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벨라루스인이란 동슬라브계 벨라루스어를 쓰는 민족을 말한다. 오늘날 기준으로는 벨라루스인과 러시아인은 서로 차이가 좁혀져서 구분하기 힘든데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있었던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의 벨라루스 점령의 영향 탓이다. 2차 대전 이전의 벨라루스인은 러시아인과 엄연히 다른 역사와 문화를 가진 민족이었다.
2. 기원
- 9세기 동유럽 민족 분포 지도
공통성을 가지고 있던 슬라브족들이 이주 이후 분화되면서 동슬라브족, 서슬라브족, 남슬라브족으로 나뉘어진 후 슬라브족에서 분화된 동슬라브족은 키예프 루스 시절에는 공통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후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 루신인 그리고 벨라루스인으로 갈라지는데 계기는 몽골 제국의 키예프 루스 침략이다.
몽골의 침략을 피해 달아난 루스 난민 중 북쪽으로 오늘날의 모스크바 근교로 이동한 사람들은 북부 삼림지대에 핀-우골어족에 속하는 여러 민족들과 혼혈되면서 러시아인의 기원이 되었고 스키타이 민족과 혼혈된 상태로 키예프 공국 영토에 그대로 남은 사람들은 우크라이나인이 되었으며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근방에 살던 슬라브족들은 발트어를 쓰는 민족들과 혼혈되면서 오늘날의 벨라루스인의 기원을 이루었다.
중세에는 벨라루스인과 우크라이나인을 통틀어서 루테니아인(Ruthenians)이라는 말로 칭해졌으나 17세기 중반 우크라이나에서 코사크 헤트만국이 세워진 후 우크라이나인과 벨라루스인을 서로 구별해서 부르게 되었다. 러시아나 우크라이나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벨라루스도 미녀가 많은 나라로 유명하다.
3. 분화
키예프 대공국을 구성하던 여러 공국 중 흑해와 발트해를 잇는 수운 요충지에 위치한 폴로츠크 공국이 오늘날 벨라루스 일대의 발트어족과 슬라브족을 아우르는 나라를 건설했다. 폴로츠크 공국의 종주국이었던 키예프 공국이 멸망한 이후 벨라루스 일대는 독일인들과 타타르인들에게 시달리는 암흑 시대를 겪었으나 발트 해의 리투아니아인들이 폴로츠크 공국과 투로프 공국을 병합하며 발트족과 슬라브족을 아우르는 국가인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건설했다.당시 리투아니아인들은 자체적인 문자 기록 문화가 없었기 때문에 이미 동로마 제국을 거쳐서 종교와 문화를 먼저 전수받은 루테니아인 지식인들이 리투아니아 대공국에서 활약했으며 이 덕분에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공식 행정 언어는 중세 루테니아어, 즉 벨라루스어였다. 벨라루스어의 지위는 리투아니아인과 벨라루스인 귀족들이 전부 폴란드화되는 1690년대까지 공식 행정 언어로 유지되었다. 즉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문화는 리투아니아인의 문화임과 동시에 벨라루스인의 문화이기도 하다.
4. 규모
벨라루스의 인구 84%는 벨라루스인으로, 벨라루스에 거주하는 벨라루스인 인구는 7백만명 정도다. 벨라루스라는 나라가 영토가 결코 작은 나라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인구가 꽤 적은데 이는 벨라루스가 주변 러시아나 우크라이나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농사짓기 불리한 척박한 환경인 데다[1] 서유럽과 러시아 본토 사이에 끼인 위치 때문에 두 세력 간에 전쟁이 터질 때마다 전장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벨라루스 외에도 러시아 제국과 소련 시절에 러시아인이 진출하는 곳에는 어디에나 벨라루스인도 조금씩 섞여서 같이 진출했으므로 과거 러시아의 판도에는 아무리 적은 수라도 벨라루스인도 조금씩 섞여 있는 경우가 많다. 러시아 각지에 벨라루스인 52만명, 우크라이나에는 통계상으로는 27만명의 벨라루스인이 거주한다. 우크라이나 체르니히우(러시아어로는 체르니고프) 주민 상당수가 벨라루스계 조상을 두고 있다.
발트 3국에도 상당수의 벨라루스인 집단이 있다.
한때는 폴란드에도 벨라루스인들이 많이 살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스탈린이 폴란드 동부 영토의 대부분을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에 떼어주는 과정에서 폴란드에 살던 벨라루스인 상당수가 벨라루스에 귀속되었다. 그래도 비아위스토크 같이 벨라루스와의 접경지대에 있는 도시들은 벨라루스인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으며 일부 벨라루스인들은 알렉산드르 루카셴코의 독재를 피해 폴란드로 이주하기도 한다.
4.1. 벨라루스의 유대인
리투아니아와 라트비아, 벨라루스에 살던 유대인들은 이른바 리투아니아 유대인이라는 뜻의 "리트박(Litvaks)" 유대인으로 분류되었으며 폴란드의 하시딤 유대인과 대립하는 사이였다.19세기부터 20세기 초반 벨라루스는 러시아 제국에서 유대인 인구 비중이 제일 높은 지역이었다. 특히 벨라루스 도회지 인구는 절반 가까이가 유대인이었다. 그러나 미국으로 이민가는 유대인 인구가 급증함에 따라 한 때는 91만명에 달하던[2] 벨라루스 유대인은 2차 대전 직전에는 37만명 정도로 감소했다. 이민가지 못하고 남아있던 벨라루스 유대인들은 2차 대전 동안 홀로코스트와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의 벨라루스 점령의 영향으로 3분의 2가 사망했다고 한다. 생지옥을 뚫고 살아남은 유대인 상당수가 이스라엘로 이민을 가면서 오늘날 벨라루스에는 7만여명의 유대인 인구만 남아 있다.
마르크 샤갈, 미하일 보로딘이 벨라루스 출신 유대인이었다.
4.2. 벨라루스인 디아스포라
오늘날 벨라루스 해외에서 벨라루스인 인구가 가장 많이 거주, 체류하는 국가는 러시아다. 러시아 제국 시대부터 러시아인과 벨라루스인, 우크라이나인 사이의 통혼은 일상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러시아인들 중 친척 중에 벨라루스인이 있는 경우는 특이한 경우도 아니다. 카자흐스탄에도 상당수의 벨라루스인들이 거주하고 있었으나 소련 붕괴 후 상당수가 벨라루스 혹은 러시아, 독일 등으로 재이민하였다.벨라루스가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던 시기, 특히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사이 상당수의 벨라루스 유대인들이 미국으로 이주하였던 바 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러시아 제국이 멸망하고 벨라루스 영토의 상당 부분이 폴란드 제2공화국의 영토가 되었는데 당시 폴란드에서 정교회를 믿는 벨라루스인들을 차별하면서 다시 상당수의 벨라루스인들이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역사도 있다.
1949년 당시 벨라루스 인민 공화국 망명 정부는 벨라루스인 디아스포라를 다음과 같은 규모로 추산하였다.
미국 | 500,000 |
아르헨티나 | 100,000 |
캐나다 | 30,000 |
영국 | 11,000 |
브라질 | 10,000 |
프랑스 | 10,000 |
서독 | 10,000 |
물론 해당 수치는 개략적인 수치다. 벨라루스인 이민자의 대부분은 유대인 혹은 벨라루스 내 폴란드인/리투아니아인 가톨릭 교도였고 이들은 오늘날 자신의 정체성을 유대인, 폴란드인에서 찾지 벨라루스계에서 찾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예외가 있다면 폴란드 제2공화국에서 폴란드에서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벨라루스인 정교회 신도들이 있다.[3]
소련 시절에는 인접한 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상당수의 벨라루스인들이 이주되었는데 이러한 연유로 오늘날 라트비아에는 상당수의 벨라루스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다른 한편 1970년대부터 상당수의 벨라루스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이민했던 바 있다. 소련 붕괴 후에도 벨라루스 내 유대인들은 기회가 되는 대로 이스라엘로 이민하고 있다.
4.3. 벨라루스의 무슬림
자세한 내용은 립카 타타르 문서 참고하십시오.5. 문화
자세한 내용은 벨라루스/역사 문서 참고하십시오.빌뉴스 대학과 인쇄소를 중심으로 벨라루스 르네상스가 전개되었으나 흐멜니츠키 봉기 이후 벨라루스 일대가 러시아 제국의 침략으로 초토화되면서 벨라루스의 르네상스 문화는 한 차례 포맷당했으며 20세기 초반 민족주의 운동이 고조되면서 벨라루스 민족 문화가 재발견되는 시점에서 스탈린의 대숙청과 2차 대전으로 한 번 더 포맷당했던 역사가 있다.
5.1. 벨라루스 그리스 가톨릭
근세에서 근현대까지 벨라루스인 절대다수가 폴란드의 압력으로 정교회에서 교황수위권을 인정하는 벨라루스 그리스 가톨릭으로 반강제로 개종당하기도 했으나 러시아 제국에서 1830-31년 폴란드 독립 봉기가 진압된 이후 벨라루스 그리스 가톨릭 신도 거의 대부분을 정교회로 재개종시켰다.20세기 초반 벨라루스 민족주의자들이 벨라루스 르네상스는 벨라루스 그리스 가톨릭의 역사와 겹친다며 복구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나 상술한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의 벨라루스 점령 여파로 벨라루스 민족주의 지식인들이 갈려나가면서 실패하고 오늘날에는 신도가 약 7천여 명 정도에 불과하다고 한다.
5.2. 언어
오늘날에는 벨라루스인 상당수가 벨라루스어보다는 러시아어를 선호하며 러시아 제국과 소련의 영향으로 벨라루스인의 거의 대부분이 러시아어를 모국어나 다름없이 구사한다. 벨라루스 본토인이 아닌 해외의 벨라루스계 주민들은 경우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생기는데 벨라루스 민족주의 탄압을 피해 서방 국가로 망명해 온 벨라루스인의 후손들은 벨라루스인 정체성을 더욱 강조하며 자신들끼리의 대화에서 벨라루스어를 고집하는 경우가 많지만 소련 붕괴 후 단순히 생계형 이민을 온 벨라루스인들은 러시아계 주민들에게 묻어가는 경우가 많다. 언어·문화적으로 현지에 거의 동화된 경우에도 전자는 벨라루스계 후손으로서의 정체성이 강하고 후자는 러시아계에 묻어가는 경향이 강하다.6. 벨라루스인 인물
-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 2015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 스뱌틀라나 치하노우스카야
- 스타니슬라우 슈시케비치
- 멜리티나 스타니우타
- 프란시스크 스카리나 - 16세기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르네상스를 주도했던 인물
- 옥사나 네베스라야
- 안드레이 그로미코 - 1957년부터 1985년까지의 소련의 외무장관으로 재임했던 인물
- 안드레이 알롭스키
- 알략산드라 샤르헤예우나 파드뱌레스스카야
- 제냐 카타바
- 장팡량 - 장징궈 전 중화민국 총통의 영부인
- 게나디 코로케비치 - 영재 프로그래머
- 알렉세이 이그나쇼프 - 2000년대에 K-1에서 활약한 입식타격 격투기 선수
-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 소피야 할샨스카야 - 야기에우워 왕조의 브와디스와프 3세와 카지미에시 4세의 모친
- 스베틀라나 보긴스카야
- 폴리나 플라신스카야
- 발레리 컨[4]
7. 관련 문서
- 동슬라브 / 러시아인 / 우크라이나인
- 벨라루스계 미국인
- 벨라루스계 아르헨티나인
- 벨라루스계 러시아인
- 벨라루스계 라트비아인
- 벨라루스계 리투아니아인
- 벨라루스계 영국인
- 벨라루스계 독일인
- 벨라루스계 프랑스인
- 벨라루스계 우크라이나인
- 벨라루스계 캐나다인
- 벨라루스계 호주인
- 벨라루스계 폴란드인
8. 외부 링크
[1] 러시아 유럽 부분과 우크라이나는 체르노젬 지대라서 벨라루스보다 토질이 좋다. 벨라루스는 숲이 발달해 체르노젬 지대처럼 부엽토가 쌓이지 못했다.[2] 당시 벨라루스 전체 인구의 17% 이상[3] 1차대전 직후 미국에서는 동유럽 이민자들을 쿼터제를 적용해 막으면서 벨라루스인들은 미국 대신 어쩔 수 없이 거리도 더 멀고 생소했던 아르헨티나로 이민하곤 했다.[4] 주로 바르셀로나와 밀라노, 발리와 싱가포르 등에서 활동하는 모델로 대한민국 수원 소재 아주대학교에 교환학생으로 유학 왔던 적이 있다. 교환 학생 시절에 수도권 대학 유학생들 사이에서 절세 미녀로 엄청 유명했다. 모델 업계에서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입문해 별로 많이 유명한 사람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