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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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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사료로서의 높은 가치3. 오해4. 족보 기록의 윤색5. 조상이 겹치는 사례들6. 인구 대다수의 본관 조작7. 현대의 족보 위조8. 북한에서9. 참고

1. 개요

족보()는 '한 가문의 계통과 혈통 관계를 적어 기록한 책' 또는 '한 가문의 계통과 혈통 관계'다.

족보를 '보첩(譜牒)'이라고도 한다. 한 가문의 계통과 혈연관계를 알기 쉽게 (대부분)부계 중심으로 정리한 도표 형식의 책으로, 가문의 단합과 조상에 대한 공경이라는 유교적인 가족관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그 시초는 중국으로, 제왕연표(帝王年表)라는 황족의 혈통 계보 책에서 비롯되었다. 개인이 족보를 가지게 된 것은 한나라현량과 제도를 통한 인재 선발에서 응시생의 가족 내력을 확인하는 데에서 시작되었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한반도에 족보가 처음으로 건너온 것은 1562년(명종 17)의 문화유보(文化柳譜)라 하나, 전하지는 않는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족보는 1472년(성종 7) 간행된 안동 권씨의 "성화보"(成化譜)이다. 굳이 조선 시대가 아니라 하더라도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의 문벌귀족들도 족보와 유사한 혈통 증명 체계를 가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안동 권씨 성화보의 제작 과정에서 권제-권람-서거정으로 이어지는 기나긴 자료 수집 및 제작 기간이 소요되었고, 그 서문에서 '우리나라는 이전에는 종법도 보첩도 없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 이전의 혈통 기록 방식과는 분명히 구분되는 새로운 시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혈통과 가문에 대해 연구, 분석하는 학문을 보학(譜學)이라 한다. 순종 황제가 보학에 능통했다고 한다.

한국에서 성씨는 삼국시대부터 왕족/귀족층에서 사용하기 시작했지만[1] 전국 각 본관의 지방 세력가 이하 수준까지 일반적으로 보편화된 것은 고려시대에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각 지역 호족세력이나 건국 과정에서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성씨와 본관을 하사하면서부터다. 그리고 이들의 가문 계통 기록이 족보의 원형이 된다.

현대 한국에 들어서는 각 문중의 종친회나 화수회(花樹會)에서 계속 족보를 다듬고 있다. 출판사 중에서는 대전광역시에 있는 회상사라는 곳에서 현행 족보의 9할 가량을 전문적으로 만들어서 제작하고 있다. 여러 종중이나 정치가들의 선물도 많이 받아서 꽤 유명한 곳이다.[2] 2010년에 족보 5-6천권을 분실했다.@

가계도는 족보를 현대적으로 도식화 해서 나타낸 것이다.

족보의 변천사를 보면 당시 시대상의 변화도 알 수 있는데, 예를들어 조선 초기에는 아들과 딸이 모두 족보에 기재가 되고 순서도 출생일 순으로 적혔던 것을 볼 수 있으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딸은 거의 기재가 되지 않는다거나 기재가 되는 경우도 출생일 순이 아니라 아들이 앞에 오고 딸이 뒤에 기재되는 형태로 바뀌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에는 종친회 사이트에서 인터넷 족보를 제공하여 편하게 족보를 열람할 수 있다. 그런데 족보는 등초본과는 달리 법적 효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잘못된 내용이 올라가 있어도 본인이 정정하지 않는 이상 바로잡히지 않는다. 특히 현대인들은 족보 자체에 관심을 가지는 이들도 적어, 족보에 잘못된 내용이 올라가 있어도 이를 바로잡지 않거나 잘못된 내용이 올라가 있는 줄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현대 인물에 대해 논문을 쓰거나 위키 문서를 작성하면서 족보의 내용을 자료로 삼을 때는 반드시 언론 기사나 해당 인물 본인의 증언에 비추어 교차검증을 할 필요가 있다.

2. 사료로서의 높은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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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는 사료로서의 가치를 갖고 있다. 미국 하버드 대학교에서 35년 넘게 한국학을 개척, 발전시킨 에드워드 와그너 박사(1924~2001)는 한국학을 연구하면서 족보에 대한 연구를 혁신시킨 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와그너는 족보에 나타난 문과 급제자를 통해 유력 문중에 관한 연구를 통해 각 유력 문중들이 어떻게 해서 유력자 집안이 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이 족보에 충실히 담겨져 있다는것을 알아내었다.

유득공은 《발해고》를 편찬하면서 족보인 《만성통고》와 《영순태씨족보(永順太氏族譜)》를 참고 자료로 삼았고, 이병도와 더불어 한국사 학계의 1세대 대표 학자로 꼽히는 이기백 교수는 생전에 신라 말기의 사병(私兵) 문제를 연구한 「신라사병고(新羅私兵考)」를 발표하면서 흥양 이씨 족보를 역사적 자료로 활용했고[3] 진주 소씨 족보를 통해 상대등 알천(閼川)을 새롭게 인식했다며 족보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 바 있다. 진주 소씨는 신라의 상대등 알천의 후손을 칭하는 집안으로, 이기백에 따르면 1979년에 진주 소씨 서울 종친회에서 사람이 찾아와 종친회보(宗親會報)에 알천에 대한 글을 써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었는데 알천은 신라의 왕족이고 김씨이므로 소씨일 수가 없다는 생각에 적당히 거절하여 보냈는데, 나중에야 신라 말에 김해(金海)의 호족이었던 김율희(金律熙)가 소율희(蘇律熙)라고도 기록되기도 한다는 점을 알게 되었고, 金은 음이 '김' · '금'이지만 그 뜻은 '쇠'이기 때문에 蘇라는 글자와 서로 통용되어 쓰일 수 있을 뿐 아니라, 8세기 원성왕과 왕위를 다투다 패한 왕족 김주원이 강릉으로 낙향한 것처럼 실제로 김춘추와의 왕위 계승을 두고 대립하기도 했던 알천이 김춘추에게 패한 뒤 지방인 진주로 낙향했을 가능성을 유추해내기에 이르렀다.

족보의 기록을 하나의 단서로 삼아 조상[4]의 무덤을 찾은 사례가 토요미스테리극장을 통해 소개된 일도 있다.관련내용 리뷰

특히 족보들 중에서도 양반 종가집에서 대대로 계승하는 족보는 그 금전적, 문헌학적[5], 서지학적, 사회학적[6][7] 가치가 상당하다.

종합하자면 조선 말기에 성행했던 별보 등재와 공명첩 매매와는 별개로, 각 본관들의 형성과 발전 과정을 살펴보는 큰 맥락의 사료적 가치는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일부 종가집을 제외한 대다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본관 조상이 자신의 진짜 조상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는게 문제지만.

3. 오해

한국의 전체 성씨에서 김이박 등 특정 성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많은 이유에 대해서 흔히 "원래는 성씨를 가진 사람은 인구의 극소수였는데 근현대에 와서 족보 매매를 해서 그렇다", "원래 노비였던 사람들이 성을 가지게 될 때 유명한 성씨인 김,이,박을 주로 골라서 그렇다" 등등의 주장이 있으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위조한 건 '본관'이지 '성씨'가 아니기 때문이다. 양반만 성씨가 있었다는 일반적인 오해와 달리 실제로는 양반 뿐만 아니라 양민들도 성씨를 가지고 있었다. 문헌을 살펴보면 심지어 노비들도 성씨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에는 3대 동안 관직을 지내지 못하면 양반의 자격이 사라진다고 여겼기 때문에 양반의 후손이라 하여도 실제 양반으로 인식되는 계층은 적었다. 실제로 일개 농민에 불과했던 전봉준도 엄연히 천안 전씨 족보에 기록된 인물이며, 스스로 '상놈의 패를 찼다'라고 자조한 김구김자점의 방계 후손으로 그 선대를 상고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한국의 성씨가 특정 성씨들에 치우쳐 있는 것은 족보 위조나 족보 매매, 노비들의 유명 성씨 선택 같은 것 때문이 아니다. 한국인의 성씨는 원래부터 편중되어 있었다. 다음은 그 증거이다.
인조 15년 무과 입격자 배출 상위 5개 성씨

김(金) 1252 명 (22.7%) 2000년 현재 김씨 인구 21.6%
이(李) 793 명 (14.4%) 2000년 현재 이씨 인구 14.8%
박(朴) 462 명 (8.4%) 2000년 현재 박씨 인구 8.6%
최(崔) 336 명 (6.1%) 2000년 현재 최씨 인구 4.7%
정(鄭) 179 명 (3.3%) 2000년 현재 정씨 인구 4.4%

특정 성씨가 능력이 더 뛰어나서 더 많이 붙는 게 아닌 이상 각 성씨별로 합격 확률이 비슷하다고 보면 조선 시대의 성씨 비율도 현대 성씨 비율과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본관이 없거나 모르던 사람들 상당수가 주류 성씨의 혹은 같은 성씨를 가진 유력 본관으로 별보를 등재하거나 공명첩을 매매했다고 추론할 수 있다.

4. 족보 기록의 윤색

한국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4대 성씨인 김해 김씨, 밀양 박씨, 전주 이씨, 경주 김씨는 전부 과거 한반도에 존속했던 군주국의 국성이며, 조상이 각각 가야(김수로), 신라(박혁거세), 조선(이성계), 신라(김알지)의 왕족이다. 이들 성을 가진 인구를 모두 합치면 1100만 명을 넘는다.

재미있는 것은 기존의 양반층 내에서도 집안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서 과거의 유명한 인물에 집안의 족보를 연결시키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는 것. 《구당서》를 보면 당나라두정륜이라는 인물이 성남(城南) 두씨 집성촌에 찾아가서 자신의 이름을 그네 집안 족보에 넣어달라고 청탁했다가 거절당한 기록이 있고, 오대십국시대에는 곽숭도(郭崇韜)라는 자가 사람들이 자신에게 곽자의의 후손이라며 아부하는 말에 솔깃해서 정말 후손인양 그 무덤에 찾아가 곡을 하고 오기까지 했다고. 현재 남아있는 조선 시대 족보의 서문에서는 이들 일화가 흔히 '족보 위조'의 반면교사적 예화로서 자주 등장하고 있다.

조선 초기의 성리학자로 아버지 김숙자의 행적을 정리하는 김에 자신의 족보까지 함께 추려서 《이존록》이라는 제목으로 엮어낸 김종직[8]은 자신이 속한 선산 김씨[9]의 시조로 여겨지던 김선궁(金宣弓)이라는 인물[10]에 대해 "계보가 너무 멀어서 (그 사람이 정말 내 조상인지 아닌지) 확인할 길이 없다!"면서 선궁 대신 고려 시대의 호장이었다는 흥술(興述)이라는 인물을 '비조(鼻祖) 1세'로 해서 족보를 기록했다.[11] 즉 집안에 내려오는 전승은 말 그대로 전설로서 인정해 주겠지만, 자신은 자신과 직접적으로 혈연이 있고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인물(문헌으로 100% 실증 가능한 인물)부터 조상으로서 인정하겠다는 뜻이다.[12]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 실학자 가운데서 족보 기록의 과장이나 윤색에 대한 사료 비판을 행하는 이들도 등장했다. 안정복은 《동사강목》을 쓰면서 기자조선마한의 후손이라 자처한 청주 한씨의 족보에 기록된 준왕 이후 마한 역대 41명의 왕들의 연대나 시호에 대해서 "이거 정사보다 기록이 자세하기는 한데 다 믿기는 어렵다"며 보충설명 정도로만 부기하고 본문에서는 빼버렸으며, 선산 김씨 농암공파의 파조 김주[13]에 대해서도 고이편에서"이거 오래 전부터 전해온 기록이니까 일단 싣기는 실었는데 고려 말기에 예의판서라는 벼슬이 없었고 중국 역사를 뒤져봐도 김주에 대한 얘기는 안 나오는데 이상하다"라고 의문을 표시해놨다.

다산 정약용도 한국 정(丁)씨의 도시조라는 정덕성(丁德盛)[14][15]이라는 인물과 압해 정씨의 연원을 이야기하면서도 "사실 관계에 대한 고증이 어렵다"며 회의를 표하기도 했다.

5. 조상이 겹치는 사례들

이씨만 따지면, 같은 시기에 활동하던 조상의 이름이 다른 가문에 겹쳐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인천 이씨와 예안 이씨[16]의 이지저(李之氐),[17] 고부 이씨와 흥양 이씨의 이양승(李陽升), 고부 이씨와 정선 이씨의 이초(李初), 용인 이씨함평 이씨의 이광봉(李光逢), 우봉 이씨와 함평 이씨의 이운로(李雲露)[18], 덕수 이씨와 안악 이씨의 이심(李深)[19], 심지어 지봉유설의 저자인 이수광의 경우는 김포 이씨 족보에 올라와 있다. 비단 이씨 뿐만 아니라 조(趙)씨에도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데, 함안 조씨와 순창 조씨의 조경(趙璥), 횡성 조씨와 직산 조씨의 조영인(趙永仁)[20]-조충(趙沖)-조계순(趙季珣)-조변(趙抃) 4대, 김제 조씨와 양주 조씨의 조수량(趙遂良)[21]이 있다. 김씨의 경우는 더욱 황당한데, 신라 김씨 계열인 당악 김씨의 후손이 가야 금관국 김씨 계열로 들어간 경우도 나타난다. 이러면 김알지수로왕의 촌수관계가 나올지도 더 웃긴 건 한 사람이 세 가문의 족보에서 동시에 등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대표적인 경우로 임진왜란 때 의병장을 지낸 익흥부원군(益興府院君) 이응순(李應順)이 있다. 그는 원래 (구) 원주 이씨이지만, 우계 이씨와 안악 이씨 족보에도 이름이 올라가 있다.

6. 인구 대다수의 본관 조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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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4대 본관인 김해 김씨, 밀양 박씨, 전주 이씨, 경주 김씨는 전부 과거 한반도에 존속했던 군주국의 본관이며, 조상이 각각 가야(김수로), 신라(박혁거세), 조선(이성계), 신라(김알지)의 군주다. 4대 본관에 속한 인구를 모두 합치면 천만 명을 넘는다. 이 밖에 다른 주요 본관들도 모두 당대 이름난 가문이었으며, 그렇지 않은 경우는 거의 없다.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인구가 본관으로만 따지면 왕족 아니면 귀족 후예라는 어처구니 없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조선에서는 양반 내에서도 계급이 분화되어, 한양에 모여 살면서 관직을 독점하는 '권반'과 향촌 내에서 모여 살며 지방에서라도 독자적인 세력을 이루어 살았던 양반 사족인 '향반', 그리고 권력도 경제력도 없이 도태된 '잔반'이 생겨난다. 잔반들은 암울한 경제 사정을 타파하기 위해 부농층에 족보를 팔았고 부농층은 족보를 사고 다른 마을로 이사한 후 양반 행세를 하면 되었다. 아니면 아예 돈을 주고 양반집안에 양자로 들어가기도 했다.
임금이 낮에 경연을 가졌다. 그때 사헌부집의 유수가 아뢰었다. "역관(譯官) 김경희가 자기 마음대로 활자를 만들어서 비치해 둔 다음, 다른 사람들의 족보를 많이 모아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시골에서 군역을 모면하려는 무리들을 꾀어다가 그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책장을 바꾸어 가짜 족보를 만들어 주는 것으로 돈벌이를 하고 있습니다. 형조에 명령하셔서 엄중 조사하여 무거운 벌을 주도록 하십시오." 그러자 임금이 이를 허락하였다.” - 《영조실록》1764년 11월 12일
 
즉 조선 말기에 이르러 공명첩 매매와 별보 조작이 성행하기 시작했으며, 이후에는 대량으로 위조되어 농민들도 단체로 조작하기 시작했다. 양반이란 지위는 단순히 현대적 관점에서 귀족 작위를 받는 명예로써의 가치와는 다르게 농민으로 하여금 가혹한 '군역'을 면제받게 해주는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22] 조선 후기 양반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자 세수가 지속적으로 줄어들게 되었고, 이에 따라 흥선대원군 시기에 이르러선 양반에게도 군포를 거두는 호포제가 법제화되었다.

그 외에도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평민들이 양반의 직위로 올라서는 경우도 있고, 가난한 조정이 재정을 확보하고자 공명첩을 발급한 경우도 있지만 이것은 극히 소수다.

이런 양반들의 증가현상은 당시 인구조사로도 확연히 드러난다. 조선 초기에는 지배계급인 양반이 가장 적고, 중인, 상민, 천민 순으로 숫자가 많아지는 피라미드 구조였는데, 이 시기에 상민은 줄어들고 양반은 폭발적으로 늘어나서 일부 지역의 경우에는 오히려 양반이 상민보다 많은 역피라미드의 인구구조가 증폭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때문에 철종 때 공노비 6만명을 해방시켜 상민을 늘렸으나, 그래도 이 추세를 막지는 못했다.

본래 있던 양반들은 위기감을 느끼며 족보를 확장하지 못하도록 상소도 올리고 신문고도 때리고 했지만 시대적인 흐름을 그들이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23] 결국 어정쩡한 타협으로 본래의 양반 족보 안에 "별보"라 하여 혈연관계가 증명되지 않은 사람들의 족보 등재를 묵인하기도 했다.

이를 보다 못한 구한말 지식인들은 자기 조상을 부정하는 패륜적인 행위라며 족보 위조를 크게 비난했다. 증산종교의 교조 강일순(姜一淳, 1871~1909)의 말에서 잘 드러난다.
지금은 근본으로 다시 돌아가는 시대이니 혈통 줄을 바르게 하라.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바꾸어서 계보를 위조하는 자는 다 죽으리라.
강일순의 주장대로라면 이 나라의 상당수는 모두 죽어야 한다. 나라의 패륜되는 한국산 사이비종교들의 시조가 할말은 아닌거 같은데.

역사학자 박홍갑은 2016년 9월15일 YTN과의 인터뷰에서 족보가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해 설명하였는데, 박홍갑의 발언에 의하면 본관이 일반적으로 보편화된 것은 고려시대가 되어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각 지역 토착 호족세력에게 본관을 지정해주면서부터라고 한다. 따라서 "본관은 생물학적인 계보라기보다는 사회, 문화적인 계보"에 가깝다. 즉, 종가집을 비롯한 일부 예외적인 케이스를 제외하면 조상의 DNA와 자신의 DNA가 일치하지 않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관련 기사

굳이 자신의 조상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고 싶다면 족보에 기록된 조상과 본인의 DNA 대조검증을 통해 알아볼 수 있지만, 이를 위해서는 조상의 묘를 열어야 하는데 조상의 묘가 파헤쳐지는 것을 해당 종가, 종친회와 문중에서 용납하지는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어디까지나 족보상의 조상이 자신의 진짜 조상인지 아닌지를 알아낼 수 있을 뿐, 가짜로 판명날 경우 자신의 진짜 조상이 누구인지 알아내기는 불가능하다. 위조를 했던 조상이 무슨 일을 했는지, 진짜 이름이 무엇인지, 누구의 후손인지에 대한 기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사실상 거의 없으며, 설령 있다고 한들 단편적인 내용일 뿐 구체적인 기록까지는 아니기 때문이다.

7. 현대의 족보 위조

일단 근현대 이후 족보가 처음 만들어졌다면 당연히 신빙성을 갖기가 어렵다.

대표적으로 회산 감씨의 경우 고려 공민왕 시기에 노국대장공주를 따라온 원나라의 한림학사 감둥리[24]의 16세손 감철(甘喆)이 북벌을 중지시킨 공으로 금자광록대부에 오르고 회산군(檜山君)에 봉함받은 뒤로 본관을 회산으로 한다고 감씨 문중에서 족보라고 주장하는 문서에 기록되고 있기에 감철은 조선시대의 인조 이후의 사람으로 추정된다. 문제는 이들이 자신들의 조상이 봉해졌다고 주장하는 회산군(檜山君)은 이미 조선 성종이 재위할 때 성종이 자신의 다섯째 아들인 이염(李恬)을 회산군(檜山君)에 봉해졌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데 이후 감철(甘喆)이 북벌을 중지시킨 공으로 금자광록대부에 오르고 회산군(檜山君)에 봉해졌다는 기록은 그 이후의 조선왕조실록이나 야사에서조차 나오지 않는다. 애초에 조선시대에 왕족이 이미 봉해진 작위를 일개 양반이 봉해졌다고 족보를 만들었다면 그 일족은 역모죄로서 멸족당했을 것이다. 실제 감씨에 대한 기록은 임진왜란 시기에 공을 세운 여일 감경인(汝一 甘景仁)이 있으나 그 이후에는 기록이 없어 역사학자들은 감씨 문중은 조선 중기 이후로 급제자를 배출하지 못해 몰락 양반이 되었고 직계 명맥이 끊기면서 방계들로 맥을 이어갔으며 이들도 맥이 단절될 시기에 일어난 갑오개혁으로 다른 계층들이 유입된 것으로 추정하는데 신분제 폐지로 인해 다들 양반 성씨를 쓰게되자 양반임을 드러내기 위해 족보를 만든 것으로 추정한다. 문제는 양반이라 해도 3대에 한번은 초시라도 합격해야 양반직을 유지할 수 있었기에 벼슬에 뜻이 없고 학문에 힘쓰는 산림 처사라도 초시나 향시 생원시와 진사시에 응시해서 통과해야만 했다. 그래야 군역과 부역을 면제하고 학문에 힘쓸 수 있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공무원 시험을 볼 생각 없는 사람이 대학교수학자가 되기 위해 또는 생계를 위해 국가전문자격증과 석박사학위를 딸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초시에 합격하면 이를 증명하는 증명서가 발급되는데 이것이 존재해야 양반직을 유지할 수 있고 살제로 조상이 양반인 가문들은 족보에 이를 내세웠다. 문제는 이들은 객관적인 증명자료 없이 족보에서만 양반이라고 주장하기에 역사학자들도 외면한 것이다.

감씨 문중에서 내세우는 족보가 대한민국 건국된 이후에나 만들어진 족보(족보: 1952년, 대동보 : 1976년)인 것도 있지만 기록조차 왕족의 작위까지 조상이 받았다고 하는 등 왕족의 작위까지 자기 가문들이 받았다고 하는 역사왜곡이 심해 족보를 수집하여 연구하는 역사학자들도 객관적이지 않고 허구에 가깝다는 이유로 외면했다. 족보 내용에 조선 성종의 아들인 왕자 이염이 봉해진 회산군 작위를 이후에 태어난 자기 조상이 봉해졌다는 구절들이 있어 전주 이씨 문중의 어그로를 끌어 소송까지 갈 뻔했으나 전주 이씨 문중에서 많고많은 성씨들이 너도나도 족보를 조작하는 것이 하루이틀도 아닐 것이라며 일일이 소송으로 대응하면 전주 이씨의 가풍을 해치므로 일일이 대응하지 않겠다고 하여 소송까지는 이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해당 항목에서도 나오듯이 최근에야 만들어진 족보이면서 너무 뻔뻔하게 조작을 했고 정통 양반이라고 주장하여 대표적으로 현대의 족보 조작의 하나로 알려졌다. 심지어 이들도 감씨 직계가 아닌 감씨 방계들의 하나로 이미 감씨 직계는 명맥이 끊겼다고 알려져 있다.[25] 그 외에도 족보 자체가 너무 최근에 만들어져서 족보의 효력이 없다는 얘기도 나오는데다 구글 등에서 회산 감씨 족보를 검색하면 회산 감씨 족보와 대동보를 5만원에 판다는 감씨 문중으로 보이는 판매자의 글이 있다. # 문중의 일원이라면서 족보를 헐값에 판다는 것도 문제지만 해당 판매글의 상세 항목을 보면 족보는 1952년에 만들어졌고 대동보는 1976년도에 만들었다고 나온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족보가 아닌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나 만들어진 족보였기에 족보를 연구하는 이들에게도 족보로서 인정받지 못한 것이다.

독립운동가 등의 후손이 되면 얻는 국가유공자 혜택을 노리고 족보나 대동보를 조작까지 하다가 적발되고 처벌받는 사례들이 생기면서 족보 조작에 대해서 더 엄격해졌다. 대표적으로 족보 조작이 발각된 사례로 지난 1995년 국가보훈처(이하 보훈처)는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한 의병장 차도선(1863년~1939년) 등 5명의 애국선열 유해봉환을 추진했는데 차도선의 종손을 자처한 가짜들이 나왔다. 당시 보훈처 관계자들은 중국을 방문해 길림성 무송현 두지동 옛집 타작마당에 있던 차도선의 묘소와 손녀 등의 유족을 확인했다. 친손녀 차월겸(66, 차도선의 셋째 아들 '차원복'의 3녀)은 한국 정부의 유해봉환 요청에 따라 1995년 청명에 할아버지의 시신을 화장해 보관했다가 같은 해 6월 중국 연변 조선족 자치주 장백호텔에서 보훈처 직원들에게 유해를 전달했다. 보훈처는 같은 해 6월 23일 대전국립묘지에서 안장식을 진행했다. 그러나 친손녀가 보훈처 직원에게 전달한 차도선의 유해는 가짜 종손 차상옥(당시 차씨종친회 사무총장·2007년 사망)이 유족대표로 참가한 가운데 안장됐다. 뿐만 아니라 국립묘지 비석엔 가짜 종손이 손자 대열에 끼었고, 차도선의 출생지는 가짜 종손의 본적인 '충청남도 청양군'으로 뒤바뀌는 수난을 당해야 했다.

이렇게 종손을 자처한 가짜들이 나온 이유는 유족들이 모두 중국에 거주하고 있어 확인이 어렵다는 걸 이용해 자신들을 후손으로 넣어 국가유공자 후손들이 받는 혜택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차상옥이 가짜 종손인 것이 밝혀진 이후에도 가짜 종손을 자처하는 이들이 줄줄이 등장했지만 모두 조작으로 밝혀졌는데 유족들은 이들의 종손 보증 요구에 시달렸다고 한다. 유족들이 종손 보증을 거부하자 소위 '첩' 설을 내놓으며 '독립운동을 한 사람은 일제의 감시와 체포 등으로 부인 곁에 갈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여자를 얻어 살 수밖에 없었다'라면서, 호적에는 없지만 차도선의 종손자를 자처하는 집안이 '큰집 혹은 작은집'이라는 황당한 주장까지 했다. 즉, 의병장이니까 첩을 두었을 수도 있다라는 억지 주장이었는데 차도선의 손녀 차옥겸(59, 차도선의 셋째 아들 '차원복'의 4녀)은 "종친회 사람들이 얼토당토않은 주장을 해대기에 "그러면 우리 할아버지가 바람둥이냐"고 항의했다"면서 "종친회 사람들로부터 종손으로 인정해달라는 강요에 너무 많이 시달렸다"고 털어놨고 언론에 의해 족보 조작이 발각되고 취재가 이어지자 종손을 자처하던 이들은 남들은 인정하지 않지만 자신들은 차도선의 후손이라고 생각한다고 주장였으나 보훈처에서 족보 조작이라고 판단을 내렸기에 더 이상 우기지는 못 하였다고 한다. #

이러한 이유로 보훈처도 각각의 가문에서 내세우는 족보에 소위 독립운동가들의 후손으로 자처하는 경우 이를 증명하지 못하면 국가유공자 후손으로 혜택을 얻기위해 족보를 조작한 범죄행위로 보겠다고 밝힌 상태다.

8. 북한에서

북한에서는 북한 정권이 수립하고 나서 봉건적 유물을 없애고 종파주의를 막는다는 핑계로 본관호적을 폐지하고 그와 동시에 족보를 새로 업데이트 하는 일 자체를 금지했다. 반동으로 몰릴까봐 기존 족보도 소실된 것이 많고, 고려 태조 왕건의 왕씨 가문 족보도 후손이 불태워버릴 뻔 하다가 간신히 살아남았다. 이 반쯤 불탄 족보는 1992년 북한 정부에 기증되어 국보로 지정된다.

그래서 북한의 젊은 층은 족보나 본관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자신들의 조상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도 태반이라고 한다. 다만 북한내에서도 족보를 역사적인 사료로 이용은 하고있고, 기존에 있던 민간의 족보를 회수하여 박물관 등지에 보존하고 역사연구에 쓰고 있기는 하다. 또한 개인은 자기 뿌리를 몰라도 정부 차원에서는 자국 공민의 가족배경, 친척관계, 주변인의 정보 등을 파악해두고 있다고 한다.

9. 참고


[1] 물론 이들도 가문과 나라의 역사를 문헌으로 정리했다. 다만 국가적 권력층인 이들의 기록은 현대인이 생각하는 족보라기보단 역사책의 형식에 더 가까웠다.[2] 이 회상사 초대 회장 박홍구의 아들이 정치인 박병호와 국회의장 박병석이다.[3] 조선 후기에 향리층들이 모여 지은 《연조귀감(椽曹龜鑑)》이라는 책에 인용된 향리들의 족보 가운데 《흥양이씨보(興陽李氏譜)》의 "신라 말기에 귀족의 후예들이 다투어 호무(豪武)를 써서 주(州)와 현(縣)을 제패하였다," 하는 기술이 인용되었는데, 이기백은 이 기록이 신라 말기 지방의 세력가 즉 호족이 군사력을 거느리고 있었다는 증거이며 너무도 당시의 실정을 잘 드러내는 기록이라고 평가했다.[4] 무려 700년 전 고려 시대의 인물인 허유전(1243∼1323)이었다.[5] 족보가 제작되던 당시의 시대상이나 작성 배경 같은 것.[6] 한국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족보인 안동 권씨 성화보나 문화 류씨 가정보 같은 경우 후대 족보와 비교해 보면 부계뿐 아니라 모계 역시 빠지지 않고 기록되어 있어 조선 중기 이후 시대상의 변화 과정을 여타 족보들과 비교해 확연하게 알 수 있다.[7] 특히 직업적 특성상 양자를 들여 집안의 계보를 이었던 내시들의 경우 "낳아주신 은혜만큼이나 키워주신 은혜도 귀중하다"는 이유로 양자로 이은 계보를 족보 기록으로써 정리했다. 이것이 양세계보(養世系譜). 조선 시대의 내시들 자신이 남긴 몇 안 되는 기록이다.[8] 현재 선산 김씨 점필재공파의 파조(派祖)로 모셔지기도 한다.[9] 일선 김씨라고도 하는데 선산의 옛 지명이 일선이다.[10] 고려 초기 왕건이 후백제를 칠 때 종군해서 왕건에게 활을 하사받고 선산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전하는 인물이다.[11] 비조라는 단어는 코 비를 쓰는데 인간이 태내에서 가장 먼저 생성되는 기관이 라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12] 비슷한 경우가 중국에도 있는데 북송의 명장 적청의 경우 어떤 사람이 그에게 잘 보이려고 적청이 당 측천무후 시대의 명신이었던 적인걸의 후손인 것처럼 꾸민 계보도를 바쳤는데 적청은 "내 조상은 평민이었다"면서 받지 않았다는 일화가 《몽계필담》에 남아 있다.[13] 선산 김씨 족보에서는 김주가 고려 말의 예의판서로 명에 사신으로 갔다오다 압록강에 이르러서 고려가 멸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의관을 집에 전해주고 "이 의관이 집에 도착한 날을 내 기일로 제사지내라"라고 전한 다음 다시 명으로 돌아가서 홍무제에게 "고려를 멸망시킨 이성계를 명에서 나서서 토벌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홍무제는 듣지 않고 다만 김주의 고려에 대한 충절을 높이 사서 명의 관직을 주었으며, 김주의 외손자가 명에 온 조선 사신과 만났다고 적었다.[14] 당나라 등주(鄧州) 정영(丁營) 출신으로 과거에 급제해 당문종 때 대승상에 오르고, 무종 때 대양군에 봉해졌으나 당선종의 심기를 거슬려 자손들이 때 직언 상소한 것이 지금의 전남 신안 압해도에 유배되었고 후에 사면되었으나 너무 늙어서 중국까지 돌아갈 수 없어 그냥 압해도에 눌러 살았다고 한다. 압해 정씨의 시조이기도 하다.[15] 참고로 중국에서 정(丁)씨가 생겨난 연원을 따지면 강태공의 아들 급(伋)이 정공(丁公)이라는 시호를 받은 이후 그의 지손(支孫)들이 정(丁)씨를 성(姓)으로 삼았다고 하며, 현재 중국에서는 정(丁)씨를 제양당(齊陽堂) 정(丁)씨라 칭하고 있다.[16] 한때 1979년판 전의 이씨 대동보에 들어간 적 있었지만, 대수상의 논란으로 인해 1992년판 전의 이씨 대동보에서 빠졌다.[17] 인천 이씨의 이지저는 고려 중기 묘청의 난 때 인물인데 비해, 예안 이씨의 이지저는 고려 후기 인물로 충숙왕 때 식목도감사를 지냈다고 한데(예안 이씨 측 시조에 관한 자료), 단순 생년차이를 계산해보면 191년 차이로 약 6~8대손 차이이다. 그런데 이지저의 자(字)를 보면 인천 이씨에서는 종고(宗固), 예안 이씨에서는 종회(宗回)로 되어 있다. 더불어 시호(諡號)를 보면 인천 이씨에서는 문정(文正), 예안 이씨에서는 문인(文仁)으로 되어 있다. 연대상으로 확연히 동명이인인데도 불구하고 같은 인물로 의심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한(고려) 문서를 참조.[18] 조선 초기의 인물로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종성군(鍾城君)에 봉해짐. 이세인(李世仁)이라는 손자가 기록되어있다는 점도 공통점이다.[19] 중종반정 공신 중의 한 명으로 하원군(河源君)에 봉해짐[20] 횡성 조씨 족보에는 이름이 영인으로 되어 있고, 직산 조씨 족보에는 이름이 영원(永元), 일명 영인으로 되어 있다. 결국 같은 인물인 셈.[21] 조수량은 계유정난으로 희생되었다는 점에서 둘다 같이 나오지만, 관직에 대해서는 김제 조씨에서는 금군별장으로 양주 조씨에서는 관찰사로 나와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22] 전근대의 군역은 지금보다 훨씬 가혹했다.[23] 조선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최석정은 1678년 풍양 조씨 족보의 서문을 쓰면서 “근래 사대부 집안에서 조금씩 보첩을 '수명(修明)'하는 것을 일삼고 있다”며 족보의 급격한 보급·확산 추세가 사회적으로 체감할 수 있는 수준임을 밝힌 바 있다.[24] 공민왕에게서 제왕을 뜻하는 이름인 '규'를 하사받았으나 이후 비리가 드러나면서 천민으로 강등되면서 이름인 규도 박탈되어 천민 감둥리로 사망한다.[25] 직계가 단절되어 방계들이 실제로 직계에서 갈라져 나온 것인지 갑오개혁 이후로 전혀 관계없는 이들이 편입된 것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족보의 내용 등의 오류를 보면 후자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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