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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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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작위 등급3. 관례적 작위4. 이민족 작위5. 작위를 얻는 법

1. 개요

이십등작(二十等爵)은 진나라상앙이 도입한 작위이다. 정확하게는 18등급의 법품(法品)과 제후의 작위로 여겨지던 관내후와 열후로 구성되는데, 일반적으로 이들을 합쳐 20등작 제도로 부른다. 평민들에게 수여되는 하위 8등급을 제외하여 12등작으로 치는 경우도 있다. 진나라에서 시작되어 전한후한을 거쳐 운용되었다.

나라 전체의 각 호(戶)에 20개 등급의 작위나 법품을 할당하는 것이었다. 법품을 받는 대상은 호적에 호주(戶主)로, 호적에 오르지 않은 무적자나 유민, 노비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전쟁에서 공적을 세우는 게 가장 확실하게 작위를 올리는 방법이었지만 평소 다른 것으로 공적을 세우거나 왕이 기념행사 때 아예 한등급씩 일괄적으로 올려주기도 하는 등 진나라 백성이라면 진짜 아무것도 안 하는 수준이라도 어느 정도의 작위는 있게 마련이었다.

작위와 법품은 국가에 세운 공적을 뜻했으며, 동시에 사회적 명예이기도 했다. 그 등급에 따라 경작지와 주거지가 차등적으로 지급되어, 경제적인 혜택도 분명했다.[1] 그리고 법을 어겨서 죄를 지은 자가 있다면 반역이나 살인 같은 중대한 죄는 사형에 처했지만,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죄는 대부분 법품을 일정 등급 낮추는 것으로 대체할 수 있었다.[2]

진나라의 형벌은 가혹했지만 동시에 감형받거나 면제받을 방법이 있었기에 백성들이 무조건 규정대로 혹형을 받은 건 아니었다. 문제는 진나라 통일 후에는 이런 조치가 결과적으로 심각한 차별을 불러왔다는 데 있다. 물론 진시황이 6국에만 적용하는 특별법을 따로 만든 건 아니고 원래 진나라 법 그대로 적용했을 뿐인데, 문제는 기존 진나라 백성들은 전쟁에서 공을 세웠거나 기존의 공적으로 작위를 높여서 처벌을 면하기 수월했던 반면, 정복된 6국의 백성들은 진나라 백성들 보다는 낮은 지위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어서 상대적으로 가혹한 처벌을 받게 된 것이다.[3] 한고제는 진나라의 법체계를 계승했지만 대신 처벌수위를 대폭 완화했고, 또한 백성들에게 법품을 그냥 막 뿌렸기에 결과적으로 진나라의 형법보다는 훨씬 너그러웠다.[4]

또한 규정대로 공유지를 배분하기란 사실 진나라 시절부터 불가능했던 일로 파악되며, 한나라가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인구가 증가한 것에 더하여, 한무제가 벌인 각종 대외원정으로 인해 재정이 궁핍해지자 군사비 조달을 명목으로 매작하는 일도 잦아지면서, 경제적인 특전은 유명무실화되었다.[5] 한무제는 1~11 등급에 새로 무공작(武功爵)을 제정해 실제 군공을 세운 장병들에게 수여하기도 했지만 이마저도 널리 쓰이진 못했다. 결국 전한 말기쯤에는 사람들이 18등급의 법품에는 별 가치를 두지 않게 되었고, 상대적으로 제후 작위로 구분되어있던 관내후와 열후의 가치가 고평가된다.

전한 경제(景帝)무제(武帝) 재위기를 거치면서, 열후나 공주의 식읍을 실질적으로 황제가 통치권을 행사하게 되면서 통치권 유무에 따른 차이점이 사라지고, 열후의 '국(國)'과 공주가 사실상의 통치권을 행사해오던 식읍인 '읍(邑)'은 현(縣)과 동급인 행정구역으로 취급되어 운영된다.[6] 관례상 새로 황족이나 열후가 식읍을 받을 때마다 기존의 현에서 국이나 읍을 독립시키는 행태는 계속되어 결과적으로 불필요한 행정구역이 늘어나는 폐단이 발생하게 되었는데, 후한 광무제가 식읍의 규모에 따라 기존의 열후들을 현후(縣侯)–향후(鄕侯)–정후(亭侯) 3종류으로 구분하고, 현후가 되지 않는 이상 기존의 현에서 새로운 '국(國)'을 독립시키지 않게끔 만들었다.[7] 후한은 보통 식읍을 수여하면 열후로 봉했기 때문에 관내후에게는 식읍이 수여되지 않게 되어, 관내후와 열후의 실질적인 구분도 다시 가능해졌다.

후한 말, 조조가 하위 8급의 이민작(吏民爵)과 9등급인 오대부(五大夫)만을 남기고 그외 10~18등급의 법품을 혁파하였고, 관내후 아래에 명호후(名號侯)–관중후(關中侯)–관외후(關外侯)를 설치하면서 이십등작 제도는 폐지되었다.

2. 작위 등급

등급의 숫자가 적을수록 낮고, 클수록 높은 계급이다.

법품 1~8 등급은 일반 평민도 받을 수 있는 작위로, '민작'(民爵) 또는 '이작'(吏爵)이란 이름으로 구분되었는데, 이를 통칭하여 이민작(吏民爵)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다른 등급들이 폐지된 수나라 이후에도 명목상 이민작 등급은 살아남아 송나라 때까지 사용된 흔적이 남아있긴 하지만, 이미 당나라 때 '고작'(古爵)으로 불릴 정도로 쇠퇴한 상황이었고 송나라 멸망 이후로는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법품 9~18 등급은 봉록 600석 이상의 관리들에게만 수여되어, 관작(官爵)으로 구분되었다. 관작은 진나라 때 관리들의 계급 서열 역할을 했었지만, 한나라에서는 봉록 등급을 의미하는 질(秩)의 격차가 곧 관리들의 서열로 여겨졌기 때문에 중요하게 여겨지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9등급인 오대부 이외의 다른 8개 등급은 군주에게 (卿)으로 예우받는 고위 등급이다.[8] 후한조조가 이 8개 등급을 혁파함으로써 사라졌다.

19~20 등급은 법품에는 해당되지 않고 한나라 때의 명칭을 기준으로 각각 관내후(關內侯)와 열후(列侯)로 불린 별개의 작위로써, 제후(諸侯)로 통칭된 특별한 신분이었다. 최고 등급인 열후로 책봉되어야 후(侯)의 칭호를 사용할 수 있어, 수여받은 식읍의 이름을 따서 ○○후(侯)로 호칭될 수 있다. 따라서 관내후 이하는 식읍을 소유하더라도 후(侯)로 호칭되지 않고 기존의 관례대로 ○○군(君)으로 불렸다. 전한 때까지는 식읍에 대한 통치권의 유무로 열후와 관내후가 구분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후한 때는 보통 식읍을 수여하면 곧바로 열후로 책봉했기에 관내후는 식읍을 갖지 않는 작위로서 인식되어 열후와 구분된 것으로 보인다.

후한 때에는 식읍의 규모에 따라 열후가 현후(縣侯)–향후(鄕侯)–정후(亭侯) 순으로 구분되고, 후한 말에는 현후(縣侯)–도향후(都鄕侯)–향후(鄕侯)–도정후(都亭侯)–정후(亭侯) 순으로 한층 더 세분화 되었다. 다만 이는 식읍을 수여하면 관례상 새로운 행정구역을 분할해야 하는 폐단을 막고자 도입한 구분이었을 뿐 열후 계급 내 서열을 의미하지는 않았는데, 삼국시대 위나라 때부터는 열후 계급을 나눈 별도의 등급들로 규정되어 서열이 발생했다. 후한 말기 조조에 의해 관내후 아래로 명호후(名號侯)[9]와 관중후(關中侯), 관외후(關外侯) 3등급이 신설되어 관내후 등급 또한 세분화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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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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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급
20등작
무공작
지급분[10]
× 무작자(無爵者)[11] 1
민작 1등급 공사(公士) 조사(造士) 1.5
2등급 상조(上造) 한여위(閒輿衛) 2
3등급 잠요(簪裊) 양사(良士) 3
4등급 불경(不更) 원융사(元戎士) 4
이작 5등급 대부(大夫) 관수(官首) 5
6등급 관대부(官大夫)[12] 병탁(秉鐸) 7
7등급 공대부(公大夫) 천부(千夫) 9
8등급 공승(公乗) 낙경(樂卿) 20
관작
[13]
9등급 오대부(五大夫) 집융(執戎) 25
10등급 좌서장(左庶長)[14] 정려서장(政戾庶長) 74
11등급 우서장(右庶長) 군위(軍衛) 76
12등급 좌경(左更) 78
13등급 중경(中更) 80
14등급 우경(右更) 82
15등급 소상조(少上造) 84
16등급 대량조(大良造) → 대상조(大上造)[15] 86
17등급 사거서장(駟車庶長) 88
18등급 대서장(大庶長)[16] 90
제후 19등급 내후(內侯) → 윤후(倫侯) → 관내후(關內侯)[17] 95
20등급 철후(徹侯) → 열후(列侯)[18] 105[19]

이 외에 이민족 수장들에게 수여한 별도의 작위가 있었고, 전한 때에는 관례에 따라 왕(王)과 공(公)의 칭호를 받는 제후들도 생겨났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문단 참조.

왕망이 제후 등급과 왕을 폐지하고 유교 경전에 규정된 작위 등급에 따른 오등작을 시행하였으나, 신나라가 망하면서 환원되었다. 이후 위나라 때 왕과 열후 사이에 오등작 등이 도입되어, 공(公)과 백(伯) 사이에 오등작 후(侯)가 있음에도 오등작 최하위인 남(男) 아래에 다시 열후 이하의 후(侯)들이 혼재하는 복잡한 양상이 되었다. 서진은 오등작 위로 개국작(開國爵)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또 만들어내어 한층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열후 이하의 제후 등급과 개국작을 별도로 구분하는 개념 등은 남북조시대 때 북조 왕조들이 폐지했고, 수나라로 이어지면서 오등작 서열에 따른 작위제도가 정립되었다.

3. 관례적 작위

춘추전국시대 이전부터 식읍을 보유한 사람은 그 식읍의 지명을 봉호로 따와서 '○○군(君)'으로 호칭하는 관례가 있었다.

또한 한나라 때에는 이십등작 이외의 작위로 왕(王)과 공(公)이 발생되기도 했다.

3.1. 군(君)

진나라에서는 철후로 책봉되어야 '○○후(侯)'로 호칭되는 특전을 누릴 수 있었고, 철후가 아님에도 식읍을 수여받은 사람은 기존의 관례대로 '○○군'으로 불렸다.

후한 때에는 보통 식읍을 수여하면 열후로 책봉했으나, 여성은 남편이나 자식이 생존 중이라면 호주가 될 수 없기에 열후로 책봉되지 못했고, 결국 군으로 호칭되는 대상은 보통 여성이 식읍을 받는 경우로 한정되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지양군(池陽君)이다. 이러한 관례로 인해 군 칭호는 점차 여성 전용의 작위로 인식되었고, 수나라 이후부터는 외명부의 작호(爵號)로 활용된다.

3.2. 왕(王)

원래 시황제가 황제를 칭하면서 사라진 칭호였으나, 진나라의 통치질서가 붕괴되어 기존 6국 제후의 후예들이 왕(王)을 자칭하면서 부활했다.

한고제항우를 멸한 뒤에 제후왕들의 추대를 받아 황제가 되면서, 형식상 황제의 신하가 되긴 하였으나 자신들의 독자성은 그대로 인정받아, 여러 개의 군(郡)을 거느린 독립세력으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고제 생전에 초나라 왕 한신 등 대부분의 이성제후왕들이 반란을 일으키거나 반역 혐의를 받고 제거되어 황족들이 임명되는 작위처럼 변질되었고, 그마저도 오초7국의 난을 거치고 추은령(推恩令)이 시행되면서 봉토의 규모가 지속적으로 축소되어, 1개 군(郡)을 영지로 삼는 황족 전용의 작위처럼 여겨지게 된다.

하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왕은 관례상 황족에게 수여되는 특전이었을 뿐, 열후나 관내후처럼 법제화된 작위였던 것은 아니다. 조비가 선양을 받은 뒤에 후한의 황족들의 왕작을 폐지하여 열후로 강봉(降封)하고, 위나라 황족은 공(公)으로 책봉했다. 하지만 이때 손권을 오왕(吳王)으로 책봉했으므로 왕작 자체를 폐지한 것은 아니었으며, 이듬해에 황족들을 왕으로 승작시켰다. 아마도 후한 때 제후왕으로 책봉된 구 황족들을 강봉하고자 이와 같은 절차를 진행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위나라에서는 황족들을 항렬에 따라 왕과 공으로 책봉하는 것을 법제화하였으며, 이후 왕조들은 조비의 선양 사례를 명분으로 삼아 이미 왕으로 책봉되어 있던 전 왕조의 황족들을 강봉했기에 동일한 이유로 왕작을 폐지한 사례는 없다.

3.3. 공(公)

보통 주나라 때부터 있었던 작위로 알려져 있으나, 주나라 때에도 공(公)은 왕의 스승격으로 예우를 받는 삼공(三公)의 관직을 맡은 신하나 공식적으로 왕의 신하가 아닌 빈객의 예우를 받는 송후(宋侯)를 왕이 특별하게 높여 부른 호칭에 불과했다.

한나라 때 유교가 통치질서를 구성하는 사상으로 받들여지면서 이왕삼각의 예에 따라 상나라주나라의 후예들을 예우해야 한다는 여론이 강해졌는데, 처음에는 관내후 지위를 주는 것에서 시작했으나, 이들의 지위가 점차 높아져 결국에는 송공(宋公)과 정공(鄭公)[20]으로 지위가 승격했다. 비록 이들의 식읍은 현(縣)과 동격의 규모에 불과했으나, 의전상 서열은 높아서 왕(王)보다 더 높은 예우를 받았다. 두 왕조의 후예 이외에는 오직 왕망조조구석의 특전과 함께 이 칭호를 받았다.[21]

삼국시대 위나라 때 비로소 왕(王)과 공(公)의 작위가 법제화되고, 서열 역시 왕이 공보다 높은 것으로 설정되었다. 다만 주나라의 후예인 위공(衛公)이나 한나라의 후예인 산양공(山陽公)은 황제의 빈객 지위이기에, 영가의 난으로 단절될 때까지는 예외적으로 의전상 왕보다 높은 서열이었다. 또한 조조의 선양 사례에 따라, 구석을 받고 공(公)으로 책봉된 뒤 왕(王)으로 승작하고 최종적으로 선양을 받는 행위는 육조시대 내내 반복되었는데, 이때 찬탈자가 구석을 받아 책봉된 공(公)의 서열은 당연히 일반 황족들의 왕(王)보다 높은 서열로 간주되었다.

4. 이민족 작위

솔중왕(率眾王) – 귀의후(歸義侯) – 읍군(邑君) – 읍장(邑長)

실제 명칭은 '수여세력의 국호+솔선(率善)+종족명 또는 봉호+작위'로 구성되었는데,[22] '솔선'이나 종족명을 생략한 용례도 있다. 실제 발견되는 유물들 중에는 읍장보다 낮은 지위로 해당 세력의 규모에 따른 것으로 추정되는 천장(仟長)·백장(佰長) 등을 사용한 경우도 보인다. 진(秦)나라 때부터 남북조시대까지 쓰였던 것으로 확인된다.

진나라의 근거지였던 관중지방조차 토착 이민족인 저족이 있었듯, 진나라와 한나라 전역에는 비록 독자적인 세력이나 국가를 구성하지는 못했지만, 한족과는 언어와 문화가 명백히 다르고 독자적인 정체성을 가진 다양한 이민족들이 살았다. 이러한 이민족 집단들을 포섭하고자, 이민족 수장층들에게 그 세력의 규모에 따라 위와 같은 특수 작위를 책봉하면서 이들에게 조세나 징병의 의무를 부과했던 것들이 확인된다.[23]

솔중왕이나 귀의후를 처음 책봉할 때를 제외하면, 이민족 전용 작위는 황제가 직접 책봉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그 이민족을 관할하는 지역의 태수가 재량권을 행사하여 수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부터는 이민족 수장들에게 위의 작위 외에도 중랑장(中郞將)–도위(都尉)–백장(伯長) 등 이민족 편성 부대의 지휘관 직책을 수여하기도 했다.[24]

한나라 초기까지는 외국의 군주를 왕(王)이나 고유칭호인 선우(單于) 등을 그대로 인정하기도 했다.[25] 하지만 한무제가 흉노를 제압한 시점에는 중원 주변에 국가 체계를 갖추고 있던 고조선이나 남월 등이 모두 멸망한 상황이 되면서, 그 이후로는 국경에 인접한 '외국'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에 매우 인색해졌고, 결국 국경 바깥의 이민족 군주에게도 이 작위들을 수여했다.

황제의 조정에서는 점차 외교를 직접 주관하지 않게 되었으며, 국경 바깥의 이민족과의 외교는 실질적으로 인접한 지역의 태수가 전담했다. 중원 제국이 현실적으로 중원과 구분되는 세계인 '해외(海外)'와 외국의 존재를 다시 인정하게 된 것은 영가의 난 이후로, 남북조시대부터 중앙 조정에서 다시 '외국'과의 외교를 직접 담당하면서 조공책봉관계에 따른 국제질서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5. 작위를 얻는 법

  • 군공 포상
    전투에서 자신이 벤 적군의 머리, 즉, 목 1개와 작위의 등급이 연동됨에 따라 수급이란 단어가 탄생했다. 특히 군공을 세우면 작위 등급에 따라 보장되는 경작지나 주거지 외에 추가적인 지급분도 수여되었다.
  • 공적 표창
    군공이 아니더라도, 국가에 곡물을 헌납하거나 범죄자 체포에 협력하는 등 본연의 임무 이상의 특별한 기여를 하는 경우에 작위 승진이 이뤄지기도 했다.
  • 신개척지에 이주
    전한 초반까지 군(郡)·현(縣)을 설치하는 과정은 확보된 영역에 주변 지방 사람들을 사민시키는 형태가 아니라, 현지 토착 이민족이나 반정부 성향의 유랑민들이 자리잡고 있던 영역에 일단 군·현의 경계를 설정하고 실제로 현을 건설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즉 새로 설치되는 군·현으로 이주하는 것은 치안이 전혀 확보되지 않은 지역에 정착하는 모험이었기에, 마땅한 유인책을 마련하지 않는 이상 이주 대상자들의 협력을 받아낼 수는 없었다. 작위를 수여하는 것 또한 그 유인책 중 하나였다.
  • 국가의 경사
    제왕의 즉위, 개원, 열후 책봉, 태자 책봉 등의 경사에 의례적으로 잠요 등급 이하의 호(戶)에 민작 1등급씩 수여했다. 군주 자신이 기분에 따라 내려주기도 해서, 진시황이 천하통일을 달성한 뒤 그 기념으로 기존 진나라 백성들의 작위를 1등급씩 올려준 사례가 있다. 일반 평민은 대부분 이런식으로 승진했는데, 일괄적으로 모든 민호에게 내려줬기 때문에 아무것도 안 하고 살아도 죄를 짓지 않으면 알아서 등급이 올라갔다. 오래 산 노인일수록 자연스럽게 높은 등급을 보유하게 되므로 비록 명예직일 뿐이지만 향촌에서는 높은 권위를 가지게 된다. 이렇게 국가의 경사 때 민작을 수여하는 관례는 송나라 때까지 지속되었기에, 남북조시대 이후로는 민작에 큰 의미가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송나라 때까지 제도상으로는 잔존할 수 있었다.
  • 상속
    제후 작위는 정식 후계자가 그대로 세습했고, 그외 10등급 이상 계급의 자식은 모두 8등급인 공승부터 출발했다. 3~9 등급은 자신이 보유했던 등급에서 2등급을 깎은 등급 수 만큼 상속할 수 있었는데 분할상속도 가능했다. 단, 법품을 보유한 자가 공무 중 순직한 경우에 후계자는 선친의 등급을 그대로 물려받을 수 있었다. 열후의 경우 자신이 보유한 식읍의 일부를 반납하여 후계자가 아닌 자식을 관내후로 올릴 수 있었는데, 1명당 100호를 반납해야 했다.

[1] 당시에 농민들은 일반적으로 농한기엔 향(鄕)에 배치되었다가 농번기에는 그 해에 경작가능한 전(田)에 배치되어 전 인근에 위치한 거주구역인 리(里)에서 생활하였고, 농업에 종사하지 않는 평민이나 관리들은 다른 일가족이나 노예를 대신 보낼 수 있었다. 해마다 배치되는 전·리는 달랐기에, 주기적인 이동도 잦았다. 사유지가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 농법의 한계상 휴경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드넓은 경작지를 소유한 것이 아니라면, 매년 경작가능한 농경지와 그 인근에 위치한 주거지를 더 많이 지급받는 혜택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2] 이십등작제에서 법품은 호(戶)에 수여되는 개념이었고, 법품으로 형벌을 대신할 경우에는 범법자의 소속 호의 법품에 구애되지는 않았다. 즉, 생판 남의 형벌을 면제해주기 위해 법품을 깎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살고 있는 현(縣)이 다를 경우는 혈족 같은 경우에 한정해서 예외적으로 인정되었고, 군(郡)을 초월하는 경우에는 사실상 인정되지 않았다.[3] 진나라 통일 이후 남군(南郡)의 행정문서인 <리야진간(里耶秦簡)>에는 '荊不更'이라는 작위가 발견된다. '형(荊)'은 당시에 장양왕의 이름 '자초(子楚)'를 피휘하고자 '초(楚)'를 대신하여 쓰였는데, 때문에 이 작위를 두고 다소 논란은 있으나 대체로 초나라 시절의 작위를 인정한 사례로 해석하고 있다. 의외로 진나라는 6국을 정복한 뒤로 기존 유력자들의 기득권을 인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귀족들의 식읍도 몰수하지 않았으며, 식읍을 중앙 직할로 편입시킬 때는 반드시 보상까지 했을 정도였다. 다만 초나라에서 진나라의 이십등작처럼 모든 백성들을 대상으로 작위나 법품을 수여했는지 알 수 없고, 진나라가 모든 6국 백성들의 기득권을 보장해줬는지도 확인되지는 않는다. 특히 <리야진간>에서는 진나라 관리들이 법령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초나라 출신 백성이나 이민족들에게 불이익을 주는 사례가 자주 드러나고 있어, 진나라의 통치가 전혀 관용적이지는 않았음이 드러나고 있다.[4] 사실 한나라 초반까지 황제의 중앙 조정은 기존 6국을 완전히 흡수하지 못했다. 고제가 이성 제후왕들을 대부분 숙청하기는 했으나, 제후왕국은 기존 6국 유력자들의 지지를 받으며 형성된 정권이었으므로 기존의 제후왕국을 완전히 해체하지는 못했고, 황족을 새로운 왕으로 세워두는 것이 한계였다. 제후왕국이 완전히 흡수되어 한나라의 행정구역으로 전락한 것은 오초7국의 난을 진압한 이후이다.[5] 전한 중기 무렵부터 이런 공유지들은 군현의 통제에서 벗어나 사실상 향촌 사회의 유력자로 등장한 호족들이 통제하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6] 진나라의 군현제 상에서 현(縣)은 기존 진나라 귀족들이 소유하던 식읍들 위에 설치된 행정구역이었기에, 열후의 식읍에 어느정도 독자성이 인정되어도 현의 행정력과 사법권을 넘어서는 수준으로 양립할 수는 없었다. 전한의 열후나 공주의 식읍은 군국제의 여파로 현의 통제를 넘어서는 수준의 독자적인 통치권을 행사하여 왔기에 문제가 된 것이다.[7] 사실 이마저도 기존의 현을 이름만 국으로 고친게 대부분이다.[8] 이들은 현(縣)의 관할민이 아닌 특수한 신분으로 취급되기도 했다.[9] 현재 쓰이는 표현대로 바꾸자면 '○○侯'라는 명칭이다. 가장 유명한 사례가 손호가 귀명후(歸命侯)로 책봉된 것이다.[10] 장가산한간의 〈이년율령(二年律令)〉에서 파악된 공유지 배분 규정으로, 해당 수치 만큼 경작지와 주거지를 각각 지급했다. 지급 단위는 경작지의 경우 경(頃), 주거지의 경우 택(宅)이다.[11] 진나라 때 작성된 간독에서 실제 쓰인 단어로, 문자 그대로 작위가 없는 사람을 지칭한다. 달리 졸오(卒伍)라고 표현한 용례도 있다. 법품을 받은 적이 없는 사람은 경졸(更卒)로 지칭하여, 형벌로 인한 강등으로 보유하는 작위가 없게 된 사람인 사오(士伍)나 서인(庶人)과 구별하기도 했다.[12] 진나라 때 칠대부(七大夫)로도 쓰인 용례가 있다. 지급되는 경작지와 주거지의 수량과 연관이 있는 듯.[13] 《상군서(商君書)》에선 10등급은 객경(客卿), 11등급은 정경(正卿), 12등급은 좌서장, 13등급은 우서장, 14등급은 좌경, 15등급은 우경, 16등급은 소량조(少良造), 17등급은 대량조로 차이가 있다. 아마도 상앙이 최초로 이십등작을 도입한 당시에는 이렇게 쓰였다가 후에 개편된 것으로 추정된다.[14] '서장'(庶長)이 붙는 직위는 진나라 초기부터 상당한 고위직이었고, 전권을 휘두를 만큼의 권력이 주어지는 일도 흔했다. 그 흔적이 당대 최고위직이었던 '대서장'이 법품 중 최고위인 18등급의 명칭으로 규정된 것으로도 남아있다. 진목공 시절의 명신이었던 건숙백리해의 직위가 각각 좌서장과 우서장이었고, 이는 흔히 후대의 좌승상과 우승상으로 치환되고 있다. 전국시대 불세출의 명장 백기가 처음 제수받은 직위이기도 하다.[15] 진나라 때 대량조로 불렀다가, 한나라 때 대상조로 바뀌었다. 대량조는 고대 진나라의 최고위직이었으며, 진군 총사령관의 직위였다. 하서를 평정한 공로로 상앙이, 그리고 그 유명한 백기가 이궐 전투에서 한·위 연합군 24만명을 몰살시키고 제수받았다. 대량조의 직위가 상국(상방)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대서장 직위가 상국이 되었다는 기록도 있어 불분명하다. 아마도 진나라 때에도 상방은 적당한 왕족이 맡는 사실상 명예직이었고 그런 상방을 보좌하는 승상이 왕이 직접 등용한 인재로 실질적인 최고 관직이었던 경우가 잦았기에, 이런 혼선이 발생한 듯하다.[16] 상앙의 변법 이전까지는 진나라의 최고위직이었다.[17] 진나라 때 내후로 규정되었다가, 통일 이후 윤후로 고쳤으며, 한나라 때 관내후로 바뀌었다.[18] 전한 초기까지 '徹'자는 '通'자로도 쓰였기에, 마찬가지로 통후(通侯)로 쓰인 용례도 있다. 진나라 때 작성된 간독 중에 통일 이후 철후를 고쳐 열후로 부르게 한 명령이 발견되는데, 전한 초기에도 철후라는 표현이 계속 사용된 것으로 보아 확실하게 지켜지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한무제가 즉위하면서 피휘로 인해 열후로 명칭이 일원화되었다.[19] 주거지 한정. 경작지에 관한 규정은 발견되지 않았다.[20] 후한 때 위공(衛公)으로 바뀜.[21] 조조가 위공(魏公)으로 책봉된 뒤에 위왕(魏王)으로 승작한 것 때문에 당시에도 공이 왕보다 낮은 작위 였던 것으로 인식되고 있으나, 실제로는 헌제의 조서에도 명시되어 있듯 위공으로 책봉된 시점부터 조조의 지위는 제후왕보다 높은 예우를 받도록 규정되었다. 특히 조조의 경우에는 식읍마저 10개 군(郡)을 받아 제후왕들과는 차원이 다른 지위를 누렸다. 순욱이 괜히 위공 책봉을 반대했던 것이 아닌 것.[22] 한(漢)나라에서 읍군을 책봉했다면 정식 명칭은 '漢率善○○邑君'이 되고, 위(魏)나라에서 귀의후를 책봉했다면 정식 명칭은 '魏率善○○歸義侯'가 되는 식이다.[23] 삼국시대의 저족왕 강단(强端)이 대표적인 사례이다.[24] 중랑장은 군(軍)의 지휘관으로 장군과 동급이다. 군(軍)의 예하부대를 부(部)라고 하는데, 그 지휘관은 도위나 사마(司馬)였다. 부의 예하 부대를 곡(曲)이라고 하며, 그 지휘관은 후관(候官)이었다. 원래 이민족 편성 부대의 중랑장·사마 등은 한인(漢人)으로 임명하여 지휘권을 독점해왔으나, 위나라 때부터 이민족 수장을 사마·후관보다 격을 높인 도위·백장으로 임명하여 그 지휘권을 위임한 것이다.[25] 이에 흉노의 선우가 바뀔 때마다, 한나라는 '한흉노선우새(漢匈奴單于璽)'라고 새긴 도장을 보냈다. 왕망은 여기에 쓰인 '새(璽)'가 천자의 도장에만 사용할 수 있는 글자라고 여겨 '신흉노선우장(新匈奴單于章)'으로 멋대로 고쳐 보내 흉노 선우의 분노를 일으켰고(...), 결국 흉노의 침략을 당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