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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사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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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제2대 주석
류사오치
[ruby(刘, ruby=Liú)][ruby(少, ruby=Shào)][ruby(奇, ruby=qí)](劉少奇, 유소기) | Liu Shaoqi
파일:류사오치.jpg
출생 <colbgcolor=#ffffff,#191919>1898년 11월 24일
파일:청나라 국기.svg 호남성 영향현
사망 1969년 11월 12일 (향년 70세)
파일:중국 국기.svg 중화인민공화국 허난성 카이펑시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중화인민공화국 파일:중국 국기.svg
학력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1]
직업 정치가
종교 무종교(무신론)
소속 정당
재임기간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 부주석
1949년 10월 1일 ~ 1954년 9월 27일
전국인민대표 초대 상무위원장
1954년 9월 15일 ~ 1959년 4월 28일
중화인민공화국 2대 국가주석
1959년 4월 27일 ~ 1968년 10월 31일
1. 개요2. 생애
2.1. 초기 이력2.2. 건국 이후2.3. 국가주석 시절2.4. 실각 및 사망2.5. 사후 복권
3. 가족관계4. 저서5.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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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공산주의 혁명가, 정치인. 중화인민공화국의 제2대 국가주석,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주석,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대약진 운동 이후 마오쩌둥의 노선을 비판하며 덩샤오핑과 함께 실용주의 노선을 주장했고 파탄 상태였던 중국의 경제를 급속도로 회복시켰지만 마오쩌둥으로부터 수정주의로 매도되어 숙청당했고, 문화대혁명 중에 홍위병들의 박해 속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영어 기준으로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단 2명만 Chairman(주석) 직위를 가졌는데 바로 마오쩌둥과 류사오치 뿐이다.[2]

2. 생애

2.1. 초기 이력

1898년 11월 24일 청나라 후난 성 닝샹현(현재는 닝샹시)에서 출생. 마오쩌둥의 고향인 사오산 시와 경계를 접하고 있는 바로 옆동네 출신으로 류사오치는 마오의 고향 후배 격이 된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39_Liu_Shaoqi_and_Zhou_Enlai.jpg
《1939년 중일전쟁 시절 저우언라이(오른쪽)와 함께 찍은 사진. 제2차 국공합작 시기이기 때문에 국민당 당휘가 붙은 국민혁명군 군복을 입고 있다. 》

1920년 소련으로 유학을 갔고, 1921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한다. 1922년에 귀국해서 노동운동에서 큰 활약을 했다. 마오쩌둥이 농촌지역에서 활약했던 것과 달리 류사오치는 도시지역에서 활약을 했다. 1929년 홍6군 정치위원에 임명되어 유격전을 지휘하였다.[3] 대장정 중 열린 쭌이 회의에서 마오쩌둥을 지지함으로써 마오쩌둥 지도체제가 확립되는데 큰 기여를 하였으며, 1937년 중일전쟁시절 후일 중국 인민해방군 10대 원수중 하나인 사령원 천이와 함께 신사군 내 정치위원으로 참여하여 중국 남부 지역(양쯔강 하류)에서 군공을 세운다. 이러한 활약등으로 인해 1945년 중국공산당의 5인비서 중 1명으로 뽑혔다.

1948년 5월 9일, 중공중앙과 중앙군위의 공동결정으로 화북중앙국이 수립되자 화북국 제1서기에 임명, 새로 점령한 화북 지역의 당무를 담당하였으며, 이후 중공의 지배지역이 중국 전역으로 확장되면서 필요한 행정 실무진을 류사오치의 화북국에서 보충하게 되면서 이름 뿐인 후계자에서 차차 막강한 실력자로 거듭나게 된다. 하지만 동북왕으로 불리며 화북지역에서 명성을 쌓고 있던 가오강은 류사오치가 2인자인 것에 대해 계속 불만을 품었고 이것이 가오강 사건으로 번지게 된다.

2.2. 건국 이후

파일:external/www.21ccom.net/2742_121218101514_1.jpg
《마오쩌둥(사진 가운데)과 함께》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자 중앙인민정부 부주석의 자리에 올랐으며, 1954년부터는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의 자리에 올라 마오쩌둥에 이어 2인자의 자리를 확실히 굳힌다. 1956년 9월, 8차 당대회에서 당에 부주석이 설치되자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주석에 선출되었다. 그리고 1959년, 마오쩌둥이 국가주석직에서 사임하자 류사오치는 드디어 후임 국가주석에 선출되어 국가원수인 류 주석으로 불리게 되었다.[4]

2.3. 국가주석 시절

"자본주의 시대의 착취는 봉건시대의 착취에 비해 진보적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착취하는 사람이 없는 것보다 있는 편이 낫다. 오늘날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은 자본가들이 공장 문을 열기를 고대한다. 착취를 당해야 실업을 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형편만 되면 공장을 계속 늘려나가라. 전력을 다해 회사를 잘 관리하여 더 많은 사람에게 일자리와 봉급을 주고 착취하라. 국가는 사회생산력 제고에 애쓴 공로를 잊지 않겠다."[5]
造船不如买船,买船不如租船[6]
생산보다 구매가 더 좋고, 구매보다 대여가 더 좋다!
그의 실용주의적인 경제관을 나타내주는 말로, 후일 실시되는 덩샤오핑식 개혁개방의 원조였다.

1961년, 저우언라이와 함께 고향인 호남성을 비롯하여 시골을 시찰하게 되었는데 이 때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참혹하게 파괴된 인민의 삶을 보고 대충격을 받아 마오쩌둥 노선에 반기를 들게 된다. 이때 류사오치는 고향 사람들로부터 편지를 받았는데 내용은 '우리 고향분이 국가주석이라는 높은 자리에 올랐으니 큰 영광입니다. 하지만 류 주석, 당신은 고향 사람들이 굶어 죽어간다는 걸 알고 있습니까? 배고프고 아파도 간부들에게 말하지 못합니다. 후손들이 우리 마을에서 높으신 분이 나왔는데 그 때문에 수 많은 사람이 굶어 죽었다고 말하면 안되지 않겠습니까. 고향 사람을 도와주십시오'라는 것이었다.

당초 마오쩌둥이 주도한 삼면홍기(총노선, 대약진운동, 인민공사)에 비교적 긍정적인 의견을 표했던 류사오치는 현실을 바로 보게 된 후 1962년 1월 보고에서 "천재가 3할이면 인재가 7할이다."라고 발언했다.[7]

청중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고 마오쩌둥은 그의 이런 발언에 크게 불쾌해하며 "인재란 발언이 다름아닌 참사"라고 그를 비판했다. 비록 공개석상에서 대놓고 마오쩌둥 주석의 책임을 언급했던 펑더화이 수준의 비판은 아니었지만 "마오쩌둥이 든 '열손가락 중 실수 한손가락, 성공 아홉손가락'이란 비유는 오로지 극소수 지역에서만 통한다"면서 마오쩌둥을 정면 비판했고, 정부가 인민들의 아우성을 검열하고 찍어누르고 있다고 독재까지 통으로 비판하며 고향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에게 무릎을 꿇고 사과하기까지 했다. 7월엔 마오쩌둥에게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었다. 역사가 당신과 나를 심판할 것이다! 역사책에 식인행위마저 기록될 것이다!" 라고 소리지르며 싸우기까지 했다. 이때 마오는 당신은 도대체 지금까지 뭘 했는가? 삼면홍기는 땅에 떨어졌고 이젠 토지를(자본주의 사회에서처럼 개인소유로) 재분배하겠다는 소리군. 내가 죽으면 이 나라는 어떻게 될까? 너는 왜(나의 정책을 뒤집으려는 간부들의 요구에) 버티지 못하느냐!고 말했다.

파일:external/cpc.people.com.cn/F2004071515501800000.jpg
《덩샤오핑(왼쪽)과 함께》

이후 류사오치는 국가원수인 국가주석으로서 당 서열 2위인 중국공산당 총서기[8] 덩샤오핑과 손을 잡고 시장경제정책을 도입하여 경제정책의 변경을 꾀한다. 대약진 운동의 무리한 중공업화 정책을 폐지하고 다시 농업과 경공업의 비율을 높이는 정책을 폈으며 이런 노력 덕분에 중국의 농업 생산량은 대약진 운동 이전의 수준으로 회복되었고, 경제성장률도 1963년에 10.2%의 성장률을 보인것을 시작으로 1966년까지 매년 두 자릿수 정도에 성장률을 기록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서 군권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마오쩌둥은 이런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을 수정주의자라고 주장하였고 결과적으로 이 두 세력은 대립하게 된다. 특히 1964년 10월 소련 제1서기(서기장) 흐루쇼프의 실각은 마오쩌둥에게 류사오치가 자신을 몰아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심어주었다. 원래 류사오치가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선포된 것은 류사오치가 마오쩌둥의 대단한 신임을 받는 전우였다기보단 백구파와 홍구파로 나뉜 중국공산당 내부에서 정통 프롤레타리아 혁명 노선을 타면서 도시 혁명을 주도했던 류사오치를 명목상 2인자로 삼아 당내 화합을 꾀하고 중국을 사이비 공산주의로 보는 소련의 의심을 불식시키기 위함이었다. 당연히 마오쩌둥은 류사오치에게 실권을 줄 생각은 없었으며, 당내에 강성한 홍구파 실력자들은 류사오치 따위에게 2인자를 줬다는 데에 이를 갈고 있었다. 그러나 류사오치는 중국공산당이 중국 전역을 지배하게 되는 과정에서 당 조직 문제를 담당하면서 날로 권위가 커졌고, '류 주석'으로 불리면서 또 다른 한명의 권위있는 주석이 되었다. 결국 이러한 흐름에 따라 류사오치는 마오쩌둥의 통제에서 벗어나 자율성을 확보해나가려 했다. 하지만 이 시기 마오쩌둥과 류사오치의 관계를 관찰한 마오쩌둥의 주치의 리즈수이는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이 현역에서 은퇴할 생각이 조금도 없다는 것을 간과했다는 결론[9]을 내렸고 이것이 큰 불화의 씨앗[10]이 되었다.

2.4. 실각 및 사망

파일:external/img.epochtimes.com/1309031618222436.jpg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2선으로 후퇴해야 했던 마오쩌둥은 그동안의 통제를 완화하고 현실적인 경제정책을 펼치던 류사오치를 중국흐루쇼프로 여기면서 다시금 권력의 전면에 나설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한편 경제는 회복되고 있었지만 공산당에 대한 불만과 실망감이 고조되고 공산당 내의 내분도 일어나는 등 혼란한 국내 정세 때문에 일련의 대학생들이 대자보를 붙이고 학교를 벗어나서 직접 군중집회를 여는 등 조직화된 집단행동에 나서자 류사오치는 이들을 체제불안 세력으로 간주해서 자신이 직접 관리하는 공작조를 각 학교에 파견해서 강력하게 통제했다. 당연히 대학생들은 이런 억압에 크게 반발했고,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에 대한 불만이 커져 갔다. 그리고 기회를 엿보고 있던 마오가 직접 나서서 학생들을 부추긴다. 마오는 공작조에게 핍박받던 학생운동 지도자들을 직접 접견하고, 공작조가 대중의 열정을 무시하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비판한다. 그리고 마오의 지지를 얻은 학생들은 홍위병을 자처하면서 폭주한다. 바로 문화대혁명의 시작이다.

1965년 해서파관 사건을 시작으로 류사오치를 당내에 숨은 주자파로 지목하는 비판이 슬금슬금 기어나오더니, 1966년 중국 대학생에 의한 문화대혁명이 발생하자 류사오치 역시 홍위병의 표적이 되어 비판을 받게 되었고, 덩샤오핑과 함께 자아비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공산당 제8기 중앙위원회 제11차 전원회의에서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으로 재선되긴 했으나 당 서열 2위에서 8위로 추락하였으며, 당 부주석에서 해임되어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10월부터 홍위병들은 류사오치를 중국의 흐루쇼프로 몰아댔고 12월 18일 장춘차오가 칭화 대학의 조반파 우두머리 콰이다푸를 만나 류사오치를 물에 빠진 개로 표현하며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홍위병들은 류사오치를 매섭게 공격했고, 국가주석인 그는 아내와 함께 홍위병들에게 참혹하게 구타당하고 제트기 자세로 고문당했다. 1967년 1월 13일 류사오치는 가족들과 함께 옌안이나 고향으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살게 해달라고 요청했으나, 마오쩌둥은 거절했다. 결국 1968년 10월 31일 결국 국가주석직에서 물려나게 되고 당에서 제명당하게 된다. 이후 베이징에서 가택연금 상태에 놓여져 있었는데 1969년 7월 18일 홍위병이 그의 저택을 습격, 2시간 동안이나 폭행, 폭언을 당했다. 비탄에 젖은 류사오치는 건강이 심각하게 악화되어 혈압이 260까지 치솟았고 혈당 수치 상승으로 고통받았다. 거기에 폐렴이 겹쳤으나 전혀 치료를 받지 못했다.

1969년 10월 중순 류웨이황이란 가명을 쓰고 허난성 카이펑으로 이송되었으나 그곳에서도 가구 하나 없는 방에 방치되었고, 불과 한 달 후인 1969년 11월 12일 오전 6시 45분에 사망했다. 구급차는 그가 죽고 2시간 후에나 왔고 의사는 사망 증명서에 무직인 남성이 질병으로 사망했다고 기록했다. 시체는 빠르게 소각되었다.

2.5. 사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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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이 죽고 4년이 지난 후인 1980년 복권되었으며, 1981년 무죄가 인정되었다. 그리고 1987년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주더와 함께 중국 건국의 아버지 4인으로 뽑혀서 지폐에 초상이 실렸다. 그리고 경제 정책은 류사오치의 것이 전면 채택되어 마오쩌둥 노선은 폐기됨으로써 류사오치가 최종 승자가 되었다.

2019년 3월부터 중국 CCTV에선 46부작 드라마《공산당인 류사오치(共产党人刘少奇)》가 방영되었다. 류위안이 <38선> 등 드라마 제작에 적극 관여하는 것을 고려하면 사실상 문화적 복권이 이뤄진 셈이다.

하지만 연도별 류사오치의 모습을 그려내는 인트로가 인상적인 작품이지만, 류사오치의 가장 처참한 몰락은 일절 그리지 않고 있다. 1편에서 1961년 고향에 돌아온 류사오치 주석이 고향 사람들의 환대를 받는 인트로에서 1906년으로 돌아가서는, 그대로 1948년 중공 설립 직전까지의 모습에서 갑자기 엔딩을 맺기 때문. 가장 찬란한 순간만을 그려내는 대신 껄끄러운 대목을 모두 삭제했다는 것에서 여전히 중국 사회에서 '문혁'이 금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3. 가족관계

결혼을 총 6번이나 하여 9명의 자녀를 얻었다.
  • 첫째 부인: 저우(周)씨, 이름은 불명. 고향 이웃마을 처녀로 집안에서 중매결혼을 시켰으나 정을 붙이지 못하고 이내 헤어졌다. 조혼을 강요당했던 마오쩌둥을 포함하여 20세기 지식인들 사이에서 흔히 있던 현상.
  • 둘째 부인: 허바오전(何葆贞, 1902~1934). 1922년에 결혼했으나, 국민당 정부에 의해 투옥되어 1934년에 옥사했다. 장남 류윈빈(刘允斌, 1924~1967), 차남 류윈뤄(刘允若, 1930~1977), 장녀 류아이친(刘爱琴, 1928~2020)을 낳았다.
  • 셋째 부인: 시에페이(谢飞, 1913~2013). 류사오치의 비서였다. 자식은 없다.
  • 넷째 부인: 왕치엔(王前). 신사군의 간호사 출신이었다. 아들 류윈젠(刘允真→刘丁으로 개명, 1946~2019), 딸 류타오(刘涛, 1944~)를 낳았다.
  • 다섯째 부인: 왕지엔(王健). 주더의 소개로 만나 결혼했지만 건강이 나빠서 오래 함께하지는 못했다. 자식도 없다.
  • 여섯째 부인: 왕광메이(王光美, 1921~2006). 본래 물리학도였으나 중국 공산당의 영어 통역원으로 활동하다가 1948년 류사오치와 결혼했다. 23살 연하로 가장 부부간에 금슬이 좋았고 여생을 함께한 실질적인 부인이다. 아들 류위안(刘源, 1951~) 딸 류핑핑(劉平平, 1949~2009), 류팅(刘亭, 1952~), 류샤오샤오(刘潇潇, 1960~)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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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사오치가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원수국가주석 직위에 오르자 그녀도 퍼스트 레이디 자격으로 외교 일정을 같이 참여하였는데 그동안 공산국가 외교에서 자주 볼 수없는 남편을 도와 외교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두고 서방 세계에선 '치파오 외교'로 불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왕광메이 역시 남편과 함께 문화대혁명 때 커다란 고초를 겪어야 했는데 여기엔 마오쩌둥의 아내인 장칭의 개인적인 질투도 한몫 했다는 평가가 강하다. 왕광메이가 당했던 수모 중 유명한 사례가 바로 '탁구공 목걸이'. 왕광메이가 류사오치와 함께 버마를 순방할 당시, 하얀 치파오와 당시 버마의 권력자인 네윈이 선물한 버마산 루비 목걸이를 착용한 왕광메이의 모습에 대해 외신들이 큰 관심을 가진 적이 있었다. 장칭은 이를 '부르주아적 패션'으로 트집을 잡았고, 홍위병들은 이를 빌미로 삼아 왕광메이에게 치파오와 하이힐, 그리고 탁구공으로 만든 목걸이를 걸게 한 뒤 맹렬하게 비난을 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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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광메이는 12년 동안 옥살이를 하다가 4인방이 숙청 당한 이후 복권되었다. 이후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및 상무위원회 위원직을 맡았으나 현실 정치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았고 사회 봉사 활동 등에 힘쓰다가 2006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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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사오치와 왕광메이 사이에는 1남 3녀의 자식이 있다. 두 사람 사이의 유일한 아들이었던 류위안(刘源. 사진 위에서 왕광메이의 영정 사진을 들고 있는 인물)은 문혁 당시 고초를 겪은 뒤에 복권되어 순조로운 경력을 쌓아왔다. 1980~90년대에는 허난성에서 장을 거쳐 정저우시 부시장, 허난성 부성장 등을 역임했고, 이후 양상쿤의 배려로 무장경찰로 넘어가 무경총부 부정치위원(중장 계급)까지 지냈으며, 2005년에는 인민해방군으로 전속되어 군사과학원 정치위원(2005~2011), 총후근부 정치위원(2011~2015)을 지내며 사실상 최고 계급인 상장까지 올랐다. 이처럼 지방행정, 경찰, 군을 자유롭게 오고 간 이력은 태자당 출신의 막강한 배경이 있기 때문이며, 역시 부친 때문에 문혁 시기에 큰 수난을 당한 시진핑과 각별한 사이라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특히 그는 총후근부 정치위원 취임 이후 군부 내 반부패 정풍 운동을 주도, 전 총후근부 부부장이던 구쥔산(谷俊山) 중장의 비리[11]를 파헤쳐 몰락시켰다. 구쥔산 중장의 뒤를 봐주던 중앙군위 부주석 쉬차이허우(徐才厚)까지 내쫓길 정도였다. 이는 최고권력자 시진핑의 지원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때문에 한때 중국 군부의 최고 실세라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2015년 12월에 인민해방군에서 퇴역하였다. 명목상 이유는 65세의 나이로 상장 계급상의 정년에 해당하고, 현재 추진되고 있는 중국의 병력 축소 및 조직개편에 따른 것이라고 하지만, 류위안을 주축으로 하는 인민해방군 내 반부패 운동에 대한 군부 일각의 반발 때문이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이후에는 전국인민대표대회 재정경제위원회 부주임위원 직을 맡고 있다.

류위안을 포함해 류사오치의 자녀들도 문화대혁명 때 수모를 당해야 했다. 딸인 류아이친은 네이멍구 자치구에서 근무하다가 홍위병에게 폭행당해서 허리를 크게 다쳤다. 류사오치가 왕광메이와 결혼하기 전 허바오전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들인 류윈빈과 류윈뤄 역시 홍위병에게 폭행당한 뒤 수감되었다가 류윈빈은 1967년에 자살했으며, 류윈뤄는 병으로 인해 출소했다가 1977년에 병사했다. 게다가 이 자식들은 모두 홍위병들이 자신의 부모를 모욕하고 폭행하는 것을 보도록 강요받은 것은 물론이고 자식들 스스로도 부모들을 모욕하도록 강요당했다.

이 중 류윈뤄는 다른 이유로도 박해를 받았다. 류윈뤄는 소련에 유학하면서 현지의 소련 여성과 연애를 했었다. 하지만 당시 중국과 소련의 관계는 썩 좋지 않았고, 류사오치는 아들의 연애가 자칫 외교 관계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래서 류사오치는 류윈뤄에게 중국 여성과 결혼할 것을 권고하며 여러 여자들을 소개해 줬다. 그러나 류윈뤄와 딱히 맺어진 여성은 없었고 계속해서 편지로 소련 여성과 연애를 했다. 여기까지는 류사오치 집안의 가족 문제일 뿐인데, 장칭과 홍위병들은 이를 꼬투리 잡아서 류사오치와 류윈뤄가 소련에게 국가 기밀을 누설한 간첩이라고 누명을 씌웠다. 류사오치와 류윈러는 편지를 보내면서 항상 다른 당 간부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사실과 편지의 내용을 신고했으며 소련 간첩이란 혐의는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했으나 당연히 먹히지 않았다. 또한 류사오치가 류윈러에게 소개해 준 여성 중 한명은 홍위병에게 폭행당해서 평생 반신불수 신세가 되었다.

4. 저서

5. 참고문헌

  • 로더릭 맥파커 외, 중국 현대정치사 : 건국에서 세계화의 수용까지 1949~2009(서울: 푸른길, 2012)
  • 모리스 마이스너,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1(서울: 이산, 2004)
  • 모리스 마이스너,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2(서울: 이산, 2004)
  • 바르바라 바르누앙, 위창건, 저우언라이 : 평전(서울: 베리타스북스, 2007)
  • 산케이신문 특별취재반, 모택동 비록 上(서울: 문학사상사, 2001)
  • 산케이신문 특별취재반, 모택동 비록 下(서울: 문학사상사, 2001)
  • 신승하, 中國當代 40年史 : 1949 - 1989(서울: 고려원, 1993)
  • 신승하, 중화민국과 공산혁명(서울: 대명출판사, 2001)
  • 알렉산더 판초프, 스티븐 레빈, 마오쩌둥 평전(서울: 민음사, 2017)
  • 에즈라 보걸, 덩샤오핑 평전 : 현대 중국의 건설자(서울: 민음사, 2014)
  • 장옥법, 중국현대정치사론(서울: 고려원, 1991)
  • 조영남,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 1 , 1976-1982 : 개혁과 개방(서울: 민음사, 2016)
  • 중국공산당중앙당사연구실, 중국 공산당 역사 2권 하(서울: 서교출판사, 2014)
  • 프랑크 디쾨터, 마오의 대기근 : 중국 참극의 역사 1958~1962(파주: 열린책들, 2017)
  • 프랑크 디쾨터, 문화 대혁명 : 중국 인민의 역사 1962~1976(파주: 열린책들, 2017)
  • 프랑크 디쾨터, 해방의 비극 : 중국 혁명의 역사 1945~1957(파쥐: 열린책들, 2016)
  • 현이섭, 중국지 : 마오쩌둥과 중국 혁명 평석 下, 대란대치편(서울: 인물과사상사, 2017)

[1] 소련이 아시아 지역의 공산주의 혁명가를 양성하기 위해서 설치한 교육기관. 1920~30년대 덩샤오핑, 류사오치, 호치민, 주세죽, 조봉암 등 중국, 베트남, 조선의 수많은 공산주의자들이 이곳에서 공부했다. 1938년에 폐지되었다.[2] 마오쩌둥 사후 중국의 주석은 영어로 President로 표기된다. 권한대행까지 포함하면 둥비우까지 총 3명이다.[3] 이때 휘하의 정치부 주임이 마오쩌둥의 동생인 마오쩌탄이었다.[4] 당시 마오의 사임을 대약진 운동 실패에 따른 권력 약화로 해석하는 시각도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오히려 마오쩌둥은 류사오치가 자신의 충실한 후계자라고 믿었기 때문에 안심하고 퇴진해서 막후 상왕 노릇을 즐기려 한것이다. 실제로 마오가 주석직을 떠난 1959년은 루산회의에서 마오가 대약진을 비판하는 펑더화이를 압박해 숙청하고 오히려 대약진을 더욱 강행시키는 상황이지 대약진에 대한 공개비판론 따윈 없던 상황이다. 허룽 등 일부 원수들도 인민들이 열심히 일하는데 왜 인민들 기를 죽이냐고 마오의 편에 서던 상황이고 마오는 너무 조리돌림당한 펑더화이가 자살하지 않을지 염려하던 판이다. 마오가 대약진의 책임을 진 것은 1961년의 자아비판이며, 그나마도 공산당은 밑에 놈들이 못한것으로 돌리고 마오의 책임은 경감시켜줬다. 하지만 1년 후인 1962년 7천인 대회 종료되고 대약진운동 실패가 더욱 명확해진다. 이로인해 마오쩌둥의 실무 영향력이 줄어들기 시작하고 이 둘의 관계가 급격하게 바뀌게 된다.[5]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승기를 잡고서 대세를 굳혀가던 1949년 5월, 톈진 기업인들과의 좌담회에서 해외망명을 검토하는 기업인들을 회유하고자 남긴 발언. 일명 '착취유공론'(搾取有功論).[6] 직역하면 배를 만드는 것은 사는 것보다 못하고, 배를 사는 것은 빌리는 것보다 못하다. 정도 되겠다.[7] 당시 마오쩌둥을 비롯한 대약진운동 옹호세력은 대약진의 실패를 단순히 기근을 비롯한 자연재해가 겹친 불운 정도로 치부하려 했다. 하지만 류사오치의 발언은 대약진운동이 처음부터 잘못된 계획이었고, 따라서 그러한 계획을 세운 사람들(마오쩌둥 포함)에게 더욱 큰 책임이 있음을 분명히 했다는 의미를 갖는다.[8] 당시 중국 지도자들 중에서 당-군-정 모두에서 덩샤오핑보다 더 강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은 마오쩌둥 단 한 명이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특정 분야에서의 영향력만을 가졌을 뿐이었다. 상무위원단 내 서열과 명망에서 보다 앞서는 류사오치가 국가주석으로서 명목상 서열 2위로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간주됐고, 당 주석인 마오와 총서기인 덩샤오핑 사이에는 부주석인 류사오치, 저우언라이, 주더, 천윈 그리고 루산회의 이후로는 린뱌오 등 6인의 부주석이 존재했으나 당이 모든 분야를 지도하는 중국에서 마오쩌둥을 대리해 당을 총괄한 덩샤오핑의 실제 위상은 류사오치, 저우언라이와 대등했다고 간주해도 무방하다.[9] 물론 마오쩌둥은 류사오치 견제 조치를 이전에도 계속 취했다.[10] 그러나 류사오치는 마오쩌둥 개인 숭배를 적극 주장하며 불을 지폈던 사람이고, 대약진 시절에도 아직도 남아 있는 국민당 반동 세력을 철저히 제거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평가하기도 했고, 사회주의 교육 운동을 지휘할 때는 많은 억울한 피해자를 낳았다. 아이러니 한 것은 그로부터 몇 년 후 본인이 당에 숨어 있던 국민당의 스파이로 간주되어 제명되었다는 것.[11] 한화로 무려 6조 원 가까운 돈을 축재했다고 한다. 때문에 사형을 선고받아도 할 말이 없었으나 무기징역+가산몰수형에 그쳤다.[12] 원제는 공산당원의 수양을 논한다(论共产党员的修养)이지만 한국에서는 해당 제목으로 번역 출판되었다.[13] 인도 지역의 공산당 운동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