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8 19:18:18

민중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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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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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c5b356> 고구려 제4대 국왕
민중왕 | 閔中王
파일:지안 고구려 유적 분포도_조무용.jpg
민중왕릉으로 추정되는 마선구 고분군(맨 왼쪽) 전경.
출생
(음력)
<colbgcolor=#fff,#1c1d1f>5년~18년 사이[1]
고구려 국내성
사망
(음력)
48년 (향년 30~40대)
고구려 국내성
능묘 민중원 석굴(閔中原 石窟)[2]
재위기간
(음력)
고구려 제4대 국왕
44년 10월 ~ 48년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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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c5b356> 본관 <colbgcolor=#fff,#1f2023>횡성 고씨
성씨 고(高) / 해(解)?
해색주(解色朱) / 해읍주(解邑朱)[3]
부모 부왕 유리명왕[4]
모후 왕후 송씨
형제자매 고도절, 고해명, 고무휼
동생 고재사, 고여진
누이 1명
왕후 왕후[5]
시호 민중왕(閔中王) }}}}}}}}}

1. 개요2. 성씨 논란3. 내정4. 《삼국사기》 기록5.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내가 죽으면 반드시 이곳에 묻어라. 다시 능묘를 만들지 말라."[6]
吾死 必葬於此. 不須更作陵墓.
삼국사기》에 기록된 유언
고구려의 제4대 왕.

제3대 대무신왕이 승하한 뒤, 태자(뒷날의 모본왕)의 나이가 어리다 하여 즉위했다. 《삼국사기》는 대무신왕의 동생이자 유리명왕의 아들이라고 했고, 《삼국유사》는 대무신왕의 아들이자 모본왕의 동생으로 적었다. 하지만 후자가 맞다면 태자가 어려서 즉위했다는 말과 상충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맞다고 본다.

2. 성씨 논란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성이 해씨라고 한다. 이름이 '해색주'(解色朱)라 실제로는 고씨가 아니라 해씨라는 설이 있다.

3. 내정

5년 동안 재위했는데 좋은 일은 하나도 없었다. 자연재해 때문에 민심도 흉흉했고, 잠우락부(蠶友落部)의 10,000여 가가 후한낙랑군에 귀부했다.[7]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면 석굴에 매장된 것이다. 민중원에서 사냥을 하다가 스스로 석굴에 장지를 정했다고 한다. 민중원에 능을 썼다고 해서 왕호도 '민중왕'이 되었다.[8] 그런데 재위 4년차에 왕이 사냥을 나갔다가 그해 7월, 자기가 죽으면 동굴에 묻어달라고 하더니 바로 다음 해에 승하했다. 지병이나 노환이 있어 이미 오늘내일 하고 있었다면 사냥을 나가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니 아마 사냥을 나갔다가 부상을 입어 얼마 안 돼 죽은 것이 아닌가 싶다.

4.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三國史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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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석문 및 문헌기록상 신라 최초로 성씨를 사용한 왕은 진흥왕임
* 29~31권까지 연표
* 32~40권까지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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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민중왕 본기〉
一年冬十月 민중왕이 즉위하다.
一年冬十一月 민중왕이 대사면을 실시하다.
二年春三月 민중왕이 잔치를 베풀다.
二年夏五月 홍수로 백성이 굶주려 창고를 열어 구제하다.
三年秋七月 왕이 노루를 잡다.
三年冬十一月 남쪽 하늘에 혜성이 나타나다.
三年冬十二月 겨울의 국내성에 눈이 오지 않다.
四年夏四月 민중원에서 사냥을 하다.
四年秋七月 왕이 석굴에 장사지내달라고 하다.
四年秋九月 동해사람이 고래 눈을 바치다.
四年冬十月 10,000여가가 낙랑군으로 가서 후한에 투항하다.
五年 민중왕이 승하하다.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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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왕실의 계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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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형인 대무신왕이 4년에 태어났고, 아버지 유리명왕이 18년에 승하했으므로 민중왕의 출생년도는 대략 5년에서 18년 사이로 추정되며, 승하했을 때의 나이는 많아봐야 40대 초중반이었을 것이다.[2] 마선구석묘자석굴 추정[3]동국통감기록.[4] 《삼국유사》에는 대무신왕.[5]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민중왕조-에 '왕후와 여러 신하들이 임금의 유언을 어기기 어려워 석굴에 장사지내고'라는 기록이 있어서 왕후가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지만 더 이상의 기록이 없다. 한편 고구려형사취수제 관습을 생각하면 그녀가 대무신왕의 왕비들과 동일인이 아닐까 추정되기도 한다.[6] 옛날에는 왕릉을 만든다고 하면 강제징용, 강제이주 등으로 인해 그 일대가 아주 쑥대밭으로 변했다. 그래서 민심이 매우 안 좋을 수밖에 없었다. 대무신왕의 능을 만들 때 백성과 지방 유력층들의 반발을 느낀 민중왕이 자신의 능은 동굴에 작게 만들라고 한 것으로 보인다.[7] 후한서에 의하면 잠지락부(蠶支落部)의 대가 대승이 만여구(萬餘口: 약 1만명)을 이끌고 낙랑군에 투항했다고 기록하고 있다.[8] 민중왕뿐만 아니라 고구려 역대 왕들 중에는 장지의 이름을 따서 왕호가 기록된 이들이 많다. 예를 들어 모본왕, 고국천왕, 중천왕, 서천왕, 미천왕, 고국원왕, 소수림왕, 고국양왕 등이 모두 장지가 왕호가 된 경우이다. 또한 유리명왕보장왕은 이름을 그대로 써붙인 경우이고(휘호), 태조대왕·차대왕·신대왕은 처음 왕·다음 왕·새로운 왕이라는 뜻이었다. 특이하게 장수왕은 오래 살았다(長壽) 하여 장수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