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5-28 18:05:17

라몬 막사이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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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món Magsaysay

1907년 8월 31일 ~ 1957년 3월 17일

1. 개요2. 생애3. 평가4. 기타

1. 개요

Ramón del Fierro Magsaysay

필리핀의 영웅.

필리핀의 제7대 대통령이자 사실상 (완전 독립 이후인 제3공화국부터 치면) 제3대 대통령. 재임 1953년 12월 30일 - 1957년 3월 17일. 청백리로 유명하다.

2. 생애

1907년 루손섬 리바의 유복한 가톨릭 가정에서 6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순혈 말레이인 출신으로서는 극히 드문[1][2] 중류층(아버지가 기술학교 교사)이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1913년 미국인 교장과의 갈등[3]으로 실직한 후로는 어려운 시절을 보내며 고학으로 야간대학을 졸업했다[4]. 1933년에도 버스정비사로 일했으며, 이때 만난 루즈 반존과 결혼했다. 이후 부지런함을 인정받아서 마닐라 운송회사의 총지배인으로도 있었다.

태평양 전쟁 때는 1942년부터 항일 유격대로 활동하기도 했었다.

고향인 삼발레스 주의 군정 장관으로 임명되었다가 1946년에 부인의 소개로 정치에 입문해 필리핀 자유당 하원의원, 1950년에는 국방장관이 됐다.

당시 항일 유격대 중 공산주의를 추종했던 '후크발라하프' 그룹(이른바 '후크단')의 토벌 등 우익적인 행보를 이어가며 정부의 정화에 힘썼다[5]. 무엇보다 공산주의 세력의 기반이 될 수 있는 민심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기에 실제로 큰 성공을 거둬냈다. 이때의 별명이 '태평양아이젠하워'. 후크단 지도자 L. 타루크(루이스 타룩)까지 투항시켰을 정도로 유화책에도 놀라운 수완을 보여주었다. 그야말로 당근과 채찍. 기동성과 유연성을 중시한 것도 특징. 하지만 이런 개혁정책으로 견제를 받아 해임되었으며 그 해 선거에 나갔다.

1953년의 대선에서는 국민회의당(Nacionalista Party) 후보로 출마하여, 내가 먹기 전에 국민이 먹어야 한다며 자신의 아버지라도 부정을 저지르면 법대로 하겠다는 유세로 화제를 모았다. 결국 선거에서 현직 대통령인 엘피디오 키리노를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돼 그 이후로 복지 정책에 노력하였다. 대외적으로는 미국의 안보 정책에 협력하였다.[6] 1954년마닐라에서 창설된 동남아시아 조약기구(SEATO)에 가입하였다.

그러나 불과 4년만인 1957년 재선 운동을 위한 지역 순방을 마치고 세부에서 돌아오는 중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하였다.[7][8] 부통령인 카를로스 P. 가르시아가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하지만 가르시아 역시 막사이사이 사후에 일어난 정국 혼란을 수습하지 못 했고 가르시아와 마카파갈 등 그의 뒤를 이은 후임 대통령들 모두가 연임에 실패하고 이후 마르코스 독재 정권이 들어서면서 필리핀은 발전 가능성을 모두 잃어버린 채 동남아시아의 희망 없는 후진국으로 추락해버린다.

3. 평가

그의 노력으로 당시 필리핀은 그럭저럭 안정되고 평화로운 시대를 누릴 수 있었다.

필리핀에서 국부로 추앙받지만 위에 나온 우익적 행보로 인하여 토지개혁을 요구하던 민중들에 대한 억누르기로 극과 극 반응을 보이고 있다[9][10]. 물론 현실적 어려움도 있었다. 높은 국민적 지지에도 불구하고 상류층으로 구성된 상, 하원은 그의 정책(특히 토지 개혁)에 협조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막사이사이는 장점이 더 많은 정치인이었다. 개인적으로 무척 검소했으며, 청년 시절에는 구두가 닳는 것을 아까워 하여 종이로 신발 깔창을 만들어 신고 다녔을 정도이다. 게다가 가족이나 친척에 대한 비리도 일절 봐주지 않는 청렴한 인물이었다[11]. 또한 부인이 영부인이 된 뒤에 필리핀 내의 지주, 대기업 총수 및 유력 정치인의 부인들과의 커넥션을 만들려고 그들을 대통령 관저에 초청했는데, 막사이사이가 이에 노발대발하며 이들을 모조리 내쫓은 일도 있었다[12]. 정치인의 청렴함은 국가의 발전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친다. 막사이사이는 사망 당시 50살에 불과했을 뿐더러, 재선이 가능한 상태였다. 필리핀의 정치적 혼란의 시작은 막사이사이의 죽음과 뒤이은 대통령들의 연이은 재선 실패에서 비롯되는 측면도 있다. 물론,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막사이사이와 같은 청렴한 인물이 정상적으로 집권에 성공하고 그 뒤에도 '국가의 큰 어른'인 전직 대통령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했다면 적어도 국가 청렴도라는 측면에서는 매우 긍정적인 기여가 있었을 것이다.

4. 기타

막사이사이의 아시아 평화 정책을 기리는 의미로, 록펠러 재단의 지원을 받아 설립한 막사이사이상이 제정되어 있다. 한때는 "아시아의 노벨상"이라고 불렸을 정도로 아시아 지역에서는 권위있는 상이었다. 대한민국 국민 중 수상자는 장준하, 김활란[13], 김용기, 이태영, 장기려, 엄대섭, 제정구, 정일우, 김임순[14], 오웅진, 법륜, 윤혜란, 박원순, 김선태 목사[15] 등.

그의 이름을 놓고 한국에서는 "막 사이사이로 가는 사람."이라는 공대개그가 있다. 생2 세포 호흡 파트의 산화적 인산화 과정을 공부하는 학생들도 이따금씩 들어봤을 법한 드립이다. 왜냐하면 H+(수소 이온)가 미토콘드리아 내막에서부터 막 사이사이 공간으로 능동수송에 의해 이동하기 때문(...)

그의 아들 라몬 막사이사이 2세와 형제 제나로, 삼촌 비센테, 종손 조셉 또한 정치가로 유명하다.


[1] 필리핀 상류층은 대부분 스페인계 혼혈인이었다.[2] 다만 어머니 쪽으로 스페인계 혈통이 약간 섞였다. 그러나 막사이사이 본인이 순혈 말레이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용모를 가지고 태어났던 관계로, 막사이사이 가문은 사실상 순혈계통으로 취급되었다.[3] 교장이 낙제점을 기록한 자기 아들을 유급시키지 않는 조건으로 좋은 자리를 주겠다고 제안했는데, 막사이사이의 아버지가 이 제안을 씹고 교장의 아들을 유급처리해버렸다. 그 일로 인해 막사이사이의 아버지는 교사직에서 해고당했다. 막사이사이는 이렇게 일평생을 청렴하고 강직하게 살았던 아버지에게 막대한 영향을 받아서 뒷날 정치인이 되었을 때도 그는 청백리로서 자신의 신념을 지키면서 살았다.[4]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서 도로 공사장의 인부로 뛰었는가 하면, 아버지가 목공소를 겸한 수제 도구 공장을 열자, 아버지의 공장에서 제작한 제품을 발주처에 전달하는 일도 한 적이 있었다. 거기에 물소를 키우는 축산업자 노릇을 하거나, 전술한 아버지의 공장에 공급할 을 굽는 일까지 하는 등, 안 해본 일이 없었다. 본격 맥가이버 대통령 필리핀김병만[5] 다만 아래 각주를 보면 알겠지만, 막사이사이는 우익이 아니다.[6] 그는 키리노가 부패하여 공산주의가 자랄 토양을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를 후보로 삼아주겠다던 자유당의 제의도 거부했고 자유당을 탈당해 선거를 치렀다.) 일본 하토야마 이치로 총리와 국교회복 조약인 네리-타카자키 협약을 맺은 것도 임기 중.[7] 비행기 사고의 원인이 비행기뇌물을 많이 실어서 이륙중량 초과가 되어서였다는 소문이 있다. 하지만 추락 시점이 이륙 직후가 아니라 6천피트 상공 순항 중이었던 점을 볼때 반대파의 흑색선전으로 생각된다.[8] 여담으로, 사고 직전에 비행기에 오르려는 남편에게 영부인이 비행기 대신 배를 타고 오라고 조언하자, "나는 놀러가는 게 아니라, 공무집행 중이오. 그렇게 한가하게 놀다 올 시간이 없어요."라고 말하고는 기어이 비행기에 오르고 말았다. 사고가 있기 1년 전에도 자칭 예언자라는 사람이 "조만간 대통령님의 신변에 이상이 생길 것이오."라고 말한 바 있는데, 막사이사이 본인이 이를 혹세무민한 자의 개소리라고 여겨 씹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다음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9] 다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념적 견해에서 나온 것. 민중을 억압했으면 야당인 그가 당선될 가능성도 별로 없었다. 미국과 함께 위로부터의 토지개혁을 추진한 자체가 성공 여부와는 별도로 평가받을 만한 일.[10] 당시의 아시아권 국가에서는 공산주의를 지지하면 좌파, 반대하면 우파라는 식의 이분법적인 사고가 팽배했고, 그래서 오늘날에는 좌파 사회민주주의로 분류됐을 사람들의 상당수가 우익으로 분류되곤 했다. 막사이사이도 이런 케이스로, 진짜 우익이었다면 행할 리 없는 토지 개혁이나, 복지정책을 벌였다는 점에서 그가 우익이라고 보긴 힘들다. 몰라서 그렇지, 반공주의 성향의 좌파도 분명히 있는데, 멀리 갈 것도 없이 한국 운동권 중에서 PD계열이 바로 공산주의를 회의적으로 보는 좌파이다.[11] 키리노 대통령의 재임 시절에 막사이사이의 삼촌이 국영 시멘트 회사의 사장직에 임명된 일이 있었는데, 막사이사이가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나서 사장으로 내정된 과정이 수상쩍다는 이유를 들어서 삼촌을 모가지해버렸다. 대통령의 친척이 공직에 있으면 필연적으로 부정부패로 이어진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역시 마르코스와 굉장히 대비되는 면모라 할 수가 있다. 그리고 이런 그의 강직하고 청렴한 모습 자체가 그의 아버지에게서 유래했을 만큼, 막사이사이 가 자체가 부정부패와는 담을 쌓고 산 집안이기도 하다. 이 점도 오늘날까지 권력과 부를 탐하다가 이멜다 마르코스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에 의해 코로 바나나를 먹을 정도로 부패에 찌들은 마르코스 가와 대비되는 면모다. 그야말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안티테제.[12] 위의 각주에서 제기된 그의 죽음의 원인이 된 비행기 사고에 대한 음모론이 개소리 취급받는 이유 중의 하나가 이것이다. 가족들의 부정부패를 지극히 경멸했던 사람 본인이 직접 뇌물을 돌리러 다녔다는게 말이 되지 않는다. 되려 뇌물이 안 통하는 강직한 인물이라는 점때문에 지주들과 결탁한 부패한 정치인들의 훼방때문에 그의 개혁이 지지부진해지기도 했다.[13] 교육부문의 상을 받았는데, YWCA와 각종 감리회 계열 학교 이사장으로서 받은 것이다.[14] 거제 애광원 설립자이자 원장으로 52년 원아원으로 건립 이후 지금까지도 원장을 지키고 있다. 73년에 애광원으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90이 넘어간 나이에도 정정하시고 있다.[15] 시각장애인이자 실로암안과병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