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25 02:33:32

신경제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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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문제점

1. 개요

Социализм бедняков — это паршивый социализм. (가난한 사회주의는 후진 사회주의다.)
니콜라이 부하린

Новая Экономическая Политика(New Economic Policy)

러시아 내전 말기인 1921년 블라디미르 레닌에 의해 시행된 소련의 경제정책. 시장경제의 부분적인 허용을 골자로 한다.

2. 상세

보통 '신경제정책'으로 번역되지만 '새로운 경제정책'이라는 일반용어로 오해를 살 여지가 있는 만큼[1] 보통 소련의 것을 가리킬 때는 명확하게 NEP 또는 네프라고 표기한다.

시장경제의 부분적 재도입을 특징으로 한다. 볼셰비키 혁명 후 토지개혁을 단행했지만 소비에트 정부가 사유재산을 불허함에 따라 자신의 농토를 국가에 다시 빼앗기는 꼴이되면서 농민들의 저항이 엄청났고 지나치게 낙관적인 전망에 따라 통화가치를 의도적으로 떨어트렸는데 오히려 생필품 구매에 불편함만 주는 결과를 낳았으며 이 때문에 곡물 생산량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내전까지 겹치면서 소련의 산업기반이 파괴된 데다 설상가상으로 1921년에 들어닥친 기록적인 가뭄까지 겹쳐 대기근[2]이 닥쳐왔고 장티푸스, 콜레라 같은 전염병까지 나돌면서 약 500만명 가량이 죽어나갔다. 러시아 내전이 끝나갈 무렵인 1921년 3월엔 비볼셰비키 좌파 봉기인 크론슈타트 반란도 일어났다. 내전에서 어렵게 승리한 볼셰비키였지만 이러한 경제상황을 극복하지 못하면 내전이 재개될 위험성이 높았기 때문에 전시 공산주의 정책을 폐기하고 외국으로부터 식량을 지원받아 구호에 나서는 한편 원활한 전후 재건을 위해서 기존의 마르크스주의 강령을 토대로 수정된 신경제정책을 발표했다.

농민 개인이 자기 생산물을 팔 수 있도록 허가하고 일정한 기준의 사기업 활동도 허가하였으며 외국 자본을 허용하는 등 자본주의 경제 정책을 일부 도입하며 시장경제의 요소들을 대거 도입했다. 여기에 박살난 통화가치를 정상화하고 세금을 걷어 재정을 안정화시키라는 옛 부르주아 출신 고문관[3]들의 조언에 따라 중앙정부의 예산을 삭감하였고 세금을 걷기 시작했으며 화폐 가치가 얼마 안가 안정화되었다. 그러자 농민들에게 걷던 현물세는 사실상 화폐세의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이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일체 허용하지 않던 기존 마르크스주의 강령에 전적으로 배치되는 정책이었기 때문에 소비에트 러시아 공산당에서 많은 논쟁과 반발이 야기되기도 했으나 전후복구와 기근을 조속히 종식시켜야된다는 레닌의 강력한 의지에 의해 관철되었다.

신경제정책 실시 후 소련 경제는 빠른 속도로 회복하기 시작하여 1923년에 이르러 기근에서 벗어났고 1928년 들어서는 전쟁전인 1913년도의 경제수준을 회복하였다. 레닌의 주장으로 시행된 전기보급계획의 결과 20년대 후반이 되자 1913년의 7배에 달하는 전기 보급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신경제정책은 이쯤에서 한계에 봉착했다. 정치적인 이유로는 레닌이 죽고 트로츠키와 스탈린이 대립하였는데 둘 모두 네프를 중지시키고 공업화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고 경제적인 이유로는 네프 기간동안 부를 축적한 네프맨과 같은 부자들이 출현해 빈부의 격차가 점점 커졌기 때문이다. 다수의 일반 공산당원들은 네프의 시행이 혁명의 결과를 무위로 되돌리고 결과적으로 1913년과 다를 바 없는 퇴보로 만들었다고 생각했으며 20년대 내내 계속된 당내 정치투쟁은 단결과 권위에 집착하던 당원들을 불안에 빠뜨렸다. 그러나 네프는 좀 더 지속될 수 있었는데 이는 네프를 멈추고 공업화를 추진할 재원이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공업화를 추진한다는 건 말이 좋지 막대한 돈이 드는 일이었고 외국의 차관을 빌려와야 한다. 트로츠키는 공업화 추진에 있어서 옛날 세르게이 비테가 했던 것처럼 외국 차관을 들이자고 주장했는데 이는 역설적으로 트로츠키 반대파에게 공격할 구실을 잔뜩 만들었다. 왜냐면 그 차관을 들일 국가가 결국 자본주의 국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채를 들이지 않는다면 결국 인민, 특히 농민들을 쥐여짜는 수밖에 없는데 이는 많은 반발이 예상될 것이었다.

하지만 대외적 상황은 소련에게 공업화라는 선택지를 강요했다. 영국 경찰이 소련의 주영 통상기구를 습격해 와해시키는 일이 벌어지는 바람에 영국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 따라서 외채를 들이는 일은 이론적으로도 불가능해졌다. 여기에 국제 공산주의 혁명에도 심각한 차질이 생겨 중국에서는 국공합작이 결렬되어 4.12 상하이 쿠데타가 발생해 국공내전으로 돌입했으며 폴란드에서는 소련 외교대사가 암살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런 일련의 외교참사는 소련인들로 하여금 자본주의 국가들이 소련을 무너뜨리려 공작하고 있고 전쟁을 벌이려 한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여기에 언론과 정보기관들이 연일 국내의 '간첩'과 '반혁명분자'들을 잡아들이며 국내의 적을 조심하라고 선전하자 국내에도 혁명의 적이 있다는 공포가 확산되었다. 전쟁이 코앞에 다가왔다는 소문이 퍼지자 농민들은 그해 농업 생산량이 풍작이었음에도 다시 1920년처럼 시장에 곡물을 팔지 않았으며[4] 실업률이 급증하였고 도시에서는 생필품이 대거 사재기되었다. 네프로 기껏 회복한 경제가 다시 악화되고 있었다.

트로츠키는 이 소문을 이용해 스탈린을 비난했지만 스탈린은 이에 대응하지 않다가 1927년 중반 전쟁이 일어나리라는 소문을 공식적으로 부인하고 트로츠키의 비판을 역으로 비틀어 적이 모스크바의 코앞까지 다가와도 분파행위를 할 작자라고 비판했다. 이 공격은 매우 효과적이어서 트로츠키는 급속도로 인망을 상실했으며 얼마 후 당에서 완전히 축출된다. 이를 계기로 스탈린은 국내의 '반혁명분자', 즉 부르주아 출신 고문관, 네프로 부를 축적한 이들, 공산당에 가입되지 않은 기술자 등을 대거 잡아들여 사실상의 사법살인을 저질러 네프의 기반을 붕괴시켜 버렸고[5] 식량 공급의 감소로 인해 폭등한 식량 가격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6] 1928년부터는 쿨라크를 인민의 적으로 지목해 대대적인 농민을 향한 가혹한 수탈과 농업집산화를 강행했다.

동시에 대숙청의 전조도 이때 나타났는데 비록 스탈린은 전쟁 소문을 부인하기는 했지만 동시에 진짜로 자본주의 국가들이 소련을 무너뜨리려 할지 모른다는 공포를 가지고 있었다. 스탈린은 사법살인을 통해 부르주아 출신 피고들에게서 얻어낸 억지 자백을 진지하게 믿었으며 반대파 숙청을 통해 자본주의 국가들의 음모를 최소 몇 년 늦추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 성과를 인민들에게 자랑했으며 사회적인 불안과 공포, 서로에 대한 불신은 가시지 않고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심해졌다. 스탈린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빈곤이나 식량 문제, 경제 위기 등의 원인을 '반혁명분자들의 사보타주' 때문이라 주장함으로서 이런 위기를 더욱 부추기기까지 했다.

3. 문제점

1923년 여름에 대규모 경제 위기가 일어났다. 이는 네프 정책 자체의 근본적인 문제로, 네프는 자본축적 확대를 위해 농업 생산물에 대한 국가 수매가를 낮게 책정하고 국영기업이 만드는 공산품 가격은 높게 책정했다. 그런데 시장에서 거래되는 시장가가 국가가 설정한 수매가에 수렴하면서 이 차이가 극히 벌어지게 되어 가위 위기라 불리는 문제가 발생했다. 트로츠키는 1923년 4월에 열린 12차 당대회에서 농업 가격과 산업 가격의 차이가 점점 벌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도표를 소개했다. 1923년 10월에 그 차이가 가장 크게 벌어졌을 때 농업 가격 대비 산업 가격의 비율은 1913년에 비해 3배나 높았다. 결국 당은 농촌 수매가를 인상함으로서 위기를 해결해야 했다.

신경제정책이 도입되면서 소비재 경공업은 번성했지만 생산수단 생산과 관련된 중공업은 뒤쳐졌다. 1924년 10월 1일의 산업 생산은 1920년의 2.5배에 달했지만 전쟁 전 수준의 40%에 불과했고 금속 산업은 겨우 28.7%였다.

거기에 서민들 입장에서도 좋지 못하게 보일 일들이 일어났다. 볼셰비키 집권 이후 교육과 의료가 전면 무상화되었으나 신경제정책의 시행으로 다시 유상화되었는데 이는 비용을 지불할 능력이 없는 하위 계급에게는 퇴보로 여겨졌다. 게다가 연금이다 각종 수당도 불평등하게, 즉 당사자의 조건에 따라 다르게 지급되었다. 네프가 종식된 데는 이런 변화에 대한 사람들의 불만도 영향을 미쳤다.


[1] '닉슨 쇼크'를 불러일으킨 1971년 리처드 닉슨의 경제안정책도 신경제정책으로 불린다.[2] 기근은 1922년까지 지속되었는데 1922년 1월 볼셰비키는 기근 해결을 명분으로 교회 재산을 대규모로 압류했다.[3] 볼셰비키들 중에는 부르주아나 구 제국 상류층 출신을 고문으로 기용하는 것을 반대하는 이들이 꽤 있었으나 레닌은 이들의 주장을 당이 모든것을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만심이라며 비판하고 공산주의자 행정가가 충분히 길러지기 이전까지는 이들을 고용하고 조언을 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4] 다만 이는 국가가 설정한 수매가가 현저히 낮았기 때문이기도 하다.[5] 이 사법살인의 목적은 이것도 있지만 동시에 구 상류계급 출신 관료나 기술자들을 향한 노동자들과 평당원들의 노골적인 불신과 혐오를 이용해 전쟁 불안을 해소하고, 동시에 공업화 경제계획에 회의적으로 반응하던 관료 세력을 일소하기 위함이기도 했다.[6] 기존 당원들이 농민들을 상대로 유화적인 해결책을 썼던 것과 달리 스탈린은 식량 가격 폭등의 근본적인 원인이 소수의 쿨라크만이 시장에 식량을 내놓음으로서 사실상의 독점 상태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고 이는 정확한 판단이었다. 스탈린은 공업화 추진을 위한 재원 마련을 위해 단기적으로 확실한 해결책을 쓰고자 했고 그게 바로 부농 탄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