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3 21:50:08

아돌프 히틀러/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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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가족사3. 가계도
3.1. 히틀러의 선조3.2. 히틀러의 이복형제자매3.3. 히틀러의 동복형제자매3.4. 이복 형제들의 후손

1. 개요

파일:히틀러 가문 가계도.jpg
아돌프 히틀러의 가족관계.

2. 가족사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Volksb%C3%BCcherei_Braunau_03.jpg
브라우나우암인의 히틀러의 생가 앞에 설치된 기념석. 히틀러의 생가라는 표시는 전혀 없이 그저 '평화, 자유, 그리고 민주주의를 위해, 다시는 파시즘이 없기를, 수백만의 죽음이 경고한다'는 글귀만이 있다.[1]

아돌프 히틀러의 할머니인 마리아 아나 시클그루버(Maria Anna Schicklgruber)는 요한 게오르크 히들러(Johann Georg Hiedler)와 동거하던 중, 아돌프 히틀러의 아버지인 알로이스 히틀러를 혼외자로 낳았다.

마리아 시클그루버는 알로이스가 태어난 42세에 프랑켄베르크 가문에서 시녀로 일했는데, 프랑켄베르크는 알로이스가 태어난 직후부터 그가 14세가 될때까지 마리아에게 소정의 금액을 매해 지불하였다. 후일 이 사실에 대해 의문을 품은 아돌프 히틀러 본인이 한스 프랑크에게 조사를 명령했는데, 한스 프랑크는 프랑켄베르크 본인이나 그의 아들인 레오폴트 프랑켄베르크가 사실 알로이스의 아버지라고 추정된다고 사형 전의 자서전에 주장하였다.[2] 프랑켄베르크 가문은 유대인 가문이기 때문에, 이렇게만 본다면 히틀러는 1/4 유대인이 되지만, 사실 '부유한 유대인 가문으로부터 돈을 뜯어내기 위한 마리아의 자작극'일 가능성이 낮지 않기 때문에[3] 확실하지는 않다. 후일 윌리엄 패트릭 히틀러는 자신의 삼촌인 아돌프 히틀러와 자신이 유대계 혈통이라 주장했는데, 영국으로 망명한 뒤 히틀러를 까내리기 위해 한 말일 가능성은 존재한다.[4][5]

마리아 시클그루버는 알로이스의 출생신고는 곧바로 했지만, 정작 히들러와의 혼인신고는 하지 않고 계속 동거상태를 유지하였다. 알로이스가 태어난 이후 5년이 지나서야 히들러와 뒤늦게 혼인신고를 하였고, 이미 태어나 있던 알로이스는 친자로 입적하지 않고 동거자로 표시했다. 이 히들러라는 성은 고정된 철자가 없이 휘틀러(Hütler)로 쓰이기도 했다.

요한 히들러는 혼인신고 이후 어디론가로 가출하였고, 알로이스는 어머니의 성 시클그루버를 가지고 알로이스 시클그루버(Alois Schicklgruber)라는 이름으로 삼촌(아버지의 동생)인 요한 네포무크 히들러(Johann Nepomuk Hiedler)의 아래에서 자랐다. 히틀러의 조상은 독일계 오스트리아인들이었으며 17세기 후반부터 '히들러'라는 성이 역사에 나타난다.

어쨌든 요한 히들러는 나중에 돌아와 이름을 히틀러라고 바꾸었고 이 철자가 굳어지면서 알로이스에게도 전해진다.

알로이스는 자라나서 세관공무원이 되었다. 그는 초등학교 학력으로 세무서장(세관장)이 된 입지전적인 인물인데, 이는 당시로서도 대단히 드문 일이었다. 그는 결혼을 세 번 했다. 첫 결혼은 상사의 친척인 스무살 이상의 연상이었던 돈 많은 여자 안나 글라슬과 했다. 그런데 첫째 아내가 아파서 드러누워 있을때 하녀였던 프란치스카 마첼베르거와 바람을 피웠고 하녀는 임신을 하게 된다. 첫째 부인이 자녀 없이 죽자 그 하녀와 두 번째 결혼을 하고 그 사이에서 이복 형제/자매들인 알로이스와 앙겔라가 태어났다. 두 번째 아내가 죽기 전에도 바람을 피워서 임신을 시키고 2번째 아내가 죽자 3번째 결혼을 한다. 3번째 아내가 바로 아돌프 히틀러의 생모 클라라 푈츨이었다. 정리하자면, 첫 번째와 두 번째 처는 모두 병사했고, 첫 번째 부인의 집안으로부터 유산과 집안을 물려받아 알로이스는 재산과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다. 그는 세번째의 결혼에서 여러 명의 자식을 얻게 된다. 이 중 네 번째 자식이 바로 아돌프였다.

3번째 부인은 알로이스의 사촌누나 요하나 푈츨의 딸인 클라라 푈츨이었다. 조선시대 이후의 한국인의 관점에서는 외당숙과 종질녀 사이에서 나온 근친상간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고려시대까지도 왕실에서 조차 남매끼리 결혼하는 경우가 있었고, 그 때문에 신라시대나 고려시대에 근친상간의 기준이 현대 한국과 같았던 당시 중원의 황제에게 책봉요청서를 쓸 때 이를 문제삼을까봐 왕비의 성을 왕비의 어머니의 성으로 바꾸어 동성임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했었던 사례도 존재하였고, 또 전 세계적으로 혼인이 금지되는 친족 범위가 5촌 이상인 나라는 극히 드물고, 유럽에서는 20세기 초까지 사촌간의 결혼도 드문 일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고려할 필요가 있다. 당장 히틀러의 출신 국가의 그 당시 황제만 해도 사촌 여동생이 황후였으니...

영국의 전기작가 이안 커쇼의 주장에 따르면, 법적으로 알로이스 시클그루버를 키워 준 삼촌인 요한 네포무크 히들러가 알로이스의 진짜 생부일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아돌프의 친할머니 마리아 안나 시클그루버는 알로이스 시클그루버를 낳고 5년 후에 요한 게오르크 히들러와 결혼한다. 이 부부가 죽은 지 약 20여년 뒤 요한 히들러의 동생이 '실은 우리 형님이 알로이스를 친자식으로 인정했었다니까요.' 하면서 교회에 뇌물을 먹이고 사후 입적시켰는데, 이런 비정상적인 입적은 알로이스 히틀러의 삼촌이 실은 그의 생부였다는 가설을 뒷받침한다. 알로이스는 당시 50이 넘은데다가 이미 세관장으로 출세한 상태였고, 사생아로서 받는 사회적 차별도 거의 없었기에 출생의 사실을 감추기 위해 별다른 노력을 할 필요가 없었다. 호적 변경도 삼촌(요한 히들러의 동생)이 주도한 데다가 나중에는 알로이스에게 재산도 상속해줬다. 그런데 후에 알로이스는 히틀러로 성을 바꾸고 생부로 의심되는 삼촌의 손녀와 결혼하는데 그녀가 아돌프 히틀러의 생모다. 이는 교회법으로도 근친이 명백하고 법적으로도 5촌(삼촌이 생부라면 삼촌-조카지간)인데, 결혼 당시 알로이스 히틀러가 직접 로마를 방문해서 교회에 바친 뇌물로써 그를 호적에 올리는데 성공했다.

3. 가계도

3.1. 히틀러의 선조

3.2. 히틀러의 이복형제자매

3.3. 히틀러의 동복형제자매


히틀러의 친남매들 대부분이 요절했기에 파울라는 1900년 이후까지 살아남은 유일한 동생이었다. 그래서 아돌프는 동생 파울라를 매우 아꼈고[7] 남매간의 사이도 좋았다. 아돌프가 독일의 독재자가 된 이후에도 업무로 인해 자주 만나지 못해도 1년에 한번씩은 파울라에게 찾아와서 같이 쇼핑하고 식사했으며 매달 동생에게 정기적인 돈을 주었다. 파울라는 자기 오빠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전혀 알지 못한 상태였고, 그저 자기한테는 잘 대해주고 따뜻한 오빠라는 사실밖에 몰랐다. 본인은 나치당에 가입을 거절하고 군병원에서 비서로 일하면서 전쟁기간 내내 행정 업무에만 전념했다. 결국 나치 독일이 패망할 때 1945년 5월 연합군 측 비밀요원들에게 체포당하고 나서야 자기 오빠의 진짜 정체를 알았지만, 파울라는 오빠의 만행과는 별다른 관련성이 없었다. 특히 연합국은 연좌제를 금지했기에 바로 석방되었고, 기존에 파울라에게 공여된 재산 역시 그대로 인정했다. 군무원에서 해직된 후엔 골동품 가게에서 일하면서, 그동안 모아둔 돈과 오빠가 준 돈으로 투룸 형식의 작은 집으로 이사해서 남은 여생을 조용히 살았으며 평생 결혼하지 않고 자녀 없이 독신으로 살다가 사망했다. 이로서 아돌프 히틀러의 직계는 대가 완전히 끊기게 되었다.

3.4. 이복 형제들의 후손

아돌프 히틀러와 동복 형제들은 자손 없이 죽은 반면 이복형제의 후손들은 여전히 살아있거나 가까운 과거까지도 생존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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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히틀러의 생가였던 이 건물은 1910년대 이후 소유주가 따로 있었으나 오스트리아 정부에서 1972년부터 건물을 임대해 장애인 복지 시설과 도서관 등으로 활용해왔다. 소유주와 정부의 수십 년간의 법정 공방 끝에 2019년 8월, 소유주에게 11억원 가량을 보상하기로 판결되었다.# 네오 나치 세력들의 '성지'가 될 우려가 있어서 2016년에는 철거하려 했으나 정치권과 역사학계의 반발이 커서 2019년 11월, 경찰서로 개조하기로 새로 결정되었다.#[2] 문제는 프랑크 본인도 이렇게 적었다가 나중에는 히틀러가 아리아인이라 적는 등 이상한 행적을 보였고, 결정적으로 마리아 시클그루버의 거주지에 유대인들이 살았다는 사실까지는 어떻게든 증명이 되었는데 '프랑켄베르크 가문' 자체의 흔적은 아예 없다. 프랑크가 오기를 했을 가능성까지 볼 수는 있겠는데 그렇게 본다면 히틀러가 유대인 혈통이라고 인정하기 위해 증거를 끼워맞추는 것에 가깝다.[3] 마리아는 이미 요한과 동거중이었기 때문에, 굳이 요한 히들러의 존재를 부정하고 프랑켄베르크나 그의 아들 레오폴트가 알로이스의 아버지라고 단정지을 이유는 없다.[4] 윌리엄 패트릭 히틀러 본인도 당연히 마리아가 살던 곳이나 가족 이야기 정도는 알았을테니, 사실 여부를 떠나서 히틀러의 위신을 실추시키기 위해 '믿거나 말거나 식'으로 말할 근거는 충분했을 것이다.[5] 윌리엄 패트릭 히틀러를 포함해 살아있는 히틀러의 친척들을 상대로 유전자 검사를 해본 결과 아슈케나지/세파르딤 유대인들에게서 발견되는 북아프리카계 유전자가 '발견되긴' 했는데, 이것만으로 역시 히틀러가 일부 유대인이라는 근거를 내리기에는 부족하다.[6] 히틀러 가문의 본래 성씨는 히들러(Hiedler)였는데, 알로이스 히틀러 때부터 히틀러(Hitler)가 되었다.[7] 특히 아버지가 사망한 지 4년 뒤에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난 터라 아돌프는 파울라의 부모 역할도 하며 동생을 잘 챙겨주었다.[8] 전쟁 후 히틀러라는 성을 힐러(Hiller)로 바꾸었다고 한다.[A] 종조부가 히틀러라는 사실을 안 뒤 히틀러라는 저주 받은 혈통이 계속 이어지지 않길 바란다며 결혼도 안하고 자식도 안 낳겠다고 서로 합의했다고 한다.[A] [A] [12] 1989년 교통사고로 사망.[A] [14] 알로이스 히틀러 주니어가 도박 여행으로 유럽 간 시기에 제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가족과 연락이 끊겨서 브리짓 다울링과 이혼하지 않았음에도 생사를 확인할 길이 없어 중혼하게 된다.[15] 히틀러에 반대한 이복형과 달리 히틀러를 지지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독일 국방군에 입대하였고 1941년 제23 포츠담 포병연대에서 복무하였다. 히틀러는 아끼는 조카가 위험한 전방에 나가는 것을 걱정하였다. 1941년 1월 10일 통신 장비를 수거하고자 파견되었는데 소련군에 잡히고 말았고, 스웨덴 적십자사가 야코프 주가슈빌리와 교환하기로 주선했는데 히틀러는 받아들였으나 항복을 절대 용납하지 않던 이오시프 스탈린이 거절해 무산되었다고 한다. 결국 여러 달 동안 고문을 받다가 죽었고 사후 2급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히틀러와 스탈린 모두 하인츠와 야코프가 죽었을 때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16] 오스트리아에서 화학 교사로 일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루프트바페 중위로 징집되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부상당하고 포로로 잡혀 소련에서 10년 넘게 노역 생활을 하다가 1955년 오스트리아로 귀국해 다시 교사로 조용히 살다 1977년 사망했다.[17] 1925년부터 히틀러와 같이 살기도 하면서 가까웠는데, 히틀러는 겔리를 사랑했지만 독신으로 살고 싶어 했고 이에 다른 사람과 사랑하지 못하게 했다. 겔리는 1931년 권총으로 자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