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인류 원리(人類原理, anthropic principle)란 호주의 물리학자 브랜든 카터가 1973년에 제창한 일종의 사유, 철학관 또는 가설로, '인본 원리[1]', 또는 '인간 중심 원리'라고도 한다.[2]약한 인류 원리(Weak anthropic principle, WAP)와 강한 인류 원리(Strong anthropic principle, SAP)로 나뉜다. 약한 인류 원리는 대략 "지적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우주에서만 그것을 관측할 지적 생명체가 탄생할 수 있으므로, 관측되는 우주는 반드시 지적 생명체가 탄생할 만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라는 명제이며, 강한 인류 원리는 좀 더 나아가 "우주는 반드시 지적생명체가 탄생할 조건을 갖추는 것이 강제되어 있다."라는 주장을 기반으로 한다.[3][4]
물리학자들이 미세 조정된 우주나 희귀한 지구 가설에 대응해 많이 제시하는 논리이다. 다만 약한 인류 원리는 항등적인 명제, 즉 truism이고 강한 인류 원리는 truism은 아니지만 과학적으로 검증할 방법이 현재로서는 없다. 따라서 완전한 과학 이론이라기보다는 변경지대의 과학에 해당한다.[5]
2. 등장 배경
드넓은 우주에서 대부분의 환경이 인간에게 가혹[6]한데 반하여, 지구의 조건이 너무나 인간에게 호의적이고 지구는 그 존재만으로 마치 기적처럼 느껴진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인류원리가 등장했다. 이에 따르면 "우주가 이렇게 미세조정되었고 지구도 이렇게 적절한 환경에 존재해서 인류가 태어나게 되었다니, 우리는 행운아야!"라고 주장하는 것은 일종의 선택편향(selection bias)이라고 할 수 있다. 인류원리는 표본의 범위를 존재할 수 있는 우주 전체로 잡아야하는 게 아니라 지적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는 우주로 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미세 조정된 우주, 혹은 희귀한 지구라는 개념은 현재의 지구의 상태, 혹은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정해진 '정답'이나 최종적인 '목적'으로 생각하는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기인한다. 요컨대 "지구(혹은 인류)는 특별하지 않다"는 코페르니쿠스 원리(Copernican principle)를 여전히 거부하는 '심리적인 천동설'이라고 비유할 수 있다.
일련의 과정을 거쳐 여러 경우의 결과가 생길 수 있다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그 중 한 결과를 집어들고는 이 결과를 위해 그간의 과정이 끼워맞춰진 것이라 생각하면 기적적인 일로 여겨지는 것. 예를 들어 키보드의 숫자키를 아무렇게나 100만번 두드리면 2393...이라는 식으로 100만자리 숫자열이 만들어진다. 무려 10의 100만승 분의 1 이라는 사건이 일어난 셈인데, 시간만 오래 걸릴 뿐이지 사실 아무 특별할 것 없는 일이다. 그런데 이 숫자가 만들어진 걸 '정답'이나 '목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이렇게 낮은 확률의 사건은 자연적으로 일어날 순 없으니 이건 분명히 신께서 안배한 숫자야!"라고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7]
좀더 친숙한 예로, 철수가 이런 생각을 하는 걸 생각해보자. "엄마와 아빠의 인생에서 무수한 변수 중 하나라도 달랐다면 둘은 만나지 못했을 거고 나도 태어나지 못했겠지. 그러니 아빠 엄마의 인생의 경로 하나하나는 내가 태어나도록 미세하게 조정된 결과인 거야. 뿐만 아니라 엄마 아빠의 모든 조상들이 겪었던 일들도 그렇고, 결국 이 세상 전체가 나의 존재를 위해 만들어지고 조정되었던 거야. 빙하기도 베트남전도 아마존의 나비 한마리의 날갯짓까지도." 철수의 관점에서는 우리 모두 철수가 태어나기 위해 만들어지고 조정된 일개 변수일 뿐이 된다.[8]
하지만 철수가 태어났다는 건 다른 이들에게는 전혀 특별한 일이 아니다. 다른 이들의 눈에는 철수는 80억 인류 중 하나일 뿐이고, 길거리에서 스쳐지나가는 무수히 많은 동종 개체 중 하나일 뿐이며, 사실 아예 철수가 태어나지 않았다 한들 별 다를 건 없을 것이다. 철수도 지구 반대편에서 카를로스가 태어나든 태어나지 않았든 별 특별한 느낌을 갖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만약 카를로스가 "철수야, 너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과 이 우주는 나를 위해 만들어지고 조정된 미세변수일 뿐이야."라고 한다면 철수는 무슨 기분이 들까?
특정 성향의 사상가들이 지구나 인류를 '특별하게 느끼며' 미세조정 우주 같은 걸 생각해내는 것도 철수와 마찬가지로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생각해보면 이들에겐 잔인한 말이 될 수 있겠으나 이 같은 인간 중심적 사고에는 아무런 논거가 없다. 철수가 없어도 인류는 인류이듯이, 인류가 없어도 지구는 지구이며, 지구가 없는 경우의 수에서도 우주는 우주이다. 마찬가지로 만약 현생 인류가 관측하지 못한 수많은 우주를 포함하는 '공간 사물 A'가 존재한다면, 귀납논증에 의거하여 우리가 사는 우주가 없더라도 A는 A일 것이다.
위에서 카를로스가 철수에게 한 말처럼, 우주가 인간을 위해 만들어지고 미세조정되었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은 정합성을 갖는 논거가 없기 때문에 어디에든 갖다붙일 수 있다. 북극성이나 모기를 위해 지구와 인류와 우주가 만들어진 것이고, 우리 인류는 그저 모기나 북극성을 위해 만들어지고 미세조정된 변수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식으로 말이다: "모기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우주상수를 비롯한 무수한 변수들이 딱 들어맞아야 하는데 우연히 이렇게 될 확률은 0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인간을 비롯한 이 세상은 모기를 위해 설계되어 창조된 것이며, 모기가 피를 쉽게 빨 수 있도록 인간의 털이 적게 설계된 것 또한 그 명백한 증거 중의 하나이다."
한편, 경우의 수를 넘어서 흔히 확률 0이라 부르는 무한히 낮은 확률에 대해서도 같은 원리로 일어날 수 있다. 자세한 건 확률 문서 참조.
2.1. 미세 조정된 우주(Fine-tuned universe)
미세 조정된 우주 가설("Fine-tuned universe" hypothesis)이란 우주를 이루고 있는 기본적인 물질, 천체 구조, 더 나아가 생명체 등은 우주의 기본적인 물리 상수[9]들이 아주 좁은 범위에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는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우주의 등장을 위한 미세 조정의 필연적인 결과로만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주된 논지는 다음과 같다.- 최초의 우주에서 기본 입자들 사이의 네 가지 힘(중력, 전자기력, 강한 상호작용, 약한 상호작용)의 비율이 조금만 달랐더라면(예컨대 강한 상호작용이 2%만 더 셌더라면), 안정적인 원자들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고 따라서 지적인 생명체는 커녕 안정적인 천체 구조도 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 현재 우주의 밀도[10]는 정확하게 '임계밀도'라 불리는 값에 근접해 있는데, 만약 우주 탄생 초기에 이 밀도가 조금만 더 컸더라면 우주는 지적 생명체가 탄생할 틈도 없이 수축하여 빅 크런치로 멸망했을 것이고, 조금만 더 작았더라면 안정적인 천체 구조가 생겨날 틈도 없이 빨리 팽창하여 빅 프리즈로 멸망했을 것이다. [11]
- 현재 우주에서 관측되는 암흑에너지의 밀도는 양자장론에서 예견되는 진공에너지의 대략적인 값에 비해 터무니없이 작다.(1050-120배)[12] 하지만 반대로 암흑에너지가 이렇게 약했기에 현재 우주는 아직 팽창하여 흩어지기 전에 은하, 항성과 같은 구조들을 형성할 수 있었다.
이렇게나 정밀한 조건을 만족해야만 현재의 우주가 존재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 모든 조건이 우연히 만족되었을 확률은 매우 낮다. 기적으로 봐도 무방한 정도. '미세 조정'이라는 명칭의 늬앙스로 인해 언뜻 들으면 강한 인류 원리를 긍정하는 것으로 들릴 수 있지만 이 개념 자체는 단순히 현재 우주가 매우 좁은 파라미터들의 조합으로만 존재할 수 있다는 '현상'에 대한 기술일 뿐이며 조정자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은 아니다. 미세 조정된 우주 가설은 지적 설계 등의 원인론과는 달리, '그렇다면 누가(또는 어떤 원리가) 우주를 미세 조정했는가?'나 '무엇 때문에 미세 조정되었는가?' 등에 대해서는 불가지론의 여지를 남겨 둔다.
2.2. 희귀한 지구(Rare-Earth)
희귀한 지구 가설("Rare-Earth" hypothesis)이란 미세 조정된 우주 가설과 궤를 같이 하는 가설로, 인류와 다른 생명체가 서식하는 지구 및 태양계, 더 나아가 우리 은하 등의 환경이 각각 천문학적인 규모에서 너무나도 적절한 조건을 갖고 있으며, 이는 관측 가능한 우주의 다른 천체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조건들이라는 것이다. 이 가설은 2000년에 《Rare Earth: Why Complex Life Is Uncommon in the Universe?》라는 책이 출간되면서 본격적으로 지명도를 얻었다. 영문 위키피디아의 'Rare earth hypothesis' 문서에서는 대략 다음과 같은 주장들을 희귀한 지구 가설의 특징으로 들고 있다.- 지구는 적절한 은하계의 적절한 위치에 있다. 은하 중심부에는 초거대블랙홀이 있을 뿐만 아니라 별의 밀도가 높아 초신성 폭발 또는 블랙홀의 감마선 폭발에 생명체가 몰살될 가능성이 높다. 반대로 은하 외곽 쪽은 무거운 원소들의 밀도가 더 낮기 때문에 지열을 유지해줄 방사성 원소와 문명 발전에 필수적인 중금속이 부족해진다. 특히 철보다 더 무거운 원소들은 초신성 폭발을 통해서만 생성되므로, 항성의 생성-소멸이 적은 구역은 해당 원소들의 비율이 적을 수밖에 없다.
- 지구는 적절한 종류의 항성 주위를 적절한 거리에서 돌고 있다. 태양의 질량이 너무 컸다면 단백질을 파괴하는 자외선이 문제가 되었을 것이고, 별의 진화가 너무 빨라져 지구 상에서 진화를 통해 인간이 탄생하기까지의 기간인 40억 년의 시간을 벌기 힘들었을 것이다. 반대로 질량이 너무 작았다면 잦은 플레어 및 너무 좁은 골디락스 존, 그리고 조석 고정으로 인해 생명 탄생에 지장이 있었을 것이다. 또한 태양과 유사한 항성들 가운데서도 강력한 플레어를 수시로 내뿜는 별들이 간혹 있으므로 항성이 태양과 비슷하다고 해서 모두 생명 탄생에 적합한건 아니다.
- 지구와 함께 태양계를 구성하는 다른 행성들이 너무나 적절하다. 근처의 수성, 금성, 화성은 작아서 지구의 궤도에 악영향을 주지 않으며, 태양에 끌려서 안쪽까지 들어갔다 나오는 소행성이나 혜성의 궤도를 자주 비틀지 않는다. 반대로 바깥쪽의 행성들, 특히 목성은 큰 덩치와 중력으로 외부에서 오는 위험물질(혜성 따위)들을 빨아들여서 내행성들을 보호하는 방파제
탱커역할을 한다. 목성 그 자체로 소행성을 빨아들일 뿐 아니라 거대한 중력으로 엄청난 영역의 라그랑주 포인트를 만들어내어 소행성을 붙잡아 놓는다. 쉽게 말해 목성방향에서 오는 소행성 뿐만 아니라 태양 반대편에서 오는 소행성도 모조리 중력에 묶어 놓는다. - 지구의 궤도는 안정적이다. 다른 행성이랑 공전 궤도가 겹친다거나 거대 가스 행성이 지나치게 무겁다거나, 혹은 태양에게 동반성이 있었다면 행성 사이 복잡한 중력 섭동으로 인하여 가스 행성 한둘만 남기고는 거진 행성계에서 퇴출된다. 지구의 궤도는 더욱 불안정해져 극단적인 온도 변화를 겪거나 탄생 후 얼마 되지 않아 태양계 바깥으로 튕겨나갔을 것이다.
- 지구는 적절한 사이즈의 적절한 유형의 행성이다. 목성형 가스 행성에서는 그것이 가스로 구성되어 있는 만큼 생명체를 기대하기가 어렵다. 지구형 암석 행성도 작은 행성은 내부가 더 빨리 식어버려서 맨틀의 대류가 일어나지 않으며 따라서 자기장이 없어지고 대기가 항성풍에 날아가 버린다.(=화성) 지구보다 더 큰 지구형 행성의 경우는 태양계에 그 예가 없어서 쉬이 결론지을 수는 없지만, 빠른 자전 속도와 두꺼운 대기층을 가지게 되어 지표면은 시도 때도 없이 초강력 폭풍이 몰아치는 환경이 되었을 것이다. 지구는 암석 행성이 가질 수 있는 질량의 상한선 근처(지구 질량의 약 2배)에 있으며 이보다 더 커지면 강한 중력으로 대기를 붙잡아둘 수 있게 되어 해왕성형 행성이 되어버린다.
- 지구 상의 물의 총량과 지표면의 고저차이가 적절하여 바다와 육지가 적절한 비율로 형성되었다. 특히 바다는 행성의 기온을 적절하게 유지하는 데 있어서 매우 큰 역할을 한다. 바다의 면적이 적으면 그만큼 행성의 기후 변화가 극심해서 생명체가 살 수 있는 공간이 한정되고, 그만큼 진화의 기회도 적었을 것이다. 헌데 반대로 바다가 너무 많았다면 육상생물이 진화할 기회가 너무 적었을 것이다. 물이 더 많거나 지표면이 더 평평했었다면 표면이 전부 바다로 뒤덮인 바다행성이 됐을 것이다. 돌고래 같은 고도의 지능을 가진 생명체가 나타났을 수도 있지만, 불, 전기를 사용하고 천체를 관측하며 달에도 사람을 보낸 인류문명 같은 유형의 문명을 이루었을 거라고 보기는 어렵다.
- 지구는 비슷한 행성들 중에서도 이례적으로 강한 자기장을 가지고 있다. 화성 테라포밍이 어려운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가 자기장이 너무 약해 대기를 유지하기 어려움임을 생각할 때 우주선들을 막아줄 수 있는 자기장은 생명체 탄생에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지구는 크기 대비 자기장의 세기가 우주적으로도 매우 이례적으로 강하다. 이는 지구의 형성과정에서 우연히 테이아라는 소형 행성과 충돌하여[13] 지구 맨틀과 핵에 많은 에너지가 공급되었기 때문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러한 특수한 지구의 조건이 생명체 탄생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 위의 자기장 담론과 연결되는 내용으로, 지구는 아직 맨틀과 핵에 많은 에너지를 가지고 있으며 이는 맨틀의 대류를 통해 판의 움직임을 유발한다. 이러한 지각 변동은 생태계의 다양성을 불러일으켰으며, 지구 내부의 뜨거운 열은 열수분출공이라는 생명 탄생의 요람을 또한 만들어내었다.
- 지구의 위성인 달의 크기가 너무나도 적절하다. 큰 위성은 큰 조석간만의 차를 초래하며, 이것은 다시 생명 탄생의 후보지 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원시 지구의 바닷가 거품 웅덩이(원시수프)들을 많이 만들어냈을 것이다. 또한 달의 큰 크기는 지구의 내부를 적절히 휘저어 자기장의 유지에도 도움을 준다.
이런 너무나도 적절한 조건과 더불어 언급되는 것이 드레이크 방정식이다. 희귀한 지구 가설의 지지자들은 이것을 조금 더 바꾸어서 희귀한 지구 방정식을 만들었으며, 여기에 포함되는 변수들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 은하 속 생명체 거주가능 영역에 존재하는 항성의 비율
- 그 항성들 중에서 행성들을 거느리고 있는 비율
- 그 행성들 중에서 가스형 행성이 아닌 행성의 비율
- 지구형 행성들 중에서 미생물 수준 이상의 생명이 탄생한 행성의 비율
- 그 행성들 중에서 복잡한 생명이 탄생한 행성의 비율
- 그 행성들의 수명 중 다세포 생물이 살아갈 만한 기간이 차지하는 비율
- 그런 조건을 만족하는 행성들 중에서 거대한 위성을 갖고 있는 행성의 비율
- 그 행성들 중에서 행성계 속에 거대한 가스 행성을 지니고 있는 행성의 비율
- 그 행성들 중에서 생물의 대량 절멸을 겪지 않은 행성의 비율 (근데 우리도 대여섯 번 겪긴 했다)
...이것들을 모두 만족하는 행성이 과연 우주에 얼마나 많겠느냐는 것이다.
딱 보기에도 알겠지만 희귀한 지구 가설을 거꾸로 뒤집어 보면 "그러니까 외계인은 없을 거야 아마"라는 결론도 나온다. 실제로 희귀한 지구 가설은 외계인 떡밥을 다룰 때 종종 등장하며, 종종 미세 조정된 우주 논증을 거꾸로 뒤집는 듯한 방식으로 쓰이기도 한다. 즉, 미세 조정된 우주는 (또 다른 외계인이라 할 수 있는) 인류에게 너무나도 호의적인 우주를 그린다면, 희귀한 지구 가설은 고등 생명체를 잉태하기에는 너무나 가혹하고 적대적인 우주를 그리고 있는 셈.
이로 인해 희귀한 지구 가설은 페르미 역설의 해결책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우주 문명이 발견되지 않는 원인은 생명체에게 호의적인 환경이 극도로 희귀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여기서 더 발전되어 등장한 개념이 대여과기 가설이다.
한편 물리학자 S. 웹은 자신의 저서 《모두 어디 있지?》에서 페르미 역설을 소개함과 함께 외계인 존재 떡밥을 다루면서 50가지의 예상 응답을 제시했는데 "외계인은 존재할까?" 에 대한 예상 응답도 대부분 다 들어있다. 희귀한 지구 가설의 주축을 이루는 주장들을 무려 19가지로 세밀하게 분류하여 하나하나 자세하게 논의했다. 그는 여기에서 1) "우주는 무한히 넓다. 우주 어딘가에 충분한 기술력을 지닌 지적 생명체가 없을 리는 없다." 와 2) "그러나 우주는 소위 '거대한 침묵' 을 지키고 있다. 그들이 존재한다면, 우주는 왜 조용한가? 그들은 모두 어디 있는가?" 의 상반되는 현실 사이에서 결과적으로는 희귀한 지구 가설을 잠정적으로 선택하였다. 그는 에라토스테네스의 체의 형식을 빌어서 자신의 19가지의 제약조건들을 일일이 검사한 후 "역시 인류는 외톨이였다" 고 결론내렸다. 한편 그는 더 나아가서 "지구 같은 행성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 는 주장에 대해서 심지어 "그런 기대 자체가 교묘히 포장된 거만함, 내지는 잘난체와 겸손함을 동시에 달성하려는 것이 아닌가?" 라고 도발하기까지 하였다.
그 외에, 생물학계에서는[14] 유신론적 진화론자이자 캄브리아기 대폭발의 권위자인 S.C. 모리스가 희귀한 지구 가설을 지지하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해당 가설을 소개하면서 긍정적으로 가능성을 열어두는 느낌에 가깝지만, 종종 희귀한 지구 가설의 지지자로서 소개되고 있다.
이에 대한 비판은 거꾸로 "평범성의 원리" 에 초점을 맞춘다. 연구에 따르면 이미 수학적으로 지구와 비슷한 외계 행성이 우리 은하에만 수십억 개가 존재할 수 있다. 참고로 관측 가능한 범위 내에서 추산되는 은하의 숫자만 수천억 개다. 은하당 평균 수십억 개의 지구형 행성이 있다고 감안할 때, 수십억 x 수천억 개만 해도 경우의 숫자는 아득하게 늘어간다. 우리 은하가 비교적 큰 은하라는 것을 감안한다 할지라도, 이 숫자는 관측 가능한 범위 내의 우주에 있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경우의 수는 고작 수십억 개 불과하지 않다. 문명의 수도 천 단위에는 육박할 것이라는 예측이 있다. 이 희귀한 지구가설에 대한 비판의 핵심이 되는 논리는 당신들 생각보다는 흔하다는 것이다.
또한 외계인 관련 떡밥에 얽혀 있는 보다 전통적인 반박으로, 우주의 무한히 넓은 성질을 강조하는 경우도 있다. 우주의 무한히 넓은 성질은 희귀한 지구 가설에 대한 가장 확실하고 정면적인 반박이라 말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인류는 관측 가능한 우주 밖에 관측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밖에 어떤 문명이 있든, 어떤 초 우주적 존재가 있든 인류는 그것을 알 수 없다. 특히, 상대도 인류처럼 상대성 이론(정확히 말하자면 광속)을 극복하지 못했을 경우 이 경향은 더욱 심해진다.
또한 인류의 생물학적 지식이 지구에서 발견된 생물에게서만 얻어졌다는 것 역시 반증이 될 수 있다. 앞서 언급된 희귀한 지구 가설에 설득력을 주기 위한 확률은 다분히 지구 중심적이다. 인류 과학사에서 심해 열수구 생물, 혐기성 생물 등이 발견되었던 것과 그것들이 가져온 충격을 생각해 보면 된다. 이 생물들은 인간이 이전에 생각하던 '생물이 존재할 수 있는 환경'이라는 기준을 뒤집어버렸다. 당장 곰벌레를 생각해보자. 희귀한 지구 가설에선 가스형 행성을 지워버렸지만, 가스형 행성의 대기나 그 주변의 위성에서 살아가는 생명체가 없다는 보장을 할 수는 없다. 즉, 희귀한 지구 가설에서는 어디까지나 지구의 환경이 아니면 생물체가 탄생하고 생존할 수 없다는 전제가 깔려있으나, 그것은 역으로 지구에서 탄생하고 생존한 생물들이기에 그런 것이라는 반론이 가능하다. 타 행성에서는 그 행성의 환경에 알맞은 생물이 탄생할 수 있다는 것.
궤도 안정성을 확대해석해서 아예 지구의 궤도가 약간만이라도 더 타원궤도였다면 화성처럼 연간 기온차이가 수십 도에 이르러 생명체가 번성할 수 없다는 내용도 널리 퍼져 있으나 이에 대한 근거는 더더욱 없다. 당장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부터가 연간 수십 도에 달하는 연교차를 보이지만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들은 멀쩡하게 잘 살고 있으며, 예시로 든 화성 같은 경우는 내부가 빨리 식어 행성자기장을 구현할 동력원이 사라지면서 태양풍에 무방비하게 노출된 화성 대기와 바다가 그대로 우주로 쓸려나가며 사막화가 진행된 것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외계 행성 문서 중 3.5번째 문단에 언급되어 있다.
더불어, 인류의 존재 자체가 이미 외계 생명에 대한 하나의 긍정적인 신호로 간주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도 많다. 이는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쉽다.'라는 생각의 연장선에 있다. 하지만 도박사의 오류를 생각해 보면 인류의 존재가 외계인의 존재를 긍정할 증거로 사용되기에는 다분히 불충분하다.
또한 아이작 아시모프는 희귀한 지구 가설에 대한 반박하는 듯한 내용을 나이트폴이라는 소설의 인물의 대사로 몇 문장 집어넣었다. 해당 소설의 배경은 항성이 7개인 행성이라서 낮이 유지되는데, "항성이 1개뿐인 행성이 있다면, 항성의 빛이 도달하지 못하는 시기가 있으니까, 생명체가 생길 수가 없지 않냐"라는 식의 대사가 등장인물의 입에서 나온다. 위의 고균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불가능하다 생각하는 환경에서도 생명의 분화가 가능할 수 있다는 것. 이는 반증가능성 등의 개념과도 관련이 있다. 희귀한 지구 가설이건 그것에 대한 반론이건, 현재 인류의 지식과 기술력, 관측 수준에서는 저 가설들이 옳은지 아닌지에 대한 답을 내기는 힘들다.
3. 상세
3.1. 약한 인류 원리(Weak Anthropic Principle)
우주가 관측되려면 반드시 그 안에 지적이고 의식을 가진 생명체가 있어야 하며, 따라서 우리 우주가 지적 생명체가 탄생할 수 있게끔 '미세조정'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은 그리 놀랍지 않다는 원리이다. 즉, 지적인 생명체가 발달할 만큼 '좋은' 조건이 주어지지 않은 우주는 관측되지도 않고 멸망했을 것이고, 따라서 관측되는 우주는 필연적으로 지적 생명체를 가질 수 있는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는 뜻.비유를 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당첨번호가 정해진 상태로 발급되는 복권들이 있는데, 이 복권들을 모종의 방법으로 스캔해서 개봉하지도 않고 그 결과를 알 수 있는 기계가 있다. 이 기계는 수백만 장의 복권들을 읽은 뒤에, 단 한 장의 당첨 복권만을 통과시키고 나머지는 버린다. A와 B는 기계를 통과한 유일한 복권을 뜯어서 확인해보고, 당첨번호가 적혀있는 것을 확인한다. 그리고 A는 자신이 엄청난 행운아이며 복권에 당첨된 것은 신이 내린 축복이라고 확신하고, B는 기계를 분해해서 그 작동 원리를 파헤치려고 한다. 이 상황에서 당신은 누가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가?
복권들은 우주, 당첨은 지적 생명체의 존재 여부, 당첨번호는 지적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게 하는 우주의 기초 상수, 기계는 우주의 작동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복권이 기계를 통과했으니 당연히 거기에 당첨번호가 적혀있을 것이고, 따라서 A는 절대 행운아가 아니라 필연적으로 당첨번호를 가진 것이라고 판단내릴 것이다.
생각해보면 수백만 장의 복권 중에 당첨 복권이 단 한장만 있어도 기계는 그 복권을 통과시킬 것이고, A와 B는 당첨 복권을 갖게 된다. 마찬가지로 다중우주론의 여러 우주 중에서 단 하나의 우주만이라도 지적 생명체가 살 조건을 갖추고 있다면, 그 우주에서 시간이 지난 후에 지적 생명체가 탄생할 것이다. 이 생명체가 자신의 우주에서 당첨번호를 확인하게 되는 것이 필연적이라는 것이 바로 약한 인류 원리다.
이는 어떠한 과학적인 관찰 없이 논리로만 전개된 명제이기 때문에 반증 불가능(unfalsifiable)하며, 따라서 과학 이론이 아니다. 그저 하나의 항등적인 명제일 뿐이다. 다시 말해 "1=1"라는 항등식과 같아서, "어째서 그러한가"를 따지는 것 자체가 멍청한 접근이라는 뜻이다.
단적으로 말해, "어떻게 우리 우주는 이렇게 인간이 탄생할 수 있도록 완벽하게 미세조정되었는가?" 하는 질문은 "어떻게 1은 1과 완벽하게 똑같도록 미세조정되었는가?" 하는 질문과 같다. 질문 자체가 답할 필요도 탐구할 가치도 없다.
3.2. 강한 인류 원리(Strong Anthropic Principle)
Strong, 강한이라는 뜻 그대로 인류 원리의 기본 개념을 강하게 주장하는 것으로 우주는 이를 관측하는 생명체가 언젠가 등장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이다. 즉, 우주의 모든 법칙들이 우리에게 유리하게 설계되어 있기 때문에 우주는 처음 생겨났을 순간부터 우리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었다는 것. 약한 인류 원리와는 다르게 이쪽은 항등 명제가 아니며, 반증 불가능한 주장에 해당한다.이 원리를 계속 파고들다 보면 결국에는 지적 설계자로 이어지기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그 예로 이 개념에 쏟아진 비판 중의 하나를 소개한자면, "이런 우호적인 환경을 만들 때에 왜 하필 우주의 아주 작은 부분인 조그만 행성, 그리고 그 중에서도 조그마한 영역에서만 일부 생물에게 우호적인 영역을 만들었는가[15]"이다.
4. 비판
"약한 인류 원리는 단순히 동어반복(tautology)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통해 우리가 아직 모르는 어떠한 것도 설명할 수도 없고 예측할 수도 없다. 강한 인류 원리는, 그저 불필요한 추측일 뿐이다.
In its weak version, the anthropic principle is a mere tautology, which does not allow us to explain anything or to predict anything that we did not already know. In its strong version, it is a gratuitous speculation."
존 어만, 에르넌 맥멀린, 헤수스 모스테린
In its weak version, the anthropic principle is a mere tautology, which does not allow us to explain anything or to predict anything that we did not already know. In its strong version, it is a gratuitous speculation."
존 어만, 에르넌 맥멀린, 헤수스 모스테린
- "인류" 원리라는 이름 때문에 비판받기도 한다. 내용 자체는 지적 생명체가 인류이건 아니건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인류"라는 이름을 붙인다는 건 꽤나 인간 중심주의적으로 들린다는 것. 자칫 인간 원리가 마치 "우주는 인간을 위해서 존재합니다!"라는 인간 중심주의적인 사상인 것처럼 오해할 수 있다. 물론 위키피디아의 Anthropic principle 항목만 참고해보면 알겠지만 전혀 그런 내용이 아니다. 이름과 실제가 다른 것의 예시 중 하나가 될 수도. 여기서 인류라 함은 관찰자로서 지적생명체의 존재를 일반적으로 일컫는 것이라 생각하자.
4.1. 약한 인류 원리에 대한 비판
- 우주나 지구의 희귀성에 관한 질문들에 대해 과학적인 대답을 내놓지도 않으면서 오용된다는 문제점이 있다. 즉 적절한 대답을 찾지 못할 때마다 툭툭 튀어나오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적 명제라는 것.
- 위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는 약한 인류 원리의 본질을 생각해볼 때 너무 당연한 귀결이다. 약한 인류 원리란, 주어진 질문 자체가 전혀 과학적이지 않고 아무런 가치가 없는 질문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원리이기 때문이다. "1=1"라는 식이 있을 때, 어째서 "1"과 "1"이 같은가를 고민하는 것은 수학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1"은 "1"로서 정의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군가가 "왜 1=1인가?"라고 질문할 경우, "그렇게 정의되었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정확히 동일한 논리적 구조에 따라, "왜 우리 우주는 인간이 탄생할 수 있도록 되어있는가"에 대한 답변은 "그야 질문하는 당신이 인간이니까" 외에는 불가능하다.
- 인류가 아직 알지 못하는 생명체의 존재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다른 조건을 가진 다른 행성에 있는 생명체가 어떤 행태를 띨지는 추정밖에 할 수 없다. 생명체의 예가 더 많으면 좋겠지만, 우리에게는 그런 예가 없다. 그리고 전자의 질량, 전자기 상호작용의 강도, 물리학 법칙이 다른 우주에서 생명체가 어떤 형태를 띨지에 관해 추정하는 것은 더더욱 곤란하다. 우리는 단순히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다른 환경 아래서는 일종의 생명체가 생기지 않을지 어떨지 말할 수 없다.
우리 우주의 다른 행성은 물론 물리적 매개변수들이 다른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우주에서 다른 어떤 형태의 생명체도 존재할 수 없음을 증명할 부담은 우주가 초기 생명체를 위해 정교하게 조율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유신론자들에게 있다. 그들은 그런 증거를 내놓은 적이 없고, 그런 증거를 찾는 일이 가능할 것 같지도 않다.
사실 정교한 조율 논증 전체가 궁극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내친구 마틴 와그너는 모든 물리적 매개변수가 전능한 신과는 무관하다며 토를 단다. “그가 스스로 원했다면, 우리를 철저한 진공 속에서 살도록 창조할 수도 있었을 텐데.”
빅터 J. 스텐저, “신 없는 우주”, 김미선 옮김, 바다출판사, 2013, P.192~P.193
간단히 말해 우리는 우주를 구성하는 매개변수가 다른 우주나, 다른 환경조건을 가진 행성을 아직 경험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미세 조정된 우주나 희귀한 지구 가설을 주장하기에는 너무 이르다는 것이다. 지구나 현존하는 우주 외의 환경에서 어떠한 형태의 생명체가 존재할지는 알 수 없다.우리 우주의 다른 행성은 물론 물리적 매개변수들이 다른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우주에서 다른 어떤 형태의 생명체도 존재할 수 없음을 증명할 부담은 우주가 초기 생명체를 위해 정교하게 조율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유신론자들에게 있다. 그들은 그런 증거를 내놓은 적이 없고, 그런 증거를 찾는 일이 가능할 것 같지도 않다.
사실 정교한 조율 논증 전체가 궁극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내친구 마틴 와그너는 모든 물리적 매개변수가 전능한 신과는 무관하다며 토를 단다. “그가 스스로 원했다면, 우리를 철저한 진공 속에서 살도록 창조할 수도 있었을 텐데.”
빅터 J. 스텐저, “신 없는 우주”, 김미선 옮김, 바다출판사, 2013, P.192~P.193
- 미세조정된 우주의 확률값을 측정하는 방법론에 문제가 있다는 주장도 있다.
인류가 발생한 우연의 일치에 대한 연구 대부분이 지닌 많은 결함 가운데 한 가지는 연구자가 단 하나의 매개변수를 변화시키는 동안 다른 모든 변수가 고정되어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그들은 나아가 모든 매개변수가 독립적이라는 엄청나게 잘못된 가정을 근거로 의미 없는 확률까지 계산함으로써 이 실수를 증폭시킨다. 나는 연구할 때 모든 매개변수가 동시에 변할 수 있도록 주의를 기울인다.
물리학자 앤서니 아기레는 여섯 가지 우주론적 매개변수를 몇 자리수 단위로 동시에 변화시켰을 때 생기는 우주를 따로 조사한 결과 ‘별과 행성과 지적 생명체가 그럴듯하게 발생할 수 있는’ 우주론을 구축할 수 있었다. 물리학자 크레이그 호건도 별개로 실시한 또 다른 분석에서 유사한 결론을 얻었다. 그리고 일본 교토 대학의 이론 물리학자들은 별 형서을 위한 매개변수가 정확히 어땠는가와 상관없이 생명체를 위해 필요한 중원소들은 심지어 가장 초기의 별에도 존재할 것임을 보여 주었다.
출처 : 빅터 J. 스텐저,“신 없는 우주”, 김미선 옮김, 바다출판사, 2013, P.185
미세조정된 우주를 논할 때 단 하나의 변수만 변화시키고 다른 변수는 고정되어 있다고 가정하는데, 사실 이렇게 가정할 이유는 없다. 물론 아직까지는 우주론적 매개변수들 간의 관련성을 가정하거나 가정하지 않을 근거는 없으며 이를 가정하는 연구들에서도 그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우주론적 우연이 존재한다는 현상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물리학자 앤서니 아기레는 여섯 가지 우주론적 매개변수를 몇 자리수 단위로 동시에 변화시켰을 때 생기는 우주를 따로 조사한 결과 ‘별과 행성과 지적 생명체가 그럴듯하게 발생할 수 있는’ 우주론을 구축할 수 있었다. 물리학자 크레이그 호건도 별개로 실시한 또 다른 분석에서 유사한 결론을 얻었다. 그리고 일본 교토 대학의 이론 물리학자들은 별 형서을 위한 매개변수가 정확히 어땠는가와 상관없이 생명체를 위해 필요한 중원소들은 심지어 가장 초기의 별에도 존재할 것임을 보여 주었다.
출처 : 빅터 J. 스텐저,“신 없는 우주”, 김미선 옮김, 바다출판사, 2013, P.185
4.2. 강한 인류 원리에 대한 비판
물웅덩이가 아침에 깨어나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을 상상해 보자. '참 내게 맞는 재밌는 세상, 내게 맞는 재밌는 구멍이야. 아주 편안하게 내게 딱 맞지 않아? 사실, 내게 딱 들어맞게 존재하는 바닥의 이 구멍은 내가 여기 있도록 만들어져 있는 게 틀림없어!' 이윽고 태양이 하늘에 떠올라 공기가 덥혀지면서 그 웅덩이가 점점 작아지지만, 그 웅덩이는 아직도 이 세상은 자신이 그 구멍에 고여 있도록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생각을 놓지 못한다. 그 웅덩이는 자신이 사라지는 순간에야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나는 이런 생각을 경계해야 한다고 본다.
리처드 도킨스가 '미세 조정된 우주'를 반박한 것. 위키백과 참조
리처드 도킨스가 '미세 조정된 우주'를 반박한 것. 위키백과 참조
우주 혹은 지구의 환경이 인류의 탄생 및 지속에 우호적이도록 의도적으로 설계된 것인지에는 많은 의문이 따른다. 인류가 등장하기까지 지구는 수십 번의 크고 작은 대멸종을 거쳐 왔음이 확인되고 있으며, 현대 인류에게는 여전히 환경파괴, 기후 변화, 핵전쟁, 소행성 충돌이나 감마선 폭발 등에 의한 종 단위의 멸종 위협이 도사리고 있다.
지구가 지적 생명체가 탄생하고 번성하기에 가장 이상적인 환경인지조차도 알 수 없다. 아직까지 생명체가 발현한 행성으로는 지구 이외의 사례가 없기 때문이다. 대여과기 가설에서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인류는 지독한 악조건을 뚫고 우연히 탄생한 지적 생명체이거나, 혹은 앞으로 곧 멸망해버릴 일시적인 이상점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리처드 도킨스가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지구 환경을 지나치게 우호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로또 복권에 5번 연속으로 당첨되었다고 해서 다음에도 당첨된다는 보장은 없듯이, 지구가 여태까지 인류애게 우호적인 환경을 제공해왔다고 해서 미래에도 그럴 것이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천문학적 스케일에서 보면 지구의 생물권은 너무나도 연약하기 때문에 약간의 변화만으로도 언제든지 대멸종이 딕칠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모든 생물이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 따라서 기후 변화, 자원 고갈등의 위기를 맞닥뜨린 현 상황을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마냥 낙관하는 것은 위험하다.
우주상수들이 누군가에 의해 조정되었다고 생각할 이유 또한 없다. 우리는 아직 우리 우주 바깥을 관측할 수 없으며 우리 우주 이외에 다른 우주가 있는지 없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주에 시초가 있다는 것을 알며 또한 우주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도 안다. 만약 우주가 만들어지고 소멸하는 일이 무한 번에 가까운 횟수로 일어난다면 우리 우주와 같이 정밀하게 조정된 상수를 갖는 우주가 생길 수도 있다. 조정자를 가정하지 않아도 우연에 의해 적당한 상수를 갖는 우주가 생길 수 있으니 조정자가 없다면 적당한 상수를 갖는 우주도 없다는 주장을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
조정자가 있다는 주장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조정자를 상정하지 않았을 경우 불가능한 현상의 존재를 입증해야 한다. 즉, 적당한 상수를 가진 우주는 조정자가 있을 때에만 생성될 수 있으며 다른 가능성은 없다라는 것을 입증해야 우주상수를 근거로 조정자의 존재를 받아들일 수 있다. 이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서는 다른 가능성이 있다는 것만 보여도 된다. 우주의 생성과 소멸이 무한 번 반복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다른 가능성이 있으므로 조정자의 주장을 받아들일 이유는 없다.
결정적으로 지적설계와 비슷하게 조정자는 누가 설계했는지 혹은 어느 '이상적인' 공간 덕분에 등장했는지 설명할 필요가 있다. 이는 미세 조정된 우주에도 해당하는 비판이다.
5. 관련 문서
[1] 한자어를 사용한 번역 명칭으로 인본주의와는 전혀 관계가 없으니 구분할 것.[2] 그 외의 표현으로서, 영국의 수리물리학자이자 유신론적 진화론자인 존 폴킹혼 경은 자신의 저서에서 인류 원리를 언급하면서, 어쩌면 이것을 탄소원리로 바꾸어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인류원리, 인류학적 원리, 인간 중심 원리라는 표현도 있다.[3] 우주를 예로 들었지만, 지구가 되어도 상관없다.[4] '인류'를 '나'로 치환해서 유아론적인 비유를 들자면, "내가 태어날 세계만 내가 경험할 수 (혹은 살아갈 수) 있으므로, 경험할 수 있는 세계는 반드시 내가 태어날 수 있는 세계이다.", "내가 태어나서 경험하지 않을 세계는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으므로, 내가 태어나서 살아가는 세계만이 의미있는 세계이다."[5] 결국 이 이론에서의 관측이란, 전우주적인 광범위한 관측 및 상호작용으로 인해 고전역학이 실질적으로 적용되는 거시적 차원을, 관측자를 나 하나로 국한한 변수없는 사고실험 속 양자역학에 가깝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당신이 달을 보기 전에는 달이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라는 비판을 극단적으로 긍정하는 이론인 셈.[6] 지나치게 뜨겁거나, 차갑거나, 중력이 과하거나, 산소가 없거나, 방사선이 과하거나 등.[7] 가령 창조론자들은 진화론을 공격하기 위해 "1/10^50보다 작은 확률의 사건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다"는 '보렐의 법칙'을 인용하곤 하는데, 실제로는 이렇게 매우 작은 확률의 사건들이 늘상 일어나고 있다. 단지 예상할 수 없는 일들이라서 의미가 없을 뿐. 물론 이론상으로는 적은 시도로도 찍어서 맞힐 수도 있긴 하다. 애초에 '보렐의 법칙'이란 게 '만유인력의 법칙'같은 자연법칙이 아니라 '머피의 법칙'처럼 그냥 하나의 아이디어일 뿐이다.[8] 이와 관련된 비디오 자료[9] 대부분 차원을 가지지 않는(dimensionless), 즉 어떤 단위를 쓰느냐에 상관없는 상수들을 말한다. 양성자와 전자의 질량비, 전자기력과 강한 상호작용의 결합상수 등.[10] 우주를 수축시키려는 물질과 우주를 팽창시키려는 암흑에너지의 밀도의 합[11] 예를 들면 빅뱅 이후 1나노초 이내에 우주의 밀도가 10-24배 정도만 컸어도 현재 우주는 빅 크런치를 맞이했을 것이다. 이 문제는 빅뱅 우주론에서 '평면성 문제'라고 불리는 것으로서 인플레이션 이론이 탄생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12] 이는 우주 상수 문제라고도 불린다.[13] 이 과정에서 달 역시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4] 사실 오늘날의 외계인 떡밥에 대해서는 점차 생물학의 지분이 넓어지고 있는 추세이다. 즉, 생물학계의 의견은 갈수록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다.[15] 따지고 보면 인격신의 존재에 대한 반론이 될 수 있으나, 대중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주로 인간이 종교를 만들 땐 자기들이 사는 지구 밖에 몰랐으니까 자기들이 우주 속 특별한 존재인줄 알고 인격신과 지구 중심의 종교 세계관 전개를 만들어냈는데 알고보니 인간은 생각보다 하찮은 존재더란 식으로 이끌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