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비자유 민주주의(非自由民主主義 / Illiberal democracy)는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가 시민의 헌법적 권리에 대한 제도적 제한으로 나타나는 정치 체제를 의미한다.[1] # 단순하게 비자유주의(Illiberalism)이라고도 한다.2. 설명
1997년 미국의 정치 저널리스트 파리드 자카리아가 포린어페어스[2]지에 투고한 기사에서 처음 제안되었으며, 이후 비교정치학의 개념으로 정착되어 활발한 학술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는 유고슬라비아 내전을 지켜보면서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로 당선된 정부"가 인종주의자나 파시스트, 분리주의자로 이루어져 있고 공개적으로 평화와 화합을 방해한다면, 과연 자유민주주의라 부를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하였다. 뒤이어 전 세계의 사례를 분석하면서 "비자유 민주주의라는 불편한 현상이 페루에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까지 또 시에라리온에서 슬로바키아까지 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자라나고 있다."고 평했다. #비자유민주주의는 간단하게 자유주의 없는 민주주의 정도로 정의할 수 있으나 실제로는 몇 가지 결함이 있는 자유민주주의부터 교도민주주의 같이 선거를 치를 뿐인 독재 체제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넓은 스펙트럼을 포함한다. 예컨대 민주적 절차에 의해 사회 구성원 다수가 동의하는 가치관의 효력이 발휘되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경우도 비자유 민주주의의 예시가 될 수 있고, 대중 선동과 언론 탄압으로 비판적인 목소리를 억압하더라도 일단 선거만큼은 민주적으로 치른다면 역시 비자유 민주주의로 분류할 수 있다.
유의어로 준민주주의(semidemocracy)가 있으나 엄밀하게는 다른 개념이다. 비자유민주주의는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가 치러지지만 시민의 권리가 억압되는 체제를 의미하고, 준민주주의는 자유롭지만 공정하지 않은 선거가 이루어지는 체제를 의미한다.[3] # 선거가 공정하지 못하지만 시민의 자유를 온전히 보장하는 체제는 자유 준민주주의(liberal semidemocracy) 혹은 허용적 준민주주의(permissive semidemocracy)라 불리고, 선거는 공정하지만 시민의 자유를 제한하는 체제가 비자유 민주주의이다.
같은 원리로 북한, 중국,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투르크메니스탄, 에리트리아, 적도 기니, 쿠바처럼 제대로 된 야당(관제야당 제외)이나 선거가 존재하지 않는 일당독재 국가들이나 사우디아라비아, 브루나이 같은 전제군주제 국가들은 애초에 선거를 통해 집권세력을 선출하는 것이 아니므로 비자유민주주의에 해당하지 않는다.
한편, 자유롭지 못하고 야당의 활동이나 언론의 독립적인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민주주의는 애초에 민주주의라고 볼 수 없다며 비자유 민주주의라는 명칭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 이와 관련하여 이탈리아의 정치학자 노르베르토 보비오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동전의 양면"이라 지적하며, 자유주의는 민주주의에 의해서 보장되고 민주주의는 자유주의에 의해서 보장된다고 평했다. 거꾸로 말하면 자유주의 없는 민주주의는 공산주의나 파시즘처럼 망하고, 민주주의 없는 자유주의는 폭주한다는 주장이다. 파리드 자카리아 역시 나폴레옹 3세 치하의 프랑스, 빌헬름 2세의 독일,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일본 등 세 가지의 역사적 사례를 들어 민주적이지만 평화를 존중하지 않고 시민의 자유에 대한 진지한 고려가 없는 국가는 언제든 폭주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3. 사례
- 비자유민주주의의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한 파리드 자카리아는 유고슬라비아 내전의 당사국들과 더불어 1997년 기준으로 페루,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시에라리온, 슬로바키아 등을 비자유민주주의의 예시로 꼽았다. 아시아-태평양 연안에서는 파푸아뉴기니와 필리핀을 예시로 꼽으며, 아시아 국가들이 전반적으로 민주보다 자유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평가했다. #
- 라틴 아메리카의 사례들을 조사한 피터 스미스(Peter Smith)의 2004년 연구에서는, 아르헨티나(1983, 1990-2001), 볼리비아(1983-2004), 도미니카 공화국(1979-1980, 1984-1999), 에콰도르(1991-1995, 2001-2004), 엘살바도르(1994-2004), 과테말라(1996-2004), 아이티(1990), 온두라스(1997-2004), 브라질(1988, 1990-2004), 칠레(1989), 콜롬비아(1978-2004), 멕시코(2000-2001), 니카라과(1990-2004), 파나마(1994-1999), 파라과이(1993-2004), 페루(1980-1991, 2001-2004), 베네수엘라(1989-1998) 등 대부분의 국가들이 비자유민주주의를 경험한 적이 있다고 결론지었다. #
- 강봉구는 2006년 러시아의 탈소비에트 과정을 연구한 논문에서 "푸틴 시대 러시아 민주화의 상태는 최소민주주의만 작동되고 있는 비자유민주주의이며, 옐친 시대의 민주적 무질서에서 민주적 질서로 이행하는 과정"이라고 평가했다. # 당시는 푸틴이 연임을 통해 두번째 대통령 임기를 수행하던 시절이라 푸틴의 독재가 지금처럼 강고하지 않았다.
- 대니얼 벨(Daniel A. Bell), 데이비드 브라운(David Brown), 카니쉬카 자야스리야(Kanishka Jayasuriya), 데이비드 존스(David M. Jones)의 공동 연구에서는 태평양 연안 지역의 비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을 분석하였다. 여기에는 권위주의의 잔재가 남아 있던 대만, 금권정치가 횡행하는 말레이시아, 리콴유 일가의 준독재가 지속되는 싱가포르 등이 예시로 꼽혔다. # 참고로 이 연구는 1990년대를 대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아직 민주화 도정에 있던 대만이 비자유민주주의의 예시로 거론되었다.
- 튀르키예의 에르도안 정권도 비자유민주주의의 '교과서적인 예시(textbook example)'로 꼽힌다. CNN CBC 에르도안은 분명 민주적인 선거로 당선된 대통령이고, 부정선거가 이루어진다는 명확한 물증도 없지만, 튀르키예를 점점 세속주의에서 멀어지고 시민의 자유를 제약하는 방향으로 바꾸어 가고 있다.
- 인도네시아 역시 민주적 집권 절차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에 만연한 부정부패와 소수민족 및 이방인에 대한 제도적 차별 등 시민의 자유를 제한하는 모습으로 인해 비자유민주주의의 사례로 꼽혔다. #
- 헝가리의 오르반 빅토르 총리는 비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한다고 직접 선언했다. # 굳이 본인의 선언이 아니더라도 상술한 바와 같이 튀르키예의 레제프 에르도안 정권이나 폴란드 법과 정의당 정권[4]과 함께 비자유민주주의의 대표적인 예시로 분류된다.
- 크시슈토프 브제흐친(Krzysztof Brzechczyn)은 코로나19 판데믹 대처 과정을 두고 '포스트공산주의(post-communist)'로 중국을, '자유주의적 귀족정(liberal autocracy)'의 예로 싱가포르와 마카오를, '비자유민주주의(illiberal democracy)'의 예로 대만과 대한민국을 각각 꼽았다.[5] 구체적으로 중점을 두어 설명한 대만의 사례를 보면 "감염자들을 핸드폰 사용 기록을 통해 전산적으로 감시하고, 사람들이 방역 수칙을 어기고 각자의 주거지에서 벗어나지 않는지 직접 확인"했던 것을 비자유민주주의라는 근거로 제시했다. #
3.1. 한국의 사례
대한민국을 대상으로는 아직 활발하게 논의되는 개념은 아니다. 구글 스콜라 '비자유민주주의' 검색 결과만 보더라도 한국 연구자들이 러시아나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타국의 사례를 연구한 논문은 많으나 한국 근현대사에 적용한 연구 결과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2014년 유종성이 쓴 한국 민주주의와 표현의 자유: ‘자유민주주의’의 위기에서 "보수세력은 냉전·분단체제의 역사적 경험으로 안보와 반공을 명분삼아 겉으로는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우면서도 권위주의를 정당화했으며, 진보세력은 언론개혁에 대한 비자유주의적 접근과 함께 명예훼손죄 남용, 인터넷 표현의 자유 제한, 선거운동 자유의 제한[6] 등을 지속·강화하며 자유민주주의를 경시 또는 배척하는 경향을 보였다"고 서술하며 관련 키워드로 비자유민주주의(illiberal democracy)를 제시하였다.
상기하였듯 크시슈토프 브제흐친(Krzysztof Brzechczyn)은 코로나19 판데믹 대처 과정을 두고 대한민국을 대만과 함께 '비자유 민주주의(illiberal democracy)'의 예로 분류하였다. # 방역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과도하게 희생한다는 관점으로, 과거 프랑스의 언론사에서도 비슷한 맥락의 기사가 나왔던 바 있다. 다만 대한민국의 종합적인 정치사회적 면모에 대한 평가라기보다는 코로나19 방역에 한정한 이야기이고, "민주주의 내에서는 자유민주주의보다 비자유 민주주의가 오히려 판데믹 대처에 더 유리한 점이 있다"는 문장도 함께 적시되었음을 유의.
Towards a Model of Illiberal Democracy에서도 대한민국 현대사를 두고 사례 분석을 하고 있으나 직접적으로 어떠한 결론을 내지는 않았다.
4. 관련 문서
- 교도민주주의
- 아시아적 가치
- 민족적 민주주의 - 5·16 군사정변 이후 서구권의 자유민주주의를 배척하기 위해 박정희가 내세운 정치 이데올로기. 한국식 민주주의라고도 불린다.
- 독재
- 반자유주의
- 트럼프주의
- 포퓰리즘
- 우르호 케코넨 - 1934년 쓴 팜플렛 '민주주의의 자기 방어'에서 비자유민주주의 성향을 드러냈다.[7]
- 독재화
[1] As described by Fareed Zakaria, “illiberal” democracy occurs when free and fair elections combine with systematic denial of constitutional rights.[2] 한국에는 김대중과 리콴유의 아시아적 가치 논쟁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3] Elections that were free but not fair—when only one candidate had a realistic prospect of winning, when any major candidate or party was effectively prevented from winning, or when elected leaders were obliged to share effective power with or cede it to nonelected groups—are considered to be “semidemocratic.”[4] 행정부가 노골적으로 사업부에 개입하며 삼권분립을 위배했지만 민주주의지수, 세계의 자유는 비자유민주주의 국가라고 하기엔 힘든 수준이다.[5] Singapore and Macau could be classified as illiberal autocracies, and Taiwan and South Korea – as illiberal democracies.[6] 한국 선관위는 선거운동기간을 정해두고 정치인의 정책발언, 시민운동단체의 활동, 언론의 보도 내용 하나하나에 전부 선관위가 유관해석을 내려서 규제하는 등 정치활동에 수많은 제약을 가하고 있다. 여론조사도 선관위가 공개전에 전부 사전심사를 한다.[7] 물론 이 글은 제목답게 방어적 민주주의 경향도 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