구하는 역사학자들, 예컨데 게오르크 오스트르고르스키나 도널드 니콜 등의 견해를 종합해 보면, 그가 더 살았다면 제국이 다시 로마 시절의 영광을 되찾지는 못했더라도, 최소한 1453년처럼 허망하게 멸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데에 의견이 일치한다. 안드로니코스 3세가 천수를 누렸다면, 오늘날 세계는 로마 제국을 실존하는 '그리스-발칸 왕국'으로 기억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의 급사는 발칸 지역사의 한 분기점이었다 평가할 수 있을것이다.
물론 이 명민한 황제에게도 한계는 있었다, 문제는 제국의 부활이 시스템의 회복이 아니라 안드로니코스 3세라는 걸출한 개인과 그의 친구인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의 능력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가 살아있을 때는 모든 게 잘 돌아갔지만, 그가 사라지자마자 구심점을 잃은 제국은 산산조각 났다. 거기에 자신이 젊고 건강했기에 급사를 예상치 못했고, 9살짜리 아들과 야심 많은 귀족들 사이의 완충 장치를 전혀 마련해두지 못했다. 결국 황제 자신이 없으면 망할 나라를 만들어놓고 떠난 꼴이 되었던 것이다.
로마사를 돌이켜 보면 로마의 결정적 순간에는, 좀 상투적으로 표현하자면 '시즌 n번째 마지막 로마인(The Last Roman)'들이 있었다. 이 기준으로 보자면 안드로니코스 3세는 동로마 제국이 강대국으로서 최소한의 위엄을 갖췄던 마지막 시기의 황제라고 할 수 있다. 황제는 아나톨리아를 잃은 패배감을 극복하고, 발칸 반도와 에게해를 중심으로 제국의 생존 전략을 수정하여 제2의 건국에 가까운 성과를 냈다. 1340년 시점에서 제국은 다시금 지역의 맹주로 부상했다. 그러나 자신의 건강을 과신하여 후계 구도를 제때 정리하지 않았고, 오스만 베이국의 초기 제압에도 실패했다는 과는 분명 존재할 것이다.
4. 여담
14세기의 무슬림 여행자 이븐 바투타가 1332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 황제를 알현하였다고 한다. 다만 동로마 제국측 기록에는 황제를 알현했다는 기록이 없다.당시 이븐 바투타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아나톨리아의 여러 도시를 거쳐 흑해를 건너 킵차크 칸국에 당도해 있었다. 이때 킵차크의 우즈베크 칸(Öz Beg khan)[7]의 기독교인 아내였던 안드로니코스 3세의 딸 바얄룬 팔레올로기나(Bayalun Palaiologina)가 출산을 위해 고향을 방문하게 되자 우즈베크 칸의 명령으로 그녀를 수행하면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하게 된다.
게임 징기스칸 4와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 플레이할 수 있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징기스칸 4에서는 능력치는 수수하지만 등용 특기가 있어서 영주로서 인재 등용을 맡기면 된다. 이후 유로파 유니버설리스 5에서 동로마의 스타팅 군주로 등장한다.
5. 참고자료
- 워렌 트레드골드 : <비잔틴 제국의 역사>
-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 : <비잔티움 제국사>
- 존 줄리어스 노리치 : <비잔티움 연대기>
- 영문 위키피디아
[1] 특히 아버지인 미하일 9세가 충격으로 사망한 것이 결정타였다.[2] 세르비아는 안드로니코스 2세를 지지했으며 불가리아는 안드로니코스 3세를 지지했다.[3] 이후 니케아는 이즈니크로 불리게 되며 21세기가 된 현재까지 오스만-튀르키예 공화국으로 이어지는 튀르크 세력의 영토로 남아있다. 다시 예전의 위상을 회복하지 못하고 지방 소도시로 전락하였다.[4] 상선이라 해서 무시할수도 있는데 이 당시 상선들은 지중해에 들끓는 해적들로부터 상인들과 물자들을 방어하기 위해 상당히 무장이 잘 되어있었다. 즉, 유사시에 군함으로 동원해도 큰 문제가 없었다.[5] 감옥에 갇혀 있다가 안드로니코스 3세가 단독황제가 되고 석방되어 마케도니아 지방의 통치를 맡고 있었다.[6] 물론 흑사병이라는 펜데믹급 전염병에 제대로 강타를 맞았다는 것도 국력 약화의 이유이긴 했지만 흑사병이 동로마만 때린 건 아니라서...[7] 우즈베크라는 민족명과 우즈베키스탄이라는 국호의 어원이 된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