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8:37:10

제갈량/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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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
諸葛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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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특징3. 군재4. 제갈량에 대한 말말말5. 현대 사학자들의 평6. 관련 문서

1. 개요

제갈량을 평가하는 항목이다. 제갈량의 평은 역사적으로 칭찬일색이라는 느낌이 강한데, 이따금 있는 비판도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반박하는 느낌이 강하다. 예를 들어 습착치읍참마속에 대한 부정적인 평의 경우, 후에 왕세경, 홍량길, 『속후한서』를 지은 학경 등에게 반박당했다. 이것만 봐도 제갈량이 역사적으로 꽤나 높은 평가를 받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특징

제갈량은 충심과 뛰어난 능력으로 이상적인 신하의 대명사로서 항상 인기인이었으며, 그 덕에 오래 전부터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다. 결론적으로 북벌을 실패하고 주군의 대업인 천하통일을 이루지 못한 채 눈을 감았기에 그에 따라 비판 역시 없진 않았으나[1] 당대부터 현대까지 고금의 쟁쟁한 인사들이 높게 평가하고 있다. 그만큼 삼국지에서 후반기를 책임지는 스타이면서도 여러가지 매력적인 부분이 부각되는 인물이다. 그래서 아예 제갈량 사후 제대로 집필이 되지 않은 삼국지 관련 작품도 많고, 제갈량을 기억하는 사람도 굉장히 많은 편. 삼국지의 시작(184년)부터 제갈량이 죽을 때(234년)까지와 그 뒤로 삼국지가 정말로 막을 내릴 때(280년)까지의 시간은 거의 비슷하며 그 동안 여러가지 사건이 꽤 많이 일어난다. 그리하여 진나라 건국과 삼국시대 결말의 시발점이 되는 사마의를 모르는 사람은 있을 수 있으나, 그의 주군 유비와 함께 제갈량은 삼국지를 읽지 않은 사람도 웬만해서는 알 정도다.

현대에는 여러모로 그의 주군인 유비처럼 긍정, 부정 의견이 많이 갈리는 쪽으로도 재평가를 받는 인물이나, 그가 유비 사후 촉한을 이끌며 큰 위기가 없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제갈량이 역사에 남은 이유는 어쩌면 그의 경세가적, 또는 군략가적 역량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과 별 상관이 없는지도 모른다. 제갈량 만큼 "사대부적 낭만성"을 온전하게, 아름답게 구현한 인물은 제갈량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다는 것이, 사람들이 이 선비에게 주목하는 이유가 아닐까.

3. 군재

"그러나 제갈량의 재주는 치융[2]에는 능하나 기모[3]는 부족하고, 백성들을 다스리는 재간이 장략[4]보다 더 뛰어났습니다. 그런데 그와 대적한 이들 가운데에는 혹 인걸도 있었고 또한 군사 수가 부족해 적과 같지 못했으며 공격과 수비는 서로 다르므로, 이 때문에 여러 해 동안 군사를 움직였으나 능히 이기지 못했습니다."
진수, 『삼국지』「제갈량전(諸葛亮傳)」[5]
"여러 해 동안 군사를 움직였으나 공을 이루지 못했으니, 응변[6]과 장략[7]은 그의 장점이 아니었던 것 같다."
진수, 『삼국지』「제갈량전(諸葛亮傳)」[8]

진수가 제갈량의 군재를 비판하면서 동시에 병사 수가 부족했다는 것을 인정하듯, 제갈량의 군재를 긍정하는 쪽에서는 촉과 위의 기본적인 국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단 한번도 궤멸하거나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점에서 나쁘지 않았고, 또 인구가 그리 많지도 않은데 북벌 때마다 수만의 군사를 모은 것도 군사 행정적인 측면에선 매우 뛰어났다고 평가한다.

삼국지연의에서의 소설적인 과장을 제외하고 보면 대체로 신중하고 견실한 지휘관으로서 판짜기 능력은 뛰어나지만, 돌발 상황이 발생하거나 혼선이 발생했을 때 과감/도박적인 대응으로 변수를 창출하는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군사적 자료나 연구가 활발한 로마사에 대응하면 트라야누스나 폼페이우스와 비슷한 타입이며 카이사르나 게르마니쿠스 등과는 정반대되는 성향이라고 볼 수 있다.

행정 능력이야 두말할 나위 없다보니 동원력도 강력했지만, 그렇게 동원된 군사를 정비하고 유지하는데에도 뛰어났다. 다만 당대인인 진수도 증언했듯 누구나 인정하는 제갈량의 행정 능력과 동원 능력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위군의 규모로 인해, 제갈량은 항상 불리한 규모와 불리한 조건에서 자신보다 수적으로 우세한 위군과 싸워야만 했고 이것이 견실하고 신중한 본인의 성향과 맞지 않다보니 전체적인 전과가 좋지는 못한 편이었다. 위군은 관서 방위군에 낙양과 장안에서 증원되는 중앙군까지 합치면 대체로 촉한보다 군사력이 우세했고 특히 기병 전력에서는 항상 압도하는 상황이었다.

다만 번뜩이는 과단성은 부족해도 병사를 지휘통제하는 역량 자체가 부족한 것은 아니었다. 제갈량의 도전에 응전한 위군 지휘관들은 대체로 패배를 면치 못했기 때문이다. 사마의도 노성 전투에서 섣불리 회전을 걸었다가 밀려난 뒤 지구전으로 노선을 변경했고, 장합은 심지어 철수하던 제갈량을 추격하던 중이었음에도 함정에 빠져 전사하고 말았다. 그나마 곽회와 학소가 제대로 대응한 편이었지만 곽회도 회전에서 제갈량과 맞붙은 것은 아니었고, 학소는 수성전이라는 유리한 입지에서 잘 버틴 것이지 마찬가지로 제갈량을 전술적으로 압도한 것은 아니었다.

사마의가 제갈량에게 보인 태도에서는 시사하는 점이 크다. 맹달과 공손연을 토벌할 때 사마의는 속공과 기동전에서 강점을 보였고, 사마의의 압도적인 전략 기동성과 전투에서 보여주는 맹렬한 공격성에 맹달과 공손씨는 제대로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단기간에 분쇄되어버렸다. 하지만 사마의는 노성에서 제갈량과 한 차례 부딪혀본 뒤로는 문 걸어잠그는 수세로만 일관했는데, 그의 강점과 약점을 정확히 파악했기 때문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즉, 회전에서는 사마의를 압도할만큼 매우 강력하지만, 문 걸어잠근 상대를 자극할만한 변수 창출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 이 와중에 촉군의 규모도 적고, 원정군이라 물자까지 부족하다보니 더더욱 발이 묶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때문에 오장원에서 선택한 것이 둔전이었다. 누가 더 오래 버티나 한 번 해보자라는 도전이었고 사마의 입장에서도 난처한 상황이긴 했다. 이렇게 전쟁이 초장기전으로 흐르면 군주/대중에게서 받는 신임이라는 것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둔전까지 하며 자리 깔고 앉은 제갈량을 지구전으로 대응하는건 일전의 노성 전투 이후의 문 잠그기와는 의미가 많이 달라진다. 이전의 촉군은 한정된 물자로 성과를 못 내다보면 빠르던 늦던 돌아갈게 분명한 군대였지만, 자리잡고 농사까지 짓기 시작한 이번 원정대는 그냥 놔두면 몇년이고 그 자리에 말뚝박을 군대였기 때문에 성격 자체가 완전히 딴판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자국 영토 내에서 벌어지는 장기전을 견디지 못한 군주나 대중이 지휘관을 의심하여 결전을 독촉하거나 지휘관을 교체하여 패망하는 사례는 동서양에 분명 존재한다. 동양에서는 조괄이 그러했고, 서양에서는 한니발에게 지구전으로 맞선 파비우스가 이러한 이유로 경질되었다. 물론 이러한 구상은 구체적인 무언가가 드러나기도 전에 제갈량이 병사함으로서 효과적이었을지 아니었을지는 상상의 영역으로 남게 되었다.

4. 제갈량에 대한 말말말

4.1. 위진남북조시대

신 진수 등이 말씀 올립니다. 신이 이전에 저작랑(著作郎)으로 있을 때 시중(侍中) 영중서감(領中書監) 제북후(濟北侯) 신 순욱(荀勖), 중서령(中書令) 관내후(關內侯) 신 화교(和嶠)가 상주하여, 신으로 하여금 예전 촉 승상 제갈량의 옛일을 정리하도록 했습니다.

제갈량은 위태로운 나라를 보좌하고 험조한 곳에 의지해 복종하지 않았으나, 오히려 그의 말을 기록하고 부끄럽고 착한 말을 남겨두니, 이는 실로 대진(大晉)의 광명 지덕함이 무궁하게 끼친 것으로 자고이래로 일찍이 없었던 일입니다. 중복된 것은 삭제하고 서로 유사한 것끼리 분류해 모두 24편으로 만들었고 편명은 앞에 적은 대로입니다.

제갈량은 어려서 출중한 재주와 영패(英霸)의 기량을 갖추고, 키가 8척에 용모가 매우 훌륭하니 당시 사람들이 그를 남다르게 여겼습니다. 한나라 말 혼란을 만나 숙부 제갈현을 따라 형주로 피난 가서, 몸소 밭갈이며 문달(聞達)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좌장군 유비가 제갈량이 뛰어난 기량을 갖추었다 하여 제갈량의 초려를 세 번 방문하니, 제갈량은 유비의 웅자(雄姿, 웅대한 자태)가 걸출함을 보고 마침내 해대사성(解帶寫誠, 출사하여 성심을 다함)하고 서로 두텁게 결납(結納, 결탁)했습니다.

위무제(魏武帝, 조조)가 남쪽으로 형주를 정벌하고 유종이 주(州)를 들어 투항하자, 유비는 세력을 잃고 군사는 적었으며 송곳 꽂을 땅조차 없었습니다. 제갈량은 그때 나이 27세로 기책(奇策, 기묘한 계책)을 세우니, 직접 손권에게 사자로 가서 오회(吳會)에 구원을 청했습니다. 손권은 이전부터 유비를 복앙(服仰, 탄복하고 우러름)한데다가, 또한 제갈량의 기아(奇雅, 뛰어나고 고아함)함을 보고 그를 매우 경중(敬重, 공경하고 중히 여김)하여, 곧 군사 3만을 보내 유비를 도왔습니다. 이에 유비가 힘을 얻어 무제와 교전해 그 군을 대파하고, 승세를 타 크게 이겨 강남을 모두 평정했습니다. 그 뒤 유비는 또한 서쪽으로 가서 익주를 취하고 익주가 평정된 뒤 제갈량을 군사장군(軍師將軍)으로 삼았으며, 유비가 존호를 칭하자 제갈량을 승상, 녹상서사로 삼았습니다.

유비가 죽은 뒤 그 사자(嗣子, 대를 이은 아들, 즉 유선)가 유약(幼弱)하여, 크고 작은 일은 모두 제갈량이 전담했습니다. 이에 밖으로는 동오와 연결하고 안으로는 남월을 평정하고, 법을 세우고 제도를 시행하며 융려(戎旅, 군대, 군무)를 정리하고, 기계에 능하고 교묘한 재주가 있어 이를 극도로 연구하고, 과교(科敎, 법과 교령)를 엄명히 해 상벌에 필히 믿음이 있게 하여 악은 필히 처벌되고 선은 필히 현창되니, 관원에게는 간사함이 용납되지 않고 사람들은 스스로 힘쓰며 길에 떨어진 물건이 있어도 줍지 않고, 강자가 약자를 침범하지 않고 사회기풍이 숙연해졌습니다.

당시 제갈량의 본뜻은, 나아가서는 용양호시(龍驤虎視, 용이 머리를 들고 범이 노려봄)해 사해(四海)를 포괄하고, 물러나서는 변경에 걸터앉아 우내(宇內, 천하)를 진탕(震蕩, 뒤흔듦)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자신이 죽은 후에는 능히 중원을 짓밟고 상국(上國, 위나라)에 맞설 자가 없다고 여겼기에 이 때문에 용병을 그치지 않고 여러 번 무력을 과시했습니다. 그러나 제갈량의 재주는 치융(治戎, 군사를 다스림. 군 통수)에는 능하나 기모(奇謀, 기이한 모략)는 부족하고, 백성들을 다스리는 재간(理民之幹)이 장략(將略, 장수로서의 지략)보다 더 뛰어났습니다. 그런데 그와 대적한 이 중에는 혹 인걸(人傑)도 있었고 또한 군사 수가 부족해 적과 같지 못했으며 공격과 수비는 서로 다르므로, 이 때문에 여러 해 동안 군사를 움직였으나 능히 이기지 못했습니다.

옛날 소하(蕭何)는 한신(韓信)을 추천하고 관중(管仲)은 왕자(王子) 성보(城父)를 천거했는데, 이는 모두 자신의 장점을 헤아려볼 때 모든 것을 겸하여 가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제갈량의 기량은 정리(政理, 정치)에 능하니 또한 관중, 소하의 아필(亞匹-버금가는 짝, 동류)이라 할 만합니다. 그러나 당시 명장 중에 성보, 한신 같은 이가 없어 이 때문에 공업이 지체되고 대의를 이룰 수 없었던 것입니다. 대저 천명이 돌아가는 곳은 정해져 있어 (사람의) 지력(智力)으로 다툴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청룡 2년(234년) 봄, 제갈량은 군을 이끌고 무공(武功)으로 나와 군사를 나눠 둔전하고 오래도록 주둔할 기초를 만들었다가 그해 가을 병으로 죽으니, 일반 백성들이 그를 기리어 그 말이 입에 가득했습니다. 지금까지도 양주(梁州), 익주(益州)의 백성들은 제갈량을 찬탄하여 그 말이 아직도 귀에 남아 있으니, 비록 감당(甘棠, 시경 감당편)에서 소공(召公)을 읊고, 정나라 사람들이 자산(子産, 정나라 정치가)을 노래했다고 하나 먼 과거의 비유를 들 필요가 없습니다. 맹가(孟軻, 맹자)가 말하길,

"편안히 하는 도리로 사람을 부리면 비록 수고스러워도 원망하지 않고, 살리는 도리로 사람을 죽이면 비록 죽더라도 원망하지 않는다."

고 했으니 실로 옳은 말입니다.

의논하는 자들이 혹 의심하기를, 제갈량의 문채(文彩, 문장, 문사)가 아름답지 않고 정녕주지(丁寧周至, 여러 번 반복하며 꼼꼼함)함이 지나치다고 합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고요(咎繇, 순임금 때 명신)는 대현(大賢)이고 주공(周公)은 성인(聖人)인데, 상서(尙書, 서경)를 살펴보면 고요의 계책은 간결하고 우아하나 주공의 가르침은 번잡하고 상세합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고요는 순(舜), 우(禹)와 함께 말했고 주공은 신하들과 맹세했기 때문입니다. 제갈량과 더불어 말한 이들은 모두 뭇 평범한 이들이라 이 때문에 그 문장의 뜻이 심오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르침과 남긴 말은 모두 경사종물(經事綜物)하여 공정하고 성실한 마음이 그의 문묵(文墨, 문장)에 드러나 족히 그 의리(意理, 뜻과 이치)를 알 만하며 지금에도 유익한 점이 있습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폐하께서는 옛 성인을 힘써 본받으시고 호탕하여 꺼리는 바가 없으시니, 이 때문에 비록 적국(敵國)의 비방하는 말일지라도 모두 싣게 하고 고치거나 숨기는 바가 없어 이로써 대통(大通)의 도를 밝히셨습니다. 삼가 베껴 적어 저작국에 올렸습니다. 신 진수는 실로 두렵고도 두려워, 머리를 조아리고 또 조아립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태시(泰始) 10년(274년), 2월 1일 계사일, 평양후 상(平陽侯相) 신 진수(陳壽)가 올립니다.

진수, 『삼국지』「제갈량전」 中, 274년 제갈량집을 지으며 올린 진무제 사마염에게 올린 상소문.
[ruby(鞠躬盡瘁, ruby=국 궁 진 췌)] [ruby(死而後已, ruby=사 이 후 이)]
몸을 굽혀 모든 힘을 다하며 죽은 뒤에야 그만둔다.
후출사표 中. 제갈량의 인생을 한 문장으로 나타낸 문장이라 할 수 있다.
내가 공명을 얻은 것은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과 같다.
유비관우, 장비에게
충무후(忠武)는 영명하고 고매하며, 장강가에서 위나라 군대를 격멸시킬 책략을 바쳤다. 오(吳)를 끌어들여 촉(蜀)과 연맹하도록 하고, 우리 군주를 위해 도모했다. 선제의 유명을 받아 재상이 되고, 문무(文武)를 정비하였으며, 덕행과 교화를 넓히고, 사람들을 계도하여 풍속을 바꾸었다. 현인과 어리석은 자도 마음을 경쟁하고, 모두 자신의 몸을 잊고 받든다. 영내를 안정시키고, 사방의 국경지대를 안정시켰다. 자주 적지로 들어가 그 위광을 빛나게 하고, 대국(大國)을 소모시켰는데, 멸망시킬 수 없었던 것이 안타깝다.
양희, 계한보신찬, 제갈승상을 찬함(贊諸葛丞相)
만일 그들을 조금이라도 느슨하게 두어 제갈량(諸葛亮)은 다스리는데 밝아 재상이 되고 관우(關羽)와 장비(張飛)는 삼군(三軍)을 뒤덮을 만한 용맹으로 장군이 되고, 촉나라 백성들이 이미 안정되었다면, 험준한 곳을 거점으로 하여 요충지를 지켜도 이길 수 없습니다. 지금 공격해서 취하지 않으면 나중에 반드시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삼국지』 「유엽전」 中
유비는 웅대한 재주가 있고 제갈량은 나라를 잘 다스리며, 손권은 허실(虛實)을 알아보며 육손은 병세(兵勢)를 잘 보니, 험준한 곳에 웅거하여 요해지를 지키고 강과 호수에 배를 띄워 두고 있으니, 모두 도모하기 어렵습니다.
『삼국지』 「가후전」 中
유비는 관대하고 어질면서도 법도가 있으며 사람을 얻는데 사력을 다합니다. 제갈량은 다스림에 통달하고 변화를 알고 바르면서도 모략이 있으니 재상으로 삼을 만합니다. 장비, 관우는 용맹하면서도 의리가 있으니 모두 만인지적으로 장수로 삼을 만합니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인걸(人傑)로, 유비의 지략에다 세 인걸이 그를 보좌하니 무엇을 성공하지 못하겠습니까?
『삼국지』 「선주전」 주석 부자 中
지금 제갈승상은 재능이 탁월하고 걸출하여 아직 싹트지 않은 일을 깊이 볼 수 있으며, 유비의 유언을 받아 고아(유선)를 맡아 말세에 다시 일어나는 왕실을 보좌하며, 사람들을 의심하지 않고 공적을 기록하고 과실을 잊었습니다.
『삼국지』 「여개전」 中
현덕이 옛날 공명을 오에 보냈는데, 내가 한번은 자유(제갈근)에게 말하길 "경과 공명은 형제이며 또한 동생이 형을 따르는 것이 의로움의 순리이니, 어찌 공명을 머무르지 않게 하겠소? 공명이 만약 여기에 머물러 경을 따른다면 내가 응당 글월을 보내 현덕 밑에서 풀어주겠으니, 그 뜻은 자연히 사람을 따르는 것일 뿐이오" 라 했더니, 자유가 내게 답하길 "아우 량이 남에게 절개를 굽히고 인질로 붙잡혀서 명분을 정하여도 의로움에는 두 마음이 없습니다. 아우가 머무르지 않는 것은 제가 (유비에게) 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라 했으니, 그 말은 그야말로 신명(神明)스러움을 꿰뚫는 것이었소. 지금이라고 어찌 응당 이런 일이 있겠소?
『삼국지』 「제갈근전」 中, 이릉대전 발발 직후 제갈근에게 참소가 돌자 손권이 그를 변호하며
제갈량은 계략을 통찰하므로 반드시 신성한 생각을 굽혀가며 펼치는 것의 마땅함을 알 것이며, 게다가 하늘에서 내려준 것과 같은 조정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제갈량의 마음을 미루어 보면, 틀림없이 의심이 없을 것입니다.
오나라의 장온, 촉한에 사신으로 파견되며
위연은 매번 제갈량을 따라 출진할 때마다 번번이 군사 만명을 청해 제갈량과 서로 길을 달리 하여 동관에서 만나 한신(韓信)의 고사(故事)처럼 하고자 했으나 제갈량이 이를 제지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위연은 늘 제갈량을 겁이 많다고 하며 자신의 재주가 모두 쓰이지 못한다고 한탄했다.
『삼국지』 「위연전」
제갈량(亮)은 산을 거점으로 굳게 지키다가 지금은 스스로 왔으니, 이는 병서(兵書)에서 말하듯이 사람을 끌어들이는 기술과 합치되오. 하물며 제갈량은 삼군(三郡 : 천수, 남안, 안정)을 탐하여 전진할 줄만 알고 물러날 줄을 모르니, 이제 이때를 이용한다면 그를 쳐부수는 것은 필연적이오.
『삼국지』 「명제기」 주석, 위서(魏書)에서 인용, 조예가 조정의 신하들에게
제갈량이 상국(上國-위나라)을 겸병하지 못한 것이 어찌 당연하지 않겠는가! 무릇 진나라는 순임보를 살렸으니 폐법(廢法)하여 공을 이루었고, 초성왕은 득신이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몰랐기에 그를 죽이고 거듭 패배했다.

이제 촉은 궁벽한 한 귀퉁이의 나라로 인재가 상국보다 적은데 그 준걸을 죽이고 물러서서 어리석은 자를 거두어 쓰니 명법(明法)을 인재보다 중히 여겼던 것이다. 이는 삼패지도(三敗之道)를 배우지 못한 것으로 장차 대업을 이루는 것이 어찌 어렵지 않았겠는가!

또한 선주(유비)가 마속을 크게 쓰지 말라고 경계했지만 어찌 마속이 인재가 아니라 말할 수 있으리? 제갈량이 유비의 가르침을 받들고도 이를 따르지 않은 것은 분명 마속을 완전히 버리기에는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천하의 재상으로 큰 공을 세우려 하면서 재능을 헤아려 임무를 제한하지 않고 그 그릇에 따라 일을 맡기지 않았다. 만약 사람을 알아보는 일에 허물이 있었다면 주군의 가르침을 위배한 것이고, 능력을 헤아림에 실수가 있었다면 유익한 인재를 죽인 꼴이다. 이를 두고 보면 (제갈량을) 지혜로운 자라 말하기 어렵다 할 것이다.
『삼국지』 「마속전」 주석에서 습착치의 「양양기」를 인용, 습착치가 제갈량이 마속을 죽인 일을 평하며
황공형(황권)은 호방한 남자입니다. 항상 앉으나 서나 그대(제갈량)를 칭찬하였는데 말을 빌려 어떤 구실을 찾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마의, 제갈량에게 주는 편지에서
"공은 상을 주되 먼 사람을 빠뜨리지 않고 벌을 주되 가까운 사람에게 아첨하지 않았다. 작위를 주면서 공로를 새우지 않고는 얻을 수 없었고, 형벌을 주면서 귀하고 세력이 있다고 하여 면제해주지 않았으니 이렇게 하였기에 현명한 사람이든지 어리석은 사람이든지 모두가 그 자신의 몸을 잊었던 것이다."
『자치통감』 中, 제갈량의 관속인 승상 장사 장예의 말
나라를 다스리는데 법도가 있는 것이니, 상하가 서로 침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명공(※이 경우는 제갈량의 일)을 위해서, 집안일에 비유해서 말씀드려 볼까 합니다. 지금 어떤 사람이 노예에 경작을 행하게 하고, 노비에 취사를 조달하게 하고, 닭에 때를 알리게 하는 역을, 개에게 도둑으로 향해 짖는 역을, 소에 무거운 짐을 옮기는 역을, 말에 먼 곳에 가는 용무를 근무하게 하신다면, 각자의 일에는 공백이 없고, 필요한 것은 모두 이루어져, 유연하게 두 다리 뻗고, 베게를 높이 베고 잘 먹고 마시고 삽니다. 그런데 어느날 돌연, 자기 자신으로 그러한 일을 모두 해치기로 하고, 다른 사람에게 위탁으로 하지 말고, 자신의 체력을 써서, 이 번잡한 의무를 행하려고 한다면, 육체는 피로해 정신도 혼미하고, 결국 무엇 하나 완성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집주인의 지혜가 닭이나 개, 노비보다 못해서 일까요? 아닙니다. 가장으로서의 법도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래서 옛사람들은 앉아서 도(道)를 논하는사람들을 왕공(王公)이라 했고, 작(作)하고 행(行)하는 자들을 사대부(士大夫)라 했습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한선제(漢宣帝) 시절의 승상이었던) 병길(丙吉: 邴吉: BC 100년경 사람)은 길에 죽어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 이유를 묻지 않고 소가 헐떡거리는 것을 보고 걱정했으니, 사람이 죽은 것은 지방관이 처리해야 할 일이고 소가 헐떡거리는 일은 농사와 기후에 관한 것으로 재상이 살펴보아야만 할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한문제(漢文帝) 시절의 승상 진평(陳平)은 화폐나 곡물의 수량에 대해서는 알려고 조차 하지 않았는데 이는 담당자가 따로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실로 병길과 진평은 통치의 체계에 통달했다 할 수 있습니다.

지금 명공에는 정치를 실시하기에 즈음해, 몸소 출납부를 조사하시고, 하루 종일땀을 흘려 오셔집니다. 너무 노동이 과중하지 않을까요.
「양양기(襄陽記)」 中
“제갈량은 생각이 많고 결단력이 부족하니(慮多決少) 필시 영채를 안돈하여 스스로 방비를 굳게 한 뒤에야 보리를 수확할 것이오. 우리가 이틀 동안 급히 행군하면(兼行) 충분하오.”
『진서』 「선제기」, 사마의가 제갈량이 상규의 보리를 수확한다는 말을 듣고 두려워하는 장수들에게
“제갈량은 뜻이 크나 기회를 살피지 못하고(不見機), 꾀가 많으나 결단력이 부족하고, 용병을 좋아하나 임기응변이 없으니, 비록 10만 군사를 이끈다 한들 내 계획 속으로 빠져들 뿐이라 반드시 격파할 수 있다.”
『진서』 「선제기」, 사마의가 동생 사마부에게
천하의 기재로다!
『삼국지』 「제갈량전」, 『진서』 「선제기」, 사마의가 제갈량이 죽고 촉군이 떠난 진채를 보며
건흥 12년에 제갈량이 죽자 후주(後主)는 그의 죽음을 애석해하며 소복을 입고 사흘간 애도를 표했다. 이막이 소(疏)를 올려 말했다.

"여록(呂祿), 곽우(霍禹)가 꼭 역심을 품은 것은 아니며 효선제(孝宣帝)도 신하를 죽이는 군주 되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신하는 핍박이 닥쳐올까 두려워하고, 군주는 신하의 위세를 두려워한 까닭에 간사한 자들이 생겨났습니다. 제갈량은 강한 군대에 기대어 이리(狼)처럼 사방을 둘러보고 범처럼 사납게 노려보며 다른 사람을 안중에 두지 않으니, 신은 늘 그것을 염려했습니다. 이제 제갈량이 죽어 일족은 온전함을 얻었고 서융은 모두 평정되었으니 모두가 경축해야 할 일입니다."

후주가 노하여 그를 하옥시키고 주살했다.
『화양국지』, 제갈량이 죽은 후 이막이 유선에게 한 말
양호육항이 서로 상대할 때 사신이 오고가면 육항은 양호의 덕량을 칭찬해 악의나 제갈량도 이보다 더 훌륭할 수 없다고 하였다.
『진서』 「양호전」 젊을 때 악의랑 비교했는데 후세대에게 동렬로 취급받았으니 성공한 셈?
진무제(晉武帝, 사마염)가 제갈량이 나라를 다스리던 일을 묻자 번건이 대답했다,

"잘못된 점을 들으면 반드시 고쳤고 긍지가 지나치지 않았으며, 상벌에 신의를 보이니 족히 신명(神明,천지신명)을 감동시킬 만 했습니다."

황제가 말했다,

"훌륭하구나! 만약 내가 이런 인물을 얻어 보좌케 한다면 어찌 금일의 근심이 있겠는가!"[9]
사마염, 『자치통감』 中, 촉의 대신이었던 번건에게 제갈량이 촉을 다스린 것에 대해 듣고[10]
제갈량은 승상이 되어 백성을 어루만지고 예법과 규칙을 나타냈으며, 관직을 간략하게 하고 권부의 제도를 느슨하게 하였으며 성실한 마음을 열고 공정한 정치를 실행했다. 충의를 다하고 시대에 이익을 준 자에게는 비록 원수라도 반드시 상을 주었고, 법을 범하고 태만한 자에게는 비록 가벼운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사형에 처했다. 죄를 인정하고 반성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 자에게는 무서운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석방했으며, 진실을 말하지 않고 말을 교묘하게 꾸미는 자에게는 비록 가벼운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반드시 사형에 처했다. 선행을 하면 작은 일이라도 상을 주지 않은 적이 없으며, 사악한 행동을 하면 섬세한 것이라도 처벌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각종 사무에 정통하였고, 사물은 그 근원을 이해하였으며, 사람의 말에 근거하여 그의 행위를 관찰하고 허위로 가득한 사람과는 함께 있지 않았다. 그 결과, 촉나라 경내의 사람들은 모두 그를 존경하고 아꼈으며, 형법과 정치가 비록 엄격하였으나 원망하는 자가 없었다. 이것은 마음을 공평하게 쓰고 상주고 벌주는 것을 분명하게 했기 때문이다. 제갈량은 세상을 다스리는 이치를 터득한 걸출한 인재로서 관중[11], 소하[12]와 비교할만 하다 할 수 있다. 항상 자신을 관중과 악의에 비견했으니 절반은 성공한셈 (그러나 여러 해 동안 군사를 움직였으나 공을 이루지 못했으니, 응변(應變) 장략(將略)은 그의 장점이 아니었던 것 같다.)[13]
진수, 『삼국지』, 『자치통감』 中
한조가 기울고 천하가 붕괴되자 호걸들이 다투어 신기(神器)를 탐내었다. 위씨(魏氏)는 중토(中土)를 차지하고 유씨(劉氏)는 익주를 점거하니 아울러 해내에서 거병하며 당대의 패주(霸主)가 되었다. 제갈, 사마 두 재상은 이때에 이르러 명주(明主)에게 몸을 맡겨 혹 촉한에서 공을 세우고 혹 이수, 낙수에서 사책에 이름을 남겨 공을 세우고, 조비와 유비가 죽고 난 뒤 후사가 대를 잇자 각각 보필의 임무를 받아 어린 주인을 보필하며 승낙한 성심을 저버리지 않고 또한 일국의 종신(宗臣)으로 패왕(霸王)을 어질게 보좌했다. 전대를 살펴 근래의 일을 보면 두 재상의 우열은 가히 상세히 알 수 있다.

공명은 파촉에서 일어나 하나의 주(州)를 차지하고 라는 엄청난 대국과 겨루었는데 군사와 백성들이라곤 위나라의 9분의 1밖에 되지 않았다. 공명은 농업과 군사 일, 그리고 형법 등을 잘 정비했기 때문에 수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파죽지세로 기산까지 쳐 들어가 황하와 낙수의 물로 말의 목을 축일 뜻을 품을 수 있었다. 중달은 10배나 되는 땅과 거기 있는 수많은 군졸을 기반으로 견고한 성지와 강대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자기 자신의 보전에만 급급할 뿐 적을 깨뜨리지 못하고 제갈량이 제멋대로 날뛰도록 내버려 두었다. 만약 이 사람(제갈량)이 죽지 않았다면 끝내 그 뜻을 펼치며, 해를 이어 궁리하고 바삐 다그치며 모략을 일으켰을 것이니 즉 옹주, 양주는 갑옷을 벗지 못하고 중국은 안장을 풀 수 없어 승부의 형세는 또한 이미 결정되었다 할 것이다. 지난날 자산(子産)이 정나라를 다스릴 때 제후들이 감히 군사를 내지 못했고 촉상(蜀相)이 이에 가깝다 할 수 있으니, 사마의에 비하면 또한 뛰어나지 않은가![14] (중략)

이제 중달(仲達)의 재주는 공명(孔明)보다 못하며 당시의 세력은 지난날과 다르니, 현덕이 적과 맞섰는데 공명이 어찌 출군하여 적을 도모하지 않을 수 있겠소? 옛날 악의(樂毅)는 약소한 연나라 군사로 다섯 나라의 군사를 겸하여 강국인 제나라로 장구(長驅)해 70여 성을 떨어뜨렸소. 지금 촉한의 병졸은 연나라 군보다 적지 않고, 군신간의 결속은 악의 때보다 더 신의가 있소. 게다가 우리 국가와 순치(脣齒)의 도움이 되어 동서로 상응하고 뱀처럼 머리와 꼬리가 되면 형세가 중대해져 다섯 나라의 군사에 비할 바가 아니니, 어찌 저들을 꺼리어 불가하단 것이오? 무릇 병(兵)은 기(奇)로써 승리하고 지(智)로써 적을 제압하는 것이니, 토지의 넓고 좁음이나 인마(人馬)의 많고 적음에만 편벽하게 의지해서는 안 되오. 내가 그의 치국한 형체를 보면 당시에 이미 엄숙하고 가지런했고 그 가르침이 뒤에도 남았으며, 그 말에 이르러 간절하고 진취(進取, 적극적으로 나아가서 일을 이룩함)의 뜻을 진술하여 충성스러운 계책과 충직하여 주인에 대한 의(義)가 드러나니 비록 옛날 관중, 안영이라 해도 어찌 이보다 더하겠소?
오나라 장엄(張儼), 『묵기(黙記)』「술좌편(述佐篇)」 中
과거 관중(管仲)은 백씨(伯氏)의 변읍(騈邑) 3백 호를 몰수했지만, 백씨는 평생 동안 원한의 말을 하지 않았다. 성인이라도 이렇게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제갈량은 죽음으로써 요립에게 눈물을 흘리게 했고, 이평을 죽게 했다. 어찌 원망의 말을 하지 않은 것뿐이겠는가!

무릇 물은 완전히 평평하므로 기우는 자는 그것을 모범으로 하고, 거울은 밝게 비춰주므로 추하게 생긴 자라도 노여워하지 않는다. 물과 거울이 사물의 본질을 그대로 나타내도 원망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에는 사심이 없기 때문이다. 물과 거울에 사심이 없어 비방을 면하는데, 하물며 대인 군자가 생명을 좋아하는 마음을 갖고 있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덕을 펴며,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에만 법을 수행하며, 자신이 지은 죄에 형벌을 가하고, 사심에 따르지 않고 봉록과 작위를 주고, 노여워하지 않으면서 처벌한다면, 천하에서 복종하지 않는 자가 있겠는가! 제갈량은 이것에 따라 형벌을 쓸 수 있었고, 진한 이래 이러한 자는 없었다.
『삼국지』「이엄전」 주석, 습착치의 말을 인용하여
파촉에서는 이후에도 오랫동안 그 통치를 연모하고 그리워했다. 사후, 묘의 건립을 요구하는 소리가 곳곳에 울려 특별히 의논하여 면양에 세워졌다.
습착치, 「양양기(襄陽記)」 中
제갈량이 처음 죽었을 때, 도처에서 각각 사당 세울 것을 청하니, 조정에서 예질(禮秩, 예의등급과 작록품계)을 따져 의논한 뒤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자 백성들은 시절(時節, 사시 절기)에 맞춰 도로 위에서 사사로이 제사를 지냈다. 간언하는 이 중에 어떤 이가 청을 들어주어 성도에 사당을 세우자고 했으나 후주는 따르지 않았다.

보병교위(步兵校尉) 습융(習隆), 중서랑(中書郎) 상충(向充) 등이 함께 표(表)를 올렸다,

신이 듣기로 주나라 사람들은 소백(召伯, 주 소공)의 덕을 기려 감당(甘棠, 팥배나무)을 베지 않았고, 월왕(越王)은 범려(範蠡)의 공을 생각해 금을 주조해 그 형상을 보존했다 합니다. 한나라가 흥한 이래 작은 선행과 덕으로도 그 형상을 그려 사당이 세워진 자가 많습니다.

하물며 제갈량의 덕은 멀고 가까운 곳에 모두 본보기가 되며 그 공훈이 계세(季世, 말년)를 덮으니, 왕실이 무너지지 않은 것은 실로 이 사람에 힘입었습니다. 그런데 증상(蒸嘗, 봄가을의 제사)을 사문(私門, 가문)에서만 지내게 하고 묘상(廟像)을 빠뜨린 채 세우지 못하게 하여, 백성들은 길거리에서 제를 올리고 융이(戎夷)들은 들판에서 제사지내게 하니, 이는 덕을 보존하고 공을 기리는 바가 아니며 옛 사람들이 술추(述追)하던 바도 아닙니다.

지금 만약 민심에 모두 따른다면 어그러져 전범에 맞지 않고, 경사(京師, 수도)에 세우면 또한 종묘(宗廟)에 가까우니, 이것이 성회(聖懷, 임금의 마음)가 꺼리는 까닭이라 생각됩니다.

어리석은 신이 생각건대, 제갈량의 묘에 가까운 면양(沔陽)에 사당을 세워 친속으로 하여금 때마다 제를 올리게 하고, 무릇 그 신하나 옛 관원으로 제사를 올리려는 자는 모두 그 사당에서만 지내도록 한정하여 사사로운 제사를 끊는 것이 정례(正禮-올바른 예법)를 존숭하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이에 비로소 그 말에 따랐다.
「양양기(襄陽記)」, 습융과 상충의 상소
진나라 초 부풍왕(扶風王) 사마준이 관중을 진수할 때,[15] 사마 고평(高平, 연주 산양군 고평현)사람 유보(劉寶), 장사 형양(滎陽, 하남윤 형양현)사람 환습(桓隰) 등 여러 관속 사대부들이 제갈량에 대해 함께 논했다. 이때 논의하는 자들 다수는, '제갈량이 잘못된 곳에 몸을 맡겨 촉 백성들을 수고롭게 했으며, 힘은 적으면서 계획만 거창했으니 자신의 덕과 역량을 헤아리지 못했다'고 비웃었다.

금성(金城)사람 곽충은 '제갈량의 임기응변과 지혜, 뛰어난 지략이 관중, 안영보다 뛰어난 점이 있으나 공업(功業)을 이루지 못해 논자들이 미혹되었다'고 하며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제갈량의 관한 다섯 가지 일(이른바 곽충5사)을 조목조목 제시했다. 유보 등이 또한 다시 반박하지 못하고, 부풍왕은 개연(慨然)히 곽충의 말이 옳다고 하였다.[16][17]
「촉기」
을 얻었고, 을 얻었으며, 를 얻었다.
세설신어
제갈량이 비록 영웅과 패자의 재능(英霸之能)을 갖췄으나, 주인(유선)이 중흥(中興)의 그릇이 아니었고, 변변찮은 촉(蜀)으로 이이 폐기된 천명을 따라 강한 위를 북탄하고자 하였으며, 상국(上國, 위)과 필적하였으니, 또한 어렵지 아니하였던가.
화양국지』 저자 상거, 동윤을 제외한 촉한사영과 강유의 평가 中
옛 모습 그대로 보고 싶어, 남은 자취 찾아 왔소이다.
그대가 남긴 일 끊어질까 염려되어, 남산의 돌들이 속삭입니다.
환온, 당어림 中, 347년 백제성 인근 팔진도 유적을 답사하고
환온(桓溫)이 촉(蜀)을 정벌하였는데 제갈무후가 (생존하였을) 때 소사(小史)를 지낸 사람이 아직도 (살아) 있어 나이가 1백여 세였다. 환온이 묻기를 "제갈승상은 지금의 누구와 더불어 비교 할 만한가?" 하니 자신과 비교할 만하다 여겨 마음으로 자못 자긍(自矜)하였다. 대답하여 말하기를 "제갈공께서 계실 때에는 또한 남다름을 깨닫지 못하였사온데, 공께서 돌아가신 후부터는 그분과 비교할 만한 (사람을) 본적이 없습니다."하였다.
제갈충무기[18]
왕경략(景略, 왕맹)은 한 시대의 영웅호걸이며 폐하(부견)께서는 그를 제갈무후와 비교하셨는데, 오직 그가 죽을 때 했던 말(동진을 공격하지 말라)만은 기억하지 않으십니까?
『자치통감』 中,부융(부견의 동생)이 부견에게 간하며
만약 중화(中華)를 거닐며 그 뛰어난 재주를 펼쳤다면, 중화에 선비가 많다고 하여 어찌 가리고 막혔겠는가! 위나라에 몸을 맡겨 그 기량과 재능을 펼쳤다면 실로 진장문(진군)이나 사마중달(사마의)도 능히 서로 대등하게 겨루지 못할 것인데, 하물며 그 나머지 무리들이겠는가!
『삼국지』「제갈량전」 中,배송지가 최주평에게 제갈량이 위나라엔 뛰어난 선비가 많으니 가지 말라고 말한 부분에 주석을 달며
천자께서 내게 명해 면양(沔陽)에 이르게 하니 북소리 들으며 뭇 선철(先哲)들이 남긴 빛을 길이 생각하며 융산(隆山)에 올라 멀리 바라보니 수레앞 턱 가로나무가 제갈(諸葛)의 고향이로다.

대저 신물(神物)이 응기(應機)하고 대기(大器) 무방(無方)하나 사람에 통해 쓰러지고 막혀 대덕(大德)은 늘 한결같지 않으니, 이 때문에 골바람이 불면 추우(騶虞,상상의 동물)가 울고, 운뇌(雲雷)가 성하면 잠린(潛鱗)이 뛰어오른다.

이지(伊摯, 이윤)는 세 번 초빙함에 갈옷을 벗고 중니(中尼, 공자)는 부름을 받자 옷을 걷었고, 관중(管仲)은 명을 받자 표변(豹變)하고, 공우(貢禹)는 감격(感激)하여 회장(回莊)했다. 남다른 서생(徐生, 서서)이 보배를 들추어내어 깊이 감추어둔 와룡을 풀어 놓으니, 유씨(劉氏)가 기울어져 뒤집힐 때 가상하게도 그대가 주행(周行)했도다.

무릇 자기를 알아주는 주인이 있으면 목숨을 다하는 어진 이가 있는 법, 이에 우리 한나라를 셋으로 나눠 우리 변방에 걸터앉고, 우리에 맞서 북면하고 우리 위나라 지경으로 말달렸다. 영명하구나. 그대여! 홀로 천령(天靈)을 품으니 어찌 신(神)의 공경함이고(豈神之祗) 어찌 사람의 정(精)이겠는가? 생각 깊고 덕이 맑음이여! 다른 세상에 있어 꿈에서 만날 뿐 같은 세상에 있지 못함이 한스럽구나.

그대의 팔진(八陣)을 미루어보면 손자, 오자 때도 없던 것이고, 목우(木牛)의 기이함은 쉽게 본뜰 수 없고, 신노(神弩)의 공은 또한 미묘하구나! 천정(千井)을 가지런히 쌓으니 또한 얼마나 비요(祕要)한가! 옛날 전, 요(주문왕을 보좌한 태전泰顚과 굉요閎夭)가 명성이 있어 뒤쫓을 자 없다 하나 그 누가 그대의 뛰어나고 기묘한 주획(籌畫)만 하겠는가. 장문(臧文)이 죽고 말로써 칭찬받았으나 또한 그대와 같이 언행을 아울러 밝히지 못했다. 이오(夷吾, 관이오 즉 관중)가 술잔을 되돌리고 악의가 끝내 절의를 지키지 못했으니 어찌 그대의 명철(明哲)과 수충(守沖)에 비견되겠는가. 임종하여 맡길 때 사양함은 허유(許由, 요임금의 선양을 거부한 인물)보다 낫고, 정무를 맡아 일에 임함에 백성들의 말이 떠돌지 않았다.

형벌은 정나라보다 공정하고 교화는 노나라보다 아름다우니, 촉민들이 수치를 알게 되고 하수, 위수가 안거했도다. 고요(皋陶, 임금의 신하)가 아니면 이윤에 비견되니 어찌 관중, 안영에 그치겠는가. 강개하고 탄식할 뿐이로다! 옛적 그대가 은거했던 이 집을 생각하면, 어질고 지혜로운 거처했던 곳으로 규곽(規廓)이 없구나. 해가 있다가도 달이 떠서 때가 되면 떨어져 저녁이 되니 누가 능히 죽지 않겠냐만 귀한 이에겐 남긴 격식이 있도다.

그대의 공훈을 생각하면 풍속을 고쳐 후세에 이르렀고, 남아있는 전범을 읊고 노래하면 게으르고 나약한 이를 장려한다. 멀고도 멀어 그 법규가 높으니, 무릇 그대와 같은 자는 가히 헤아리기 어렵다. 멀고도 멀어 그 법규가 높으니, 무릇 그대와 같은 자는 가히 헤아리기 어렵다. 그리 오래지 않은 옛적에 어그러져 만 리 길을 달리하니, 이제 내가 와서 그대를 그리며 옛 터를 바라본다. 한고조의 혼이 풍, 패로 돌아가고 태공(太公-강태공)의 5대가 주나라로 돌아가 묻혔으니 망량(罔兩)이 방불(髣彿)하여 영향(影響)이 남았기를 바라노라. 영혼이 있다면 어찌 그가 이를 알아보겠는가!"
『삼국지』「제갈량전」 주석에서 「촉기」를 인용, 진나라 영흥(永興, 304~305) 중, 진남장군 유홍이 융중(隆中)에 도착해 제갈량의 옛 집을 살펴보고 위가 둥근 비석을 세워 공덕을 현창하고, 태부연(太傅掾) 건위(犍爲) 사람 이흥(李興)에 명해 글을 짓게 했다.[19] 당시 유홍은 영가의 난으로 무너지던 진나라의 형주에 머물면서 형주를 보호하고 있었다.
어떤 이가 제갈량이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다. 원자가 말하였다.

장비, 관우유비와 함께 일어나 조아 복심의 신하로 모두 무인이었고, 뒤늦게 제갈량을 얻어 이로써 좌상(보좌하는 재상)으로 삼았소. 이에 뭇 신하들이 기뻐하고 탄복했는데, 유비는 족히 믿을만하고 제갈량은 족히 중시할 만했기 때문이오.

그러다 6척의 고아를 맡아 한 나라의 정무를 총괄하고, 범용한 군주를 섬기며 전권했으나 예를 잃지 않았고, 군주의 사무를 대행했으나 국인들이 의심하지 않았으니, 이와 같은 즉 군신 백성들이 마음으로 흔쾌히 봉대했음을 알 수 있소.

법을 행함이 엄격한데도 국인들이 기쁘게 복종하고 백성을 부려 그 힘을 다하게 해도 아랫사람들이 원망하지 않았소. 그 군사들이 출입할 때는 빈객처럼 하니 행군할 때 도적질하지 않고, 꼴과 땔나무를 베는 자들은 사냥하지 않으니 마치 중국에 있는 듯 했소. 그가 용병함에는 산처럼 머물며 바람처럼 진퇴하고 군사가 출동하면 천하가 진동하니 인심이 근심하지 않았소.

제갈량이 죽은 뒤 지금까지 수십 년이 지났는데 국인들이 노래하며 그리워하여 마치 주나라 사람들이 소공을 그리워하는 듯 하오. 공자가 이르길 '웅은 가히 임금노릇할 만하다'고 했으니 제갈량에도 이러한 점이 있었소.

또 물었다.

제갈량이 처음 농우로 출병했을 때 남안, 천수, 안정의 세 군 사람들이 배반하여 제갈량에 호응했습니다. 만약 제갈량이 급히 진격했다면 이 세 군은 중국의 소유가 아니었을 것이나 제갈량은 천천히 행군하며 진격하지 않았습니다. 얼마 뒤 관병이 농에 올라 3군을 회복하고, 제갈량은 척촌의 공도 세우지 못하고 이 기회를 잃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원자가 말했다.

촉병이 가볍고 날랜 군사로 좋은 장수가 적었고 제갈량이 처음 출병했을 때는 중국의 강약을 알지 못했으니 이 때문에 의심을 품고 모험하지 않았던 것이오. 게다가 대거 모인 자들이 가까운 공을 탐하지 않아 진격하지 않았소.

그(물어본 자)가 말했다. '그가 의심했다는 것을 어찌 아십니까?'

원자가 말했다.

처음 나와 천천히 움직이고 둔영을 중복하고 그 뒤 항복한 뒤에도 진병하여 싸우려 하지 않았소. 제갈량은 용맹하고 싸움에 능했으나 세 군이 배반해도 속히 이에 응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그가 의심했다는 징표요.

그(물어본 자)가 말했다. 그가 용맹하고 싸움에 능했다는 것은 어찌 아십니까?

원자가 말했다.

제갈량이 가정에 있고 전군(前軍)이 대파되었을 때 제갈량의 둔영이 수리 떨어져 있었으나 구원하지 않았소. 관병과 서로 접했으나 또한 천천히 행보하니 이는 그가 용맹했다는 것이오. 제갈량이 행군(=용병)할 때 안정하고 견중했는데, 안정하면 쉽게 움직일 수 있고 견중하면 가히 진퇴할 수 있소. 제갈량의 법령이 밝고 상벌에 신의가 있어 사졸들이 명을 받으면 험지에 뛰어들면서 몸을 돌보지 않으니, 이는 그가 싸움에 능했다는 것이오.

그(물어본 자)가 말했다.

제갈량이 수만 군사를 이끌며 일으키고 세운 것이 수십만의 공력과 같으니 기이한 점입니다. 이르는 곳마다 영루, 우물과 부엌, 축간, 울타리, 장새를 세워 이를 법도로 삼고, 한 달을 행군해도 떠날 때는 처음 도착했을 때처럼 해놓으니 노고와 비용이 들며 꾸미기를 좋아합니다. 이는 어떻습니까?[20]

원자가 말했다. '촉인들이 경박하니 이때문에 견고히 하며 부린 것이오.'

그(물어본 자)가 말했다. '그랬다는 걸 어찌 아십니까?'

원자가 말했다. '제갈량은 실질로 다스리고 명의에 의하지 않았으며 뜻이 크고 원대해 가까운 공을 급히 취하는 것을 구하진 않았소.'

그(물어본 자)가 말했다. '제갈량은 관부, 차사, 교량, 도로를 짓기 좋아했으나 이는 급무(급한 업무)가 아닙니다. 어떻습니까?'

원자가 말했다.

소국에 현명한 인재가 적으니 이 때문에 그 존엄을 높이고자 함이오. 제갈량이 촉을 다스릴 때 경작지가 개간되고 창고는 충실해지고 기계는 날카로워지고 축적된 곡식이 넉넉해졌으나 조회는 화려하지 않고 도로 위에 술취한 사람이 없었소. 무릇 본이 세워지면 말이 다스려지고, 여력이 남은 후에야 작은 일에 미치는 것이니, 이는 그 공을 권하려 했기 때문이오.

그(물어본 자)가 말했다. '그대가 제갈량을 논하는 데는 증험이 있습니다. 제갈량의 재주로 보면 그 공이 적다고 하는데 이는 어떻습니까?'

원자가 말했다. '제갈량은 지본(근본을 중시)하는 자로 응변은 그의 장점이 아니니 이 때문에 감히 그 단점을 쓰지 않는 것이오.'

그(물어본 자)가 말했다. '그렇다면 그대가 그를 칭찬하는 건 왜입니까?'

원자가 말했다.

본래 현자란 심원한 것이니 어찌 완비함을 기준으로 책망하겠소? 무릇 능히 단점을 알고 쓰지 않는다면 이는 현자의 위대함이오. 단점을 알면 즉 장점도 아는 것이오. 무릇 전식(원래 생각)이라도 더불어 말해보고 맞지 않으면 제갈량은 쓰지 않았으니 이로써 내가 (현자로 칭하기에) 가하다고 한 것이오.
원준의 저서 「원자(袁子)」
조씨와 천하를 다투지 못하고, 형주를 버리고 물러나 파촉에 들어가서 유장을 유탈하고 손씨와 거짓으로 맺어 험한 땅에 몰려, 근처의 이족에게 참람하게 고하였다. 이에 책략을 내려 조타와 짝을 이루었으니, 관소[21]의 아필이란 말은 또한 지나치지 않았는가.
최호(북위의 재상), 『위서』「모수지전」 中

4.2. · ~ 북송

당태종: 위징과 제갈량 중 누가 더 훌륭하다 보오?
잠문본: 제갈량의 재주는 재상과 장수를 겸하니 위징이 견줄 수 있는바가 아닙니다.
당태종: 위징이 인의를 이행해 짐을 보필하여 요순에 이르도록 하고자 했으니 비록 제갈량이라고 할 지라도 대등하지 못할 것이오.
당태종 이세민과 잠문본의 대화, 신당서
옛날 주문왕은 형벌을 만들고 사면하지 않았으며 촉나라 선주(유비)는 일찍이 제갈량에게 말하기를 '나는 진원방과 정강성 간의 주선으로 다스림과 혼란에 관한 도를 갖추었소, 그러나 일찍이 사면에 대한 말은 없었소.'라고 말하였소. 그러므로 제갈량은 촉나라를 10년간 다스리면서 사면하는 일이 없었으나 촉나라는 잘 다스려졌소. 양무제는 해마다 여러 차례 대사면을 단행하였지만, 결국 나라는 멸망했소. 작은 은혜를 베푸는 사람은 큰 덕을 상하게 하오.

또 한나라와 위나라 이래 제갈량은 촉나라의 승상이 되어 또한 매우 공평하고 정직하였소. 제갈량이 일찍이 표를 올려 요립과 이엄을 남방으로 내쫒았으나, 제갈량의 부음을 들어 요립은 슬피 울며 '나는 좌임(오랑캐)이 될 것이다.'라고 했고 이엄은 병이 나서 죽었소. 그러므로 진수가 칭찬하기를 '제갈량의 정치는 성심을 열고 공평한 도리를 폈다. 충성을 다하여 시대에 유익한 자라면 비록 원수라고 할 지라도 반드시 상을 주었고 범법자나 태만한 자는 비록 친분이 있더라도 반드시 벌하였다' 하였소. 경들은 어찌 이를 흠모하여 따르지 않으려 하는 것이오? 짐은 역대의 훌륭한 제왕을 흠모하고 있으니, 경들 또한 전대의 훌륭한 재상을 본 받아야 할 것이오. 만일 이와 같이 한다면 곧, 명성과 높은 지위를 오래 지킬수 있을 것이오.

옛날 촉나라 후주는 유약하고 어리석었으며, 제나라 문선제는 미친 행동을 하고 패덕스러웠으나 나라가 다스려 질 수 있었던 것은 각기 제갈량과 양준언[22]을 임용하고 미워하거나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오.
당태종 이세민, 정관정요
"옛날 제갈량은 작은 나라의 승상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말하기를 '내 마음은 저울과 같다. 특정한 사람을 위해 제멋대로 경중을 조작할 수 없다'고 했다. 하물며 내가 지금 큰 나라를 다스리는데 있어서야 더 할 말이 있겠는가!"
당태종 이세민, 중서령 방현령이 인사의 공평을 묻는 질문에 대해
승상의 사당이 어딘지 찾으니
금관성 밖의 잣나무 숲이라네.
계단에 드리운 풀은 봄기운이 완연하고
나뭇잎 사이로는 꾀꼬리 울음 울리네.
세 번 찾아준 은혜천하삼분의 계책을 내고
를 정성껏 섬긴 늙은 신하의 마음이여.
출사하여 이기기 전에 몸이 먼저 가니
후세의 영웅들은 옷깃을 적시네.
두보의 촉상(蜀相)
이윤과 여상(태공망)에 백중하고 천하가 그 지휘에 따른다면 소하나 조참도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당나라 시인 두보
제갈공명 큰 이름 우주에 드리우고
종신이 남긴 모습 엄숙하고 청고하나니.
삼분할거의 계책을 펼쳐 놓고
만고에 하늘 높이 뜬 제일의 명예더라.
맞수 찾으려면 이윤여상을 보고
자신있는 지휘는 소하조참도 달아나리라.
명이 다한 한나라 운세 끝내 회복 어려워
뜻을 세우고 몸 바쳐 군무에 힘쓰더라.
두보, 고적에서 회포를 읊다 제5수(詠懷古跡 其五)
제갈량은 촉에 웅거했으되, 그의 큰 뜻은 장안까지 덮었구나.
물고기와 물이 세 번 만나 합치니 사해(四海)에 풍운이 이는구나!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
위엄으로 국가를 고요하게 하고, 지모로 이웃을 움직이고, 북을 들고 군을 내면, 삼군의 용기가 넘치고, 군을 국경에 두면, 천 리에 티끌이 없으며, 내외의 재주를 겸한 이를 말하자면, 오직 공명(孔明)과 경략(景略, 왕맹) 뿐이었다. 그러므로 최호는 "왕맹은 부견의 관중이고, 유유는 사마덕종의 조만(曹瞞, 조조)이다.”라고 일렀고, 손성은 "공명은 소국을 훌륭하게 보필했으니, 자산의 부류다."라고 일렀다. 이 말이 적당하도다.
당나라 주경칙(朱敬則)의 수고조론(隋高祖論) 중
무후(공명)가 죽은지 거의 500년이 된다고 하지만 지금에 이르기까지 양한(梁漢, 촉)의 백성들은 그 공적을 노래하며, 사당에 모시는 자가 있다. 그 백성들에게 사랑받음이 이 같이 오래였다.
손초, 각무후비음(刻武侯碑陰) 中
승상(제갈량)은 정치를 보좌할 것을 유증받아 나라는 부유하고 형벌은 공정하니, 비록 이윤의 격이 황천에 있고, 주공의 빛이 사표에 있어도 이보다 더 낫지 않을 것이다.
태평광기제갈각편, 손권이 숙부 제갈량과 비교하며 제갈각에게 시험삼아 질문한 말.
사이의 얽히고 설킨 험준한 길, 그 길을 통해 제갈량은 때때로 많지 않은 군사를 이끌고 강적에 대항했다. 그 빛남이 마치 새벽녘의 샛별과 같으니, 오직 제갈량만이 촉을 밝게 비추었구나.
북송 왕안석(王安石)
"공명(孔明)은 거의 예악(禮樂)을 일으킬 수 있었다."
명도 선생 정호(程顥, 중국 북송(北宋) 중기의 성리학자)[23]

4.3. 남송 이후

[ruby(王佐奇才儒者氣象, ruby=왕 좌 기 재 유 자 기 상)] [ruby(伊呂之間管樂之上, ruby=이 여 지 간 관 악 지 상)]
왕을 보좌할 만한 뛰어난 재주가 있고 유학자의 기상이 있으니,
이윤강태공에 비길 만하고 관중악의보다 낫도다.
주희가 쓴 근사록(近思錄) 관성현편(觀聖賢篇)에 등장하는 표현
"제갈공명이 죽지 않았다면 예악을 부흥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孔明無死 禮樂可興)
남송(南宋) 진량(陳亮, 1143~1194)[24]의 〈제갈공명론(諸葛孔明論)〉
나는 매양 진수의 삿됨과 고루함을 한스럽게 여긴다. 그는 무후(武侯)의 경략(經略)의 차제와 사전에 조짐을 알아 환란을 미연에 방지한 것, 나라를 다스리고 사람을 등용한 것과 군대를 부리고 통제하던 요점은 모두 덮어두고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다행히 다른 전기(傳記)와 배송지의 주(注)에 뒤섞여 나타난 사실이 있어서 주워모았는데, 감히 말을 수식함으로써 사실을 잊게 하지는 않았다.
남송의 성리학자, 장식[25]
이로 인해서 당시의 평론이 장준의 충의는 대략 한(漢)나라 제갈량과 비슷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제갈량은 자기가 생존해 있는 동안 위연(魏延), 양의(楊儀)로 하여금 이의를 품지 못하게 하였으나, 장준은 오개(呉玠)로 인해 곡단(曲端)을 주살하였으며, 제갈량은 법효직(法孝直)을 포용하였으나, 장준은 이강(李綱), 조정(趙鼎)을 포용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비방까지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제갈량에게 미치지 못한 점이다.
송사(宋史)》 361권 〈장준전(張浚傳)〉
뭇 영웅 벌떼처럼 일어나 세상 일 어지러운데
온갖 경륜 품고서 초가집에 누웠었네.
나라 위한 의리는 삼고초려로 높아졌고,
출사표의 위대한 계책은 칠종칠금으로 남아 있다오.
목우와 유마 누가 어찌 알았겠으랴.
백우선과 윤건은 제갈 승상만 썼다오.
일월처럼 밝은 무후의 충성심은 천고에 빛나는데,
고개 들어보니 위나라, 진나라의 옛터만 남았구나.
이제현의 제갈공명의 사당을 돌아보며
"그분의 훌륭함 논해 보자면 이윤여상에 버금가네."
명나라의 재상 방효유가 지은 제갈무후찬(諸葛武侯贊)에서
진 효공(秦孝公)이 병이 들어 상군(商君, 상앙)에게 왕위를 전하려 하였는데 상군이 받지 않았다. 효공의 마음가짐이야말로 공의(公義)에 입각한 것이었는데 다만 한스러운 것은 인물이 상앙밖에는 없었던 점이었다. 한(漢) 나라 소열황제(昭烈皇帝, 유비)가 제갈공명(諸葛孔明)에게 전해주려 한 것도 대체로 이와 같은 맥락에서였다. 그러고 보면 두 임금이 자립할 수 있었던 것은 요행이 아니었던 것이다.
조선 신흠, 상촌집.
촉한의 선주(先主)는 한나라의 후손으로, 공명 같은 왕좌지재를 만나 군사를 출동하여 역적을 토벌하되 삼대[26]처럼 군사를 동원함에 있어 도(道)가 있어 거의 한나라 왕실을 회복할 듯 하였다. 비록 하늘이 돌보지 않아 선주가 죽고 무후도 죽어 비록 공업은 끝을 맺지 못하였으나, 그 성취한 바는 참으로 컸었다.
정도전
제갈공명은 남양 땅에서 용처럼 누웠다가, 선주의 삼고를 기다린 후에 일어났으니, 이는 곧 이윤(伊尹)이 밭이랑에서 갑자기 깨달은 것과 같다. 두 차례의 출사표는 의론이 정대하여 이훈(伊訓)·열명(說命)과 함께 참고하여 볼 것이다. 그러므로 나아가고 처하는 큰 절개와 충성·대의가 삼대(三代) 이후로 유일한 사람이었으니, 그 성심을 열어 공도(公道)를 편 것은 실로 재상의 법이 될 만하였다. 비록 운수가 옮겨가 몸이 죽어서 공업을 이룩하지는 못하였으나, 그렇다고 어찌 이것 때문에 저것을 버리겠는가.
권근
불 꺼질 듯 한나라 지킬 수 없었는데
위기에 직면하여 명 받들어 자기 한 몸 잊었네
사람을 논함에 꼭 성패를 따질 것이 아니노라
천고에 아직도 팔진도가 전해지고 있으니
신숙주
君臣知遇動昭融 군신의 지우에 소융이 움직였으나
其柰劉家運已窮 유가의 운수가 다했음을 어이하리요
兩表忠誠照千古 두 표문의 충성이 천고에 비추나니
莫將成敗少英雄 성패를 가지고 영웅을 폄하하지 말라
이산해
제(齊)나라 환공(桓公)은 음악 소리와 아름다운 여색이 귀와 눈에서 떠나지 않았고, 한(漢)나라 소열(昭烈)은 군중(軍中)에 분주하여 넓적다리 살이 말안장 위에서 닳았으니, 만약 어질고 재주 있는 신하가 보좌하지 않았더라면, 환공은 어진 임금이 될 수 없었을 것이요, 소열이 조그마한 땅도 소유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환공은 관중을 등용하고 소열은 제갈량을 등용하였기 때문에 제후를 규합(糾合)하여 천하를 한 번 바로잡는 공(功)을 이루기도 하였고, 한중과 서천을 점유하여 한나라의 국운을 연장시키기도 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관중이 성현(聖賢)의 도를 알지 못하였고, 공명(孔明)은 신불해(申不害)와 한비자(韓非子) 같은 법가(法家)의 폐습을 벗어나지 못하여 공렬(功烈)이 여기에 그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어진 이에게 맡겨 패도를 행한 자이다.
율곡 이이 동호문답(東湖問答) 중
이윤이 유신(有莘)의 들에 있을 때에 몸소 밭 갈고 도를 즐거워하여 당세에 뜻이 없는 것 같았고, 성탕이 재차 초빙하러 올 때까지도 뜻이 확고했었는데, 매우 간절하게 청하고 그 정성이 더욱 드러난 뒤에야 마음을 확 돌려 부르는 데 응하였습니다. 그래서 뜻을 같이하고 덕이 합쳐져서 하늘까지 감동시켰습니다. 수대에 걸쳐 재상을 역임하고 임금을 추방하기까지 하였으나 혐의를 받지 않았고, 진실한 덕을 끝까지 다하고 벼슬을 그만두게 되어서도 오히려 간절하게 훈계하여, 늙을수록 더욱 독실하였습니다.

제갈량은 융중(隆中) 땅에 있을 때는 무릎을 안고[抱膝] 길게 휘파람을 불면서 우주에 눈을 높이 두고 생을 마칠 생각이었으므로, 소열제가 두 번째 찾아가도 오히려 은둔(隱遁)할 생각이 견고하였습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그를 좋아하여 세 번이나 찾아가기를 게을리하지 않은 뒤에야 마음을 돌리고 몸을 바쳤습니다. 계책이 서로 부합하자 재능을 다하고 정성을 극진히 함으로써 나라가 회복하기를 기약하였습니다. 어린 임금을 도우면서부터는 정책이 자기에게서 나왔는데 누구도 이간하는 말이 없었고, 강대한 위나라도 겁을 내었으며, 거의 예악(禮樂)의 교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이 두 사람은 비록 도에는 정조(精粗)의 차이가 있고 덕에는 대소의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임금을 믿어 충성을 다한 것은 한가지이니 후세사람이 미칠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어찌 두 사람의 현명한 것만으로 그렇게 된 것이겠습니까. 실은 임금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건대, 탕왕이 이윤을 칭찬하여 말하기를, “마침내 으뜸가는 성인을 찾아 그와 함께 온 힘을 다했다.” 하였으니, 지극히 감복한 것입니다. 소열제가 제갈량을 칭찬하여 말하기를, "나에게 공명(孔明)이 있는 것은 마치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과 같다." 하였으니, 그가 매우 즐거워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군신이 이렇게 서로 마음이 맞으니 두 사람이 어찌 독실하게 서로 돕지 않았겠습니까.
율곡 이이, 성학집요
한(漢)나라 고조(高祖)의 소하(蕭何) 와 당(唐)나라 태종(太宗)의 위징(魏徵) 과 송(宋)나라 태조(太祖)의 조보(趙普)같은 이가 어찌 이윤(伊尹) ·부열(傅說) ·여상(呂尙) ·제갈량(諸葛亮) 같은 인물들과 비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그 시대의 특출했던 자들을 얻은 데에 지나지 않습니다. 가령 이 세 임금이 그 사람을 버려두고 쓰지 않고서 반드시 이윤·부열·여상·제갈량 같은 이를 기다린 다음에야 비로소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였다면, 이윤·부열·여상·제갈량 같은 이를 마침내 얻을 수가 없어 한나라 4백 년의 기업과 정관(貞觀)의 치세(治世)와 천하의 평정을 함께 시작할 자가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인물은 한·당에 비하여도 훨씬 뒤떨어지는데 더구나 삼대(三代) 때와 같은 인재를 구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만약에 한 시대의 특출한 자를 취하고자 한다면 어느 시대인들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것은 전하께서 위임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선조 16년(1583년) 4월 1일 임자 6번째기사, 당파를 초월한 인재 등용과 폐정의 혁신을 진달한 병조 판서 이이의 상소문 중
제갈무후와 선공(宣公) 육지(陸贄)[27]는 자신이 태평성대를 잘 이룰 만한 위치에 있었으나 필경에는 뜻을 품은 채 펴지도 못하고 죽었으니, 그것을 천(天)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당시에 만약 두 사람이 아니었다면 촉(蜀) 나라와 당(唐) 나라가 존재했을지 의문이니, 오직 이러하기 때문에 끝내 인사를 버리고 천수만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류성룡
恢復思諸葛 중원을 회복하던 제갈량이 생각나고
長驅郭子儀 위기를 막아내던 곽자의가 그립구나
이순신
진린: 내 지난번 천문을 보니 대장별이 떨어지던데, 공이 이를 모르지 않을 것인즉, 어찌 무후의 기도법을 쓰지 않는 것이오?
이순신: 내 충성이 무후만 못하고, 내 덕망이 무후만 못하고, 내 재주가 무후만 못하여 세 가지 다 무후만 못하매 무후의 기도법을 쓴다고 해도 하늘이 능히 들어주시겠소?
이충무공전서 中, 진린과 이순신이 나눈 서신
그러나 와룡을 위해서는 언젠가 한 번 변무(辨誣)하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문로(門路)와 연원(淵源)은 비록 우리 유학의 정통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백세를 두고 사표가 될 만한 인물임에는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세상에서 그를 논하는 이들이 허다히 근본은 버리고 지말(枝末)만 따지고 정상적인 것은 소홀히 봐 버리고 괴이한 것만 믿는 통에, 그의 정대광명한 사업이 결국 풍운이나 일으키고 팔진도나 쳤던 일에 가리워져 버리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통한스러운 일입니까. 그의 계자서(戒子書) 한 편과 출사표(出師表) 두 편만 보더라도 그의 심학(心學)의 올바름과 조수(操守)의 신밀(愼密)함, 그리고 충직한 절의와 식견의 고상함이 과연 어떠합니까. 노재(魯齋)는 공명의 초려 장소(草廬長嘯)를 칭찬했는데, 담박(澹泊)과 영정(寧靜)의 교훈[28]은 빠뜨려 버리고 도리어 이것만을 취한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안정복
제갈공명의 학문은 그 궁극에 이른 경지를 고찰할 수 없지만 행동으로 드러난 것을 가지고 논한다면 계로의 용맹과 염구의 재예와 자공의 변설, 중궁의 천자가 될 만한 덕을 참으로 이미 겸했다. 지금 공자의 사당(문묘)에 배향 되는 사람 중 산동의 얼치기 학자나 문사나 일삼는 소인은 모두 들어갔는데도 제갈공명의 경우에는 거론하는 이가 있는 것을 듣지 못했으니 참으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서포 김만중
한 나라의 정치를 섭행하고 범상한 임금을 섬기며 권병(權柄)을 오로지하였으나 예를 잃지 않았고, 임금의 일을 행하였으나 나라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았다. 법 집행이 근엄하여 나라 사람들이 마음으로 기뻐하여 복종하였고 백성들의 힘을 쓰되 그들의 힘을 다하게 하였으나 아래에서 원망하지 않았다. 군사를 출동하여 적국에 갔을 때도 규율이 엄하여 행인이나 죄없는 사람들을 해치지 않기를 본국에 있을 때와 같이 하였다. 용병(用兵)할 때 중지하면 산처럼 중엄했고 진퇴할 때는 비바람과 같았으므로, 천하가 흔들려도 인심이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제갈량이 죽은 지가 지금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나라 사람들은 주(周) 나라 사람들이 소공(召公)을 그리듯 노래하며 사모하고 있다. 법령(法令)이 엄명하고 상벌(賞罰)이 미더웠으므로 사졸들이 명령에 복종하여 위험(危險)한 데에 달려가도 목숨을 돌아보지 않았으므로 수 만의 군대를 거느리고도 수십 만의 군대가 이룩한 공(功)을 세웠다. 가는 곳마다 영루(營壘)를 설치할 때는 우물, 부엌, 울타리, 장색(障塞)을 모두 법대로 만들었으므로 한 달 간 있다가 떠날 때도 처음과 같았다. 게다가 촉(蜀) 사람들은 용맹하였기 때문에 오랫동안 부릴 수 있었다. 실(實)을 힘쓰고 명(名)을 힘쓰지 않았고, 뜻이 크고 바라는 것이 위대하여 관부(官府), 차사(次舍), 교량(橋梁), 도로(道路)를 잘 수리했으며, 작은 나라는 어진 인재가 적기 때문에 존엄하게 하고자 했다. 농지(農地)를 개간하고 창고를 가득채웠으며, 기계를 편리하게 수리하고 저축을 넉넉하게 했다. 따라서 조회(朝會)는 검소하게 하고 도로에는 술취한 사람이 없었다. 이와 같이 근본이 확립되었으므로 끝이 잘 다스려졌으며 여력이 있은 뒤에 작은 일에 미쳤으니 이것이 바로 그의 공을 권장하게 되는 이유이다. 제갈량은 근본을 준행한 사람이었으므로 임기응변(臨機應變)의 술책은 그의 장점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감히 자신의 단점을 사용하지 않은 것인데, 어찌 한몸에 구비하기를 요구할 수가 있겠는가?

난국(亂國)을 다스리는 데는 준엄한 법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원자(袁子)의 의논이 공명의 뜻과 멀지 않다. 그러므로 그가 말한 바가 조리 정연하여 규도(規度)가 어제 일처럼 완연하다. 그러나 ‘임기응변은 공명의 장기가 아니었다.’ 하는 것은 대체로 진수의 여론(餘論)을 주워모은 것으로 공명을 모르는 자의 말이다."[29]
조선 이덕무, 청장관장서
제갈무후(諸葛武侯)가 이르기를, "권세와 이익만으로 교제를 하면 먼 훗날까지 가기가 어렵다. 선비가 서로를 아는 것은, 온화한 날씨라고 해서 더 꽃을 피우지도 않고 추운 날씨라고 해서 잎이 떨어지지도 않아 사시장철 시들지 않고 험난함을 겪을수록 더욱 견고해지는 것과 같다." 하였다.
삼국(三國) 중에서, 위(魏)나라는 찬시(篡弑)한 일이 있었고 오(吳)나라는 폐립(廢立)한 일이 있었던 것은, 모두 드센 신하에게 제재를 받았기 때문이다. 촉한(蜀漢)은 망하기 전에 용렬한 임금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었으나 나라에 내우(內憂)가 없었으니, 소열제(昭烈帝)와 무후(武侯)의 규모가 원대했던 것이다.
조선 이유원, 임하필기 中
손권이 제갈 무후를 칭찬하기를, '진실함은 음양을 감동시키고 정성은 천지를 감동시켰다.' 하였고, 사마의는 그의 군영과 보루를 살펴보고 감탄하기를, '천하의 기재(奇才)이다.' 하였으며, 종회는 촉 땅에 들어가 그의 묘에 제사를 지내고 갔다. 무후가 적국에게 존경받고 신뢰받은 것이 이와 같았는데 하물며 자신의 나라에서이겠는가. 무후가 죽자 요립(廖立)이 눈물을 흘리고 이평(李平)이 슬퍼하다 죽은 것은 참으로 당연한 일이었다. 남만의 풍속에 북쪽 문을 모두 낮게 만들어 나갈 때에 반드시 고개를 숙여야 하니, 이것은 무후가 가르친 것이다. 항상 북쪽에 머리 숙여 복종하게 한 것인데 이것을 오랠수록 더 잘 준수하여 감히 고치지 않았으니, 그의 신성한 위엄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것이다. 그의 신이(神異)한 자취가 남만과 촉 지방에 많이 남아 있는데 시간이 오래될수록 더욱 신이하니, 어복포(魚腹浦)에 돌로 쌓아놓은 팔진도(八陣圖)는 오랜 세월이 지나도 훼손되지 않아 마치 귀신의 돌봐 줌이 있는 듯하다. 그 외에 사만세(史萬歲)가 그의 기공비(紀功碑)를 넘어뜨린 것[30]과 조빈(曹彬)이 그의 비석에 절한 것[31], 숙친왕(肅親王)이 비지(祕誌)를 얻은 것 등은 그 대표적인 것들이다. 옛사람 중에도 이러한 사람이 있었는가.

제갈공명이 죽자 촉(蜀)이 망했다. 허나 위(魏)의 멸망도 제갈공명의 죽음에서 연유하였으니, 이는 왜인가? 제갈공명이 죽지 않았다면 사마중달은 온 힘을 다해 서쪽을 막느라 관서 지방에서 한 발자국도 떠나지 못했을 것인데, 어느 겨를에 정권을 찬탈해 나라를 도둑질했겠는가. 설령 국권을 빼앗을 만한 힘이 있었다 하더라도 제갈공명의 공격이 두려워 감히 그러지 못했을 텐데 하물며 촉을 도모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촉이 망하자 사마씨의 세력이 더욱 강해져서 위가 결국 진(晉)에 선양(禪讓)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미 촉과 위가 병합되었는데 오(吳)가 어찌 독존할 수 있었겠는가. 오에서 제갈각(諸葛恪)을 쓴 것이나 위에서 제갈탄(諸葛誕)을 쓴 것은 모두 제갈공명 때문이었다. 제갈공명이 있었던들 손준(孫峻)이 어찌 감히 제갈각을 처참하게 죽이고 사마소(司馬昭)가 어찌 감히 제갈탄을 해쳤겠는가. 그러므로 제갈공명의 죽음에 삼국(三國)의 운명이 달려 있었을 뿐 아니라 제갈씨 가문의 운명도 달려 있었으니, 이 점에 있어서는 이윤(伊尹)과 여상(呂尙, 강태공)도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
조선 성대중, 청성잡기
삼국(三國)이 나뉘어 있을 때 촉(蜀)나라가 가장 약하여 믿는 바는 오직 제갈공명(諸葛孔明)뿐이었습니다. 제갈공명이 죽은 뒤에는 촉나라의 형세가 아주 위태로웠으니, 그때는 바로 임금이 부지런히 정무를 돌보아야 할 때였습니다. 그런데도 후주는 자주 바깥으로 행행(行幸)하고 풍악(風樂)을 더욱 크게 베풀고 놀았습니다. 신하들은 간사스럽고 임금은 어두웠으며, 조정에는 직언을 하는 사람이 없었고, 백성들에게는 굶주린 기색이 있었습니다. 이에 주변 나라의 사신들조차도 능히 촉나라가 망할 것임을 알았는데, 그 임금은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망하는 것이 역시 마땅하지 않습니까.

혹자는 말하기를 “공손술(公孫述) 이후로 촉(蜀) 땅을 근거지로 삼았던 자들은 모두 중국(中國)에 의해 멸망당하였다. 이것이 어찌 비록 형세가 험고하기는 하지만 땅이 작아서가 아니겠는가.”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漢)나라 고조(高祖)가 촉 땅에 봉해졌을 그 당시에는 항씨(項氏)는 초(楚) 땅을 차지하고 있었고, 전씨(田氏)는 제(齊) 땅을 차지하고 있었고, 위표(魏豹)는 위(魏)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고, 진여(陳餘)는 조(趙)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고, 하열(夏說)은 대(代)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고, 영포(英布)는 구강(九江)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고, 장한(章邯)과 동예(董翳)와 사마흔(司馬欣)은 진(秦)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한(漢)나라가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단지 파촉(巴蜀) 가운데 한 귀퉁이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런데도 고조는 파촉에서 일어나 삼진(三秦)을 평정하고 구강(九江)을 귀순시키고, 제(齊)와 위(魏)와 대(代)와 조(趙)를 병합하고서 마침내 항적(項籍)을 사로잡아 천하를 다 차지하였습니다. 그런데 누가 촉 지방은 땅이 작아서 천하에 횡행하기에 부족하다고 한단 말입니까.

예로부터 승패(勝敗)는 사람에게 달려 있었지 땅에 달려 있지 않았습니다. 위(魏)나라는 촉(蜀)나라에 비해 훨씬 컸는데도 제갈공명을 두려워하기를 마치 범을 두려워하듯이 하였습니다. 가령 제갈공명이 죽지 않았다면, 비록 한(漢)나라를 회복할 수는 없었을지라도 등애(鄧艾) 따위의 무리는 두려워하기에도 겨를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능히 촉나라로 쳐들어갈 수 있었겠습니까.

이것을 가지고 논해 본다면, 승부는 사람에게 달려 있지 땅에 달려 있지 않음이 분명합니다. 이 때문에 장강(長江)의 험고함은 마찬가지인데도 손권(孫權)이 있을 때에는 능히 조조(曹操)를 패퇴시켰으며, 손호(孫皓)가 있을 때에는 왕준(王濬)에게 항복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파촉의 땅은 마찬가지인데도 한 고조 때에는 능히 항우(項羽)를 사로잡았는 데 반해 유선(劉禪)이 있을 때에는 등애에게 항복하였던 것입니다.

예로부터 창업을 한 임금으로는 크게는 한나라 고조가 천하를 통일한 것을 말하고, 작게는 손권이 할거한 것을 듭니다. 그런데 그들의 후예에 이르러서는 유선이나 손호와 같이 되지 않는 경우가 드무니, 참으로 슬픕니다. 《서경》 〈상서(商書) 태갑 상(太甲上)〉에 이르기를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면, 너의 선조를 욕되게 할 것이다.〔辟不辟 忝厥祖〕”라고 하였는데,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입니다.

《시경》에 이르기를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자서, 너를 낳아 준 부모를 욕되게 하지 말라.〔夙興夜寐 無忝爾所生〕”라고 하였습니다.
조선 정두경[32], 동명집 中
(전략) 제갈공명은 제왕을 보좌할 만한 재주로 한실(漢室)의 적통(嫡統)을 보좌하여 한(漢)나라의 적을 토벌할 것을 맹세하고 한실을 회복하기를 기약했으나, 구구하게 한쪽 구석에 머물러 있다가 뜻을 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중략) 제갈량은 신야(莘野)에서 농사짓던 이윤(伊尹)에게 은연중 부합하고, 한 번 조이고 한 번 푸는 것을 법도가 있게 하는 것은 위천(渭川)에서 낚시질하던 강태공(姜太公)과 거의 같았습니다. 게다가 뛰어난 웅지를 분주히 펼쳐 한 세상을 좌우하면서 나라를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하다가 죽고 난 뒤에야 그쳤으니, 공명(孔明)의 소양(所養)이 어떻습니까.(중략) 더구나 공명이 대업(大業)의 단서를 열지 못한 것은 천명인지라 인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가령 하늘이 그에게 좀 더 오래 살게만 해줬더라면 한실을 흥복(興復)시키고 한실의 대업을 열었으리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하략)
기대승, '옛 사람들의 은현(隱見, 숨었다 나타났다 함)과 지업(志業, 지망하는 사업(事業))의 서로 다른 점을 들어보라'에 대한 답안을 적은 책문(策問)[33]
제갈량이 이르기를, ‘몸과 마음을 다하여 나라에 이바지하되 죽은 뒤에 그친다(鞠躬盡膵 死而後已)’고 하였으니, 신하된 자로는 오직 제갈량 한 사람 뿐이다.
강희제가 63세에 남긴 생시 유조
군사를 잘 통솔할 수 없을 때 오직 그만이 이를 통솔했고,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없을 때에도 오직 그만이 이를 다스렸다. 정치가 편안하지 못할 때 오직 그만이 이를 편안케 했고, 나라의 살림살이가 어려울 때 오직 그만이 이를 풍족하게 했다.
청나라 철학자 왕부지(王夫之)
애석하게도 이때 이미 인재들이 이미 위, 오 두 나라에 다 거두어졌기 때문에 얻은 사람은 비교적 적었지만, 그러나 제갈량은 일류의 인물로서 두 나라 모두 얻을 수 없었는데 유비 혼자 그를 얻을 수 있었으니 역시 성심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의 효력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청나라의 학자 조익, 이십이사차기 권7
[ruby(三代下一人, ruby=삼 대 하 일 인)]
하은주 이래 최고의 인물.
중국의 근대 사상가 궈모뤄(郭沫若, guōmòruò)[34]의 평[35]
진수가 제갈량을 논하며, "재주가 군을 다스리는 게 장점이었고, 기묘한 계책은 단점이었으며, 백성을 다스리는 재능이 장수의 지략보다 뛰어났습니다."라고 일렀는데, 이는 슬퍼서 나온 말이 아니다. 용병하며 기책을 내는데 능숙함은, 의당 위무제(魏武帝)만 못하다. 그러나 더불어 대적한 바는, 원소 이외에는, 모두 큰 모략이 없었고, 또한 모두 깊고 단단한 뿌리가 없었으나, 위(魏)와 같은 경우는 힘써 싸우지 않으면 이길 수 없었다. 위연의 다른 길을 통해 모두 모이는 모략은, 취하지 않음이 아까워할 만하다. 그러나 포야(褒斜), 자오(子午)는, 나오기는 쉬워도 이어지기는 어려워, 함양(咸陽) 이서가 만약 평정될 수 있어도, 위가 대군을 일으켜 이를 다투고, 농우의 여러 군이 그 뒤에 기대면, 촉이 과연 이를 지킬 수 있겠는가? 이가 제갈량이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자 한 이유인가?

제갈량전의 주에서 인용한 장엄(張儼)의 묵기(默記)에서 제갈량과 사마의의 우열을 논하길 : "공명은 보졸 수만을 이끌고, 기산祁山으로 멀리 달리며, 흔쾌히 하(河), 낙(洛)에서 말에게 물을 먹일 뜻이 있었다. 중달은 10배의 땅에 근거하나, 견고한 성에 근거해, 정예를 가지고, 자신을 보전하는데 힘쓸 뿐이었다. 만약 이 사람이 죽지 않고, 그의 의지를 이루었다면, 승부의 형세는 이미 결정됐을 것이다." 이는 헛소리가 아니다.

주에서 또한 한진춘추(漢晉春秋)를 인용해 말하길 : 가허, 위평이 자주 싸우길 청하며 이르길 : "공께서 촉을 호랑이와 같이 두려워하시니, 천하의 비웃음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선왕(宣王)이 이를 괴로워했다. 상표하여 거듭 싸우길 청했다. 위위 신비(辛毗)에게 절(節)을 가지고 이를 억제하게 했다. 강유가 제갈량에게 이르길 : “신좌치(辛佐治)가 절을 가지고 이르러서, 적은 다시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제갈량이 이르길 : "그는 본래 싸울 뜻이 없었으니, 거듭 싸우길 청한 것은, 그의 무리에게 용감함을 보이려던 것일 뿐이다. 장수가 군에 있으면, 임금의 명도 받지 않는 바가 있는데, 만약 우리를 제압할 수 있다면, 어찌 천 리를 가서 싸우길 청했겠는가?" 위지 명제기(明帝紀)에서 이 해에 조서로 선왕에게 다만 보루를 단단하게 하고 수비하여 그들의 예봉을 꺾으라고 시킨 것을 특별히 적었으니, 승조(承祚)에게 진실로 깊은 뜻이 있었던 것이다.

제갈량이 손권을 논하며 그의 지력이 가지런하지 못하기에, 강(江)에 한정하여 스스로 보호한 것이라고 이르나, 제갈량은 중원을 밟고 돌아다니며, 상국(上國)에 맞먹을 수 있어서, 용병하며 그치지 않고, 자주 그의 무력을 과시했으니, 그의 재주는 진실로 때를 어기지 않았다.
여사면(呂思勉, 중국의 근대 사학자), 진한사(秦漢史)
제갈량은 매우 재능이 있어 서촉에서 대단히 훌륭한 정부를 성립할 수 있었고, 또한 여섯 번 기산에 거하며 북벌할 수 있었으며 오나라, 위나라와 함께 셋으로서 정족을 이루었다.
쑨원, 《삼민주의(三民主義)》의 민권주의 중 제갈량 칭찬.
제갈량의 행동은 봉건시대 기준으로도 도덕적 기준이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의 근대사학자 범문란(판원란,1891~1969)[36]
유일하게 제갈량이 있어, 나중에 삼국이 양한(전한, 후한)과 똑같이 후세에 빛날 수 있게 되었다.
중국의 근대사학자 전목(쳰무, 1895~1990)[37]
유비 선생이 제갈량에게 탁고를 주고 제갈량에게 스스로 정권을 인수하겠다고 공언했지만, 정말 명분이 좋아서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제갈량은 순풍에 돛을 단 채 황좌에 앉기는커녕 고등학교 1, 2학년 나이의 (유비의) 열일곱 살 나이 큰아들을 추대하였고, 공경스럽고 신중함을 지키며 온 힘을 다 바치다가 죽어서도 끝이 없었다. 현실정치에서 황제의 권좌는 누구의 힘이 크면 누가 위에 앉는 것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능히 윗자리에 앉을 수 있지만 윗자리에 앉지 않는 충신의사에게 그 때문에 존경심을 느낀다. 왜냐하면 편리하고 아주 쉽게 구석에서 여러 나쁜 짓을 하고, 재물과 여색이 넘치는 것은 바로 대장부가 하지 않는 정조가 있기 때문이다. 제갈량이 하지 못하는 일이 있는 것에 우리는 정례(頂禮,이마를 땅에 대고 가장 공경(恭敬)하는 뜻으로 하는 절)를 드린다.
대만의 평론가이며 반체제 인사이자 역사가인 백양(보양,1920~2008), 《백양판자치통감:18 삼국정립》에서.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제갈량의 명성을 불후의 것으로 만든 까닭은 그의 우수성보다는 그의 진정성에 있다. 그는 마음만 먹으면 촉한의 황제가 될 수 있었고, 위나라에 항복해 좋은 대우를 받을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리고 고독한 투쟁의 길을 갔다. 후한 말기에서 진나라 통일에 이르는 시대는 도덕이 조소받고 힘이 곧 정의가 되던 시대였다. 동탁, 조조, 사마의, 그리고 유비는 모두 자신을 믿어준 군주를 배신하고 힘으로 권좌를 차지했다. 한나라 헌제나 유선, 손호는 편안한 여생을 보내기 위해 조상이 남겨준 나라를 저버렸다. 이런 시대에 오직 제갈량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고,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바보’로 살다가 간 것이다. 오직 눈앞의 이익을 탐하는 혼란스러운 세상, 그 속에서의 한 조각 진실됨, 또는 진실되어 보임. 그것이야말로 비슷하게 ‘천재적인 전략가’의 이미지를 가진 태공망이나 장량이 멋지게 성공하고서도, 오히려 실패한 제갈량의 명성을 따라가지 못하는 이유가 아닐까.
네이버캐스트 인물세계사, 제갈량 편 中

5. 현대 사학자들의 평

라프 데 크레스피그니는 제갈량의 남방 정책이 실질적인 개발로 이뤄지지 못해 국력을 신장시키지 못했음을 지적하였다.

존 킬리그루(John Killigrew)는 제갈량의 북벌을 다룬 논문에서 전반적인 군사적 능력을 비판하며, 그가 불필요한 전쟁을 유지하였고 원정 전반에 어떠한 중대한 정치적 혹은 군사적 성공도 거두지 못했음에도 비운의 영웅으로 포장되었다고 평가했다.[38]

촉한 정권 연구의 권위자로서 캠브리지 중국사의 촉 파트를 저술한 마이클 파머(J. Michael Farmer)는 존 킬리그루를 인용하며, 제갈량을 둘러싼 신격화가 현대까지 이어지는 현상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39]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연구 교수인 최진열[40]은 자신의 저서 역사 삼국지에서 상당히 좋게 서술했다. 유비 세력이 일시적이지만 익주형주를 차지하게 공헌했으며, 제갈량의 군재에 관해 전투에서 이기고 전쟁에서 진 실패한 명장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그리고 제갈량의 군재를 사마의보다도 우수하게 평가하는 발언을 했다. 제갈량의 북벌 덕분에 위나라가 제갈량 사후에도 오랫동안 공격하지 못했다는 평이다. 물론 완벽한 인물은 아니라는 평가도 했다.

서강대학교 사학과의 계승범 교수[41]제갈량을 두고 이 좋지 않아서 실패한 영웅호걸이라 평가했다. 금요칼럼 운칠기삼과 노블레스 오블리주

임용한 교수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제갈량의 군재 묘사를 비판하면서, 오히려 그는 실리주의자로서 행정과 지휘를 잘 수행했다고 평가하였다.

중국 사회과 학원 도서·정기간행물 심독(審讀) 전문가로 재직 중인 통차오(童超)[42]는 제갈량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며, 라프 교수와 다르게 남방 정벌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민족들에 대한 회유책도 좋게 평가했으며, 남방 개발이 이 지역의 폐쇄성을 타파하였고 촉한국력을 적잖이 증강시켰다고 평가했다. 보이는 중국사 - 상

6. 관련 문서


[1] 이마저도 여러 명사들이 이는 하늘이 정한 것이지 제갈량을 탓할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평이 아래 다수 있다.[2] 治戎, 군사를 다스림.[3] 奇謀, 기이한 모략.[4] 將略, 장수로서의 지략.[5] #[6] 應變, 임기응변의 준말. #[7] 將略, 장수다운 지략. #[8] #[9] 자치통감에서는 "나만이 홀로 제갈량 같은 자를 얻어 신하로 둘 수 없단 말인가?"라고 말한다.[10] 그러자 번건은 '등애도 제대로 못 보면서 어찌 제갈량을 찾느냐'고 말했고, 사마염은 크게 깨달아 자기 아버지 사마소가 역모죄로 몰아 죽인 등애의 신원을 회복시켜 주었다.[11] 문서 참조, 제 환공을 춘추오패의 첫 타자로 올린 인물[12] 문서 참조, 한고조 유방 밑에서 승상을 역임, 한고조가 항우를 패배시킨 후에는 어느 주연에서 신하들이 개국의 공을 묻자 천하통일에 한신, 장량보다도 공이 크다고 한 인물. 공명은 결국 천하통일엔 실패했지만.[13] 괄호 안의 부분은 자치통감에 인용될 때 배제된 부분이다.[14] 이는 제갈량이 사마의에게 보낸 서신에 관해 논한 것이다.[15] 사마준은 사마의의 아들로 사마염에겐 숙부이며, 진 태시 6년(270년) 이래 독발수기능을 대적하기 위해 진서대장군 도독옹량주등제군사(都督雍凉等州諸軍事)로 관중을 진수했다.[16] 곽충오사는 배송지가 비판했으며 1사를 제외하고는 자치통감에도 들지 못했다. 그러나 곽충 5사의 경우 후대의 역사가들도 종종 제갈량의 신의와 군사 다루는 법에 대한 일화로서 인용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여러 관속 사대부들이라는 자들은 제갈량에 대해 실제로는 제대로 아는게 없어서, 비웃으며 떠들다가 후세의 배송지가 비판한 곽충의 일화를 듣고도 감히 그에 대해 의심을 가지지 못해 반박하지 못하고 더 이상 비웃지 못했다는 것. 곽충의 일화를 그저 옳다고 한 사마준 역시 제갈량에 대해선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으로 추정된다.[17] 배송지는 자신이 이해하는 바와 다른 일은 대차게 까는 경향이 있는데, 1차 북벌 후 돌아온 제갈량의 공(功)을 축하하는 일화를 담은 곽충 4사는 강유를 천수의 필부라 하고 가정에서의 손실등을 들어 비판하였는데, 이는 지나친 비판이나 다름이 없다. 왜냐하면 공적과 실책은 서로 따로 있는 거지 공적이 실책을 덮거나, 실책때문에 공적을 축하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제갈량이 강유를 얻고 농서(隴西), 남안(南安), 기성(冀城) 세곳의 항복을 받아낸 것은 확실한 공(功)이기 때문에 충분히 있을 수 있다는 얘기이다.[18] 이 일화는 속담조에서 나온듯하다. 속담조에 따르면 '환선무(환온)가 촉을 정벌했을 때 환온은 제갈량 시절의 하급 관리를 만나보게 되었는데, 그의 나이는 백여세였다. 환온이 묻기를 "제갈승상은 오늘날의 누구와 견줄 수 있겠소?" 이에 관리가 답하길 "갈공(제갈량)께서 계실 때도 남다른 사람을 느끼지 못하였는데, 갈공께서 돌아가신 후로는 진실로 그와 견줄만한 자를 보지 못했습니다." 하였다.'라고 한다.[19] 왕은(王隱)의 진서(晉書)에 의하면, 이흥(李興)은 이밀(李密)의 아들로 다른 이름은 안(安)이다.[20] 다시 말해 너무 지나치게 진지를 차린다는 말[21] 관중소하[22] 북제의 재상 양음(楊愔, 511~560)을 뜻한다, 준언(遵彥)은 그의 자.[23] 《근사록(近思錄)》 권14 〈관성현(觀聖賢)〉에 나온다. 당시 제갈량의 정사가 도에 가까워 성왕(聖王)의 정사처럼 예악을 일으키는 데 거의 가까웠다고 높이 평가한 것이다. 또 "제갈공명(諸葛孔明)은 왕자(王者)를 보좌할 마음은 있었으나 그가 행한 도리는 미진한 점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한실을 부흥시키려고 했던 일은 옳은 일이었다. 공명은 유자의 기상이 있었고 공명은 예악(禮樂)을 거의 일으킬 수 있었다.”라고 한 것을 가리킨다. 왕통(王通)이나 주희(朱熹)도 이와 비슷한 평론을 하였다.[24] 남송 무주(婺州) 영강(永康) 사람. 자는 동보(同甫)고, 학자들은 용천선생(龍川先生)이라 불렀다. 재주와 기상이 뛰어났고, 군사에 대해 논하기를 즐겼다. 성리(性理)에 대해 공리공담하는 것을 반대하고 실사실공(實事實功)을 강조했으며, 영가학파(永嘉學派)에 상응하는 영강학파(永康學派)를 창립했다. 주희(朱熹)와 가까웠지만 학문적으로는 왕도(王道), 패도(覇道) 및 의리(義利)에 대해 대립하는 관점으로 비판했고, 실제의 효용을 중시했다. 저서에 용천문집(龍川文集)과 용천사(龍川詞) 등이 있다.[25] 자는 경부(敬夫), 혹은 흠부(欽夫), 낙재(樂齋)이며, 호는 남헌(南軒)이고, 시호는 선(宣)이다. 나라를 지키고 군사를 중시하는 치국의 원칙을 비롯하여 경세치용 등을 강조했고, 많은 제자를 양성한 교육자이기도 했다. 장식은 학교가 과거에 얽매이지 않기를 바랐으며 학문의 현실적인 의의를 중시했다.[26] 三代: 하(夏)·은(殷)·주(周)[27] 당나라의 명신, 754년 ~ 805년[28]소학 가언小學 嘉言》에 이르길 제갈량이 제갈첨에게 남긴 말로 "담박이 아니면 뜻을 밝힐 수 없고, 영정(寧靜)이 아니면 멀리 이를 수 없다."라고 일렀다.[29] 원준의 글을 보고 이덕무가 이를 인용하여 평가한 글이다.[30] 수(隋)나라 행군총관(行軍摠管) 사만세(史萬歲)가 남녕(南寧) 만이(蠻夷) 찬완(爨翫)의 반란을 평정하던 도중에 제갈량(諸葛亮)의 공적을 기록한 비석을 보았는데, 그 뒷면에 “만세 뒤에 나보다 나은 자가 여기를 지나갈 것이다.〔萬歲後 勝我者過此〕”라고 새겨 있었다. 이에 사만세가 좌우로 하여금 그 비석을 쓰러뜨리고 진격하게 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북사 권 73 사만세 열전》[31] 이것 역시 제갈량의 예지력과 신통력에 관련된 일화일 듯하나, 《송사(宋史)》 권258 조빈열전(曹彬列傳)에는 그가 촉(蜀) 지방으로 출정한 사실만 기록되어 있고 이에 관련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32] 1597년 ~ 1673년, 조선 중기의 문인, 학자. 그를 평하는 사람들이 악부는 한․위(漢․魏)와 같고 가행(歌行)은 이백(李白), 두보(杜甫)와 같고 근체시는 초당, 성당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하였다.효종이 즉위하자 27편의 풍시를 지어 올려 호피를 하사받기도 했다. 이조판서, 대제학을 추증하였다.[33] 조선시대 고급공무원 선발 시험인 과거 대과의 마지막 관문으로, 최종합격자 33명의 등수를 정하는 시험에서 쓰는 답안.[34] https://ko.m.wikipedia.org/wiki/궈모뤄[35] 참고로 궈모뤄는 조조를 "민중적 혁명가"로 매우 높이 평가하고 유비제갈량에 대해선 상당히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인물이다.[36] 중국의 역사학자. 난카이 대학, 베이징대학교 등에서 중국 문학을 강의하였고 《문심조룡강소》를 저술하였다. 1929년경부터 역사학으로 전환하여 《중국통사간편》을 썼고 1947년에는 《중국근대사》를 편찬했다. 중국공산당 간부로서 역사학의 지도적 역할을 했다.[37] 중국의 역사학자. 장쑤성 출신, 장난대 문학원 원장을 지냈고, 홍콩 신야서원을 설립했다. 타이완 중국문화대학 교수로 주자학 연구에 전념하여 '국학대사'로 불렸다. 저서는《논어요략》,《중국사상사》등이다.[38] John Killigrew, Zhuge Liang and the Northern Campaign of 228–234[39] "중국에서 제갈량에 대한 많은 학술적 글들은 현존하는 역사적 근거를 무시하고 그를 칭찬하는 논조를 취한다. 제갈량에 대한 중국 서술의 엄청난 양과 일반적인 논조를 보고 있노라면, 우리는 중국에서 발행되는 모든 학술지의 매 호마다 실리기 충분할 정도로 많은 글들을 써내는 성도 외곽의 공장 단지를 상상해볼 수 있다. 그 공장 단지에서는 중국 역사를 전공한 대학원생들이 책상에 묶여 제갈량의 생각과 의식을 칭송하는 글을 쓰고 있을 것이다."[40]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연구 교수로 석사와 박사 학위를 갖고 있으며, 수많은 역사책을 출판했는데 2008년 대한출판문화협회 올해의 청소년 도서와 2010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로 선정되기도 했다.[41] 미국 워싱턴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42] 중국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연구원·부소장, 중국사학회 부비서장(副秘書長), 중국 위진남북조사학회 부회장, 중국 진문(秦文)연구회 회장 등등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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