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제국군의 영관급 장교 |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word-break:keep-all" | <colbgcolor=#29176e> 정령 正領 | |
| 육군 陸軍 | 구연하 | 길영수 | 노백린 | 신재영 | 신태준 | 어담 | 윤철규 | 이건영 | 이근형 | 이민식 | 이태래 | 조철희 | 현흥택 | |
| 해군 海軍 | - | |
| 부령 副領 | ||
| 육군 陸軍 | 김익남 | 김정우 | 왕유식 | 유혁로 | 윤치성 | 이기동 | 이민굉 | 장기렴 | 조민희 | |
| 해군 海軍 | - | |
| 참령 參領 | ||
| 육군 陸軍 | 김교준 | 김기원 | 김명환 | 김응선 | 김인수 | 김희선 | 김혁 | 남기창 | 민대식 | 박두영 | 박승환 | 박영철 | 신창희 | 양규열 | 유동열 | 이갑 | 이기표 | 이동휘 | 이두황 | 임재덕 | 조중만 | 현상건 | 홍창걸 | 황준성 | |
| 해군 海軍 | - | |
| ※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황제·황태자 제외 | ||
| ※ 둘러보기 | | ||
| }}}}}}}}} | ||
1. 개요
申載永구한말의 군인이자 법조인, 친일반민족행위자.
2. 생애
1863년 1월 4일(음력)에 태어났다. 본관은 평산 신씨다.1885년 승정원일기에 처음 등장한다. 1886년, 부산 해관 감리서 서기관으로 재직했다. 1888년에는 벌을 받아 유배되었고 1894년에 풀려났다. 사면 후에 외무아문 주사를 지냈다. 1895년 김홍집 내각에서 육군 참령으로 임용되었다. 법부 검사국장, 법률기초위, 법부 참서관, 고등재판소예비판사 등 군사 계급을 갖고 다른 관직에서 근무했다.
1899년에는 인사경리장교 계급인 3등감독으로 임용되었다. 군부 경리국 1과장으로 근무했다. 이후 육군법원 이사, 법원장 서리 등 군법 관련 업무를 했다. 1905년에는 부령 계급, 1907년에는 정령 계급이 확인된다. 경력을 볼 때 야전군인은 아니었고 오늘날의 군법무관 역할을 했다.
남대문 전투 후인 1907년 8월 12일에 군법회의 판사장이 되었다. 다른 판사로는 육군 부장인 민병석, 참장인 한진창과 이남희가 있었다. 4일 뒤에 해임되었다.
대한제국군 해산 이후 군복을 벗고 양주군수로 임명되는 등 관직 생활을 이었다. 1909년에는 평양 공소원 판사로 재직 중인 게 확인된다. 1909년과 1910년 사이에 의병 재판을 했다.
총독부 기록에서도 이어져서 1912년 함흥군수, 1918년에는 고원군[1] 근무 명령이 확인된다. #1 #2 1922년에는 일본에서 서훈을 받았다. # 1923년에 퇴관했다.
1931년 5월 18일에 사망했다.
3. 출처
[1] 신재영이 1894년 유배에서 풀렸던 곳이 고원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