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0-07 12:42:15

조철희(대한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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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군의 영관급 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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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출처

1. 개요

조철희(趙轍煕)는 구한말의 군인이다. 최종 계급은 오늘날의 대령급인 육군 정령이다.

2. 생애

1898년에 부관 직위로 승정원일기에 등장한다. 1899년에 계급은 정위였고, 원수부 검사국원으로 근무했다. 그해에 참령으로 진급해서 검사국의 부장(차장) 자리를 맡는다.

1902년에 부령으로 진급했다. 임시혼성여단 보병 제2연대장 등을 맡았다. 1905년에는 육군유년학교가 생기자 교장을 맡았다. 부령 계급으로 친위대대장을 맡기도 하는데 이때 동료 대대장으로 뒤에 시위혼성여단의 휘하 대대장이 되는 이기표도 있었다.

육군 헌병대장을 맡느라 보병에서 헌병으로 병과를 이동했다. 육군법원의 법원장 대리를 맡기도 하고, 다시 보병 장교로 복귀하였다. 1906년에 정령으로 진급했고, 보병장교의 병과장인 군부 군무국 보병과장을 맡았다.

1907년에 시위혼성여단이 만들어지자 보병2연대의 연대장으로 배치되었다. 1907년 7월에 고종 퇴위 반대 운동에 탈영병들이 참가하면서 여단 회의가 열리는데, 이때 여단장 양성환 앞에서 감정적인 반응을 보인 2연대 1대대장 이기표를 팔을 잡고 끌어낸 인물로 알려져 있다. # 그 뒤에 대한제국군 해산으로 무보직 제대 조치되었다.

이후 9월 10일에 부상병들을 위한 기금에 5원을 기부했다. 같은 기사에 2연대 2대대 부관인 신규식은 3원을 기부했다. # 9월 12일에는 군대 해산 당시 받은 은사금으로 회사나 은행을 차리자는 움직임을 보였다. #

1908년 11월엔 전라북도 군산항에서 측량사무소를 열고 이를 대한매일신보에 여러 차례 광고하였다. #

1909년에 대한공업회의 총회에 의사원으로 참여했다. 회장은 윤치성, 총무는 임재덕이었으며 의사원으로 신규식 등이 있었다. #

1910년 5월에는 호서학생친목회에 문구류 등을 기부하였다. # 경술국치 직전인 8월 24일에는 경기도 광주에서 도자기 회사를 차리고 광고를 싣는 등 계속 사업 활동을 했다. #[1]

총독부 관보에 1917년 主人廣業株式會社 소속으로 등장한다. 1922년에는 朝鮮土地經營株式會社 소속으로, 1931년에는 林野調査委員會 관련 공문에 이름이 등장하는 게 마지막이다. 구한말에 군인을 제대하고 계속 사업가로 활동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3. 출처


[1] 1910년까지 사업활동을 같이 하던 신규식은 이듬해 상하이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