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의 대외 전쟁·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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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쟁 ,1618 ~ 1648, | |||
제2차 빈 공방전 ,168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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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683년 7월 17일부터 9월 12일까지, 약 60일 동안 이어진 오스만 제국과 합스부르크 제국의 두 번째 빈 공방전. 포위전의 마지막 이틀인 9월 11일부터 12일간 벌어진 이틀간의 대규모 기병전을 따로 '빈 전투'라고 부르기도 한다.
의외로 한국에서는 인지도가 높지 않지만 당시에는 도합 20만명 이상의 대군이 치른 대규모의 전쟁이며, 유럽사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친 중요한 전쟁이다. 특히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기병전이 벌어진 전쟁이기도 하다. 포위전 격퇴 이후 합스부르크 제국, 폴란드-리투아니아를 필두로 한 신성동맹의 반격이 개시되며 대튀르크 전쟁으로 이어진다.
2. 배경
17세기 말의 동유럽 정세는 매우 불안해졌다. 1세기 전까지도 감히 맞설 자가 없던 합스부르크 제국은 30년 전쟁의 여파로 주변국의 정세를 살피는 처지가 되었으며, 16~17세기 한때 맹위를 떨치던 스페인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역시 크게 약화되어 있었다. 스페인은 30년 전쟁 패배와 네덜란드의 독립으로 세가 크게 꺾였고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대홍수를 거치며 몰락하던 상황이었다.반면 잉글랜드, 프랑스, 스웨덴은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고 있었다.[1] 오스만 제국 역시 쉴레이만 1세 사후 균열의 조짐이 드러나고 있었으나 아직 유럽 국가들 가운데 오스만 제국과 정면으로 싸워 이길 수 있는 나라는 없었다. 1차 빈 공방전의 발단이 된 헝가리 왕국의 대부분은 아직 오스만 제국이 손에 쥐고 있었으나 에르데이 공국은 점점 떨어져 나갈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당시 오스만의 실권자였던 '카라 무스타파 파샤'는 전성기를 지나 내리막길을 걷는 제국을 부흥시킬 필요를 느꼈고, 또한 느슨해진 제국의 기강을 다잡고 자신의 권력을 확고히 할 필요성도 있었다. 그런 그에게 상 헝가리[2]의 개신교도들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에 저항해 일으킨 반란은 호재였다.
상 헝가리에서 반란을 일으켜 상 헝가리 공작을 칭한 퇴쾨이 임레(Thököly Imre)[3]는 오스만 제국에게 신종하고 연공을 바치는 조건으로 오스트리아를 공격해 달라고 요청해 왔고, 그 쉴레이만 1세도 어쩌지 못한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을 공격하는 것에 오스만 제국의 수뇌부는 선뜻 내켜하지 않았지만, 호전적인 군주 메흐메트 4세는 이를 반겼다. 결국 오스만 제국은 무스타파 파샤의 명분론에 휩쓸려 합스부르크 왕가를 박살내고 헝가리를 완전히 손에 넣어 서유럽으로 진출하기 위해 다시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20년 전 빈을 목표로 오스트리아와 벌인 전쟁 중 센트고트하르드에서 패하는 바람에 빈 공격이 좌절된 상황에서 다시 한 번 빈을 목표로 하기 시작한 것이다.
3. 개전과 전황
1683년 7월 14일 카라 무스타파 파샤가 지휘하는 오스만의 15만 대군은[4] 마침내 다시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인 빈에 당도했다. 이번의 원정군은 1세기 전과는 그 양상이 달랐다. 그러나 카라 무스타파 파샤는 엄청난 전략적 실수를 범하는데, 당시 빈 성채를 무리하게 들이치려다 병력과 물자만 날려먹고 실패한 사실을 거울삼아, 이번엔 아예 성을 포위한 상태로 버텨서 말려죽이기로 계획을 세운 것이다. 그리하여 17일부터 포위가 시작되었다. 애초부터 장기전을 염두에 둔 원정이었기에 준비한 물자도 병참도 과거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물론 병력과 화력 역시 1차 때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당시 오스만 제국의 형편에 비추자면 심각한 각출이었다.
대조적으로 당시 빈의 주둔군은 1만 1천여명, 자원병 5천여명으로 1세기 전보다 더 빈약했다. 비록 1세기 전에 비해 서유럽 전체의 국력이 향상되었다고는 하나, 중부 유럽을 통치하는 오스트리아의 패권은 30년 전쟁의 후유증으로 약화된 상황이었다. 특히나 오스트리아는 사방에 적국[5]이 산재한데다가 보헤미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모두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장이 왕위를 겸하는 느슨한 동군연합 체제였을 뿐, 오스트리아 대공국을 중심으로 한 단일 중앙 집권 체제를 갖추지 못하여 어느 한쪽으로 힘을 편중시킬 수 없었다. 그러나 파사우로 피난간 합스부르크 왕가의 레오폴트 1세는 빈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성벽 주위의 주택들을 허물어 성벽을 넘어올 것을 대비해 화망을 집중시킬 공터를 만드는 등 철저하게 대비를 했다.
마침내 교전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1차 때처럼 격렬한 공방은 없었다. 오스만 제국군은 애초부터 빈을 말려죽일 심산이었기에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오래 버티는 길을 택했다. 장기간에 걸쳐 튼튼한 포위가 이어졌고 빈 내부의 시민들은 물자난으로 인해 온갖 고초를 겪었지만 그럼에도 필사적으로 저항하다보니 요새는 함락될 기미가 없었다. 빈의 주둔군은 1차 때처럼 자체적으로 적을 물리친다는 목표에 대해서는 체념했지만, 대신 외부로부터의 구원을 믿으며 끈질기게 항전했다. 하지만 8월에 들어서면서 상황은 더욱 심각해져 요새벽 또한 오스만군의 지속적인 공격으로 무너지기 직전인 곳이 곳곳에 생겨나기 시작했다. 방어군과 시민들 사이에서 굶주림과 피로는 점차 커져만 갔다. 특히 경계 임무 시 조는 자는 즉각 총살이라는 극약조치도 동원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한편 외교력이 뛰어났던 레오폴트 1세의 노력으로, 좀 늦게 파견되기는 했지만 마침내 기독교 세계를 수호한다는 명목 하에 신성 동맹의 원군 7만 4천이 파견되었다. 이 7만의 구원군 중 대다수인 4만 7천은 신성 로마 제국 전역에서 모집된 병력이었고 나머지는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얀 3세 소비에스키가 친정을 온 폴란드-리투아니아군 2만 7천이었다. 로렌 공작 샤를 5세[6]이 이끄는 구원군 중 일부가 빈 북서쪽 5km 지점까지 진격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엔 도시의 심정은 절박함 그 자체였다. 하지만 제국군은 15만에 달하는 오스만군의 포위망을 풀지 못했다.
9월, 구원군 본대가 빈 근처까지 도착했다는 소식에 다급해진 오스만군은 총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포격을 퍼붓고 갱도를 파는 등의 전술은 1차 때와 같았지만, 이번에는 화약의 성능이 좀 더 좋아져 있었다. 갱도에 화약을 매설하고 폭파시키자 빈의 요새벽도 무너지기 시작했다. 별모양 요새 중 뾰족한 부분인 라벨린의 요새벽이 무너져 폭 12m의 폭이 생겼고 오스만군은 이를 통해 요새 내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방어군은 사력을 다해 저항했으나 9월 8일, 결국 라벨린이 오스만군에게 점령당했고 방어군은 도시 성벽까지 무너질 것을 대비해 시가전으로 전환할 태세를 갖췄다.
이제 빈에게 남은 선택은 콘스탄티노폴리스처럼 도시에 오스만 제국의 월성기가 걸리는 것 뿐. 이렇게 빈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전철을 따라가나 싶었지만 함락 직전인 9월 12일, 폴란드군이 나타나 오스만군을 공격했다. 성을 함락시키느라 정신이 팔려있던 오스만군은 뜻밖의 적에게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패전했다. 적의 지원군은 예상하지 못하고 빈 공격에만 치중해 있었기 때문에 배후가 허술할 수밖에 없었고, 그 배후를 친 선봉이 하필이면 강력하기로 이름난 윙드 후사르였던 것도 컸다. 결국 오스만군은 이번에도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오스만군은 빈 수비군과 유럽 연합군의 병력을 압도했다. 하지만 장기간의 포위전으로 많이 지쳤던터라 병사들의 사기가 저하된데다 장비도 여전히 구식이었다.[7] 화력에서도 열세라 대포가 여전히 유럽 연합군보다 적었고[8] 화기가 부족해 병사들에게 총을 충분히 지급하지 못해 활을 그대로 쓸 정도였다.[9] 게다가 오스만군 내부도 총사령관인 카라 무스타파 파샤가 독선적으로 일처리를 하다보니 장군들의 불만이 컸고 오스만군 휘하의 타타르인들은 강압적인 무스타파를 정말 싫어하여 제대로 협조하지도 않았다.[10] 한마디로 단합력도 최악이었던 것.
반면에 유럽 연합군은 단결이 잘 되어 있었고 사전에 정찰병을 계속 보내어 오스만군의 동향을 철저하게 분석하여 오스만군이 의외로 허술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공격했으니 승리할 수밖에.
4. 후속전 대튀르크 전쟁
이번에는 오스트리아도 1차 때처럼 적이 곱게 퇴각하도록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위기를 벗어난 레오폴트 1세는 재빨리 폴란드와 함께 오스만군 추격에 돌입하여 후속전인 대튀르크 전쟁으로 이어졌다. 레오폴트 1세는 헝가리, 크로아티아 등 합스부르크 제국 전역에서 군대를 소집하였다. 또 유럽 각국에 지원군을 요청하여 바이에른 선제후국과 작센 선제후국 등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국들이 참여하였고, 루스 차르국까지 참전했다. 또 스페인계 합스부르크 가문이 다스리는 스페인 왕국도 끼어들었다.다만 전쟁 좋아하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울 루이 14세의 프랑스는 여기에 참여하지 않았는데, 루이 14세는 오스만과 오스트리아 사이에 전쟁 위기가 고조되던 1681년 9월, 신성 로마 제국령인 슈트라스부르크(스트라스부르)를 기습 침공하여 점령했다. 합스부르크 제국이 오스만 제국의 침공 위협에 대비하느라 스트라스부르에 병력을 보내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고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 그리고 오스만 제국이 오스트리아를 침공한 후에 루이 14세는 한동안 관망하고 있다가 1688년 헝가리 전역에서 튀르크와 싸우고 있는 오스트리아의 뒤통수를 갈기며 9년 전쟁을 일으키는 파렴치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애초에 프랑스는 16세기 초반 프랑수아 1세 때부터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어 합스부르크 왕가에 맞서왔기에 놀라운 일도 아니다. 오히려 1664년 오스만-오스트리아 전쟁 당시 후자를 도운 것이 이례적이었다. 이후 프랑스-오스만 동맹은 1세기 가량 이어지다 19세기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이집트 원정과 그리스 독립 전쟁, 알제리 점령으로 인해 중간에 크림 전쟁으로 잠시 한 배를 탄 것을 제외하면 완전히 깨진다.
결국 오스만 제국은 퇴각하면서도 점령지를 단단히 다졌던 제1차 빈 공방전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퇴각하면서 추격해온 유럽 연합군한테 실컷 얻어맞아 점령지를 상당수 잃고 말았다.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이 체결되어 오스만 헝가리와 에르데이 공국은 합스부르크 제국에게 완전히 귀속되었다. 거기에 폴란드는 오스만 제국에게 빼앗겼던 포돌리아, 베네치아 공화국은 펠로폰네소스, 루스 차르국은 아조프를 접수했다.
한편 신성동맹과 오스만이 실컷 싸우는 틈을 타 신성 로마 제국의 뒤통수를 갈겼던 루이 14세의 프랑스는 의외로 9년 전쟁에서 고전하며 일시적으로 점령했던 영토 대부분을 도로 토해냈지만, 스트라스부르만은 건졌다.
5. 영향
2차 빈 공방전을 기획했던 오스만 제국의 실권자 카라 무스타파 파샤는 패전 책임을 물어 처형당했으며[11] 메흐메트 4세도 패전의 책임을 이유로 예니체리에게 폐위당했다. 그러나 그만한 국력을 각출하고도 실컷 얻어맞아 체면을 구긴 제국은 더 이상 이미지를 만회할 수 없었다. 전쟁을 통해 엄청난 인력과 물자를 상실한 것으로도 모자라 영토마저 축소되고, 사실상 만방에 종이호랑이임을 알리는 꼴이 되고 말았다. 실제로 오스만 제국이 명백히 쇠퇴하고 있음이 유럽인들의 눈에도 분명해진 것이 바로 이 때부터다.이후 오스만 제국은 강성해진 북쪽의 러시아 제국이 오스만의 영토를 노리고 침투해오면서 더는 동서로 신경을 돌릴 수 없게 되었다.
오스만 제국을 다시 한번 막아낸 합스부르크 왕가는, 그게 비록 폴란드의 구원 덕분이긴 하지만 아무튼 국위를 한층 떨치고 국내의 분란을 잠재울 수 있었다. 또한 헝가리 왕국을 완전히 합병할 수 있었고,[12] 진정한 의미의 제국으로 나아가는 기반을 마련했다. 그러나 폴란드는 이후 혼란 끝에 100년 후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프로이센에 의해 3차례의 분할을 당하면서 멸망하고 말았다.
여담인데 당시 오스만 제국군 전사자들이나 포로들이 가지고 있는 게 커피 원두였는데 오스트리아군은 이걸 서로 가지려고 싸우다가 몇몇은 칼을 뽑아 싸우다가 서로 다치거나 죽는 일도 벌어졌다! 그만큼 당시 커피 원두는 비싸고 귀했던 물건이었다. 심지어 당시 프랑스가 오스트리아 지원을 외면하는 댓가로 오스만 측에게 받은 보답이 커피 원두였을 정도. 커피 원두를 준다고 할때 루이 14세가 무척 기뻐했다는 일도 있다. 물론 이웃 라이벌 오스트리아가 한방 먹어봐라는 계산도 있었겠지만. 어째든 이때 맛 좀 본 오스트리아에서 커피가 크게 유행하게 되고 이후 유럽 전체가 커피에 빠지게 된다. 유럽인들 입맛에 너무 써서 좀 레시피를 바꾼게 카푸치노이다.
비록 쇠퇴하기 시작했다고는 해도 오스만 제국은 제2차 빈 공방전 이전까지는 여전히 위명을 떨치는 대상이었고, 쉽게 싸움을 걸기 힘든 제국이었다. 빈의 어머니들이 아이들을 재우면서 말을 듣지 않으면 '튀르크 악마들'이 와서 잡아먹는다고 겁을 주었다는 일화도 있다. 하지만 1683년의 2차 빈 공방전으로, 이러한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빈을 포위했던 오스만 세력이 어처구니없이 무너진 것은 유럽과 오스만 모두에게 충격을 가져오기에 충분한 대사건이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오스만과 합스부르크 & 유럽 제국 사이의 세력 균형에서 영구적인 반전의 기점이 되었다.
물론 오스만 제국은 여전히 적지 않은 세력을 갖추고 있었으므로 당장 바람 앞의 등불이 된 것은 아니다. 게다가 유럽의 군주들이 함께 힘을 합쳐서 오스만 제국을 압박하기보다는 자기들끼리의 싸움에 더 집중한 탓도 있어서, 오스만 제국은 이후에도 2세기 가까이 그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실제로 베네치아에게 뺏겼던 펠로폰네소스 반도는 전쟁으로 다시 되찾기도 하였다. 그러나 유럽에서 상대적으로 평화적인 분위기가 대두하고 러시아 제국의 남하가 본격화된 19세기 후반 이후 결국 세력 구도는 명백하게 오스만에서 유럽 쪽으로 넘어가게 된다. 이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현상유지정책의 영항이 컸다. 즉 프랑스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면서 되도록 유럽에서는 전쟁을 벌이지 않으려 했고, 그게 어느 정도 먹혀든 것. 다만 빌헬름 2세는 비스마르크와 생각이 달라서 적극적인 확장정책을 추구했고, 그 결과는...
이 전쟁은 14-17세기동안 중유럽의 최강국이었던 폴란드의 마지막 불꽃이기도 하였다. 오랫동안 폴란드는 이 때 도와 주었던 오스트리아가 나중에 자국을 찢어먹는 데에 한몫 했다고 소비에스키를 욕했지만, 폴란드의 친서방화가 강해지는 지금은 그래도 폴란드가 서구를 위해 크게 공헌한 것이 있다고 다시 소비에스키를 추앙하는 분위기이다.[13]
한편 제2차 빈 공방전의 원인이 된 퇴쾨이 임레는 빈 공방전에서 승리를 거둔 합스부르크 제국이 반격을 개시해 오스만 제국 편에 가담한 상 헝가리의 반란 진압에 들어가자 필사적으로 저항해보았지만 중과부적으로 밀렸고, 1685년 오스만 제국으로 도망쳤다. 이후 에르데이 공작으로 선출되어 오스만군의 지휘관으로 오스만군에 종군하였지만 젠타 전투에서 사부아 공자 외젠에게 개박살나고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대튀르크 전쟁에서 합스부르크 제국이 승리를 거두면서 헝가리 독립시도를 위한 그의 꿈은 무산되었다. 1700년, 헝가리 탈환을 위한 마지막 시도가 실패로 끝나며 부인 일로나 즈리니와 함께 오스만 제국으로 망명했고, 1705년에 이즈미트에서 사망했다. 그렇지만 퇴쾨이 임레는 헝가리인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아 훗날 부다페스트 영웅광장의 14인 중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결국 그의 요청이 나비효과가 되어 헝가리 전역의 오스트리아 지배를 불러일으켰지만 헝가리 독립을 향한 의지는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헝가리 독립에 대한 의지는 양아들이자 부인 일로나 즈리니의 친아들 라코치 페렌츠 2세가 계승하여 1705~1711년 라코치 독립 전쟁으로 이어진다.-
6.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6.1. 비엔나 전투 1683
자세한 내용은 비엔나전투 1683 문서 참고하십시오.6.2. 뮌히하우젠 남작의 모험
1988년 테리 길리엄의 영화 뮌히하우젠 남작의 모험에서 배경으로 등장한다. 오스만군에 포위된 빈에서 뮌히하우젠 남작이 자신의 모험을 들려주는 것으로 영화가 시작하여 마지막에 오스만군이 패퇴하는 것으로 끝난다.6.3. 반지의 제왕
영화판의 경우, 나팔산성 전투의 양상은 2차 빈 포위와 유사하게 돌아가는데, 압도적인 전력을 가진 오르크 군대가 헬름협곡의 성을 포위했었고, 성벽을 화약으로 폭파하고 돌파했었지만, 후에 도착한 로한의 기병대가 언덕에서 돌진하면서 오르크들의 패배로 돌아갔기 때문. 다만 원작 소설의 경우에는 로한 보병이 지원하러 온다. 또한 펠렌노르 평원의 전투에서 로한 기병대가 오르크 군대를 격파하는 장면은 윙드 후사르 기병대의 공격을 모티브로 했다.6.4. 워해머 판타지
워해머 판타지에서 카오스와의 대전쟁에서도 아사바르 쿨의 군대가 키슬레프를 포위해 함락 직전까지 몰아넣었으나 키슬레프 기병대와 제국 기병대의 연합군이 카오스의 군세의 허를 찌르는 것의 모티브가 되었다.6.5. 기타
해병대 갤러리에서도 메 흐흑메트 2세 해병님의 빈 대장난이라는 이름으로 언급되며 이를 주제로 한 해병문학도 있다. 다 이길뻔한 상황에서 기열 '윙드' 후사르의 습격을 받고 역돌격하는게 포인트.7. 이야깃거리
7.1. 크루아상의 전설
지금도 세계적으로 인기있는 초승달 모양의 빵인 크루아상은 바로 이 2차 빈 포위때 생겨났다고 한다. 그 유래에 대해서는 크게 2가지 설이 있다. 다만 정작 튀르키예에서의 반응은 글쎄.. 튀르키예 요리 항목 참조.7.1.1. 첫 번째 설
2차 빈 공방전 당시 오스만 제국의 공성 전법 가운데, 성벽 아래로 갱도를 판 다음 화약을 매설하여 폭파하는 것이 있었다[14]. 그리고 빈 공방전 당시에도 이 전법이 사용되었고 수비군은 이쪽에서도 갱도를 파내려간 다음 적의 갱도를 발견, 막아버리는 식으로 대응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지하실로 밀가루를 가지러 간 제빵사가 갱도를 파는 소리를 듣고 즉시 수비군에 알려 오스만의 계획을 좌절시켰다. 이 공로로 해당 제빵사는 영예로운 문장을 가게에 내걸 수 있게 되었다. 이에 제빵사는 자신의 업적(?)과 오스만군 축출의 영광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해 오스만 국기와 닮은 초승달 모양의 빵을 개발해 팔기 시작했다. 이 빵을 씹어먹으면서 오스만을 격퇴한 만족감을 느끼라는 것. 때마침 반오스만 정서가 강한 유럽인들에게 큰 호응을 얻으면서 이 빵은 주식이 되었다.7.1.2. 두 번째 설
폴란드군과 오스만군의 교전 당시 예지 프란치셰크 쿨치츠키(Jerzy Franciszek Kulczycki)라는 폴란드인이 결정적인 공훈을 세웠다. 그 공훈은 오스만군의 포위로 외부 사정을 알지 못해 성내의 분위기가 절망에 빠졌을 때, 오스만군 복장으로 위장하고 혈혈단신 포위망을 빠져나가 외부의 동맹군과 접선하고 귀환, 지원군의 파병을 알려 수비군의 사기를 진작시킨 것이다. 이에 오스트리아에서는 그에게 빈에 살 수 있는 영주권을 부여했고, 그는 이를 기념하고자 1686년 카페를 차려 역시 오스만을 상징하는 초승달 모양의 빵을 팔아 명물로 만들었다. 이것을 그 유명한 마리 앙투아네트가 오스트리아에서 프랑스로 시집갈 당시 프랑스 궁정에 전파시켰다고 한다.하지만 이 이야기는 말 그대로 썰일 뿐이다. 왜냐하면 그가 세웠다고 알려진 카페보다 1년 앞선 1685년에 빈 최초의 카페가 개업했기 때문이다. 실은 1783년 오스트리아의 가톨릭 사제 고트프리트 울리히(Gottfried Uhlich)가 그럴싸하게 지어낸 이야기이다.
7.2. 그 외
별자리 중 방패자리라는 별자리가 있는데, 이는 승리의 주역인 윙드 후사르를 이끌었던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얀 3세 소비에스키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별자리이다.이 포위전 이후 오스만 제국이 점차 쇠퇴하자 그 이전까지는 동방의 강대한 이교도 제국의 문화를 경탄 어린, 혹은 질시하는 태도로 바라보던 유럽인들의 시선이 점차 이국적이고 오리엔탈리즘적인 환상으로 바뀌어 가기 시작하면서 유럽에 본격적으로 튀르크리 열풍이 시작되었다. 공포의 대상에서 무서울것 없는 존재가 되자 문화 소비자들인 유럽인들이 안심하고 느긋하게 오스만 문화를 소비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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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들 중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원래 강대국이었지만[2] 현재의 슬로바키아[3] 상 헝가리의 케슈마르크(현재의 슬로바키아 케주마로크)에 기반을 두었던 귀족으로 센트고트하르드에서의 승전에도 불구하고 불리한 조약으로 물러선 레오폴트 1세에게 분개하여 반란을 모의했던 즈린스키 역모 사건때 부친을 잃어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한 반항심이 거셌다.[4] 30만이라고 하지만 과장으로 보며 실제론 15만~17만으로 보고 있다.[5] 오스만 제국 만큼 프랑스도 위협적인 적이었는데, 특히 오스트리아의 월경지인 슈바벤과 알자스 일대의 외지오스트리아(Vorserösterreich)는 프랑스에게 살금살금 갉아먹혀 결국 라인강이 오늘날 독일과 프랑스의 국경이 되었다.[6] 레오폴트 1세의 손녀 마리아 테레지아와 결혼하는 프란츠 1세의 할아버지다. 레오폴트 1세의 이복 여동생 엘레오노레와 결혼한 인연으로 합스부르크 제국을 도와 참전했다.[7] 대포 사거리가 빈 수비군보다 떨어져서 빈 수비군의 포격에 오스만군이 큰 피해를 입을 정도였다.[8] 당시 빈의 오스트리아군은 대포가 무려 312문이나 있었지만 실제 운용 가능한 대포는 141문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래도 150문의 대포를 가져온 오스만군에게 지지않을 정도의 화력이었고 신성 동맹의 지원군이 대포를 140문이나 가져오자 당연히 화력에서 압도될수밖에 없었다.[9] 더욱이 오스만군은 구식인 매치락을 썼기 때문에 플린트락으로 무장을 바꾼 빈 수비군에게 개인화력으로도 밀리는 판국이었다.[10] 영화 비엔나에서도 타타르인들이 무스타파를 싫어하는게 티가 나서 그의 명령을 대놓고 거부한다.[11] 사실 실권자 무스타파는 하도 강압적으로 일처리를 하다보니 정적이 많았다. 그래서 정적들은 이를 빌미로 벌떼같이 달려들어 술탄에게 패전의 책임을 물어 처형하자고 했던 것이다.[12] 다만 헝가리의 완전한 복속은 1711년, 서트마르 조약으로 라코치 페렌츠 2세의 봉기를 진압한 이후다.[13] 오스트리아는 폴란드를 분할시킨 세 나라들(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중에서 폴란드와의 악연이 그나마 덜한 편이다. 프로이센과 러시아는 가톨릭을 믿는 폴란드인들과 달리 각각 루터교회와 정교회를 믿어서 자신들 치하의 폴란드인들을 탄압하면서 가톨릭 신앙까지 탄압한 반면, 오스트리아는 폴란드와 같은 가톨릭 국가인 관계로 적어도 종교적으로는 자신들 치하의 폴란드인들을 탄압한 적이 없고, 정치적으로도 독일, 러시아와는 달리 유화책을 썼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폴란드와 오스트리아의 사이가 좋다고 보기는 힘들며, 폴란드와의 관계가 괜찮은 독일어권 국가는 스위스, 리히텐슈타인, 룩셈부르크 정도다.[15][14] 이 전법은 늦어도 1453년 콘스탄티노플 공방전부터는 사용되었고, 이후 오스만군의 기본적인 공성 전법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는다. 아예 포병대의 산하 부대 가운데 갱도를 파 폭파하는 것을 전담하는 "라음즈 오자으(Lağımcı Ocağı)" 라는 공병대가 따로 있었을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