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제11대 황제 도미티아누스 Domitianus | |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 티투스 플라비우스 도미티아누스 Titus Flavius Domitianus |
출생 | 51년 10월 24일 |
로마 제국 로마 | |
사망 | 96년 9월 18일 (향년 44세) |
로마 제국 로마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81년 9월 14일 ~ 96년 9월 18일 (15년 4일) | |
전임자 | 티투스 |
후임자 | 네르바 |
부모 | 아버지 : 베스파시아누스 어머니 : 도미틸라 |
배우자 | 도미티아 롱기나 |
자녀 | 플라비우스 카이사르 플라비아 |
종교 | 로마 다신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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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로마 제국의 제11대 황제. 두 번째 세습 왕조였던 플라비우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이다.매우 과시적이고 비타협적인 성격 탓에 원로원 의원들과 많은 갈등을 일으킨 데다, 노골적인 공포정치로 정국을 운영한 이유 때문에 원로원을 비롯해 타키투스, 수에토니우스 등 당대 지식인들에게 악랄하고 잔인한 황제로 대차게 까였다. 결국 시해까지 당해 사후 대중들에게 좋지 않은 이미지로 각인되었고, 그리스도교가 국교화된 이후에는 폭군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원로원, 지식인 등 로마 상류층의 평가와 별개로 당대 기사계급, 일반민중, 군대에게는 특유의 철저하고 꼼꼼한 성격덕에 오히려 공정하다며 큰 지지를 받았고, 여기에 더해 오늘날 역사가들의 연구와 각종 로마사 관련 서적들을 통해 도미티아누스의 통치와 행정적, 국방적 성과가 인정받으면서, 단순 ‘잔인하고 악랄한 폭군’이라는 오명을 벗고 폭압적인 정치를 펼치긴 했으나 행정가로선 상당히 뛰어난 황제로 재평가받고 있는 인물이다.
2. 생애
2.1. 즉위 전의 삶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와 플라비아 도미틸라의 둘째 아들로 51년 10월 24일 로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기사계급 출신이었으며, 위로는 11살이나 연상인 친형 티투스, 여자 형제인 소 도미틸라가 있었다.베스파시아누스가 승진을 거듭해 로마 주류 사회에 편입된 이후 태어났기 때문에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형과는 성장 과정부터 많이 달랐다. 티투스가 소년 시절까지 은수저조차 없는 가난한 평민 가정에서 자랐다면, 아버지가 집정관에 취임하기 한 달 전 태어난 도미티아누스는 로마 상류층 자제로서 갖춰야 하는 교육을 받았다. 따라서 도미티아누스는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의 서민적 풍모, 형 티투스의 다정다감한 성격과 달리 소년 시절부터 귀족적인 풍모를 가지고 있었고,[1] 황제 즉위 전까지 형과 달리 군복무를 경험하지는 않았다.
도미티아누스는 네로 사후 벌어진 내전 당시 로마에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와 비텔리우스 간의 전쟁이 벌어졌을 때, 큰아버지 사비누스와 함께 유피테르 신전 안으로 도망쳐 밤새 관리인 숙소에 숨어 있다가 변장을 하고 탈출해야만 했다. 이후에도 추격을 받다가 어머니의 친구 도움으로 여러 번 목숨을 구했다. 얼마 뒤 아버지가 내전 승리 후 황제가 되자 로마를 관할하는 수도 법무관에 올랐다. 이때 도미티아누스는 명장 코르불로의 딸이자 아일리우스 라미아의 아내였던 도미티아 롱기나[2]를 남편과 이혼시키고 결혼했다.
도미티아누스는 베스파시아누스 생전에 이미 '프린켑스 유벤투티스'의 지위를 가지면서, 아들이 없던 형 티투스의 후계자로 선언된 상태였기 때문에 언제라도 황제 자리를 대신할 수 있었다. 또한 베스파시아누스 생전에 이미 6차례나 집정관을 지내는 등 제왕 교육을 받아서, 형 티투스가 황제가 된 뒤에 아버지 생전 형이 누렸던 호민관 특권 등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는 티투스가 예전부터 동생에게 집정관을 양보하는 등 배려있는 모습을 여러 번 보여줬기에 가능한 요구였다. 그러나 티투스는 동생의 무리한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런 까닭에 도미티아누스는 티투스를 적대해 제위에 오른 뒤 티투스의 신격화 허용 외에는 어떤 영예도 수여해주지 않았다. 아울러 원로원에서 연설할 때도 모호한 표현으로 티투스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 형의 요절 당시 죽음의 배후일 것이라는 소문까지 나왔다.
2.2. 황제
2.2.1. 즉위 초반
도미티아누스는 티투스의 갑작스런 사망 이후 예정대로 황제에 즉위했다. 그는 태생적으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황실의 황제들처럼 파트리키가 아님에도 워낙 귀족적이고 지나치게 자신의 위상을 드높이려고 했다. 이는 타고난 성격이었다고 하는데, 이런 도미티아누스의 성격과 행동은 많은 부분에서 아버지나 형과 달랐다. 즉위 전에는 이런 모습을 자제했지만, 도미티아누스는 아버지와 형이 죽은 뒤 아버지의 정부 카이니스[3]가 해방노예 출신이라는 이유로 평상시와 달리 입맞춤을 거부하고 손등을 내미는 행동을 저질렀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말과 행동 모두 뻔뻔하고 무례해 젊은 시절부터 상냥한 사람이 아니라고 평가받았다. 또한 아버지, 형과는 달리 제국 통치에 필요한 실무 경험이나 군사 경험이 없는 채로 즉위했기에 실무적인 약점이 뚜렷했다.2.2.2. 재위 중반
도미티아누스는 즉위 초부터 팔라티노 황궁, 도미티아누스 경기장, 네르바 포룸[4]의 공사를 시작하고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건축을 시작한 콜로세움을 준공하였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 이후 100년 만에 로마 병사들의 급여를 인상하였다. 또한 라인 강과 도나우 강 사이 군사상 취약지점인 슈바르츠발트를 로마 영토에 편입하고 그곳에 처음으로 게르마니아 방벽을 세워 국경선의 방어를 더욱 강화시켰다. 또한 법 집행과정을 공정하고 엄격히 하도록 노력했으며, 공공도덕을 강조하고 유죄로 판결난 사건들을 꼼꼼히 검토해 억울하게 유죄가 된 사건들을 취소시키고 돈에 매수되어 판결을 뒤집은 배심원들을 처벌했다. 따라서 도미티아누스 시대에 이르게 된 이후 로마는 행정관과 속주 총독들의 성실성과 청렴도가 상당히 높아졌고, 로마 일반 시민들에게 축제를 제공하는 등 선심성 정책들을 많이 베풀어 평가가 괜찮았다.그러나 도미티아누스는 점점 원로원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가면서 통치에 그늘을 드리웠다. 이는 원로원의 권한을 축소하고 기사계급을 더 중용한 탓도 컸지만, 도미티아누스의 개인적인 성격과 행동 탓도 컸다. 도미티아누스는 스스로 사치가 심했는데, 그럼에도 타인(특히 원로원과 부자들)에게 유독 엄격했다. 그는 풍속과 도덕적 양심을 이유로 임페라토르 스스로 이를 바로잡아야 된다는 사명감 아래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원로원 의원들의 사생활까지 간섭하고 그리스 문화에 심각하게 빠진 나머지 동성애를 즐긴 원로원 의원들을 모조리 풍속 위반 혐의로 처벌했다. 아울러 그는 베스타 처녀 사제 중 최고 사제 코르넬리아를 비롯한 총 4명의 여사제들을 근친상간과 맹세위반 혐의로 처벌했다. 코르넬리아는 여러 명의 애인을 뒀다는 혐의로 생매장이라는 로마에서 거의 사라져 간 전통 처벌 방식으로 죽였고[5], 근친상간 혐의로 기소된 세 여사제는 스스로 사형 방식을 선택하도록 한후 처형했다.
그래서 도미티아누스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시대의 역사가들인 소 플리니우스, 타키투스 등에게 필요 이상으로 잔인하고 허세가 심하다고 혹평을 들었는데 실제로 로마 상류층에서 도미티아누스는 평판이 굉장히 나빴다. 하지만 이런 평과 별개로 도미티아누스의 대대적인 풍속 도덕 교화정책 중에 후대 로마인들에게 훌륭하다고 평가받은 것도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일부 극소수의 부자들이 집안 남성노예를 거세시켜 환관처럼 만드는 불법행위를 처벌하는 것이었는데, 이때 도미티아누스는 법적 테두리 안에서 단호하게 이를 금지하고 어길 시 정한 규칙대로 무관용 처벌했다.
또 도미티아누스는 그를 끔찍하게 싫어했던 타키투스와 수에토니우스의 평가처럼 공적 업무를 볼 때 양심적이고 성실한 황제였다. 그래서 원로원에서는 그를 독재자라고 미워했음에도 자애로운 성격도 갖고 있다고 평했다. 훗날 콤모두스를 기록 말살형에 처할 때 원로원에서 콤모두스의 악행을 언급하면서 도미티아누스에 대해 야만적이라고 언급했지만 네로처럼 악랄하다고 하지는 않았다.
2.2.2.1. 도미티아누스 별장 건설
아우구스투스 이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네 황제는 개인 소유의 별장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국고에서 비용을 충당해 황제 개인 소유의 별장을 짓지 않았다. 이는 사치스럽고 자기과시적이었던 칼리굴라도, 그보다 더 사치스럽고 스스로를 예술과 미학의 천재로 여긴 네로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도미티아누스가 궁전 건축가 라비리우스에게 역대 로마의 위정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별장을 능가하는 황제 전용 호화별장을 명령했을 때, 원로원은 도미티아누스가 사치금지와 엄격함을 요구함에도 매우 이중적이라고 여겼다.로마의 발상지 혹은 모체로 불린 알바롱가에 자리잡은 도미티아누스 별장은 바다와 호수를 볼 수 있는 가장 탁 트인 위치에 자리잡고 있었다. 로마에서 2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 별장은 인근에 자리잡은 폼페오 알바노 별장으로 불리는, 폼페이우스 별장보다 더 화려했다. 오늘날을 기준으로 굳이 비교하면 이 호화별장은 하나의 리조트였고 놀이공원이었다. 어떻게 보면 네로의 황금 궁전이 로마에서 수도권 외곽에 지어진 것과 똑같았다.
별궁 형태로 총 3층으로 건설된 본관은 거대한 테라스를 끼고 있었는데, 최고급 벽돌을 이용해 둘러 싼 구조였다. 본관에는 3개의 호화로운 안뜰이 자리잡았고 건물은 판테온 내부와 흡사한 독특한 구조로 설계됐다. 안방, 서재, 응접실과 함께 트리클리니움도 여러 개가 자리잡았고, 트리클리니움은 주인의 위엄을 상징하도록 설계되고 만일의 암살 위협을 차단할 수 있는 구조까지 갖추고 있었다. 이 구조들은 모두 도미티아누스가 만든 팔라티노 황궁을 복사하듯 옮겨놓은 구조라서 별장, 별궁이라기보다는 새로운 궁전이라는 말이 더 어울렸다.
각 본관 중 호수, 바다가 바라 보이는 곳에는 테라스가 만들어졌고, 이 테라스들은 15m 간격을 두고 설치돼 어디에서든 주변 풍경을 볼 수 있었다. 그 주변에는 호화 정원이 있었으며 지하통로를 통해 본관에서 안전하게 호수, 바다까지 걸어간 뒤 호화선을 타고 유흥을 즐길 수 있게 건설됐다. 내부 편의시설 역시 완벽해, 도미티아누스와 그 가족만을 위한 휴식공간이 모두 구비됐다. 최고급 진흙을 사용해 만든 수도관을 연결한 목욕탕, 사우나실, 마사지 방 등이 자리잡았고, 거대한 본관 안에는 원형교차로처럼 어느 문을 가더라도 이동이 가능했다. 그 주변에는 신화 속 분위기가 연출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님파이아 거리라는 이름의 산책로가 조성됐다. 극장, 유흥시설, 전차개인연습실 등이 구비되어 있었다. 즉, 도미티아누스 별장은 네로의 황금 궁전처럼 그 안에 즐길 수 있는 모든 것이 있었던 종합유흥시설이자 또 다른 황궁이었다.
동시대 사가 플리니우스는 도미티아누스가 이 별장에서 보이는 호수에서 보트를 띄워 호화로운 파티를 열었다고 하며, 호사가라는 평이 더 어울리는 변호가이자 역사가 수에토니우스는 도미티아누스가 이곳에서 열정적으로 활쏘기 연습을 했다고 말한다. 실제 도미티아누스는 칼리굴라처럼 공개적으로 호수에 배를 띄우지 않고도 첩실, 측근들과 함께 최고급 호화선에 올라 눈치를 안 보고 호수, 바다 위에서 선상 파티를 즐겼다. 원하면 극장으로 유명 배우, 가수를 불러 공연을 즐길 수 있었고, 전차 연습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당연한 말인데 수비대가 정주하면서 방어하고 그들끼리 숙식을 해결할 수 있도록 건설돼, 변란이 벌어지면 이곳에 틀어박혀 군대가 올 때까지 버티면 그만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장점에도 이 별장은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된 뒤, 이후 황제들에게 철저히 외면받았다. 공개적으로 일부 시설을 개방하겠다고 한 황금 궁전도 욕을 먹었는데, 형식상 공화국 체제인 로마 제국 안에서 황제가 국고로 이 거대한 빌라를 지었으니 당연했다. 원로원은 이 비밀별장을 도미티아누스가 중건한 팔라티노 황궁 일부 시설과 함께 무척 싫어했다. 따라서 후임 황제 중 하드리아누스를 제외하곤 도미티아누스 별장과 같은 곳을 국고에서 비용을 충당해 짓지 않았다.
트라야누스는 이곳의 위치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전쟁을 치르고 업무를 하느라고 제대로 이용하지 못했다. 반면 예술가 기질이 강한 하드리아누스는 개인 취향에 어울리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아예 티부르에 빌라 아드리아나라는 곳을 새롭게 지었다. 그렇지만 하드리아누스는 어쩔 수 없이 이곳에 잠시 살아야만 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본인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고급 별궁이 예정기일보다 늦게 완공됐기 때문. 허나 이곳을 이용한 하드리아누스는 끝내 도미티아누스 빌라를 짐덩어리 취급하면서 빌라 아드리아나 완공 직후 떠났고 그곳에서 사망했다.
하지만 워낙 시설이 좋고, 비상시 대피공간이자 방어시설로 유용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이곳을 이용했다. 물론, 이 역시 이들이 이곳을 좋아해서 머문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사정 때문에 사용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175년 폭동 때문에, 안전상 이유로 가족들을 데리고 피난처로 며칠 동안 이곳을 이용했다고 하는데, 이후 어떤 로마황제도 이곳을 사용하지 않았다. 세 번의 암살 위기를 겪은 콤모두스는 안전이 보장된 도미티아누스 빌라는 거들떠보지 않고, 퀸틸루스 형제가 소유한 퀸틸리 빌라를 빼앗아 개조 후 이곳과 팔라티노 황궁을 오가며 살았다.
따라서 이 별장은 건설 이후, 국가에서 관리한 황제 개인 재산 중 인기없고 외면받은 별장이 됐다. 그래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명령으로 197년 제2 파르티카 군단 병사 중 근위대에 배속된 이들을 위한 병영으로 개조됐다. 이때부터 이 별장은 세베루스 왕조 이후부터는 카스트라 알바나로 불리게 된다. 이 당시 판노니아 군단병들은 가족들과 함께 영구 이전해 퇴역병 마을을 건설하면서, '합법적'으로 불필요한 시설을 뜯어다가 각 개인이 기거할 사택 건축자재로 이용했다. 하여 이 시기부터 이 건축물은 별궁이 아닌 병영 내지 성채 같은 형태를 띠게 된다. 이때 도미티아누스 빌라 혹은 도미티아누스 별장의 자재를 뜯어 조성한 신도시가 제2 파르티카 군단 병사들과 그 가족들이 모여살게 되면서 오늘날까지 있는 이탈리아의 알바노 라치알레다.
2.2.2.2. 효율적인 재정 건전성 확보
즉위 초에 아무런 일을 하지 않은 것 같았음에도 세밀히 국고와 세수 문제를 점검해 제국의 국고를 계산된 흑자 상태로 만든 성과를 남겼다. 따라서 콜로세움 완성, 공공건축물 개보수, 군대 월급 인상, 빈민 복지 향상, 문예가 후원 등을 했음에도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된 직후, 그가 로마제국에게 남긴 것은 빚더미가 아닌 효율적이고 건실한 국고 관리를 통한 확실한 연간 수입액과 국고기금이라는 선물이었다. 이는 이후의 안토니누스 피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도 하지 못한 최대 업적이었다.브라이언 존스가 말했듯, 도미티아누스는 화폐의 은 순도를 90%에서 98%로 높이고, 은화 무게를 2.87g에서 3.26g으로 증가시켰음에도 빚이 아닌 잉여금을 남겨줬다. 이는 85년 금융위기 당시 은화 순도와 무게를 각각 93.5%와 3.04g으로 평가절하함에도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 형 티투스가 건실하게 유지한 재정 수준보다 훨씬 안정적으로 국고를 채웠다는 말이 된다. 이는 이전의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도 못한 것이었고, 그가 반대파를 제거해 호주머니를 채운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같은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도 그가 남긴 유산이었다. 따라서 도미티아누스는 역대 로마 제국의 황제 중 내정과 세수 관리, 행정 분야에 있어서는 최고의 천재라고 평가받고 있다.
더욱이 이 사람의 치세기 때부터 제국의 서방 경제가 침체기에 접어들었고, 제국의 서방 경제와 동방 경제 편차는 심화된 터라 이 공로는 팍스 로마나가 도미티아누스가 남긴 작품이라고 평가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쨌든 도미티아누스는 존스 추정으로 연간 12억 세스테르티우스 이상을 로마 국고에 수입액으로 남겨주도록 설계했고, 이 금액 중 1/3 정도는 로마군 유지와 군비 증강에 사용되도록 계획해 이를 제국에 남겼다. 즉, 후일의 콤모두스, 카라칼라처럼 황제가 제 기분에 따라 미친 척하고 돈을 펑펑쓰면서 호화선물을 뿌리거나, 트라야누스처럼 국고 수입만 믿고 팽창정책을 펼치지 않는 이상 구멍날 일이 없게 유산을 남겼던 것이다. 이는 그가 즉위할 당시 79년 폼페이 매몰, 80년 화재로 국고가 여전히 비상지출 상황인 것을 생각해보면 놀라운 업적인데, 이런 선물은 후일의 트라야누스 시대의 팽창정책과[6] 하드리아누스의 황제 속주 순방을 명분으로한 방만한 국고관리로 다 까먹었다가 안토니누스의 어느 영국인 학자의 절규를 인용하면 너무나 평온한 통치로 간신히 복구했지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루키우스 베루스 즉위 직후부터 터진 외적 침입과 자연재해, 전염병 유행으로 모두 사라진다.[7]
2.2.3. 전쟁
아그리콜라 원정 칼레도니아의 육상 해상의 진출로를 표하고 있다. | 마찬가지로 진출로와 요새를 말하고 있다. |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는 즉위 전부터 수많은 전투경험과 군사적 업적을 가진 황제였다. 그러나 도미티아누스는 즉위 전부터 치세 내내 유독 군사적 업적이 없었고, 군무경험조차 부족했다. 따라서 스스로 임페라토르이자 프린켑스로서의 책무를 중요시 여긴 도미티아누스는 즉위 직후부터 군대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황실 예산의 많은 부분에 꾸준히 국방비를 측정했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 시대 이후 두 번째로 로마군의 임금 인상을 확정해 이를 실행했다. 그 결과, 국방비의 대부분은 병사들의 연봉 인상과 복지 향상에 책정되어 집행됐다.
그는 즉위 직후부터 게르마니아 일대에서 전투를 벌이는 것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83년 게르만족 분파 중 하나인 차타족과의 전투 승리를 기념한 정식 개선식을 로마에서 거행했고, 원로원으로부터 '게르마니쿠스(게르마니아를 정복한 자)'라는 존칭을 받았다. 이 존칭은 원로원이 자발적으로 선사한 것이 아니라 황제가 스스로 원해서 얻어낸 것이다. 도미티아누스는 전쟁터에서 병력을 이끌고 원정에 제대로 나서지 않았음에도 개선장군이 되었기 때문에 존칭을 받은 모양새가 떨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원로원은 즉위 직후부터 아니꼬웠던 도미티아누스가 반강제로 얻어낸 이 칭호를 자랑스러워한 것을 놓고 쓴웃음을 지었다.
도미티아누스의 치세에는 명장 아그리콜라가 활약했다. 아그라콜라는 브리타니아에 파견되어 히베르니아(아일랜드)까지 탐험과 토벌전을 나가 이름을 남기고 칼레도니아(스코틀랜드)를 합병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다.(아그리콜라의 칼레도니아 침공) 그러나 때마침 멀리 떨어진 본국의 도나우 강 지역에서 여러 군단과 군사를 잃어, 85년 로마로의 귀환을 명령받아 합병을 앞두고 정벌 도중 그간 수년간의 고생길이 무색하게 빈손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85년, 도나우 강 북쪽의 다키아족이 로마로 쳐들어오자 도미티아누스는 다키아족과 전쟁을 벌여 우여곡절 끝에 88년 다키아족을 무찌르는 데 성공했다. 이듬해(89)에는 고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 루키우스 안토니우스 사투르니누스가 반란을 일으켰지만 진압되었고, 이로 인해 후의 황제가 되는 트라야누스가 등장하게 된다. 이 반란의 경우 사투르니누스가 죽기 전 증거를 소각하는 바람에 증명되지는 못했으나, 밀고자를 대거 고용하고 재무관직에 종신 취임하면서 원로원 의원들을 숙청하던 도미티아누스에 대해 불만을 품은 원로원 반대파들이 뒤에서 사주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로 인해 원로원과 도미티아누스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대부분의 로마인들이 다키아를 완전 섬멸할 것으로 기대한 것과는 달리 도미티아누스는 다키아의 데케발루스 왕과 강화를 체결하여 로마인들을 실망시켰다. 특히 로마인들은 포로가 된 병사들을 돈으로 구해낸 것에 분통을 터트렸다. 물론 도미티아누스에게도 이유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키아와 싸우는 사이에 도나우 강 유역에 거주하던 야만족들이 로마로 쳐들어올 조짐을 보였기 때문에, 다키아와 다른 야만족들과 동시에 전쟁을 치르기는 무리라고 판단한 도미티아누스는 일단 다키아와 강화를 맺기로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키아와의 강화는 도미티아누스에 대해 결정적으로 민심이 떠나는 계기가 되었다.
2.2.4. 황제권 강화와 자기 우상화
도미티아누스는 즉위 초반을 제외하고 꾸준히 원로원에게 나쁜 평가를 받았다. 이는 그가 매우 비타협적이고 단호했던 성격 탓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황제권을 강화하면서 자기 우상화를 지나칠 정도로 내세웠기 때문이었다. 먼저 그는 이전 여느 황제보다 원로원을 대놓고 빈 껍데기로 여기고 황제는 원로원의 말을 충고하고 존중만 해주면 된다는 태도를 대놓고 보였다. 이는 이전까지 원로원과 관계가 틀어졌던 티베리우스, 칼리굴라나 치세 중반 이후의 네로조차 하지 않은 방법이라서 당하는 원로원에서는 "우리를 대놓고 무시하네"라고 생각했고, 굴욕감까지 느꼈다. 여기에 더해 도미티아누스는 항상 원로원보다 황궁 내 관료들에게 실권을 부여하고, 늘 중요 정책을 새롭게 건설한 황궁 안에서 관료들과 처리한 뒤 원로원에 명령조로 통보하는 방식을 일관했다.그러면서 그는 황궁 관료사회와 원로원에 지속적으로 속주민들을 수혈하면서 새로 들어온 속주민들에게 큰 역할을 부여했다. 따라서 많은 속주민들이 도미티아누스 시대동안 귀족, 기사계급으로 편입됐는데[8], 이 중에서 대부분은 그리스 출신이나 그 혈통의 동방 출신들이 진짜 많았다. 이때 황제는 노골적으로 그리스와 동방 출신들에게 집정관 자리까지 여러 차례 추천해 당선시켰는데, 이는 자연스레 본국과 소외된 속주 태생 원로원 인사들의 불만을 증폭시켰다.
그런데 이런 황제권 강화보다 원로원에게 더 모멸감을 느끼게 한 것은 바로 황제의 한결 같은 언행이었다. 즉위 직후 몇 개월을 제외한다면 도미티아누스는 늘 원로원에게 역대 황제처럼 "원로원 여러분"이라는 존중 표현조차 없었고, 늘 상대를 존중하는 말은 모두 생략한 뒤 사무적이고 명령조로 말했다[9]. 그런데 이는 원로원뿐만 아니라 속주 총독과 황실과 관계된 모든 인사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 까닭에 지나치게 나쁜 평판을 듣게된 이유가 됐다.
아울러 도미티아누스는 항상 자신을 지칭할 때 높였고, 원로원에게 자신을 부를 때 '도미누스 에트 데우스(주인이자 신)'라고 부르게 했다. 그리고 그는 늘 원로원과 고위관료들이 자신과 접견하거나, 황제 자신이 이들을 대상으로 공식연회를 베푸는 공간을 황궁으로 정한 뒤 예법을 만들어 운영했다. 그는 역대 황제와 달리 여러 첩을 공개적으로 두었고, 이와 관련해 자신이 첩들과 침대에서 레슬링을 한다[10]는 등의 발언을 주변에 한 까닭에 이 부분에서도 큰 비난을 받았다. 이는 이전 자신과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문의 위상을 높이려고 한 가이우스(칼리굴라) 시대에도 없었던 일이었고, 이전까지 가장 귀족적이었고 사생활이 난잡했다는 소리를 들은 네로조차 하지 않은 행동이었다. 따라서 로마인에게 이런 도미티아누스의 고압적이고 가부장적인 언어선택과 행동은 무시와 퉁명스러움으로 느껴졌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에 대해 타키투스는 자신의 저서 <아그리콜라>에서 "네로조차 자기가 명령한 추악한 행위를 목격하는 일을 삼갔다."고 맹비난했다.
이 외에도 그는 원로원 입회때마다 늘 개선장군 복장을 착용하고 등장했으며, 9월과 10월을 자신이 원로원에게 부여받아 사용을 허가받은 존칭과 자신의 이름을 넣어 게르마니쿠스(9월), 도미티아누스(10월)로 부르도록 일방적으로 바꿨다.[11] 또 원로원 의원의 비리를 감시하는 '델라토르 제도'를 적극 활용했는데, 이런 그의 정국 운영은 원로원과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켰다. 그리고 이런 양측의 갈등 관계는 85년 도미티아누스 자신이 종신 재무관직에 취임하면서 결정적으로 폭발했다. 재무관은 국세조사를 담당하는 직책이었지만 또한 원로원 의원을 추방할 권한도 있었기 때문에 도미티아누스의 종신 재무관 취임은 원로원 의원들은 위협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또한 도미티아누스는 반역죄를 활용함에 있어서도 이전 황제들보다 뻔뻔하고 잔인한 방법을 사용한데다 숙청대상 역시 광범위한 탓에 원로원에서 불만이 상당했다, 도미티아누스는 숙청하기로 결정한 자신의 재산관리인, 전직 집정관 아레키누스 클레멘스를 반역죄로 죽이기 전 이들에게 상냥하게 굴고 인내심을 시험한 뒤 십자가형으로 죽이거나 과거 죄인들을 죽이는 방법으로 사형시켰다.[12]
아울러 이전보다 잔인한 방법의 취조 방법과 고문법[13]을 개발해 정적의 주변 사람을 고문해 증거를 얻어내고, 이를 증거삼아 정적을 고발한 뒤 사형을 언도하는 방식으로 제거했다. 이런 까닭에 황제와 원로원의 관계는 갈수록 악화됐고 회복불가수준으로 치닫게 됐다.
2.3. 암살과 사후
자세한 내용은 도미티아누스 암살 사건 문서 참고하십시오.상술했듯 도미티아누스는 자신의 법률상 지위와 위상에 상당히 공을 들였고 본인 스스로를 우상화했다. 그래서 자신이 고대 그리스 경기를 본떠 4년마다 1번씩 개최한 경기를 주재할 때마다 그리스풍의 옷과 금관을 착용했다. 또한 경기시 동료 심판들에게 여러 신들로 둘러싸인 도미티아누스의 초상이 새겨져 있는 관을 쓰게 해 모든 로마 시민들에게 자신이 우월함을 홍보했다.
도미티아누스는 시간이 지날수록 원로원과 관계가 악화됐는데, 이를 본인도 알고 있었다. 동시대 사람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도미티아누스는 암살되기 전 꿈속에서 본인 스스로 수호신으로 섬기고 있던 미네르바에게서 "내가 마르스에게 무장해제를 당해 널 도울 수 없다"는 말을 듣고 버림받는 것을 들었다고 한다. 수에토니우스라는 사람이 호사가이고, 이런 부류의 주장을 사실처럼 적어놓았기 때문에 믿기 어려운 사실이지만 황제 본인은 원로원과 기사계급 인사들과 관계가 최악이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85년 스스로 종신 감찰관에 취임해 고발을 남발하면서 원로원과 제국 내 장군들을 지나치게 통제했다. 늘 개선식 의상으로 원로원에 출입했다. 따라서 도미티아누스는 모든 부분에서 로마 상류층에게 인기가 없었다. 이렇게 원로원을 비롯한 정치적 반대파들과 척을 지고 있으면서, 도미티아누스는 자주 주인(도미누스)이자 신(神)인 짐이 하찮은 너희들에게 이렇게 명하노라.[14]와 같은 발언들로 반대파들을 자극했다. 따라서 원로원 내에서 도미티아누스에 대한 불만은 상당히 컸고, 실제로 이런 평판은 도미티아누스가 생전 정적들을 고발하고 제거하는 일들과 합쳐져 암살된 뒤 ‘야만적이었던 폭군’으로 단죄된 이유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게르마니아 총독이 게르만족 출신의 점성대가이며 예언가인 라기니우스 프로클루스를 불경죄 혐의로 체포해 로마로 압송했다. 라기니우스 프로클루스는 게르마니아 지역에서 번개와 별자리로 점을 치다가 도미티아누스가 서기 96년 9월에 제 수명을 못 채우고 죽을 것이라고 예언했기에, 총독이 깜짝 놀라 체포 후 로마로 보냈던 것이다. 도미티아누스도 총독의 보고로 이 점쟁이가 허풍쟁이가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재차 점을 치게 했다고 한다. 이는 수에토니우스 외에도 후대의 디오 카시우스조차 사실이라고 기술했는데, 이 점쟁이가 친 게르만족과 켈트족들이 사용한 점성술과 그리스 및 로마의 점성술 모두에서 똑같은 결과가 나왔다. 그래서 도미티아누스는 이 사람에게 직접 사형을 언도했다. 허나 라기니우스 프로클루스의 점괘에 따르면, 황제의 죽음이 이해 9월 18일이 될 것이라고 했기 때문에 일단 사형 집행은 그가 예언한 날짜 이후로 무기한 중지됐다.
라기니우스 프로클루스가 직접 점괘를 공개하기 전부터, 로마와 황제 주변 상황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따라서 도미티아누스는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암살에 대비했다. 도미티아누스는 호위를 강화하고 자신의 배게 밑에 늘 호신용 검을 두고 잤고, 약간의 변고 조짐이 있으면 즉시 고발을 통해 의심되는 이를 붙잡아 체포하고 심문했다. 그럼에도 결국 96년 9월 18일 저녁, 그는 황궁 안에서 암살됐다. 황제는 시종 스테파누스에게 암살됐는데[15], 처음 일격을 당할 당시 배게 밑에 숨겨 놓은 검이 없자[16] 하인들에게 칼을 내놓으라고 소리 지르고 침실을 탈출하려고 했다. 하지만 하인들에 의해 모든 문이 굳게 잠겨 있어 도미티아누스는 탈출하지 못했고 맨손으로, 무장한 스테파누스 및 하인들과 싸워야 했다. 이때 도미티아누스가 얼마나 처절하게 저항했는지 칼에 손이 베인 상황에서 부상당한 손으로 암살자의 얼굴을 붙잡고 눈을 후벼 파려고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스테파누스와 암살자들에게 7번이나 칼에 찔려 다시 한번 치명상을 입고 44세의 나이에 죽었다. 시신은 도미티아누스를 아기 때부터 키워준 유모가 수습해 화장한 뒤 조카딸 율리아의 무덤에 재를 섞는 방법으로 매장되었다. 유모의 이 행동 때문에 후일 도미티아누스가 율리아와 근친상간을 저지른 것을 황후 도미티아 롱기나가 알게 되어 암살에 가담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하지만 반대 의견도 많다, 도미티아가 이후 재혼하지 않고 남은 평생을 '나는 도미티아누스의 아내'라고 말하며 수절하는 등 부부 사이가 좋았다는 증거도 많았기 때문이다.
이 암살극의 이면에는 근위대장 2명과 여러 궁정 관리, (위에 나온 것처럼 반론도 있지만) 황후 도미티아 롱기나가 있었으며,[17] 도미티아누스의 뒤를 이어 제위를 이은 네르바 역시 음모에 가담한 것이 분명하다고 한다. 하지만 존 그레인저로 대표되는 현대 사가들은 시종 스테파누스가 암살을 결행한 배경에, 도미티아누스가 벌인 서기 95년 부유한 자유민 에파프로티투스(네로의 해방노예이자 개인비서) 숙청 사건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한다. 에파프로티투스는 제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 1세에게서 자유를 얻고 황제의 개인이름+성씨를 받아 자유를 얻은 사람이다. 그는 클리엔텔라 의무 조항 때문에 제 주인의 아들인 브리타니쿠스를 죽인 네로의 개인비서 역할을 했지만, 네로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해 국가의 적이 된 이후 홀로 된 네로를 끝까지 따르고 주인의 마지막 명령("내 목을 찔러라")를 이행한 사람이었다. 헌데 그는 도미티아누스에게 네로가 몰락한 지 한참이나 흐른 뒤에야, 도미티아누스의 명령으로 기소돼 추방되고, 처형됐다. 이는 에파프로티투스가 과거 피소 음모 사건 당시 네로 황제에게 보고서를 작성해 보고했고 네로의 황금궁전 프로젝트를 사실상 총지휘한 실세 중 실세였기에, 어떻게 보면 로마인들 생각에는 죗값을 치른 일이었다.[18] 허나 스테파누스 등 플라비우스 왕조의 노예, 해방노예들이 봤을 때 이는 당시 원로원을 모두 적으로 둔 황제가 괜한 꼬투리를 잡아 처형한 사건으로, 언젠가는 자신들도 황제에게 당할 것을 보여준 상징 같은 사건이었다. 실제로 에파프로티투스가 추방되고 처형된 명분은 그와는 무관한, 도미티아누스 시대에 벌어진 법원 관리 암살 사건이었다고 한다. 어쨌든, 스테파누스는 동료 해방노예 막시무스와 함께 황제를 암살했고, 황제는 라기니우스 프로클루스의 점괘 그대로 그날 어이없게 생을 마감했다.
도미티아누스가 죽자, 원로원은 그의 죽음을 기뻐하며 도미티아누스에게 "기록말살형"을 선고했다.[19][20] 다만 도미티아누스가 완성한 플라비우스 경기장을 만든 사람이 도미티아누스라고 쓰여진 석판만큼은 경기장을 지은 것을 감사히 생각한 시민들이 결사적으로 막아서 지우지 못했다.
시민들은 무관심했다고 해도, 군대는 이에 반발해 이듬해에 네르바를 사실상 유폐한 상태로 책임자들을 처벌하라고 협박했고 스테파누스, 파르테니우스 등 암살자들을 끌어내 처형했다.[21] 이 외에 공화정으로 복귀하려는 시도도 있었으나 이는 칼리굴라 암살 때와 마찬가지로 금세 사그라들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공화정 복귀가 극소수만의 주장인데다 머리끝까지 열받은 군대가 제정이 공화정보다 낫다며 무산시켰기 때문이다. 어쨌든 원로원은 네르바를 황제로 추대함으로써 플라비우스 왕조는 27년 만에 붕괴되고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가 그 뒤를 이었다.
도미티아누스가 죽자, 원로원과 근위대는 놀라운 점괘로 미래를 예언한 라기니우스 프로클루스에게 감탄하며 그를 풀어줬다. 네르바 황제도 라기니우스 프로클루스에게 400,000세스테르티우스라는 거금을 내려줬다고 한다.
3. 성격
도미티아누스는 책임감이 강하고, 일반 민중이나 속주민들에게는 자애롭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사교성이 지나치게 부족했고, 사색적이었으며 의심이 많았다고 한다. 따라서 그는 아버지, 형과 달리 사람들과 밤 늦도록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자신의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볼 수 있게 새롭게 지은 팔라티노 황궁에 투명한 흰 대리석 주랑들을 만들어 일렬로 세우도록 했다. 또한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를 클라우디우스 황제에게 천거하는 도움을 주어 베스파시아누스가 정실부인 사후 평생 사실상 부인으로 대우한 해방노예 출신 여성 안토니아 카이니스에 대해 절대 새어머니로 인정하지 않고 해방노예로 냉정하게 대우할 정도로 자신의 위치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다.그러나 여러 부분에서 티베리우스와 비슷해보여도 많이 달랐다. 티베리우스는 혼자놀기를 좋아했어도 어린시절부터 로마, 그리스 문학을 좋아했고 자신이 좋아한 그리스 문학가의 필체로 시나 문학을 짓는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또 그는 네르바 황제의 할아버지 네르바로 대표되는 소수의 부랄친구나 일부 가족들[22]과는 여러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기를 진짜 좋아했던 사람이었다. 이 외에도 그는 공무 외의 시간에 점성술 책을 읽고 이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취미도 있었으며, 어릴 적부터 검투사 경기, 전차 경주, 서커스, 무언극과 같은 유흥문화에는 큰 흥미도 없어[23] 로마인들에게 "재미없고 과묵하다", "애늙은이", "삶의 낙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 , "베스타 여사제 같다" 등으로 평가받았다. 반면 도미티아누스는 티베리우스처럼 태생적으로 과묵하고 수줍음이 많은 폐쇄적 성격이 아니었음에도, 이상할 정도로 취미가 딱히 없었다. 그는 애당초 여자애인을 거느리지 않고, 유흥문화라면 질색하면서 혼자 사색하고 가족이나 소수의 친구, 점성술사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티베리우스와 달리 사치스럽고 콜로세움, 키르쿠스 막시무스 등으로 자주 놀러가 유흥문화를 즐기는 사람이었다.
티베리우스는 자기 우상화에 관심도 없었고, 원로원이 이를 먼저 제안했어도 늘 완강하게 거부했다. 또 그는 가계 전체가 파트리키였음에도 불구하고, 소박함과 투박함을 선호한 데다, 여자문제나 사생활에서도 정적들이 공격할 만한 것이 딱히 없었다[24]. 이외에도 티베리우스는 태생적으로 로마귀족답지 않게, 로마서민들이나 입는 평범한 재질의 투니카, 토가 등을 입고, 음식 역시 시골밥상 등을 즐겨 먹었다. 그래서 정적과 로마 풍자시인, 서민들은 이런 티베리우스를 인색하고 본인에게도 짠돌이라고 비이냥 거리면서도 그 엄격함과 언행일치된 모습에 놀라워했다.
반면 도미티아누스는 티베리우스와 달리 어린시절부터 매우 귀족적이고 화려함을 선호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나이가 먹을수록 더 귀족적이고 화려해졌다. 입은 옷은 늘 최고급 재질로 만들어진 것들이며, 호화로운 음식과 이국적인 향신료 등은 도미티아누스에게 사랑을 받았다. 이는 본래 기사계급 출신으로 평민들과 여러 부분에서 취향이 비슷한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와 상반된 모습이었고, 밤늦게까지 술파티를 즐김에도 정도는 지킨 형 티투스와도 비교됐다. 더욱이 그는 자신의 롤모델이었던 티베리우스와 달리 자기애가 강렬했던 칼리굴라 이상으로 자기를 높이는 성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미티아누스는 칼리굴라나 아버지, 형과 달리 유머 감각이 매우 없었고 유머에 큰 관심도 없었다.
자기 자신에게 엄격했다는 부분에서도 얼핏보면 두 사람은 비슷해보이지만 여기에서도 둘의 차이가 분명했다. 티베리우스는 기본적으로 자신과 타인 모두 엄격했고, 실제로도 그랬다. 티베리우스는 젊을 적부터 리더십과 자기희생 정신이 대단해, 군사행동 중 위기에 처한 부하들을 위해 앞장서거나, 제 능력에서 최선을 다한 부하를 챙기는 인품을 갖추었다. 또 능력에 따라 부하를 차별하기보다는, 그 부하가 능력이 부족해도 성실하면 그를 높이 평했다. 반면 도미티아누스는 기본적으로 엄격한 성격이었고, 자신과 타인을 구분해 엄격함의 잣대를 들이대는 스타일이었다. 그는 귀족적인 만큼이나 부하를 다룰 때 명령 복종을 중요시했고, 자신이 요구하는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무자비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티베리우스는 차가운 짠돌이, 잔정도 없는 구두쇠로 로마민중과 원로원에게 비난받았음에도 비이냥 속에는 존경이 있었고, 도미티아누스는 민중들과 일반군인들에게는 인기가 있었어도 원로원으로 대표되는 로마 엘리트 지식인들에게는 더 미움을 받았다.
그래서 도미티아누스는 경호대를 대동해 저녁식사 후 산책하는 것 외에는 마땅한 취미도 없었고, 취미라고 해도 자신의 책무에 더 몰두하거나 첩들의 털을 뽑는 가학적 취미 등으로 더 유명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도미티아누스는 정적이나 원로원에게는 사치가 심하고, 잔인하고 변태같은 인간으로 치부됐다. 반면 적어도 로마 내에서 중립적이라는 이들에게서는 자기애가 강한 사람임에도 퇴폐적이나 행복한 사람이 아니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외에도 그는 당대부터 성격과 관련된 평이 분명하게 갈렸다. 이는 플라비우스 가문이 제위를 차지하기 전부터 나온 친 플라비우스 왕조, 반 플라비우스 왕조, 반 도미티아누스 세력, 친 도미티아누스 세력 모두의 평이라서, 주목할 만 하다. 동시대 모든 로마인들의 일관된 이야기를 살펴보면, 도미티아누스는 능글맞으면서도 냉혹하고 때론 비열한 면이 많았던 아버지, 형과는 달리 선천적으로 자신감이 부족하고 냉혹하고 무자비함에도 소심했다고 한다. 따라서 아버지, 형과 달리 키가 매우 크고 타고난 미남임에도 이상하리만큼 이중적이고 타고난 카리스마가 부족해보였다.
그는 제위에 오른 이후, 시간이 지날수록 주변을 의심하는 경향이 심해지고 비밀스러운 방법으로 명령을 내리고 스스로 고립된 채 본인을 과보호하는 경향도 강했다. 도미티아누스는 평생동안 본인만 알아듣는 이상한 유머를 한다거나, 자기비하적인 농담을 하면서 상대를 시험하고 이를 통해 그 사람의 향후 행동을 예측하는 이상한 버릇이 몸에 배어 있었다. 이는 도미티아누스를 좋아하는 이들도 비슷하게 말한 부분인데, 여러 학자들은 도미티아누스가 이런 성향을 갖게 된 것은 그가 청소년기였던 10대 후반 무렵에 겪은 성장환경 때문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도미티아누스는 네로 치세기부터 네 황제의 해 내내 본인 목숨도 장담할 수 없는 환경에 놓여 있었고,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고립된 채 자라야만 했다. 이는 칼리굴라의 10대 성장기와 상당히 흡사한 모습이다. 그는 네로 치세기 당시에 아버지가 극장에서 졸았다는 이유로 추방되는 것을 경험하면서 홀로 성장하고 네로 측근들의 감시를 받았다. 이어 어머니가 병으로 죽었고, 부친과 형은 늘 밖으로 나가 있었으며, 그를 돌봐준 백부 사비누스와 그 일가는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 치하에서 전쟁으로 죽거나, 황제 명령으로 살해됐다. 이는 도미티아누스도 비슷했는데, 그 역시 비텔리우스 부하들 손에 거의 죽을 뻔 했고 만일 여장을 하고 탈출하는데 실패했거나 어머니의 친구들이 그를 숨겨주지 않았다면 69년 내전 당시 거의 죽을 뻔 했다. 즉, 도미티아누스가 티베리우스, 칼리굴라를 섞어 놓은 듯한 변덕스럽고 냉혹하면서도 의심병이 심한 성격을 갖고 있으면서도, 자기과시적이면서도 소심한 모습을 보인 이유는 이런 성장 배경이 큰 몫을 차지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고대기록상의 여러 의견 등을 종합해, 도미티아누스 황제를 바라본 역사가 브라이언 존스는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진짜 성격을 평가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복잡하다고 평한다.
4. 평가
"무자비하지만, 유능한 독재자''
알랭 M. 고잉, 현대 미국의 고대 로마사가
알랭 M. 고잉, 현대 미국의 고대 로마사가
도미티아누스는 당대에는 폭군으로 여겨졌고, 기록말살형이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썼다. 하지만 현대의 연구에서는 행정 능력 등이 재평가되고 있고 그가 황제로 기록말살형을 받을 정도로 어떤 악행을 벌였는지 의문이라는 의견이 대다수의 평을 받고 있다. 특히 자신과 비슷한 부류의 황제로 평가받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두 황제 티베리우스, 가이우스(칼리굴라)에 비해 원로원 외 다른 로마인들에게는 인기가 많았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기록말살형을 선고받을 만큼 폭군으로 단정지을 수 없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하지만 도미티아누스는 성격적, 행동적 결점이 분명한 까닭에 원로원과의 사이가 아주 나빴고, 이는 그가 당대부터 필요 이상 욕을 먹는 결과를 초래했다. 특히 그는 자신을 우상화하고, 반대파들을 숙청하는 방식으로 권력을 강화했다. 그러면서도 정치 조율 능력은 떨어졌기에 재위 4년여 만에 원로원과 갈등을 일으키다가 근위대장과 일부 근위대의 배신으로 암살당한 칼리굴라와 많이 비슷했다. 그러나 도미티아누스는 칼리굴라와 달리 자기절제가 상당했고 위엄과 절제를 강조한 황제였다. 또 행정적 능력이 재평가된 황제답게 미숙하지 않았다. 그래서 전반적으로 티베리우스와 통치 스타일이 비슷하다고 평가받고 있다.
타키투스는 <연대기>에서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칼리굴라) 시대는 매우 비슷했다고 말했고, 도미티아누스는 전반적으로 원로원 관계가 두 사람과 일정부분 비슷했다. 특히, 도미티아누스는 여러 부분에서 티베리우스와 비슷했고 그를 참조했다. 따라서 간단히 보급형 티베리우스 또는 업그레이드된 칼리굴라라고 평가할 수 있다.
재평가받고 있는 티베리우스와 마찬가지로 도미티아누스 역시 일반적인 로마 역사상의 폭군과는 달리 로마 제국을 안정시키고 발전시키려는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던 황제였다. 그러나 도미티아누스는 기득권층과 마찰을 빚었음에도 자신에 대한 우상화 등으로 필요 이상의 적을 많이 만들었으며 티베리우스 통치기 중 후반기처럼 정국을 끌고 갔다. 그 결과, 그는 실패한 황제가 되고 말았다. 이 당시, 원로원과 달리 근위대 및 군단병으로 대표되는 군부와 적극적으로 기용한 기사계급, 그리고 로마의 서민층에서 도미티아누스의 인기는 상당히 높았다. 특히 국방면에서 보면 아우구스투스 시절 게르마니아 지역을 완전히 상실한 이후 라인 강과 도나우 강을 방어선으로 삼은 기존 로마의 영토정책의 개혁을 추구하여 많은 호응을 받았다.
그러나 도미티아누스는 많이 비교되는 티베리우스에 비해 여러모로 떨어졌고 적이 너무 많았다.
도미티아누스는 재평가 이후에도 정치, 행정, 군사적 경험이 많고[25] 정치적 계략도 먼치킨이었던 티베리우스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부족한 능력을 지닌 황제였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 이유를 몇 가지 살펴보면 먼저 도미티아누스는 즉위 당시 너무 경험이 없었다. 이 부분은 티베리우스의 후임 가이우스(칼리굴라)와 비슷한 부분인데, 문제는 도미티아누스는 복점관 같은 정치와 무관한 관직 외에는 원로원이나 군대를 다룬 적이 없는 가이우스처럼 아버지와 형 곁에서 예비후계자 임에도 명예만 있을 뿐 경험이 없었다.
그의 평가가 안 좋았고, 티베리우스와 비슷했다고 해도 혹평을 들은 또 다른 이유는 친형 티투스와의 관계 및 형과의 비교도 있었다. 아버지 생전부터 차기후계자 중 한 명으로 각종 명예, 훈장을 수여받고 관직을 경험한 도미티아누스는 항상 친형 티투스보다 후순위였다. 그런데 이는 비타협적이고 자기애가 강한 그가 형과 냉담한 관계로 치닫는 원인 중 한 가지가 됐다고 한다. 따라서 형제 관계는 냉담한 사이 그 이하도 아니었는데, 형 티투스가 즉위 후 그의 무리한 요구를 절차 등을 들어 거부했던 일과 도미티아누스가 즉위 후 형에게 보인 태도는 이런 비교를 더 돋보이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는 독살설의 배후가 도미티아누스라는 말도 안 되는 풍문까지 나오게 했다. 여기에 더해 형 티투스가 어린 시절부터 로마 상류층의 예법을 익힌 것과 반대로, 즉위 전까지 궁중 교육조차 받지 못한 상태였다. 따라서 도미티아누스는 매우 귀족적인 사내임에도 거만하고 상대에 대한 예의와 존중 부분에서 매우 단점이 뚜렷했는데, 이는 서민적이었던 아버지, 즉위 전까지는 냉혈한 같았지만 즉위 후 모든 로마인들에게 따뜻함과 공정함으로 사랑을 받은 형과 자연스레 비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그가 많이 참조한 티베리우스와 비교해도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티베리우스는 냉혹한 짠돌이 군주였어도, 최소한 원로원에게 공허한 절차와 예의는 항상 갖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도미티아누스의 평가가 고대부터 나빴던 또 다른 이유는 그와 많이 비슷했던 티베리우스, 칼리굴라처럼 냉혹한 정국 운영이 가장 큰 이유였다. 이 부분은 그가 최악으로 평가받게 만들었는데, 그럼에도 그가 더 비난받은 이유는 상대방에 대한 지나친 무시와 자기강조가 컸다. 하지만 상술했듯 도미티아누스는 칼리굴라와 달리 매우 절제적인 군주였고, 확실히 티베리우스와 비슷했다.
도미티아누스와 많이 비교된 티베리우스는 말년에 카프리 섬에 틀어박혀 공포 정치를 했어도, 10대 때부터 양부 아우구스투스를 도와 제국 전역에 파견돼 공적을 쌓았고 그 능력을 정적들조차 이미 인정한 사람이었다. 여기에 더해 티베리우스는 일평생을 로마에 머물면서 통치한 도미티아누스와 달리 즉위 전부터 군사적, 정치적, 행정적 경험이나 성과 역시 또래나 연배가 많은 인사들과 비교해도 아그리파 등 극소수 외에는 없을 정도로 지나치게 풍부했다. 마르쿠스 롤리우스는 게르만족에게 패배하고 갈리아 총독에서 쫓겨난 뒤 자기를 대신한 티베리우스가 일처리를 잘하는 걸 보고 강한 적의를 품고 티베리우스를 음해하기도 했다. 즉, 당대에 티베리우스보다 많은 경험과 실력을 가진 사람도 없었고, 즉위 후에도 그보다 제국 전체를 손바닥 꿰듯 알고 미래까지 예측해 장기적으로 정책 전체를 마련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또한 이 황제는 본인의 능력도 출중한 상황에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후계자였다고 해도, 어찌되었던 간에 실력으로 모든 경쟁자를 제거하고 로마의 일인자가 된 '신격 아우구스투스의 유일한 아들'이자 '세 번째 율리우스 카이사르'였다. 심지어 아우구스투스의 '아들'이라는 지위도 전임자의 친혈육들이 여러 이유 때문에 부족해서 물려받았다고 해도, 어머니는 리비아 드루실라였다. 또 이미 로마 사회에 악티움 해전 승리를 기념하는 개선식에서 12살의 나이에 양아버지 아우구스투스의 아들로 소개된 뒤 개선마차 위 개선장군 왼쪽에 같이 타는 방식으로 데뷔하고, 마르켈루스 생전부터 후계자 수업을 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생뚱맞게 양자로 입적된 인물이 아니었다.
반면 도미티아누스는 이런 티베리우스와 다르게 즉위 당시부터 프라이토리아니 병영으로 간 뒤 충성 보너스를 지급하고 오르는 모양새로 즉위했고, 후반기 티베리우스처럼 원로원이나 정적을 제거할 때, 본인이 이를 대놓고 담당했다. 그런데 이 방법은 공통점이 많은 그와 다르게 대놓고 뻔뻔하고 강압적이었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적을 많이 만들었고, 황족, 황실 관료들까지 숙청 대상으로 만들었다. 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평판을 깎아 먹었는데 설상가상 치세후반부터는 편집증 증세까지 나타나고 사치까지 심해졌다.
이는 매우 엄격했어도 시종일관 공사 모두 한결 같았던 자신의 우상과 대비됐다. 또 티베리우스는 이런 분위기가 재위 후반, 특히 세야누스가 야심을 표출하면서 터진 세야누스 숙청 사건 이후 시작됐던 황제라서 여기에서도 안 좋은 소리가 나왔다. 티베리우스는 당대 사람들에게 그토록 비난받은 은둔정치 당시 세야누스에게 실권을 넘겨줬다고 해도, 모든 결정은 티베리우스가 직접 내렸고, 군권은 본인이 장악한 상태였다. 즉 그는 프라이토리아니를 스스로 제어할 수 있었고, 원로원과 사이가 험악했어도 이 부분 역시 본인의 역량으로 충분히 제어할 수 있었다. 이는 도미티아누스도 비슷했다.
하지만 티베리우스는 도미티아누스처럼 황제 본인이 원로원에 출석해 직접 상대를 반역죄로 고소하거나, 때론 상대를 안심시킨 뒤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거나 고문까지 개발해 정적을 대놓고 제거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카프리 섬이나 나폴리에 머물면서 세야누스 숙청 이후 확실한 이유로 원로원 동의 아래 정적을 고발하고 숙청했으며, 대부분의 친혈육을 세야누스에게 잃고 독이 바짝 오른 상태에서도 원로원에게는 매몰차게 서한장을 보내도 항상 "원로원 의원 여러분" 같은 존칭을 사용하면서 최대한 상대방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하지만 도미티아누스는 본인이 직접 고소하거나 상대를 공격하면서도 그 범위가 원로원 내에서 너무 광범위했다. 또 업무 역시 원로원을 대놓고 무시하고 황궁 안에서 처리한다던지, 아니면 원로원까지 아랫사람 다루듯 사무적이고 명령조로 말했기 때문에, 티베리우스와 비슷한 행동을 하는 것 같아도 당하는 입장에겐 더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 외에도 티베리우스의 정적 숙청 과정은 세야누스 사건 이후, 황제이자 친족을 위한 복수를 위한 피해자 자격으로 이뤄졌는데, 지나치게 공포분위기를 조장했다고 욕을 먹었어도 원로원 입장에서는 어쨋든 가족이 학살 당했으니 확실히 명분이 있다고 생각했고 세야누스파에 대해 원로원 본인들도 원한이 있었기 때문에 '진작에 수도에서 통치하지 왜 섬에 틀어박혔다가 이제 와서 저 난리야' 정도였다. 하지만 타키투스로 대표되는 원로원 입장에서 보면 도미티아누스는 티베리우스처럼 음험하고 냉혈한로 비춰졌어도 본인이 원로원에 출석해 직접 상대를 고소하고 그 과정도 잔인한데 이유도 말 그대로 기강 잡기 같은 이유라서 "음험하고 거만한 데다 잔인하다"며 욕을 먹었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 모두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에게 차갑고 거만하다고 소리를 들었던 것은 사실이나, 여기에서도 분명한 차이가 있었고 이 부분은 두 사람의 평가가 크게 엇갈린 이유가 됐다. 도미티아누스는 티베리우스와 다르게 로마군 월급 인상 등의 조치를 취하고, 자신과 비교된 사람과 달리 빵과 서커스 제공도 많이 한 황제라서 상류층에겐 최악이어도 일반 병사들과 군부, 서민들에게는 매우 공정하고 자애로운 황제였다. 하지만 티베리우스는 본인 스스로 우상화를 거부할 정도로 본인과 타인 모두에게 차갑고 엄격했고 본인 스스로도 사치와는 거리가 멀어 기본적으로 '차갑고 거만한 짠돌이', '잔정도 없는 냉혈한'이라고 더 까였지,[26] 도미티아누스처럼 상류층 전체에게 평판이 최악은 아니었다. 즉, 기록상 평가를 내리는 원로원, 교양인들에게 도미티아누스는 개인적 결함으로 티베리우스보다 인자했어도 평판은 나빴다.
이런 차이점은 본인 역시 잘 알고 있었는데, 도미티아누스는 전임황제들과의 여러 가지 차이점 중 자신의 경험이 부족하다는 것에 신경을 많이 썼다. 따라서 즉위 후 티베리우스의 정책 등을 많이 참조하고 활용해 약점을 메우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했듯이 경험부족은 기록이나 정책을 참조해 진행하더라도 한계는 분명했다. 하지만 도미티아누스는 황제로서의 책임감과 별개로 성격적으로 의심이 많고 칼리굴라 이상으로 자기애가 대단했다. 그래서 결정적으로 살아 생전 자신에 대한 우상화를 거부한 티베리우스와 달리 스스로를 노골적으로 우상화시키고 공포정치를 펼치면서 필요 이상으로 원로원과 대립했다. 또한 젊은 시절부터 군사적 경험이 전무한 탓에 아그리콜라같은 명장도 휘하에 두었음에도 다키아 전쟁 등 여러 군사적 사안에 대한 대처가 미흡하여 국경 확장에는 실패했다는 비판을 듣게 했다.
도미티아누스는 세습왕조의 마지막 황제, 특히 암살로 제위를 잃은 황제들이 그렇듯 다음 황제와 그 왕조의 정통성과 명분 때문에 근대 이후 학자들에게 지극히 저평가되고, 폭군이 됐다고 재평가받고 있다. 따라서 도미티아누스의 성격, 행동 문제가 큰 결점이라고 해도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평화는 전임자 도미티아누스가 로마제국을 안정적이고 평화롭게 만들기 위해 노력한 결실이며, 도미티아누스의 행정적 성과로 얻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도미티아누스는 매우 과시적이고 비타협적이며 잔인한 황제였다. 따라서 자기과시로 점철된 사치, 잔인함, 편집증에 시달린 독재자라는 비난은 피할 수 없었고, 이런 실패들이 업적보다 주목을 받으면서 이 사람의 치세 결과는 암살과 기록말살형이라는 불명예로 끝났다고 평가받는다.
5. 여담
- 상기했듯이 베스파시아누스가 착공한 콜로세움은 이 도미티아누스 치세때 완공된다.
- 의도적으로 그리스도교를 박해한 황제로도 유명한데, 인지도로나 시기상으로나 네로에게 밀린다. 하지만 네로는 로마 대화재 때문에 우발적으로 그리스도교를 박해했다면, 도미티아누스는 황제숭배에 저항하는 그리스도교를 박해했다는 목적성에서 차이가 있다.
- 전제군주정 칭호를 대놓고 사용한 최초의 로마 황제다.
[1]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자신이 잘생겼다는 것을 대놓고 자랑하곤 했다. 하지만 나이들며 뱃살이 나오고 탈모까지 오자 가발을 썼다고 한다. 외모 집착과 대머리 콤플렉스가 심해서 직접 <모발 관리에 대하여>라는 책까지 집필했다.[2] 3대 황제 가이우스 칼리굴라의 아내 밀로니아 카이소니아의 조카이기도 하다.[3] 베스파시아누스가 아내와 사별한 뒤, 사실상 아내였다. 카이니스는 게르마니쿠스와 클라우디우스의 어머니 소 안토니아의 해방노예 출신이었다.[4] 건설 당시에는 당연히 이 이름이 아니었다. 원래는 도미티아누스 때 착공된 통로 포룸(카이사르 - 아우구스투스의 포룸 사이의 공간)으로 포로 로마노에서 베스파시아누스 포룸으로 가는 통로였다. 도미티아누스가 건설을 시작한 포룸이지만 네르바가 즉위해서 사망하기 전에 완공되었고 도미티아누스가 기록말살형을 당하는 바람에 네르바의 이름이 붙게 되었다. 네르바 입장에서는 정말 운이 좋았다고 볼 수 있다.[5] 코르넬리아의 애인들로 지목받은 이들 역시 모두 포룸에서 매를 맞아 죽는 전통적인 개죽음방식으로 처형됐다.[6] 물론 다키아 약탈과 파르피아 약탈로 많은 양의 금을 국고에 추가하긴 했다.[7] 그나마도 안토니누스가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 때 박살나고 있던 제국 제정을 복구시켜두어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대처가 가능했지 이마저도 아니었으면 로마는 정말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다. 믈론 이와 관련해서 일부 학자들은 국경 게르만 부족들이 안토니누스에게 먼 게르만 족으로 부터 로마에게 구원을 요청한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아우렐리우스 치세에 가까운 게르만 족의 유입이 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자세한 것은 안토니누스 피우스 문서 참조.[8] 대표적인 인물로는 트라야누스 부자, 하드리아누스의 아버지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 아페르,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친가 아우렐리우스 풀부스 가문 등이 있었다.[9] 원로원과 사이가 나빴던 이전까지의 황제들은 감정대립을 하거나 관계가 험악했어도 늘 원로원에게 존중이 담긴 말을 했다.[10] 이는 실제 레슬링보다는 여러 첩과 난교를 즐기는 것을 의미한다. 기록에 의하면 도미티아누스 때 황궁 정전의 침실 침대 크기가 이전보다 훨씬 커졌다는 서술이 있는 것으로 보아, 첩들과 난교를 즐겼다는 것이 사실일 것이다.[11] 여담이지만 도미티아누스 자신이 롤모델로 삼고 그렇게 행적을 탐독했던 선대 황제 티베리우스는, 정작 7월(율리우스), 8월(아우구스투스)에 이어 9월을 자기 이름으로 하는 걸 거절함으로서 관행을 끊어버렸다. "황제가 12명이 넘으면 어떻게 할 거냐?"라는 일침도 함께. 해석하기에 따라 도미티아누스는 티베리우스를 '참고'한 것이며, 원로원을 깔아뭉개는 데는 한술 더 떴기 때문에, 되려 이 일화를 알았기 때문에 9월과 10월을 자기 이름으로 삼아버렸을지도 모른다(...) 물론 기록말살형에 따라 도미티아누스 사후 9월과 10월은 원상복구되었다.[12] 숙청이 결정된 자신의 재산관리인을 구슬리며 뻔뻔하게 자신이 주최한 저녁식사 자리에 손님으로 초대시켜 융숭히 대접하고 온갖 말로 안심시킨 다음 날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다. 또한 아레키누스에게는 함께 여행가자고 말한 뒤 친구로 잘 대해주다가 돌아온 뒤 반역죄로 죽였다.[13]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항문에 불붙은 막대기를 삽입하는 고문법을 개발했다고...[14] 이 시기만 해도 황제 신격화 및 숭배는 로마 내에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아우구스투스가 기원전 27년 사실상 제정을 열었음에도, 로마 제국은 형식상 엄연한 공화국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미티아누스 이전에 스스로를 유피테르처럼 보이려고 퍼포먼스를 벌이고, 개인신격화 비슷한 우월화 조치를 취한 칼리굴라조차도 본인 스스로를 "주인님(도미누스)" 혹은 그 비슷한 단어로 지칭하지 못했다. 아니 그는 이 단어 비슷한 부류의 것은 원로원과 로마인들 앞에서 입밖에 대놓고 꺼내지 않았다. 이는 도미티아누스 이전과 아우렐리아누스 황제 이전까지의 로마황제들도 비슷해,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원로원에게 신하 노릇이나 하라고 말을 대놓고 하지 않았다. 도리어 2대 황제 티베리우스의 경우, 동방 출신의 원로원 인사가 농담으로 "도미누스(주인님)"이라고 아부하자, 크게 노해 "이 단어는 우리 집안 노예들이 나를 부를 때만 쓰는거다! 다시는 그 단어를 사용하지 마라!"고 경고까지 했다. 즉, 로마 원수정 아래에서 도미누스와 같은 왕정 비슷한 용어는 로마와 본국 이탈리아 밖의 지중해 동부, 그것도 이 일대의 속주민들을 대상으로 장려된 용어 중 가장 과격한 용어였다. 다만, 아우렐리아누스 이후 도미누스는 황제들 입에서 공식화됐고, 디오클레티아누스 이래 공식적으로 정착됐다. 다시 말하면, 도미티아누스가 죽고도 200여 년 뒤 도미나투스(전제정) 체제 성립 이후에서야 로마 황제는 원로원과 로마시민들을 신민으로 취급할 수 있었다.[15] 하인이 도미티아누스한테 공문서가 왔으니 서명해달라고 해서 책상으로 왔는데 이는 계략이었다. 그곳에는 무장한 스테파누스와 하인들이 그를 죽이려고 대기하고 있었다.[16] 스테파누스와 공모한 하인 파르테니우스가 사전에 검을 치워버렸다.[17] 이들의 철저한 사전모의 속에서 암살이 이뤄졌기 때문에 암살자들이 황제의 침실을 습격했던 날, 도마티아누스는 무방비 상태로 암살됐다.[18] 왜냐하면 에파프로티투스가 모은 막대한 재산은 피소 음모 사건 보고서를 통해, 그 공로로 얻은 피해자들의 재산 중 그 일부였기 때문이다.[19] 로마 상류층 남녀 모두에게 가장 불명예스런 형벌로, 고인이 생전에 이룩한 모든 업적에 대한 기록을 지워버리는 것이다. 사실 이 벌은 원로원의 화풀이에 가까운 것으로, 네로도 이 벌을 받았으며 말년에 원로원과 사이가 나빠진 하드리아누스도 사후 다음 황제였던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눈물을 흘리며 원로원을 설득하지 않았으면 이 벌을 받을 뻔했다. 의외일 순 있는데, 칼리굴라는 이 벌을 받지 않았다. 사실 칼리굴라가 이 벌을 받지 않은 것은 암살 직후 워낙 상황도 급박했고, 애당초 이 황제의 암살은 원로원 안에서도 암살 당일부터 "공화정 복귀vs아우구스투스 이후 공화정 체제 유지"라는 구도에서 후자가 절대 지지를 받아, 일찌감치 암살가담자들이 반역자로 몰린 "멀쩡한 상황에서 벌어진 황제의 억울한 죽음"과 가까운 사건이었기 때문에 이 처벌을 받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 이는 요세푸스, 타키투스, 소 플리니우스, 디오 카시우스 모두 증언한 사실이므로, 칼리굴라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의외일 수 있다.(로마인들 입장에선 기록말살형 건덕지가 없는 국가원수 시해사건이었다.) 물론 공화정 회귀를 주장한 원로원 내 소수세력은 칼리굴라를 진심으로 기록말살형을 시키고 싶어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당시, 칼리굴라 외에도 선대의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도 공화정 체제의 적으로 간주해 기록말살형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살아남은 아우구스투스 직계 남녀황족을 모두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황숙 클라우디우스는 살아남았고, 그는 근위대의 지지를 업고 완전무장한 병사를 대동해 원로원에 출석했다. 이때 그는 중구난방으로 싸우는 원로원 앞에서 기록말살형을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즉, 칼리굴라 암살은 암살결행 목적부터 원로원 내 분위기까지 기록말살형 선고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배경 때문에 새 황제와 원로원 모두 이 사건을 정리한 뒤, 관련 가담자를 처리하고 서둘러 이 문제를 덮고 넘어갔다.(그럼에도 암살이 벌어진 직후, 원로원 의원 중 황제 지지세력과 황실이 고용한 게르만인 경호대, 근위대 병사들은 암살에 가담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들을 잡아 죽이고 그 가족들까지 "황제를 위한 복수"를 명분삼아 도륙냈다.)[20] 네로, 엘라가발루스의 경우에는 기록말살형이 통과되지 않았음에도 사실상 기록말살형이 그대로 집행되어 단죄받았다. 물론 이 둘은 제국을 진짜로 박살낼 뻔한 양반들이라[21] 도미티아누스는 군대에서 인기가 매우 높았다. 이유는 도미티아누스가 카이사르 이후 처음 군인들의 급여를 올려주었기 때문이다. 네르바가 트랴야누스를 후임황제로 지명한건 군대의 불만을 가라앉히기 위한 한 수단이었다.[22] 젊은 시절에는 연애결혼으로 맞이한 첫 아내 빕사니아 아그리피나, 친동생 대 드루수스 부부, 양아버지 아우구스투스와 쉬는 날 대부분을 보냈고 나이를 먹은 후에는 조카와 아들 내외 정도였다고 한다.[23] 어느 정도로 흥미가 없었는지, 아우구스투스의 지시로 참석해도 잠시 얼굴만 비추고 퇴장했다. 이는 소년 시절부터 일관된 모습이었는데 본인 이름이나 가문으로 주최한 검투사 경기, 전차 경기, 무언극 등에 얼굴도 비추지 않고, 그 근처도 방문하지 않아 로마인들에게 놀라움을 안겼다.[24] 당대, 후대 로마인들이 지적했듯 너무 깨끗해서 재미없는 것이 문제였다고 한다. 어느 정도였냐고 하면 평생 순결을 맹세한 베스타 여사제 수준이라고 반놀림을 당할 정도였다. 그래서 현대 학자들은 티베리우스를 공적, 사적으로 너무 엄격한 청교도적인 로마 황제라고 부르기도 한다.[25] 티베리우스는 젊은 시절 이집트와 아프리카를 빼면 안 가본 속주가 없다고 할 정도로 많이 돌아다녔으며, 후계자로 낙점되기 전 고위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양부 대신 전쟁터에 숱하게 나가본 경험이 있는 인물이었다. 정치가와는 영 동떨어진 과묵한 성격이 문제라서 그렇지 정치 감각도 뛰어났다.[26] 오죽하면 티베리우스가 죽자 로마 시민들이 환호하며 '티베리우스를 테베레 강에 던져버리자!'고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참고로 고대 로마에서 시신을 테베레 강에 버리는 처벌은 부관참시와 동급의 매우 무거운 형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