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5 17:35:54

빌헬미나 여왕

빌헬미나(네덜란드)에서 넘어옴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8b1646, #a41b54 20%, #a41b54 80%, #8b1646); color: #fff;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rowcolor=#fff> 오라녀나사우 왕조
<rowcolor=#fff>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빌럼 1세 빌럼 2세 빌럼 3세 빌헬미나
<rowcolor=#fff> 제5대 제6대 제7대
율리아나 베아트릭스 빌럼알렉산더르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2004년 네덜란드 가톨릭방송 KRO가 네덜란드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네덜란드인 100명'을 선정
TOP 10
1위 2위 3위 4위 5위
핌 포르튀인 빌럼 1세 판 오라녀 빌럼 드레이스 안토니 판 레이우엔훅 에라스뮈스
6위 7위 8위 9위 10위
요한 크루이프 미힐 더라위터르 안네 프랑크 렘브란트 하르먼손 판 레인 빈센트 반 고흐
11위~100위
11위12위13위14위15위
알레타 제이콥 크리스티안 하위헌스 안니 M.G. 슈미트 율리아나 여왕 요한 루돌프 토르베
16위17위18위19위20위
알리다 보스하르 안톤 필립스 프레디 하이네켄 하니 스하프 빌헬미나 여왕
21위22위23위24위25위
바뤼흐 스피노자 툰 헤르만 클라우스 폰 암스베르크 요한 판 올덴바르네펠트 마르코 반 바스텐
26위27위28위29위30위
피트 피에테르손 헤인 요프 덴 아윌 얀 리흐워터 파니 블랑커스쿤 Van Kooten en De Bie
31위32위33위34위35위
후고 그로티우스 요한 드 위트 안토니 포커 에뒤아르트 데커르 리페비스터펠트의 베른하르트 공자
36위37위38위39위40위
빔 코크 마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스허르 마르코 보르사토 에릭 하젤로프 로엘프제마 티에스토
41위42위43위44위45위
베아트릭스 여왕 티투스 브랜즈마 코르넬리스 렐리 한스 테이우언 조셉 륀
46위47위48위49위50위
레온티엔 반 무어셀 빌럼 요한 콜프 홋프리트 보만스 헨드릭 A. 로런츠 아벌 타스만
51위52위53위54위55위
요프 반 덴 엔데 안드레 판 다윈 유스트 반 덴 본델 리누스 미헬스 미스 보우만
56위57위58위59위60위
빌럼 바렌츠 페르디난드 도멜라 뉴엔하이스 뤼트 뤼버르스 얀 틴베르헌 빔 소네벨트
61위62위63위64위65위
조크 스미트 프리츠 볼케스테인 히에로니무스 보스 조니 크라이캄프 마르하 클롬
66위67위68위69위70위
요하네스 베르메르 딕 브루너 알베르트 프레스만 요프 주테멜크 헬라 하세
71위72위73위74위75위
토마스 아 켐피스 윌리엄 3세 케누 시몬스도흐터 하셀라에르 요하네스 디데릭 판데르 발스 부보 오켈스
76위77위78위79위80위
안나 마리아 반 슈 헤르만 부르하버 루드 굴리트 모니크 판더 프레이크 드 존지
81위82위83위84위85위
안톤 피에크 바우더베인 드 그루트 윌렘 프레데릭 헤르만 피터르 옐러스 트룰스트라 알베르트 헤인
86위87위88위89위90위
폴 드 리우 자크 P 티세 얀 볼커르스 피트 몬드리안 시몬 스테빈
91위92위93위94위95위
하윌라우머 흐룬 판 프린스테러르 륏허르 하우어르 하리 뮐리스 아브라함 카이퍼 마르턴 트롬프
96위97위98위99위100위
빔 칸 폴 버호벤 이자벨 드 샤리에르 람세스 샤피 아베 렌스트라
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

<colbgcolor=#a41b54><colcolor=#fff>
네덜란드 제4대 국왕
빌헬미나
Wilhelmina
출생 1880년 8월 31일
네덜란드 헤이그 노르트아인더 궁전
사망 1962년 11월 28일 (향년 82세)
네덜란드 아펠도른 헤트 로 궁전
재위기간 네덜란드 여왕
1890년 11월 23일 ~ 1948년 9월 4일
서명 파일:빌헬미나 여왕 서명.svg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a41b54><colcolor=#fff> 가문 오라녀나사우 가문
이름 빌헬미나 헬레나 파울리너 마리아
(Wilhelmina Helena Pauline Maria)
아버지 빌럼 3세
어머니 발데크피르몬트의 에마
배우자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하인리히
(1901년 결혼 / 1934년 사망)
자녀 율리아나 여왕
종교 개신교 (네덜란드 개혁교회) }}}}}}}}}

1. 개요2. 작위3. 출생에 얽힌 사연4. 재위기간5. 양위와 사망6. 평가7. 가족관계
7.1. 조상7.2. 자녀
8. 여담

[clearfix]

1. 개요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Queen_of_Holland_2.jpg
파일:Jacob_Merkelbach,_Afb_010164033120 .jpg
소년기 노년기
네덜란드의 제4대 국왕.

즉위 이래 58년 가까이 재위해 네덜란드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집권한 군주이다. 前 네덜란드 율리아나 국왕의 어머니이자 前 네덜란드 국왕 베아트릭스의 외할머니로, 제1차 세계 대전제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네덜란드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2차 대전 때는 독일 국방군에 쫓겨 영국 런던[1]으로 망명했지만 그곳에서 망명정부를 이끌며 나치 독일에 대한 싸움을 그치지 않아 저항의 어머니, 네덜란드의 국모로 존경받았다. 현재도 네덜란드인들에게 최고의 국왕을 꼽으라고 할 때 열에 아홉은 빌헬미나 여왕이라고 답한다.

2. 작위

3. 출생에 얽힌 사연

네덜란드 국왕 빌럼 3세와 그의 후처 발데크피르몬트의 에마 사이에서 외동딸로 출생했다. 영유아기에 사용한 이름은 왕위 계승을 고려하지 않았기에 빌헬미나가 아니라 파울리네였다. 출생 당시 계승서열은 3위로 준살리카법에 의해 이복오빠 알렉산더와 숙부 프레데릭 다음이었다.

출생 전부터 시끄럽게 시작했는데, 에마는 빌럼 3세보다 41세나 연하에다 빌럼 3세가 워낙 바람둥이라 결혼 당시에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았다. 결혼 생활 내내 치고 받았던 전처 뷔르템베르크의 조피[2]가 끼고 살던 막내를 마땅찮게 보던 빌럼은 후계자가 더 필요하다는 이유로 재혼을 선언, 원래는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의 엘리자베트와 덴마크의 티라[3]에게 청혼했으나 퇴짜 맞았다.

그리고 나서 에마의 언니인 발데크피르몬트의 파울리네에게도 청혼했지만 이 역시 퇴짜를 맞았다. 전 왕비를 살인미수 급으로 패던 가정폭력 때문에 아내가 병을 얻어 죽었다는 얘기나 상상을 초월한 여자관계와 추문[4], 성격 더럽기론 타의 추종을 불허, 무엇보다 다 늙은 주제에 자식 핑계로 한참 어린 여자들만 구하고 다니니 당연한 결과. 그러다 마침내 에마에게까지 청혼했던 것.

물정 모르는 순진한 처녀였던지 망나니 왕을 구제해보겠다는 의무감이었던지 몰라도, 에마가 유럽에 소문이 자자한 노인의 악명을 듣고도 결혼한 것은 세간을 놀라게 했다. 그래도 결혼한 뒤에는 그녀의 내조 덕인지 늙어서 성질이 죽은 것인지, 빌럼은 성격도 나름 온화해지고 바람기가 완전히 사라져 부부 금슬도 매우 좋았다. 전처를 죽어라 두들기고 아들들을 학대하던 악당 노인네의 변화는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하는데, 여담으로 빌럼 3세는 전처가 낳은 두 아들과 사이가 최악이라서 에마는 부자 사이를 화해시키려고 노력했지만 안타깝게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아들들이 하도 당해서 애비 얼굴도 안 보려할 정도에 자식에게 하던 왕의 고약한 성질머리가 어디 안 가서..

이후 임신한 에마가 아들이 아니라 딸 빌헬미나를 낳자 사람들은 아들 타령을 하던 몹쓸 영감탱이가 분명 성질 부릴 거라고 예상했으나 빌럼은 이 늦둥이 딸을 예뻐하여 전처의 자식들과 달리 편애하면서 또 주변을 놀라게 한다.

전처 뷔르템베르크의 조피가 낳은 빌럼, 마우리츠, 알렉산더르 세 아들은 삼남 알렉산더르를 빼고는 요절했다. 장남은 부왕과 심한 불화를 겪다가 주색잡기로 건강을 해쳤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알렉산더르는 티푸스로 파울리네(빌헬미나)가 4세 때 세상을 떠났다. 이처럼 이복 오빠들이 후사 없이 잇따라 죽었기 때문에, 빌럼 3세의 자녀로서 유일하게 생존한 그녀가 잠정적 왕위계승자가 되었다.[5] 여담으로 여왕은 부왕의 사랑만 받고 커서 그런지 본 적도 없고 자기를 예뻐하지도 않은 오빠들에 대한 환상이 컸다고 한다. 오빠들을 그렇게 만든 게 그 아버지라는 것을 생각하면...

1884년 막내오빠인 오라녀 공 알렉산더르가 요절하자 네덜란드의 왕위계승권자가 거의 남지 않게 되었다. 이때 네덜란드는 빌헬미나의 왕위 계승을 위해 살리카법을 폐지했고, 여왕 즉위시 왕호를 고려하여 파울리네에서 빌헬미나로 이름[6]을 바꿨다. 동군연합이었던 룩셈부르크의 대공위는 원래 나사우 공작가인 나사우바일부르크 가문아돌프에게 넘어갔다.[7] 그러나 룩셈부르크도 아돌프의 아들 기욤 4세에 이르러 남성 계승자가 단절되면서[8], 2대 만에 살리카 법을 폐지하고 기욤 4세의 장녀 마리아델라이드를 최초의 여대공으로 즉위시켰다. 이후 기욤 4세의 차녀 샤를로트가 즉위하면서 룩셈부르크의 대공위는 보르보네파르마 가문[9]으로 넘어갔으나, 1980년대 귀천상혼 논쟁으로 보르보네파르마 가문과 절연하여 다시 나사우바일부르크 가문이 되었다.[10]

4. 재위기간

4.1. 어린 여왕

1890년 11월 23일, 41년간 재위한 부왕이 73세를 일기로 사망하자 10살의 나이로 여왕이 되었으나, 나이가 어렸던 탓에 어머니 에마 왕대비가 8년간 섭정을 하였다. 권위주의적이었던 남편과는 달리 의회와 헌법을 존중한 에마 왕대비의 섭정 기간은 여왕이 훗날 입헌군주제를 확립하게 되는 기반으로 자리매김했다. 즉위 초인 1895년 영국을 방문해 빅토리아 여왕을 만났는데, 60년 이상 산전수전을 다 겪은 할머니 여왕은 이제 갓 즉위한 소녀 여왕을 '우아하고 지적이며 귀여운 소녀'라 평하는 일기를 남겼다. 1898년 9월 6일, 여왕이 대관식을 거행하고 성인이 되자 에마 왕대비는 섭정을 거두고 물러났다.

4.2. 결혼

파일:Queen Wilhelmina Wedding.jpg
빌헬미나와 하인리히의 결혼식 사진.

빌헬미나 여왕이 성년이 되면서 왕가는 여왕의 남편 찾기에 나섰다. 네덜란드 의회는 여왕의 부군으로서 너무 한미한 가문 출신도 아니고, 그렇다고 너무 대가문의 후계자도 아닌 조건으로 적당한 배필을 찾길 원했다. 왜냐하면 너무 한미한 가문 출신은 네덜란드 여왕의 부군이라는 지위에 어울리지 않았고, 너무 대가문 출신이면 여왕의 부군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네덜란드의 내정에 간섭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조건에 적합하다고 여겨진 사람이 바로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 프리드리히 프란츠 2세의 막내아들 하인리히였다. 빌헬미나와 하인리히 둘 다 러시아 황제 파벨 1세의 후손들로 7촌 사이다. 빌헬미나 여왕은 파벨의 6녀 안나 파블로브나 여대공의 손녀, 하인리히는 파벨의 차녀 옐레나 파블로브나 여대공의 증손자.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가독일 제국의 오래된 왕가 중 하나였으며 하인리히의 이복 형인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 프리드리히 프란츠 3세러시아 제국아나스타샤 미하일로브나 여대공과 결혼했다. 이 프리드리히 프란츠 3세의 장녀인 알렉산드리네크리스티안 10세와 혼인해 덴마크의 왕비가 되었고, 차녀인 체칠리에빌헬름 2세의 장남 빌헬름 황태자와 결혼해 독일 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비가 되었다. 여담으로 이 집안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하인리히의 이복 누나인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마리 여공작으로, 알렉산드르 2세의 3남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과 결혼하여 러시아식으로 개명한 마리야 파블로브나 대공비다. '미헨 대공비'로 더 잘 알려진 마리야 파블로브나는 손위동서 마리야 표도로브나 황후와 함께 러시아 사교계를 이끌어가던 인물로 언제나 야심만만하다는 평가를 들었다고. 마리 외에도 하인리히의 누나들 중 하나인 엘리자베트 알렉산드리네는 올덴부르크 대공국의 대공비로 니콜라우스 폰 올덴부르크의 어머니다.

게다가 하인리히는 막내아들이라 가문의 영지를 상속받을 가능성도 거의 없었다. 아들 많은 가문의 막내 아들이면 가문의 영지를 상속받을 가능성이 거의 없었기에 직업을 가지고 스스로 살 길을 개척해야 해서 많은 이들이 성직자군인의 길을 갔다. 실제로 하인리히도 다른 이들처럼 직업 군인으로 평범하게 살아갈 예정이었다. 그야말로 딱 적당한 신랑감이었던 셈.

1901년 2월 7일, 두 사람은 결혼했다. 하인리히가 독일 출신이기 때문에 네덜란드의 왕위가 독일로 넘어갈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어서 하인리히는 결혼하고 나서 독일 내의 메클렌부르크슈베린 공국에서의 그의 권리를 네덜란드로 귀속시켰으며 이름도 네덜란드식인 '헨드리크(Hendrik)'로 개명했다.

하지만 이렇게 결혼했음에도 두 사람의 금슬은 썩 좋지 않았는데, 헨드리크 공은 마음 좋고 농담을 즐기는 사람이었던 반면 빌헬미나 여왕은 언제나 의무만을 강조하는 삶을 살았다. 빌헬미나 여왕의 의무에 대한 과도한 강조는 헨드리크 공을 받아들일만한 여유를 가지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헨드리크 공도 초창기엔 많이 의욕적이었지만, 여왕이 거의 무산시켜 버렸다. 심지어 심한 경우에는 '당신이 나설 일이 아니다'라며 면박까지 줬다고. 또다른 문제는 수익에 대한 문제였는데, 헨드리크 공은 고국에서의 수익이 끊어지게 되면서 언제나 돈이 부족했고 여왕은 남편의 빚에 대해서 매우 언짢게 생각했다.

게다가 후계자 문제까지 겹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욱 나빠졌다. 여왕은 두 번의 유산 끝에[11] 1902년 사산된 아들을 낳았다. 때문에 여왕의 후계자 문제는 네덜란드 사회에서도 걱정거리였다. 이 무렵 왕위 추정상속인은 빌헬미나의 고종사촌의 아들인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 빌헬름 에른스트였고, 다음은 그의 고모인 마리 알렉산드리네 대공녀였다. 전자는 네덜란드 왕위 계승권을 포기할 것이 예상되었고 후자는 여왕이 되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아 큰 문제는 아니었지만, 그 아들인 로이스-쾨스트리츠의 하인리히 32세는 독일 군부와 관계가 깊은 인물이었다. 따라서 여왕이 후계자가 없이 사망한다면 네덜란드가 독일 제국의 영향권에 들어갈지 모른다는 우려가 많았다. 좋지 않은 부부 사이에도 불구하고, 이런 이유로 여왕 부부는 많은 노력을 했지만 이후 수많은 유산을 한 끝에 결혼 8년 만인 1909년 4월 30일, 드디어 외동딸 율리아나가 태어났다. 율리아나가 태어난 후에도 두 차례 임신했지만 모두 유산했다. 이 때문인지 헨드리크 공은 외동딸 율리아나를 매우 끔찍이 아꼈다고.

이 외에도 두 사람의 결혼 생활 내내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가부장적인 질서가 여전히 유지되던 시절인 20세기 초에 아내의 신하로 산다는 것은 여전히 힘든 일이었고,[12] 헨드리크 공은 이런 문제를 다른 여성을 찾아다니면서 해소했다. 아내가 왕이라는 것에 스트레스가 심했는지 그가 건드린 여자는 대부분 하위 계층 여성이었다는 듯. 특히 Mien Abbo Wenneker이라는 여성과 오랫동안 관계를 지속해서 여러 명의 사생아까지 낳았을 정도. 또 헨드리크공은 사냥과 바다로 나가는 것을 즐겼는데, 이런 경향은 나이가 들수록 국서로서의 의무를 소홀히 하게 했다. 멋진 요트를 마련해 여친들과 함께 바다에 나가는 일이 많아졌다고.

그나마 헨드리크 공은 나이가 들고 기력이 떨어지면서 종교에 의지하게 되고 다소 조신해지면서 아내와도 약간은 사이가 회복되는 기색을 보였다. 헨드리크 공은 나이가 들면서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었는데, 살이 찌기 시작했고 류머티즘도 생겨났다. 1929년에 첫 심장마비가 왔으며 1934년에 두 번째 심장마비가 왔다. 두 번째 심장마비가 온 지 며칠 후 사망했다.

여왕은 문란한 사생활에 빚까지 지고 의무에도 소홀했던 남편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가 죽은 후에야 좀 더 이해하게 되었다. 워낙 앨버트 공이 '여왕의 부군'으로서 매우 모범적인 케이스이다 보니 헨드리크 공에 대한 평은 매우 나쁘고 실제로도 그런 인물이었지만 당시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앨버트 공같은 케이스는 정말 희귀한 케이스였다.[13] 자신이 남편과 불화했던 것 때문에 여왕은 딸 율리아나의 결혼 상대에 무지하게 신경을 써서, 신랑감을 물색하던 이들을 노이로제에 걸리게 했다는 후문. 그러나 그렇게 고른 상대는 그 남편보다 더한 작자였으니.(...)

4.3. 제1차 세계 대전

20세기 초반의 유럽 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 전운이 감돌 때, 젊은 여왕은 독일 제국을 방문해 빌헬름 2세[14]를 만났다. 여왕을 작은 나라의 풋내기로 깔본 빌헬름 2세는 "내 병사들 키는 7피트인데 당신의 키는 그들의 어깨밖에 안 되는군."이라고 빈정대자 이 말을 들은 여왕은 "그 말이 맞네요. 근데 우리가 제방을 열면 10피트 깊이로 잠길 겁니다!"라고 미소지지으며 맞받아쳤다.[15]

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914년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네덜란드는 중립을 선언했지만, 협상국이 독일을 봉쇄할 때 이웃 나라인 네덜란드도 그 여파를 피하지 못하고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군사력을 키우기 위해 고심하고 독일의 침공을 경계하던 여왕은 전쟁 와중에 군주정을 폐지하자는 사회주의자들의 움직임과도 맞닥뜨리지만, 국가를 위해 불철주야로 노력하는 젊은 여왕에 대한 국민의 지지 덕분에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여파로 여왕은 금융자산의 약 20%를 잃기도 했다.

이후 1918년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에는 퇴위당한 빌헬름 2세의 망명을 받아주고 그를 인계하라는 협상국의 요구를 물리치는 대인배적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빌헬름 2세와 사이가 좋은 건 아닌지라 빌헬름 2세가 네덜란드 도른 하우스에 거주할 때 빌헬름 2세와 만난 적은 없으며, 1938년 빌헬름 2세의 차손인 루이스 페르디난트의 결혼식에도 딸인 율리아나를 보냈고 본인은 가지 않았다. 나치 독일의 등장 이후 호엔촐레른 가문은 나치 독일에 호의적이였으며 일부 왕자들은 나치 독일의 군사 조직에 가담하기도 했다.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1945년 5월 빌헬름 2세의 도른 하우스는 네덜란드 정부에서 몰수했고 호엔촐레른 가문은 도른 하우스에서 쫒겨난다. 1956년 도른 하우스는 박물관으로 재개장해서 오늘날에 이른다. 참고로 빌헬름 2세의 묘소도 도른 하우스에 있으며, 빌헬름 2세의 현손자이자 현 호엔촐레른 가문의 수장인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폰 프로이센이 2014년에 네덜란드 정부에게 도른 하우스의 소유권을 돌려달라고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4.4. 제2차 세계 대전

파일:external/lisawallerrogers.files.wordpress.com/queen-wilhelmina-broadcasting.jpg
2차대전 중 라디오 연설을 하고있는 빌헬미나 여왕. 전문 들어보기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약 20년이 지나고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1940년 5월 10일, 나치 독일이 국경을 넘어 침공해 오자 영국 국왕 조지 6세가 파견한 구축함 HMS 해러워드 호에 승선, 영국으로 망명했다. 네덜란드는 얼마 못가 나치 치하에 들어간다. 여왕은 런던에 망명정부를 세우고서[16] 21만 5천 파운드를 기부해 스핏파이어 43대를 구입하고, 심야 라디오 방송 라디오 오라녀(Radio Oranje)를 통해 아돌프 히틀러를 '인류의 공적'이라 비난하며 네덜란드 국민의 지속적인 저항을 촉구했다. 연설이 끝난 뒤 네덜란드의 국가인 Het Wilhelmus 2절이 흘러나왔다. 국가가 2절부터 제창되는 것은 대단히 이례적이지만 2절의 의미를 볼 땐 그만큼 긴박했다는 상황.[17] 여왕이 진행하는 라디오 방송을 나치 치하의 네덜란드인이 청취하는 것은 당연히 금지되었고 가정의 모든 라디오를 압수했지만, 몰래 다락방이나 마루밑에 숨겨둔 라디오를 통해 네덜란드인들은 은밀하게 라디오를 들으며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당시 몰래 라디오 오라녀를 청취하던 네덜란드 국민의 모습이 담긴 실제 영상

또한 전쟁 속에서도 국민들은 빌헬미나 여왕에게 상당히 의지했다고 볼 수 있는 점이, 독일이 네덜란드를 점령하고 온갓 매체들을 검열하여 탄압하는 독일에 저항하는 상징으로 V와 W 사인이 유행을 하였다. 뜻은 승리(Victory)와 빌헬미나 여왕(Wilhelmina). 즉, '빌헬미나 여왕님이 네덜란드를 승리로 이끌 것이다'라는 의미가 담긴 메시지였다. 이 V, W 사인은 네덜란드 곳곳에 낙서되기도 하며, 서로 손가락 수신호로 사용해 보이기도 하며 해방의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외에 OZO라는 사인도 통용됐는데 뜻은 'Oranje Zal Overwinnen', 즉 '오라녀가 이길 것이다' 라는 뜻이다.[18] 또한 빌헬미나 여왕의 초상화가 각인된 네덜란드 휠던 10센트짜리 동전을 가슴에 달고 다니기도 했다는 점을 보아 당시 네덜란드 국민들에겐 빌헬미나 여왕이 희망 그 자체, 더 나아가 네덜란드의 국모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저항의 표시를 독일군에게 들키면 즉시 수감되었고[19] 사형되는 일도 허다했다.

한편 여왕은 1942년 6월 24일부터 8월 11일까지 미국을 국빈 방문해 8월 5일에는 미국 국회의사당에서 연설했다. 영국 본토 항공전이 격화되는 동안 잇따른 공습으로 거의 죽을 뻔하기도 했지만 나치에 대한 여왕의 저항 정신은 꺾이지 않았다. 런던에 자리잡은 네덜란드 망명정부의 디르크 얀 더헤이르(Dirk Jan de Geer) 총리는 연합군이 승리하지 못할 거라며 독일과 협상하려 했기 때문에, 침략자와의 협상은 있을 수 없다며 강경론으로 일관한 여왕은 더헤이르와 마찰을 빚었다. 여왕은 더헤이르 총리에게 반대하던 법무장관 '피터르 슈르츠 헤르브란디(Pieter Sjoerds Gerbrandy)'를 통해 더헤이르를 굴복시켰다. 그 결과 더헤이르는 총리직에서 물러났고 헤르브란디가 후임 총리가 되었다.[20] 이렇듯 강인한 의지를 보여준 여왕에 대해 윈스턴 처칠 총리는 "런던에 있는 망명정부 인사들 중 유일한 진짜 대장부이다."[21]이라며 높게 평가했다.

마침내 1945년에 나치 독일이 패망하자 네덜란드로 복귀한 여왕은 전후 재건에 힘을 기울였지만, 환갑을 넘긴데다가 건강마저 좋지 않아 외동딸 율리아나 공주에게 양위하는 것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5. 양위와 사망

노년에 접어든 여왕은 율리아나 공주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지만 장녀 율리아나는 "어마마마께서 즉위 60주년까지는 채우셔야 합니다."라며 왕위를 고사했다. 그러나 건강이 점차 나빠지면서 병을 앓던 여왕은 식민지 인도네시아가 독립한 해이자 자신의 대관식을 거행한 지 50주년이 되는 해인 1948년 9월 4일, 57년 286일의 재위를 마무리하고 딸에게 양위했다.[22]

양위 후 별궁에서 지내던 여왕은 1962년 11월 28일,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델프트 신교회의 묘실에 안장되었다. 만일 그녀가 양위하지 않고 그대로 왕위를 지켰다면 재위기간은 모두 72년 5일이 되는데, 이는 유럽의 군주들 중 프랑스루이 14세 다음으로 긴 재위기간이자 역사상 군림한 여왕들 가운데서 가장 긴 재위 기간이 된다.[23]


장례식 영상.

6. 평가

재위기간 동안 네덜란드의 입헌군주제를 확립했으며 보통선거를 비롯한 여러 가지 사회 개혁을 위해 법률과 헌법을 개정했다. 그녀의 치세 때 사회가 안정되고 산업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해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

비록 여왕의 치세 이후부터는 왕실의 영향력이 예전만 못하게 되지만 율리아나에게 양위하고 별궁으로 물러난 후에도,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그녀가 보여준 불굴의 의지는 네덜란드의 정신적 지주로 부족함이 없었으며 그녀에 대한 국민의 사랑과 존경 또한 변하지 않았다. 1953년에 일어난 북해 대홍수 때는 일흔셋의 노구를 이끌고 피해지역을 방문하며 네덜란드 국민을 격려해 국가의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기도 했다.

7. 가족관계

7.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빌헬미나 여왕
(Wilhelmina)
<colbgcolor=#fff3e4,#331c00> 빌럼 3세
(Willam III)
<colbgcolor=#ffffe4,#323300> 빌럼 2세
(William II)
빌럼 1세
(William I)
프로이센의 빌헬미네 공주
(Princess Wilhelmina of Prussia)
러시아의 안나 파블로브나 여대공
(Grand Duchess Anna Pavlovna of Russia)
파벨 1세
(Paul I)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 여공작
(Duchess Sophia Dorothea of Württemberg)
발데크피르몬트의 공녀 에마
(Princess Emma of Waldeck and Pyrmont)
발테크피르몬트 공 게오르크 빅토어
(George Victor, Prince of Waldeck and Pyrmont)
발테크피르몬트 공 게오르크 2세
(George II, Prince of Waldeck and Pyrmont)
안할트베른부르크샤움부르크호임의 에마 공녀
(Princess Emma of Anhalt-Bernburg-Schaumburg-Hoym)
나사우의 헬레네 공녀
(Princess Helena of Nassau)
나사우 공작 빌헬름
(William, Duke of Nassau)
뷔르템베르크의 파울리네 공주[24]
(Princess Pauline of Württemberg)

7.2.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녀 율리아나 여왕
(Juliana)
1909년 4월 30일 2004년 3월 20일 리페비스터펠트의 베른하르트 공자
슬하 4녀[25]

8. 여담

  • 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 유치에 반대 의사를 내비쳤고, 개막식에도 불참했다. "고대 이교도들의 제사 의식이 네덜란드 한복판에서 재현되는 걸 보고 싶지 않다"는 게 이유.[26] 그러다 노르웨이를 다녀온 뒤 생각이 바뀌었는지 폐막식에는 참가했다.
  • 1949년 4월 23일 전쟁 배상을 이유로 독일 침공을 직접 지휘해 니더라인(Niederrhein)에 있는 엘텐(Elten) 지방을 1963년까지 네덜란드가 점령하였다. 당초 여왕은 동프리슬란트와 쾰른, 아헨을 잇는 상당히 넓은 지역을 차지하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독일 난민을 대규모화 하는 것을 막으려는 연합국최고사령부의 반대로 엘텐을 비롯한 몇 개의 마을만 얻었다.[27] 자세한 것은 오데르-나이세 선 문서 참고.
  • 문명 6에서 네덜란드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1] 대전 당시 런던네덜란드를 포함해 프랑스, 체코슬로바키아, 그리스, 폴란드 등 추축국으로 인해 점령당한 많은 국가들의 망명정부 본부였다.[2] 뷔르템베르크 국왕 빌헬름 1세의 딸이자 파벨 1세의 외손녀(파벨의 4녀 예카테리나의 차녀).[3] 크리스티안 9세의 막내 딸로 이후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2세와 결혼해 하노버의 왕세자비가 된다.[4] 심지어 아들의 여자랑도 얽혔다는 얘기가 있다![5] 당시 네덜란드는 빌럼 1세로부터 내려오는 남계 후손이 죄다 절손되버리는 마당에 살리카 법을 폐지하지 않으면 오라녀 왕가 자체가 단절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6] 풀네임은 빌헬미나 헬레나 파울리네 마리아였는데 이전까지는 빌헬미나가 아니라 미들네임인 파울리네로 불리웠다.[7] 네덜란드의 오라녀나사우 왕조나사우 가문의 차자 계열이고, 나사우 공작가였던 나사우-바일부르크 가문이 나사우 가문의 장자 계열이다.[8] 기욤 4세 슬하의 적자녀 모두가 딸이었고, 남계 후손이 있긴 했지만 귀천상혼이여서 계승권이 없었다.[9] 파르마 공국필리포 1세로부터 시작하는 스페인 보르본 왕조의 이탈리아계 방계 가문. 샤를로트 여대공의 남편이 파르마 공국의 마지막 공작이었던 로베르토 1세의 6남 보르보네파르마의 펠릭스 공자로, 샤를로트와 펠릭스의 맏아들 장 대공부터 아버지의 가문을 따르게 되었다.[10] 1995년 보르보네파르마 가문과 화해하였으나 가문 명칭은 나사부바일부르크 가문으로 계속 가는 것으로 정리되었다.[11] 여담으로 첫 번째 유산 때, 아이가 유산된 것은 헨드리크 공이 여왕에게 성병을 옮겨서라는 소문이 파다했다.[12] 지금도 그런 점에서 여왕의 남편은 prince가 아닌 king으로 해달라고 말하는 모 국가도 있다. 사실 왕비는 princess가 아닌 queen이 되는데 여왕의 남편도 king으로 해줘야 하는 것도 맞는 말이긴 하다. 실제로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등 국서에게도 king이란 호칭을 주는 나라들도 있(었)으나, 네덜란드는 아니었다.[13] 심지어 현대 '여왕의 부군'으로서 너무 나서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죽어있지도 않게 밸런스를 잘 조율하기로 유명한 필립 공조차 앨버트 공에 미치지 못했다.[14] 참고로 빌헬미나 여왕은 빌헬름 2세와 7촌 관계이다. 빌헬름 2세의 친할머니 아우구스타 황후가 빌헬미나 여왕의 아버지 빌럼 3세와 이종사촌이었다.[15] 7피트는 213cm로 2023년 기준 전 세계에서 고작 2,800명 가량만이 존재한다.# 그리고 저 시대에는 평균키가 더 작았고, 인구도 지금보다 적어서 당연히 더 없었다.[16] 런던이 독일 공군의 공습을 받고 있는 상황이라, 만일을 대비해 왕위계승자인 율리아나 공주캐나다로 피신시켰다. 실제로 여왕의 거처도 폭격을 받았고, 가까스로 위기를 벗어났다.[17] 더군다나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2절의 상황이나 언급된 '폭군'이 누군지 딱 매치가 되던 상황.[18] 여기서 '오라녀(oranje)'는 여왕을 의미하기도 하며 네덜란드 그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19] 대부분 덴 하흐의 스헤베닝언의 형무소로 수감되었다. 이 곳은 네덜란드인 수감자들 사이에서 '오라녀호텔'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20] 이후 더헤이르 전 총리는 네덜란드령 동인도로 발령받지만 명령을 거부하고 '독일 정부의 허가를 받아' 중립국인 포르투갈을 통해 네덜란드의 가족들 곁으로 다시 돌아갔으며 귀국 후에 독일에 협력하는 방법을 담은 지침서를 발간하는 등 충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전후에는 재판에 회부되어 모든 작위와 명예를 빼앗겼고 이에 즉각 항소를 했으나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받고는 굴복했다.[21] 영어 원문은 "the only man in the Dutch government". 망명정부 인사들 가운데 '사내(man)', 즉 소위 남자답다고 표현하는 용기나 강인함 등을 갖춘 사람이 빌헬미나 '여왕'밖에 없으니 나머지 인사들은 제대로 된 사내도 아니라고 돌려 까는 블랙 유머였다.[22] 양위하면서 메클렌부르크 여공작 호칭과 네덜란드의 공주(프린세스) 호칭을 사용했다. 태상황이라는 게 있는 동아시아에서 선왕에게 공작 호칭을 준다면 모독으로 취급받았지만 네덜란드가 있는 유럽은 동아시아와 예법이 달라서 상관없다. 다만 Princess는 Queen보다 격이 떨어지는 호칭인 것은 사실이다. 영국이었으면 Queen Mother(왕대비) 작위를 내렸을 가능성이 높다.[23] 현재로선 최장 기간 재위한 여성 군주는 엘리자베스 2세로, 70년 7개월 간 재위했다. 만약 빌헬미나가 양위하지 않았다면 엘리자베스 2세보다도 더 오래 재위했을 거라는 말이다.[24] 프리드리히 1세의 손녀이다.[25] 베아트릭스 여왕 등.[26] 올림픽은 원래 고대 그리스인들이 올림포스 신들에게 바치던 운동경기이긴 했다.[27] 아직 서독 정부가 세워지기 전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훗날 아데나워 정부는 네덜란드와의 협상을 통해 2억 8000만 마르크를 지불하고 1963년 5월 엘텐 지역을 다시 돌려받았다. 단 다위벨스베르흐(Duivelsberg) 란 작은 숲만 네덜란드의 소유로 그대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