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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bgcolor=#330066><colcolor=#ffffff,#ffffff>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5·13대 군무장 유동열 柳東說[1]烈, 柳東悅 등으로 표기한 문헌도 있다. 여기에서 說과 悅은 서로 통자 관계이다.] | Liu Tong-yul | |||
| | |||
| 출생 | 1879년 3월 26일 | ||
| 평안도 박천군 군내면 남부동 매화동[2] (現 평안북도 박천군 박천읍 남부리 매화동) | |||
| 사망 | 1950년 10월 18일 (향년 71세) | ||
| 평안북도 희천군 | |||
| 묘소 | 애국렬사릉 | ||
| 본관 | 문화 류씨[3] | ||
| 호 | 춘교(春郊) | ||
| 재임기간 | 제5대 군무총장 (이승만 정부) | ||
| ? ~ 1924년 4월 16일 | |||
| 제13대 군무장 (양기탁 내각) | |||
| 1934년 11월 2일 ~ 1935년 9월 1일 | |||
| 초대 참모부장 (제2차 이동녕 내각, 좌우연합정부) | |||
| 1939년 10월 25일 ~ 1944년 | |||
| 제7대 교통부장 (좌우연합정부) | |||
| 1943년 1월 20일 ~ 1944년 4월 24일 | |||
| 서명 |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330066><colcolor=#fff> 이명 | 유청송(柳靑松) | |
| 부모 | 아버지 유종식(柳淙楨), 어머니 최씨 | ||
| 친인척 | 사촌형 유동작(柳東作) | ||
| 종교 | 유교(성리학) | ||
| 학력 | 샌프란시스코 중학교 (졸업) 세이죠 학교 (졸업) 제15기 일본육군사관학교 (기병과 / 졸업)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임관) | ||
| 경력 | 신민회 결성 참여 청도회의 참석 105인사건으로 피체 한인사회당 참여 임시정부 군무장 임시정부 참모부장 임시정부 교통부장 | ||
| 서훈 |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1989년) | ||
| 군사 경력 | |||
| 임관 | 일본 육군사관학교(15기) | ||
| 복무 | 일본군 | ||
| 1903년 ~ 1904년 | |||
| 대한제국군 | |||
| 1904년 ~ 1907년 | |||
| 최종 계급 | 참령 | ||
| 주요 보직 | 시위기병대장 | }}}}}}}}} | |
1. 개요
| |
| 1946년 3.1절 기념식 당시[4] |
대한제국 군인 관료 출신으로 미군정기 군인 관료까지 직무를 수행했고, 초대 대한승마협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2. 생애
2.1. 대한제국의 군인
1879년 평안북도 박천군 박천면 남부동 매화동#에서 유종정(柳淙楨)의 아들로 태어났다. 19세 때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다. 구한말에 살았는데 당시엔 대한제국군의 군인들이 일본에서 교육을 받는 일이 많았다. 그는 일본육군사관학교의 예과인 세이조(成城)학교를 다녔고, 1903년 일본육군사관학교 제 15기로 졸업했다. 병과는 기병이었다.[5] 그 해 12월 일본 육군기병대 견습사관으로 근위사단에서 실무를 익히던 중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대한제국 파견 무관 자격으로 일본군에 종군했다.| |
| 기병대장 유동렬 |
2.2. 독립운동
1910년에 경술국치가 발생하자 국내와 중국을 오가며 독립군 자금을 모집하다가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1911년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1년 6개월 뒤에 나와서 중국에서 주로 독립운동을 다방면에서 활동하였다. 1920년대 초에는 같은 군인장교 출신이자 임시정부 국무총리였던 이동휘와 함께 고려공산당에 가담해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자유시 참변을 겪고난 후, 1921년 이후 병원과 농장을 경영하면서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주력했다.1929년 3월 지린에서 조선혁명당을 결성하였으며, 1930년에는 임시정부로 다시 복귀하여 1944년까지 수차에 걸쳐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역임했다. 1935년 7월,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신한독립당, 의열단, 대한인독립단 등 5개 독립운동단체가 대일전선통일동맹을 공동 발기해 결성한 조선민족혁명당을 조직했을 때, 조선혁명당의 대표로 참여해 반일 민족연합전선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1940년대에는 한국광복군의 참모총장을 지냈다.
2.3. 광복 이후
광복 후에는 귀국하여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한국광복군의 군인들은 미군정의 푸대접과 일본군, 만주군 출신 파벌이 군 내에서 다수를 차지한 것에 반감을 가져 군사영어학교나 남조선국방경비대에 입대하지 않았는데 이응준의 설득과 조병옥의 추천으로 그가 미군정의 국방장관격인 통위부장이 되자 광복군 출신 경력자들이 다수 입대하였다. 특히 일군 대좌 출신으로 미군정의 군사고문으로 임명된 이응준은 유동열, 지청천, 이범석 3인중 유동열을 선택하여 미군정 참여에 부정적이던 유동열을 설득하였다.[6]임시정부 요인들께서 말씀하시는 법통을 우리나라 군대로 하여금 계승하는 일이 숭고한 사명이라고 생각해 달라.
이응준이 유동열을 설득하면서
당시 광복군 출신들이 입대하자 일본 학병, 만주군 출신 장교들은 유동열이 군내에서 광복군을 중심으로 파벌질을 한다고 반발하였다. 그러나 그를 추천한 사람이 일본육사계열의 최선임격인 이응준이었고, 일본육사 출신들도 일단 해방 후에는 대부분 자숙, 근신하며 (구성인원에서는 자기들이 다수라고 해도) 임시정부와 광복군 출신 인사가 창군의 대표격 지위를 담당한다는 원칙을 수용하여 큰 반발은 적었다.이응준이 유동열을 설득하면서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사돈 최동오와 함께 납북되었다. 당시 유동열은 72세라는 고령의 나이에 중병까지 앓고 있어 희천에 이르렀을 때 최동오의 무릎에 기대어 생을 마감했다.
3. 기타
이응준이 군사영어학교 개설 시 광복군에 대한 인원배분을 동일하게 하였고, 유동열을 설득하여 통위부장에 위촉함으로써 광복군 등 중국에서 활동한 군경력자들이 한국군에 입대할 수 있는 정치적, 실질적 배경이 생기게 되었다. 이 덕분에 국군의 인적 구성이 일본군과 만주군 일색으로 채워지는 것을 막았다.광복군, 국부군 출신들이 대부분 당시 기준으로 중장년층으로서 군사학교 교육을 대부분 1910-20년대 중국에서 수료한 관계로 일본군, 만주군 출신 인사들보다는 군사 교육의 체계, 실전 경험 등에서 다소 떨어진 면이 없지 않았으나 국군의 정통성 차원에서 정말 중요한 일이었다.
1949년 미 군사고문단 참모장을 맡았고 1981년까지 미 8군사령관 특별고문을 맡았던 짐 하우스만의 저작 <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 대위>에 따르면, 유동열은 김종갑이 상놈 출신이라는 이유로 진급을 막았다고 한다.[7]
춘천 8연대의 수석장교인 김종갑 중위가 대위로 진급할 때였다. 그는 6.25 전쟁 기간 동안 사단장까지 지냈고 나중에 육군 중장으로 예편돼 국방차관까지 올라간 사람이다.그런데 이 사람의 진급 명령이 나오지 않았다. 통위부장 유동열 장군이 브레이크를 걸고 있었다. 그는 조선경비대의 장교는 반드시 양반 출신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유능한 김종갑의 가문을 잘 알지는 못하나 어쨌든 유동열 장군이 보기에는 조선의 고급 장교가 될 만한 양반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런 케이스로 진급이 유보돼 있는 사람이 많았다. 도대체 어쩌겠단 말인가. 지금은 단 1명의 장교도 아쉬운 판인데 능력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양반 논쟁으로 인사의 차질을 빚고 있으니 어처구니없는 입장이었다.
나는 부족한 장교를 양성하기 위해 현지 임관을 통해 장교 숫자를 늘리는 한편 육군사관학교 개설을 돕고 있었다. 유장군은 계속 장교의 조건으로 “양반”을 들고 나왔다. 그러나 그런 말이 새 경비대를 조직하는 마당에 통할 리가 없었다. 어느 미군 조직법에도 양반만이 장교가 돼야 한다는 근거가 없었다.
짐 하우스만, <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 대위>, p.127~128.
자매품으로 송호성 국방경비대 총사령관[8]은 경비대 사관학교를 불시에 방문하여 신언서판(身言書判)이나 관상이 안 좋다는 이유로 후보생 20여 명을 그 자리에서 잘랐으며 자기 맘에 안 드는 장교는 불문곡직 제주도 9연대에 처박았다. 이런 막가파 장군이 잘 나갈 수 있던 이유는 같은 임시정부-광복군 출신인 통위부장 유동열이 밀어준 덕분이라고 한다.[9]나는 유능한 김종갑의 가문을 잘 알지는 못하나 어쨌든 유동열 장군이 보기에는 조선의 고급 장교가 될 만한 양반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런 케이스로 진급이 유보돼 있는 사람이 많았다. 도대체 어쩌겠단 말인가. 지금은 단 1명의 장교도 아쉬운 판인데 능력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양반 논쟁으로 인사의 차질을 빚고 있으니 어처구니없는 입장이었다.
나는 부족한 장교를 양성하기 위해 현지 임관을 통해 장교 숫자를 늘리는 한편 육군사관학교 개설을 돕고 있었다. 유장군은 계속 장교의 조건으로 “양반”을 들고 나왔다. 그러나 그런 말이 새 경비대를 조직하는 마당에 통할 리가 없었다. 어느 미군 조직법에도 양반만이 장교가 돼야 한다는 근거가 없었다.
짐 하우스만, <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 대위>, p.127~128.
딸 류미영(1921~2016)은 납북되지 않고 남한에 남았다가, 1986년에 남편 최덕신과 함께 월북했고, 2000년 이산가족 상봉 때 북측 대표단의 일원으로 남한을 방문했다.[10] 2016년에 사망했다.
4. 대중매체에서
1984년작 KBS1 특집드라마 <독립문>에선 배우 정운용이 연기했다.1985년작 KBS1 특집드라마 <전웅실록: 오성장군 김홍일>에선 배우 최창호가 연기했다.
5. 둘러보기
| 대한제국군의 영관급 장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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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8 부반머우 | 1962 강기동 의병 | 1962 권동진 3·1 운동 | 1962 권병덕 3·1 운동 | 1962 김동삼 만주방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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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2 이동녕 임시정부 | 1962 이명룡 3·1 운동 | 1962 이범윤 의병 | 1962 이봉창 의열투쟁 | 1962 이상설 계몽운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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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2 편강렬 계몽운동 | 1962 홍기조 3·1 운동 | 1962 홍범도 만주방면 | 1962 홍병기 3·1 운동 | 1963 문태수 의병 | |
| 1963 신석구 3·1 운동 | 1963 이범석 광복군 | 1963 정환직 의병 | 1965 응우옌까오끼 | 1966 천청 | |
| 1968 린썬 | 1968 쑹자오런 | 1968 어니스트 베델 | 1968 뤼톈민 | 1968 탕지야오 | |
| 1968 황싱 | 1968 후한민 | 1969 우빈 | 1970 쑨커 | 1977 주자화 | |
| 1977 이승희 만주방면 | 1979 카를로스 P. 로물로 | 1980 주시경 계몽운동 | 1982 김하락 의병 | 1986 장건상 임시정부 | |
| 1989 김붕준 임시정부 | 1989 박열 일본방면 | 1989 안재홍 국내항일 | 1989 오화영 3·1 운동 | 1989 유동열 임시정부 | |
| 1989 윤기섭 임시정부 | 1989 조완구 임시정부 | 1990 김병조 임시정부 | 1990 문창범 만주방면 | 1995 박용만 미주방면 | |
| 1995 이동휘 임시정부 | 1995 채상덕 만주방면 | 1995 최석순 만주방면 | 1996 구춘선 만주방면 | 1998 김경천 만주방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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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柳[2] #[3] #[4] 옆에는 양쪽에 김구와 이승만, 뒤에는 허정과 조완구 등이 있다.[5] 이때 같은 15기로 입학한 조선인들은 이갑, 김기원, 남기창, 박영철, 박두영, 전영헌, 김응선으로 유동열 본인까지 합하여 총 8명이었고, 이들은 흔히 8형제배(8兄弟輩)라고 불렸다. 8명의 선택은 저마다 갈려서 이갑과 유동열은 망명 후 독립운동에 투신했고 박두영, 박영철, 김기원, 김응선은 악질 친일파로 남았으며 남기창과 전영헌은 일찍 죽었다.[6] 유동열, 지청천은 한국광복군 출신 이전에 일본육사출신이라는 점에서 기존의 일본육사 출신이 많은 국군에 협조적일 것으로 판단했을 것으로 보인다.[7] 다만 객관적으로 바라보자면 당시 일찍이 일본인 군사 고문들과 생활하여 군사 고문이라는 조직에 익숙해 주한미군 고문관들과 친밀한 관계였던 백선엽 장군(알레이 버크 제독과의 친분이 유명하다) 등 만주군 출신들과는 다르게 독립적, 배타적 성향이 강한 조직이었던 국민혁명군,한국광복군,일본군 출신 장교들은 미 고문관들과 그리 사이가 좋지 않아 개인적 불화로 미 고문관들에게 의도적인 악평을 받은 경우도 많았다. 유능했음에도 욕을 먹은 케이스가 시흥지구전투사령관 김홍일과 수도사단장 김석원 등이 있다. 다만 유동열은 대한제국군 출신의 보수적인 장교였으므로 그가 이런 행적을 보였을 가능성도 낮지 않기는 하다.[8] 덕장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나 무능한 군인이라는 평이 주였으나 하우스만의 회고를 보면 그는 민주적인 군인으로 묘사되기도 한다.[9] 출처: 장창국, <육사졸업생>, p153[10] 월북한 류미영이 북측 이산가족 대표단에 포함되어 온 것에 반공 성향의 일각에서는 "우리도 황장엽을 이산가족 대표단에 끼워서 북한에 파견하자"는 반응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