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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FF>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제8대 데스포티스 Nikephoros II Orsini | 니키포로스 2세 오르시니 | |
칭호 | 데스포티스 |
출생 | 1328년 |
사망 | 1359년 (향년 30~31세) |
재위기간 | 1335년 ~ 1338년 (1차 재위) 1356년 ~ 1359년 (2차 재위) |
가문 | 오르시니 |
휘 | 니키포로스 오르시니(Nikephoros Orsini) 니키포로스 두카스(Νικηφόρος Δούκας) |
아버지 | 조반니 2세 오르시니 |
어머니 | 안나 팔레올로기나 |
배우자 | 마리아 칸타쿠지니 |
종교 | 정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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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제8대 데스포티스.2. 생애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제7대 데스포티스인 조반니 2세 오르시니와 미하일 2세 콤니노스 두카스의 아들인 디미트리오스 두카스의 손녀 안나 팔레올로기나 사이의 장남이다. 7살 때인 1335년 부친이 갑작스럽게 사망한 후 이피로스의 데스포티스가 되었다. 어머니 안나가 섭정으로서 이피로스를 통치하려고 남편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증거는 없다.1336년, 동로마 제국 황제 안드로니코스 3세는 이피로스가 테살리아를 돌려주길 거부하자 군대를 일으켜 이피로스로 쳐들어갔다. 1338년 멸망의 위기에 직면한 이피로스 측이 항복 의사를 밝혔고, 안드로니코스 3세는 안나를 인질로 보내고 니키포로스 2세와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의 딸 마리아 칸타쿠지니를 약혼하게 하였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에 반감을 품은 이피로스 귀족들은 니키포로스를 빼돌려서 타란토에 있는 카트린 2세에게 보내기로 했다. 그녀는 라틴 제국의 부활을 꾀하고 있었기에, 이들과 손을 잡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도모하려 했다. 1338년 카트린은 펠로폰네소스로 건너가 반란을 선동했고, 이피로스는 아르타에서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동로마 총독 테오도로스 시나디노스를 체포했고, 니키포로스는 이피로스로 돌아왔다. 그러나 안드로니코스 3세와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는 재빨리 토벌군을 이끌고 와서 반란군을 격파하고 토모카스트론에서 니키포로스 일행을 포위했다.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는 신변을 보장해줄 테니 항복하라고 요구했고, 전의를 상실한 수비대는 항복했다.
그 후 니키포로스는 마리아와 정식으로 결혼하였고, 판히페르세바스토스(panhypersebastos)의 칭호를 받았다. 이것은 고대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그리스어로 번역한 단어 Sebastos에 Pan(모든)+Hyper(더한, 뛰어난)를 더한 칭호로, 황제 다음 가는 직위였다.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송되었고, 1341년 팔레올로고스 내전이 발발했을 때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와 함께 했다.
1347년 칸타쿠지노스가 내전에서 승리하고 요안니스 6세로 즉위한 뒤, 니키포로스는 데스포티스로 선임되었다. 1351년부터 아이노스와 헬레스폰토스 연안의 도시들을 통치하는 임무를 맡았다. 1355년 팔레올로고스 내전이 또다시 벌어지고 1340년대 후반 이피로스를 정복한 세르비아의 명군 스테판 두샨이 사망하면서 세르비아가 혼란에 빠지자, 그는 이피로스를 탈환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기로 마음먹었다.
1356년 봄 세르비아의 관할이었으나 총독이 사망하면서 무정부 상태가 된 테살리아를 공략하고, 여세를 몰아 이피로스로 진격하여 두샨의 동생이자 이피로스의 제9대 데스포티스를 자처한 시메온 우로시를 축출하고 이피로스의 군주가 되었음을 선포했다. 그러나 당시 이피로스의 대부분 지역은 알바니아 부족들에게 장악되어 있어서 통제가 불가능했다. 그는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고 세르비아의 반발을 회피하기 위해 스테판 두샨의 미망인 헬레나의 여동생인 불가리아의 테오도라와 결혼하려 했다. 당시 장인인 요안니스 6세는 요안니스 5세와의 내전에서 패하여 퇴위한 뒤 수도원으로 들어간 상태였기에, 마리아의 가치는 없는 것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빈민 구제를 열심히 하고 신하들을 온화하게 대해서 인망이 두터웠다. 귀족들은 강하게 반발했고, 니키포로스는 어쩔 수 없이 마리아와의 결혼을 이어가야 했다.
1359년, 아이톨리아의 아켈로오스 전투에서 알바니아 부족과 전투를 벌이다 전사했다. 이후 알바니아군에게 점령당할 위험에 처한 이피로스의 몇몇 도시들은 시메온 우로쉬에게 귀순했지만, 대부분의 영토는 페터르 로샤를 비롯한 알바니아 지도자들의 수중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