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2-08 13:00:34

안드로니코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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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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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간의 혼란 레온티오스 | 티베리오스 3세 | 2차 재위 유스티니아노스 2세 · 티베리오스 | 필리피코스 | 아나스타시오스 2세 | 테오도시오스 3세
이사브리아 왕조 레온 3세 | 콘스탄티노스 5세 | 아르타바스도스 · 니키포로스 | 2차 재위 콘스탄티노스 5세 | 레온 4세 | 콘스탄티노스 6세 | 이리니
니키포로스 왕조 니키포로스 1세 | 스타브라키오스 | 미하일 1세 랑가베스 · 테오필락토스 · 스타브라키오스
- 레온 5세 · 콘스탄티노스
아모리아 왕조 미하일 2세 | 테오필로스 · 콘스탄티노스 | 미하일 3세 · 테클라
마케도니아 왕조 바실리오스 1세 · 콘스탄티노스 | 레온 6세 | 알렉산드로스 2세 | 콘스탄티노스 7세 | 로마노스 1세 · 흐리스토포로스 레카피노스 · 스테파노스 레카피노스 · 콘스탄티노스 레카피노스 | 로마노스 2세 | 니키포로스 2세 | 요안니스 1세 | 바실리오스 2세 | 콘스탄티노스 8세 | 로마노스 3세 | 미하일 4세 | 미하일 5세 | 공동 즉위 조이 · 테오도라 | 콘스탄티노스 9세 | 2차 재위 테오도라
- 미하일 6세
콤니노스 왕조 이사키오스 1세
두카스 왕조 콘스탄티노스 10세 | 에브도키아 · 미하일 7세 · 콘스탄티오스 두카스 · 안드로니코스 두카스 · 콘스탄티노스 두카스 | 로마노스 4세 · 레온 디오예니스 · 니키포로스 디오예니스 | 니키포로스 3세
콤니노스 왕조 알렉시오스 1세 · 콘스탄티노스 두카스 | 요안니스 2세 · 알렉시오스 콤니노스 | 마누일 1세 | 알렉시오스 2세 | 안드로니코스 1세 · 요안니스 콤니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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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케아 제국
라스카리스 왕조 테오도로스 1세 · 니콜라오스 라스카리스 | 요안니스 3세 | 테오도로스 2세 | 요안니스 4세 | 미하일 8세
비정통 콘스탄티노스 라스카리스
동로마 제국
팔레올로고스 왕조 미하일 8세 | 안드로니코스 2세 · 이리니 | 미하일 9세 | 안드로니코스 3세 | 요안니스 5세 | 공동 즉위 요안니스 6세 · 마테오스 | 2차 재위 요안니스 5세 · 안나 | 안드로니코스 4세 · 요안니스 7세 | 3차 재위 요안니스 5세 | 2차 재위 요안니스 7세 | 4차 재위 요안니스 5세 | 마누일 2세 · 요안니스 7세 · 안드로니코스 5세 | 요안니스 8세 | 콘스탄티노스 11세
아우구스투스 · 카이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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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 제122대 황제
안드로니코스 2세
Ἀνδρόνικος Β
<nopad> 파일:Andronikos_II_Palaiologos2.jpg
<colbgcolor=#702963><colcolor=#FCE774,#FCE774> 이름 안드로니코스 두카스 앙겔로스 콤니노스 팔레올로고스
Ἀνδρόνικος Δούκας Ἄγγελος Κομνηνὸς Παλαιολόγος
출생 1259년 3월 25일
니케아 제국 니케아
사망 1332년 2월 13일 (향년 72세)
동로마 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
재위 기간 로마 황제
1282년 12월 11일 ~ 1328년 5월 24일 (45년 165일)
전임자 미하일 8세
후임자 안드로니코스 3세
부모 아버지: 미하일 8세
어머니: 테오도라 팔레올로기나
배우자 헝가리의 언너, 몬페라토의 이리니
자녀 미하일 9세, 테오도로 1세 델 몬페라토
종교 정교회
1. 개요2. 생애
2.1. 초기 생애2.2. 재정 위기와 베네치아 문제2.3. 아나톨리아 전선
2.3.1. 오스만 베이국의 발흥2.3.2. 크레타 침공2.3.3. 바페오스 전투2.3.4. 카탈루냐 용병2.3.5. 방어선의 붕괴
2.4. 불가리아와 전쟁2.5. 팔레올로고스 내전 (1321~1328)
3. 평가4. 가족관계5. 참고 자료

1. 개요

로마 제국 제122대 황제이자 동로마 제국 팔레올로고스 왕조 제2대 황제.

1261년 부친 미하일 8세에 의해 복원된 로마 제국의 제122대 황제이자,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제2대 황제. 부친이 1282년 사망하면서 50년 가까운 기간 동안 옥좌에 앉아있었다. 그가 황제에 오를 당시, 제국은 유럽과 아나톨리아 양면에서 수많은 적들의 압박을 받고 있었으며, 이는 일부분 그의 부친의 책임이 있어 개고생을 했다.[1] 특히 개판난 경제는 그를 괴롭혔고 결국 재정난 해결을 위해 상비군을 대폭으로 감축하고 해군을 해체했는데 이는 장기적으로 제국에 이 되고 만다.[2] 말년에는 손자와의 내전을 벌였고 결국 패배하여 수도원에서 죽었다. 한마디로 안 좋은 상황 속에서 나름 노력은 했지만 그 과정이 좋지만은 않아 이란 욕은 다 들어먹게 된 황제.[3]

2. 생애

2.1. 초기 생애

풀네임은 안드로니코스 두카스 앙겔로스 콤니노스 팔레올로고스. 그는 미하일 8세테오도라 팔레올로기나의 아이들중 가장 오래 살았다. 또한 그는 요안니스 3세 와도 혈연관계가 있다. 그는 1261년, 아버지 미하일 8세가 콘스탄티노플을 수복한 직후 공동황제로 임명되었다. 1282년 미하일 8세가 죽자 단독황제로 즉위하였다.

2.2. 재정 위기와 베네치아 문제

1285년, 그는 재정 위기와 화폐 가치 하락을 해결하기 위해 증세와 함대 축소를 결의하였다. 그의 치세 동안 히페르피론의 가치는 급격하게 떨어졌다.

그는 재정문제 해결을 위해 세금을 올리고 면세자들의 수를 줄이며 약 80척을 보유하던 해군을 해체한다. 따라서 이후 동로마 제국은 제노바 공화국베네치아 공화국 해군에 의존하게 되었다.

1296년에 제노바인들이 황제의 묵인 하에 콘스탄티노폴리스 갈라타 지구의 베네치아 상인들을 학살하자, 1296 ~ 1302년간의 전쟁이 발발하게 되고 동로마 - 제노바 측이 패하여 산토리니 섬 등이 베네치아 령이 되었다.

이렇게 되자 뒤늦게 재정 안정화를 이유로 해군을 해체한 것이 멍청한 짓이었음을 깨닫게 된 안드로니코스 2세는 1320년대부터 해군력 재건을 목표로 드로몬 20척을 건조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2.3. 아나톨리아 전선

2.3.1. 오스만 베이국의 발흥

1281년, 에르투으룰 사후 부족을 이어받은 오스만 1세1289년에 에스키셰히르를 함락, 제국 측에 충격을 주었고, 1299년에는 베이 칭호를 쓰며 쇠위트를 수도로 정한 후에 오스만 제국이 될 국가를 세웠다.

2.3.2. 크레타 침공

안드로니코스 2세는 1277년 베네치아인들과의 조약으로 제국으로 송환된 호르타치스(Hortatzis)에게 크레타공격을 명령했다. 크레타를 완전 정복하는데는 실패했지만 여기서 납치한 크레타인들을 메난드로스 강가에 이주시켰다.

2.3.3. 바페오스 전투

오스만 1세1282년 부족장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리고 약 20년 동안 동로마령 비티니아에 여러번 침입하여 제국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팔레올로고스 시대의 벨리사리우스"로 일컬어지는 알렉시오스 필란트로피노스오스만군을 상대로 선전했으나, 그가 모종의 이유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명형에 처해진 뒤에는 속절없이 밀렸다.

1301년 오스만 베이국니케아 제국의 수도였던 니케아포위했고, 여러차례 프루사를 공격했다. 또한 근처 농지를 황폐화하고 니코메디아를 굶기겠다고 협박을 했다.

1302년 봄, 공동황제였던 미하일 9세는 마그네시아 방면 원정을 계획했다. 튀르크인들은 동로마군의 수에 압도당하며 전투를 피해다녔다. 그 과정에서 동로마군은 너무나 깊숙히 진격해 버렸고 결국 그들은 마그네시아에서 고립되게 된다.

결국 징집병들은 그들의 가족과 집들을 지키기 위해서, 알란족트라키아 일대의 그들의 가족들을 지키기 위하여 떠나면서 동로마군은 전투없이 와해되고 만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미하일도 막대한 난민들과 함께 해상으로 철수했다.

이후 니코메디아를 구원하기 위해 안드로니코스는 메가스 헤타리아 요르요스 무잘론[4]에게 2천의 군사를 주어 보냈고 1302년 6월 27일 바페오스 평원에서 (아마도 니코메디아 인근) 오스만 1세가 이끄는 5천의 튀르크군 경기병대와 조우했다. 5천의 오스만군은 오스만 1세의 군대 뿐만이 아니라 그의 동맹인 파플라고니아와 메난드로스 강 인근 튀르크군도 포함되어 있었다.

튀르크의 돌격이 시작되자 전투에 관심없었던 알란족들이 철수 하기 시작했고, 동로마군의 전열은 붕괴되었다. 요르요스 무잘론은 남아있는 군사를 이끌고 니코메디아로 후퇴했다.

2.3.4. 카탈루냐 용병

미하일 9세의 실패와 바페오스 전투 전투의 패배 이후 안드로니코스는 지중해에서 끗발좀 날리던 루지에로 데 플로르가 이끄는 알모가바르 병종의 카탈루냐 용병들을 고용했다.

카탈루냐 용병대는 명성대로 여러번 튀르크인들에게 승리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정복지를 제대로 관리하기는 커녕 튀르크인들보다도 더 잔인하고 야만적인 통치를 벌였고, 약탈까지 저지르며 미하일 9세와 여러번 충돌했다.

1305년 이러한 횡포를 도무지 견디지 못한 동로마는 루지에로 데 플로르를 암살하기에 이른다. 이에 카탈루냐 전우회는 대장을 죽인 동로마에게 크게 분노했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적이었던 튀르크인들과 함께(...)[5]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테살리아를 약탈하고 황폐화했다. 거기에 아테네 공국테베를 정복하여 아예 거기에 눌러 앉아 1390년대에 피렌체에 조져지기 전까지 아테네 공국을 통치했다.

2.3.5. 방어선의 붕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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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7년의 정세

튀르크인들은 계속하여 동로마 제국령 아나톨리아를 공격했고 대부분의 비티니아 일대는 오스만 1세오르한의 공격으로 상실되며 안드로니코스 내전기에는(1326년) 프루사까지 잃는다.

오스만 베이국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카라시 왕조는 1296년 이후 팔로카스트론(Paleokastron)을 포함한 미시아 강가 일대를 정복한 것을 시작으로 1310년에 아이딘이 스미르나를, 사루한은 1313년 마그네시아를 정복했으며 게르미얀(Germiyan)은 1328년 시마브(Simav)를 점령하는 등 아나톨리아 서부 대부분이 튀르크인들에게 넘어가게 된다.

2.4. 불가리아와 전쟁

토도르 스베토슬라프제2차 불가리아 제국 역시 큰 문제로 다가왔다. 그는 1305~1307년간 미하일 9세를 박살내고 북부 트라키아 일대 대부분을 정복했다.

이 전쟁은 미하일 9세의 딸을 불가리아 차르와 혼인시키며 종결되었으며 이후 그의 장손 안드로니코스 3세는 불가리아와 동맹을 맺고 안드로니코스 2세와 내전을 치른다.

2.5. 팔레올로고스 내전 (1321~1328)

1320년 장손 안드로니코스 3세는 자신의 아내와 불륜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그의 형제이자 안드로니코스 2세의 둘째 손자인 마누일을 죽였고 이에 충격을 받은 이들의 아버지 미하일 9세가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 살인과 방탕하고 불성실한 행동으로 할아버지 안드로니코스 2세의 분노를 산 안드로니코스 3세는 후계자 자격을 박탈당하고 만다. 계승권을 잃게 된 안드로니코스 3세는 1321년 부활절에 콘스탄티노플에서 탈출해 아드리아노플로 가서 지지자들을 모으기 시작했고 그 결과 이후 요안니스 6세가 되는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 시르얀니스 팔레올로고스 등의 지지자들을 모으는데 성공했다.

시르얀니스는 노황제와의 협상을 위해 대군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플로 향했고 1321년 6월 6일 양측은 평화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으로 안드로니코스 3세는 안드로니코스 2세와 공동황제에 오르며 트라키아, 마케도니아를 다스리게 되었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함한 나머지 영지들은 안드로니코스 2세가 다스리게 되었다. 그러나 두 안드로니코스들은 말이 공동황제였지만 사실상 별개의 국가였으며 두 세력 모두 자유롭게 외국과 조약을 맺었다.

1321년의 평화는 그리 오래 유지되지 못했는데 안드로니코스 3세 진영에서 권력다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시르얀니스는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와 안드로니코스 3세의 관계를 질투하고 있었으며 자신이 얻은 보상이 너무 적다고 생각해 안드로니코스 3세에게 역심을 품고 있었다.[6] 결국 시르얀니스는 1321년 12월 안드로니코스 2세 쪽으로 진영을 갈아탄다.

시르얀니스는 진영을 갈아탄 대가로 안드로니코스 2세로부터 메가스 둑스라는 작위를 받았으며 노황제에게 내전을 재개하라고 부추겼다. 허나 콘스탄티노플 인근 도시들이 안드로니코스 3세의 손아귀에 들어가자 안드로니코스 2세는 평화를 원했고 손자와 할아버지는 1322년 6월 영토를 2차 내전 이후로 원상복귀하는 것으로 조약을 맺는다. 이 조약으로 시르얀니스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 버렸고 그는 분노하여 안드로니코스 2세를 죽이고 자신이 황제가 되려는 쿠데타 계획까지 세웠으나 이 시도는 실패했고 시르얀니스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한동안 평화가 지속되었다. 하지만 농노들의 지속적인 반란이 문제가 되어 1327년 2월 두 안드로니코스 사이에 새로운 내전이 시작되었다. 이번 내전에는 다른 발칸반도의 국가들 역시 참여했으며 안드로니코스 2세는 세르비아의 스테판 우로시 3세 데찬스키와, 안드로니코스 3세는 불가리아의 차르 미하일 아센 3세와 동맹을 맺고 내전을 치른다.

마지막 내전의 무대는 마케도니아였다. 여러 전투 이후 테살로니카를 포함한 마케도니아의 도시들이 안드로니코스 3세의 손아귀에 들어오자 이런 승리로 고취된 안드로니코스 3세는 콘스탄티노플 공격을 계획했고 1328년 5월 드디어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입성 이후 그는 안드로니코스 2세를 자진 퇴위하게 압박했고 안드로니코스 2세는 자진 퇴위하고 2년 후에 수도원에서 사망한다.

3. 평가

안드로니코스 2세는 무려 46년이라는, 로마 역사 전체를 통틀어도 손에 꼽히는 긴 재위 기간을 가졌다. 그가 군사적, 외교적으로 제국을 망친 암군이라는 평가는 피할 수 없다. 할아버지의 가장 큰 실책들은 손자 안드로니코스 3세에게는 절대 저렇게 하면 안 된다 확실한 가이드라인이 되었다. 할아버지가 해군을 없애서 상권이 붕괴하고 해적이 어떻게 기승을 부렸는지를 목격했기에, 안드로니코스 3세는 즉위하자마자 해군 재건을 제1순위 과제로 삼을 수 있었다. 할아버지가 카탈루냐 용병에게 당하는 것을 보고, 안드로니코스 3세는 외국 용병보다는 자국군 강화나 동맹군 활용에 더 무게를 두었다.

그렇다고 46년 동안 아무것도 안 하고 놀기만 한 무능한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문화, 종교, 행정 분야에서는 뚜렷하고 굵직한 업적을 남겼다. 만약 평화로운 시대의 군주였거나, 황제가 아닌 문인,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였다면 칭송받았을지도 모를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비잔티움 최후의 황금기, 팔레올로고스 르네상스의 후원자였다, 학문과 예술의 영역에선 영원히 위대한 업적으로 남을 것이다. 군사력은 쇠퇴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비잔티움의 예술과 학문은 안드로니코스 2세 시절 최고조에 달했다. 1204년 제4차 십자군 전쟁으로 인한 혼란 이후, 문화적 측면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그 이전으로 되돌리고자 노력하며 고대 그리스-고대 로마 문화의 전통을 강조했다. 안드로니코스 2세는 학자 황제였고 천문학, 수학, 철학, 신학 등 모든 학문을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어려운 시대 상황 속에서도 회화, 건축, 이콘(성화) 등 기독교 미술 분야에서 찬란한 문화적 성과를 이루었으며 종교, 정치, 학문, 예술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인본주의적 사고가 물결처럼 퍼져나갔다. 당대 최고의 지성인인 테오도로스 메토키테스, 니키포로스 그레고라스 같은 학자들이 황제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활동했다. 오늘날 이스탄불 여행의 필수 코스인 카리에 박물관(옛 코라 교회)의 그 아름다운 모자이크프레스코화가 바로 안드로니코스 2세의 재상 메토키테스가 황제의 후원을 받아 만든 것이다. 비잔티움 미술의 정수가 이 시기에 완성되었고 이 시기 양성된 학자, 예술가, 문헌들은 훗날 서유럽으로 건너가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촉발하는 씨앗이 되었다.

또 안드로니코스 2세의 부황 미카일 8세는 서유럽의 침공을 막기 위해 억지로 서방 교회와의 교회 통합을 추진했었다. 이는 제국 내의 성직자와 민중들에게 엄청난 반발을 샀고, 내란 직전의 상황을 유발했다. 안드로니코스 2세는 즉위하자마자 아버지가 맺은 교회 통합을 파기하고 정교회의 전통을 회복시켰다. 이는 서유럽과의 관계는 악화시켰을지 몰라도, 제국 내부의 극심했던 종교적 갈등과 민심 이반을 단번에 수습하여 자신의 통치 기반을 안정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덕분에 46년이나 제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안드로니코스 2세는 부패해가는 제국의 행정 시스템을 고치기 위해 노력한 개혁가이기도 했다. 당시 제국은 귀족들의 부정부패로 재판이 엉망이었다. 1296년, 황제는 보편 로마 재판관(kritai katholikoi tōn Rhomaiōn, κριταὶ καθολικοὶ τῶν Ῥωμαίων, Universal Judges of the Romans)이라는 제도를 신설했다. 성직자와 평신도로 구성된 이 최고 재판소는 황제의 간섭도 받지 않는 독립적인 사법 기구로, 공정한 재판을 통해 사회 정의를 세우려 했다. 비록 나중에는 이들조차 매수당하며 빛이 바랬지만, 시스템을 고치려 했던 그의 노력은 높이 평가받는다.

또한 군사력이 없었기에 그는 자신의 가족을 희생하여 외교로 나라를 지켰다. 북쪽의 강적 세르비아 왕국의 왕 스테판 밀루틴이 쳐들어오자, 군대로 막을 수 없었던 안드로니코스 2세는 자신의 5살 난 딸 시모니스를 40대인 밀루틴에게 시집보냈다. '어린 딸을 팔아먹었다'는 비난을 듣기도 했지만, 냉정하게 보면 이 결혼 동맹 덕분에 북방 전선에서 장기간의 평화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가 없었다면 제국은 훨씬 더 일찍 무너졌을 것이다.

사실 냉정하게 말하면, 안드로니코스 2세가 손자 안드로니코스 3세에게 물려준 물질적 유산은 마이너스나 다름없었다. 금고는 비었고, 해군은 없었으며, 소아시아는 오스만에게 넘어갔으니까 말이다. 심지어 내전을 치르느라 그나마 남은 국력도 깎아먹은 상태였다. 하지만 제국을 유지하는 시스템과 소프트파워 측면에서 본다면,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남긴 유산이 전무했던 것은 아니다. 안드로니코스 3세가 짧은 기간이나마 제국을 중흥시킬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할아버지가 깔아놓은 무형의 인프라가 있었다.

안드로니코스 3세의 가장 큰 무기는 그의 오른팔인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를 비롯한 유능한 참모진과 인적 자원이었다. 그런데 이 엘리트들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다. 안드로니코스 2세가 40년 넘게 후원한 '팔레올로고스 르네상스' 덕분에 제국에는 고도로 교육받은 지식인, 행정가, 외교관 자원이 넘쳐났다. 안드로니코스 3세는 군사적 재능은 있었지만 행정 디테일은 부족했는데 이를 할아버지가 키워놓은 고학력 관료 집단인 로고테테스(Logothetes)들이 완벽하게 보좌했다. 일단 전사 황제가 든 칼을 닦고 빛나게 해줄 브레인들은 잔뜩 키워서 물려준 셈이다.

또한 보편 로마 재판관 제도는 안드로니코스 3세 시대에도 유효한 통치 수단이었다. 안드로니코스 3세는 할아버지가 만든 이 사법 제도를 바탕으로 부패 척결 운동을 벌였다. 제국의 영토가 줄어들수록 중앙집권적인 법치 시스템이 중요했는데, 할아버지가 만들어놓은 사법 기구 덕분에 안드로니코스 3세는 지방 영주들을 법적으로 통제하고 내부 기강을 잡는 데 드는 수고를 덜 수 있었다.

거기에 시모니스를 시집보내는 굴욕을 감수하며 맺은 세르비아와의 혼인 동맹은, 안드로니코스 3세 초기까지도 어느 정도 유효했다. 비록 세르비아는 여전히 위협적이었지만, 할아버지의 외교적 노력 덕분에 안드로니코스 3세가 즉위 직후 북쪽의 세르비아와 동쪽 오스만 양면 전선에서 동시에 전면전이 터지는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었다. 이 틈을 타서 안드로니코스 3세는 그리스 본토 테살리아, 에페이로스 수복에 집중할 수 있는 전략적 시간을 벌었다.

결론을 내보자면, 안드로니코스 2세는 '무능한 게으름뱅이'가 아니라, '방향이 잘못된 열심가'에 가까웠다. 그는 재위 기간 내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국정을 돌보고, 학자들과 토론하고, 교회를 짓고, 법을 고쳤다. 문제는 당시 제국에 필요한 리더십은 '우아한 학자'가 아니라, 칼을 들고 전장을 누빌 '야만적인 전사'였다는 점이다. 그의 시대에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몰락하는 제국이 남긴 화려한 모자이크와 높은 수준의 문학 작품들은 제국의 쇠락과 대비되어 더욱 비극적인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국가는 죽어가는데, 문화는 가장 화려하게 꽃피웠던 시대를 만든 장본인, 그가 바로 안드로니코스 2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안드로니코스 2세가 손자에게 남긴 것은 돈과 군대가 인재, 행정 조직, 제국의 문화적 자부심이었다. 물론 당장 북방의 세르비아와 동쪽의 오스만이 칼 들고 쳐들어오는 상황에서 이게 무슨 소용이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안드로니코스 3세가 그나마 마지막 불꽃을 태울 수 있었던 연료는 역설적이게도 할아버지가 평생을 바쳐 육성한 제국의 지적, 행정적 역량에서 나왔다. 만약 안드로니코스 2세가 문화와 행정마저 방치했다면, 안드로니코스 3세는 즉위하자마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깡통 제국을 마주했을 것이다.

4. 가족관계

  • 콘스탄티노스 팔레올로고스 - 동생. 매우 총명하고 전공도 세워서 명망이 높았다. 이에 위협을 느낀 안드로니코스에 의해 반역 혐의를 뒤집어쓰고 수도원에 유폐되었다.
  • 콘스탄티노스 팔레올로고스 '데스퍼트' (1278~1335) - 안드로니코스에 의해 수도원에 유폐됨
  • 요안니스 팔레올로고스 '데스퍼트' (1286~1308)
  • 바르톨로메오 팔레올로고스 (1289)
  • 테오도레 1세 팔레올로고스 (1291~1338) - 몬페라토를 상속받음
  • 시모니스 팔레올로고나 (1294~1336년 이후) - 세르비아의 스테판 밀루틴과 결혼
  • 테오도라 팔레올로고나 (1295)
  • 이사키오스 팔레올로고스 (1299)

현재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 카를 폰 합스부르크의 800년 전 조상 중 한 명이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본가는 후계 없이 단절되었지만, 이탈리아몬페라토 변경백국을 지배하고 있던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분가의 조상이 안드로니코스 2세였고, 이 분가는 남계는 끊겼으나 여계 쪽으로 자손을 남기는데 성공하여 그 후손이 합스부르크의 개조가 되었다.

5. 참고 자료

  • 워렌 트레드골드 : <비잔틴 제국의 역사>
  •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 : <비잔티움 제국사>
  • 존 줄리어스 노리치 : <비잔티움 연대기>

[1] 서방의 가톨릭 세력과 동방의 튀르크계 적들은 동로마 제국을 항상 위협하던 양면의 적들 그 자체이지 미하일 8세든 누구든 특정한 황제의 책임이라 하기 어려운 문제이지만 미하일 8세의 경우 찬탈로 인해 부족한 정통성과 이를 만회하기 위해 감행한 무리한 원정 및 인기영합적 정책, 그리고 이로 인해 발생한 심각한 재정의 소모 및 국력의 피폐화와 민심의 이반, 여론의 분열등이 심각한 문제였다.[2] 황제 본인도 당장 경제가 안좋아서 어쩔 수 없었지만 이것이 멍청한 짓임은 알고 있어서 경제 사정이 어느 정도 나아지자 뒤늦게나마 군사력 복구에 힘썼고 그 결과 육군은 그의 손자인 안드로니코스 3세 때에 미하일 8세 수준은 아니더라도 다시 적극적인 군사원정이 가능할 정도로는 회복되지만 해군은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도 회복되지 못했다.[3] 특히 해군 해체 건은 오늘날에 봐도 쉴드가 불가능하다. 이때 해체된 해군 전력이 나중에 오스만 해군으로 편입되거나 해적이 되어 제국에게 향한 칼날이 되었기 때문이다.[4] 미하일 8세의 소산드라 쿠데타 당시 살해당한 섭정 요르요스 무잘론과는 동명이인이다. 아마 친척으로 보인다[5] 물론 적대했던 튀르크인이 아닌 동로마 내에 있던 튀르크인 용병들을 설득한 것으로 추정된다.[6] 거기에 확실친 않지만 안드로니코스 3세가 그의 부인을 탐하기까지 해 완전히 마음이 떠났다는 설도 있다.[7]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이슈트반 5세와 쿠만의 에르제베트의 딸.[8] 모레아의 데스포티스 디미트리오스 팔레올로고스와는 동명이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