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5 13:55:15

사마정

진서(晉書)
{{{#!wiki style="margin: -0px -10px; margin-top: 0.3px; margin-bottom: -6px; color: #ece5b6"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제기(帝紀)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181818,#e5e5e5
1권 「선제기(宣帝紀)」 2권 「경제문제기(景帝文帝紀)」 3권 「무제기(武帝紀)」
사마의 사마사 · 사마소(昭) 사마염
4권 「혜제기(惠帝紀)」 5권 「회제민제기(懷帝愍帝紀)」 6권 「원제명제기(元帝明帝紀)」
사마충(衷) 사마치 · 사마업 사마예 · 사마소(紹)
7권 「성제강제기(成帝康帝紀)」 8권 「목제애재폐제기(穆帝哀帝廢帝紀)」
사마연(衍) · 사마악 사마담 · 사마비 · 사마혁
9권 「간문제효무제기(簡文帝孝武帝紀)」 10권 「안제공제기(安帝恭帝紀)」
사마욱 · 사마요 사마덕종 · 사마덕문
※ 11권 ~ 30권은 志에 해당. 진서 문서 참고
}}}}}}}}}}}}
[ 열전(列傳) ]
||<-6><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 31·32권 「후비전(后妃傳)」 ||
[ 재기(戴記) ]
||<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width=33%> 101권 「유원해재기(劉元海戴記)」 ||<-2><width=34%> 102권 「유총재기(劉聰戴記)」 ||<width=33%> 103권 「유요재기(劉曜戴記)」 ||
유원해 ,유화 · 유선, 유총 ,유찬 · 진원달, 유요
104 · 105권 「석륵재기(石勒戴記)」 106 · 107권 「석계룡재기(石季龍戴記)」
석륵 ,석홍 · 장빈, 석계룡 ,석세 · 석준 · 석감 · 염민,
108권 「모용외재기(慕容廆戴記)」 109권 「모용황재기(慕容皝戴記)」
모용외 ,배억 · 고첨, 모용황 ,모용한 · 양유,
110권 「모용준재기(慕容儁戴記)」 111권 「모용위재기(慕容暐戴記)」
모용준 ,한항 · 이산 · 이적, 모용위 ,모용각 · 양무 · 황보진,
112권 「부홍등재기(苻洪等戴記)」 113 · 114권 「부견재기(苻堅戴記)」 115권 「부비등재기(苻丕等戴記)」
부홍 · 부건 · 부생 ,왕타, 부견 ,왕맹 · 부융 · 부랑, 부비 · 부등 ,삭반 · 서숭,
116권 「요익중등재기(姚弋仲等戴記)」 117 · 118권 「요흥재기(姚興戴記)」 119권 「요홍재기(姚泓戴記)」
요익중 · 요양 · 요장 요흥 ,윤위, 요홍
120권 「이특등재기(李特等戴記)」 121권 「이웅등재기(李雄等戴記)」
이특 · 이류 · 이상 이웅 · 이반 · 이기 · 이수 · 이세
122권 「여광등재기(呂光等戴記)」
여광 · 여찬 · 여륭
123권 「모용수재기(慕容垂戴記)」 124권 「모용보등재기(慕容宝等戴記)」
모용수 모용보 · 모용성 · 모용희 · 모용운
125권 「걸복국인등재기(乞伏國仁等戴記)」
걸복국인 · 걸복건귀 · 걸복치반 · 풍발 ,풍소불,
126권 「독발오고등재기(禿髪烏孤等戴記)」
독발오고 · 독발리록고 · 독발녹단
127권 「모용덕재기(慕容徳戴記)」 128권 「모용초재기(慕容超戴記)」
모용덕 모용초 ,모용종 · 봉부,
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 혁련발발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800080><tablebgcolor=#800080> ||
}}} ||

''''''
<colbgcolor=#fff,#1f2023>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경조부군[추존][2]사마랑창무정후하간평왕[3]의양왕
장무왕
의양성왕[4]하간평왕[5]
동평왕
고조 선황제[추존]세종 경황제[추존]제헌왕[8]동래왕[9]
북해왕[10]
제무민왕
태조 문황제[추존]세조 무황제(초)비릉도왕[12]
효혜황제(2)민회태자
진헌왕진왕[13]
효민황제(4)[14][15]
성양회왕
성양상왕
초은왕
동해충왕
시평애왕
회남충장왕진왕[16]
한왕
신도회왕
청하강왕[17]
장사려왕
성도왕화용왕[18]
오효왕효민황제[19]
발해상왕[20]
예장왕효회황제(3)[21]
대애왕
제헌왕[22]
성양애왕청하강왕[23]
요동도혜왕동래왕[24]화용왕[25]
광한상왕북해왕[26]
낙안평왕
연왕 기[27]
사마영조
낙평왕
여남문성왕[28]사마수
여남회왕
낭야무왕낭야공왕중종 원황제(5)[29]
무릉장왕
동안왕
회릉원왕
연왕 경연왕 기[30]
부풍무왕순양왕
신야장왕
평원왕
양효왕
조왕[31]
안평헌왕안평정왕남궁현왕[32]
안평왕 돈[33]
의양성왕[34]
태원성왕하비왕[35]
사마익남궁현왕안평왕 우[36]
하비헌왕하비왕
태원열왕하간왕
상산왕안평왕 돈안평왕 우[37]
패순왕
동무대후팽성목왕팽성원왕
고밀문헌왕동해효헌왕
신채무애왕
고밀효왕
남양왕진원왕 보[38]
범양왕
사마순제남왕중산왕
사마진초강왕초정왕초왕
초민왕
단수현후안평정후[39]
안성정후임성왕 릉임성왕 제
서하무왕
안평정후 안평정후[40][41]
경조부군 이전[추존][43]
정서부군 - 예장부군 - 영천부군
※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황제는 추존황제를 포함해서 자황색()으로 굵게 쓰고 팔왕은 빨갛게 쓴다. 그리고 8왕의 난에 관련된 종실은 갈색으로 쓴다.
※ 출계(出系)는 취소선을 치고 계자(系子)는 밑줄을 친다.
각주 [ 펼치기 · 접기 ]

[추존] [2] 황제로서의 뚜렷한 존호를 헌상받지 못했으나 다른 추존 황제와 동격배향(同格配享).[3] 친부는 의양성왕[4] 친부는 안평헌왕[5] 숙부(실제로는 종숙) 창무정후에게 출계(出系)[추존] [추존] [8] 친부는 진문제[9] 종숙(실제로는 숙부) 요동도혜왕에게 출계[10] 종숙(실제로는 숙부) 광한상왕에게 출계[추존] [12] 적장자나 두 살에 요절하여 혜제가 사실상 장남이 되었다. 항목이 존재하고 추봉(追封)되었기에 기재[13] 친부는 회남충장왕[14] 여기까지 서진[15] 친부는 오효왕[16] 백부 진헌왕에게 출계[17] 숙부 성양애왕에게 출계[18] 친부는 사마유(동래왕)[19] 백부 진헌왕에게 출계[20] 적장자였던 비릉도왕처럼 한 살에 요절했으나 추봉(追封)되었기에 기재한다.[21] 직접 난을 일으킨 적은 없는 여남문성왕 대신 팔왕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22] 백부 진세종에게 출계.[23] 친부는 진무제[24] 친부는 제헌왕[25] 백부 성도왕에게 출계[26] 친부는 제헌왕[27] 숙부 연왕 경에게 출계[28] 난을 일으킨 적은 없기에 팔왕에서 빼고 대신 효회황제를 넣는 시각도 있다.[29] 여기부터 동진[30] 친부는 진문제[31] 윤통(閏統)[32] 숙부 사마익에게 출계[33] 숙부 사마형에게 출계[34] 백부 사마랑에게 출계[35] 숙부 하비헌왕에게 출계[36] 숙부 안평왕에게 출계[37] 친부는 남궁현왕[38] 진안이 장사만 황제의 예로 올리고 시호는 왕으로 하였다.[39] 종조부 사마민에게 출계했다지만 이러면 소목에 어긋나 항렬이 꼬임[40] 종실에서 팔왕의 난에 아니 가담하고 난이 끝나가는 직전까지 살았다.[41] 친부는 단수현후. 다만 종조부에게 출계하면 항렬이 꼬여서 친부가 법적으로 종형이 되는데 이 문제는 어찌 된 건지 몰?루[추존] [43] 아니 추존되었으나 칠묘에 동격배향(同格配享).
}}}}}}}}} ||

司馬整

생몰년도 미상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서진의 인물. 자는 공수(孔修). 사마망의 삼남. 사례 하내군 온현 사람.

2. 생애

위나라에서 낭중, 중랑, 의랑, 간의대부, 기도위, 급사중, 치서시어사를 지냈으며, 265년에 남향군태수 겸 선위장군이 되었다. 둘째 형인 사마홍은 하간왕이 되어 봉지가 따로 있었으며, 맏형 사마혁이 사망하자 조정에서 알자를 남향군으로 보내 의양왕 세자로 책봉하자 사마정은 사양하고 조카 사마기에게 상속권을 넘겼다.

267년에 남중랑장, 남양군태수에 임명되고 청천후에 봉해졌으며, 사마망보다 먼저 사망해 관군장군으로 추증되었고 사마염이 의양군의 수현을 나누어 사마정을 왕으로 봉하고 시호를 목(穆)이라 했다.

그의 아들인 사마매가 작위를 계승했다.

사망 시기가 명확하진 않지만 267년 또는 268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이며, 진서에서는 세자가 되었다가 일찍 죽은 걸로 나오지만, 268년에 남향 사람들이 남향태수비를 세우면서 사마정의 이력이 밝혀졌고 세자에 임명되었지만 양보했다는 것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