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제국군의 영관급 장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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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bgcolor=#29176e><colcolor=#fff> 대한제국 육군 정령 이민식 李敏軾 | |||
| 출생 | 1875년 6월 26일 | ||
| 경기도 포천군 창수면 운산리 (現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운산리) | |||
| 사망 | 1934년 1월 9일[1] (향년 58세) | ||
| 경기도 경성부[2] (現 서울특별시) | |||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봉안관 부부위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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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업 | 독립운동가, 군인 | ||
| 서훈 | 팔괘장 5등 (1906) 건국훈장 애족장 (2011) | ||
| 군사 경력 | |||
| 복무 | 조선군 | ||
| 1892년 ~ 1897년 | |||
| 대한제국 육군 | |||
| 1897년 ~ 1907년 | |||
| 최종 계급 | 정령 | ||
| 주요 보직 | 친위대 제1연대 제1대대 부관 진위대 제1연대 제1대대 중대장 군기창 검사관 궁내부 주전원 경 | }}}}}}}}} | |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2. 생애
2.1. 관직 생활
1875년 6월 26일 경기도 포천군 창수면 운산리에서 전 판서 이규석(李奎奭)의 아들로 태어났다.1892년 천거를 받아 초관(哨官)에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선전관, 훈련원 주부, 훈련원 판관, 훈련원 첨정, 분시어를 역임했다.
대한제국 시절인 1898년 참위로 임명, 친위대 제1연대 제1대대부에 발령받았다.
1900년 부위로 진급하였고 친위대 제1연대 제1대대 부관이 되었다. 1901년에는 육군피복위원을 겸임했고, 정위로 진급하여 진위대 제1연대 제1대대 중대장으로 임명되었다. 1903년 영평군수와 주임관 4등이 되었다. 1904년에는 참령 계급으로 나오며[3] 군기창 검사관으로 임명되었다.
1905년 종2품에서 정3품이 되었다. 1906년에는 육군 포병 부령으로 진급, 1907년 5월 7일 궁내부 주전원 경에 임명되었고 7월 29일 봉상사 제조를 제수받았으나 닷새 만에 해임.
부령(副領)
김재은(金在殷)ㆍ박기양(朴箕陽)ㆍ이인영(李寅榮)ㆍ이민하(李敏河)ㆍ김연시(金演蓍)ㆍ최낙주(崔洛周)ㆍ안종환(安宗煥)ㆍ김학안(金學顔)ㆍ박이병(朴彛秉)ㆍ박원교(朴元敎)ㆍ이기동(李基東)ㆍ강찬희(姜璨熙)ㆍ조민희(趙民熙)ㆍ윤진우(尹鎭佑)ㆍ윤원구(尹元求)ㆍ민긍호(閔兢鎬)ㆍ민영옥(閔泳玉)ㆍ민영선(閔泳璇)ㆍ신성균(申性均)ㆍ장기렴(張基濂)ㆍ장봉환(張鳳煥)ㆍ송문섭(宋文燮)ㆍ백남신(白南信)ㆍ유혁로(柳爀魯)ㆍ이병우(李秉禹)ㆍ이민섭(李敏燮)ㆍ이민식(李敏軾)ㆍ이해원(李海元)ㆍ이남하(李南夏)ㆍ박선빈(朴善斌),
1907년 9월 3일 당시 제대자 명단
김재은(金在殷)ㆍ박기양(朴箕陽)ㆍ이인영(李寅榮)ㆍ이민하(李敏河)ㆍ김연시(金演蓍)ㆍ최낙주(崔洛周)ㆍ안종환(安宗煥)ㆍ김학안(金學顔)ㆍ박이병(朴彛秉)ㆍ박원교(朴元敎)ㆍ이기동(李基東)ㆍ강찬희(姜璨熙)ㆍ조민희(趙民熙)ㆍ윤진우(尹鎭佑)ㆍ윤원구(尹元求)ㆍ민긍호(閔兢鎬)ㆍ민영옥(閔泳玉)ㆍ민영선(閔泳璇)ㆍ신성균(申性均)ㆍ장기렴(張基濂)ㆍ장봉환(張鳳煥)ㆍ송문섭(宋文燮)ㆍ백남신(白南信)ㆍ유혁로(柳爀魯)ㆍ이병우(李秉禹)ㆍ이민섭(李敏燮)ㆍ이민식(李敏軾)ㆍ이해원(李海元)ㆍ이남하(李南夏)ㆍ박선빈(朴善斌),
1907년 9월 3일 당시 제대자 명단
1907년 대한제국군이 해산되었을 때 부령 제대자 명단에 이름이 올라가 있다. 이후 승정원일기에는 이민식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승정원일기에서는 그가 정령으로 진급했다는 기록이 없다. 하지만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과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매일신보에 따르면 '육군 정령'으로 나온다.
2.2. 독립을 위해
1919년 3·1운동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 소식을 접한 그는 민족 독립운동에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항일 비밀결사 운동에 참여하였다.1920년 경성 연지동 경신학교에서 장응규, 여준현, 안종운 등과 함께 비밀결사 조직인 대한독립주비단을 결성하였다. 그는 초대 사령장(司令長)으로 추대되어 조직을 이끌었으며, 군자금 모집, 무기 구입, 청년 훈련 등을 통해 실질적인 무장 독립운동을 준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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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1년 1월 5일 자 매일신보 주비단 수령 체포 구한국 육군 정령 이민식 |
주비단 수령 체포
구한국 육군 정령 이민식
지난 12월에 경기도 뎨삼부에서 검거된 대한독립주비단의 수괴되는 구한국 궁내부 주전원 경과 육군 정령으로 있던 경성부 지례동 거주하는 이민식은 그 후에 행적을 감추어서 당국에 체포됨을 면하고 있던 바 3일 오전 11시에 시내 광화문 앞에 나온 것을 뎨삼부 형사에게 체포되어 지금 조사 중인데 이민식은 주비단의 수괴로 음모를 계획한 것이라더라.
현대어로 풀어쓴 매일신보 기사
구한국 육군 정령 이민식
지난 12월에 경기도 뎨삼부에서 검거된 대한독립주비단의 수괴되는 구한국 궁내부 주전원 경과 육군 정령으로 있던 경성부 지례동 거주하는 이민식은 그 후에 행적을 감추어서 당국에 체포됨을 면하고 있던 바 3일 오전 11시에 시내 광화문 앞에 나온 것을 뎨삼부 형사에게 체포되어 지금 조사 중인데 이민식은 주비단의 수괴로 음모를 계획한 것이라더라.
현대어로 풀어쓴 매일신보 기사
1921년 1월 대한독립주비단이 일제 경찰에게 발각, 이에 주비단의 사령장이었던 이민식이 체포되었으며 경성복심법원에서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 등으로 인해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민식은 형기를 마친 뒤 건강이 악화되어, 1934년 1월 9일에 향년 58세로 서거하였다.
2011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는 독립운동에 기여한 이민식의 공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3. 여담
- 포천 출신 독립운동가로, 지역 사회에서도 그의 공적을 기리는 다양한 행사가 열리고 있다.
- 후손에 대한 예우와 대통령 표창 수여 등도 진행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