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1-17 15:04:11

구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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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군의 영관급 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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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출처

1. 개요

具然河

구연하는 구한말의 군인이다. 최종 계급은 대한제국 육군 정령.

2. 생애

1876년 승정원일기에서 처음 등장한다. 구식군대의 장병이었다. 1880년에는 개천 군수로 발령되었다. 1883년에는 경상좌도 병마우후로 임명되었으나 부모의 위독함으로 사직을 냈다. 이듬해인 1884년에 강원 중군, 1885년 친군별영 기사장에 단부하였다. 선전관, 총어영 기사장, 통위영 영관 등을 지내다가 1891년에 기록이 끊기다가 9년 뒤인 1900년에 신식 군대 참령 계급으로 등장한다. 대한제국군 진위대 제3연대 제3대대(경주진위대)의 대대장을 지냈다.[1] 1902년에는 진위대 5연대 3대대장(종성진위대), 1904년 시종무관, 경기 순찰사 등을 지냈다. 1905년 시위대 대대장으로 재직하다가 부령으로 진급했다. 1906년에는 정령으로 진급했다.

1907년 대한제국군 해산으로 제대하였다.

일본측 기록에 따르면 1903년 무렵에 의주진위대의 대대장으로 재직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의주에 출장 온 일본인이 가옥을 빌려달라고 해서 구연하가 물색해서 빌려주기로 했는데, 그 뒤에 대대장 본인이 그 집에 들어가면서 빌려주지 않았다. # 그해에 의주진위대 장병들에게 일본 민간인이 폭행당하는 사건이 있기도 했다. 일본 민간인이 술에 취해 군인들에게 온당치 못한 언동을 하자 기왓돌을 던져 초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구연하는 이 일로 일본측에 유감을 표명했다. #

러일전쟁 당시에 일본군에게 근처의 러시아군 병력 규모 등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이후 東鄕辰二郞 소좌를 한국의 부대 내에 숨겨달란 일본측의 요청이 있었는데, 구연하는 중립을 이유로 거절하였다. 해당 소좌는 이후 한국인이 세운 일본어학교에 숨었다. #

일본측에서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충주 출신이라고 한다. 의주대대장을 마치고 서울에 체류할 때 경무사 구영조의 집에 머물렀다는 설이 있다. #

전역 후에 1908년 대동학회월보, 1909년 대한협회월보의 회원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두 단체는 성격이 상이한 편인데, 육군 정령을 지낸 유지라서 이곳저곳에 이름을 다 올린 것으로 보인다.

3. 출처


[1] 이 시기에 도적을 잡은 일로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 당시 언론에도 칭찬의 글이 실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