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5 03:40:16

유아론

If a tree falls in a forest and there's nobody around, does it make a sound?
만약 숲 속의 나무 하나가 쓰러졌는데 아무도 그걸 몰랐다면, 그 나무는 쓰러지는 소리를 냈다고 할 수 있는가?[1][2]
조지 버클리[3]

1. 개요2. 특징3. 한계4. 관련 문서

1. 개요

유아론(唯我論, Solipsism), 독아론(獨我論) 또는 주아론(主我論)은 세계에 오직 자신만이 실재하며 자신 이외의 모든 것은 자신이 시각, 청각 등 감각으로 받아들인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론이다. 유아론에 따르면, '자아를 갖고 생각하는 자신' 이외의 타인이나 물건들은 모두 그것이 실재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감각이 만들어낸 내 자아 속에만 존재하는 허상인지 알 수 없다. 한자를 풀이해 보면 '오직 유(唯)', '나 아(我)' 이다.

2. 특징

유아론은 과학이 아닌 단순한 사유(思惟)이므로 반증이 불가능하다. 인간이 체험하는 모든 경험은 자신의 감각 기관으로부터 획득한 자극이 전기화학적 회로를 통해 뇌로 전달되는 것이므로, 감각을 벗어나 유아론을 긍정하는 증거를 획득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영화 《매트릭스》의 '빨간 약' 이나 아이작 아시모프의 소설 《최후의 질문》에 등장하는 하이브 마인드와 같이, 차원의 계(界) 그 자체를 깨뜨리는 수준의 정보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한, 이 물음은 영원히 풀리지 않을 것이다.

'인간을 둘러싼 세계'와 '자기 자신'의 관계에 대한 물음은 고대 그리스 이후로 철학자들에 의하여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으며, 평범한 일반인이라도 누구나 인생을 살면서 한번쯤 해 보는 상상이기도 하다. 2010년대를 전후하여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왔던 '통 속의 뇌' 같은 글도 유아론적 사색의 하나다. 종교에서는 불교의 진리가 이 철학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 석가모니는 평생에 걸쳐 무아(無我)를 설파하였으며, 이것은 대승불교의 경전인 '반야심경'의 정수인 '색즉시공(色卽是空)' 이라는 유명한 구절에 담겨있다. 곧 그는 감각기관의 자극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인식하는 의식과 자아까지도 모두 공(空)하다고 보았다. 즉 자아라는 것도 모두 연기(緣起)한다고 보았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사상가인 장자의 그 유명한 호접지몽 이야기도 유아론적 사색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不知周之夢為蝴蝶與,蝴蝶之夢為周與?
알지 못하겠다.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가, 나비가 꿈에 장자가 된 것인가?

유아론적 관점에서는 자기 자신이 죽으면 그 순간 모든 세계가 멸망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생각하기를 멈추고, '나'라는 것을 인식할 수 없으며, 더 이상 외부로부터 감각을 수용할 수 없으므로 '나'는 '내가 죽은 이후의 세계'에 대해 아는 것이 영원히 불가능하다. 따라서 자신이 죽은 이후에 다른 타인이 어떻게 살아가며, 지구에 어떤 사건이 일어나고, 역사는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 하는 이야기는 더 이상 자신이 경험할 수 없는 무의미한 허상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 상태가 개인에게 있어 어떻게 다가올지 대략 추측해 보자면 '내가 세상에 존재하기 전'에 대해 사유해보면 된다. 다시말해 '내가 태어나기 전'에 대해 생각해보면 된다. 당연히 경험적으로, 내가 존재하기 전에는 생각할 수 없었으니 나는 과거에 대해 무지하며, 따라서 과거는 나에게 무의미하다. 물론, 그 전에 "태어나기 전의 느낌을 생각해보라니, 그게 무슨 헛소리인가?"싶을 정도로 질문 자체가 이상하다고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허나 그 황당함의 기저인, '그것에 대해 생각할 시도조차 황당하다는 그 느낌', 즉 그만큼의 무상감과 무의미함이 아마 개인의 존재가 없는 상태에 대한 개인 존재성의 작용기전일 것이다. 만약 당신이 "나는 과거가 어떠어떠하게 존재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인식하고 있다!"[4]고 반박한다면, 당신은 그것을 실제로 경험한 것이 아니라 결국 현재 여기에 존재하는 당신이 구전이나 역사서를 통해 과거를 현재 당신 인식의 틀 안에 받아들인 것에 불과하다고 재반박 할 수 있다. 즉, 과거의 사건에 대해 어떤 확실한 증거가 있더라도, 그 증거가 현재의 "나"에게 도달하기 위해서는 결국 현재 시점의 감각전달 과정을 거쳐야 하며, 이것은 유아론적인 사고방식에서는 "현재"의 사건이지 과거 그 자체의 사건이 아니다. 결국 과거라는 개념을 포함한 시간 자체도 유아론자 자신 안에 종속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는 얘기다. 동일한 방식을 통해 "타인" 또는 "객관"을 통해 지각되고 증명된 어떤 개념과 지식도 그것이 "나"에게 도달해서 "나"의 감각으로 전달되기 전에는 "나"에게는 무의미하므로, 궁극적으로는 "나"의 감각전달과정을 거치지 않은 모든 외부세계는 무의미해지는 것이다.

더불어 나 이외의 모든 것이 실재하는지 알 수 없다고 가정한다면, 죽음 이후의 세계영혼과 같은 이야기 또한 실재하는지 허상인지 판단할 수 없으므로 삶과 죽음 모두가 알 수 없는 것인 셈이 된다.

3. 한계

이러한 사유는 매우 극단적인 환원주의를 통해서만 정당화된다. 먼저, "나"의 감각전달과정을 통해 외부의 정보를 인지하는 과정 자체가 칼로 무 자르듯 나누어지지 않는다. 내가 모르는 사실을 "나"의 주변인인 A가 알고 있다고 했을 때, 그 정보가 "나"에게 전달되는 것은 A가 나에게 그것을 명시적, 언어적으로 알려줬을 때인가, 아니면 내가 A의 비언어적 행동을 보고 그것을 짐작하거나 의심했을 때인가, 아니면 A의 비언어적 행동을 직접 보지 못한 상태에서 B, C 등의 타인의 언어적/비언어적 단서를 통해 그것을 유추했을 때인가? B, C 등의 타인의 단서를 D, E, F 등의 타인이 포착해서 유추해낸 정보가 소문을 통해 나에게 도달했을 경우는 어떠한가? 이런 식으로 온갖 경우의 수를 고려하다보면, "이 범위 바깥의 정보는 나에게 전달되지 않았으므로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경계를 설정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경계가 사실상 설정 불가능하다면, 유아론적인 세계관을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우주에 대한 인식은 사실상 차이가 없게 된다. 그렇다면 굳이 "객관적 외부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극단주의적인 태도를 고집하여 철학, 과학, 공학, 인문학 등 인류가 쌓아온 다른 모든 세계관과의 충돌과 긴장을 감수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또한, 인간의 정신은 서구의 근대주의자들이 가정했듯 단일하고 무결한 실체가 아니다. 인간의 정신활동 중에서 인간이 스스로 자각하는 "의식(나)"의 비중은 생각보다 매우 적고, 심지어는 어떠한 정보를 스스로 자각하면서도 그것을 "의식(나)"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마저 있다. 특히 현대 뇌신경학과 의학의 발전에 따라 매우 신기한(반직관적이고 특이한) 사례가 많이 밝혀졌는데, 예를 들어 뇌의 특정 부분이 고장날 경우, 시각적 인지능력 자체는 이전과 전혀 다름이 없으나 시각적으로 지각된 얼굴을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과 연결시키는 기능이 망가지는 경우가 있다. 수십년을 함께 산 배우자의 얼굴을, 시력에 전혀 문제가 없는 눈으로 직접 보면서 그 구성요소와 생김새가 전혀 다르지 않은 것을 명백히 인지하면서도, 뇌신경의 오류로 인해 그 얼굴이 배우자의 얼굴로 인식되지 않아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게 내 배우자의 얼굴을 흉내낸, 그렇지만 절대 내 배우자가 아닌 낯선 사람"으로 인지하고 이를 극복하지 못하는 사례가 그러하다. 이러한 사례를 겪은 환자의 경우, 심리적인 문제가 아닌 뇌신경의 문제이기 때문에, 상담과 설득을 통해 이를 교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심지어 환자 본인이 모든 객관적, 의학적 정보를 수용하고 합리적인 추론을 통해 상대방이 자신의 배우자가 맞다는 사실을 납득하더라도, 그 환자의 신체와 무의식과 정신은 여전히 상대방을 낯선 사람으로 인식하고 반응한다. 이 경우 "상대방이 나의 배우자이다"라는 정보는 나에게 전달되었는가 전달되지 않았는가? 전달되었다고 가정한다면 "정보가 전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우주(세계관)에 유의미한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사례"이고, 전달되지 않았다고 가정한다면 나의 감각기관 자체의 오류(배우자가 아닌 사람이 배우자와 물리적으로 동일하여 구분 불가능하다고 감각하므로)를 나타내어 나의 감각기관만을 근거로 우주를 구성하는 것이 무모한 시도라는 것을 시사한다.

이처럼 "나(의식)"의 감각전달과정과 정보처리과정 자체가 절대적이지 않고 부정확하며 오류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유아론적인 태도는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된다. 오히려 자신이 감각하고 확신하는 정보를, 자신과 독립된 외부의 객관적인 검증을 통해 재확인하고 만약 자신의 감각이 틀렸다면 이를 수정하려는 태도를 갖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유아론은 이기주의를 정당화 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

4. 관련 문서



[1] 유아론적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답은 "소리가 나지 않았다"라고 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나무는 처음부터 거기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이므로, '나무가 쓰러졌다'는 정보 또한 실체 없는 것이 된다.[2] 이에 대해 "아무도 그걸 몰랐다고 하더라도, 에너지 보존법칙에 따라 나무가 쓰러지면서 전환된 포텐셜 에너지는 빛, 소리, 지질학적 현상 등 어떤 방식으로든 남아있을 것이므로, 나무가 쓰러지는 그 순간을 목격한 사람이 아무도 없더라도 그 사실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라는 식으로 반박하고자 한다면, 그런 반박은 위 인용구의 의도를 적절히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유아론적인 시각에서 "아무도 몰랐다면"이라는 가정은 마치 물리학에서 말하는 사건의 지평선 너머의 사건과 같이 원칙적, 본질적으로 "아는 것이 불가능하다면"을 가정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유아론이 가정하는 세상이란 "나"의 직접적 감각을 넘어선 그 어떤 것도, 심지어는 "나"의 감각마저도 오류 및 왜곡의 가능성이 있어 신뢰할 수 없는 세상이기 때문이다.[3] 실제로 조지 버클리가 정확히 이 말을 한 것은 아니고, 『A Treatise Concerning the Principles of Human Knowledge(1710)』등에서 언급한 몇 가지 인식론에 관한 비유를 20세기에 요약, 정리한 문장이 알려진 것이다.[4] 즉, '과거는 나와 독립되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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