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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려 시대 이전
전주 옛 이름으로 알려진 온고을은 이 지역으로 비정되는 마한 만로국(萬盧國), 원산성(圓山城)과 삼국시대 완산군(完山郡), 남북국시대 신라 완산주(完山州)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온'은 일백(一百)을 뜻하는 순우리말로 의미 확대가 일어나며 '전부', 또는 '모두'라는 뜻을 갖추게 된다. 원(圓) 역시 온을 음차함이었으며, 백제를 거쳐 신라에게 넘어간 때도 여전히 완산(完山)이라고 불렸다. 완산이란 지명은 현재 전주시 하위 행정구역인 완산구와, 옛 전주군에서 시가지를 제외하고 군으로 분리된 전북특별자치도 완주군으로 명맥을 잇고 있다. 그러나 온고을이란 말은 현대에 구현해 본 우리말 이름이라는 것이지 삼국시대에도 온고을이라고 불렸을 가능성은 낮다. '온'으로 시작하는 단어였으리라 추측할 순 있다.원삼국시대에 현 전주시 일대에 마한 만로국(萬盧國), 원산성(圓山城)이 위치해 있었다고 추정된다. 문화적으로는 완주와 함께 익산 건마국과 주로 흐름을 함께 하는 형국인데, 마한 시기에는 주로 건마국과 정치적 움직임을 함께 했을 개연성이 크다.
삼국시대에는 백제 완산군(完山郡)이었고, 두이현(豆伊縣, 현 완주군 이서면 일대), 고산현(高山縣, 현 완주군 고산면 일대), 구지지산현(仇知只山縣, 현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일대)을 거느렸다.
백제 멸망 후 당나라 웅진도독부가 지배하다 나당전쟁으로 신라 땅이 되었고 남북국시대 신라 9주 5소경 중 완산주(完山州)가 설치되었다. 현 전북도청 소재지 기능은 이미 이때부터 있었던 것이다. 다만 신라가 맨땅에 신도시를 건설해 주요도시로 삼은 게 아니었고 이미 입지가 좋아 사람들이 많이 살고 기반시설이 완비되어 있던 고구려와 백제 주요 도시를 발전시킨 것이었기 때문에 이미 백제 때부터 현 전북지방 내 요충지 겸 대도시였을 가능성이 높다. 757년(경덕왕 16)에 한화정책으로 완(完)을 의역해 완산주를 현재 이름인 '전주(全州)'라고 고쳤다. 거느린 두이현, 구지지산현은 각각 두성현(杜城縣), 금구현(金溝縣)이 된었다. 고산현은 개칭되지 않았다.
삼국통일전쟁 기간 및 그 직후에는 신라가 부여, 공주 일대에 주로 관심을 집중했고, 때문에 익산, 전주, 완주 일대에는 상대적으로 관심도가 떨어졌으며 때문에 역설적으로 백제 멸망 후에는 백제의 기억과 정체성이 보다 남아 있는 지역이 되었다. 패서 일대처럼 아예 실질적인 자치를 영위한 건 아니었지만 신라가 의도적인 원 신라인 사민은 덜한 지역이었다는 얘기. 때문에 후삼국시대인 900년(효공왕 4)에 신라 장수 견훤이 백제부흥운동을 기치로 걸고 광주에서 근거지를 전주로 옮겨 후백제의 수도로서 36년 동안 기능했다. 이때 옛 신라 전주 관청이 있던 현재 시내 지역을 벗어나 새로 후백제 도성을 쌓았는데, 이 전주성은 동고산(승암산, 치명자산)을 왕궁으로 삼아 북서쪽으로 뻗어나간 형상을 하고 있었으며, 그 규모는 현재 오목대 길 건너편으로 해서 전주고등학교 부근까지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 한옥마을, 풍남문 등이 있는 현재 시내 지역은 전주천변 습지대였다는 주장도 있다.
다만 이 시기에 의미심장한 변화가 일어난다. 후백제 존속 기간 초반에는 문경과 상주 일대와 고고학적으로는 꽤 비슷해지며, 그 이후 어느 시기에서는 다름아닌 서라벌 일대의 고고학적 유형이 대거 유입되는 것으로 드러난다. 이는 견훤이 고향인 문경 및 상주 일대 사람들을 전주 일대로 대거 초빙해서 지지 세력 삼아 우대하고, 이후 서라벌 함락 시기를 전후한 시점에서는 서라벌 및 그 인근 주민들을 강제로 후백제 수도 전주로 사민시켰기에 벌어진 현상으로 풀이된다. 아예 고고학적 양상마저 분명히 드러날 정도로 원신라인들의 대량 사민이 전주에 이뤄졌고 따라서 후백제의 핵심지 전북 일대는 오히려 후백제 시기를 거치면서 신라화가 많이 진행되었다고도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물론 견훤은 후백제 핵심지를 신라화하겠다고 한 게 아니라 통일신라의 선진 문화를 갖춘 신라의 마지막 남은 정수를 털어서 자기 나라를 강화하겠다는 의도로 한 거였으나, 견훤 자신이 타도당하고 얼마 안가 후백제 자체가 망하면서 뜻하지 않게 전북 서부를 포함한 전주 일대가 신라화되어 왕건의 삼한일통만 도운 결과만 남았다. 당연한 얘기로 이렇게 되면 전북 서부 일대의 분립적인 백제 연고 의식은 흐려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의든 타의든 전주에 정착하게 된 문경, 상주, 경주[1] 출신 원신라인들이 후백제 멸망 후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증거는 문헌으로든 고고학적으로든 딱히 확인되지는 않으니[2], 이들은 이후로도 전주에 정착해 살아간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는 신라 왕실조차도 해내지 못한 전주 일대의 신라화를 견훤이 해냈다고도 볼 수 있는 부분이다.
2. 고려 시대
- 936년: 후백제 멸망, 안남도호부 설치
- 940년: 전주로 명칭을 되돌림
- 983년: 전주목 설치
- 1005년: 전주에 절도사를 둠
- 1018년: 안남도호부 재설치
- 1022년: 전주목 설치
- 1182년: 관노비와 군인이 합세해서 폭동을 일으킴
- 1355년: 원나라 사신을 잡아 가둔 죄로 부곡으로 강등
- 1366년: 전주목으로 환원
- 1388년: 전주부성 축성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멸망시킨 후, 백제 유민들을 경계해 수도였던 전주에 당나라 군사행정제도인 도호부제를 본떠 안남(安南)도호부를 설치했다. 이는 신라 유민들을 경계해 신라 수도였던 경주 일대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한 것과 같지만, 이후 안동도호부가 현 안동시내로 이치되며 지금까지 경상북도 안동시로 이어지는 것과 달리 안남도호부는 여기저기 이치되다가 결국 폐지되며 현재 사라졌다. 마찬가지로 여진족을 경계해 설치된 안변도호부는 현재까지 강원도 안변군으로 이어진다. 요나라를 경계해 설치된 (영주)안북대도호부는 현 평안남도 안주시로 이름 일부가 이어진다.
일리천 전투 중에 도시가 완전히 작살났다. 이후 중심도시 자리에서 벗어난 건 아니고 안남도호부도 설치되어 있었지만 1010년 고려에 거란이 침입해서 현종이 나주까지 피난할 때 일부러 전주를 피해 갔다는 것을 보면 고려 초기 전주가 얼마나 처참했는지 짐작할 만 하다.[3] 파괴 이후 시가지는 다시 천변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으며, 1022년에는 상당히 복구되었는지 12목의 일원이 되었다. 공민왕때 원나라 사신을 가둔 일로 부곡으로 강등됐다 다시 '완산부'가 되었다.
3. 조선 시대
자세한 내용은 전주부 문서 참고하십시오. 조선 왕조 삼대 계국백 朝鮮王朝三大啓國伯 | ||
화령 | 완산 | 안변 |
- 1392년: 완산유수부 설치
- 1403년: 도명과 읍호를 일치시키기 위해 전주부로 개칭
- 1895년: 23부제 실시로 전주부 전주군으로 개편
- 1896년: 13도제 실시로 새로 설치된 전라북도 도감찰부를(도청을) 전주에 둠
- 1906년: 월경지 및 땅거스러미 정리로 군역 축소
4. 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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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현 전주시 일대 행정구역 상황. |
- 1914년 : 전주군과 고산군을 통합하여 전주군으로 개편
- 하위 면 : 전주면, 이동면, 이서면, 우림면, 난전면, 구이면, 상관면, 소양면, 용진면, 초포면, 조촌면, 삼례면, 봉동면, 고산면, 삼기면, 비봉면, 운선면, 화산면, 동상면, 운동하면
- 1915년, 운선면 중 현 도평리, 임화리 지역을 충청남도 논산군 양촌면에 편입(가야곡면 지역에서 편입한 지역을 환원)하고 논산군 양촌면에서 산북리(현 산북리 일부)를 환원
- 1930년 : 이동면 9개 리(노송리, 인후리, 중산리, 화산리 등)를 전주면에 편입, 정 등을 신설
- 1931년 : 전주면을 전주읍으로 승격
- 1935년 : 전주읍이 전주부로 승격되어 분리되고, 전주군의 잔여지역을 완주군으로 개칭. 우림면·난전면을 우전면으로, 삼기면을 고산면·화산면에, 운선면·운동하면을 화산면·운주면에 합면. 우림면 청도리(위 지도에서 금산면 시가지(원평) 쪽으로 삐죽 튀어나온 곳)를 김제군 금산면에 편입
- 1940년 : 완주군 이동면(홍산리는 우전면으로 이관), 조촌면 일부를 전주부에 편입
5. 대한민국
1974년부터 2001년까지 사용한 깃발 |
1945년 8.15 광복 당시 전주부와 완주군의 행정구역 상황. |
전주 정(町)명 개정 | ||
구 행정구역 | 신 행정구역 | 현 행정구역 |
대정정(大正町)1정목 | 망성동(望城洞) | 완산구 중앙동1가 |
대정정(大正町)2정목 | 선북동(宣北洞) | 완산구 중앙동2가 |
대정정(大正町)3정목 | 중앙동 | 완산구 중앙동3가 |
대정정(大正町)4정목 | 문화동(文化洞) | 완산구 경원동1가 |
대정정(大正町)5정목 | 경동(慶洞) | 완산구 경원동2가 |
대정정(大正町)6정목 | 동인동(東仁洞) | 완산구 풍남동1가 |
대정정(大正町)7정목 | 관선동(觀善洞) | 완산구 풍남동2가 |
본정(本町)1정목 | 남계동(南溪洞) | 완산구 전동3가 |
본정(本町)2정목 | 청석동(靑石洞) | 완산구 다가동1가 |
본정(本町)3정목 | 서인동(西仁洞) | 완산구 다가동3가 |
본정(本町)4정목 | 대동(大洞) | 완산구 다가동4가 |
팔달정(八達町) | 종동(鐘洞) | 완산구 중앙동4가 |
대화정(大和町) | 전동 | 완산구 전동 |
풍남정 | 풍남동 | 완산구 풍남동3가 |
고사정 | 고사동 | 완산구 고사동 |
화원정(華花園町) | 화원동(花園洞) | 완산구 경원동2가 |
다가정 | 다가동 | 완산구 다가동2가 |
청수정(淸水町) | 교동 | 완산구 교동 |
완산정 | 완산동 | 완산구 동완산동, 서완산동1가~2가 |
서정(曙町) | 서학동 | 완산구 서서학동 |
상생정(相生町) | 태평동 | 구 태평동1가~ |
노송정 | 노송동 | 동노송동 서노송동 남노송동 중노송동 |
소화정(昭和町) | 진북동 | 덕진구 진북동 |
화산정 | 화산동 | 구 구 |
중산정 | 중산동 | 구 중화산동2가 |
검암정 | 금암동 | 덕진구 인후동2가, 덕진동1가 각 일부 |
서신정 | 서신동 | 완산구 서신동 |
덕진정 | 덕진동 | 덕진구 덕진동1·2가 각 일부 |
인후정 | 인후동 | 덕진구 인후동1가, 인후동2가 일부 |
- 1957년 11월 6일: 완주군 초포면(하리는 삼례면으로, 상운리는 용진면으로 이관), 우전면(중인리, 용복리, 석구리, 원당리는 구이면으로 이관) 및 조촌면·용진면 일부를 전주시에 편입. 시기 상으로 미루어 보아 이는 제4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둔 자유당 이승만 정권의 게리맨더링으로 보인다. 실제로 같은 시기에 대구시, 광주시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다. 다만 위에서 말한 대구와 광주의 사례의 경우 이때 편입된 지역 중 일부가 나중에 인근 군으로 환원되다.
법률 제453호 시·군행정구역변경에관한법률 (시행 1957.11.06) | |
1957년 이전 구 행정구역 | 1958년 이후 신 행정구역 |
완산군 초포면 우방리 | 전주시 우아동3가 |
완산군 초포면 신성리 | 전주시 호성동1가 |
완산군 초포면 봉암리 | 전주시 호성동2가 |
완산군 초포면 송전리 | 전주시 호성동3가 |
완산군 초포면 전당리 | 전주시 전미동1가 |
완산군 초포면 미산리 | 전주시 전미동2가 |
완산군 우전면 송정리 | 전주시 효자동1가 |
완산군 우전면 효자리 | 전주시 효자동2가 |
완산군 우전면 홍산리 | 전주시 효자동3가 |
완산군 우전면 태평리 | 전주시 삼천동1가 |
완산군 우전면 계용리 | 전주시 삼천동2가 |
완산군 우전면 안산리 | 전주시 삼천동3가 |
완산군 우전면 석불리 | 전주시 평화동1가 |
완산군 우전면 장천리 | 전주시 평화동2가 |
완산군 우전면 문정리 | 전주시 평화동3가 |
완산군 조촌면 오송리 | 전주시 송천동1가 |
완산군 조촌면 시천리 | 전주시 송천동2가 |
완산군 조촌면 동곡리 | 전주시 팔복동2가 |
완산군 조촌면 동산리 일부 | 전주시 팔복동1가 |
완산군 조촌면 여의리 일부 | 전주시 팔복동3가 |
완산군 용진면 아중리 | 전주시 우아동1가 |
완산군 용진면 산정리 일부 | 전주시 우아동2가 |
완산군 상관면 대성리 일부 | 전주시 동서학동 |
1957년 전주시 확장 당시 행정구역 상황. |
1957년 12월 12일: 편입지역 리를 동으로 개편하고 일부 동을 통폐합했다. 외곽 지역에 있던, 각기 이름이 다른 법정리들을 몇 개씩 뭉쳐 XX동n가 방식으로 한 이름으로 통일한 다음 숫자를 붙였다.
전주시 조례 제108호 | |
구 행정구역 | 신 행정구역 |
망성동(望城洞) | 중앙동1가 |
선북동(宣北洞) | 중앙동2가 |
중앙동 | 중앙동3가 |
종동(鐘洞) | 중앙동4가 |
청석동(靑石洞) | 다가동1가 |
다가동 | 다가동2가 |
서인동(西仁洞) | 다가동3가 |
대동(大洞) | 다가동4가 |
문화동(文化洞) | 경원동1가 |
경동(慶洞) | 경원동2가 |
화원동(花園洞) | 경원동3가 |
동인동(東仁洞) | 풍남동1가 |
관선동(觀善洞) | 풍남동2가 |
풍남동 | 풍남동3가 |
남전동(南洞) | 전동1가 |
북전동(北洞) | 전동2가 |
남계동(南溪洞) | 전동3가 |
남고사동(南) | 고사동1가 |
북고사동北 | 고사동2가 |
동교동(東校洞) | 교동1가 |
서교동(西校洞) | 교동2가 |
동태평동(東太平洞) | 태평동1가 |
서태평동(西太平洞) | 태평동2가 |
동노송동 | 중노송동1가 |
중노송동 | 중노송동2가 |
동완산동 | 동완산동1가 |
중완산동 | 동완산동2가 |
서완산동 | 서완산동1가 |
남화산동 | 서완산동2가 |
북화산동 | 중화산동1가 |
중산동 | 중화산동2가 |
인후동 일부 | 인후동1가 |
인후동 일부, 동금암동(東 洞) | 인후동2가 |
덕진동 일부, 서금암동(西 洞) | 덕진동1가 |
덕진동 일부, 북금암동(北 洞) | 덕진동2가 |
동서학동 | 동서학동1가 |
산성동(山城洞) | 동서학동2가 |
- 1983년 2월 15일: 완주군 상관면 대성리·색장리, (1973년에 일부가 편입된) 용진면 산정리를 전주시에 편입
1987년 완주군 조촌읍 편입 당시 행정구역 상황. |
- 1987년 1월 1일: 완주군 조촌읍[4]을 전주시에 편입.
- 1989년 1월 1일: 완주군 용진면 산정리, 금상리와 구이면(1957년에 대부분 전주시에 편입된 우전면 잔여 지역) 중인리, 용복리, 석구리, 원당리를 전주시에 편입. 이 개편으로 이서면과 완주군 나머지 지역이 분리되며 이서면이 완주군의 월경지가 되었다.
[1] 다만 견훤이 경주에서 붙잡아 전주에 강제로 사민한 이들은 대부분 진골 출신들이었을 개연성이 높은 것도 아이러니다.[2] 태평양 전쟁 말기에 홋카이도 일대에 끌려간 한국인 남성들도 끌려간 지 불과 5~6년 밖에는 되지 않았으나 이미 그동안 생활기반을 그곳에 꾸리고 결혼마저 한 상태였기에, 대부분은 한반도로 돌아오려면 올 수 있었음에도 돌아오지 못하고 어쩌는 수 없이 그곳에 정착해야만 했다. 전주에 끌려가서 최소 8년, 길게는 이십 몇 년을 지낸 원신라인들도 상황이 비슷했을 가능성이 있다.[3] 이 때 전주를 피해 가자고 주장한 신하의 논리는 '전주는 태조께서 싫어하셨던 곳이니 주상께서는 행차하지 마소서'였다. 훈요 10조가 위작되었다는 설과 별개로 태조가 전북 일대(후백제 중심지역)를 꺼렸다는 증거이다. 전주는 후백제 수도였으니 고려 초기까지 반고려 감정이 잔존해 있었을 가능성이 있는데 아직 호족이 사병을 거느리던 시대였고 실제로 현종은 피난 중 왕실에 반감이 있는 호족들에게 위협을 받은 적이 있다. 따라서 당시 옛 후백제 수도를 지나가는 건 영국 국왕이 북아일랜드를 방문하는 것처럼 위험할 가능성이 높다.[4] 이 중 원동리(현 원동)는 1983년에 이서면에서 조촌면으로 넘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