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상문고등학교의 비리재단 관련 사건.1980년대도 아니고 2000년대 첫 해에 고등학생들이 주체적으로 시위에 나서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이례적인 사태였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그렇다고 고등학생이라고 사회투쟁에 나섰던 역사가 없는 것은 아니고 1994년에 청소년단체 '샘' 사건으로 인해 사라지기 전까지만 해도 고등학생 운동권은 흔했다.[1] 4.19 혁명으로만 거슬러 올라가도 언니, 누나, 형, 오빠들을 잡아가지 말라고 하면서 초등학생들이 당당히 투쟁에 나섰다.
세월이 지나 1990년 6월에는 대구 달서 경화여자고등학교 학우 김수경이 투신자살로, 9월에는 충북 충주 충주고등학교 학우 심광보가, 1991년 연쇄 분신 파동 당시 전남 보성 보성고등학교 학우 김철수가 분신자살로 항의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사회적 분위기가 그에 맞는 의식을 형성하게 한다는 산 증거.
2. 전개
상문고 학생 인권 선언
우리 학생은 하나의 인격체로서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존중하도록 배울 권리가 있다. 십 수년간 배움의 과정은 우리가 서로를 같은 인간으로서 존중할 권리와 의무가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지난 암울한 세월 불의한 세력으로부터 유린당한 인권을 되찾기 위하여 이 땅의 민주시민들이 보여준 용기와 희생의 역사는 그러한 가르침의 산실이었다. 그러나 민주화의 역사가 살아 숨쉬어야 할 학교에서는 여전히 강압적이고 비민주적인 통제가 행해지고 있고, 입시를 빌미로 한 이기심의 고취는 우리모두를 불행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있다. 이에 우리 학생들은 교육의 진정한 주체로서, 그리고 자신의 삶을 풍성히 가꾸어나갈 책임이 있는 독립된 인격체로서 지난 숭고한 역사의 가르침을 본받아 우리 자신의 인권을 되찾을 것을 선언한다.
양적인 교육대상의 확대만이 강조되어 온 근대부터 신민(臣民)들을 통제하기 위한 관료주의적 편의만이 강조된 일제와 군사독재 체제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우리 교육은 어떤 우를 범해 왔는가. 한국의 주변부적인 위상과 암울한 시대의 부산물인 획일화 교육은 학생들의 개성을 철저히 무시한 채, 인간이 가진 무한한 가능성의 싹을 뿌리뽑아 왔다. 학생 개개인이 마땅히 인간으로서 존중받아야 할 권리는 성적이라는 단 하나의 평가기준에 의해 여지없이 유린되었다.
'애들은 맞아야 한다'는 식의, 암울한 시대가 남긴 우민화 교육의 잔재는 학생들을 타율적으로 길들여 왔다. 학생과 교사 사이에 응당 보장되어야 할 평등한 인격체간의 의사소통의 권리가 짓밟힌 채, 기성 제도권의 감내할 수 없는 폭력이 학생이기 이전에 한 인간인 우리들 스스로에 대한 존중심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비합리적인 인권의 억압은 대한민국의 학생들을 오로지 눈치만 발달한 타율적인 바보로 만들어 왔다. 이러한 비민주적 교육을 받고 자란 우리가 미래를 담당하게 된다면,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의 크나큰 손실과 도덕적인 위기를 초래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이제 학생들은 독립된 인격체로서 천부적으로 부여받은 권리를 주장하고자 한다. 우리는 더 이상 '훈육'이라는 명목으로 우리들에게 가해지는 비인격적 대우에 순응하지 않을 것이다. 학생 통제의 편의만을 위한 강압적인 인권유린의 관행들은 반드시 시정되어야한다.
일부 교사들과 기성세대의 구태의연한 권위주의도 거부한다. 우리들은 더 이상 교권이 '힘의 권위'로서 학생을 짓누르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교권은 '사랑의 권위'여야 하며 교사의 직분에 부합할 때 부여되는 공적인 권리여야 한다. 이러한 민주적 의식의 각성 하에, 스승과 제자는 서로를 존중하고 상호간의 예의를 지켜야 한다.
이제 학생들은 우리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부모와 교사, 기성사회로부터 되찾을 것을 선언한다. 우리는 각자의 능력과 적성에 맞는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 더 나아가 모든 종류의 사회적 요구와 평가로부터 벗어나 한 인간으로서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하도록 가르침을 받을 권리를 갖고 있다. 각자의 재능과 소신에 따라 자신의 즐거운 인생을 살아가고 남을 사랑하고 존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교육, 이제 우리 학생들은 그러한 교육을 요구한다.
학생들의 일은 학생들이 스스로 처리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민주 교육이요, 숭고한 역사의 열매인 민주주의에 대한 학습이다. 우리는 학교에서 학생과 관련하여 이루어지는 모든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한다. 전반적으로 민주화되어 가는 우리 사회의 추이를 보아 이는 시대의 대세임이 분명하며, 민주사회의 주역으로 성장해 나갈 학생들에게 필수적인 '산 교육'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러한 민주교육의 연장선상에서 우리는 학생의 본분인 학업에 열중하고 스스로를 방종으로부터 진정 자유롭게 할 것을 다짐한다.
오늘 우리는 학생들의 정당한 권리를 되찾을 것을 선언한다. 진정한 교육의 민주화와 학생들의 민주 시민의식 배양을 위하여, 이 땅의 올곧은 역사발전을 위하여 우리는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대한민국의 교육을 반석 위에 올려놓을 수 있도록 전력을 경주할 것이다. 학생의 인권이 보장되고 존중되는 학교, 학교의 주인인 학생이 진정한 주체가 되는 학교를 만들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이 모일 때, 민주 교육의 이상은 현실로 다가올 것이다. 그 현실을 하루라도 앞당기기 위하여, 학우들아 일어서자.
2000년 3월 18일
상문고등학교 학생 일동
1994년에 재단과 교장의 비리와 횡포를 도저히 감내하지 못하고 일부 교사들이 양심선언을 하면서 상춘식 교장[2] 및 그의 아내 이우자 이사장의 학생부 성적 조작 및 공금 횡령 비리 사건[3]이 발각되었다. # 이 사건으로 이사장과 이사들이 구속, 수감되었고[4] 재단 이사의 해임 및 관선 이사의 파견이 이루어졌으며 교육법이 개정되었다. 이 덕분(?)에 PD수첩이나 그것이 알고싶다 등의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되었다.우리 학생은 하나의 인격체로서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존중하도록 배울 권리가 있다. 십 수년간 배움의 과정은 우리가 서로를 같은 인간으로서 존중할 권리와 의무가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지난 암울한 세월 불의한 세력으로부터 유린당한 인권을 되찾기 위하여 이 땅의 민주시민들이 보여준 용기와 희생의 역사는 그러한 가르침의 산실이었다. 그러나 민주화의 역사가 살아 숨쉬어야 할 학교에서는 여전히 강압적이고 비민주적인 통제가 행해지고 있고, 입시를 빌미로 한 이기심의 고취는 우리모두를 불행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있다. 이에 우리 학생들은 교육의 진정한 주체로서, 그리고 자신의 삶을 풍성히 가꾸어나갈 책임이 있는 독립된 인격체로서 지난 숭고한 역사의 가르침을 본받아 우리 자신의 인권을 되찾을 것을 선언한다.
양적인 교육대상의 확대만이 강조되어 온 근대부터 신민(臣民)들을 통제하기 위한 관료주의적 편의만이 강조된 일제와 군사독재 체제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우리 교육은 어떤 우를 범해 왔는가. 한국의 주변부적인 위상과 암울한 시대의 부산물인 획일화 교육은 학생들의 개성을 철저히 무시한 채, 인간이 가진 무한한 가능성의 싹을 뿌리뽑아 왔다. 학생 개개인이 마땅히 인간으로서 존중받아야 할 권리는 성적이라는 단 하나의 평가기준에 의해 여지없이 유린되었다.
'애들은 맞아야 한다'는 식의, 암울한 시대가 남긴 우민화 교육의 잔재는 학생들을 타율적으로 길들여 왔다. 학생과 교사 사이에 응당 보장되어야 할 평등한 인격체간의 의사소통의 권리가 짓밟힌 채, 기성 제도권의 감내할 수 없는 폭력이 학생이기 이전에 한 인간인 우리들 스스로에 대한 존중심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비합리적인 인권의 억압은 대한민국의 학생들을 오로지 눈치만 발달한 타율적인 바보로 만들어 왔다. 이러한 비민주적 교육을 받고 자란 우리가 미래를 담당하게 된다면,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의 크나큰 손실과 도덕적인 위기를 초래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이제 학생들은 독립된 인격체로서 천부적으로 부여받은 권리를 주장하고자 한다. 우리는 더 이상 '훈육'이라는 명목으로 우리들에게 가해지는 비인격적 대우에 순응하지 않을 것이다. 학생 통제의 편의만을 위한 강압적인 인권유린의 관행들은 반드시 시정되어야한다.
일부 교사들과 기성세대의 구태의연한 권위주의도 거부한다. 우리들은 더 이상 교권이 '힘의 권위'로서 학생을 짓누르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교권은 '사랑의 권위'여야 하며 교사의 직분에 부합할 때 부여되는 공적인 권리여야 한다. 이러한 민주적 의식의 각성 하에, 스승과 제자는 서로를 존중하고 상호간의 예의를 지켜야 한다.
이제 학생들은 우리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부모와 교사, 기성사회로부터 되찾을 것을 선언한다. 우리는 각자의 능력과 적성에 맞는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 더 나아가 모든 종류의 사회적 요구와 평가로부터 벗어나 한 인간으로서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하도록 가르침을 받을 권리를 갖고 있다. 각자의 재능과 소신에 따라 자신의 즐거운 인생을 살아가고 남을 사랑하고 존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교육, 이제 우리 학생들은 그러한 교육을 요구한다.
학생들의 일은 학생들이 스스로 처리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민주 교육이요, 숭고한 역사의 열매인 민주주의에 대한 학습이다. 우리는 학교에서 학생과 관련하여 이루어지는 모든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한다. 전반적으로 민주화되어 가는 우리 사회의 추이를 보아 이는 시대의 대세임이 분명하며, 민주사회의 주역으로 성장해 나갈 학생들에게 필수적인 '산 교육'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러한 민주교육의 연장선상에서 우리는 학생의 본분인 학업에 열중하고 스스로를 방종으로부터 진정 자유롭게 할 것을 다짐한다.
오늘 우리는 학생들의 정당한 권리를 되찾을 것을 선언한다. 진정한 교육의 민주화와 학생들의 민주 시민의식 배양을 위하여, 이 땅의 올곧은 역사발전을 위하여 우리는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대한민국의 교육을 반석 위에 올려놓을 수 있도록 전력을 경주할 것이다. 학생의 인권이 보장되고 존중되는 학교, 학교의 주인인 학생이 진정한 주체가 되는 학교를 만들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이 모일 때, 민주 교육의 이상은 현실로 다가올 것이다. 그 현실을 하루라도 앞당기기 위하여, 학우들아 일어서자.
2000년 3월 18일
상문고등학교 학생 일동
그러다 1999년 말부터 비리 재단(상춘식 일가)이 학교 복귀를 노리고 꼼수를 부리는 정황이 포착되면서 학교가 술렁이기 시작했고 2000년 1학기 말 즈음에는 본격적으로 시위에 돌입하여 학생회 측에서 1학기 기말고사를 거부하고[5] 2000년 7월 초에 아침 10시경에 고등학생 신분으로 서초동 법원/검찰청 앞까지 진출해 전대미문의 시위를 하기도 하였다.
사실 이 시위는 계획된 시위가 전혀 아니었고 학교 운동장에서 농성을 벌이다가 누군가 법원으로 나가자는 즉흥적인 제안에 모두들 순식간에 동요되어 갑작스레 이루어진 시위였다.[6] 운동권에 뜻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단순히 비리 재단 복귀를 반대한다는 일념 하에 즉흥적으로 벌인 시위였기에 일반적인 시위와는 달리 아는 운동권 노래도 전혀 없어서 교가와 애국가만 죽어라 부르긴 했다.
1,500여명 가까이 되는 전교생들이 갑작스레 일제히 거리로 쏟아져 나온 탓에 혼란이 일어났다. 특히 서울고 사거리와 그 주변 골목에서 출동한 전경들과의 대치 상태가 상당히 심각했다. 학생들이 더 이상 진출하는 것을 막고자 전의경들이 사거리 사방 길을 전경 차량을 활용하여 담을 만들고 방패를 형성하여 차단막을 형성하였다. 학생들은 아무런 무기도 없었고 폭력도 행사하지는 않았지만, 전경들은 1,500여명의 고등학생들을 막기 위해 압박했다. 차단 과정에서 학생들과 충돌도 발생하여 전경의 무자비한 곤봉과 군홧발, 방패 세례 등에 의해 팔골절 등의 부상을 입은 학생도 있었고 시위 과정에서 물리적인 충돌을 막기 위해 학생들과 전경 사이에 방패처럼 서 있던 학부모가 누군가 던진 물체[7]에 맞아 부상을 당한 사례도 있었다. 경찰, 고교생 시위 과잉 진압...학부모 항의 잇따라
[8]
오전 10시 경에 학생들이 쏟아져 나온 서울고 앞 사거리 일대의 교통은 당연히 마비되었는데 어느 덤프트럭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막무가내로 밀어붙여 전경 차단막이 뚫리는 바람에 학생 시위대가 서초동 법원, 검찰청 쪽으로 진출하는 길이 트이게 되었다.[9] 서초동 서울지방법원/검찰청 사이에 있는 대로변 막다른 길에 모인 학생들은 학생회장 및 학생회 임원들의 삭발식을 진행하고[10] 재단 반대 시위 구호와 교가를 부르며 계속 시위를 진행했으나 시위 장소가 법원/검찰청이라는 워낙 국가 중요 시설에 인접한 민감한 곳인지라 시위 진압용 장갑 차량까지 등장하여 해산 방송을 하는 등 전경의 압박 수위가 높아졌고 점심시간이 가까워져 학생들의 전투력이 급감한 탓에 이내 자진 해산하였다. 그래서인지 다행히 연행된 학생들은 없었지만 오후에 이뤄진 자진 해산에는 당시 날씨의 영향도 있었다. 시위는 낮 최고 기온이 무려 33.0℃에 구름 한 점 없는 날씨 속에서 한낮까지 진행되었다. 계획 없이 급작스럽게 시작된 시위였던지라 학생들은 날씨에 대한 그 어떠한 대책도 없이 교복 하복 차림으로 아스팔트 바닥에 앉아서 더위와 햇볕을 고스란히 받았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더위에 탈진하거나 피부에 화상을 입은 학생이 나오는가 하면 오랜 시간 아스팔트 바닥에 앉아 있으면서 바지가 녹아 눌러붙었다는 이야기조차 나올 정도였다.
이 시위 이후 조금 사태가 잠잠해지는 듯 싶었지만 아직 근본적 해결책이 없었기에 불안한 상황 속에서 학교가 운영되다가 이듬해인 2001년에는 재학생들의 등교 거부, 담임교사 이중 배정[11], 신입생들의 학교 배정 거부와 당시 2학년 학생들의 집단 전학 신청으로 인해 학교 자체가 완전히 붕괴될 뻔했다.
당시 1학년 신입생은 기존 입학 인원의 80% 이상이 입학 거부 및 전학 신청을 하였고 2학년 학생들도 전체 인원 중 1/5~1/4 가량 정도가 전학 신청을 한 상태였다. 당시 복귀 재단 측에서 교장으로 임명된 장방언(아래쪽 사진의 갈색 양복 입은 교사)은 그래도 전학 신청서에 도장을 안찍고 진상 부리지는 않고 빠르게 처리해주었다.[12]
또 당시 교육청의 신입생 재배정 조치에 대해 기존 재학생들의 학부모들이 "학교를 정상화한다더니 폐교조치를 하는 것"이라면서 격렬히 반발하여 서울 서초동에 위치했던 유인종 당시 교육감의 자택 앞에서 새벽 4시까지 밤샘 농성을 한 데 이어 서범석 당시 부교육감과 간담회를 통해 이러한 대책을 유보시켰다. 결국 2001년 당시 신입생들의 80%는 다른 학교로 옮겼지만 이후 신입생들이 배정되지 않는 사태를 막을 수 있었다.
교사들도 이 사태로 인해 파벌이 나뉘었는데 재단 복귀를 반대하는 쪽은 상대위(상문고사태 대책 위원회)라는 이름으로 활동했고[13] 찬성하는 쪽은 상미교(상문의 미래를 생각하는 교사들의 모임)로 나눠지게 되었다.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기본적으로 재단 복귀를 반대하였지만 시위 등의 각종 운동이 맞물려 분위기가 상당히 고조되고 나서 학생회를 비롯한 일부 학생들은 상미교 측 교사들을 상춘식에 미친 교사들이라고 하며 2000년 7월 시위 당시에 상미교 교사들 중 대표 교사들의 사진을 붙인 인형들을 불태우는 화형식을 했으며, 이 때 상미교 교사의 차량을 일부러 파손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2000년에 대법원은 상춘식이 고등학교의 교장으로서 학부모들로부터 1988년 3월경부터 1993년 3월경까지 사이에 모금한 찬조금 중 금 1,133,900,000원과 1992년 4월경부터 1993년 12월경까지 사이에 징수한 보충수업비 중 금 601,774,500원을 합한 금 1,735,674,500원을 보관 중 1986년경부터 1990년경까지 사이에 피고인의 위 학교법인에 대한 토지매매계약해약반환채무금 888,400,000원의 일부, 1986년경부터 1988년경까지 사이에 피고인의 처 공소외인의 보석상 인수로 인한 채무금 650,000,000원의 일부, 1992년경부터 1993년경까지 사이에 피고인의 빌딩 신축자금 중 금 400,000,000원의 변제에 각 사용하고 그 나머지 금액을 1988년경부터 1993년경까지 사이에 생활비 등으로 사용함으로써 횡령한 혐의를 모두 인정하고 성적조작 등의 혐의와 합쳐 징역 3년과 집행유예 4년이 확정되었다.(서울중앙지방법원 94고합531[15], 서울고등법원 95노36, 대법원 99도457)
2002년에 대법원에서 전 이사장 상춘식에게 동인학원에 대한 서울특별시교육청의 이사진 승인 취소는 정당하다고 패소 판결을 내려 2001년에 파견했던 5차 관선이사(이사장박경양 참교육학부모 부회장) 3명의 자격이 회복되었다. 그리고 2012년 봄까지 교육청에서 이사를 파견해서 운영하였다. 1심 판결 뒤 법률신문, 2심 판결 뒤 법률신문(서울행정법원 2000구5868, 서울고등법원 2000누9467, 대법원 2001두2874) 덤으로 이 사건으로 인해 당시 교장이었던 상춘식은 상씨 종친회에서 제명까지 당했다(관련기사).
덕분에 특이하게 '공립보다 더 공립스러운' 사립학교가 되었다. 과거에 명문이었던 덕분에 동문회의 지원 등이 빵빵해서 사립 같은 공립 학교인 옆 학교(서울고등학교)와는 정 반대되는 상황인 듯. 사건 이후에는 목천 상씨 문중에서 운영하고 있고 학교법인 명칭도 동인학원에서 상문학원으로 환원하였다. 상춘식으로 대표되는 문제의 구 재단이 학교 운영에 복귀하려고 소송을 걸었으나 결국 패소하면서 구재단의 복귀는 차단되었다. #
2012년에 관선 이사진의 철수 및 상채규 이사장을 필두로 상기숙(한서대 중국학과 교수), 상원종(전 국회 사무총장 직무대리), 이한수(선인장학재단 이사), 윤기원(법무법인 원 대표변호사), 구희석(전 강동교육지원청 관리국장), 이자흠(상문고 교장)으로 구성된 정이사가 선임되면서 상문고등학교는 정상화 궤도에 오르게 되었고 상문고등학교 사태는 사실상 해피 엔딩으로 종결되었다. # 그리고 2016년 5월 25일을 끝으로 상채규 이사장의 임기가 종료되었고 상문학원 새 이사장에 상원종 전 국회 입법차장이 선임되어 정상화 2기 이사회를 꾸리게 되었다. # 사학분쟁조정위원회도 정상화 이후 상문고등학교는 상춘식 집안이 아닌, 상씨 문중이 설립한 학교가 맞다는 해석을 내려 완전히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되었다.
비슷한 사례로 부산에 위치한 브니엘학원 사태가 현재 진행형이고 이쪽도 몸싸움까지 발생할 정도로 격렬한 다툼이 있었지만[16] 이쪽은 구 재단이 퇴출된 이후 학교를 차지한 신 재단도 상당한 비리 재단이다 보니 나중에는 신재단의 횡포와 비리에 견디다 못한 이들이 오히려 과거에 부도사태를 불러온 비리재단인 구재단을 지지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일어나 버렸다. 하지만 상문고등학교가 서울에 있는 것에 비하면 브니엘학원은 저 멀리 부산에 있는 데다 아웃풋도 다소 부족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덜 조명받은 것. 그 외에도 유사 사례로 예원학교, 서울예술고등학교 구재단 복귀 시도 사례나 안양시 신성중학교, 신성고등학교 구재단 복귀 시도 사례도 있었으나 이쪽은 상문고등학교처럼 구재단이 소송에서 패소하면서(법원이 사학의 공공성을 우선시하여 판결하였다.) 구재단의 복귀가 차단되고 학교의 정상화가 이루어지면서 사실상 해피 엔딩으로 종결되었다.
이 사건은 2012년에 상문고등학교가 정상 궤도에 오르면서 잊혀질 줄 알았으나 2013년 고용노동부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게 법외노조 통보를 하면서 이유로 든 해직교사 9명 가운데 한 명이 이 사건으로 인해 해직된 것으로 드러나 다시 한 번 주목을 받았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법외노조 갈등과 소송 참조.
간략하게 이야기하자면 1994년 상문고 교장으로 있었면서 보충 수업비를 유용한 혐의가 드러난 상춘식의 부인 이우자(당시 재단 이사장)와 상춘식의 친누나 등 6명은 1999년 말 서울시교육청으로부터 상문고를 운영하는 동인학원의 새 이사진으로 선임 승인을 받자 교사들이 시 교육청에서 점거 농성을 벌이는 등 강하게 반발했는데 당시 점거 농성을 이유로 기소되어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받고 당연 퇴직된 것[17]이다. 이후 결과는 교사들의 강력한 반발로 서울시교육청이 이사진 선임 승인을 취소하고 관선이사를 파견했고 이에 이씨 등이 임원승인취소처분 취소 청구 소송을 냈으나 1심 선고에서 이사진들의 손을 들어주었고 '임시이사 직무집행 정지 가처분'도 받아들여졌고 2심, 3심도 마찬가지였다.
3. 참고 및 출처 자료
- 상문고 투쟁의 주역들을 만나다.<노동자 연대>,황재민ㆍ 차승일, 2001-04-01
- [제72호 쓴소리] 상문고등학교는 정상화되어야 합니다,<참여연대>,2000.08.31
- [분노] 상문고등학교를 말한다,<딴지일보>,상문고등학교 동문,2001.3.13
- 파행 6년동안 교육청은 뒷짐만 상문고사태…비리재단 방치, 문제 터지자 뒤늦게 허둥지둥,<주간 한국>,이동훈, 2001/03/21
- 영화같은 현실? 현실같은 영화!,<교육희망>,윤근혁,2005/04/17
- 상문고 교사들의 양심선언 "세상에 우째 이런 일이!",<직썰>,산하의 오역,2015-03-16
- [교육]사립학교 탐구 보고서 2 : 단군 이래 최대 사학비리, 상문고
4. 창작물에서
- 두사부일체 - 상춘고라는 이름으로 거의 동일한 사학비리를 다룸. 이사장 이름도 상춘만. 참고로 두사부일체의 주연 정준호는 비슷한 사학비리를 다룬 영화 공공의 적 2에서는 비리재단 명선재단의 이사장으로 나온다.
5. 기타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106회 학교의 봄 - 강남 S고 잔혹사 |
- 2023년 12월 14일자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 해당 사건을 다뤘다. 학교명 특정 방지를 위해서 방영분에서는 S고로만 언급했다. 또한 해당 회차에 이야기 친구로 출연한 정모는 실제로 상문고등학교 44회 졸업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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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치인 강위원도 광주서석고등학교 재학 시절 전국교직원노동조합 합법화를 외치던 고등학생 운동가였다. 이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역사 참고할 것.[2] 초대 이사장 상헌의 아들이다. 당시 초대 이사장인 상헌은 목천 상씨 문중에서 가장 어르신이라 그를 이사장으로 모신 것이라고. #[3] 당시 비리에 대한 이야기들 중 가장 유명한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학교 강당을 짓는다고 학생들에게 돈을 걷고 다음날 현재 상문고 옆에 있는 그 골프장이 올라갔다는 전설이 있다. 다른 하나는 대학 입학에 따라 촌지를 받았다고 한다. 서울대는 100만원부터 시작해서 연고대는 그보다 낮은 액수 등.[4] 상춘식 교장, 장방언 교감, 이우자 이사장 등이 모두 감옥에 다녀왔다.[5] 이로 인해 기말고사는 2000년 여름방학 이후로 미루어졌다.[6] 사실 상문고에서 서울지방법원과 검찰청이 위치한 서초동 법조단지까지는 거리가 한두 블럭 정도로 상당히 가까운 편이어서 걸어서도 10분대로 접근 가능하기에 이런 즉흥적인 제안이 자연스레 먹혀 들어간 것이다.[7] 흉기나 무기 같은 건 아니었고 누군가 들고 온 나무 의자였다고 한다.[8] 맨 앞의 삭발하는 학생은 당시 학생회장이었던 김영도(3학년)다.[9] 물론 법원/검찰청으로 진출할 때는 전교생들 중 몇몇 인원들이 이탈하여 인근 PC방으로 흩어지기도 했다는 다소 웃픈 이야기도 있다 .[10] 나름 비장한 분위기였지만 우습게도 바리깡 배터리 충전을 제대로 하지 않은 탓에 삭발 도중 바리깡이 작동을 멈춰 버려 일부 학생회 임원들은 삭발을 하다 만 머리로 시위를 할 수밖에 없어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는 후문이 있다.[11] 교사들끼리 재단 찬성파와 반대파로 나뉘어 각자 담임교사를 배정한 것이다. 그래서 2001년 3월 개학과 함께 각 반에 담임교사가 2명씩 와서 서로 실랑이를 벌여 학생들을 혼란에 빠뜨렸다.[12] 애초에 상춘식이 교장을 하던 시절에 교감을 하면서같이 감방에 다녀올 정도로 부역자 역할이나 하던 사람이라 악질적으로 도장을 안찍어주거나 할 수도 있었으나 의외로 진상부리지 않고 처리해줬다.[13] 아이러니하게도 상춘식의 오른팔과 앞잡이 같았던 교사들 중 일부가 상대위 소속이었다.[14] 아직도 명단이 인터넷 어딘가에서 돌아다닌다. 은퇴하지 않은 경우 나이가 좀 있는 교사라면 명단에서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15] 징역 4년이 선고되었다.[16] 2011년에는 구 재단 복귀에 반대하는 이들이 부산시에서 차량으로 출발하여 먼 거리를 달려와서 서울시에 위치한 광화문 정부 청사 앞으로 진격한 적도 있었다.[17] 국가 공무원은 자격정지 이상의 형을 선고받으면 당연퇴직, 즉 파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