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ffe300>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3대 선전선동국장 미하일 수슬로프 Михаи́л Су́слов | Mikhail Suslov | |||
| 파일:1963_Press_Photo_Mikhail_Andreyevich_Suslov.png | |||
| 공식 초상화, 1963년 | |||
| 본명 | 미하일 안드레예비치 수슬로프 Михаи́л Андре́евич Су́слов Mikhail Andreyevich Suslov | ||
| 출생 | 1902년 11월 8일 | ||
| 러시아 제국 사라토프현 흐발린스키군 샤홉스코예 (現 러시아 볼가 연방관구 울리야놉스크주 파블롭스키군 샤홉스코예) | |||
| 사망 | 1982년 1월 25일 (향년 79세) | ||
|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 |||
| 묘소 | 크렘린 벽 묘지 | ||
| 재임기간 | 제3대 선전선동국장 | ||
| 1947년 ~ 1948년 | |||
| 소련 공산당 제2서기 | |||
| 1965년 12월 6일 ~ 1982년 1월 25일 |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ffe300> 부모 | 아버지 안드레이 안드레예비치 수슬로프 | |
| 신체 | 키 190cm | ||
| 배우자 | 예카테리나 알렉산드로브나 수슬로바 | ||
| 형제자매 | 빅토르, 마르가리타 | ||
| 자녀 | 아들 레볼리[1], 딸 마야[2] | ||
| 학력 | 모스크바 국립경제연구소 (졸업) | ||
| 종교 | 무종교 (반종교)[3] | ||
| 소속 정당 | [[소련 공산당|]] | ||
| 주요 서훈 | 10월 혁명 훈장 레닌훈장 (5회) 사회주의노력영웅 (2회) 조국전쟁훈장 1급 | ||
| 별명 | 회색 추기경 (Серым кардиналом) | }}}}}}}}} | |
1. 개요
소련의 정치인.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과 서기를 지냈으며 스탈린과 흐루쇼프 시기부터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면서 브레즈네프 시기에는 그 영향력에 전성기를 맞았다, 이로 인해 붙은 별명이 회색의 추기경과 그늘의 실력자.
흐루쇼프 실각에 가담하거나 반체제 인사를 탄압하고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주도하는 등 보수파의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동시에 스탈린 격하의 시작인 소련 공산당 20차 대회를 찬성하고 도리어 다른 공산권 국가에 이를 강요하는 등 전체적으로는 온건 보수파에 가깝다.
2. 생애
1902년 11월 8일, 러시아 제국 사라토프현 흐발린스크군 샤홉스코예 마을의 가난한 소작농이었던 안드레이 안드레예비치 수슬로프의 세 자녀중 한 명으로 태어났다. 가족의 작은 농장에는 말 한 필조차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생계를 위해 바쿠의 유전 현장에서 일용직으로 일해야 했다.소년 시절부터 수슬로프는 활발하고 에너지가 넘치는 성격으로, 14세 때 목공과 건축 일을 하는 장인들을 모아 함께 일하기 시작했고, 곧 아르한겔스크로 향했다. 이후 온 가족이 그를 따라 북부로 이주했다. 북부 러시아에서 머무는 동안 수슬로프 일가는 10월 혁명의 소식을 듣고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샤호프스코예로 귀향한 뒤, 아버지 안드레이는 러시아 공산당에 입당하여 흐발린스크 지역에서 당 활동을 시작했다. 미하일 역시 1918년, 16세의 나이에 정치 및 사회 활동에 참여했다. 그는 중등 교육을 마치자마자 1918년에는 농촌빈곤위원회에, 1920년에는 콤소몰에 가입했으며, 농촌 콤소몰 세포의 창설을 주도하여 곧 그 조직의 책임자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그의 뛰어난 조직력과 지도력이 드러났다. 콤소몰 활동가 회의에서 수슬로프는 콤소몰의 사생활이라는 주제의 보고서를 발표했는데, 이는 참석자들의 큰 공감을 얻었고, 다른 당 청년조직들에서도 배포할 것을 권장받았다. 이 시점 이후 수슬로프 가족의 구체적인 행적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한 전언에 따르면, 1920년경 그의 가족 중 두 명의 자녀가 사망하고 1930년 아버지가 사망했다.
1921년에는 러시아 공산당(РКП)에 가입했다. 그해 가난한 노동자나 농민에게 고등 교육을 시키기 위해 기초적인 교육을 시키던 노동자 대학(Рабочий факультет)에 입학했다. 1924년 졸업하고 모스크바 국립경제연구소에 들어갔다. 젊은 시절의 적극적인 태도와 강인한 성격 덕분에 그는 일찍이 교육자로 활동할 수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이미 모스크바 기술학교에서 강의를 맡았다.
1928년 모스크바 국립경제연구소[4]를 졸업하고 1929년에 공산당 경제연구소의 대학에 입학하고 1931년에 졸업했다. 이 시기 그는 니키타 흐루쇼프와 스탈린의 아내 나데즈다 알릴루예바를 알게 되었다. 이 만남은 스탈린 산업 아카데미에서 이루어졌는데, 당시 흐루쇼프는 그곳의 당위원회 서기였다. 그러나 이때는 아직 깊은 교류가 없었고, 두 사람의 친분은 1940년대 후반에야 본격적으로 이어진다. 1931년, 수슬로프는 전연방 공산당 통제위원회와 인민검열위원회 산하 통제위원회의 위원이 되었다. 그의 임무는 당원들의 기강을 점검하고, 제명된 볼셰비키들의 재심 청구를 검토하는 일이었다. 그는 맡은 바 일을 성실히 수행했고, 1934년에는 소비에트 인민위원회 산하 당 통제위원회의 수장으로 임명되었다.
2.1. 스탈린 시대
1937년부터 그는 로스토프 주당위원회의 부서장을 맡았고, 1년 후에는 같은 위원회의 제2서기로 승진했다. 1939년에는 이미 스타브로폴 지방위원회의 제1서기가 되었다. 1939년 2월부터 1944년 11월까지 스타브로폴 지방 공산당 비서를 역임하면서 나치 독일이 로스토프를 점령한 후 북캅카스로 진격하자, 수슬로프는 이 지역의 파르티잔 운동 조직 임무를 맡았다. 동시에 그는 자캅카스 전선군 군사평의회의 일원으로도 활동했다. 스타브로폴 탈환 이후부터는 트란스캅카스전선에 배치되어 스탈린의 명령을 받고 캅카스 지역의 체첸족과 인구시족, 그 외 무슬림 소수민족을 카자흐스탄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일을 총 지휘하였고, 1944년에는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중앙위원회 사무국에서 활동하며 전후 복구 업무를 담당했고, NKVD 소속 제4 보병사단을 동원해 '숲의 형제들'이라고 불리는 리투아니아 민족주의자들을 숙청했다. 7월부터 11월 사이, 1,826명이 '숲의 형제들' 및 문서상 첩자, 파괴공작원, 협력자로 규정되어 사살되었다. 이듬해인 1945년에는, 리투아니아 NKVD가 반소비에트 혐의로 19,183명을 체포하고, 9,672명을 살해했다. 그러나 수슬로프의 판단으로는 이 정도로는 부족했다. 그는 "리투아니아 각 군마다 50~60가구씩, 산악대 두목들과 가장 악질적인 무장 범죄자들의 가족을 추방해야 한다", 그리고 "체포된 '숲의 형제들'에 대해서는 공개 재판을 실시해야 한다"고 지시했다.수슬로프에게는 리투아니아 체류를 위한 공용 아파트가 배정되었다. 그러나 그곳은 텅 비어 있었고 가구 하나 없었다. 이에 리투아니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안타나스 스니에치쿠스는 모스크바 대표에게 걸맞은 환경을 마련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지나친 열성이 문제를 일으켰다. 점령군 추종자들이 도주하면서, 공화국 곳곳에는 주인이 버리고 간 아파트와 주택이 남아 있었다. 관계자들은 그중 가장 좋은 가구들인 거의 붉은 목재로 된 고급품을 골라 수슬로프의 관사로 옮겼다.
그 결과, 모스크바로 수슬로프가 약탈 행위를 일삼고, 호화 저택을 차려 살고 있다는 고발장과 익명 편지들이 쏟아졌다. 범죄자 척결을 위해 파견된 사람이 도리어 귀족처럼 산다는 비난이었다. 결국 이 일은 스탈린의 귀에까지 들어갔고, 수슬로프와 스니에치쿠스는 모스크바로 호출되어 불려 올라갔다. 대면 보고는 극도로 불쾌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수슬로프와 스니에치쿠스는 모든 혐의를 부인했지만, 스탈린은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 나겠냐며 몰아붙였다. 스탈린은 "어떻게 당 이름이 이런 식으로 길거리마다 회자되도록 방치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이제 막 해방된 공화국에서! 그곳 사람들 대부분은 아직도 소비에트 권력에 대해 복잡한 감정을 갖고 있지 않은가?"라며 혼내자 스니에치쿠스는 수슬로프를 감싸며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렸다.
스탈린 동지, 당신과 나는 모두 차가운 감방 바닥에서 잠을 자본 적이 있습니다. 저는 단지 제 동지를, 제 당의 동지를 더 나은 환경에서 지내게 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가구는 모두 버려진 빈집에서 가져온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수슬로프 동지는 아무것도 취한 적이 없습니다. 저를 처벌하십시오.
이에 대해 스탈린은 이렇게 답했다. "불평이 하나도 없는 간부라면, 그건 일을 안 하는 사람이다. 모두에게 잘 보이려는 자는 무능하다. 하지만 불평도 제대로 된 일에 관한 것이어야지, 이런 어리석은 약탈 문제에 대한 것은 안 된다." 그렇게 스탈린은 수슬로프와 스니에치쿠스를 리투아니아로 돌려보냈다. 단, 아파트는 좀 더 소박한 데로 옮기라는 권고를 덧붙였다.
1945년, 리투아니아 주재 소련 내무인민위원부(NKVD) 및 국가보안인민위원부(NKGB) 전권대표 트카첸코는 모스크바로 베리야에게 보고서를 보냈다. 그 내용은 리투아니아 내 당과 소비에트 기관들의 활동 실태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수슬로프 동지가 리투아니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나 각종 회의에서 하는 연설은 대체로 훈계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훈계와 연설에 현지 지도자들은 이미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더는 귀 기울이지 않으며 스스로 반성하거나 결론을 내리지도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수슬로프 동지는 거의 일하지 않습니다. 중앙위원회 리투아니아 담당국이 조직된 이후, 그는 근무 시간의 절반 가까이를 모스크바에서 보냈으며, 몇몇 군(郡)을 1~2일 정도 방문한 게 전부입니다. 낮 시간에는 그를 종종 문학 작품을 읽는 모습으로 볼 수 있고, 저녁에도 (회의나 대회가 없는 날에는) 거의 근무하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수슬로프 동지는 거의 일하지 않습니다. 중앙위원회 리투아니아 담당국이 조직된 이후, 그는 근무 시간의 절반 가까이를 모스크바에서 보냈으며, 몇몇 군(郡)을 1~2일 정도 방문한 게 전부입니다. 낮 시간에는 그를 종종 문학 작품을 읽는 모습으로 볼 수 있고, 저녁에도 (회의나 대회가 없는 날에는) 거의 근무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훗날 정체기의 주요 이데올로그, 즉 브레즈네프 시대 공산당의 최고 사상가로 불린 미하일 수슬로프에 대해 이런 내용의 보고가 올라갔다는 건 아이러니하다. 당시 수슬로프는 당에 모든 힘을 바치는 근면한 일꾼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그렇다면 다른 간부들에 대해서는 뭐라고 써야 했을까? 국민들에게는 당 지도자들이 일에 몸을 태운다고 선전하면서, 실제 기록보관소와 개인 인사기록에는 이런 보고서가 쌓여 있었던 것이다. 수슬로프가 사망했을 때, 많은 리투아니아인들이 공개적으로 기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은 수슬로프의 활동에 매우 만족한 듯했다.
1946년 4월 13일에 소련 공산당 행정부 외교정책 부서의 책임자로 임명되었고, 1947년 5월 24일에 소련 공산당의 비서로 임명되었다. 1982년 1월 25일까지 그는 중앙위원회 서기로 재직했으며, 국제 공산주의 운동, 선전, 이데올로기 등의 문제를 총괄했다. 또한 1947년 9월부터 1952년 10월까지는 중앙위원회 산하 선전 선동국의 책임자로 활동했다.
1947년 6월 16일부터 6월 25일까지 소련 과학 아카데미가 교과서로 저술한 <철학사>[5]의 내용이 부적절하다는 규탄에 대해 교재를 새로 쓰기로 결정한 토론에[6] 참석했고, 그 후 1947년 9월 17일부터 게오르기 알렉산드로프[7] 후임으로 공산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장으로 임명되어 1948년 7월까지 재직하였다. 또한 과학부장 안드레이 즈다노프의 아들인 유리 주다노프가 1948년에 유전학자 트로핌 리센코를 비판한 사건에 대해 조사하는 당 특별위원회를 이끌기도 했다.
이후 '서방의 코스모폴리타니즘에 반대한다'는 명목으로 소련 내 유대인들과 친서방 성향으로 지목된 지식인들을 탄압하는 대규모의 반유대주의, 반서방, 소비에트 애국주의 캠페인을 주도했다. 1949년 7월부터 1952년 10월까지 소련 과학 아카데미 철학 연구소 소장으로 재직하였고 1949년부터 1950년까지는 프라우다 편집장도 겸임하였다. 1949년에는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공산당 정보국회의에 소련 대표로 참가, 연설에서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을 비판하는 핵심 보고를 발표했다.
1952년 10월 16일에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상임위원으로 선출됐으나 얼마 안 가 1953년에 스탈린이 죽으면서 해임되었고, 같은 해 4월 16일에 다시 임명되었다. 소련의 생물학자이자 반체제 인사인 조레스 메드베데프에 따르면 수슬로프는 스탈린 시대 후기부터 이미 유력한 차세대 당 지도자로 떠오르고 있었으며, 심지어 '공산당의 비밀 서기장'이라는 별명까지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몇 년 후, 제20차 소련 공산당 대회에서 수슬로프는 스탈린 개인숭배 시절 이데올로기 분야에서 형성된 비정상적인 상황에 대해 언급했다.
“의심의 여지 없이, 교조주의와 주석적(註釋的) 사고방식의 확산에는 개인숭배가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개인숭배의 추종자들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발전을 오직 몇몇 개인에게만 귀속시키고, 전적으로 그들에게 의존했습니다. 나머지 모든 사람들은 단지 그 개인들이 창조한 것을 습득하고 대중화하는 역할만 해야 한다는 식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 당의 집단적 사유의 역할, 형제당들이 혁명 이론 발전에 기여한 역할, 그리고 인민대중의 집단적 경험이 무시되었습니다.”
하지만 쉽게 알 수 있듯, 당의 이데올로기 지도자로서의 수슬로프는 바로 그 스탈린 시대에 길러지고 형성된 인물이었으며, 그에게는 평생 동안 교조주의의 흔적과 독자성 및 창의성을 두려워하는 태도가 남아 있었다. 그의 이데올로기 활동의 첫 단계부터 가장 큰 목표는 어떤 이데올로기적 실수도 범하지 않는 것이었다. 즉, 지도 기관의 현행 정치적 노선과 모순되지 않는 것이다. 제19차 당 대회에서 스탈린은 수슬로프를 확대된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간부회(프레지디움)의 구성원으로 포함시켰다. 그는 스탈린의 최측근 집단에 들어갔는데, 이는 신임의 표시이자 동시에 큰 위험을 내포한 일이었다.
1952년 12월, 스탈린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불만을 품고 수슬로프에게 "당신이 일하기 싫다면, 그 자리에서 물러나도 좋소." 라 말했고 이에 수슬로프는 "당이 필요하다고 여기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일하겠습니다." 라 대답했다. 스탈린은 위협적인 어조로 "두고 보지." 라고 말했다. 이 갈등은 더 이상 발전하지 않았다. 수슬로프는 중앙위원회 간부회 구성원으로 단 몇 달만 있었다. 스탈린이 사망한 직후, 간부회의 규모가 축소되면서 수슬로프는 그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서기 중 한 사람으로 남았다.
2.2. 흐루쇼프 시대
1953년 이오시프 스탈린의 사망 이후, 수슬로프는 스탈린 비판을 지지했으며, 1961년에 채택된 새로운 공산당 강령의 작성자들 중 한 명이었다. 1953년부터 1954년까지는 해외 공산당과의 연락을 담당하는 중앙위원회 부서를 이끌었다. 1954년 소련 최고회의 연방평의회 외무위원장에 임명되었다.1956년 헝가리 혁명 당시 아나스타스 미코얀, 이반 세로프, 미하일 말리닌과 함께 부다페스트에서 헝가리 지도부와 협상을 진행했으나 결렬되면서 헝가리에 소련군을 파병하기로 결정한다.
1957년 6월, 중앙위원회 프레지디움 내 게오르기 말렌코프,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라자르 카가노비치, 니콜라이 불가닌 등이 '반당 그룹'을 구성해 제1서기 니키타 흐루쇼프를 실각시키려 한 시도가 있었는데, 지극히 활기차고, 교조주의와는 거리가 멀며, 변화와 개혁을 좋아했던 흐루쇼프는 신중하고 은밀한 성격의 수슬로프와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흐루쇼프는 자신의 팀 안에서 스스로가 최고 이념가이자 외무장관이었으며, 다른 공산당 지도자들과 직접 교류했다. 그러나 그는 당 중앙위원회 산하의 수많은 이데올로기 기관들의 일상적 활동을 관리할 정치국 구성원이 필요했다. 선택은 수슬로프에게로 향했고, 1955년 그는 다시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간부회(프레지디움)의 일원이 되었다. 흐루쇼프의 여러 시도들이 수슬로프의 마음에 들었을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1950년대 초부터 그는 게오르기 말렌코프와 매우 불편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따라서 말렌코프가 권력을 회복하게 된다면, 이는 수슬로프 자신과 그가 후원하던 인물들에게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이런 이유로, 얼마 지나지 않아 당 상층부에서 흐루쇼프 진영과 이른바 반당 그룹 사이의 치열한 권력투쟁이 벌어졌을 때, 수슬로프는 흐루쇼프 편에 섰다. 같은 해 10월, 그는 중앙위원회 본회의에서 비판 연설을 하여, 당시 국방상 및 프레지디움 위원이던 게오르기 주코프를 직위에서 해임시키는 결정을 이끌었다.
1962년 11월 20일, 탄생 60주년을 맞아 소련 최고 소비에트 상임위원회에 의해 공산주의 건설에 있어 소련 공산당과 소련에 대한 공로로 사회주의노력영웅 칭호와 레닌훈장을 수여받았다.
흐루쇼프는 수슬로프와 사이가 좋지 못했고 심심하면 흐루쇼프가 수슬로프를 무례하게 대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저기, 해외에서 이렇게 쓰더군. 내 등 뒤에 늙은 스탈린주의자이자 교조주의자 수슬로프가 앉아 있고, 기회만 되면 나를 끌어내릴 것이라고. 미하일 안드레예비치, 당신 생각엔 맞게 쓰였는가?'
수슬로프는 그 자리에서 얇고 금욕적인, 병약하고 창백한 노란빛 얼굴을 아래로 떨군 채, 꼼짝도 하지 않고, 말 한마디 하지도, 눈도 들지 않았다."
표도르 불라츠키
수슬로프는 그 자리에서 얇고 금욕적인, 병약하고 창백한 노란빛 얼굴을 아래로 떨군 채, 꼼짝도 하지 않고, 말 한마디 하지도, 눈도 들지 않았다."
표도르 불라츠키
중국과의 초기 분쟁 단계에서는 논쟁이 주로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띠었는데, 바로 이때 수슬로프는 류샤오치, 덩샤오핑, 심지어 마오쩌둥까지 상대로 주요 반대자 역할을 했다. 그는 중국 공산당에 보내는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모든 서한을 교정했고, 1964년 2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는 소련-중국 간 의견차에 대한 보고를 하기도 했다.
2.3. 브레즈네프 시대
그러나 1964년 10월에는 안드로포프, 세미차스트니와 함께 흐루쇼프를 실각시키는 데 일조하였고 1967년에는 톨리야틴스크 선거구에서 러시아 SFSR 최고 소비에트의 인민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68년에는 정치국에서 프라하의 봄 진압에 찬성표를 던졌다. 1972년 11월 20일, 소련 최고 소비에트 상임위원회 법령에 의해 소련 공산당과 소비에트 연방 자체에 대한 공로로 사회주의노력영웅 칭호를 두 번째로 수여받았다.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데올로기, 문화정책, 과학, 언론, 검열 등과 관련된 사안에서 수슬로프의 의견은 정치국과 서기장 레오니드 브레즈네프에게 결정적 영향력을 지녔다. 그는 당의 최고 이데올로기로서 급격한 변화보다 현상 유지와 온건한 보수 노선 유지를 선호했다. 예를 들어, 1969년 그는 스탈린의 공식적 복권 시도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에는 스탈린을 위대한 군사전략가이자 정치가로 묘사하는 일부 출판물을 승인했다. 또한 당시 가장 진보적이었던 소련 지식인들의 의견을 담던 잡지 《노보이 미르》 편집부 해산은 사실상 그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이 시기에는 이미 인쇄된 도서조차 판매가 금지되는 일이 잦았다. 출판사 직원들이 수슬로프에게 책 발간과 관련한 수고와 비용을 언급하면, 그는 이데올로기에는 절약이 없다고 답했다.
1967년, 수슬로프는 KGB 의장 세미차스트니를 해임하도록 강력히 요구했다. 그는 셀렙인의 친밀한 친구였으며, 해임 사유는 스탈린의 딸 S. 알릴루예바가 미국으로 탈출한 사건과 KGB가 그녀를 소련으로 데려오려는 실패한 시도 때문이었다. 새 KGB 의장으로는 이전에 수슬로프 산하에서 중앙위원회 국제부서를 이끌던 유리 안드로포프가 임명되었다. 이 임명은 우연이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불라츠키는 다년간 안드로포프와 함께 일하면서 “수슬로프는 유리 안드로포프를 좋아하지 않았고 경계했다. 그는 그가 자신의 자리를 노릴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다.”고 증언했다.
1970년대 소련의 모든 이데올로기적 삶은 사실상 수슬로프와 그의 기구가 통제했다. 물론 원한다면 과학이나 문화 여러 분야에서 일부 성과를 꼽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1970년대는 진보라기보다는 퇴보의 시기였으며, 이는 상당 부분 수슬로프의 지도력에 기인한다. 1960년대는 문화, 예술, 사회과학 분야에서 많은 전망 있는 시도가 있었던 시기였지만, 대부분은 발전을 이루지 못하고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점차 소멸했다. 국가의 문화를 만드는 지식인들에게 1970년대는 매우 불리한 10년이었다. 수슬로프 자신 또한 당의 이론이나 이데올로기에 어떠한 창조적 기여도 하지 못했으며, 그의 창의적 잠재력은 놀라울 정도로 미미했다.
1972년 11월 20일, 소련 최고소비에트 상임위원회는 공산주의 건설과 70세 생일을 기념하여 미하일 안드레예비치 수슬로프에게 두 번째 낫과 망치 금메달과 레닌 훈장을 수여했다.
수슬로프는 평균 수준 이상으로 뛰어난 모든 것에 대해 불편해했다. 예를 들어, 블라디미르 코체토프의 소설 『뭘 원하는 거야?』는 수슬로프에게 매우 불쾌하게 다가갔다. 코체토프의 지나치게 노골적인 스탈린주의가 그를 충격에 빠뜨렸던 것이다. 또한 블라디미르 비소츠키의 노래, 타간카 극장의 희곡 등도 극도로 짜증나게 했다. 에두아르트 리야조노프의 영화 『차고』와 블라디미르 슈크신의 『붉은 열매』는 오랫동안 개봉이 허용되지 않았다. 리야조노프의 영화 『무에서 온 인간』의 개봉이 왜 지연되었는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단순히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으며, 영화 배급 관계자들은 주요 이데올로기 담당자를 자극하고 싶지 않아 했다고 전해진다. 수슬로프는 또한 게오르기 주코프와 아나스타스 미코얀의 회고록 출간도 막았다.
1978년에는 스타브로폴 지방당 제1서기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모스크바로 승진시켜, 농업 담당 중앙위원회 서기로 임명하는 것을 지지했다. 브레즈네프 치세 아래에서 수슬로프는 당 내부에서 이데올로기, 검열, 교육 분야를 담당하면서 흐루쇼프의 사상적 해빙 정책을 뒤집어 반체제 인사나 급진적, 진보적인 인사를 탄압하며 조용히 당 내부에서 조용히 영향력을 키워나갔고, 1979년 KGB 의장 유리 안드로포프, 외무장관 안드레이 그로미코, 국방장관 드미트리 우스티노프와 함께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밀어붙이고야 만다. 또한 주요 반체제 인사 관련 결정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추방, 안드레이 사하로프 유배, 헬싱키 그룹 활동가 체포 등 도 모두 수슬로프가 관여한 가운데 이루어졌다. 알렉산더 파데예프 암살을 공모했다는 의심도 받는다.[8]
수슬로프는 남쪽으로 휴양을 떠날 계획이었으나 1982년 1월 25일 16시 05분, 모스크바에서 뇌졸중으로 갑작스레 중태에 빠졌다가 사망했다. 수슬로프는 오래전부터 심장 질환을 앓고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건강 상태는 양호했으며, 병원에 입원한 것도 단지 정기 건강검진을 받기 위해서였다. 사망 전날 그를 병문안했던 동료들은 수슬로프가 평소와 다름없이 정상적인 상태였다고 증언했다. 사후 크렘린 벽 묘지에 안장됐으며, 장례는 국장으로 거행되었다. 그의 묘는 다른 저명한 당 간부들의 묘와 나란히 위치한다. 그는 별도의 묘소에 안장되었고, 그 위에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수슬로프의 장례식은 국영 TV를 통해 생중계되었으며, 전국적으로 3일간의 애도 기간이 선포되었다.
3. 평가
수슬로프의 소련 붕괴에 대한 기여는 과소평가 되어있으며 지나치게 편협하고 보수적인 정책으로 소련이라는 국가 자체를 불건강하게 만들었다.3.1. 과대평가 된 능력
수슬로프는 집권기 동안 소련이 비효율적인 관료제 국가가 되는 것에 큰 기여를 했다. 그의 마르크스주의 사상은 극도로 교조주의적이었다. 수슬로프는 평생 한결같이, 마치 프로그래밍된 기계처럼, 억누르고, 막고, 눌러붙이고, 해산시키는 일만 반복했다. 그리고 그의 강한 권력으로 인해 그를 제어하거나 저항할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당의 최고 이념가였던 수슬로프는 생전에 평생 단 한 권의 책도, 심지어 소책자 하나조차 직접 쓰지 않았다. 그의 연설과 논문은 모두 보좌관들이 대신 썼다. 마르크스는 체계적이고 완전한 사회 이론을 만든 학자였으며, 그것이 실현될 경우 "각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사회"가 만들어질 것이라 믿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그 사회의 구체적 모습을 상상하지 않았다. 그들은 학자이지 공상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수슬로프는 기본적으로 빈농 출신으로 빈농 위원회에서 부농의 재산을 열심히 뜯다보니 소련 공산당에 가입했다. 보상으로 그는 콤소몰의 추천을 받아 모스크바의 노동자 준비학교에 진학했고, 이후 플레하노프 명칭 모스크바 인민경제대학에 입학했으며, 졸업 후에는 공산주의 아카데미 산하 경제연구소 대학원에 진학했다.
하지만 시대가 어느때인가, 바로 지식인에 대한 대규모 숙청이 일어난 상황이고 구체제의 지식인 대부분은 망명했거나, 처형되었거나, 혹은 곧 처형될 박탈자(лишенцы) 신분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 상태의 대학에서 뭘 배우겠나? 수슬로프의 수준은 그의 학업 경력에 크게 못 미친다. 수슬로프의 행동과 사고 수준만 봐도, 당시 붉은 교수진 양성 기관들의 교육 수준이 어떤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곳에서는 사상가를 길러내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의 교리를 전파하고 보존하며 신성시하는 선전가를 양성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물론 수슬로프는 모범적인 학생이었고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의 저작을 성실히 읽었지만 그것 뿐이었다. 스스로 생각하거나 새로운 해석을 내놓는 일은 없었다. 두드러지는 개성도 없었다. 게다가 그는 비사교적이고, 냉담하며, 늘 거리를 두는 성격이었다. 그러나 그는 집에서 특별한 일을 하나 하고 있었다. 바로 레닌의 경제학 관련 발언 카드 인덱스를 만드는 일이었다. 레닌이 경제 문제에 대해 언급한 모든 문장을 기록하고, 분류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해 둔 것이다. 바로 그 카드 인덱스가 수슬로프를 최고 권력층으로 끌어올린 발판이 되었다. 어느 날 스탈린이 연설문이나 글을 쓰던 중, 그에 맞는 레닌의 인용문이 급히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스탈린 자신도, 그 주변 누구도 레닌의 저작을 충분히 숙지하지 못해 적절한 인용문을 떠올리거나 찾아낼 수 없었다. 그때 스탈린의 최측근 중 한 명이자 수슬로프와 붉은 교수진 연구소에서 함께 공부했던 레프 메흘리스가 수슬로프의 존재를 떠올렸다. 그는 곧장 수슬로프에게 달려갔고, 필요한 인용문이 즉시 제공되었다. 그가 높은 지위를 차지하게 된 것은 그 덕분이었다.
1960년대 소련은 코시긴의 개혁 덕분에 가장 성공적인 5개년 계획을 수행하고 있었다. 국민소득은 연평균 7.8% 성장했고, 생활 수준이 향상되며 임금은 오르고 인플레이션은 거의 없었다. 대규모 주택 건설이 진행되었고, 사람들은 TV, 냉장고, 세탁기, 좋은 가구와 의류, 자동차를 갖게 되었다. 전국적인 가스화 사업이 이루어졌으며, 약 1,900개의 대규모 기업이 건설되고, 톨야티의 볼가 자동차 공장이 설립되었으며, 단일 국가 전력망이 구축되고 자동화 관리 시스템이 도입되었다. 산업 생산량은 50% 증가했다. 이는 소련 역사상 최상의 시기로, 국민들은 완전히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믿지 않더라도 삶의 지속적 향상과 경제, 우주 분야의 새로운 성취를 믿을 수 있었다. 서방에서도 소련을 군사뿐 아니라 경제적 강국으로 두려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은 중단되었다. 결정적 계기는 프라하의 봄이었다. 개혁은 필연적으로 사회적 격차를 낳았다. 성과가 좋은 사람은 더 많은 보수를 받았다. 수슬로프의 가짜 마르크스주의는 목적이나 의미 없이 완전한 평등과 금욕을 요구했고, 경제 발전과 이에 따른 물질적·사회적 불평등과는 양립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보다 더 평등한 존재는 오직 당과 소련 관료뿐이었으며, 수슬로프 자신이 그 본보기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의 방식대로 따르려는 사람은 정치국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수슬로프는 고소득, 고숙련, 자기 인식이 높은 노동 계층이 나타나면 이들이 권력 속에서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요구할 것을 명확히 이해했다. 이는 당의 영향력이 줄어들고, 민주화의 위험을 의미했다. 실제로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 그래서 개혁은 중단되었고, 대신 소련은 석유 수익에 의존하게 되었다. 아무것도 바꾸지 않아도 충분히 잘 살 수 있는 상황이 조성된 것이다.
그나마 라브렌티 베리야는 국가의 첫 실패한 재건 계획을 담당하며, 스탈린이 물리학을 유해한 부르주아 사상에서 정화하고자 했을 때, 스탈린에게 “그럼 누가 폭탄을 만들겠는가?”라고 되묻는다. 당시 생물학과 유전학, 사이버네틱스 같은 부르주아 유사과학은 제거되었지만, 물리학은 손대지 않았다. 베리아는 최고의 설계자와 과학자들이 자유롭게 창조할 때만 원자폭탄을 만들 수 있음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베리아의 질문을 이해하고 물리학을 그대로 두었다. 수슬로프에게는 베리아만큼의 상식과 판단력이 부족했다. 그는 개혁을 중단하고 모든 자유로운 사고를 억압하는 것 외에는 다른 대안을 떠올리지 못했다.
수슬로프는 혁명이 언제나 혁명가에게 재산 재분배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그것은 법칙이다. 소련에서는 그 과정이 조금 늦게 나타났을 뿐이었다. 프랑스와의 차이점도 바로 그것이다. 만약 알았다면, 그는 필연적 사건을 앞서서 대응하고 재산을 재분배하여 국가 붕괴 없이 수렴의 틀 안에서 해결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사고가 필요했지만, 교조주의자 수슬로프는 무엇보다 자유로운 사고를 두려워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를 외치며 장화를 신고 코트를 입고 창문을 닫고 시속 60km로 달리며 모든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식이었다. 결국, 수슬로프보다 덜 교조적인 사람이 주요 이념가 자리에 있었다면, 우리는 아마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소련은 점점 더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사회가 되었을 것이고, 서방은 점점 더 사회주의화되었을 것이다. 물론 이는 가정법적 상상이지만, 그런 세계라면 클라우스 슈밥과 같은 인물은 등장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수슬로프의 마지막 주요 트롤링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과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중앙위원회 서기 자리로 추천한 것이었다. 당 국제 정책과 권력 서열 2인자로서 그는 안드로포프, 우스티노프, 그로미코가 밀어붙인 이 무모한 결정을 막을 수도 있었지만, 막지 않았다. 고르바초프는 단순히 아첨으로 수슬로프를 사로잡았다. 그는 스타브로폴에서 젊은 시절을 회상하던 수슬로프에게 수슬로프의 삶과 활동 박물관을 보여주었다. 수슬로프는 감동했고, 아무런 조언 없이도 고르바초프를 지지했다. 그는 정치적으로 정적인 유리 안드로포프의 사람이었지만 박물관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냥 추천해줬다.
3.2. 숙청과 학살 가담
누구를 고발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지도자가 지목한 자라면 누구든 좋다가 그의 태도였다. '좌경 맹동주의자', '우경 수정주의자', '트로츠키주의자', '트로츠키-지노비예프 블록' 등, 고발할 대상은 차고 넘쳤다. 수슬로프는 새 스탈린 체제의 인재들이 설 자리 마련을 위해, 숙청과 탄압에 적극 협력했다. 대숙청의 칼날은 최고위층까지 미치고 있었고, 누군가를 고발하고 폭로해야 했다. 수슬로프는 이런 일에 능했다. 그는 레닌의 인용문을 풍부하게 활용하며 누구든 신랄하게 비난할 줄 알았다. 1987년, 1930~40년대와 1950년대 초반의 대규모 탄압에 관한 추가 조사를 위해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산하에 설치된 위원회 자료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수슬로프는 로스토프 주 당위원회 서기로 재직하던 시절 대규모 탄압에 직접 참여하였다. 오르조니키제 지방위원회 제1서기로 승진한 후에도, 무죄한 사람들의 석방에 강하게 반대했을 뿐 아니라 새로운 체포를 요구하였다. 1939년 7월, NKVD 위원회는 베리야에게 보고하기를, 수슬로프는 지방 NKVD 기관이 안이하고 나태하다며 불만을 표했고, 직접 구체적인 체포 대상자들의 이름을 제시했다고 밝혔다. 그 결과 1939년과 1940년, 해당 지역의 탄압은 한층 강화되었다."
생애 문단에서 볼 수 있듯이 '숲의 형제들' 진압 과정에서 1,826명이 사살되고 1945년에는, 리투아니아 NKVD가 반소비에트 혐의로 19,183명을 체포하고, 9,672명을 살해했음에도 더 강경한 진압을 주장했다. 이후 수슬로프는 당 중앙위원회의 서기 중 한 명으로 승진했을 당시, 그에게 맡겨진 주요 임무는 ‘형제 공산당’들과의 관계 조율이었는데, 이는 단순한 외교가 아니라 해외 공산운동 자금 지원, 조직 관리, 인사 통제 등 매우 민감한 업무였다. 전후 유럽의 공산당들에서는 대규모 숙청이 일어났고,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항독투쟁의 영웅 10명이 교수형을 당했다. 이 모든 일에 대해 스탈린에게 분석과 권고를 제출한 인물이 바로 수슬로프였다.
하지만 그는 해외 문제만 다룬 것이 아니었다. 1946년 11월, 수슬로프는 스탈린에게 유대인 반파시스트 위원회(EAK)에 대한 고발 문서를 올렸다. 이 위원회는 전쟁 중 세계 유대인 사회의 지지를 얻기 위해 조직된 단체였지만, 전쟁 후 유대인을 좋아하지 않던 스탈린에게는 눈엣가시가 되었다. 수슬로프는 이 변화를 재빨리 감지하고 스탈린의 의중에 맞춰 행동했다. 그 결과, 1952년 여름까지 이어진 EAK 사건으로 140명이 처벌받았고, 그중 23명에 포함되는 전 외무차관 로조프스키, 정보국장 브레그만, 보트킨 병원의 주치의 시멜료비치 등이 총살형을 당했다.
1956년, 헝가리에서 반소비에트 성격의 봉기가 일어났을 때, 수슬로프는 미코얀, KGB 의장 세로프, 그리고 말리닌 육군 대장과 함께 부다페스트로 파견되어 협상에 나섰다. 그러나 협상은 실패로 끝났고, 결국 무력 진압을 결정하게 된다. 당시 미코얀은 무력 개입에 반대했지만, 헝가리에 군대를 투입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한 사람이 바로 수슬로프였다.
노보체르카스크에서 발생한 노동자 시위 진압 사건, 노동자들이 총에 맞아 학살당한 사건 또한 공식적으로는 그가 직접 관여하지 않았지만, 그 배후에 그가 있었다는 설이 많다. 그는 당시 조사위원회의 일원도 아니었고 현장에 가지도 않았지만, 그의 어두운 방식의 일 처리와 비타협적인 성향을 감안하면 그가 영향력을 행사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스탈린 사후, 베리아, 몰로토프, 흐루쇼프 등 옛 간부들과의 권력 다툼이 벌어지면서, 수슬로프 역시 한때 소련 최고회의 외사위원회 위원장이라는 별 볼일 없는 자리로 밀려났다. 하지만 그는 곧 다시 부상했다. 당연히 본인 능력은 아니고 흐루쇼프에게 줄을 선 덕분이었다. 스탈린에게 인정받았던 것과 같은 이유로, 그는 흐루쇼프에게도 마음에 들었다. 즉, 지도자의 아이디어를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언어로 포장해주는 능력 덕분이었다. 흐루쇼프는 스스로 이론가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나와 동료 벨랴코프가 밤새 흐루쇼프의 연설문을 완성해 수슬로프에게 가져갔다. 그는 우리를 긴 회의탁자에 앉히고 직접 원고를 읽기 시작했다. '여기 잘 썼군, 아주 좋아. 이 부분도 잘 됐어.' 그렇게 읽다가 한 곳에서 멈추더니 말했다. '여기엔 레닌 인용문 하나를 넣으면 좋겠네. 적당한 인용문이 필요해.'
나는 밤새워 눈이 풀린 채로 '그건 저희가 찾아보겠습니다. 인용문은 걱정 마세요' 라고 대답했다. 그때 수슬로프가 나를 날카롭게 한 번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니, 인용문은 내가 직접 고르겠소.' 그러더니 재빨리 방 구석으로 가서 레닌 인용 카드가 가득한 서랍 상자를 꺼내왔다. 그는 길고 마른 손가락으로 카드를 빠르게 넘기며, 하나씩 꺼내 읽고는 '이건 아니야' , 또 넘기고 '이것도 아니야' 하다가, 마침내 만족스럽게 한 장을 집어 들며 말했다. '그래, 바로 이거다.'"
표도르 불라츠키
나는 밤새워 눈이 풀린 채로 '그건 저희가 찾아보겠습니다. 인용문은 걱정 마세요' 라고 대답했다. 그때 수슬로프가 나를 날카롭게 한 번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니, 인용문은 내가 직접 고르겠소.' 그러더니 재빨리 방 구석으로 가서 레닌 인용 카드가 가득한 서랍 상자를 꺼내왔다. 그는 길고 마른 손가락으로 카드를 빠르게 넘기며, 하나씩 꺼내 읽고는 '이건 아니야' , 또 넘기고 '이것도 아니야' 하다가, 마침내 만족스럽게 한 장을 집어 들며 말했다. '그래, 바로 이거다.'"
표도르 불라츠키
수슬로프는 흐루쇼프 실각의 순간에도 중심에 있었다. 1964년 10월, 흐루쇼프를 모든 직위에서 해임한 중앙위원회 본회의에서 회의를 주재한 사람이 바로 수슬로프였고, 그가 작성하고 낭독한 보고서의 제목은 "니키타 세르게예비치 흐루쇼프의 잘못된 행동으로 인해 정치국 내에서 형성된 비정상적인 상황에 대하여" 였다.
3.3. 문화적 탄압
흐루쇼프 실각 이후 수슬로프는 사실상 국가의 2인자로 부상했다. 그는 중앙위원회에서 선전, 문화, 정보, 과학, 교육기관 관련 부서를 총괄했고, 두 개의 국제 부서까지 관리했다. 또한 그의 권한 아래에는 소련군과 해군의 정치총국, 교육부와 문화부, 국가텔레라디오위원회, 영화위원회, 출판위원회, 검열기관(글라블리트), 타스통신, 그리고 작가·화가·작곡가 연맹 등 모든 이념 관련 기관들이 있었다. 심지어 대중교육단체인 ‘지식협회’와 관광 관련 부문까지 그가 통제했다. 다시 말해, 소련 사회의 모든 이데올로기적 측면은 수슬로프의 손아귀에 있었다.흐루쇼프는 지식인들을 억압했지만, 그래도 일정한 한계를 지켰다. 그 시기 해빙기라 불렸던 짧은 자유의 바람이 불었고, 예술과 사상의 공간에 약간의 숨통이 트였다. 솔제니친의 작품이 출판되었고, 흐루쇼프는 말년에 그를 완전히 출판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영화계에서도 스탈린 시대의 딱딱한 교조주의가 사라지고, '카니발의 밤' 같은 밝고 유쾌한 영화뿐 아니라 '학이 날다'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아홉 날의 한 해', '병사의 발라드' 같은 예술적 성취를 이룬 영화들이 등장했다. 흐루쇼프의 사위 알렉세이 아주베이가 이끌던 신문 이즈베스티야는 국가 기관지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가장 재미있는 신문으로 평가받았고, 발행 부수가 800만 부에 달했다.
해빙기는 흐루쇼프가 물러나기 전부터 이미 서서히 얼어붙기 시작했지만, 수슬로프가 본격적으로 이를 완전히 끝장냈다. 아주베이는 소비에트 연합 잡지의 논설 부장으로 강등되었고, 그 부서에는 사실상 그 혼자뿐이었다. 이즈베스티야는 다시 지루하고 무미건조한 당 기관지로 돌아갔고, 독자들은 억지로 구독을 강요당했다. 솔제니친은 입을 막히고 반체제 인사로 몰렸으며, 원래는 체제의 적이 아니었던 수많은 지식인들도 마찬가지로 탄압당했다.
"1962년 12월, 크렘린의 모임에서 트바르돕스키가 나를 여러 예술가들과 소개하고 있을 때, 키가 크고 마른 얼굴에 지적인 인상의 남자가 다가와 내 손을 세차게 흔들며 ‘이반 데니소비치’에 감탄했다는 말을 쏟아냈다. 너무 열정적이라 나도 놀랐다. 그런데 그는 이름을 밝히지 않았고, 트바르돕스키가 나를 보며 조용히 ‘미하일 안드레예비치…’라고 일러주었다. 나는 ‘어떤 미하일 안드레예비치?’라 묻자, 트바르돕스키가 한층 더 낮은 목소리로 ‘수슬로프야’라고 했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어째서 그가 나를 이렇게 뜨겁게 반긴 걸까? 흐루쇼프도 없는데, 아부할 이유도 없는데… 혹시 진심으로 감동했단 말인가? 그가 정말 ‘자유를 꿈꾸는 정치국 인사’란 말인가?'"
솔제니친의 회고록,『송아지는 떡갈나무에 부딪쳤다』
솔제니친의 회고록,『송아지는 떡갈나무에 부딪쳤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솔제니친의 작품에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던 듯 하다.
소설가 바실리 그로스만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로스만의 대작 『인생과 운명』이 KGB에 의해 압수된 뒤, 수슬로프는 그를 불러 세 시간 넘게 대화를 나눴다. 그러나 결국 "이 책은 제가 읽지 않았습니다. 두 명의 신뢰하는 참모가 읽었으며, 두 사람 모두 출판 시 공산주의, 소비에트 권력, 국민에게 해가 된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고 말했다. 그로스만이 원고 반환을 요구하자, 수슬로프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 안 돼요. 돌려줄 수 없습니다. 다섯 권짜리 선집을 낼 테니, 그 소설은 잊으시오. 아마도 200년, 300년 후쯤이면 출판될지도 모르죠." 결국 그 다섯 권짜리 선집은 끝내 발행되지 않았고, 『인생과 운명』은 1988년이 되어서야 세상에 나왔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시대가 바뀌어 있었다. 만약 1959년에 발표되었다면 이반 데니소비치에 못지않은 충격을 주었을 텐데, 30년이 지나서야 나온 그 작품은 페레스트로이카의 수많은 폭로 중 하나로 묻혀버렸다. 그러나 수슬로프의 목표는 이미 달성된 셈이었다. 그는 예술과 사상의 흐름을 완전히 차단하고, 다시금 냉기를 국가 전역에 퍼뜨렸다.
수슬로프는 심지어 아이스하키까지 간섭했다. 1970년대 초, 캐나다 프로 선수들과의 경기가 논의될 때, 그는 강하게 반대했다. 패배를 우려했을 뿐만 아니라, 캐나다 선수들이 소련 선수들에게 이데올로기적으로 해를 끼칠까 봐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브레즈네프가 뜻을 굽히지 않아 1972년 전설적인 슈퍼시리즈가 성사될 수 있었다.
하지만 1968년 프라하의 봄 진압 이전까지 수슬로프는 절대적인 권력을 갖지 못했다. ‘인간적인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를 시도한 노력은 그의 손에서 완전히 억압되었다. 마지막 해빙기의 등불 중 하나였던 잡지 『노비 미르』는 1970년 파괴되었고, 편집진 15명이 해고되었으며, 총편집자 트바르돕스키조차 스스로 물러났고 곧 사망했다. 이 과정에서 『노비 미르』의 주요 반대자였던 『옥탸브르』와 『몰로다야 구바르디야』도 타격을 받았다. 수슬로프는 어떤 토론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반체제 인사 탄압, 시냐프스키와 다니엘 재판, 책 출판 전 단계에서의 금지, 때로는 원고 단계에서의 금지, 저자 추방과 국가 외부로의 강제 이송, 이미 인쇄된 책 수만 부 압수, 타간카 극장 탄압, 블라디미르 비소츠키의 작품과 녹음물 금지, 조국의 저명 인사 회고록 검열, 류자노프의 『차고』와 슈크신의 『붉은 열매』 상영 금지 등 모든 행위를 주도했다. 그는 이데올로기에 돈을 아끼지 않는다며, 금전 손실을 이유로 제재를 문제 삼는 재무 담당자들에게 일관되게 말했다.
수슬로프의 부하 기관들은 수슬로프식 의사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이데올로기적으로 올바르지만 너무 재능 있는 것조차 억누르려 했다. 영화계는 브레즈네프 덕분에 어느 정도 구제받았다. 브레즈네프는 영화 관람을 즐겼고, 주말마다 새 영화를 다차로 가져오도록 했으며, 일부 작품은 검열을 통과하지 못했거나 수슬로프에 의해 금지된 상태였다.
브레즈네프조차 수슬로프를 존중하고 약간 두려워했으며, 이름 대신 미하일 안드레예비치라고 불렀지만, 수슬로프는 그를 레오니드라고 불렀다. 수슬로프와 함께 일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페레스트로이카의 설계자인 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는 수슬로프를 이렇게 회고했다.
"그의 권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정치국 회의는 축제 같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수슬로프가 돌아오면, 자신 없이 결정된 모든 사항을 즉시 취소했다. 그는 비밀서기국 회의에서 완전히 독자적으로 결정했으며, 누구와 상의하지 않고 '이렇게 하겠다'고 선언했다. 어떤 교활한 자들이 브레즈네프와 합의했다고 해도 그는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협상도 했다. 다만 항상 성공적이진 않았다. 한 사례로, 그는 붉은광장 근처 구무(GUM)를 전시관으로 바꾸려 했는데, 브레즈네프가 휴가에서 돌아오자 “누가 이런 바보 같은 결정을 내렸나?”라며 문제를 일거에 종결했다.
엘다르 리아자노프는 한 번 수슬로프가 자동차 창밖으로 영화 포스터를 보고 불쾌해해, 해당 영화가 20년 넘게 상영되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3.4. 검소한 삶?
우선, 미하일 수슬로프는 어디에 살았을까? 수슬로프는 1946년 봄, 리투아니아에서 모스크바로 돌아온 후, 당 간부용 아파트로 배정받아 아르바트의 스타로코니우셰니 페레울로크 19번지에 있는 4룸짜리 아파트에 거주했다.그러나 중앙위원회 서기로 선출된 후, 그는 크렘린 근처로 더 가까이 이사하여 그라노프스키 페레울로크 3번지(현재 로마노프 페레울로크)의 5층 건물로 옮겼다. 이 건물은 한때 소련 제5위원회 건물이라고 불리다가 나중에는 원수의 집으로 알려졌다. 수슬로프는 그라노프스키에서 1969년까지 거주했다.
이후 그는 볼샤야 브론나야 거리의 새로 지어진 13층 건물로 이사했는데, 이 건물은 1968년 중앙위원회 위원들을 위해 특별히 건설된 것이었다. 건물 자체에는 특별한 건축적 특징은 없었으나, 아파트 내부의 천장은 매우 높았다. 근처에는 이미 새로 지어진 학교와 유치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건축 자재, 배관과 기타 설비들은 해외에서 수입되었다. 볼샤야 브론나야 19번지의 수슬로프 이웃으로는 유명한 원수 알렉산드르 포크리시킨, 미래의 총서기이자 당시 중앙위원회 총무부장 콘스탄틴 체르넨코, 나중에는 우크라이나 전 지도자 표트르 셀레스트가 있었다. 2012년 기자 알렉세이 보고몰로프는 브레즈네프의 전 사위 유리 추르바노프와의 대화를 인용하며, 수슬로프가 볼샤야 브론나야에서 6층 전체를 사용했다고 전했다.
아내 예리자베타 알렉산드로브나가 사망한 후, 볼샤야 브론나야 아파트에는 수슬로프와 함께 딸 가족이 계속 거주했다. 아들 레볼리 역시 가족과 함께 이미 쿤체보에 마련된 새 당 간부용 아파트에 정착했으며, 유일한 사치는 당시 KGB에서 근무하던 아들을 위해 제공된 1976년식 ‘볼가’ GAZ-24 자동차였다.
중앙위원회 정치국 구성원으로서 수슬로프는 별도의 관저도 가지고 있었으며, 대부분의 여가 시간을 그곳에서 보냈다. 가족들도 함께 거주했다. 일부 중앙위원회 직원들은 수슬로프의 모스크바 근교 별장이 사치스럽다고 회고했지만, 실제로는 다소 혼동이 있었다. 예를 들어, 블라디미르 바이코프는 1956년 헝가리 대표단을 안내하며 방문한 자레치예 별장이 외빈 접대를 위한 별장이었을 뿐, 개인용 별장은 따로 있었다고 언급했다.
1953년 봄, 수슬로프에게는 ‘자레치예-1’ 국가 별장이 배정되었다. 2층 목조 건물로 리노베이션이 되어 있었고, 부속 건물로 벽돌 채소 저장고와 당구장이 있는 차고가 있었다. 부지는 7헥타르로, 2.8m 높이의 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400그루 전나무, 40그루 과일나무, 30그루 단풍나무와 수백 그루의 산딸기 및 라즈베리 관목이 있었다. 당시 평가액은 82만 7천 루블이었다. 전국 평균 급여가 719루블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엄청난 사치다.
50년대 말, 수슬로프는 루블료프스코예 쇼세 끝자락의 소스노프카-1 국영 별장으로 옮겼다. 전 소베츠코예 포토 편집장 올가 수슬로바는 2005년, 별장이 소박한 2층 건물이었으며, 수슬로프는 2층에서 사무실과 침실만 사용하고 딸 가족도 같은 층에 거주했다고 밝혔다. 1층은 그녀와 남편이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별지 전체 면적이 11.5헥타르에 달했으며, 모스크바 강과 연결되는 전용 해변도 있었다. 메인 주택 면적은 거의 2,000㎡였고, 1934년에 지어졌으나 몇 차례 개조가 있었다. 별장 부지에는 총 7개의 부속 건물도 있었으며, 관리인과 경비원, 직원용 소형 건물도 포함되어 있었다. 수슬로프는 이 별장을 매우 사랑했고, 여름마다 이사했으며 거의 매주 주말과 겨울에도 별장에서 시간을 보냈다. 수슬로프 사후, 그의 가족들은 소스노프카-1에서 이사하도록 요청받았고, 별장은 다른 정치국 구성원 그리골리 로마노프에게 배정되었다.
흐루쇼프는 중앙위원회 정치국 구성원들을 보로뵤프스코예 쇼세로 이사시켰다. 그곳에는 최고 지도부를 위해 완전히 비밀리에 12채의 동일한 2층 저택이 건설되었다. 저택들은 대리석과 고급 원목으로 장식되었으며, 1층에는 식당과 거실이, 2층에는 침실과 서재가 있었다. 저택에는 도시 및 장거리 정부용 전화선, 일반 모스크바 전화망, 경비실과 직통 연결되는 전용 회선 등 모든 통신시설이 갖춰졌다. 저택 주변에는 산책할 수 있는 넓은 공간과 울타리 옆 아스팔트 도로가 마련되어 있었고, 높은 담장은 시민들과 소련 엘리트를 분리했다. 경비 장교가 저택 주인의 검은 리무진을 위해 정문을 열고 닫았다. 인근에는 스포츠·체육센터와 수영장이 지어져 지도부와 가족들이 건강을 유지할 수 있도록 했다.
정치국 구성원이나 중앙위원회 서기에게는 경호원, 무전기가 설치된 ZIL 차량, 그리고 2명의 요리사, 4명의 하녀, 2명의 정원사 등 관리 인력이 딸린 큰 별장이 제공됐다. 별장에는 영화관, 도서관, 테니스 코트, 사우나, 온실, 정원이 있었다. 한때 전쟁 발생 시 지도자들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별장에 방공호를 건설할 계획도 있었지만, 비용 문제로 포기되었다. 이 모든 시설 관리는 중앙위원회 관리국이 맡았다.
최고 당 지도부의 일상은 겉보기에는 평범해 보였다. 정치국 구성원이자 중앙위원회 서기였던 미하일 솔로멘체프는 인터뷰에서 “우리는 꽤 소박하게 살았다. 월급은 800루블, 관용차, 국영 별장, 치료와 휴양, 크렘린 상점 정도였다. 상점에는 몇 번만 갔고, 아내는 셔츠와 속옷을 샀다. 정장은 맞춤 제작으로 130~140루블 정도였고, 내 옷만 15벌 정도 있었다”고 회고했다. 1974년에는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월급이 500루블 인상되었고, 1978년에는 200루블 추가 인상되었다. 수슬로프도 다수의 논문집에 대한 저작권료를 받았다. 예를 들어 1972년에는 정치출판사에서 발행한 연설집에 2,592루블의 인세가 지급되었다.
그러나 돈 자체는 큰 의미가 없었다. 구매할 수 있는 물건이 거의 없었고, 필요한 것은 대부분 무상으로 제공되거나 매우 저렴했다. 중앙위원회 서기는 특수 창고에서 하루 200루블(정치국 구성원 400루블, 후보 300루블) 상당의 식품을 주문할 수 있었는데, 실제 가격은 거의 무의미할 정도로 낮았다. 의사들이 검증한 고품질 식품은 대가족을 충분히 먹일 수 있었고, 손님 접대도 가능했다.
별장은 모스크바 서쪽, 모스크바 강 인근에 위치했으며, 일반적으로 현대식 빌라였고, 소나무 숲 속 50헥타르 규모 부지에 자리했다. 별장 구내에는 온실, 가금류와 다른 동물들을 위한 울타리, 최근에는 수영장과 사우나가 추가됐다. 별장은 다층 구조로 방과 욕실이 많았으며, 대형 식당, 당구장, 영화관이 있어 40~50명의 손님을 수용할 수 있었다. 주택에는 부속 건물, 냉동고, 주방, 온수 차고가 있었다. 모스크바 근교 별장 외에도 휴양지에는 왕실 시대부터 남아있는 별장과 궁전이 있어 여름 휴양에 사용되었으며, 거의 모든 가족이 별도의 휴양 별장을 가졌고 건설은 계속되었다. 서기나 정치국 구성원이 휴가나 출장을 갈 때는 일반 항공편이 아닌 전용기를 이용했으며, 별장이나 국가 소유 거주지에서의 숙박은 무료였다. 정치국 구성원은 전용 의사가 동행했으며, 필요한 전문가도 모스크바에서 즉시 파견됐다. 브레즈네프 시절 정치국 구성원들은 수작업 ZIL-114, 중앙위원회 서기는 ZIL-117, 장관과 부서장들은 체이카 차량을 지급받았다. 가족용으로는 추가로 볼가 자동차가 제공됐다.
KGB 9국 장교들은 보호 대상과 가족의 모든 생활 문제까지 책임졌다. 공화국에서 정치국 구성원을 배출한 지역에는 전담 KGB 팀이 배치되었으며, 3명의 요원은 교대로 24시간 경호했다. 팀장은 가사와 가족 관리를 포함한 전반을 감독했다. 정치국 구성원과 서기에게는 전용 요리사가 있었으며, 매일 의사와 영양사가 확인한 메뉴가 제공됐다. 별장에서는 봉인된 용기에 음식이 배달됐다. 가족 전담 의사도 상시 배치되어 필요 시 모든 전문의를 호출할 수 있었다. 특수 진료소는 그라노프스키 거리의 구 3층 건물에 위치했으며, 구 소련 보건부 4국 소속이었다. 정치국과 가족은 특별 상점, 비밀 작업장, 배급소에서 수입품을 사실상 무제한으로 구매할 수 있었다. 흐루쇼프 시절에는 GUM에 200번 섹션이 개설되었는데, 공식적으로는 중요한 외국 공산당 인사를 위한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최고 지도부 가족들을 위한 구매처로 활용되었다. 외국에서 직접 구매해야 하는 품목도 있었다.
국가 지도자의 개인 통역사 빅토르 수호드레프에 따르면, 그로미코 부인이 미국 방문 시 가족 전체를 위해 저렴한 상품을 찾고 구매를 지시했다고 한다. 중앙위원회 서기가 해외 대표단을 이끌 때는 관리국에서 약 1,000달러의 업무비를 배정했다. 당시 특권은 현대 지도부의 호화로운 생활과 비교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당시 달러의 가치가 훨씬 높았고, 일반 시민들은 필요한 물건을 살 수 있는 기회 자체가 거의 없었다.
4. 개인적 면모와 여담
위에서 고급 별장 소유건으로 까이기는 하지만 씀씀이가 검소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힘들다. 수슬로프의 검소한 생활이 여러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증언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매우 예의 바르고 부하들과 사상적 반대자들 모두에게 친절하고 상냥하게 행동하였다. 고위층으로써 누릴 수 있는 물질적 특권이나 사치품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의 집은 다른 고위 관리들에 비해 매우 소박했고 특별한 장식이나 호화로운 가구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옷차림 역시 단순하고 투박하여 최신 유행과는 거리가 멀었다.[9] 자신의 급여 대부분을 자선활동에 사용했지만, 이에 대해 결코 떠벌리지 않았다. 이 사실이 알려진 것은 그의 사후였다. 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는 자신의 책 《기억의 소용돌이》에서 "수슬로프는 받은 선물로 부당한 이익을 챙기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보인 적이 없었다. 책이라면 저자가 보낼 수 있었지만, 그 외에는 일에서 쫓아낼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중앙위원회 직원들은 수슬로프의 개인적 검소함이 지나칠 정도였지만, 완전히 진실된 것이라고 회상했다. 출장을 갈 때 그는 식사를 계산할 때 한 코페이카까지 정확히 지불했고, 급여 일부를 평화기금과 자선활동에 기부하며, 사라토프 지역 도서관에 책을 보내기도 했다. 그의 식사 습관 역시 단순했으며, 주로 보통 음식, 죽, 건강식 수프를 섭취했다. 경호 책임자 보리스 마르티아노프는 “남쪽 지방에서는 요리가 한 달치 준비되어도 충분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크렘린 연회에서는 음식 선택이 까다로웠다. KGB 9국 직원 알렉세이 살니코프는 “수슬로프는 연회 음식에 매우 까다로웠다. 가지나 호박으로 만든 요리는 ‘진흙’이라며 아예 먹지 않았다. 항상 소시지를 준비해야 했고, 다른 사람들과 달리 거의 술을 마시지 않았다. 연회에서는 끓인 물 한 잔만 받았다”고 회고했다. 보차로프 루체 별장 관리자인 니콜라이 하리빈에 따르면, 수슬로프는 정원과 인테리어에도 까다로웠다. 나무 대신 포장된 길, 짙은 파란색 가구 등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은 직접 수정하도록 지시했다. 이후 그의 취향에 맞추기 위해 모든 인테리어 샘플을 수슬로프에게 승인받고 진행했다고 한다. 여가 시간에도 정치적 연구와 이념적 공부에 집중했고, 별다른 취미 활동을 즐기지 않았다. 진보적 지식인들은 그를 두려워했지만, 상층부에서는 그의 성격과 습관이 오히려 풍자거리였다. 칼로슈와 낡은 코트는 그의 상징이자 별명이 되었다.그는 어릴 적 폐결핵을 앓은 후 재발을 몹시 두려워했기 때문에, 추위와 습기에 민감해져 한여름에도 항상 외투, 모자, 그리고 덧신을 착용하고 다녔다. 수슬로프가 신었던 유명한 칼로슈(방수 덮개) 는 항상 발을 건조하게 유지하려는 실용적 이유에서 비롯되었다. 그의 경호 책임자였던 보리스 마르티아노프는 "그는 평상시에도 옷을 오래 입었고, 집에서는 바지와 재킷 차림이었다. 별장에 가거나 휴양지에 갈 때는 운동복을 착용했다. 늘 착용하던 두꺼운 카라쿨 코트와 전통적인 모자도 있었다. 신발은 맞춤 제작된 가죽 밑창 반부츠를 신었고, 다 닳을 때까지 사용했다. 칼로슈 역시 늘 신었다. 파트브로에서 도착하면 칼로슈를 신발장 아래에 정리해 두었고, 모두가 칼로슈가 있으면 수슬로프가 도착했다고 알았다”고 말했다. 그의 외투는 오래되어 낡았고, 이를 본 브레즈네프가 농담 삼아 우리 모두 10루블씩 걷어 새 외투 좀 사드리자고 제안했다. 이 말을 들은 수슬로프는 곧장 새 외투를 사서 갈아입었다. 그는 창문을 꼭 닫고 운전했고, 에어컨은 물론 환기도 금지했다. 운전 속도는 시속 60km를 넘지 않았다. 항상 제시간에 출퇴근해서 수슬로프를 보면 시간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출근은 8시 59분, 퇴근은 정확히 17시 01분이었다. 중앙위원회 서기로 재직하는 35년 동안 그는 이 규칙을 철저히 지켰으며, 이는 국가 역사상 누구보다도 긴 기간이었다. 해외 출장을 다녀온 후 남은 외화를 당의 금고에 반납했고, 급여의 일부는 정기적으로 소련 평화기금에 기부했다. 이 기금은 당과 특수기관이 운영하며, 해외 공산당과 친소 조직 활동을 지원하는 곳이었다. 그는 어떤 선물도 받지 않았으며, 다른 사람도 받지 못하게 했다. 담배를 피우지 않았고, 담배 연기를 참지 못했다. 브레즈네프가 그를 아이스하키 경기장에 끌고 갈 때면 휴게실의 모든 재떨이를 치워야 했고, 브레즈네프는 거의 화장실에서 몰래 담배를 피워야 했다. 술은 거의 마시지 않았고, 크렘린 연회에서는 보드카 대신 잔에 물이 따라졌다. 복잡한 요리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다른 사람들에게는 모스크바식 철갑상어 요리를 내면서도 자신에게는 소시지와 으깬 감자를 내놓았다. 출장 중 식사 비용도 항상 자신이 지불했다. 한 번 TV에서 아이스하키 경기에서 승리팀에게 TV가 수여되는 장면을 보고 분노하며 TV 공장장에게 해고를 명령하기도 했다. 그의 아파트와 별장은 모두 '중앙위원회 관리국'이라는 표식이 붙은 관용 가구로만 꾸며졌다.
수슬로프는 오랜 세월 문학과 예술 분야에도 깊이 관여했다. 중앙위원회 서기였던 그는 때때로 작가, 작곡가, 화가, 건축가 등 당시 말하는 ‘창조적 지식인’들과 직접 만났다. 때로는 이러한 만남의 상황이 꽤 재미있기도 했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자신의 책 《송아지가 참나무에 부딪쳤다》에서 1962년 12월 크렘린 회의에서 트바르도프스키가 그를 안내하며 작가, 영화인, 화가를 소개했을 때 있었던 수슬로프와의 기묘한 만남을 회상했다. 그는 키가 크고 마른, 영리한 장방형 얼굴의 남자가 다가와 강하게 손을 흔들며 “이반 데니스비치”에 대한 기쁨을 표현했다고 한다. 솔제니친은 처음에 그가 누구인지 몰랐지만, 트바르도프스키가 “미하일 안드레예비치, 수슬로프!”라고 알려주었다. 솔제니친은 왜 수슬로프가 그를 그렇게 열정적으로 맞이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는데, 당시 상황에 권력자가 없었으므로 아부 때문이 아님을 깨달았다. 수슬로프는 진정한 감정 표현이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재미있는 일화도 전해진다. 수슬로프가 크렘린 병원에서 치과 진료를 받을 때, 의사가 입을 열어 달라고 하자 그는 “그걸 어떻게 안 하고는 안 되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연구자들은 이를 수슬로프의 '입을 최대한 적게 열기'라는 신조로 해석하며, 창조적 지식인들에게도 같은 태도를 요구했다고 한다. 스포츠와의 관계도 나쁘지 않았다. 수슬로프는 때때로 배구를 했으며, 70세가 넘어서도 경기했다. 휴양지에서 그는 가족과 경호원으로 팀을 나누어 경기를 즐겼다. 그의 키는 190cm였지만, 게임 실력은 평범했고, 팀원들이 이를 보완했다. 상대팀은 수슬로프에게 일부러 패스를 잘 하지 않았다. 그는 팀이 지면 크게 속상해했고, 때로는 자신의 열정을 억제해야 했다.
수슬로프는 수영도 즐겼으나, 브레즈네프처럼 장시간 수영하지 않고 10분 정도만 물에 있었으며, 반드시 수모를 착용했다. 그는 아이스하키에도 일정한 관심을 보였는데, 이는 주로 국가의 명예와 시민들의 긍정적 분위기 조성을 위한 것이었다. 직접 루즈니키 스타디움에 자주 가지는 않았지만, 때때로 브레즈네프 및 정치국 멤버들과 함께 국내 대회나 '이즈베스티야컵' 경기를 관람했다.
나이가 들자, 젊은 시절 앓았던 결핵의 후유증에 더해 제2형 당뇨병과 동맥경화로 고생했다. 이미 1976년에 한 차례 심근경색을 겪었으며, 회복도 완전하지 않았다. 수슬로프는 의사들을 신뢰하지 않았고, 진단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크렘린 주치의 예브게니 차조프는 “그는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을 결코 인정하지 않았고, 약을 복용하려 하지 않았다. 왼팔 통증을 단순한 관절염으로 여겼지만 사실은 심각한 협심증이었다”고 회상했다. 차조프는 수슬로프에게 심장 약을 바르는 연고 형태로 몰래 투여하기도 했다.
5. 가족 관계
아내는 엘리자베타 알렉산드로브나(1903~1972)는, 치과 의사이자 의학 박사였다. 1937~1938년에는 모스크바 치과의학연구소의 소장을 지냈다. 아들 레볼리(1929~2021)는 기술과학박사이자 소장으로, KGB에서 근무했으며 1975년부터 1989년까지 중앙전자시스템연구소를 이끌었다. 딸 마야(1939~)는 역사학 박사로, 1990년대에 가족과 함께 오스트리아로 이주했다.6. 서훈 내역
- 소련 내 훈장
- 사회주의노력영웅 (1962, 1972년)
- 레닌훈장 (1940, 1952, 1962, 1971, 1972년)
- 캅카스 방위 메달 (1944년)
- 1941-1945년 위대한 조국 전쟁에서의 용감한 노동을 위한 메달 (1945)
- 1941-1945년 위대한 조국 전쟁에서 독일에 대한 승리를 위한 메달 (1945)
- CPSU 50주년 배지 (1981)
- 10월 혁명 훈장 (1977년)
- 조국전쟁훈장 1급 (1945년)[10]
- 해외
- 사회주의노력영웅 (불가리아)
-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훈장 (불가리아)
- 칼 마르크스 훈장 (동독)
- 수흐바타르 훈장 (몽골)
- 금성훈장 (베트남)
- 클레멘트 고트발트 훈장 (체코슬로바키아)
7. 매체
- Hearts of Iron IV의 모드인 The New Order: Last Days of Europe에서 코미 공화국의 마르크스-레닌주의자 정치인으로 나온다.
[1] 10월 혁명에서 따왔다.[2] 메이데이에서 따왔다.[3] 종교 단체들이 소비에트 체제에 반하는 사상을 퍼뜨릴 수 있다며 크게 반대했다.[4] 지금의 플레하노프 경제대학교.[5] 참고로 이 책은 서방 여러 나라 언어로도 번역되어 수출되었으며, 80년대 후반에 우리나라에도 중원문화사에서 번역되었다[6] #[7] Георгий Фёдорович Александров. 위에서 말한 철학사 교재의 주 편집자 중 한명이다. 저 책 저술 직후 서방 외신으로부터 소련 철학자들 중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도 받았다.[8] #[9] Carter, Paul Milton (1997). Suslov and Soviet Scientific Communism. Dissertation, Indiana University[10] 1944년 곡물 조달계획의 성공적인 이행을 공로로 수여받았다.
분류
- 울리야놉스크주 출신 인물
- 1902년 출생
- 1982년 사망
- 제2차 세계 대전/군인
- 사회주의노력영웅
- 사회주의노력영웅(불가리아)
- 카를 마르크스 훈장
- 클레멘트 고트발트 훈장
- 수흐바타르 훈장
- 크렘린 벽 묘지 안장자
- 소련 최고회의 6기 소집 위원
- 소련 최고회의 1기 연방의회 부위원
- 소련 최고회의 2기 연방의회 부위원
- 소련 최고회의 3기 연방의회 부위원
- 소련 최고회의 4기 연방의회 부위원
- 소련 최고회의 5기 연방의회 부위원
- 소련 최고회의 6기 연방의회 부위원
- 소련 최고회의 7기 연방의회 부위원
- 소련 최고회의 8기 연방의회 부위원
- 소련 최고회의 9기 연방의회 부위원
- 소련 최고회의 10기 연방의회 부위원
-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감사위원
- 소련 공산당 19기 중앙위원회 위원
- 소련 공산당 22기 중앙위원회 위원
- 소련 공산당 23기 중앙위원회 위원
- 소련 공산당 24기 중앙위원회 위원
- 소련 공산당 25기 중앙위원회 위원
- 소련 공산당 26기 정치국 위원
- 소련 공산당 26기 중앙위원회 위원
- 당뇨병으로 죽은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