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8 11:3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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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계열3. 타 민족과의 관계4. 명칭5. 역사
5.1. 초기 정착사5.2. 대영제국과의 충돌5.3. 남아프리카 연방 수립 이후
6. 인구7. 기타8. 보어인 인물

1. 개요

Boer

16세기부터 현재의 남아프리카 지역에 정착하고 아프리칸스어를 쓰는 백인 민족 집단이다. 아프리카너(Afrikaner)라고도 부른다.

남아프리카 백인의 60%를 차지하며 남아공에 거주하는 보어인의 수는 약 320만명 정도로 추산되고, 나미비아호주, 뉴질랜드 등에 거주하는 보어인까지 합하면 350만명 정도이다.

2. 계열

혈통으로 따지면 네덜란드계가 다수이다.

이들이 '네덜란드인'이 아니라 '보어', '아프리카너'라고 따로 구별된 이유는 유럽의 네덜란드인과 다른 정체성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네덜란드계 이외의 다양한 백인계 민족들아프리칸스어를 쓰면서 정착했기 때문이다.[1] 아프리카너는 아프리칸스어를 모어로 쓰는 남아공 백인 전부를 일컫는 것이고, 아프리카너 중에서 적지 않은 수는 네덜란드계뿐만 아니라 프랑스 위그노독일에서 넘어온 사람들도 있다.

아래 영국인과의 썩 좋지 않은 관계를 생각하면 특이하지만 영국계 보어인도 소수 존재한다. 훗날 대영제국의 아프리카 남부 식민화 이전 17~18세기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직원으로 일하면서 남아공에 정착하며 언어도 아프리칸스어를 쓰게 되면서 아프리카너 정체성에 완전 동화되고, 훗날 영국이 남아공 일대를 지배해도 영국계 남아공인으로서 정체성을 거부한 이들이다.[2]

본래 케이프 아프리카너와 보어는 구별되어 쓰였으나 영국에게 합병된 뒤로는 구분없이 쓰인다.

3. 타 민족과의 관계

3.1. 네덜란드인

네덜란드계가 주류지만 역사적으로 네덜란드와의 관계는 썩 좋지 않았다. 이는 18세기 이후로 네덜란드 본토가 계몽주의자유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은 반면, 남아프리카의 보어인 공동체들은 그렇지 않아 사고방식이 크게 달랐기 때문이다. 그나마 보어 전쟁이 벌어지자 잠깐이나마 네덜란드 본국에서 관심을 가져주기도 했지만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본격화한 거물 지도자들 상당수가 오제바브란트바흐라는 친나치 단체에 가담한 이력 때문에 나치 독일의 폭압을 겪은 바 있는 네덜란드인들이 보어인을 곱게 볼 리 없었다. 그래서 제2차 세계대전 직후~1990년대까지 남아공과 가장 적대적인 나라들 중 하나가 바로 네덜란드였다.

3.2. 영국계 남아공인

보어인은 영국에서 건너와 영어를 쓰는 영국계 남아공인과는 구분되는 민족집단이다. 제2차 보어 전쟁 당시 영국은 특히 보어인 게릴라로 인해 골치가 아팠고, 따라서 영국은 민간인과의 연계가 중요한 게릴라전 특성상 게릴라와 민간인을 분리하기 위해 강제수용소를 만들었다. 인종 청소를 목표로 만들었던 나치 독일의 강제수용소와 달리 보어인 수용소는 게릴라와의 연계를 막으려는 목적으로 만들고 수용시킨 것이지만, 전염병과 영국의 수용소 관리 능력 부족 등의 이유로 보어인 병사 27,000명과 민간인 28,000명이 사망했다.[3] 10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같은 백인계이며 종족적으로도 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영국계와 나머지 아프리카너 간의 관계는 데면데면한 편이다. 특히 노년층으로 갈수록 부모나 조부모가 제2차 보어전쟁 당시 겪은 고통을 듣고 자란 경우가 많아서 이들이 영국에 대해 갖는 감정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 참전용사들이 나치 독일이나 일본 제국에 대해 갖는 감정과 비슷한 수준이다.

3.3. 흑인

흑인들을 동부 지역으로 몰아내고 정착한데다가 아파르트헤이트를 통과시키고 또한 아파르트헤이트를 주도한 정당인 국민당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경향을 보였기에 아파르트헤이트 시절에 흑인들과의 관계는 크게 나빴으며, 이 때문에 <보어인을 쏴라>(shoot the boer!)라는 노래가 흑인들에게 널리 애창되었을 정도였다.

일부 보어인의 경우에는 인종차별 정책에 부끄러움을 느끼며 선거에서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는 야당을 찍거나 아파르트헤이트 반대운동에 동참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경우가 보어 전쟁 당시 보어측의 지도자들 중 한 명이었던 아브라함 피스허르의 손자로서 아프리카너 성골 중 성골임에도 불구하고, 기득권을 다 때려치고 공산당원으로서 넬슨 만델라를 변호했던 브람 피스허르, 그리고 현대 아프리카너 문학의 거장들인 브레이튼 브레이튼바흐나 안드레 브링크가 보어인이면서도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에 반대했던 유명인사들이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상당수 보어인들이 인종차별 정책 폐지에 찬성표를 던졌다. 1980년대에는 한때 국민당 정권을 밀어줬던 보어인 사이에서조차 아파르트헤이트를 미는 국민당 정권에 불만이 많았기 때문이다. 국민당 정권이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는 흑인들을 비롯한 정권 반대파를 강경하게 탄압하고, 통제와 문화 검열이 계속되어 사회 분위기가 매우 경색된 탓이다.

ANC 집권 후에 인종간 화합을 주요 시책으로 삼으면서 관계가 많이 풀렸다고 하지만 여전히 빈부격차가 심한 상태라 현재도 흑인과의 관계가 썩 좋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4. 명칭

보어라는 이름에는 '농부'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지금도 네덜란드어로는 농부란 뜻이고, 가끔 성씨로 쓰이기도 하며 독일어의 '바우어'(Bauer)에 해당한다. 네덜란드어/아프리칸스어식 발음은 부르이다. 이에 대해서는 네덜란드어 항목 참조.

아파르트헤이트가 폐지된 현대에 와서는 보어인이라는 말이 원래의 민족적, 언어적인 의미보다 비하적인 의미에 많이 해당되기 때문에 현대에 들어와서 민족적 의미로 아프리칸스어 화자 백인을 일컫는 단어는 아프리카너가 더 정중한 표현으로 취급된다.

사실 '보어'란 단어 자체가 자기네 언어인 네덜란드어-아프리칸스어에선 그냥 '농부'라는 단어라서 남아공 인종관계의 미묘한 역학과 별개로 그냥 민족 이름 자체로서도 좀 투박하고 억센 이미지가 있다. 다만 많은 보어인들은 이런 투박하고 거친 이미지를 부끄러워하는게 아니라 탁월한 농업 기술과 강인한 생활력으로 남아공을 개간 또는 개척한 조상들을 자랑스러워하는 편이기 때문에 비하적인 성격이 희석된 것이다.

현대 남아공 사회에서 Boer란 단어의 사회적 위상은 미국에서 흑인을 Afro-American이 아니라 Black이라 부르는 것, 유대인을 보고 Jewish가 아니라 그냥 Jew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하다. 그 자체로 인종차별적이거나 모욕적인 단어는 아니고 일상에서 써도 되기는 한데, 억양이나 문맥이 좀 이상하면 인종차별적으로 들릴 수도 있는 참으로 애매한 입지의 단어이다. 따라서 혹시 남아공에 연줄이 있거나 유학, 사업차 등으로 방문할 일이 있고 이들과 관계를 맺을 일이 있다면 본인들이 스스로 보어라 지칭하지 않는다면 아프리카너라고 부르는 것이 안전한 편이다.

다만 사어가 된 것은 아니라 여전히 화자 자신이 아프리카너일 경우에 스스로를 '보어'라고 칭하는 경우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편이다. 보어인들 본인들끼리는 아프리카너란 단어가 지나치게 학술적이고 딱딱하며, 우리 민족은 거칠고 투박하지만 근면성실하고 정직한 농부가 맞다고 스테레오 타입을 긍정하면서 보어란 단어를 훨씬 더 선호하는 경우도 많다. 여러모로 현대 미국 사회에서 흑인들의 Black이나 북미 원주민들의 Native American vs American Indian 단어 선호 논쟁과 비슷하게 볼 수 있다. 다만 자칭할 경우 그런 인식이라는 것이고, 스스로가 그렇게 부른다고 해서 남이 부르는 것까지 괜찮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4]

5. 역사

5.1. 초기 정착사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35px-Charles_Bell_-_Jan_van_Riebeeck_se_aankoms_aan_die_Kaap.jpg

1652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얀 반 리베크가 데리고 온 네덜란드 농부들로부터 시작해 칼뱅교도들과 프랑스계 위그노들, 그리고 주류 종교적인 이유로 탄압받던 여러 개신교 성향의 백인들이 종교 활동의 자유를 찾아 지금의 남아공 지역으로 이주한 것이 기원이다.

이들이 백인이라지만 의외로 남아공에서 웬만한 흑인 부족보다 오래 살아온 집단에 속한다. 남아공의 원주민인 여러 흑인 부족들은 유목민처럼 거주지를 옮겨 다녔던 반면, 보어인들은 아프리카 이민 후 개척지를 잡으면 정주할 농촌과 도시를 건설하고 정착했기 때문에 이들의 짬밥은 의외로 엄청난 것이다. 서부(케이프) 지역만 보자면 남아공에서 가장 큰 흑인 민족 중 하나인 줄루족이나 코사족보다도 보어인이 오래 살았다.[5] 보어인들의 별명으로 아프리카의 하얀 부족이라는 말이 있는데, 짬밥을 생각해보면 과장은 아닌 셈이다.
파일:Voortrekker_flag.png
정착 당시 보어인들이 사용한 깃발. 훗날 보어인들의 민족 상징기로도 표현되었다.

초기에는 현재의 웨스트-노던 케이프 지역에 모여 살았고 현지 흑인들과 교류하거나 혹은 충돌하고 노예교역도 하면서 그럭저럭 살았는데 19세기초 나폴레옹 전쟁 이후 케이프 지역이 영국에 넘어가고 노예 해방정책을 펴자 농민들이 다수였던 보어인들이 대거 반발했고 영국은 이를 분쇄하는 정책을 폈다. 버틸 수가 없어진 보어인들은 포장마차와 가축들을 이끌고 강수량이 더 많은 곳을 찾아서 대거 북동쪽 내륙으로 이주했다. 당시 보어인들의 거주 지역은 미국과 마찬가지로 인구 밀도가 낮았기 때문에 가축 수도 적지 않았고, 이러한 배경하에서 이들의 이민은 유목민들의 이동을 연상케 했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현지 흑인들과의 충돌이 일어났고 이 과정에서 우수한 기마술을 보유하고 소총을 보유한 보어인들에 의한 일방적인 원주민 학살이 일어났다. 이걸 이름하여 그레이트 트렉(Great Trek)[6]이라고 한다.

1799년 보어인들은 그레이트피시 강을 따라 반투계 농경민들이 사는 지역에 도착했다. 이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뉘어 상대적으로 케이프 식민지에 가까운 오렌지 강 유역에 정착한 한 부류는 오라녜 자유국을, 더 북쪽으로 올라가 발 강 너머, 림포포 강 유역에 정착한 부류는 트란스발 공화국을, 동쪽 해안지대로 우회한 나머지 한 부류는 콰줄루[7] 일대에 정착해 나탈 공화국을 세웠다. 물론 이런 공화국들의 수립은 평화롭게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른바 캬프르 전쟁[8]이 한 세기에 걸쳐 지속된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26px-G.S._Smithard%3B_J.S._Skelton_%281909%29_-_The_Voortrekkers.jpg

이 그림은 우마차를 이끌고 가는 정착 초기의 보어인들의 모습이다. 미국과 달리 남아공의 '포장마차'는 말보다는 주로 황소가 끌었기 때문에 '옥스왜건'(Ox-wagon) 혹은 '오서바'(Ossewa)라고 불렸다.[9] 이 Ossewa는 구 남아공 국가이자 현 남아공 국가의 일부인 <Die Stem van Suid-Afrika>에도 언급된다.[10]

비록 강력한 중앙정부도 없었고 반투계 농경민에 비해 인구가 훨씬 적었지만, 우수한 기마술과 우마차를 이용한 전술을 유기적으로 활용하여 보어인들의 전투력은 일찍부터 강력했으며, 주위의 흑인 부족들은 당연히 상대가 안 되었고 심지어 당대 최강의 세력을 자랑하여 중부 지역의 흑인 부족들을 서부로 몰아내거나 흡수하던 줄루 왕국도 이들에게 밀렸을 정도였다. 보어인 500명이 흑인 수만 명을 쓸어버리고 보어인은 단 3명만 부상, 흑인은 3,000명 이상 죽은(...) 피의 강 전투(Battle of Blood River, 1838년)가 대표적으로, 영국군이 들어오기 전에 이미 수십만 ㎢의 영토(현재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내륙 지방)에 거주하던 흑인을 모두를 지배하에 넣은 상태였다.

보어인들은 이른바 피의 강 전투에서 500여명의 기병과 우마차만으로 줄루족 전사 10,000명을 일방적으로 학살하기도 했다. 줄루족 역시 기병을 도입하고 싶어했으나 전염성이 강한 가축 유행병 때문에 말을 키우고 기병을 육성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 보어인들은 줄루족에 대항해 여러차례 승리를 거두며 서서히 영토를 늘려나가, 일부 산악 고지대를 제외한 남아공 내륙 지대를 평정하는데 성공했다.

5.2. 대영제국과의 충돌

케이프 식민지를 차지한 영국은 보어인의 그레이트 트렉을 막지 않고 방치해 사실상 보어계 국가들의 독립을 인정한 상태였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에 이르자 케이프 식민지로는 만족하지 못한 영국이 점점 보어인이 살던 내륙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결국 나탈 공화국은 버티지 못하고 케이프 식민지에 합병되었고, 보어인이 세운 두 공화국은 영국의 이런 진출 야욕에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영국은 이 두 나라를 합병하지 않고 1852년샌드 강 협정, 1854년블룸폰테인 협정으로 보어인들의 독립을 인정했다.

그러던 중 남아프리카 내륙에서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자[11] 탐욕스러운 영국은 남아프리카 내륙에 진출하려 했고 그 과정에서 당연히 보어인들의 나라와 충돌하게 되었다. 이때 콰줄루의 줄루 왕국과 보어인의 트란스발 공화국 사이에 충돌이 벌어지게 되었고 이를 빌미로 1877년 영국은 트란스발 공화국을 병합했다. 보어인은 당연히 반발했지만 줄루 왕국의 위협이 지속되는 이상 그냥 참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1879년 줄루 왕국이 영국령인 나탈을 공격하자 줄루 전쟁이 발발, 영국은 줄루 왕국을 멸망시키고 나탈에 합병시켰다.

줄루 전쟁이 끝나고 줄루 왕국의 위협이 사라지자 보어인들의 불만이 다시 터져 나오기 시작했는데 영국이 트란스발 일대에 군대 배치를 늘리자 결국 1880년 트란스발 공화국이 반영 반란을 일으켰다(제1차 보어 전쟁). 넓은 국토와 낮은 인구 밀도를 기반으로 보어인들은 유격전으로 영국군을 괴롭혔고, 된통 당한 영국은 1881년 트란스발 공화국의 독립을 인정했다. 하지만 5년 후인 1886년 트란스발 공화국의 비트바테르스란트 지역에서 거대한 금광이 발견되자 케이프 식민지의 영국인들이 트란스발로 이주하면서 그 수가 점점 불어나 트란스발 내에서 보어인과 영국인 간의 갈등이 커지게 되었다. 당시 케이프 식민지의 총리였던 세실 로즈가 트란스발 공화국 내 영국인들의 대표였던 리앤더 제임슨을 획책해 1896년 쿠데타를 일으키게 만들면서(제임슨 습격사건) 이에 분노한 트란스발 공화국이 영국인들에 대한 차별 대우 법안을 통과시켰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세계 제국 영국은 트란스발 내 영국인들을 평등하게 대우하라고 요구했으나 트란스발은 이를 거부하고 모든 영국인에게 자국에서 나가라고 통보하여 사실상 선전포고를 단행했다. 그리하여 1899년 트란스발군이 케이프 식민지를 공격하면서 영국군과 무력충돌이 벌어지게 되었고 영국의 강압적인 행태에 불만을 품은 오렌지 자유국이 트란스발 공화국 측에 가담하면서 영국과 보어인 사이에 또다시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제2차 보어 전쟁)

당시 세계 최강이라 자부하던 영국군은 1, 2차 보어 전쟁기간 동안 상당히 고전했는데, 적인 보어인들이 창과 활로 무장하고 닥돌하는 비서구권 원주민이 아니라 당시 기준으로 첨단 화약 무기에 익숙한 백인이었고, 더불어 수렵에도 매우 익숙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넒은 남아프리카 땅에서 개척민으로 살다보니 말을 잘 타는 사람들이 많아 최후의 용기병이라 부를 법한 기마 척후/교란전에 능숙했다. 아직 참호전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라 마우저 소총으로 은폐와 엄폐를 적절히 활용해 유격전을 펼치는 보어인들의 전략에 영국군은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고 위장이라는 개념도 없었던 시기라 가시성이 높은 영국군의 군복은 좋은 타겟이었다[12]. 특히 수십명씩 조를 이루어 이동하는 보어군의 소부대를 뜻하는 '코만도'가 나중에 정예부대를 상징하는 단어가 될 정도였다. 게다가 보어인들도 당시 독일에서 수입해온 크루프 포맥심 기관총으로 무장할 정도로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영국군도 전략과 전술을 다듬어 이들에 대항하게 된다. 근대 영국군 특유의 붉은색 군복은 보어 전쟁을 기점으로 눈에 잘 띄지 않는 위장 색상으로 바뀌었고, 대포처럼 운반거에 거치해 운용하던 기관총도 콤팩트한 삼각대 운용 방식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또한 게릴라에 대한 지원을 끊기 위해 보어인 마을을 완전히 박살내고 민간인들을 지정한 수용소에 강제 수용시키는 등 대민 초토화 작전으로 보어인 게릴라에 대항했다.

결국 잔혹한 초토화 작전에 버티지 못한 보어인들이 협상을 요청해 1902년 4월 평화협상이 시작되었고, 5월 31일, 베레니깅 조약을 통해 제2차 보어전쟁은 대영제국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이 조약으로 보어인들의 두 나라들이었던 트란스발 공화국과 오렌지 자유국은 영국령 케이프 식민지에 합병되어 멸망했다.

5.3. 남아프리카 연방 수립 이후

하지만 보어 전쟁에서 큰 피해를 입은 보어인에 대해 동정적인 여론이 펼쳐지면서 보어인은 케이프 식민지의 주도권를 잡기 시작했고 1910년, 케이프 식민지는 오렌지 자유주, 트란스발, 나탈과 함께 자치령남아프리카 연방으로 전환하여, 영국으로부터 자치권을 획득하는데 성공했다. 이런 자치권을 바탕으로 보어인들은 자신들의 언어와 문화를 보존했다. 그리고 영국계에 비해 쪽수가 상대적으로 많았던 보어인들이 주축이 된 국민당이 창설되었고 이들이 집권하면서 전체 인구에서 소수였던 백인들의 이익을 위해서 여러 인종차별적인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나마 초기엔 (국민당에 비해서) 덜 인종차별적이었던 영국계 중심의 연합당(초기엔 남아공당)도 집권하는 양당체제여서 인종차별이 극단적인 수준까지는 가지 않았지만[13] 1948년 총선에서 국민당이 70석을 얻어 65석을 확보하는데 그친 연합당에게 승리를 거둔 뒤에[14] 유색인종의 투표권을 완전히 박탈하는 법을 통과시켜 일당 우위체제를 구축하는데 성공하고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악명높은 정책을 펼치며 흑인과 유대인, 인도인 등의 유색인종을 철저하게 탄압했다. 이런 짓거리는 1980년대 후반까지도 이어졌다가 1990년대 초반이 되어서야 그만두게 된다.

인종차별 정책이 철폐된 현재는 흑인에 비해 쪽수에서부터 밀리기 때문에 남아공의 주류 정치권에서 완전히 밀렸으며, 이들이 지지하는 정당도 국민당에서 민주연맹으로 바뀌었다.[15] 사실 도시 지역은 몰라도 시골 지역에선 보수적인 이들이 많다고 하지만, 남아공 전국에서 흑인에게 유권자 인구수에서부터 밀리기 때문에[16] 그나마 세가 되는 민주연맹을 지지하는 것이다. 물론 극우파[17]의 경우에는 따로 극우정당을 차리기는 하지만 지지하는 사람은 소수다. 간혹가다가 노던케이프 주 남부 지역과 웨스턴케이프 주 일부 지역을 합쳐서 보어인 자치구를 만들자는 얘기가 나오고는 있지만 호응하는 사람이 적어서 중앙정부에서 그냥 흘러가는 소리 정도로 취급하고 있다.

주요 도시와 근교 지역에 살고 있는 보어인들의 경우에는 그럭저럭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경제력에서 영국계 백인에게 밀렸다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얘기고 그 동안 쌓아놓은 것이 있기 때문에 일반 흑인에 비하면 평균적으로 잘 살며, 대도시 지역의 치안이 좋지 않다고는 하지만 안전한 신도시[18]로 이주할만한 여력이 있는 사람들의 비율이 크게 높은건 사실인지라 그나마 잘 먹고 잘 사는 축이기는 하다. 흑인 중산층들이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다지만 전체 흑인의 20%도 안되는 수치이니... 그러나 보어인 농민들의 경우에는 그동안 흑인들이나 컬러드들을 값싸게 부려먹거나 비하하거나 돈 대신 생산하고 남은 포도주를 지급하는 식의 차별을 가해왔기 때문에 흑인과 컬러드 노동자와의 원한 관계가 깊은 데다가[19] 아파르트헤이트 이후에도 흑인과 컬러드 노동자들을 저임금으로 부려먹는 경우가 많았기에 빈민층에서 보어인 재산 몰수 여론도 왕왕 일어서 상당한 위험에 처해있다는 후문도 있다. 그러다보니 간혹 이러한 보어인들은 강도 및 여러 중범죄에 휘말리는 경우가 많다.[20] 대다수 남아공 흑인 경찰들도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하면서 이들에 대해서 대충 수사한다든지하는 문제도 많아서[21], 사설경호업체를 고용하는 경우도 많고 그러다보니 경제적 어려움과 안전 문제로 남아공을 떠나는 이들도 많다.

이런 이들 중에 남아공 밖으로의 이주가 사실상 불가능한 빈민층도 점차 늘어가고 있는데, 이들을 화이트 스콰터(white squatter)라고 부르면서 남아공 사회의 문제로 거론되고 있는 중이다. 남아공이 백인정부에서 흑인정부로 바뀌면서 백인들의 몫이 적어지며 백인 빈곤층에 대한 지원이 크게 줄어든 것이 원인으로 지목되는데 화이트스콰터로 불릴 정도의 빈곤층이라면 정부로부터 소정의 보조금을 받을 자격이 되기는 하나, 남아공 자체가 중진국이기 때문에 캐나다, 영국, 뉴질랜드, 호주 급의 복지 수준은 꿈도 못꾸고[22] 입에 딱 풀칠할 정도라 빈곤에서 탈출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 "우리도 처지 안 좋은건 똑같은데 그딴게 뭐 대수냐" 정도의 냉소적인 반응이 많다. 이는 남아공 자체가 실업률이 30%대에 달할 정도로 매우 높아 한국 돈 월 몇만원~십몇만원 하는 소정의 정부 보조금으로 겨우 입에 풀칠하며 생계를 잇는 가난한 사람들이 인구의 40% 이상에 달할 정도로 많기 때문이다. 또한 취직을 한다고 해도 저임금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 여전히 백인의 다수가 대다수 흑인들보다 잘 사는 상황에서 백인 빈민층들이 늘어난다고 해도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실제로 백인 빈민층 비율이 백인내에서 10% 정도이며, 흑인 빈민층이나 컬러드 빈민층이 흑인, 컬러드 내에서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것과 비교하면 그 비율이 크게 낮은 편이기는 하다. 사실 백인 실업률이 8% 내외로 절대 낮다고는 할 수 없지만 흑인에 비하면 낮기 때문에 묻히는 면이 있다.

6. 인구

남아공 내 아프리칸스어를 사용하는 백인의 수
연도 인구 연평균 증감
1657 137
1754 6,000 3.97%
1806 26,720 2.91%
1936 1,120,770 2.92%
1960 1,600,000 1.49%
1985 2,581,080 1.93%
1996 2,558,956 -0.08%
2001 2,576,184 0.13%
2011 2,710,461 0.51%

남아공 백인들 중에서 보어인의 비중은 최근 점점 증가하고 있는데, 남아공 백인들 중 제2의 언어집단인 영어 화자들의 높은 해외이주율과 낮은 출산율 때문으로 판단된다. 1996년 아프리칸스어 화자는 57.7%인데 영어 화자는 38.6%를 차지했으나, 2011년에는 60.8%, 영어 화자는 35.9%로 변화했다. 백인내에서도 영국계는 대개 대도시 지역에 인구가 몰린 영향으로 출산율이 1명대 중후반 정도로 다소 낮은 편인데 반해 보어인들은 농어촌에 사는 비중이 영국계에 비해 높아 출산율이 약 2명대 초반 정도 수준으로 추정된다.

남아공뿐만 아니라 나미비아(2003년 92,400명), 잠비아, 보츠와나, 영국, 에스와티니에도 10,000명 이상의 보어인이 거주한다.

7. 기타

개인 차원에서 보면 이런 분위기에 질색해서 개방적인 성향의 보어인들도 많지만 어쨌든 아프리카너 주류들은 그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를 만들었을만큼 폐쇄적이고 인종차별적인 성향이 강해서 오늘날까지 한국인을 비롯한 동아시아계 남아공인들은 아프리카너가 아니라 영국계 주류인 케이프 식민지나 요하네스버그 근처에 산다. 그러나 여기도 교민들 포화상태+첫 세대가 흐르고 생활이 안정화되면서 슬슬 프레토리아나 스텔렌보슈 같은 남아공 아프리카너 민족문화의 본진 같은 동네에도 비백인, 비흑인 이민자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고, 현대 아프리카너들은 진짜 아직도 쌍팔년대 마인드 그대로 사는 소수 빼곤 이 기회에 역사적인 민족 이미지 개선도 좀 하고, 영국계한테 완전히 넘어간 문화적, 사회적 헤게모니도 좀 되찾을수 없나 싶어 이렇게 자기 동네에 들어오는 외부인들에게 아프리카너어를 비롯한 자기네 문화를 전파하는데 상당히 적극적이다.

트란스발 공화국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전신이 되었으며, 오라녜 자유국도 이에 합병되어 지금은 자유주(Free State)라는 특별독립구가 되었다. 더불어 줄루 제국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일부로 편입되어 현재의 대국이 되었다. 더 자세한 사항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역사에서 찾아보도록 하자.

프리토리아에 보어트레커 기념관(Voortrekker Monument)이 있다.

8. 보어인 인물

상술했듯이 보어인들은 영국계 남아프리카 공화국인과는 구분되는 민족으로, 보통 성씨와 아프리칸스어를 모어로 구사하는지의 여부에 따라 영국계와 보어인을 나눈다. 예를 들어 일론 머스크백인계 남아프리카인이지만 영국계 남아프리카인으로 분류되지, 보어인으로 분류되지 않는다.[23]

[1] 그래서인지 남아공 백인의 평균 신장은 네덜란드인보다 상대적으로 작게 나온다.(물론 네덜란드가 세계에서 키가 가장 큰 나라라는 것도 있지만.)[2] 이들도 호주계 아프리카너들과 마찬가지로 보어 전쟁에 보어측으로 참전했다. 이들 뿐만 아니라 제2차 보어전쟁 당시 영국과 호주의 정책을 비판한 일부 호주계 아프리카너들도 있다.[3] 다만, 영국이 보어인들의 떼죽음을 의도한 것은 아니다. 보어 전쟁 당시 랭먼 야전병원에서 봉사활동을 펼친 아서 코난 도일의 기록에 의하면 영국군 병사자는 14,000명이 넘어 갔는데, 해당 수치는 영국군 전사자인 8천 명을 훨씬 상회한다. 이는 영국 또한 전염병에 대항할 뾰족한 수가 없던 상황이었던 것을 명백히 보여주며, 1928년 페니실린이 등장하기 전까지 모든 인류는 전염병에 대해 속수무책이었다. 보어 전쟁의 수용소의 열악한 상황은 영국 언론에 대서특필되었고, 이에 대한 여론의 비판을 수렴해 영국 정부는 1901년 포셋 위원회를 조직하여 캠프 내 보어인의 사망률을 1902년 기준 2%까지 낮추기 위해 노력했다.[4] 가령 흑인 입장에서는 '난 Black이라는 단어가 그리 싫지 않다, 난 그냥 Black이라 하겠다' 할 수 있지만, 흑인이 아닌 입장에선 상대 흑인이 Black이라는 단어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알 수 없다. 상당수 흑인이 Black이라는 단어를 썩 싫어하지 않는다고 하니까 한 번 말해봤다가 싫어하는 흑인을 만날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그런데다가 이런 호칭이라는 것이 자기가 쓸 때랑 남한테서 들을 때랑 느낌이 다른 것도 변수이다.[5] 물론 남아공 동부 지역의 경우, 내부에선 여러 부족 간의 전쟁과 이동이 있었지만 유럽인이 도착하기 이전에 이미 반투계 흑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가장 늦은 시기인 18~19세기에 확장해 일대에 민족 대이동을 야기한 줄루 왕국도 완전히 아프리카 북쪽에서 남하한 것이 아닌 현 남아공 최동단 지역에서 출발한 것이었다.[6] 아프리칸스어로는 흐로트 트렉(Groot Trek).[7] 응구니족의 일파인 줄루족이 줄루 왕국을 세운 곳으로 현재 콰줄루나탈이란 이름으로 옛 나탈 주의 이름에 붙어있다.[8] 아랍인 노예상인들이 반투계 흑인들을 아랍어로 '불신자'라는 뜻의 카피르(Kaffir)라는 멸칭으로 부른 것에서 기원했다.[9] 물론 미국가 끄는 마차가 없었던 건 아니다. 구피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단편 애니인 <Californy'er Bust (1945)>의 극 초반에 이런 마차가 나온다. 다만, 이런 마차는 농부들이 같은 주 내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을 이동할 때 주로 썼고, 아예 타 주로 이동하는 경우라면 우마차가지고는 택도 없었다. 남아공은 한국에 비하면야 훨씬 넓지만 미국에 비하면 땅 크기도 작은 편이라서, 이런 우마차가 꽤 유용했던 것이다.[10] 영어로는 <The Call of South Africa>(남아프리카의 외침)이란 뜻이다. 남아공의 자연과 보어인들의 삶 등이 가사의 내용이다.[11] 19세기 말 남아프리카 킴벌리 지역의 다이아몬드 생산량은 당시 전 세계 다이아몬드 생산량의 약 95%를 차지했다. 현재 세계 최대의 다이아몬드 생산 기업인 세실 로즈드비어스가 생긴 것도 이때였다.[12] 심지어 나무 뒤에 숨은 영국군의 팔과 다리도 정확하게 쏘아 맞출 만큼, 보어인들은 뛰어난 저격 실력을 가졌다.[13] 그래도 상당수의 인종차별 법안이 이 시기에 통과되었다. 예를 들면 백인들이 대부분의 토지를 차지할 수 있게 한다던가, 광산업에 있어서 백인들이 유색인종이나 흑인들보다 무조건 급여를 많이 받아야 된다던가 등이었다. 다만 이 시기엔 이런 법안을 무시하거나 위반하는 일이 잦았기는 했다.[14] 참고로 득표율은 연합당이 49.2%로 과반에 가까운 득표를 했으나 인구가 적은 농촌선거구에서 국민당이 우세를 보이며 집권할 수 있었다.[15] 민주당과 국민당의 합당으로 설립된 정당이기는 하다. 국민당계 당원들이 따로 탈당했다가 선거에서 완전히 밀려서 ANC로 통합되어 버린고로 일단 계보상으로는 남아공당의 후신으로 친다. 1934년부터 1976년까지 남아공의 주요정당이었던 연합당도 국민당과 남아공당의 합당으로 결성된 정당이었지만 1940년대 이후로는 남아공당의 당원이 주류를 차지했기 때문에 보통 남아프리카당에서 이어진 것으로 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16] 남아공에서 흑인이 다수 민족이 아닌 지역은 케이프타운이 있는 웨스턴케이프 뿐이다. 그나마 여기도 상대적으로 흑인이 적다 뿐이지, 백인보단 컬러드가 많다.[17]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이들이 창당한 정당인 보수당이 상당한 세를 얻기도 했다. 그렇지만 1994년에 다인종 선거가 치러지면서 완전히 몰락했다.[18] 물론 흑인이나 컬러드 중산층들도 이사와서 살기는 한다. 흑인들이나 컬러드들도 돈 없는 사람들이 태반이라 빈민촌에서 사는 사람이 많은거지, 돈 좀 만져본 흑인이나 컬러드들은 당연히 안전한 신도시에서 살고 싶어한다.[19] 보어계 농민들은 국민당에게 몰표를 줌으로써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공약으로 내걸던 국민당을 집권시켰고, 덕택에 아파르트헤이트 시대를 개막시켜 흑인들과 컬러드들을 오지로 내쫓게 만든 주역이기도 했다.(...)[20] 특히 백인 농장주가 살해당하는 사건은 잊을 만하면 뉴스에 오를 정도이다.[21] 보어인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를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복수로 여기는 여론이 많아서, 범죄 피해자들이 억울함을 호소할 길이 없다. 경찰들 입장에서도 자기 조상님들이나, 혹은 본인들이 당했던 차별 때문에 서러웠던 판국에 피해자라면서 보어인들이 도움을 청하는 게 고깝게 보이는데다가, 아파르트헤이트 폐지 이후에 남아공의 고관대작으로 앉은 사람들도 죄다 흑인들이니, 눈치가 보여서 백인들의 일에 대해 아오안 취급이다.[22] 이들 나라 기준으로 치면 한국 돈으로 매달 수십만원에서 백수십만원 이상씩 보조금을 탈 수 있거나 공공주택에 입주할 수 있는 대상자가 된다.[23] 머스크의 자서전에서 자신은 집에서는 거의 영어를 사용했으며, 아프리칸스어는 학교에서만 배웠고, 기본적인 것만 할 줄 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