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2 01:57:30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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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쿠라 막부 초대 정이대장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源賴朝
파일:Minamoto_no_Yoritomo.jpg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초상화[1]
출생 1147년 5월 9일
오와리국 아이치군
(現 아이치현 나고야시)
사망 1199년 2월 9일 (향년 51세)
사가미국 가마쿠라
(現 가나가와현 가마쿠라시)
신체 165cm,[2] 60kg[3]
재임기간 초대 정이대장군
1192년 ~ 1199년

1. 개요2. 생애
2.1. 초기 생애2.2. 겐페이 전쟁2.3. 쇼군 재임기2.4. 사망2.5. 친족들과 사후
2.5.1. 오오히메 사건
3. 일화 및 평가4. 대중문화 속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clearfix]

1. 개요

일본 최초의 막부 체제인 가마쿠라 막부초대 쇼군이다.
고대 일본에서 중세로 넘어오면서 중앙 귀족들(공가) 중심의 구체제로는 정치 안정을 이루기가 어려워졌다. 각지에서 봉기 및 전란이 잇따르면서, 사무라이()들이 공훈을 세우고 지방을 장악하면서 새롭게 정치 세력화 되었다. 사무라이들 중 가장 큰 세력을 자랑했던 타이라()씨, 즉 헤이케(平家, 평가)[4]는 스스로 황실의 외척이 되어 중앙 귀족이 되는 방식으로 정권을 잡았지만, 중앙 귀족 중심 체제의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고, 미나모토()씨, 즉 세이와 겐지[5] 중의 카와치 겐지[6]에게 단노우라 전투에서 참패해 멸문지화를 입었다.

요리토모가 일본 열도를 장악한 이후, 일본의 중세 및 근세 정치 체제는 그가 세운 막부라는 모델을 따르게 되었다. 사무라이 봉건 영주들을 부하로 두는 막부 통치로 지방을 다스리고, 수도 교토에서는 천황과 중앙 귀족들의 세력을 인정해주는 이원적인 통치 형태가 되었다.[7] 막부는 쇼군을 정점으로, 직역이라는 이름의 독자적인 관직을 만들어 겐지의 방계와 창업 공신들을 앉혔다. 정치적 안정으로 농•어업이 안정되고 서일본은 이모작을 시작하면서 가마쿠라 막부는 정치적 정당성을 획득하게 되었다.

그러나 창업주인 요리토모의 사망 직후, 정권은 그의 처가인 호조씨(간무 헤이시의 분가)에게 모두 넘어가게 되었고, 미나모토씨(카와치 겐지)는 3대 만에 끊어지게 되었다. 요리토모의 아내였던 호조 마사코는 자신의 장남인 미나모토노 요리이에(제2대 쇼군)를 몰락시키고 친정에 실권을 모두 넘겨줬으며, 차남인 미나모토노 사네토모를 제3대 쇼군에 대신 앉혔지만 그는 아무 실력도 없었다. 그도 나중에 조카인 구교에게 암살당하면서 교토에서 셋칸가(섭관가) 출신을 제4대 쇼군으로 데려오는 지경에 이르렀고, 6대부터는 황족(친왕)이 쇼군직을 계승하게 되었다. 이렇게 명목만 근근히 이어가던 가마쿠라 막부의 시대는 9대, 130년 만에 저물게 되었다. 그나마 요리토모가 고안한 막부라는 시스템 자체는 성씨를 바꿔가면서[8] 19세기까지 이어졌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일본은 동아시아의 고대 정치가 모두 그렇듯 왕정 형식의 정치였다. 다만 천자의 방계들을 제후로 삼은 고대 중국과 달리 천황가의 방계 친족들은 사무라이가 되어 각자 국토를 수호하고 천황가를 보필했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씨족이 타이라씨(平氏, 헤이시)와 미나모토씨(源氏, 겐지)였다. 그러나 그들은 황족의 후예이면서도 궁궐 경비나 보는 신세였다. 당시에는 후지와라씨 출신의 중앙 귀족들보다 하대를 받고 눌려 있어,[9] 그때만 해도 무가 귀족은 당상관[10]이 될 수 없었다.

제56대 세이와 덴노의 후손들인 세이와 겐지의 본류인 카와치 겐지를 계승한 미나모토노 요시토모 역시 낮은 품계의 사무라이였다. 그의 3남이었던 요리토모는 어머니가 본처라 배다른 형들을 제치고[11] 후계자(적자)가 되었다. 요리토모의 어머니였던 유라고젠은 후지와라 가문 출신으로 아츠타 신궁(熱田 神宮)의 대궁사(大宮司, 오오구지)였던 후지와라노 스에노리의 딸이었다. 조선 시대 양반제도 그랬고, 동서고금의 귀족제가 다 그렇듯 모친의 귀천이 자식의 신분을 결정했다.

1159년 헤이지의 난이 발발해 당시 무사 가문의 양대 세력이었던 이세 헤이시(헤이케)와 카와치 겐지가 수도 교토에서 격돌했다. 패배한 요시토모는 부하인 오사다 타다무네(長田忠致), 카게무네(影致) 부자의 배반으로 죽고[12], 요리토모와 그의 형제들은 포로로 잡혔다. 연좌제에 걸려 죽는 게 당연한 상황이었지만, 헤이케의 당주 타이라노 키요모리의 계모 이케노젠니(池禅尼)의 호소[13]로 목숨만은 건졌고 이즈 반도로 유배되었다.

겐지를 누른 헤이케는 절대권력을 구축했다. 헤이케의 당주였던 타이라노 키요모리는 전통적인 신분 제한을 깨고, 후지와라씨가 독점하던 태정대신의 자리에 무가 출신으로서는 처음으로 올랐다. 그러나 일본 정치 체제에 어떤 변화도 없이 자기 세력을 위한 보은 정치만을 했으며[14] 가뜩이나 힘이 없었던 천황을 더 바지사장으로 만들었다.[15] 결정적으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서[16] 실권을 잃은 중앙 귀족과 호족, 사원 등 지방 토착 세력을 결착하게 만들었다.

반(反) 헤이케 연합은 시시가타니의 반란 모의, 황실의 방계였던 모치히토 왕의 거병 등 여러 사건을 일으켰지만 실패했다. 기세가 오를대로 오른 헤이케는 구실을 붙여 정권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세력들을 발본색원하려 했다. 위협을 느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처가인 호조씨 및 간토 지방의 세력을 규합해 1180년, 거병하는 도박을 단행했다.

같은 해 가마쿠라의 오오쿠라고쇼에 거처를 두고 무사들의 행정을 담당하는 사무라이도코로를 건설했는데, 이것이 일본 막부 체제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2.2. 겐페이 전쟁

초전인 이시바시야마 전투에서는 참패했다. 그러나 헤이케는 내부로부터 무너져 가고 있었다. 같은 타이라 일족이면서도 교토타이라노 키요모리에게 깊은 원한을 가진 간토 일대의 타이라씨들, 즉 반도 헤이시(坂東 平氏, 판동 평씨)들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호조씨 연합 세력에 붙었다. 일거에 세력을 불린 요리토모의 대군세는 마침내 헤이케와 정면대결을 하게 되었는데 이를 일명 겐페이 전쟁(源平合戰, 원평합전, Genpei War) 혹은 지쇼•주에이의 난(治承•寿永の乱)이라고 한다.

요리토모가 거병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동생 미나모토노 요시츠네, 사촌인 호쿠리쿠(북륙)의 미나모토노 요시나카[17] 등도 반 헤이케 봉기에 참여하여 후지가와 전투, 쿠리카라 고개 전투, 이치노타니 전투, 야시마 전투 등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었고, 기근 등으로 민심을 잃은데다 문약해진 헤이케[18]단노우라 결전에서 멸망시켜 가마쿠라 막부를 세웠다.

2.3. 쇼군 재임기

요리토모는 쇼군이 된 이후 측근에 대해 자비없는 숙청을 시작했다. 첫 번째 대상이 된 것은 요리토모가 금한 바 있는 조정 관직에 취임한 동생 요시츠네였다. 요시츠네는 억울함을 호소하러 가마쿠라에 찾아왔지만 요리토모는 그를 내치고 심지어는 죽이려고 자객까지 보냈다. 암살 시도는 미수로 끝이 났고, 격노한 요시츠네는 자객을 손수 참수한 후 이에 맞서 고시라카와 법황에게 요리토모 토벌 허가를 받아 미나모토노 유키이에와 협력하여 병사를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요리토모는 무사들로부터 확고한 지지를 받고 있었던 반면, 요시츠네는 무사들에게는 인기가 별로 없었다.[19] 아무튼 응하는 병력이 너무나 적어 실패하고 결국 오슈[20] 지방으로 도망쳐 히라이즈미오슈 후지와라씨에게 의지했다.

요리토모는 1184년쿠몬죠(公文所, 공문소)[21]몬츄죠(問注所, 문주소)[22]를 두었으며, 이듬해인 1185년 헤이케가 멸망하자 교토 조정으로부터 각지의 행정관을 임명할 권리를 받게 되어 사실상 일본의 지배자 지위를 인정받게 되었다.

1189년에는 오슈 후지와라씨의 제4대 당주인 후지와라노 야스히라를 협박해 요시츠네를 죽게 하고, 그를 토벌하는 과정에서 오슈까지 침공해 오슈 후지와라씨를 멸망시켜 버리고 히라이즈미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이로써 간토 등의 도고쿠(동국) 지방을 근거로 하는 가마쿠라 막부는 기반을 확고히 다지고 일본 전체를 장악했다.

그리고 1193년에는 어이없는 트집을 잡아 요시츠네와 함께 종군하며 공이 컸던 이복동생 노리요리마저 처형했다.[23] 그러나 이런 식으로 막부 수립 과정에서 막대한 공훈을 세운 형제들을 주살한 것은 그렇잖아도 잦은 친족 간 유혈사태로 인해 헤이케에 비해 믿을 만한 씨족 세력이 적었던 카와치 겐지의 기반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이나 다름없었고 결국 후계자가 죽자 순식간에 대가 끊기는 결과를 낳았다.

1195년에는 인 오오히메를 황후로 만들려 획책하는 과정에서 고시라카와 법황의 애첩이었던 정계의 거물 탄고노츠보네를 비롯한 여러 쿠게[24]들을 숙청하는 겐큐 7년의 정변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래 놓고 오오히메가 요절해 황후 책립 계획은 실패했고, 도리어 조정내에서 반 막부파가 대두해 버렸다.

2.4. 사망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1199년에 사망했는데, 제기되는 사인은 여러 가지이다. 어째서인고 하니 가마쿠라 막부의 공식 역사서인 《아즈마카가미》에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사망 시점(1199년)의 기록만 전후로 3년치가 빠져서 전해지지 않기 때문이다.[25] 그나마 요리토모 사망 13년 뒤의 가신의 회고에서
"중신인 이나게 사부로 시게나리(稻毛三郎重成)가 죽은 아내를 위해 사가미 강에 놓은 다리의 낙성식을 겸한 공양식에 참석했던 요리토모가 귀가 도중에 그만 말에서 떨어졌고 곧 숨을 거두었다."
는 것이 《아즈마카가미》에 남아 있고, 이것이 가장 널리 알려진 요리토모의 사망 원인이다.

하지만 이것이 《아즈마카가미》에 등장하는 것은 요리토모 사후 13년이나 지난 뒤의 일로 《아즈마카가미》에는 다리 공양부터 장례 의식까지 요리토모의 죽음에 대한 기재가 일절 없다. 때문에 이에 대해 요리토모의 최후가 불명예스러운 내용이었기에[26] 그를 존경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
"명장의 수치가 될 일을 실어서는 안 된다."
며 해당 부분을 숨겨버린 것이라고도 하지만, 도쿠가와 집안에만 《아즈마카가미》가 전해진 것이 아니기에 이는 사실이라고 보기 어렵다.

사망 원인과 낙마인과 관계에 따라[27] 해석은 달라질 수 있는데, 뭔가의 원인 때문에 말에서 떨어진 것이라면 뇌졸중 등 뇌혈관 장애가 사고 전부터 일어났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며, 낙마 자체가 원인이라면 두부외상성 뇌내출혈을 일으켰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낙마에서 사망까지 17일이 걸린 것을 보면 뇌졸중 후의 오연성•침하성 폐렴의 가능성이 있다. 《이노쿠마 칸파쿠기》에는 '음수병'(물을 마시고 싶어하는 병)이 원인이라고 했고, 현존하는 사료에도 요리토모의 죽음을 전하면서 '음수병', '사가미 강의 다리 공양', '수신의 꾐', '바다 위에 나타난 안토쿠 덴노' 등 모두 ''을 연상시키는 말이 많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다리 낙성식에 참석했다는 오늘날 사가미 강 하구 부근은 바뉴가와[28]라고도 불리는데, 요리토모가 타고 있던 말이 뭔가에 놀라 갑자기 날뛰다가 으로 들어가, 낙마에 이르게 된 데서 유래했다는 전승이 있다. 이 경우 '음수병'은 다른 생물학적인 병이 아니라 강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물을 과음한 것(즉 익사)을 의미한다는 설도 있다. 어떤 경위(이 경우에는 낙마)로 해서 그의 죽음 과정이 뭔가 물하고 관련이 있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이노쿠마 칸파쿠기》에 실린 '음수병'이 물을 몹시 찾는 병, 즉 당뇨병을 가리킨다고 하는 설이 있지만, 당시 요리토모에게 당뇨병 증상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어 가능성은 낮다. 다만 낙마로 인해 뇌의 중추신경이 저하되어 항이뇨 호르몬 분비 이상을 초래해 요붕증이 발현될 수 있고 그럴 경우 소변량이 급증하면서 몹시 물을 찾게 된다고 한다.[29]

후대인 에도 시대의 《보력간기》에는 요리토모 자신의 손에 죽음을 맞은 안토쿠 덴노나 동생 요시츠네의 망령을 보고 놀라서 죽었다고 했는데, 당시는 망령이나 귀신의 저주 같은 것을 깊게 믿었던 사회였고, 유배 시절부터 신불에 심취했을 정도로 믿음이 깊은 요리토모에게 하필 그날 갑자기 요시츠네나 안토쿠 덴노의 망령이 보였다는 것이다. 왜 하필 그날이었는가에 대해서는 뭔가 요리토모에게 의식장애가 있었다고 파악할 수도 있는데, 이것도 낙마 때문에 뇌에 뭔가 문제가 생긴 결과일 가능성이 있다.

2.5. 친족들과 사후

그의 사후, 아내 호조 마사코(北條政子)의 친정인 호조 가문이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요리토모의 아내 마사코는 "비구니 쇼군"이라 불리는 여걸로, 노년엔 가마쿠라 막부를 위해 사무라이들을 선동하기도 했다(조큐의 난).

현재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후손은 남아 있지 않다. 그의 자식 중 자손을 남긴 사람은 차남이자 제2대 쇼군이었던 미나모토노 요리이에가 유일했다. 장남이었던 치즈루마루는 어린 나이에 살해당했고,[30] 3남인 조교는 출가했으며, 4남이자 제3대 쇼군인 미나모토노 사네토모는 형 요리이에의 차남이었던 구교에게 살해당했다.

딸들 중 오오히메는 혼인도 하기 전에 일찍 죽었고, 요리이에의 자식들 역시 자손을 남기지 못했다. 장남 이치만은 아버지 요리이에가 죽기 이전, 호조 가문이 권력 독점을 위해 그의 외가를 풍비박산내는 와중에 살해당했고, 차남인 구교는 숙부였던 사네토모를 아버지 요리이에의 원수라고 생각해 암살하고 처형되었다. 3남인 에이지츠도 출가한 뒤 아버지 요리이에의 복수를 위해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어 자결했고, 다른 아들 젠교도 구교의 사네토모 암살에 가담하여 살해당했다. 딸인 타케고쇼는 제4대 쇼군이었던 후지와라노 요리츠네와 결혼했으나 첫 아이를 사산하고 사망했다.

1231년, 요리토모의 3남 죠교가 사망하면서 요리토모의 대는 끊겼고, 1234년 요리토모의 자손 중 마지막으로 남은, 요리이에의 딸 타케고쇼가 사망하면서 그의 후손은 완전히 단절되었다.

2.5.1. 오오히메 사건

파일:오오히메.jpg
오오히메(大姫)
1178~1197

요리토모의 큰 딸 오오히메(大姫)는 비극적 러브스토리의 주인공이다. 요리토모와 대립하고 있었던 호쿠리쿠의 맹장 미나모토노 요시나카(源義仲)는 자신의 아들인 미나모토노 요시타카(源義高)를 인질로 가마쿠라에 보냈는데, 오오히메와 혼인을 시켜 서로 화평을 하자는 의도였다. 당시 오오히메는 6살, 요시타카는 11살의 어린 나이였지만 오오히메는 정략결혼 상대에 불과한 요시타카를 깊이 연모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촌 지간인 요리토모와 요시나카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결국 카와치 겐지의 내전이 벌어졌다. 1184년 1월 요시나카는 역적으로 선언되었고, 요리토모가 보낸 요시츠네의 군대에게 우지가와 전투에서 패배한 후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 이런 상황이 되자 요리토모의 입장에서는 요시타카가 원수의 아들로 변한 것이어서, 장래의 화근을 뿌리뽑자는 생각에 4월 21일 요시타카의 살해를 결정했다. 시녀들을 통해 이 일을 알게 된 오오히메는 남편을 살리기 위해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교묘한 계략을 꾸몄다. 우선 요시타카를 시녀로 변장시킨 뒤 시녀들로 둘러싸 저택을 빠져나가게 한 후, 미리 다른 곳에 준비해 둔 말에 태우고 말발굽에는 솜을 완충재로 감아 소리가 나지 않도록하여 도망치게 한 것이었다. 그런 후 요시타카와 늘 놀던 시종으로 하여금 요시타카 흉내를 내게 해 하루 동안 도주한 것을 은폐시켰다.[31]

요리토모가 격노해서 추격자를 보내 즉시 처형하라는 명령을 하자 그걸 본 오오히메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혼이 날아가버렸다.'고 한다.[32] 기소 요시나카의 아들 미나모토노 요시타카는 무사시국에서 끝내 추격대의 무사인 토나이 미츠즈미에게 따라잡혀 살해당했고, 요리토모는 어떻게든 이걸 숨기려고 했지만 4월 26일 요시타카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이 요리토모에게 들어왔다.

요리토모는 이를 비밀로 하려고 했으나 또다시 시녀들을 통해 소식이 오오히메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고, 7살이었던 오오히메는 비탄에 빠져 물조차도 거의 마시지 않아 죽을 지경이 되었을뿐더러 저택 안도, 오오히메의 어머니인 호조 마사코도 슬픔에 잠기게 되었다.[33] 그런데 딸이 몇 달이나 병석에서 일어나질 못하자 호조 마사코는 발을 동동 구르다가 요시타카를 죽인 무사에게 분노의 화살을 돌려서, 아무리 명령이라고 해도 오오히메와 상의하지 않고 뒤로 몰래 요시타카를 살해한 죄는 죽어 마땅하다며 요리토모를 몹시 갈궜고, 마침 스스로도 당황해하던 차에 그 무사를 죽이면 오오히메가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요리토모는 황급히 애꿎은 토나이 미츠즈미를 참수했지만 이 역시 아무 소용이 없었다.

10여년 동안 오오히메는 병상에 누워 폐인처럼 지냈다고 한다. 남편인 요시타카를 공양하는 보탑을 세우고 명복을 비는 기도를 올리기도 했지만 오오히메의 마음의 병은 끝내 낫지 않았다.

18살 때는 황실과의 혼담 이야기가 오고 가기도 했으나 이번에는 구조[34]가 이미 선수를 친 데다가 오오히메 본인도
"그런 짓을 하느니 차라리 연못을 던지겠다."
라고 일언지하에 거절했으며 끝내는 회복하지 못하고 20살에 요절했다. 어린 나이에 대단히 열렬한 사랑을 한 셈으로, 승자도 패자도 모두 제행무상(諸行無常)하다는 《헤이케모노가타리》의 주제를 상기하면 참으로 비극적인 일이었다.

3. 일화 및 평가

창건자들이 다 그렇듯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도 운이 상당히 좋았다. 요리토모는 헤이지의 난 당시, 사형에 처해질 운명이었으나 타이라노 키요모리의 계모였던 이케노젠니에게 동정을 받아[35] 운좋게 이즈로 유배되었다. 유배 생활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던 요리토모는 평생의 반려자가 될 호조 토키마사(北條時政)의 딸 마사코(政子)와 결혼했다.

소위 키보드 워리어라는 얘기가 있다. 정략을 구사하는 과정에서 여러 사람에게 밀서를 보내 맘대로 조종하거나 협박했으며, 개중에는
"좋은 대장장이를 알아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내가 너의 목을 칠 테니) 굉장히 튼튼한 목가리개가 필요할 일이 생길 것이다."
같은 흠좀무한 서찰도 있다. 후지와라노 야스히라가 요시츠네를 배반한 것도 살벌한 협박에 굴복했기 때문이었다.[36]

또한 가마쿠라 막부의 정사 기록인 《아즈마카가미》에는 후지와라노 야스히라가 죽은 뒤, 히라이즈미 잔당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한 전투에 참전한 무장들의 전투 상황에 대해 보고를 받을 때,
"기치지 기미나리는 전사했고, 유리 나카하치 고레히라는 도망쳤습니다."
라는 말을 듣고
"기미나리가 도망쳤고, 고레히라는 전사한 것이겠지."
라고 한 마디로 답했는데, 나중에 실제 상황을 확인해 보니 요리토모가 지적한 그대로였다는 일화가 실려 있다.

이런 일화가 《아즈마카가미》 안에서 적잖이 등장하는데, 예를 들어 요시츠네가 무단으로 임관을 받았을 때, 요시츠네를 따라 조정으로부터 무단 임관을 받은 무사들의 이름과 용모, 그리고 평소의 행실을 하나하나 열거해가며 비난하기도 하는 등, 휘하 무장들의 용모나 성격을 일일이 기억하고 파악하고 있었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치밀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냉정함이 극에 달한 인물로 조금이라도 뭔가 어긋난다 싶으면 자비나 용서 없이 그대로 칼같이 처분해버렸다. 처벌에 있어서만큼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인물이었다. 사형을 선고했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목을 베어버렸고, 태형을 선고했으면 그 자리에서 두들겨 패버리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에게 숙청당한 대표적인 인물로 미나모토노 요시츠네카즈사 히로츠네 등이 있었다.

이렇듯 친족도 이용 가치가 없어지면 팽해버리고 적에게도 자비가 없는 냉혹한 권신[37]이었지만, 자식들에게는 그야말로 팔불출 아버지였다. 사냥에서 아들 요리이에가 사슴을 쏘아 잡자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서찰을 부인 마사코에게 보냈으나
"무사 아들내미가 사슴 하나 잡은 게 뭐 대수라고."
라는 대답을 듣고 데꿀멍한 적도 있었다.[38] 어린 딸 오오히메가 남편 미나모토노 요시타카의 죽음으로 몸져눕자 이를 달래려고 요시타카의 죽음을 그를 추적해 죽인 무사 탓으로 돌려 참수하고, 사찰에 요시타카를 공양하는 기도를 대대적으로 올리게 하는 등 허둥대기도 했다. 또한 냉정하다고 해서 감정이 없거나 은혜를 모르는 파렴치한 인물은 아니었기 때문에, 단식까지 해가며 적인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이케노젠니의 아들 타이라노 요리모리가 교토를 버리고 도주한('미야코오치') 헤이케군을 버리고 가마쿠라로 망명하자 그를 본인이 직접 마중나가 아버지처럼 대접하며 환영했고, 그 자손까지 가마쿠라 막부의 고케닌으로 삼았다.

사실 가마쿠라 막부의 쇼군직을 미나모토씨가 독점하지 못하게 된 것에는 요리토모의 책임도 크다고 할 수밖에 없다. 카와치 겐지의 잔존 인물들 중에서 이세 헤이시 일족을 몰아내는 데 큰 공을 세운 요시츠네는 추방 이후 의지하던 세력인 오슈 후지와라씨에 의해 살해당하도록 몰아넣었고, 역시 헤이케의 멸망에 공적을 세운 또 다른 동생 노리요리는 실언을 핑계로 처형했으며, 실패로 끝난 최초의 봉기때부터 참가했던 숙부 유키이에도 트집을 잡아서 처형했다. 친족들을 죽여댄 목적이야 자신의 직계 후손들이 막부의 권력을 독점하게끔 하기 위한 것이었지만,[39] 엉뚱하게도 처가인 호조씨가 권력을 틀어쥐는 결과를 낳았고 그걸로도 모자라 자신의 자손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요리토모의 이런 친족 경계에는 할아버지 미나모토노 타메요시 대로부터 내려온 카와치 겐지의 피로 물든 역사가 배경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아버지 요시토모는 자신의 형제 및 아버지와 편을 나누어 호겐의 난을 벌였고, 승리한 보상으로 아버지를 살려줄 것을 조정에 탄원했지만 냉혹한 고시라카와 덴노파의 실권자였던 신제이로부터 그 둘을 처형하라는 명령을 받은 후, 울며 자신의 부형을 처형한 뒤 "부모 잡아먹고 출세한 자"라는 비방 속에 산 인물이었다. 그리고 요시토모 자신은 헤이지의 난에서의 패배 이후 신뢰하던 부하에게 배반당해 살해당했다. 카와치 겐지는 대대로 이런 피비린내 나는 역사를 가진 일족이었던 것이다.

요리토모가 겐페이 전쟁 초기부터 친족을 경계하며 자신의 직계 혈통에 집착했던 또다른 이유로 요리토모 거병 당시의 상황과 연결짓는 견해가 있다. 외척이었던 호조 가문의 도움으로 관동에서 거병했을 당시에도 요리토모는 유배형에 처해진 죄수의 신분이었고, 요리토모 이외에도 키소(시나노)의 요시나카,[40] 카이의 노부요시[41] 등 겐지의 동량을 자청할 수 있는 인물들이 동시대에 너무 많았다.[42] 더 최악인 점은, 첫 출정(初陣, 우이진)[43]에서 요리토모가 패배했을 때(이시바시야마의 전투), 겐지 가문의 라이벌이었던 타케다와 키소 등이 승승장구하며 세력을 넓히고 있었기 때문에[44] 요리토모가 겐지의 대장을 운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겐페이 전쟁이 진행되면서 요리토모의 상황도 나아지고 그의 군세가 잘나가기 시작하지만 전쟁 초반부에 요리토모가 느꼈던 위기감과 고립감,[45] 그리고 친족들에게 느꼈던 열등감[46][47]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겐지 친족들을 숙청했다는 의견이다.

여담으로, 오와리까지 도망쳤던 아버지 요시토모를 배반해 죽인 오사다 타다무네(長田忠致)라는 자가 놀랍게도 거병한 요리토모에게 뻔뻔하게 나타나서 당신을 섬기겠노라고 한 일화가 있다. 요시토모의 부하인 타다무네는 헤이케와 겐지가 맞붙은 헤이지의 난에서 요시토모가 참패하고 도주하게 되자, 같이 도망가던 부하인 카마타 마사키요(鎌田政清)의 권유로 마사키요의 장인인 타다무네의 집에 머물고 있었는데 타다무네는 헤이케 측에서 요시토모의 목에 내건 보상에 눈이 먼 나머지 자기 집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던 요시토모를 사위와 함께 찔러 죽이고[48] 헤이케 쪽에 보상을 요구하러 갔다. 이 사태에 타이라노 키요모리도 어이가 퇴갤했지만 어쨌든 보상은 주어야 하니까 머나먼 이키 섬[49]을 주었는데, 감지덕지해도 모자랄 배신자 주제에
"나 같은 사람에게 최소한 (요시토모가 갖고 있었던) 사마노카미[50] 벼슬이나 미노, 오와리[51] 같은 땅의 고쿠시(国司) 벼슬은 줘야 하는 것 아니냐"
고 투덜거려서 분노한 키요모리에게 쫓겨나 버렸다. 그러자 헤이케에게 앙심을 품고는 자기가 배신해서 찔러 죽인 요시토모의 아들 요리토모에게 나타나서 임관을 요구한 것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요리토모는 충격에 빠진 부하들 앞에서 이 오퍼를 관대하게 승낙하고
"열심히 일한다면 진짜로 미노와 오와리를 주겠다."
고 약속했다. 타다무네는 정말로 신이 나서 요리토모를 섬겼는데, 겐페이 전쟁이 끝나자 요리토모는 슬그머니 타다무네를 붙잡더니
"약속했던 미노와 오와리를 주겠다."
면서 그를 며칠이나 산 채로 나무에 못박히고 포를 뜨는 특수한 처형법으로 죽였다. 미노, 오와리일신의, 끝장(身の終わり)과 발음이 같았기 때문이었다.[52] 그의 목 앞에는 요리토모가 지은 시가 쓰여진 팻말이 내걸렸다.
"싫어했다지만 살아있을 적에는 이키노카미[53]였는데 지금은 미노, 오와리를 받은 몸이 되었구나."
지금도 당시 오와리 지역에 해당하는 아이치현 미하마초(美浜町)에는 그가 못박혔다는 소나무가 전해져 내려온다.

라이벌들에 비해 인기가 다소 떨어지는 편이다. 특히나 동생인 미나모토노 요시츠네가 워낙에 인기가 많은 데다가 그를 죽게 한 게 요리토모이니[54] 전통적으로 일본 창작물에서 악역을 맡는 경우가 많다. 다만 최근에는 가해자가 된 피해자나 선역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아졌다.

가마쿠라 막부 역대 쇼군 중 하고 몸무게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는 유일한 쇼군이다.

에도 막부를 개창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상당히 존경한 인물이라고 한다.[55] 반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천한 출신으로 인한 열등감 때문이었는지 요리토모는 고귀한 가문 출신이었기에 사람들이 따른 것이니 나보다 못하다며 박한 평을 내렸다.

도쿠가와 가문이 요리토모의 후손을 자처한 것 때문에 에도 막부 성립 이후 일본에 관한 조선 측 기록에서도 한국식 독음에 따라 원뢰조로 몇번 언급된다.[56]

4. 대중문화 속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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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에서 고대 무장으로 등장한다. 내정 100으로 호조 소운과 함께 공동 1위다.

<푸른 늑대와 흰 사슴> 시리즈에서는 일본의 군주로 개근한다. <징기스칸 2>에서는 세계편 시나리오에서 징기스칸, 리처드 1세, 이사키오스 2세와 함께 선택 가능 군주로 나왔다. <원조비사>에서는 유저 시나리오/겐페이 전쟁(PS판 한정)에서 일본의 군주로 등장하는데, 정치 군주로 호죠 도키마사를 두고 있고, 휘하 무장에 미나모토노 요시츠네를 두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능력치는 정치 B 전투 C 지도 A 매력 B.

<원평토마전>에서는 주인공주인공이니만큼 당연히 최종 보스로 등장한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일본 열도를 제패했다는 설정이 있으며 이 때문에 악마에 가까운 모습이다. 후속작에서는 아예 대놓고 나 마왕이오 하는 포스를 뽐낸다. 대표적인 대사는 횡스크롤 스테이지 파트에서 시간을 질질 끌 경우(혹은 말장난(다자레) 스테이지에서 특정 구간 이상 진행할 경우) 스테이지 뒷편에서 무지막지하게 큰 모습으로 웃으면서 튀어나와 주인공 타이라노 카게키요를 거대한 로 두들겨 패면서 말하는 '장난은 끝이다'(戯れは終わりじゃ)와, 최종 보스전에서 3차 형태까지 모두 격퇴했을 때 유언으로 남기는 '나의 영혼은 불멸이니라!'(我が魂は不滅じゃ!)가 있는데 후속작인 <원평토마전 제2권>(源平討魔伝 巻ノ弐)에서는 격퇴당할 때 '나의 영혼은......우어어어어어!!!' 라고 대사를 차마 다 끝내지도 못하고 소멸당한다.

<징기스칸 4>에서도 시나리오 1에서 가마쿠라 막부의 군주로 등장한다. 놀랍게도 스텟 총합이 조선의 창업군주인 이성계와 231로 동일하다. 다만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내정에 치우쳐져 있는 반면, 이성계가 전투에 치우쳐져 있는 차이만 존재하며 세부 스텟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정치 87 전투 68 지모 76, 이성계는 정치 76 전투 83 지모 72 이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정치와 이성계의 전투가 비슷하고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전투와 이성계의 지략이 비슷하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지략과 이성계의 정치는 숫제 둘 다 76으로 동스텟이다. 특기는 농업, 건설, 외교, 등용, 돌격, 병과 적성은 보병 B, 궁병 B, 기병 B, 수군 E이다.

토탈 워: 쇼군2의 시나리오 DLC <사무라이의 태동>에 메이저 팩션 리더로 등장. 원역사의 승자 포지션이라 그런지 해당 DLC의 6가문 중 가장 좋은 보너스를 받고 시작한다. 다만 타이라 계열 가문과 후지와라 계열 가문 사이에 위치해 있어 샌드위치 당할 위험이 높은 것이 단점이다.

<Fate/Grand Order>에서는 남동생이었던 미나모토노 요시츠네랑 조상이었던 미나모토노 요리미츠가 TS되어 여동생과 겁나먼 이모님이 되어버렸다. 오픈 당시부터 출전하던 여동생의 언급으로 여기저기 나오는데,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여동생을 이리저리 써먹다가 내쳐버렸다고 한다. 마물의 목을 마구 잘라 선물이라고 보냈다거나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자 질색인 눈으로 봤다던지, 타이라노 카게키요가 빙의한 요시츠네의 육체의 기억에서 '용서해다오. 요시츠네, 나는 너를 이해할 수가 없단 말이다.'라고 말한 걸 보면, 실제 역사에서 그랬던 것처럼 여기서도 맛탱이가 간 요시츠네에게 질려서 숙청해버린 모양이다. 키소 요시나카 역시 요시츠네에게 '내가 죽는다고 전쟁이 끝나지 않는다. 내가 사라지면 요리토모의 다음 적은 너다.'라고 경고했다.

<가마쿠라도노의 13인>에서는 오오이즈미 요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역을 맡아 연기하게 된다. 초반에는 그간 음험한 모략가로 그려지던 요리토모의 인물상에서 다소 벗어나 권력 문제에 있어서는 비정하지만 쾌활하면서도 얼빵하거나 사고뭉치인 면이 있고, 전란의 시대를 마감하고 가마쿠라 막부를 열어 평화를 추구한 인물로[57] 그려지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무자비한 숙청을 단행하는 냉혹함을 보인다.

《차나왕 요시츠네》에서는 어린 시절 고시라카와 법황에게 강간당한 과거가 있으며, 그 탓에 고시라카와 법황을 증오한다. 헤이케가 토벌되자 조정으로부터 관직을 받은 요시츠네가 실제로는 친동생이 아닌 카케무샤였던 효타로 밝혀지자 가차없이 숙청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타이라노 키요모리는 죽기 전 요시츠네에게 요리토모는 헤이케에 빼앗긴 권력에만 관심있지, 백성들은 안중에도 없다고 꾸짓는데 실제로 요리토모는 권력을 독점하기 위하여 간난 아기도 죽이는 냉혹한 권력자로 탈바꿈했고, 이러한 요리토모의 모습에 그의 아내였던 호조 마사코가 질려 요리토모를 암살함으로써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다.

헤이케모노가타리(애니메이션)에서도 등장한다. 다만 헤이케의 이야기가 주가 되기 때문에 요리토모의 비중은 많지 않다. 또한 은근히 얼빵하게 묘사되었다.[58] 주된 말버릇은 "진짜로?"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결정판의 '역사적인 전투' 시나리오에 수록된 '쿠리카라'에서도 등장한다. 다만 스탯은 일반 사무라이보다 2 낮은 8인데다가 이를 공속이 0.5초라는 점으로 커버치는 노부나가와는 다르게 그런 것도 없어서 체력 빼고는 일반 사무라이보다 더 약한(...) 수준이다.


[1] 교토의 진고지(신호사)에 보관되어 있던 초상화 세 점인 진고지 삼상중 하나. 그러나 이 초상화의 주인공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아니라 무로마치 막부의 초대 쇼군이었던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동생 아시카가 다다요시(足利直義)라는 설이 있다.[2] 오야마즈미 신사에 봉납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입고 다녔다고 전해지는 갑옷을 가지고 추정한 키이다. 출처[3] 일본의 어느 정형외과의사가 추정한 몸무게이다.[4] 간무 헤이시(환무 평씨) 중의 이세 헤이시(이세 평씨)[5] 청화 원씨[6] 하내 원씨[7] 정확히는 교토를 중심으로 한 서국에는 여전히 천황을 중심으로 한 율령체제가 자리잡아 있고, 이들이 가마쿠라를 중심으로 한 동국에서 무사 계급의 지배권을 인정해준 형태였다. 이 형태는 조큐의 난 이후 조정의 권위가 완전히 붕괴하며 끝이 났다.[8] 무로마치 막부는 요리토모와 같은 카와치 겐지-아시카가씨이기는 했지만 계보가 달랐고, 에도 막부도쿠가와 가문이 카와치 겐지 중 닛타씨의 분파라고 자처하기는 했지만 현대 학자들은 "그거 그냥 족보 위조"라고 보는 견해가 대부분이다. 당시 센고쿠 시대 다이묘들은 대부분 헤이시 아니면 겐지의 자손이라고 뻥을 쳤다. 법적으로 명시된 것은 아니었지만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직계가 단절된 뒤에도 막부의 정이대장군이라면 당연히 겐지가 맡던지 아니면 황족이 맡는 것이 하나의 관례가 되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카와치 겐지를 자처한 것과도 관련이 있다.[9] 다만 후지와라씨 내에서도 직계-방계, 적출-서출 여부 및 모친의 출신에 따라 그 대우가 천차만별이었다. 섭관가(셋칸케)로 불리던 집안은 후지와라씨에서도 홋케 미도류(藤原 北家 御堂流, 등원 북가 어당류)로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후손들이었다. 이때는 오섭가(고셋케)가 정립되기 이전이었다.[10] 정3위 이상 고관[11] 그래봤자 요리토모의 두 형은 아버지가 죽을 때 살해 및 처형당해서 요리토모가 실질적인 장남이었다.[12] 큰형인 요시히라와 작은형 토모나가도 헤이케의 추격 끝에 목숨을 잃었다.[13] 일찍 죽은 자기 자식 타이라노 이에모리(平家盛)와 닮았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14] 물론 이것도 패전 직후까지만 주류였던 사관이었고, 현대에 들어서는 헤이케 정권에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가마쿠라 막부와 같은 무가정권의 초기 형태를 찾아볼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15] 사실 자기 세력을 위한 보은 정치라는 것도 말이 우스운 게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역시 각지에 난립해 있었던 귀족이나 지샤(사찰과 신사) 소유의 장원들에 무사들을 배치해 그들을 지토, 슈고로 임명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따른 무사들과 휘하 고케닌들에게 듬뿍 몰아주었고, 덕분에 요리토모 사후에 교토 조정의 고토바 상황이 막부 타도를 명령하는 선지를 내렸을 때 호조 마사코가 나서서 "돌아가신 요리토모 공께서 니들한테 얼마나 잘해줬는지 생각해 봐라"라고 일갈한 한 마디에 무사들은 일치단결해 조정을 치는 선택을 내렸다. 또한 교토 조정의 관인들 가운데서도 니카이도씨나 나카하라씨처럼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를 따라 혹은 가마쿠라 막부로부터 초빙되어 막부 산하의 만도코로나 몬주쇼 등지에서 일하는 이들도 있었다. 애초에 요리토모에게 이렇게 간토에서 세력을 키울 수 있도록 뒷배를 봐준 것도 교토 조정에서 천황을 제치고 인세이(원정)를 행하던 고시라카와 상황(법황)과 그 측근들이었다.[16] 키요모리 본인이 그런 것에 전혀 무심했다고 하기보다는 그가 추진했던 정책, 그중에서도 해상 세력이었던 헤이케의 당주답게 당시 과의 해상교역을 중심으로 이국과의 교역을 활성화하고 이를 기반으로 국가 경제를 발전시켜 보자고 추진했던 후쿠하라(고베)로의 천도가 도리어 교토 조정과 이를 중심으로 하는 기득권층의 반발을 사면서 키요모리가 "교만하다"는 악평을 받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17] 요시나카의 아버지인 요시카타는 요리토모의 아버지인 요시토모의 이복동생이었므로 서로 사촌뻘이었지만 사정은 더 복잡해서 요시카타는 요리토모의 이복형인 요시히라에게 살해당했다. 요시나카는 아들을 요리토모의 딸과 결혼시키는 등 동맹관계였으나 복잡한 원한관계에 있던 터에 요시나카가 교토를 점령해 쇼군을 자칭하고 난폭한 행동을 거듭하자 양자는 대립하게 되었고, 결국 교토를 처음으로 점령해놓고서도 요시나카는 요시츠네에게 패배해 전사했다. 요시나카는 쿠리카라 고개 전투에서 화우의 책략을 사용해 헤이케의 대군을 격파한 것으로 유명했다.[18] 헤이케의 병력은 숫자는 많았지만 거의 오합지졸 수준이었다. 첫 번째 패전인 후지가와 전투에서는 물새 소리에 놀라서 대혼란에 빠져 싸우지도 않고 패퇴해 스타트를 끊었고, 이후에도 계속 뻑하면 모랄빵이 나서 우르르 도주하는 병사들을 이끌고 졸전을 거듭했다.[19] 병사가 모이지 않아서 도주하는 꼴이 됐으니 인망도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훗날 미화된 것처럼 점잖은 비련의 영웅이 아니라 저돌적이고 상당히 야만적인 무사였을 가능성이 크다.[20] 오슈(奥州) 무츠국(陸奥國). 현재의 이와테현.[21] 행정기관으로, 후일 만도코로(政所, 정소)로 개칭되었다.[22] 토지 관련 재판 및 사법기구[23] 1193년 요리토모의 가신인 쿠도 스케츠네에게 부모를 잃은 소가 형제가 자신들도 요리토모 휘하의 무사로 임관해서 주군의 사냥길에 합류해 원수인 쿠도를 참살하는 유명한 소가 형제의 복수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의 대혼란으로 요리토모가 죽었다는 헛소문이 퍼졌는데, 노리요리가 이 소문을 듣고 걱정하는 요리토모의 부인 호조 마사코를 안심시키기 위해 "형수님, 만약 무슨 일이 있어도 제가 있습니다."라는 한 마디를 했다고 형 요리토모의 자리를 노린다는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은 것이었다. 당혹해 제대로 된 변명을 하지 못한 노리요리는 유배되었다가 처형당했다. 여담으로, 이 소가 형제의 복수 사건은 무사도의 표본이 된 복수극으로 널리 알려져 각종 가부키 등 대중매체의 인기 소재가 되었다.[24] 公家. 무사와 대척점에 서있는 교토의 귀족들을 말하며, 무사를 이르는 다른 말인 부케(武家)와 대비되는 단어이다. 공가 또는 공경이라고도 칭한다. 조정의 관위는 높았지만 이후 무사 중심의 사회로 변하면서 점차적으로 물리력을 행사하는 데는 한계가 생겼으나 대신 문화적,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매우 중요한 존재들이었다. 조정과 쿠게 층에 영향력을 가진 무사와 그렇지 않은 무사의 차이는 조정의 권위가 떨어질 대로 떨어진 센고쿠 시대에도 매우 컸다. 이때 천황이나 쿠게들이 있는 교토에 가서 이들은 만나 영향력을 늘리는 것을 상경이라고 했으며, 천하인의 중요한 조건으로 보았다. 이마가와 요시모토다케다 신겐 같은 효웅들이 오다 가문을 눈엣가시로 여겼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들이 상경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길목에 자리잡은 세력이 오다 가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다 노부나가는 이들을 막고 상경에 성공했다.[25] 아주 전해지지 않는 것은 아니고 일부 잔본 형태로 존재하기는 한다.[26] 몰래 애인을 만들어두고 밤에 몰래 만나러 다니다가 그를 첩자로 오인한 경비병에게 살해당했다거나, 아니면 아들 요리이에사네토모처럼 그 역시 누군가에 의해 암살당한 것이라거나.[27] 말에서 떨어진 것이 원인이 되어 죽었느냐 아니면 뭔가의 원인 때문에 말에서 떨어졌느냐 하는.[28] 馬入川, 마입천. 즉 '말이 들어간 강'이라는 뜻이다.[29] 또한 혈중 나트륨 농도가 저하되기 때문에 적절한 치료법이 없었던 12세기에는 이 병으로 죽음에 이를 가능성도 높았다.[30] 규슈의 명문인 시마즈 가문의 조상이라는 전설이 존재한다.[31] 시종인 운노 코타로 유키우지는 훗날의 스와씨 일족이었는데, 요시타카와 덩치도 비슷한 데다가 평소에 늘 같이 놀았기 때문에 요시타카로 변장해 침소에 누웠고, 낮이 되면 혼자서 주사위로 하는, 일종의 보드게임인 '스고로쿠'를 하는 시늉을 했다. 둘이 늘 같이 하던 놀이라서 등을 돌린채 혼자 스고로쿠를 하는 시늉을 하고 있어도 방 밖 멀리서 본 경비병들은 '둘이 또 놀이를 하고 있구나'하고 무심히 지나쳐 갔고, 그 덕에 밤이 될 때까지 요시타카가 없다는 것이 드러나지 않았다.[32] 《아즈마카가미》의 표현이다. 오오히메는 당시 만 7살이었다. 아버지가 좋아하는 남자애를 죽이라고 소리를 치는 걸 눈앞에서 목격한 것인데 기겁해 파랗게 질리지 않는 게 이상하다. 오히려 그 나이로 저렇게 치밀한 계획을 세운 것이 놀라울 정도이다.[33] 여기서 《조선왕조실록》과 달리 개인의 의견을 거의 쓰지 않는 문체인 《아즈마카가미》의 저자가 지극히 이례적으로 막부의 창건자인 요리토모를 몹시 힐난하는 어조로 자기 의견을 한 마디 쓰고 있다. (오오히메가 사랑하는 요시타카를 죽였으니 저런 지경이 되는 것도)"지극히 당연한 게 아닌가?"[34] 후지와라씨의 분파로 고셋케(오섭가)의 일원이었다.[35] 요리토모를 보니 자신의 죽은 아들이 생각난다며 살려달라고 간청했다.[36] 사실 이는 단순한 협박이 아니었다. 요리토모는 야스히라가 굴복했는데도 명분을 만들어 기어코 쳐들어가서 히라이즈미를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37] 요리토모가 애초에 적인 헤이케의 어중간한 자비로 간신히 목숨을 건져서 나중에는 그 헤이케를 멸망시킨 만큼, 적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38] 일본 위키에서는 이 일화에 대해 사슴은 일본에서 신령한 동물로 여겼기에, 사슴을 요리이에가 활을 쏘아 잡았음은 곧 '요리이에가 신의 인정을 받았다.'는 의미가 되어 요리토모가 기뻐해서 마사코에게 알렸지만, 마사코는 무슨 의미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시큰둥했다고 보는 해석도 있다고 적고 있다.[39] 이는 한 마디로 겐지의 동량(보통은 인재라는 의미로 사용하지만, 여기서는 두령 또는 후계자라는 뜻에 더 가깝다.)은 자신과 자신의 핏줄이어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40] 사촌인 요리토모와 마찬가지로 카와치 겐지의 일원이었다.[41] 즉 타케다 노부요시(武田信義). 세이와 겐지의 일원이었던 미나모토노 요시미츠의 후손을 자청하는 인물로 '미나모토노 노부요시'(源信義)를 본명으로 자칭했다. 카이 겐지(甲斐 源氏)의 4대 당주이자 카이 타케다 가문의 시조였다. 참고로 카이 지방의 유명한 센고쿠 다이묘였던 다케다 신겐의 직계 조상이었다.[42] 심지어 시나노, 카이 등의 율령국을 본거지로 삼는 겐지의 친족들과는 달리, 요리토모에게는 "자신의 영지"라고 부를 수 있는 변변찮은 땅도 없었던 시절이었다.[43] 무장에게 있어서 데뷔전의 개념이라 무사들 사이에선 상당히 중요했던 모양이다.[44] 예를 들어 요리토모가 이시바시야마에서 패전했을 무렵, 타케다는 헤이케를 무너트리며 스루가까지 진격한 상황이었기에 (전투에서 진) 요리토모를 버리고 (승승장구하는) 타케다에 전향하는 부하들도 속속들이 나왔다고 한다.[45] 겐지의 동량이라는 타이틀을 언제든지 다른 겐지 인사들에게 빼앗길 수 있다는 것. 혹은 고케닌들이 자신의 직계를 버리고 다른 겐지를 섬기러 떠날 수 있다는 것.[46] 겐페이 전쟁 초기 시점에서 조정의 거물 정치인이었던 고시라카와 법황이 밀어주던 겐지의 동량은 요리토모가 아닌 키소의 요시나카였다. 요리토모는 법황의 선지를 받기 위해 수차례 접촉을 시도했지만 문전박대를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고 한다.[47] 요시나카가 몰락한 이후에도 법황은 요리토모와 밀착하는 대신 미나모토노 요시츠네에게 케비이시-다이후호간(検非違使-大夫判官)의 타이틀을 하사하는 등 요리토모의 신경을 긁어댔다. 요시츠네가 "케비이시 호간"의 타이틀을 달았을 무렵은 아직 겐페이 전쟁이 한창 진행중이던 1184년 8월의 일로, 이 무렵 요리토모(정4위下)에게는 아직 변변찮은 타이틀이 없었다. 즉, 법황은 다른 겐지의 일족들에게 요리토모를 배신하라고 부추키는 거나 마찬가지였던 것. 사실 요시츠네도 눈치가 너무 없었다.[48] 이때 아버지가 자기 남편을 보상에 눈이 멀어 참살하는 걸 본 타다무네의 딸은 충격을 받아 투신자살했다고 한다.[49] 일본의 최변방에 가까운데다 이른바 '야시마'라고 고대 일본에서 일본을 이루는 8개의 섬이라고 지칭한 섬들 중에서도 가장 작다. 인구조차 현재에도 크기 때문에 그 쓰시마보다도 밀릴 지경이었다. 즉 속된말로 '어쨌든 보상을 줘야 하니 주긴 주는데 꼴도 보기 싫으니 이거나 먹고 꺼져라'인 셈이다.[50] 左馬頭. 종5위 벼슬로 원래는 말을 사육하는 일을 맡지만 이때는 이미 실제 관직과 하는 업무는 하늘과 땅처럼 벗어난 시대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결코 낮은 자리는 아닌데다가 무엇보다 당대 무사에게는 벼슬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타이틀이었다. 요시토모가 가지고 있었다는 것에도 알 수 있듯이 배신자가 안감생심 받을 수 있는 벼슬이 아니었다. 게다가 배신자든 아니든 간에 당시 벼슬은 혈통에 따라 정해지는게 거의 원칙이었는데 종5위 사마노카미라고 해도 무려 미나모토(무려 천황의 자손이 신적강하될 때 받는다. 클라스가 달라도 완전 다르다.)가 가지고 있던 벼슬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 부하 따위에 불과한 자가 가질만한 벼슬이 아니었다.[51] 미노와 오와리는 당대 최상등의 꿀땅이자 요충지였으며 이 중 오와리는 훗날 일본 통일의 초석을 놓은 오다 노부나가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출생지이기도 했다. 세키가하라 전투가 일어난 세키가하라 또한 미노에 위치해 있으며 도쿠가와 고산케의 영지 중 하나도 오와리였다(나머지 두 곳은 기슈, 미토). 그 정도로 중요한 땅을 일개 배신자에게 줄 리가 없었다.[52] 당시에는 지역 이름인 '오와리'나 끝장(終わり) 모두 をはり라 표기하고, '워하리'라 발음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순음퇴화 참조.[53] 공교롭게도 '이키' 역시 삶을 뜻하는 '生き' 혹은 숨을 뜻하는 '息'와 발음이 같다.[54] 그래도 남아있는 기록에서 인간적인 교만이나 전장에서의 잔혹성이 그에 대한 인간적인 평가를 떨어뜨려 중상 모략을 당하게 되었다는 지적을 받는 미나모토노 요시츠네에 비하면 미나모토노 노리요리는 이렇다 할 교만을 보인 적도 없고, 중상 모략을 받은 것도 아닌데 죽였다. 에도 시대의 국학자였던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는 자신의 저서인 《독사여론》(讀史餘論)에서 "요리토모 같은 인간 밑에서 동생으로 산다는 것도 힘든 일이다"라고 비판했다.[55] 도쿠가와 가문 역시 명목상으론 카와치 겐지의 후손이기 때문에 중시조인 요리토모를 높이 평가하는 것이 당연하다.[56] 비슷하게 요시츠네 또한 조선 기록에 원의경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기도 한다.[57] 이런 면은 고시라카와 법황과의 대화에서 솔직하게 "목숨을 부지하려고 도망다니는 건 이제 지긋지긋합니다."라고 고백한 장면에서 드러난다.[58] 그렇지만 적폐가 되어버린 헤이케를 반면교사 삼아 조정과 무사들을 분리한 신체제를 구상한 혁신적인 면모와 후환을 없애기 위해 헤이케를 완전히 멸망시키기로 결단하는 냉혹한 면모도 보여주기는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