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30 00:23:15

와우 시민아파트 붕괴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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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우시민아파트 붕괴 사고
臥牛市民아파트崩壞事故 | Wau Apartment Collapse
파일:external/static.news.zumst.com/1362998370_00462973001_20130312.jpg
발생일 1970년 4월 8일
[dday(1970-04-08)]일 경과
발생 위치 서울특별시 마포구 창전동 와우산 와우시민아파트
유형 건물 붕괴
원인 부실공사
인명피해 사망 34명
부상 40명
재산 피해 50억 700만원[1]

1. 개요2. 전개
2.1. 배경2.2. 부실 공사2.3. 붕괴2.4. 결과
3. 붕괴 이후 와우아파트4. 사고 이후 시민아파트5. 이후6. 매체7. 기타8. 유사 사건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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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70년 4월 8일 서울특별시 마포구 창전동 와우산 기슭에 위치했던 와우시민아파트 19개동 중 1개동(15동)이 붕괴된 사고이다.

2. 전개

2.1. 배경

당시 서울은 급격한 도시 팽창으로 말미암아 전국 각지에서 일자리를 찾아 몰려든 사람들로 인구가 급증했지만 그에 비해 주택 상황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그 때문에 많은 서울시민들은 소위 판자촌이라 불리는 무허가 건축물에서 지내게 되었고 이는 빠르게 늘어나는 중이었다.

2.2. 부실 공사

이런 상황에서 1966년 당시 미국 대통령 린든 B. 존슨이 방한했을 때 남산 자락과 청계천 일대의 판잣집(하꼬방)이 TV를 통해 미국에 생중계되면서 "이건 나라 망신이다"라는 여론이 높아졌고[2] 박정희 정부는 당연히 상황을 좋지 않게 여겨 판자촌을 정리하라고 명령했으며 김현옥 당시 서울특별시장 지시하에, 각 구청들은 판자촌 등 무허가 건축물의 현황을 파악한 후 대부분을 철거하고 시민아파트들을 짓게 했다. 이런 과정에서 건설된 시민 아파트 중에 바로 이 와우 아파트도 있었다.
파일:1691420327826.jpg
와우 아파트의 조감도
그리고 당연하게도 판자촌이 있던 곳에 아파트를 지었으니 대부분 위치는 산 가장자리였다. '왜 저런 곳에 아파트를 지었냐.'는 질문에 김현옥 시장이 한 "야 이 XX들아. 높은 곳에 지어야 청와대에서 잘 보일 것 아냐!"라는 말이 유명하다. 물론 단순히 그러한 이유에서 산자락에 지은 것은 아니었다. 아파트 단지를 지을 만한 평지는 당연히 지가가 비싼 탓에 예산이 부족하여 국유지인 산 가장자리에 건설을 하게 된 것이었다. 와우 아파트 위치는 현 홍대거리 뒷산인 와우산 자락에 있었다.

그러나 정해진 기간 안에 아파트를 뚝딱 지어내야 하는 데다 원가도 턱없이 낮았다. 그 당시의 서울시는 말도 안 되는 수준의 단가에 입찰하게 하고 거부하면 이후 관급공사에서 불이익을 주었다. 게다가 중간에서 업체들과 공무원들이 떼먹는 경우가 빈번했기 때문에 와우 아파트를 비롯한 각종 시민아파트는 당연하게도 날림 중의 날림 건축이었다. 물론 이 당시에도 소련이나 중국, 북한, 동독,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프랑스 등에서 단 몇주~몇개월안에 아파트를 건설하는 경우는 많았지만 이쪽은 조립식 건축이라 주요 자재들을 공장에서 미리 만들어서 조립하는 방식으로 건설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은 수십년은 넘게 버틸 수준은 되었고,[3] 한국은 그런 기술이 들어오기 이전이었다.

와우 아파트는 건설업체 몇 곳이 나누어 지었는데 그중 13~16동은 (주)대룡건설이라는 업체에서 맡았다. 대룡건설은 자신들이 지어야 할 부분을 박영배라는 토건업자에게 하청으로 맡겼는데 이 사람은 무면허 업자였다! 거기에 공사비는 1동에 1,100만 원 정도로 5층짜리 아파트 한 동을 제대로 짓기에는 금액이 부족했다. 여기에 하청을 주는 과정에서 한 동당 125만 원씩 떼먹었으니 공사비는 더욱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는 신진 코로나현대 코티나 같은 자동차가 100만 원 하던 시절이었으니 지금으로 따지면 고작 몇 억 주고 아파트 단지를 지으라는 셈, 더 와닿게 비유하자면 다 떼먹고나서 제네시스 G90 10대 남짓되는 살 수 있는 돈으로 땅만 던져주고 아파트 한 동을 지으라는 소리와 다름이 없었다.

또한, 시민아파트의 기본설계도 문제였다. 당시 서울시는 기존에 거주하는 빈민층의 생활수준을 고려하여 1㎡당 280kg 정도 하중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는 설계기준을 제시하였다. 그런데 브로커들이 개입하여 입주권 가격을 크게 올린 탓에 막상 진짜 입주대상자였던 빈민층은 도저히 입주금을 낼 만한 형편이 안 되어 입주권, 소위 딱지를 팔고 떠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래서 실제 아파트에 입주한 이들은 대부분 중산층들이었다.[4] 이들이 무거운 가구와 많은 세간살이를 들여놓아 시민아파트에 걸린 실제 하중은 1㎡당 900kg 내외로 설계 기준의 3배를 넘었다.

결국 설계도 부실하고 공사비도 부족한 데다 그마저도 중간에서 떼먹은 상황에서 업자도 무면허였으니 당연히 엄청난 날림공사가 진행되었다. 철근 70개를 써야 할 기둥에 고작 철근 5개를 쓰고 만들었으니 말 다한 셈이었다. 콘크리트 강도도 크게 떨어졌는데 시멘트 함량이 적어 자갈이 섞인 모래 반죽이나 다름이 없었고 그 콘크리트를 만들 때 쓰는 물도 불순물이 엄청나게 많은 하수도 물을 사용했다고 한다. 그 결과 그래도 설계 예상 하중보다 넉넉하게 목표로 잡은 제대로 된 설계였다면 그래도 900kg까지는 버틸 콘크리트 구조물이었으나 재료 장난질으로 인해 초기 예상 하중인 200kg대를 간신히 버틸 수 있는 부실한 콘크리트 기둥이 되었다.

거기다가 고작 6개월 만에 아파트를 완성하느라 건축물을 세우는 데 필수적인 지반공사를 전혀 하지 않았다. 1~2층짜리 가건물 같은 걸 세우는 게 아닌 이상, 건물을 지으려면 지지하고 고정해줄 수 있는 암반층이 나오거나 고정할 수 있는 공학적 조치를 할 수 있을 때까지 파거나 보강해야 한다. 즉, 어느 정도 땅을 파서 기반을 보강하거나, 연약 지반이면 전봇대 같은 커다란 콘크리트 말뚝(파일)을 더 안 들어갈 때까지 촘촘히 박는다. 그러고 나서 콘크리트로 토대를 만들고 건물을 올리는 것이 건물을 짓는 정석[5]인데 애초에 건물을 어떻게 짓는지조차 모르는 작자들건설을 맡았으니 부실한 아파트가 어떻게 될지는 뻔할 뻔자인 것이었다.

2.3. 붕괴

파일:20230905_165749.jpg
균열이 간 아파트 벽면의 모습
이런 탓에 튼튼한 암반이 아닌 물렁한 부토 위에 아파트 기둥이 세워졌다. 그나마 겨울에는 땅이 얼어 있어서 간신히 버텼지만 봄이 되고 땅이 녹자 결국 기둥이 하중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졌다. 이는 추위가 풀리는 봄에 자주 일어나는 현상으로 봄비가 내리면 산사태가 자주 난다. 겨울 동안 내린 눈이나 물이 바위나 흙 속으로 들어가 언다. 물이 얼면 부피가 커지기 때문에 바위나 흙을 지면에서 밀어내는데, 봄이 되어 녹으니 땅이 꺼지면서 녹은 물과 함께 그대로 쓸려 내려간다. 봄철에 TV나 라디오 등의 대중매체에서 해빙기 사고 예방 캠페인을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멀쩡하게 지은 아파트라면 내구성을 위해서 어느 지형이든지 지반을 튼튼하게 공사한다.

와우아파트는 1969년 12월 26일에 완공되어 입주가 시작되었는데 그때부터 이미 문제의 업자가 시공한 13~16동에는 금이 간 채였다고 한다. 특히 14동은 콘크리트 받침 기둥이 떨어지는 사고가 일어나 붕괴 시점(1970년 4월 8일)에는 주민이 대피한 상태였다. 해빙기가 되면서 땅이 녹자 지반이 내려앉으면서 기둥도 내려앉고 결국 해당 위치에 있던 15동이 산 아래쪽으로 넘어지듯이 무너져 판잣집 세 채를 덮치면서 산산조각났다.[6]
파일:20230913_013654.jpg
이 사고로 70여 명이 매몰당해 와우 아파트 입주민 33명과 잔해에 깔린 판잣집 주민 1명이 사망하고 40명이 부상당하는 큰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그나마 이 시점이 30세대 중 15세대만 입주된 상태였기에 이 정도였지 만일 모든 세대가 입주해 있었다면 사상자가 더욱 크게 늘었을 것이다.

2.4. 결과

이 사고로 '불도저 시장' 김현옥 서울특별시장이 사직했다. 모양새는 사직이었지만 사실상 경질이었다. 문제의 하청업자 박영배는 징역 5년을 선고받았고, 이외에도 3명이 징역을 선고받았다.

붕괴 직후 서독의 건축 전공 대학원생들이 사고 원인을 분석하려고 시도하다가 난색을 띄고는 귀국했는데 그 이유가 아파트는커녕 헛간을 짓기조차도 턱없이 부족한 자재로 어떻게 아파트를 지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서였다고 한다. 즉, 건축공학적인 분석과 규명을 하러 왔더니 그냥 집을 짓는 재료가 완전히 두부 수준의 재료였다는 명쾌한 결론이 나와 황당함과 기막힘에 치를 떨고 돌아갔던 것이다. 그야말로 나라 망신 제대로 당한 셈이었다.

3. 붕괴 이후 와우아파트

15동 붕괴가 일어난 후 문제의 시공업자가 시공한 13, 14, 16동도 철거됐다. 콘크리트 질이 너무 떨어져 언제 무너질지 모를 정도로 상당히 불안하고 위태로운 상황이라 철거하는 데도 애를 먹었다고 한다. 1972년 서울시 항공사진으로 먼저 이 4개 동이 철거된 모습을 볼 수 있다.

와우아파트는 총 19개 동(1-16, 가-다)이었는데, 남은 15개 동은 붕괴 이후에도 어느 정도 보강한 후 계속 사람들이 살았다. 1976년과 1984년, 1988년과 1989년 네 차례에 걸쳐 차례로 철거하고, 1991년까지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4개 동(3, 4, 5, 가)도 결국 철거한 뒤 남은 터에 공원을 조성했다.
파일:와우산78년도항공사진.png 파일:와우산현재위성사진.png
1978년도 항공사진과 지적도[7] 현재 위성사진과 지적도
그런데 지금도 이 일대 지적편집도를 잘 보면 와우아파트 시절의 흔적이 남아 있다.[8] 와우공원 북쪽의 지번주소가 183~199(1-12동)까지 여러 필지로 쪼개져 있고 남쪽으로도 200, 201((나), (다)동)로 두 개의 필지로 쪼개져 있는 것이 그 흔적. 다만 붕괴한 15동을 비롯한 13, 14, 16동은 곧바로 철거돼서인지 이 동들이 있었던 곳은 23임으로 한 필지로 되어 있다. 그리고 200번 지번주소로 표시된 (나)동의 동쪽에도 (가)동이 더 있었는데 이 동의 부지는 현재 신촌금호어울림아파트의 부지로 되어 있다. 와우아파트 동 부지 중에 유일하게 아파트가 들어선 곳. 당시 사고현장 위치도를 보면 현재 와우산 공원 남쪽에도 동들이 있었는데 그쪽에 붕괴된 15동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해당 지도의 동 위치와 현재 지적도 구획은 상술한 것처럼 필지가 바뀐 동들을 제외하고 대부분 일치한다. 다만 최근 지적편집도를 확인한 결과, 이 일대 지번이 많이 달라졌다.

게다가 아직도 이 구역이 제1종일반주거지역으로 되어있다. 따라서 "이론적으로는" 서울특별시가 부지를 매각한다면 아파트를 다시 짓는 것도 가능하지만, 참사가 일어났던 곳으로 널리 알려진 만큼 이곳에 다시 아파트가 지어질 일은 없을 것이다.[9][10] 거기다 상술하듯 1~12동, 가, 나, 다동이 있었던 곳이면 몰라도 문제의 그 13~16동은 이미 23번 필지로 되어 있기 때문에 건설 자체가 불가능한 곳이라 그럴 염려는 할 필요가 없다.[11]

4. 사고 이후 시민아파트

이 사고 이후 아직 건설되지 않은 시민아파트는 건설계획이 모두 취소 및 폐기되었고 이미 짓고 있던 시민아파트는 골조를 더 보강해서 완성했다. 사고 이후 시민아파트는 434개 동이 완공된 상태였는데, 불타는 국민 감정에 놀란 박정희 정권이 급하게 안전도를 검사하자 이 중 무려 80%인 349개 동이 보수가 필요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결국 쓸 만한 아파트는 계속 보수해서 쓰고 못 쓸 정도가 된 아파트는 하나씩 철거했다. 이때 남은 와우시민아파트도 철거되었다. 이후에 판자촌을 밀고 이들에게 시민아파트를 준다는 계획에서 중산층을 목표로 한 재개발로 재개발 방향이 수정되었다. 동시에 진행된 다른 계획인 판자촌 거주민들을 아예 서울 시외로 이동시킨다는 계획도 부실한 재개발 계획 자체에서 일이 터졌다. 대표적인 사례가 광주대단지 사건이다. 이로써 당시 정부가 꺼내든 시민아파트와 판자촌민 시외 이전 계획 둘 다 결과물에서 크게 실패한 셈이 되었다. 박정희 이후에도 1988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판자촌 정리를 시도하고 기존의 판자촌에서 바깥쪽으로 판자촌으로 이전시키며 최대한 판자촌 범위를 좁혀갔으나 끝내는 강남3구에 판자촌 알박기가 출현하는 결과를 낳았다.

서울 시내 시민아파트 대부분이 철거되고 남은 것은 소월로 근처 회현시민아파트 한 동뿐이다. 무한도전 '여드름 브레이크' 특집 초반의 바로 그 아파트.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 이후에 준공된 아파트라서 시민아파트답지 않게 골조가 튼튼하다고 하다. 물론 그마저도 지은 지 50년이 넘은 탓에 몇 년 전부터 재건축이 논의되는 상황이다.

또한 아파트 대부분이 재개발/재건축되는 상황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1970년대 구조형 아파트라서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지를 위시해 일종의 관광 명소가 되지만 이곳도 계속 노후화되므로 어떻게든 재건축하든지, 아현동 남아현 시민아파트처럼 리모델링이라도 하든지 해야 하는 상황. 그러나 이미 서울시는 과거 약수 금호 지역 재개발(지금의 남산타운아파트 일대) 당시 주민들의 반발에 관한 기억 때문인지 이 지역을 상대로 삼은 확실한 출구 전략도 나오지 않는 상황이다. 비슷한 시기 완공된 서대문 금화시민아파트 재건축 때도 이것 때문에 내홍을 치른 서울시였기에 더욱 그렇다.

이 사고 탓에 아파트를 불신하는 감정이 팽배해지자 박정희 정부는 시범아파트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중산층을 겨냥한 새로운 형태의 아파트를 짓기로 했다. 더욱 높고 더욱 쾌적하고 안전한 아파트를 목표한 것. 이에 여의도 시범아파트를 시작으로 시범아파트들이 성공했다고 할 만하게 세워졌고 이것이 지금의 아파트의 전형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와우 시민아파트 붕괴 사고는 5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대한민국 주거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5. 이후

조성된 와우공원은 현재의 홍익대학교 뒷편에 바로 위치한다. 테니스 코트나 각종 헬스기구도 있고 밤마다 사람들이 운동하러 오는 좋은 근린공원이지만, 와우산과 바로 맞붙은 홍익대 시설물들(C동, I동, P동 등)에서 가끔 귀신 목격담이 나오는 등 일종의 심령현상 장소가 된 모양이다. 너무나 어이없는 사고 전말을 생각하면 이해할 만하다. 물론 근처 거주자의 말에 따르면 없다고 한다. 그래야 집값이 안 떨어지니까.

이 사고 이후로도 대한민국의 건설업계는 별로 개선되지 않다가 결국 1990년대 다리가 무너지고, 백화점이 무너지면서 정점을 찍고 말았다.[12] 이 때문에 대한민국 내에서뿐만이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대한민국 건설사들의 신뢰도가 크게 추락했고 이 여파를 회복한 것은 2000년대 중후반이 되어서였다.[13]

1980년대 반공 서적을 보면 북한에서는 철근 대신에 싸리나무를 쓴 공법으로 건설하기에 1970년대에 아파트 붕괴 사고가 나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서술이 있는데 당시 정부에서 고의로 유포한 낭설이었다. 이 때까지는 남북한 간 체제 경쟁이 계속되던 때였다. 물론 1990년대 이후 경제력이 악화된 북한에서 부실 공사가 성행한 적이 있으며 2014년에 결국 이 터졌다.

한국의 유명 코미디 프로듀서이던 김경태가 와우아파트 16동에 살고 있었는데, 바로 옆의 15동이 무너진 것에 식겁하고 얼마 안 가 새로 집을 구하여 이사갔다고 한다.

앵커 최일구가 와우아파트에서 살았다고 무릎팍도사에서 이야기한 적이 있다. 안성에서 서울로 이사했던 당시에는 이미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가 일어난 후였지만 어린이의 눈으로 보기에도 당시 상황이 꽤 참혹했던 모양이다. 이때의 기억 탓에 MBC의 기자가 된 후 "부실공사"라면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니게 되었다고 한다. 이 인연이었는지 최일구는 MBC에서 한강 교량의 보수관리 실태를 취재하게 되었고 보도한 지 1년 후 실제로 성수대교가 무너졌다. 사고 당일 MBC 뉴스데스크를 진행하던 엄기영 앵커의 극딜은 덤. 최일구는 성수대교 붕괴 이후 당산철교의 균열을 발견하여 당산철교로 올라가서 직접 부실한 상태인 것을 확인한 뒤 촬영을 하였고 결국 안전 검사에서 딱 걸린 당산철교는 수도권 전철 5호선의 개통과 함께 철거 이후 재시공이 결정됐다. 그리고, 당산철교는 1997년 철거를 시작했을 때 기존 교량이 공사중에 그대로 무너져 1999년에 다시 완공했다. 원래 1997년 3월에 철거를 시작하려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이보다 2개월 앞당긴 1월에 재시공을 시작하였는데 이렇게 1월로 앞당긴 것도 실로 신의 한 수가 되었던 셈이다. 재시공이 더 늦었다면 금방 붕괴되어 대형참사가 났을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6. 매체

사월에 들어서 준구는 또 한 번 그의 캔버스가 찢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마포에 있는 아파트가 무너진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중략) 그것이 무너져 내린 일은 어떤 오싹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아마 모든 사람의 느낌이나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보통 사람이 죽는다거나 집이 무너진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산다. 사람은 언제까지나 살고 아는 사람들은 늘 주변에 있겠거니 하고, 눈 익은 집은 늘 그 자리에 있는 것으로 알고 산다. - 최인훈, 〈하늘의 다리〉(1970)
  • 하늘의 다리: 최인훈의 소설. 당시 와우 아파트 붕괴 사건을 다룬 몇 안 되는 드문 작품이다.[15]
  • 한강: 이 사건이 한 챕터로 나온다. 등장인물 중 한 명의 할머니가 와우아파트에 살았는데, 붕괴한 동이 아닌 다른 동이라 무사했다는 설정이라 피해자를 직접적으로 다루진 않았다.
  •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 해당 사건에 관한 제보를 받고 있지만 관련 제보가 잘 이뤄지지 않는 모양인지 2023년 5월부터 받기 시작한 제보가 1년이 다 되도록 방영 일정이 미지수인 상황이다.
  • 아파트 404에서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한 에피소드를 방영했다.

7. 기타

  • 와우아파트의 '와우'를 영단어 감탄사 'Wow'로 알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며 옛날부터 이를 영어로 번역할 때 "Wow Apartment"라고 오역해버리는 웃지못할 해프닝도 여러번 벌어진다. 때문에 이를 들은 외국인들이 눈이 휘둥그레지며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와우를 Wow로 번역해 버리는 사례는 1990년대부터 보이는 것으로 보아 역사가 오래된 오역인 듯하다. 그러나 '와우'는 영어가 아니라 "누워 있는 소"라는 뜻의 한자어 '[16]'이며, 아파트 이름이 와우아파트가 된 것도 아파트가 위치한 와우산(臥牛山)에서 이름을 따왔기 때문이다. 와우산이라는 지명의 인지도도 높지 않고 '와우'가 한자어인 줄 모르는 경우가 대다수인 데다 대부분 영단어 감탄사 Wow에 익숙하기 때문에 이러한 일이 발생하는 것. 올바른 로마자 표기법대로라면 Wau Apartment 또는 Warwoo Apartment가 정확한 말이다.

8. 유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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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9월 11일
2,996 28 9.11 테러
2001년 7월 24일
20 진주 관광버스 추락 사고
2000년 10월 27일
22 장수 88올림픽고속도로 추돌 참사

[ 199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사건명
1999년 10월 30일
56 인천 인현동 호프집 화재 참사
1999년 6월 30일
23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 사고
1998년 10월 29일
27 부산 범창콜드프라자 화재
1998년 7월 31일~8월 1일
103
1997년 8월 6일 228 대한항공 801편 추락 사고
1996년 7월 26일
20 철원 군부대 산사태
1996년 4월 4일
21 양평 버스 추락 사고
1995년 8월 21일
37 경기여자기술학원 화재
1995년 6월 29일
502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1995년 4월 28일
101
1994년 10월 24일
29 충주 제5호 화재사고
1994년 10월 21일
32 성수대교 붕괴 사고
1993년 10월 10일
292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1993년 7월 26일
68 아시아나항공 733편 추락 사고
1993년 6월 10일
20 연천 예비군 훈련장 폭발 사고
1993년 4월 19일
34 논산 정신병원 화재
1993년 3월 28일
78
1993년 1월 7일
28 우암 상가아파트 붕괴사고
1992년 10월 22일
28 대양하니호 침몰 사고
1991년 11월 3일
22 인제 버스 추락 사고
1990년 11월 4일
21 소양호 버스 추락 사고
1990년 9월 1일
25 영동고속도로 섬강교 버스추락사고
[ 198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사건명
1989년 9월 17일
24 전북 모래재 버스 추락 사고
1989년 7월 27일
79 대한항공 803편 추락 사고
1988년 3월 25일
22 안양 봉제공장 화재
1987년 11월 29일
115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1987년 8월 29일
32 오대양 집단자살 사건
1987년 6월 16일
29 극동호 유람선 화재 사건
1986년 7월 30일
21 고창 거룻배 전복 사고
1985년 1월 11일
38 양강교 버스 추락사고
1984년 3월 24일
29 영덕 시루봉 CH-53 추락 사고
1984년 1월 14일
38 부산 대아호텔 화재 사건
1983년 10월 9일
25 아웅 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
1983년 9월 1일
269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1983년 4월 18일
25 대구 초원의집 화재
1982년 6월 1일
53 청계산 C-123 추락사고
1982년 4월 26일
62 우순경 사건
1982년 2월 5일
53 제주 C-123 추락사고
1981년 11월 22일
33 부산 금정산 버스 추락사고
1981년 5월 14일
55 경산 열차 추돌사고
1981년 2월 28일
24 대림호 침몰 사고
1980년 6월 5일
23 광주 지하살롱 화재 사고
[ 197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사건명
1979년 10월 27일
26 은성탄광 화재
1979년 4월 14일
44 함백 탄광 폭발사고
1978년 7월 23일
33 한강대교 버스 추락 사고
1977년 11월 11일
59 이리역 폭발사고
1976년 10월 28일
34 동해 어선 조난 사고
1976년 5월 18일
23 답곡리 버스 추락사고
1976년 2월 28일
32 화천 버스 추락사고
1974년 11월 3일
88 대왕코너 화재사고
1974년 6월 28일
28 대한민국 해경 경비정 제863호 침몰 사건
1974년 2월 22일
159 YTL30호 침몰 사건
1973년 8월 12일
32 영동역 유조열차 폭발 사고
1973년 5월 16일
22 영일 건널목 열차 추돌사고
1972년 12월 24일
30 파크로버호 침몰 사고
1972년 12월 2일
53 서울시민회관 화재 사고
1972년 8월 1일
26 의암호 버스 추락 사고
1971년 12월 25일
166~191 대연각호텔 화재
1971년 10월 13일
20 남원역 열차 추돌사고
1971년 5월 10일
80 청평호 버스 추락 사고
1971년 5월 10일
31 질자호 침몰 사고
1970년 12월 15일
326 남영호 침몰사고
1970년 11월 5일
31 의암호 선박 전복 사고
1970년 10월 14일
46 모산 수학여행 참사
1970년 8월 21일
25 추풍령 고속버스 추락 참사
1970년 4월 8일
33 와우 시민아파트 붕괴사고

[ 196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사건명
1969년 9월 17일
37 창녕 기관선 - 남지교 충돌 사고
1969년 1월 31일
41 천안 열차 추돌사고
1968년 10월 30일
48 산청 버스 추락 사고
1968년 1월 8일
41 함양 버스 추락 사고
1967년 10월 16일
42 금릉 버스 추락 사고
1967년 9월 15일
29 삼양수산 원양어선 침몰 사고
1967년 4월 8일
80 서울 청구동 C-46 추락사고
1967년 1월 19일
39 해군 당포함 격침 사건
1967년 1월 14일
93 한일호-충남함 충돌 사고
1967년 1월 1일
41 서문시장 화재
1966년 1월 18일
22 중구 남산동 판자 아파트 화재
1964년 7월 29일
95+ 서해 어선단 실종 사고
1963년 10월 23일
49 여주 조포 나룻배 침몰 사고
1963년 6월 25일
70 거제 장승포 산사태
1963년 1월 18일
140 연호 침몰 사건
1962년 9월 7일
36 한남동 나룻배 침몰 사고
1960년 3월 2일
62 부산 국제고무공장 화재
1960년 1월 26일
31 서울역 압사 사고
[ 195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 사건명
1959년 7월 17일
67 부산 공설운동장 압사 사고
1957년 2월 22일
21 한강 미 공군 C-124A 추락 사고
1956년 1월 12일
66 태신호 화재
1955년 3월 2일
42 부산역 열차 화재
1953년 11월 27일
29 부산역전 대화재
1953년 1월 31일
56 오산 건널목 추돌 사고
1953년 1월 25일
66 행운환 침몰 사고
1953년 1월 9일
330 창경호 침몰 사고
1952년 11월 16일
25 강릉 공항 미 공군 C-46D 추락 사고
1952년 10월 16일
44 양평 미 공군 C-119C 추락 사고
1951년 7월 11일
94 제5편리호 침몰 사고
1951년 7월 11일
30+ 제13호 침몰 사고
1950년 6월 30일
23 부산 미 공군 C-54G 추락 사고
[ 194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사건명
1949년 10월 5일
71 평해호 침몰 사고
1949년 8월 18일
51 대강 터널 질식 사고
1948년 6월 8일
150 미군 독도 오폭 사건
1947년 8월 19일
23 태양환호 침몰 사고
1946년 11월 13일
42 영등포역 열차 충돌 사고
1946년 10월 22일
59 어청도 기뢰 폭발 사고
1945년 9월 29일
73 대구역 열차 충돌 사고
1945년 8월 24일
549​~𔁳,000+
우키시마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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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액수는 당시 가치이므로 지금 가치로 환산하면 1,000억은 넘는다.[2] 특히 이 장면을 미국에서 본 LA, 뉴욕, 시카고 교민들과 국비유학생들이 합동으로 청와대에 투서를 올려 ‘서울 재개발을 해달라’라고 탄원했다는 야사가 전해진다.[3] 물론 외관에 신경을 별로 쓰지 않아서 외형이 우중충하다거나 단열이 부실하다는 등의 문제점이 많이 지적된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와우아파트식으로 우격다짐식으로 짓는것은 아니었다는 얘기였다.[4]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이런 상황이 잘 나온다. 실제로 개발독재 시절에는 재개발, 재건축 아파트 입주권 소위 딱지를 팔고 떠나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이를 중산층, 부유층들이 사들여서 부동산 재테크를 하였다. 2010년대 이후에나 기존 거주민들이 신축 아파트에 100% 입주하는 재개발 지역이 나오기 시작했다. 시민아파트와 같은 이유로 역시 철거민들을 위해 조성된 광주대단지 또한 철거민들보다는 일반 입주자의 비중이 더 컸다.[5] 이탈리아에 있는 피사의 사탑은 거진 10층 다 되는 탑을 쌓는데도 밑으로는 고작 3m밖에 파지 않았다.[6] 판잣집들은 현재 아파트 단지로 재개발되었다.[7] 1978년이 V-World로 볼 수 있는 서울 항공사진 중 가장 오래된 연도이다. 후술할 사고현장 위치도와 대조하면 13, 14, 15, 16동은 물론 1, 9, (다)동도 철거되었음을 알 수 있다.[8] 사실 이곳 말고도 지적편집도에 흔적만 남은 시민아파트도 더러 있다. 시민아파트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대부분 공원화되다 보니 굳이 지적 정리를 할 이유가 없어서 그냥 그대로 뒀다. 시민아파트 외에도 몇몇 초창기 주공아파트도 지번이 여러 개로 분할되어 있다.[9] 삼풍백화점 참사가 있었던 곳은 아크로비스타가 들어섰지만, 이쪽은 손해배상을 이준서울특별시청에 헌납한 전 재산에서 대부분 충당해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매각했던 측면이 있었다. 게다가 이 부분은 인근 주민들의 반대 등 여러가지 변수도 있기 때문에 마냥 쉬운 일은 아니다.[10] 게다가 주택가 속의 산자락에 위치한 와우아파트 부지와 달리, 삼풍백화점은 강남 한복판 교통 요지에 있었기 때문에 개발 압력도 훨씬 강했다.[11] 아크로비스타도 붕괴된 삼풍백화점 A동의 위치가 현재의 아크로비스타 A동 구역에 있기에 A동 부지는 공원 같은 곳으로 비워 놓고 나머지 구역에만 아파트를 세우자는 여론도 있었다. 구 삼풍백화점 B동 부지가 현 아크로비스타 B동, 구 삼풍백화점 노상 주차장 부지가 현 아크로비스타 C동이다.[12] 성수대교는 1979년에 완공되었고 1994년 10월 21일에 무너졌으며, 삼풍백화점은 1989년에 완공되었고 1995년 6월 29일에 무너졌다.[13] 대표적인 사례로 1990년대 말레이시아스팡에서 기존의 공항을 대신할 신공항을 건설할 때 대한민국 기업들이 빠졌던 적이 있었다. 당시 한국이 말레이시아를 서서히 앞서가던 시기였다고 하지만 말레이시아에서도 대한민국의 건설사들을 믿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물론 얘네들도 이전인 1993년에 한 번 일이 터진 적이 있었다. 그러나 말레이시아 입장에선 아무리 본국에서도 건설 사고가 났던 적이 있어도 값비싼 해외 건설업체 외주를 대한민국에 맡길 리는 없는 게 당연했다.[14] <MBC 미스터리> 유튜브 채널에 이 부분 영상이 있다. 링크 영상 참고하자.[15] 자세한 내용은 송은영, 『서울 탄생기: 1960-1970년대 문학으로 본 현대도시 서울의 사회사』(2018)를 참고하면 좋다.[16] 누울
파일:CC-white.svg이 문서는 개편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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