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서(魏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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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昶 왕창 | |
시호 | <colbgcolor=#ffffff,#191919>목후(穆侯) |
작위 | 관내후(關內侯) → 무관정후(武觀亭侯) → 경릉후(京陵侯) |
최종직위 | 사공(司空) 겸 가절도독형예제군사(假節都督荊豫諸軍事) |
성씨 | 왕(王) |
명 | 창(昶) |
자 | 문서(文舒) |
아버지 | 왕택(王澤) |
생몰기간 | ?년 ~ 259년 6월 |
고향 | 병주(幷州) 태원군(太原郡) 진양현(晉陽縣) |
사공 재임기간 | 258년 8월 12일 ~ 259년 6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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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국시대 위나라의 정치가이자 학자 겸 장군으로 자는 문서(文舒). 왕택의 아들, 왕혼, 왕륜, 왕심, 왕담의 아버지, 왕묵, 왕침의 숙부. 병주 태원군 진양현 사람.2. 정사 삼국지
동군의 왕릉과 함께 명사로 이름을 얻었는데, 아버지뻘의 나이차가 나는 왕릉을 친형처럼 모셨다고 한다.[1]관직에 출사한 것은 조비가 태자일 때 태자문학에 있었다.
위나라이 세워진 뒤에는 낙양 전농교위가 되어 둔전 개간에 실적을 거둔 공적으로 연주자사가 되었고, 위명제 조예가 등극하면서는 양렬장군으로 관내후의 직위를 받았다. 이때 여러 저술활동을 했는데, 대표적으로 법을 적용함에 있어 지나친 엄격함보다는 관용의 여지를 두어 다스려야 한다는 내용의 《치론》(治論) 이 있고 그밖에도 병서(兵書), 가성(家誠) 등을 지었다.
사마의로부터 현인으로 추천받아 정시 연간(240년 ~ 249년)에 무관정후가 되었고, 이어 정남장군 겸 가절도독형예제군사에 올라 손오의 형주측 전선을 방위하는 임무를 맡았다. 당시 치소가 전선기지인 양양과 멀었기 때문에 치소를 가까운 신야로 옮기고, 수군 훈련과 군량 비축 등 손오의 동태를 대비한 방비에 힘썼다.
고평릉 사변으로 조상이 실각한 후 사마의가 대국을 장악해 신료들과 향후 국정을 의논할 때 교육/인사에 역점을 둔 5개조를 건의했다.
250년, 오나라가 이궁지쟁으로 혼란한 틈을 타 공격하면 이길 수 있다고 제안해 신성태수 주태, 형주자사 왕기와 더불어 강릉을 공격해 오의 주적(朱績)을 패퇴시켰는데,[2] 이 공적으로 정남대장군 의동삼사로 승진하고 경릉후 작위를 받았다.
252년, 손권 사후 사마사가 오를 토벌하려 하자 호준, 관구검, 제갈탄 등과 재차 협력해 공세에 들어갔으나 제갈각이 정봉을 보내 한종을 죽이는 등 양주 방면의 군세를 꺾자 군을 물렸다. 이후 관구검, 문흠의 반란을 진압한 공적으로 표기장군이 되었다.
257년, 제갈탄이 반란을 했을 당시에는 주적의 동태를 철저히 견제해 형북의 안전을 지켰다. 그 공적으로 도독의 자리를 유지한 채 사공의 지위에 올랐다.
2년 후 259년에 병사해 시호를 목후(穆候)라 했다.
안목이 탁월해 죽림칠현의 일원인 완적과 만나보고 그 사람됨에 감탄했다고 하며, 《세설신어》보에는 사마염을 비롯해 모두가 바보라고 놀렸던 막내아들 왕담의 재능을 일찍부터 간파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형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형의 조카들을 자신의 자식들과 함께 훈육시킨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곽가의 아들 곽혁과는 친구 사이였지만 자식들에겐 그의 사람을 가려 대하는 됨됨이를 본받지 말라고 가르쳤는데, 이 점은 훗날 배송지가 주를 달아 비판하기도 했다.
3. 삼국지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오나라를 정벌하려다 제갈각의 반격으로 군을 물렸다는 것 딱 한 줄만 적혀 나온다. 딱 양호의 선임 역할을 훌륭히 해낸데다 삼공까지 오른 인물인데도 끝머리에 나오는 아들 왕혼보다 비중이 더 없다.(...)4. 가족
아들 중 맏아들 왕혼은 서진 성립 후 손오 정벌 때 군을 이끌고 오나라의 승상 장제를 죽이는 등 왕준과 전공을 다퉜고, 조카(형의 아들) 왕침은 역사서인 《위서》를 집필한 업적[3]을 남겼지만 한편으로는 조모를 등지고 사마소에게 붙어 아첨한 곡학아세의 행적 때문에 세인들에게 비웃음을 샀다.5. 미디어 믹스
5.1.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삼국지 11 |
삼국지 12, 13, 14 |
삼국지 4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는데 60대인 무력을 제외한 다른 능력치가 70대 후반에서 80대 초반을 오가는 밸런스형 무장으로, 그 중 정치력이 가장 높은 축에 속한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71, 무력 63, 지력 70, 정치 83이며 병법으로는 제사, 누선, 정란, 조영, 덫, 고무를 가지고 있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75/무력 61/지력 70/정치력 83/매력 78로 준수하며 특기는 농업, 치안, 징병, 화시, 진정, 고무, 저지, 반박, 명사. 총 9개다. 아이템으로 본인 저서인 치론(지력+2)을 들고 나와서 실질 지력은 72다.
삼국지 11에서도 능력치가 통솔력 74/무력 64/지력 79/정치력 79/매력 75, 병종 적성은 창병 A/극병 B/노병 A/기병 B/병기 B/수군 C. 특기는 저술한 치론의 내용에 근거해 인정이다.
지력이 전작에 비해 9 상승했다. 삼국지 전 장수 중 능력치 총합 65위에 들 정도로 준수한 편이며, 영웅집결 시나리오에서는 진양의 재야무장으로 나와서 정원 세력으로 플레이할 경우 학소 등과 함께 중요한 인재로 쓰인다. 친애무장으로는 왕릉과 친구였던 곽혁이 있다.
삼국지 12에서 능력치는 통솔력 74/ 무력 64/ 지력 79/ 정치력 79로 매력이 빠졌을 뿐 능력치가 이전작과 같다. 그리고 본인 저서인 치론(지력+2) 버프로 지력은 81로 올라간다. 전법은 공격약화. 영웅집결 시나리오에서는 특기가 효율이 떨어져 성능은 떨어졌지만 전작과 마찬가지로 정원 세력의 중요한 인재 중 하나. 일러스트는 말을 탄 상태에서 고삐를 쥔 채 오른쪽 손바닥을 펼치고 있다.
삼국지 13에서 능력치는 전작과 같으며 특기는 상업 2, 농업 2. 전수특기는 상업이고 전법은 창병선동.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74, 무력 64, 지력 79, 정치 80, 매력 75로 전작과 달리 정치력이 1 상승했다. 개성은 후위, 명성, 법률, 농정, 학자, 주의는 왕도, 정책은 성벽확장 Lv 4, 진형은 어린, 안행, 충차, 전법은 제사, 화시, 저지, 충차, 친애무장은 곽혁, 완적, 왕릉, 혐오무장은 없다.
5.2. 삼국전투기
우주전함 야마토의 사나다 시로로 패러디되었다. 신성 전투 (4)편의 타이틀 컷을 장식하기도 했다. 소개컷에는 계산과 분석에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고 서술되었다.신성 전투 편에서 처음 등장. 당시 정남장군이었으며[4] 문흠의 거짓투항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후, 사마의에게 신성군 쪽으로 형주를 공략할 것을 제의하고 허락받았다. 이에 왕창은 왕기와 주태를 부른 뒤 오 공략에 대한 브리핑을 진행한다. 두 사람에게 이제까지 오는 양양을, 위는 강릉을 지속적으로 공격해 왔으나 정말 많은 희생을 치르지 않는 이상 강릉을 무너뜨리는 건 불가능에 가까우니 이번에는 대박을 노리지 않고 양양과 강릉의 좌우 날개나 다름없는 신성과 강하부터 꺾으며 차근차근 공략해 들어갈 것임을 선언했다.
왕창은 주태는 상용에서부터 방릉, 자귀, 무를 공략하게끔 하고, 왕기는 양양에서 이릉으로 진격하게 한 뒤 자신은 신야에서 강릉을 견제하는 것으로 계획을 짜서 실행에 옮겼다. 이 때 견제가 목표였던 왕창이 오히려 이전에 강릉을 공략했던 위군보다 뛰어난 공격력으로 강릉을 압박했다고 묘사된다. 이에 주적은 영격에 나서서 양강 앞에 진영을 짰지만, 왕창군은 밤에 몰래 도하하여 대나무 다리를 깔아 놓은 뒤 주적군을 기습했고, 예상되는 퇴각 루트에 복병까지 깔아서 주적군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강릉성을 눈 앞에 두게 되었지만 현 병력으로 공성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판단하여 애초 목적대로 이릉이 점령될 때까지 견제만 하는 것으로 정했다. 그리고 왕기의 이릉 접수 소식을 듣고 돌아가기로 했으며, 돌아가는 김에 주적을 함정에 빠트려 주적의 부장 두 명을 잡고 많은 물자를 빼앗았다. 그리고 왕창은 이 공으로 정남대장군으로 승진했다.
동흥 전투 편에서는 제갈탄과 호준이 동흥제로 진격할 당시 오 견제를 위해 강릉으로 갔다고 언급된다. 그리고 합비 방면에서의 대패 이후에는 무창으로 갔던 관구검과 더불어 회군했다.
수춘2 전투 편에서는 강릉의 주적을 견제하는 임무를 맡았다고 묘사되었다.
이후 전투외편 7편에서 사망처리 됐다.
[1] 왕창이 곽가의 아들인 곽혁과 친구 사이였다는데, 이를 감안하면 왕창과 왕릉은 부자뻘 나이차가 된다.[2] 〈오지 오주전〉에서는 주적을 육개달의 원군이 구원해 위군이 철병했다고 나오며, 〈주적전〉에는 주적이 처음에 유리했으나 갈수록 형세가 불리해져 물러났다고 이와는 상이한 기록이 적혀 있다.[3] 후술할 그의 행적 등과 관련되어 사료로서의 가치는 영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는다.[4] 이 때 왕창이 정남장군으로 부임했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이 관서를 완에서 신야로 옮기는 것이었다고 언급되기도 했다. 부관은 완이 근방에서 가장 완벽한 군사 시스템을 갖춘 곳이라고 만류했으나 왕창은 요충지란 언제나 상황에 따라 바뀌는 것이라고 말하며 강행했고, 부관은 오자마자 이사시키는 놈은 저놈이 처음이라며 빡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