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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교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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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정유재란 전투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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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일본군 대규모 상륙), 일본군 진격 시기
1592년 <colcolor=#f0ad73,wh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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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朝]: 조선군의 승리 / [日]: 일본군의 승리 / [明]: 명나라군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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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교성 전투
倭橋城 戰鬪
<colbgcolor=#C00D45,#01454F><colcolor=#f0ad73,white> 시기 1598년 (선조 31년) 10월 19일 ~ 11월 5일
(1598년 음력 9월 20일 ~ 10월 7일)
장소

조선 전라좌도 순천도호부 순천왜성
원인 조선-명연합의 사로병진책
교전국 <rowcolor=black> 일본
(수세)
조선-명 연합
(공세)
주요 인물
지휘관

파일:고니시 가몬.svg 고니시 유키나가
파일:고시치노기리몬.svg 오야노 다네모토
파일:고시치노기리몬.svg 오야노 다네하카루[1]
파일:고시치노기리몬.svg 마츠라 시게노부
파일:고시치노기리몬.svg 아리마 하루노부
파일:고시치노기리몬.svg 오무라 요시아키
파일:고시치노기리몬.svg 우치노미야 쿠니츠나
파일:고시치노기리몬.svg 고토 하루마사
파일:고시치노기리몬.svg 스모토 미치타카
조선 지휘관

파일:조선 어기.svg 이순신 (충무공)
파일:조선 어기.svg 권율
파일:조선 어기.svg 이순신 (무의공)
파일:조선 어기.svg 황세득
파일:조선 어기.svg 이언량
파일:조선 어기.svg 배흥립
파일:조선 어기.svg 방덕룡
파일:조선 어기.svg 류형
파일:조선 어기.svg 고득장
파일:조선 어기.svg 손문욱
파일:조선 어기.svg 이영남
파일:조선 어기.svg 우치적
파일:조선 어기.svg 나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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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조선 어기.svg 이청일
명 지휘관

파일:명나라 국기.png 유정[2]
파일:명나라 국기.png 진린
파일:명나라 국기.png 등자룡
병력 일본군: 14,000여 명 연합군: 51,000여 명
- 육군: 36,000여 명
- 수군: 15,000여 명
피해 사상자: 3,000명
전선 30척 침몰
전선 11척 나포
사상자: 1,600명[3]
결과 일본의 전략적 승리[4]
영향 노량 해전 발발[5]
1. 개요2. 진행 및 경과 3.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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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임진왜란 시기 1598년 음력 9월 20일 ~ 10월 7일에 조명연합군과 일본군이 얽혀 싸운 격전. 순천왜성 전투(順天倭城 戰鬪)라고도 한다.

1598년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였다. 그 직후 오대로들은 히데요시의 죽음을 비밀로 하고 조선에 주둔한 군대를 철수시킬 것을 의결한다.

그러나 비밀유지는 실패로 돌아갔고 이것이 조선측에도 알려지면서 음력 9월부터 조명연합군은 울산왜성가토 기요마사를 공격목표로 한 동로군, 사천왜성의 시마즈 요시히로를 타겟으로 한 중로군, 순천왜성고니시 유키나가 군을 타겟으로 한 서로군을 편성하여 남진, 왜군을 추격하는 전략을 세운다. 한편으로 진린의 명나라 수군과 이순신의 조선 수군을 하나로 묶어서 수로군을 따로 편성한 다음 전라도 부터 경상도 까지 남해안을 따라서 왜군을 밀어내는 전략도 세운다. 이를 사로병진작전(四路竝進作戰)이라 한다.

시도는 좋았는데, 왜성을 제대로 경험해 본 적 없는 군대를 집중 투입하지 않고 몇만씩 나눠서 동시다발적으로 공략을 하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피해가 커지자 명나라 장수들은 싸움보다는 알아서 물러날 때까지 대기하는 쪽으로 행동하기 시작하게 되면서 작전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게 되었다.

서로군 제독 유정은 8월에 조선에 들어와 군대를 거느리고 한성, 수원, 전주를 경유하여 남하한 후 9월 19일 순천 왜교성을 공략하게 된다. 여기에 도원수 권율과 전라병사 이병악 등이 이끄는 1만여명의 조선군이 포함되어 총 3만 6,000명의 지상 병력이 동원되었다.

수로군은 조명연합 함대를 편성하여 7월 24일 절이도 해전에서 승리 후, 9월 말에 조명연합육군과 연합 전선을 구축하게 된다. 지상군 3만 6천, 수군 1만 5천 합하여 5만 1천명의 군대였다.

2. 진행 및 경과

육상에서 유정 본인은 순천에서 육로로 진군하여 먼저 계책으로 회담을 진행한다고 속이고 고니시 유키나가를 사로잡으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고니시 유키나가 본인이 나타나지 않아서[6] 계책이 실패한 후 벌어진 전투에서는 공성병기를 거느리고 성을 공략했으나, 공성병기가 너무 무겁고 왜군이 조총을 쏘아대는 바람에 성에 접근도 하지 못했다. 이후 유정이 대장기를 내리고 아무런 지휘도 내리지 않았던 데다가 그 병졸들은 공성병기에서 잠을 자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를 틈타 일본군이 성을 내려와 명군을 공격하자 부총병 오광이 이끄는 군대가 놀라서 도망쳤고[7] 이방춘이 이끄는 군대가 이를 겨우 막아냈다. 이 날 명 육군의 전사자는 800명이었다. 게다가 유정은 그 와중 병사들에게 어떤 명령도 내리지 않았고 어떤 조선 여인이 왜군은 수군과 싸우느라 정신이 없으니 성을 공격한다면 점령할 수 있을 거라고 했지만 유정은 움직이지 않았고 병사들과 명의 무장들은 유정을 업신여겼다. 이후 유정은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뇌물을 받고서 남원에서 기생질이나 하고 남원에 관우 묘나 만들면서 전쟁을 회피한다.[8]

결국 이순신진린의 수군만이 단독으로 군대를 움직이고 장도 해전(왜교성 전투)이 일어났는데, 이순신은 아군이 뒷통수를 친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왜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다.[9] 이후 동일원의 패전 소식을 듣고 유정 자신도 병사를 이끌고 물러난다.[10] 그러나, 음력 10월 3일 유정이 고니시 측의 뇌물에 군사를 움직이지 않았고, 결국 수군만이 단독으로 왜교성을 공격한다. 수군은 공성을 준비한 부대는 아니었기 때문에 육군이 주저 앉은 시점부터 이미 작전은 실패라고 봐야 했다. 전투의 성격은 정박한 왜 수군과의 해전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 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장도에서 30여 척의 왜선을 격침, 11척을 나포, 왜군 3000명 사상하는 등 전과를 올린다.[11]

그러나 이전의 수군 전투와 달리 조명연합군 측 피해가 비교적 컸다. 명군의 경우 왜군의 포위망에 걸려들어 800여명의 사상자가 나왔으며, 상황이 이렇게 되자 명군을 구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순신 역시 본래 퇴각을 계획했던 시간에 퇴각하지 못하고 현장에서 사태를 관망하다 썰물 때를 놓쳐 대장선을 뻘밭에서 줄로 끌어 빼내어 퇴각하는 등 고전하였으며, 명군을 구하러 급히 편성했던 별동대와 그 지휘관을 맡았던 사도 첨사 황세득과 군관 이청일 등 조선 수군 130여명 역시 전사했다. 아무래도 해당 지역의 지리 및 왜군의 전투방식을 잘 알던 조선 수군에 비해서 명나라 군대는 잘 몰랐을 게 분명하고, 그걸 전해주기에는 서로 말이 달라 쉽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조선의 판옥선과 달리 명나라 수군의 전선은 왜선에 비해 압도적이지 못했다.[12]

여담이지만 해상에선 이순신이 분전했기 때문인지 육지에서 유정이 보였던 소극적인 태도때문인지 정확하지는 않으나 조선왕조실록의 이 전투에 관한 기록에는 이덕형이 중국군의 패전에 관한 일을 보고한다는 제목으로 되어있고 그기사에도 유정의 몰상식한 행위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13]

3. 대중매체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1회, 99회 ~ 100회에서 나오는데, 촬영을 초기에 해서인지 전투 신이 확실히 실감이 나며 전투의 긴장감도 느껴지는 것이 공을 들여 찍은 티가 난다.[14] 여기서 고니시 유키나가는 조선인 포로들을 총알받이로 내몰아 이순신을 제거하려 했지만 처음에 살려달라며 소리지르던 포로들이 이순신이 공격을 주저하다가 위기에 처한 것을 보고는 마음을 바꿔 '차라리 짐은 되지 말자'며 일본군에게 반항하면서 자신의 대장선이 공격당해 바닷물에 빠지는 굴욕을 당했다. 전투 후 조선 수군은 전체적으로 쓸쓸한 표정을 짓는 것이 승리자의 모습과는 영 거리가 멀다.[15]
1598년(무술년) 10월 3일. 조·명 연합군은 고니시 유키나가가 농성 중이던 순천 왜교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매수된 명나라 육군 제독 유정은 협공 약속을 어겼고, 이에 수군 단독으로 전투를 치렀다.
이 전투에서 명나라 전선 30여 척이 격침되고, 명 수군 2천여 명이 전사를 했으며,
조선 수군 역시 130여 명의 전상자를 냈으니, 조일 전쟁 막바지에 입은 의외의 피해였다.

99회 ~ 100회는 1회와 대체로 비슷했으나 1회 방영 이후 설정 변경 등으로 인해 대사, 장면, BGM이 1회와는 다르게 나왔으며 새로 촬영한 일부 장면들이 추가되었다. 1화에서는 황세득이 전사할 때까지 투구를 착용하고 도끼로 싸우고 있었지만, 새로 촬영한 장면에서는 드라마틱한 연출을 위해 다리에 조총을 맞을 때 투구가 떨어지고 도끼는 전투 도중 잃어버려서 부하가 던져준 적군의 칼을 들고 싸우다 전사했다.

본작에서 감정적인 성격으로 묘사된 이영남은 황세득을 구하러 가겠다고 난리를 치며 결국 억지로 황세득을 구하러 가려다가 이순신의 지휘봉에 뒤통수를 맞고 기절하는데, 이순신 역시 어쩔 수 없이 황세득을 버리고 가면서 눈을 감고 부들부들 떤다. 황세득은 이순신의 친척(처종형)이기에 이영남보다 상심이 크면 컸지 작을 리는 없었을 것이며, 권준이 위로할 때는 전장에서 전사한 아쉬운 목숨이 어찌 그 한 사람 뿐이겠느냐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지만,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슬퍼하는 모습을 보인다.

역사에의 초대 임진왜란에서는 고니시 유키나가가 진린에게 뇌물을 줘서 빠져나갈 궁리를 하지만 그것을 충무공 이순신이 차단해버린다. 이에 빡친 고니시 유키나가는 명나라 포로 2명의 손목 4개를 베어 진린에게 보냈다. 이후 노량 해전으로 이어지고 노량 해전이 벌어지는 틈을 타 고니시 유키나가는 도망쳤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말을 베어서 식량으로 썼기 때문에 아시가루들과 똑같이 뛰어서 도망쳤다.

노량: 죽음의 바다에서 인트로로 다뤄졌다. 작중 예교성이라고 자막이 나왔다.


[1] 오야노 다네모토의 아들.[2] 유정은 형식상 지휘관이지, 싸움이 벌어지는 전장 근처도 가지 않았다.[3] 일본 측 사료에 기반한 연합 수군의 피해 규모이며, 조선 측 사료에는 황세득, 이청일 휘하 130명의 조선 수군이 전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단 조선수군측 사상자는 130여명 내외이고, 대다수의 사상자는 명나라 수군에서 나왔다. 또한 육상전에서는 유정이 이끄는 명나라의 육군이 800명의 사상자를 내었다.[4] 이순신과 진린이 이끄는 수로군은 제 역할을 했으나(장도해전), 육군을 이끌던 유정이 협조하지 않아 결국 순천을 뺏지 못한다.[5] 순천왜성에 갇혀있던 고니시는 이 전투로 인해 더더욱 혼자 힘으로 빠져나가는 건 불가능해졌고, 결국 수로군의 한 축을 맡고 있던 진린을 뇌물로 구워삼아 지원군을 요청하게 되고 이것이 노량 해전으로 가는 계기가 되었다.[6] 명나라의 병사들이 당황한 나머지 포를 쏘았고 이를 눈치챈 고니시가 성으로 도주했다.[7] 이덕형의 장계에 이 내용이 나와 있다.[8]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는 1598년 10월 6일의 내용은 권율로부터 유정의 태업을 전해듣고 분노를 금치 못하는 구절이 나온다.(...)[9] 다만 그래도 이순신의 참가 전투답지 않게 피해가 엄청 컸는데, 왜군 함선 30척을 격파하고 3000여명을 전사시켰지만, 명 함선도 30여척이 파괴당했고 2300명이 사망해 조선군도 진린과 명군을 구원하다가 130명이 전사했다. 그러니까 여전히 조선 수군만 보자면 격침 0척에 전사 130명이다.[10] 물러난 자리에는 병기와 식량이 가득했다고 한다.[11] 이것만 떼어 장도 해전으로 불린다.[12] 이후 이순신이 새로 건조된 판옥선 2척을 진린에게 기함으로 쓰라고 빌려줬다는 기록이 있다. 어떤 기록에서는 선물했다고 되어있다.[13] #[14] 촬영 때 가장 많은 인원을 동원한 전투라고 한다.[15] 일본군의 피해가 더 컸지만 결과적으로 성을 점령하지는 못했다. 일이 이 모양이 된 이유는 전적으로 뇌물에 넘어간 유정의 우유부단함과 공명심에 눈이 먼 진린의 독단 때문인데, 내레이션에서는 피해만 설명해 주었을 뿐이다. 다만 전투과정내내 진린이 공을 탐내는 모습과 유정이 공격을 거부하는 모습이 나와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하는데 무리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