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당 주에 위치한 동명의 도시에 대한 내용은 믈라카시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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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어:Melaka (Darul Azim)[1]
말레이어 자위 문자:ملاک
중국어/타밀어:馬六甲/மலாக்கா
Melaka Negeri Bersejarah
역사적인 주 믈라카
역사적인 주 믈라카
1. 개요
말레이시아 서남부에 위치한 주. 동남쪽으로 조호르와 경계를 맞대고 있고 나머지는 느그리슴빌란이 둘러싸고 있다. 주도는 동명의 도시인데 이에 대해서는 믈라카 시를 참조. 이 곳에 위치한 해협에 대해서는 말라카 해협을 참조.크기는 퍼를리스, 풀라우피낭의 뒤를 이어 세 번째로 작은 주이지만, 말레이시아의 전통적인 도읍이자 지금의 이슬람 말레이시아의 시조 국가이며 말레이시아 문명 발상지의 하나이다. 즉 말레이시아의 정신적인 수도.[2]
현지인들은 "Melaka"라고 한다. 공식적인 별명은 "Negeri Bersejarah"로 뜻은 "역사적인 주 믈라카". 술탄제의 기원이다보니 가끔 "귀족의 집"이라는 뜻의 "Darul Azim"으로도 불리지만 술탄제가 폐지된 오늘날에는 그리 사용되는 별칭은 아니다. 이 이름의 기원은 믈라카 나무이다. 드물지만 "Negeri Hang Tuah"(항 투아의 집)이라는 별칭도 사용된다.
헌데 영어로는 "Malacca"라고 하는데 당장 영어 위키백과를 봐도 "Malacca"라고 되어 있다. 남한에서는 말레이어 명칭인 "믈라카"와 "말라카"가 둘 다 사용되는데 북한에서는 후자만을 사용하며 정확한 문화어 표기도 "말라까"이다. 말레이시아 현지 명칭은 "믈라카"이므로 이 문서도 "믈라카"가 되었다.
2. 역사
16세기 초반 포르투갈이 점령한 이래 인도양과 태평양에 진출했던 제국주의 유럽 열강 중 말라카를 차지하지 않고 성공적으로 인도-동아시아 무역망을 경영한 세력은 없다. 반대로 말하자면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이 차례대로 말라카를 지배했던 세월은 바로 그 나라들이 이 광활한 남아시아 해양 무역 네트워크 자체를 독점했던 패권의 척도 그 자체이기도 했다.2.1. 기원: 믈라카 술탄국
자세한 내용은 믈라카 술탄국 문서 참고하십시오.고대 믈라카는 처음엔 현지 말레이인이나 "해지인"(Orang Laut)로 불리는 이들이 살던 한적한 어촌으로 시작했다. 바다가 접해 있고 그렇다 보니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여러모로 지리적으로 중요했다.
그러다보니 기원전부터 해상 향신료 루트의 주요 거점에 속해, 동남아, 동아시아로 가는 관문이기도 했다. 실제 한반도 동남부에 치우쳐진 신라의 유물 중에서 유리 재질의 사치품이나 로마, 중동 양식의 사치품들이 있는데, 이쪽 해협을 건너간 것들이다.
이 한적한 어촌이 말레이시아 역사를 주도하게 된 것은 테마섹 왕국의 군주인 파라메스와라가 믈라카로 도피하면서 수도로 삼았고, 나라이름도 믈라카 술탄국으로 바꾸면서 한동안 말레이시아의 정세를 주도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으로 치면 고조선의 준왕이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긴 후 건마국의 왕이 되어 삼한의 정세를 주도한 것과 위례성 함락 이후 웅진에서 새출발한 백제가 비슷한 예라 할 수 있다. 본래 파리메스와라는 오늘날의 싱가포르에 위치하던 테마섹 왕국의 군주였지만 이 당시 세를 떨치던 마자파힛 제국에게 싱가포르 섬을 함락당하자 급히 믈라카로 도피했고, 믈라카를 임시수도로 정하며 그곳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힌두교를 믿는 인도계 왕조 출신이었지만 말레이인이었다. 당시 아랍 상인들과의 교류 중 이슬람이 전파되었는데 그는 이슬람으로 즉시 개종하고 페르시아어식 호칭인 "이스칸다르 샤"를 칭했고, 나라이름도 믈라카 술탄국로 개칭하였다.
다만 국가가 성립된 시기는 불분명하다. 이는 고대부터 원래 거주하던 토착세력이 무역을 하며 세운 도시와 14~15세기부터 무역이 크게 확대 되면서 번영하며 강성해진 시기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흔히 알려진 바는 15세기 초반이지만, 근래에 발표된 논문에 따르면 13세기 후반이라고 주장한다. 그만큼 건국 시기에 대해서는 이견이 갈리는 상태이다.
2.2. 포르투갈령 믈라카
1511 ~ 1641예전부터 믈라카는 지리적인 이점, 인도, 아랍과의 교류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는데 파라메스와라는 이를 노렸다. 그러나 파라메스와라가 죽은 지 한참 후 대항해 시대가 시작되면서 포르투갈이 적극적으로 나섰다. 1511년 불과 700명의 본토 병사에 300명의 남인도인 보조부대로 코끼리 20마리를 포함한 2만 명이 지키는 믈라카를 함락시켰다. 이때 포르투갈군 전사자는 불과 28명에 불과했다. 결국 믈라카 술탄국은 멸망했고, 포르투갈의 속국이 되었다.
포르투갈은 기독교(가톨릭)를 전도하려 했으나 주민의 대부분은 무슬림이었다. 믈라카 술탄국의 왕실이 조호르로 망명하여 온전한 만큼 저항의식이 강했고 지형과 기술 때문에 진압이 어려웠다. 포르투갈의 입장에서는 정복에는 성공했으나 가톨릭화에는 실패했으니 절반의 성공일 뿐이었지만 의외로 이쪽 문화에 감동을 느껴 오히려 현지 문화를 존중했다. 그래서 당시 포르투갈의 핵심 식민지였던 브라질에서는 행정 언어로 포르투갈어를 사용했지만 여기서는 말레이어를 사용했다.
당시 말라카 술탄국은 조선이나 베트남과 비슷하게 명나라의 영향권 안에 있었다. 순식간에 조공국이 멸망하는 걸 본 명나라는 망명한 말라카 술탄이 도움을 요청하자 당시 명나라에 있던 포르투갈 사신단과 상단을 모두 억류하고 함대를 편성하여 포르투갈을 몰아내려고 했다. 1521년, 1522년[3] 두차례 걸쳐 홍콩 일대에서 포르투갈 선단을 격파한 명나라는 이 기세를 몰아 말라카를 공격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포르투갈이 인근의 중국 이권을 보장하고 왜구 소탕에도 도움을 주겠다며 당근을 제시하자 마카오에서 무역을 허가하는 조건으로 양국은 합의를 봤다.
조호르로 망명한 말라카 술탄은 이를 바득바득 갈며 기용할 수 있었던 외교적, 군사적, 경제적 능력을 총동원하여 포르투갈의 지배 하에 있던 말라카를 탈환하려고 하였다. 1521년, 1550년, 1567년, 1574년 수 차례 조호르 술탄국은 인근 다른 말레이계 술탄국, 영주들과 연합군을 편성하여 포르투갈령 말라카에 공격을 가했고, 그 중 특히 1550년의 원정은 거의 함락 직전까지 갔다가 가까스로 격퇴되었다.
조호르 술탄국은 이후에도 계속 말라카를 정복하려 했지만 16세기 후반 포르투갈과 타협하여 포르투갈이 더 이상 말레이계 세력으로 확장을 하지 않으며, 인근 해적 소탕에 협력하는 조건으로 말라카 수복의 꿈을 접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말라카는 이미 불안한 정치적 상황과 끊임 없는 군사적 충돌, 그리고 이런 막장 상황을 틈 탄 해적들의 기승으로 인하여 한때 화려했던 태평양-인도양 무역의 메카로서 역할을 인근 조호르 술탄국의 리아우 열도, 빈탄, 아체, 시악 등에게 넘겨 주었다.
17세기 초반에는 오히려 조호르 술탄국과 포르투갈이 싸우던 사이 새로운 해양 세력으로 강력한 힘을 기른 이스칸데르 무다 치하 아체 술탄국의 맹렬한 공세에 둘 다 멸망할 뻔했다. 그러자 조호르와 포르투갈은 이때 만큼은 힘을 합쳐서 겨우 아체의 공세를 격퇴했다. 이런 불안정한 상황에서 네덜란드가 말레이 반도로 진출하게 된다.
2.3. 네덜란드령 믈라카
1641 ~ 1811당시 유럽에서 80년 전쟁을 겪으며 이베리아 연합 아래 포르투갈과 동군연합을 이루고 있던 스페인 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치르던 네덜란드는 포르투갈의 무역 거점인 말라카를 차지하면 이베리아 세력에게 강력한 타격을 주고, 자신들의 독자적인 해양제국의 기반도 쌓을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 17세기 초반 말레이 반도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당장은 강력한 포르투갈 세력과 어느 정도 타협은 봤지만 고토 수복이라는 꿈을 버리지 않고 있었던 조호르 술탄국에게 이 새로운 세력이 눈에 들어오게 된다. 그리고 1606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대표 마텔리프 판 용헤와 동맹을 체결하여 아체의 위협을 물리치자마자 다시 포르투갈에게 칼 끝을 돌렸다.
16세기부터 17세기 초반까지 아시아 최강급 방어력을 자랑하며 거의 두자릿수의 인근 경쟁 세력이 연합한 정복 시도를 막아냈던 포르투갈령 말라카도 결국 이베리아 제국의 약화 자체를 극복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네덜란드의 공격을 몇 차례 막아냈으나 결국 1641년 조호르-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연합군의 공격에 함락당했다. 그 결과 네덜란드는 말라카를 제외한 인근 영토 모두는 조호르 술탄에게 반환하며, 차후에도 군사적, 경제적 편익을 제공하고 영토 확장을 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조호르 술탄국과 거래를 했다.
믈라카를 수중에 넣은 네덜란드는 믈라카를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일부로 편입시켰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결정이 믈라카의 발전에도 도움이 되었다. 왜냐하면 네덜란드령 동인도가 갖춘 수도였던 바타비아는 물론 말루쿠(몰루카)까지도 이어지는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통한 무역이 경제 성장에 한 몫 했기 때문이다.
2.4. 영국령 믈라카
네덜란드도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 앞에서는 무릎을 꿇었다. 믈라카는 네덜란드가 나폴레옹에게 점령당하던 1811년에 영국령이 되었다. 문제는 영국의 세력이 커지자 네덜란드와 분쟁이 발생했는데 결국 1824년 싱가포르를 기점으로 북쪽은 영국이, 남쪽은 네덜란드가 차지한다는 내용을 골자로한 영화협정을 통해 해결했다. 이로써 믈라카는 풀라우피낭과 싱가포르와 더불어 신설 해협 식민지에 속하게 되었다. 이때 술탄제도 폐지된다. 처음에는 영국 동인도 회사령이었지만 나중에는 영국 정부에 소유권이 넘어가 왕령식민지로 개편되었다.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잠시 일제의 지배를 받았으나 1945년 일제의 패망과 함께 영국령 해협 식민지로 복귀했다. 그러나 1년만에 해체되고, 싱가포르를 제외한 상태[4]로 말라야 연합에 가입한다. 2년 만에 말라야 연합이 붕괴되고 이후 세워진 말라야 연방에도 잔류하였다.
2.5. 말레이시아 믈라카 주
1955년 첫 총선과 함께 독립이 기정사실화 되고 1957년 8월 31일을 기점으로 말라야는 독립을 쟁취하지만, 술탄제는 부활하지 못했다. 1963년 9월 16일 말레이시아가 신설되었을 때도 그냥 풀라우피낭, 싱가포르, 사라왁, 사바와 더불어 총독제가 시행되는 주의 하나가 되었다. 1989년 말레이시아의 역사유적지로 지정되었고 이어 200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2.6. 왕정복고?
누르 잔이라는 사람이 2013년 믈라카는 "복종의 집"이라는 뜻의 "Darul Islam"이라는 별칭과 함께 술탄제로 복귀해 술탄으로 추대되면서 드디어 술탄제가 복귀한다라는 주장을 했다. 그는 페락 왕실 출신인데 당초 아즐란 샤의 후계자로 지목되었으나 나즈린 샤가 떠오르면서 밀렸던 모양. 그러자 홧김에 아버지를 거역하고 술탄을 참칭했으나 끝내 내려왔다고 한다. 사실 이것도 소문일 뿐이며 사실 여부는 모른다.
그런데 본인이 이렇게 스스로를 믈라카 술탄으로 추대했다는 것은 어쩌면 본인이 믈라카 술탄의 후손일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긴 했으나 결국 진위여부는 아무도 모른다. 왕정복고를 주장한 이듬해 경찰에 검거되었고, 신성한 왕실 타이틀을 가지고 물의를 빚었으니 처벌 받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사람의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을 보면 아직도 정신 못 차린 것 같다.
중요한 사실은 믈라카 술탄국이 1511년 무너진 이후 술탄제가 부활한 적은 없다. 말라카의 술탄들은 포르투갈에게 말라카를 상실한 이후 옆동네 조호르로 자리를 옮겼다. 말라카 술탄의 혈통은 왕가가 이주한 조호르가 이어 받았고 18세기, 19세기에 있었던 왕위 계승 분쟁으로 몇차례 왕실이 바뀐 후에도 여전히 조호르에 남아 있었고, 19세기에 전혀 다른 사건으로 인하여 말라카-조호르 왕가의 왕통이 소멸 되었다.
그리고 말라카 본토는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의 직할 통치를 받았고, 현재까지 400년 넘게 자체적인 술탄이 없다. 그런 상황에 말라카에 술탄제를 복고한다는 주장은 이상하게 여겨질 수 밖에 없다.
이 주가 진짜 술탄제로 부활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지만, 술탄제의 근원지라는 점 때문에 주민들도 술탄제에 대해 의외로 호의를 보이기도 한다.[5]
누르 잔 말고도 술탄을 참칭한 자는 있었는데 이 사람은 매우 극단적인 통일주의자로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브루나이-필리핀까지 전 말레이계 나라를 합친 마필린도라는 가상의 국가의 술탄을 자처했다. 물론 이 사람도 경찰에게 제지 당했다.
3.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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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총독 모하마드 할릴 야콥.
1824년 영국령 해협 식민지로 편입이 술탄제 폐지의 발단이 되었는데 영국은 이 지역에 총독제를 도입했다. 이것은 1957년 말라야의 독립에서 1963년 말레이시아 신설 당시 새로 가입한 주에도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는 중이다.[6] 다만 과거에 비해 달라진 게 있다면 과거에는 홍콩 총독처럼 총독이 실권자였지만 지금은 캐나다 총독이나 호주 총독처럼 실권이 없다. 실권자는 총리이다.
현 총독은 통일말레이국민조직(UMNO) 소속의 모하마드 할릴 야콥이며 2004년에 취임했고, 총리는 총독과 동일한 정당 소속의 이드리스 하론으로 2013년 취임했다.
주가 작다 보니 상대적으로 선거구의 수도 적은 편이고, 의회는 총 28석이다.[7] 2013년 총선 결과를 바탕으로 하여금 현재 집권당은 말레이시아의 집권여당인 통일말레이국민조직(UMNO)이며 21석을 확보하여 의석의 총 75%를 차지하고 있다. 야당으로는 민주행동당(DAP)이 6석, 범말레이시아이슬람당(PAS)이 겨우 1석을 차지하고 있다.
과거 술탄국의 영향 때문인지 법적 수도와 행정 수도가 다르다. 이러한 일은 술탄제를 시행하고 있는 주에서만 존재하고 총독제를 시행하는 주에서는 전무한 사례. 법적 수도는 믈라카 시이지만, 행정 수도는 아예르크로이다. 술탄제를 시행하고 있는 주에서는 전형적인 현상이다.[8]
4. 사회
총독제를 시행하고 있는 주 중에서는 풀라우피낭, 사바와 함께 무슬림이 대다수인 주는 아니다.[9][10]2013년 통계에서는 25.3%가 중국인인데 동화를 거부하고 자신들만의 문화를 고수하는 전형적인 차이니스 말레이시안과 혼혈 현지화되어 중국인이라는 감각이 희미할 듯 한 프라나칸(Peranakan)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 중 프라나칸은 "바바와 뇨냐"라는 말레이-중국의 혼합된 문화를 남겼는데 여기에 바바뇨냐 유산 박물관이 있다.
인도인은 6%인데 이들은 치티라고 하는 말레이화된 인도인이다.
그리고 타 지역에서는 존재조차 불분명한 크리스탕족이라는 특이한 민족집단이 존재한다. 이들은 15세기 첫 식민지 개척자였던 포르투갈인들의 후손으로 현지 말레이인 및 원주민들과 혼혈이 이루어져 지금까지 내려져오고 있는 일종의 크리올 집단이다. 치티와 마찬가지로 믈라카 외에는 그나마 싱가포르에서 볼 수 있는 민족. 총 37,000명 뿐인 소수 민족이다. 이들은 말레이식으로 변형된 포르투갈어 방언을 사용한다. 말레이시아의 음악인 로이스턴 스타 마리아가 크리스탕 출신이다.
오랑아슬리 계열의 트무안족도 극소수 거주한다.
5. 언어
말레이어가 제1언어로 사용되고, 그 뒤로는 중국어, 타밀어 등이 사용되는데 이들도 소통할 때는 영어를 사용한다. 물론 이는 말레이시아 사회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믈라카의 위상 등을 볼 때는 이 지역 방언이 한국어로 따지면 경상도 방언 정도 될 것 같지만, 오히려 믈라카 방언은 한국어로 따지면 서울말이다. 그 이유는 오늘날 말레이시아어 표준어가 믈라카-조호르 방언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믈라카와 조호르가 역사적으로 중심지였으니 그렇게 지정된 것이다.각 지역의 방언들을 들어봐도 클란탄 방언이나 사라왁 방언은 표준어에 비해 독특하게 다른 느낌이 강하고 다소 쉬운 사바 방언이나 느그리슴빌란 방언도 확실히 방언의 느낌이 크게 와 닿지만, 믈라카 방언은 들어봐도 표준어와의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조호르 방언 역시 동일하다.
대표적인 믈라카 방언의 예는 'ekau'. 뜻은 '너(you)'이며 표준어로는 'engkau'이다. 근래에는 쿠알라룸푸르가 수도가 되고 그 쪽 말의 영향이 짙어지면서 이 방언은 점차 사라져 가고 있지만, 중요한 사실은 말레이시아 표준어는 믈라카의 유산이라는 것이다.[11]
6. 관광
Melawat Melaka Bererti Melawati Malaysia
믈라카를 방문하는 것은 곧 말레이시아를 방문하는 것이다.
믈라카를 방문하는 것은 곧 말레이시아를 방문하는 것이다.
믈라카는 관광업이 발달해 있다. 믈라카는 500년 이상의 역사를 간직한 오늘날 말레이시아의 근본이 되는 곳인 만큼 관광자원이 풍부하다.
주로 식민지의 유산으로 믈라카를 처음으로 식민지배한 포르투갈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 있다. 건축물이나 운하를 보면 고풍스러운 유럽적인 색이 강하다. 풀라우피낭이 영국적인 분위기라면 여기는 포르투갈적인 색이 짙다.
크라이스트처치
코타 아 파모사
카사 쿠바
이름의 뜻은 쿠바의 집으로 물론 쿠바와는 관련 없고 과거 영국 관리가 살았던 곳이다.
Hatten City
믈라카 내 최고급 콘도가 몰려있는 곳이다. 유명 브랜드 입점 및 영화관까지 운영하고 있는 Elements Mall이 있어 관광객들에게 각광받는 지역이다. 하지만 비교적 최근에 개발 중인 지역이라 주변이 다소 휑하다.
7. 교통
바투브른담에 위치한 믈라카 국제공항이 유일한 관문이다. 이 공항은 믈라카뿐 아니라 조호르 북부에서도 나름의 역할을 해 중요하긴 하지만...정작 이 공항으로는 갈 곳이 없다. 대게 한국인들이 쿠알라룸푸르 외 다른 지역을 갈 때는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을 거치면 될 것 같지만 정작 쿠알라룸푸르에서 그리 멀지도 않은데 직항을 할 필요 자체가 없다. 이는 마치 서울에서 청주까지를 비행기 타고 가는 것과 같다.한국에서는 직항이 없기 때문에 피낭 국제공항을 거쳐서 가는 편이 낫다. 그외 인도네시아 프칸바루의 술탄 샤리프 카심 2세 국제공항을 거치는 방법도 있지만 이 역시 한국에서 직항이 없어, 수카르노 하타 국제공항을 거쳐야만 한다. 물론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을 거쳐서 갈 수도 있지만, 이렇게 3번씩이나 갈아탈 필요는 없다. 피낭 국제공항을 거치거나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또, 그것도 국제선(술탄 샤리프 카심 2세 국제공항)을 거치지 말고 차라리 차 타고 가자! 공항에서 1시간 30분이면 충분하다. 그러나 말레이시아 자체가 싱가포르와 묶어서 여행하는 경향이 크기에 보통 쿠알라룸푸르 도착 후 쿠알라룸푸르,푸트라자야,슬랑오르 등지를 보고 피낭,랑카위,이포,겐팅 하일랜드 갔다가 믈라카,조호르바루 본 후 싱가포르를 보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아 사실상 여기만 보겠다고 일일이 환승해서 오는 건 시간과 돈 낭비다. 차라리 서말레이시아 하고 싱가포르 여행할 때 여러 지역 방문 할 때 오는 게 좋다.
옛날에는 공항이 위치한 지역의 이름을 따서 "바투브른담 국제공항"이었지만 더 유명한 이름인 "믈라카 국제공항"으로 개명했다. 최근에 터미널을 신축하는 등 변화를 보이고 있지만 관광지로서 명성에 비해 공항은 협소하다. 차라리 신공항 짓는 게 나을 듯.
시내에는 Panorama Melaka라는 시내버스가 다닌다. 그러나 배차간격은 나쁘다.
8. 출신 인물
- 가수 지아나 제인
8.1. 우호 협력 도시
[1] 잘 사용되지는 않으며 공식 별칭도 아니다.[2] 일본의 교토하고 비슷하다.[3] 천초만 해전. 명나라는 300척의 병선을 동원했는데, 여기 맞서는 포르투갈 선단은 고작 6척이었다.[4] 싱가포르가 제외된 이유는 자유무역지대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5] 현재까지 풀라우피낭, 사라왁, 사바에서는 이런 참칭 사건이 없었다. 원래부터 술탄이 없었기 때문.[6] 후에 탈퇴한 싱가포르가 이를 다소 개정하여 공화정으로 전환했다.[7] 참고로 가장 큰 주인 사라왁은 총 71석이고, 가장 작은 주인 퍼를리스는 15석.[8] 슬랑오르의 경우 법적 수도는 샤알람이지만 행정 수도는 클랑에 두고 있다. 이웃한 느그리슴빌란은 스름반(법적 수도) - 스리므난티(행정 수도). 크다는 알로르스타르(법적 수도) - 아낙부킷(행정 수도). 반면 총독제를 시행하고 있는 경우를 보면 풀라우피낭 - 조지타운, 사라왁 - 쿠칭, 사바 - 코타키나발루 등 단 하나의 수도를 두고 있다.[9] 그렇지만 66.1%로 비중이 가장 높긴 하다. 그 다음은 사바로 65.4%.[10] 다만 풀라우피낭은 중국인 중심이고 사라왁과 사바는 보르네오 원주민 중심인데 반해 믈라카는 말레이인이 63%다.[11] 조호르 방언도 근래에는 점차 사라져 가고 있다. 그나마 고립된 동부 지역의 방언들이나 크다, 퍼를리스 쪽 방언들만 거의 보존될 뿐이다. 느그리슴빌란 방언도 수도권 방언과의 차이를 보면 경기 방언-충청 방언 정도의 차이로 다르지만 비슷한 정도라 그리 존속될 것 같지는 않아 보이고, 페락 방언과는 경기 방언-황해 방언 정도의 차이라 그런지 존재감 자체가 없고 나름 비슷해서 소멸위기 상태이다. 사라왁이나 사바의 방언은 그 특유성과 고도의 자치 때문에 보존이 쉬울 것 같지만, 근래에는 본토화가 빨라짐에 따라 소멸위기 상태. 이미 많이 동화된 3세대 이후 부터는 표준어를 구사하지 방언에는 많이 취약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