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닌 BIG 3 | ||
타모리 | 아카시야 산마 | 비트 다케시 |
<colbgcolor=#333333><colcolor=#ffffff> 아카시야 산마 [ruby(明石家, ruby=あかしや)] さんま | Sanma Akashiya | |
본명 | [ruby(杉本, ruby=すぎもと)] [ruby(高文, ruby=たかふみ)] (스기모토 타카후미, Takafumi Sugimoto) |
출생 | 1955년 7월 1일 ([age(1955-07-01)]세) |
와카야마현 히가시무로군 코자가와초 | |
출신 | 나라현 나라시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신체 | 174cm, 62kg, B형 |
배우자 | 오오타케 시노부[1] (1988 ~ 1992) |
자녀 | 장녀 IMALU |
직업 | 게닌, 사회자, 배우 |
소속사 | 요시모토 흥업[2] |
데뷔 | 1974년 |
동기 | 시마다 신스케 |
별명 | 오와라이 괴수, 꽁치[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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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external/blog-imgs-43.fc2.com/sanma1-fe104.jpg일본의 MC, 개그맨.
2. 상세
일본을 대표하는 국민 개그맨으로 오와라이 괴수(お笑い 怪獣)라 불리는 인물. 1970년대에 데뷔하여 노력과 재능으로 1980년대 중반 탑 연예인으로 자리잡은 이래 현재까지 4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일본 연예계 최정상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다.비트 다케시, 타모리와 함께 일본 개그맨 빅3로 불린다.[4] 닛폰 테레비, 테레비 아사히, TBS 테레비, TV 도쿄, 후지TV 등 일본의 거의 모든 방송국 예능 프로그램의 메인 MC를 담당한 경력이 있는 코미디언이다.[5]
조혜련이 해피투게더에서 일본 개그우먼과 촬영했을 당시 유재석을 소개할 때 유재석을 한국에서 아카시야 산마와 비슷한 인기를 지닌 개그맨이라고 소개한 적이 있다. 다만, 산마의 개그 스타일은 야한 농담과 애드립에 강한 신동엽에 가깝다. [6]
3. 데뷔 전
와카야마현 출신이지만 3살 때 가족들이 나라현으로 이사를 가서 그곳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산마가 아직 어릴 때 그의 친모가 사망했고 수산물 가공업을 하시던 아버지는 재혼을 하여 의붓어머니를 데리고 왔다. 의붓어머니에게 이미 산마보다 어린 아들이 1명 있었는데 의붓형제끼리의 사이는 좋았지만[7] 의붓어머니는 본인 소생의 아들만 사랑하고 자신에게는 그 애 하나 밖에 없다며 동네방네 떠들고 다닐 정도로 산마를 자신의 아들로 여기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그러자 산마는 의붓어머니의 관심을 받기 위해 이때부터 개그를 연마하여 가족들에게 보이기 시작했고, 그렇게 각고의 노력 끝에 의붓어머니와 겨우 거리감을 좁힐 수 있었다고 한다.나라 시립 코반 초등학교 시절에는 '날다람쥐를 잡은 소년'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고 중학교 때는 나라현 중학생 스모 대회에서 2위에 올랐다고 한다. 지금도 학교에는 산마가 당시 잡은 다람쥐가 전시되어 있다고. 산마 본인에 의하면 자신에 인생 모테키 최정점은 고등학교 시절이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이미 남웃기기로 전교에서 유명해서 학교 축제때는 체육관에 전교생들을 앉혀놓고 혼자 2시간 동안 원맨쇼로 토크를 했다고 한다. 또 다른 에피소드는 신학기 써클활동 모집시기에 다른 써클의 홍보스피치를 강당에서 부탁 받아서 해줬는데 폭소의 도가니. 그걸 본 타 써클도 너도나도 산마에게 부탁해서 전부 해줬다고 한다. 학교 다니는 목적이 공부가 아니라 애들을 웃기러 다니는 거였기 때문에 재밌는 것이 안떠오르는 날에는 부담감 때문에 학교에 무단결석을 한 적도 많았다고 한다.
산마의 고등학교 졸업사진
고등학교 3학년 때인 1974년 2월, 라쿠고(전통 만담)의 쇼후쿠테이 문파로 입문해서 '산마'라는 이름을 받는다.(즉, 본래 예명은 쇼후쿠테이 산마.)[8] 입문 동기는 카게츠 극장에서 본 마츠노스케의 신작 라쿠고가 재미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처음 마츠노스케를 만났을 때 입문의 이유를 질문 받은 산마는 "센스가 좋으니까"라며 솔직한 마음을 전했고, 매우 무례한 발언에 대해 마츠노스케는 "저런, 고맙습니다"라고 답례했다고 한다. 입문 생활은 삭발당하는 것 이외는 그다지 엄하지 않았고 방임 주의였다고 한다.
입문 반년도 채 지나지 않아 교토 카게츠에서 데뷔. 이때 산마는 고전 만담인 "서쪽으로 여행"을 10일 정도 공연하였다. 그는 이 시기를 회상하면서 "첫 무대라서 긴장으로 머리가 하얗게되고, 자세를 다시했다"고 한다. 산마를 '미러볼'이라는 별명으로 부를 정도로 그의 재능에 주목한 산마의 스승 마츠노스케는 "산마를 라쿠고가 아닌 게닌으로 세우고 싶다"고 생각했고 스승의 뜻에 따라 산마는 라쿠고에서 게닌으로 전업하게 되며 이때부터 쇼후쿠테이 대신 아카시야를 쓰게 된다.
4. 연예계 경력
4.1. 1970년대
- 1975년, <11PM> (니혼TV 계열)에서 TV 데뷔. "만담가의 성인식"이라는 테마였는데, 산마는 스승인 마츠노스케의 충고를 따라서 붉은색의 영업용 블레이저를 입었다. 이 방송에서 산마는 여성 만담 콤비 우나바라 센리 마리 중 한명인 우나바라 센리(현재: 카미누마 에미코)로부터 "SEX의 48수 이외에 아는 기술이 있는 사람?" 하고 질문받자, "역십자 떨어뜨리기요~" 하고 대답하고는 그 기술을 설명했다. 스튜디오는 폭소의 도가니가 됐지만 사회자인 후지모토 기이치는 광고 시간을 틈타 "산마(꽁치)인지 정어리인지는 모르겠으나 TV에서는 해도 되는 소리와 하면 안 되는 소리가 있다. 그 정도는 배우고 출연해라!" 하고 꾸짖었다. 그러나 요코야마 야스시는 "마음에 쏙 들었다! 한 잔 하러 가자!" 하면서 좋아했고, 이후 야스시의 집에 초대도 받았다. 이 방송을 본 마츠노스케 역시 크게 칭찬했다.
- 1976년 마이니치 방송(MBS 텔레비전)의 인기 프로그램 「영 오! 오!」에 출연. 성대모사 재주가 당시 사회자였던 카츠라 산시의 눈에 띄어, 고정 출연을 하게된다. 이읃고 산마는 카츠라의 전폭적인 지지로 인해 점차 두각을 나타낸다. 프로그램 내 유닛 '더 팬더'가 개편을 하게되자 산마를 메인으로 한 「산마 앤 오사카 스페셜」(SOS)가 방송됨으로서 산마는 선배를 제치고 코너를 맡게되고 프로그램이 종료될 때 까지 2년 9개월간 프로그램의 주축으로 활약했다. 특히, 프로야구 한신 타이거스 소속의 투수 고바야시 시게루의 투구 폼을 모사 한 것이 호평을 받아서, 간사이에서 아이돌적인 인기를 얻는다.
- 1979년 칸사이 방송에서 사회자로 발탁되어 사회자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하게 된다.
4.2. 1980년대
- 산마는 1980년부터 1982년까지 방영한 프로그램 <The Manzai>에 요시모토 흥업 소속의 동료 개그맨들과 함께 출연하여 전국적으로 얼굴을 알리기 시작했다. 산마는 <The Manzai>의 2대 사회자였다.
- 1981년부터 オレたちひょうきん族(우리들은 익살족)에 출연하여 블랙 데빌, 빠텐맨 등의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대중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아카시야 산마는 전후 이래 칸사이 출신 개그맨으로서는 처음으로 전국민적인 인기를 얻은 개그맨이었다.
- 1983년 4월 18일, 한창 인기를 끌던 아카시야 산마는 의붓동생이 화재로 사망했다는 비보를 듣게 된다.[9] 당시 아카시아 산마는 사이가 매우 돈독했던 형제의 죽음으로 엄청난 충격과 슬픔에 빠져 코미디 방송에서도 웃을 수 없게 되버려 연예계를 은퇴할 생각까지 하게 되었는데, 이 당시 같이 활동하던 친한 동기 게닌인 "올 쿄진"이 산마랑 만담 중, 갑자기 "너가 니 동생을 구워버렸잖아."라고 말한 것을 듣고서는 순간적으로 이것이 어떻게든 자신을 정신차리게 하려는 목적임을 깨닫고 "뭐라카노! 기야, 땔감이 없어가 대신 태운기라고."라면서 즉석에서 블랙 코미디를 시전해 관객들을 터지게 했다. 이후 컨디션을 되찾는 것에 성공했고, 연예인을 그만 둘 생각을 접게되었다고 한다.#
- 1984년 2월 13일. 아카시야 산마는 <모리타 카즈요시 아워 웃어도 좋다고!>의 텔레폰 쇼킹 코너에 게스트로 출연하였다. 시청자들의 반응이 좋자 산마는 금요일 코너에서 레귤러로 출연하기 시작했다. 특히, 타모리와 산마 두 사람이 10분 동안 자유롭게 토크를 하는 코너가 큰 인기를 끌었다. 또한 이 때의 인연으로 1985년 5월 31일에 열린 제1회 도쿄 국제 영화제 개막식에서 타모리와 함께 사회를 보았다. 그러나 시상식 사회를 처음 본 아카시야 산마가 소피 마르소 등 해외 배우들에게 무례한 언사를 한 것이 문제가되어 「실없이 까부는 사회자」, 「소피 마르소는 분명 아카시야 산마를 진짜 블랙 데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라는 등 언론매체에서 아카시야 산마의 진행 태도를 문제삼는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후 <모리타 카즈요시 아워! 웃어도 좋다고>에서 타모리는 "우리들은 이런 취급밖에 못 받는건가!"라고 외치고 산마는 "내가 해냈어!"라며 되받아치는 등 이를 토크의 소재로 삼았다.
- 1985년 2월 1일, 일본의 악명 높은 황색 언론인 프라이데이는 아카시야 산마가 비밀리에 일반인 여성과 동거 하고 있다고 폭로하면서 도쿄에 위치한 어느 술집에서 산마와 어떤 여성이 함께 술을 마시며 환하게 웃는 사진을 특종으로 내보냈다. 이것은 아카시야 산마의 첫번째 연애 스캔들이었고 이후 그는 파파라치에 가장 많이 찍힌 연예인 1위가 되었다. 물론 프라이데이에 가장 많이 찍힌 연예인 중 한명이기도 하다. [10]
- 1985년, 아카시야 산마는 바쁜 스케줄 때문에 비행기를 애용하다가 일본항공 123편 추락 사고에 휘말릴 뻔했다. 원래 산마는 123편에 탑승할 예정이었으나, 일이 예정보다 일찍 끝나는 바람에 전일본공수로 갈아타서 다행히 화를 면했다고 한다. 아카시야 산마는 이 때의 트라우마로 잠시 활동을 중단했으며 이후 도쿄와 오사카를 왕복할 때는 신칸센을 이용하게 되었다. 산마의 좌우명 生きてるだけで丸儲け(살아있는 것만으로 이득)는 이때 생겨났고, 딸 이마루의 가명도 저 좌우명을 줄여 붙인 것.
- 다시 연예계로의 복귀를 준비했을 때 아카시야 산마는 그동안 자신의 활약에 비해 소속사인 요시모토 흥업으로부터 받는 돈이 너무 적았다는 사실을 알게되었고 이에 큰 배신감을 받아 개그맨으로서 한창 인기를 얻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크나큰 리스크[11]를 견뎌낼 각오를 하면서까지 요시모토 흥업과의 계약을 해지하고 다른 곳으로 소속사를 옮길 것을 진지하게 고민했다. 결국, 아카시야 산마는 요시모토 흥업의 도쿄 지사장이었던 기무라 마사오와 담판을 지어 매니지먼트는 그대로 요시모토 흥업에서 하되 개런티 관리를 위한 개인 사무실은 따로 마련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 1986년, TBS 테레비에서 방영된 드라마 <남녀 7명의 여름 이야기>의 남자 주연으로 출연하여 아카시야 산마는 연기자로서도 큰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이 드라마는 일본 트렌디 드라마의 시초로 평가 받는다.
- 1987년 1월 12일, 자신의 대표 방송인 산마노만마(さんまのまんま)가 31.8%의 시청률을 달성하고, 1987년 7월 18일 ~ 7월 19일까지 생방송된 제 1회 FNS의 날 'FNS 슈퍼 스페셜 1억명 텔레비전 꿈의 열기'와 1989년, 「FNS 슈퍼 스페셜 1억명 텔레비전 꿈 열도 '89」의 종합 사회를 타모리와 함께 진행하는가 하면[12] 1985년부터 1989년까지 5년 연속으로 NHK의 「좋아하는 탤런트 조사」에서 1위를 하는 등 국민 개그맨의 위치에 오른다. 한마디로 산마의 리즈 시절.[13]
- 1987년, 남코에서 패미컴용 게임, '산마의 명탐정'을 출시하였다. 그러나 소속사인 요시모토 흥업이 아카시야 산마의 허가를 구하지 않고 업체에 제작과 발매를 허용했기 때문에 정작 산마는 게임이 발매된 후에야 자신을 주인공으로 한 게임이 나왔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참고로 이 게임에는 동기인 시마다 신스케 등 실제 요시모토 소속의 연예인들이 꽤 나오는데 산마처럼 자신이 게임에 출연한다는 것을 몰랐던 연예인이 많았다고 한다.
- 1988년 9월, <남녀 7명의 여름 이야기>에서 같이 공연한 여배우 오오타케 시노부[14]와 실제로 결혼하여 화제의 중심에 올랐다. 오오타케는 사별한 전남편과의 사이에 외동아들이 있었지만, 산마는 그를 친아들처럼 친절하게 대했고 의붓아들 또한 두 사람의 이혼 이야기가 나왔을 때, "새아버지를 따라갈 것"이라고 말할정도로 산마를 따르고 있었다고 한다. 1989년 9월에는 두 사람 사이에서 장녀 이마루가 태어난다.
4.3. 1990년대
- 1992년 9월 결혼생활 4년만에 부인 오오타케 시노부와 이혼했다. 산마는 이마루가 태어나자 한창 전성기임에도 자신이 진행하던 프로그램을 줄일 정도로 가정에 충실한 남편이자 아버지가 되고자했고 시노부도 그렇게 해주기를 바랬다. 시노부는 처음에 산마의 의견에 동의하며 연예계를 은퇴했지만 가정 주부와 여배우로서의 정체성 차이에 혼란을 겪다가 산마가 연예계 일을 줄인 것과, 은퇴에 대해서 동의한 것은 무시하고 1990년 연예인으로서의 복귀를 선언한다. 이외에도 일본 거품 경제가 극에 달했던 시기에 산마는 오오타케 시노부의 의견을 따라서 8억5천만엔을 주고 건물을 매입했는데 90년대가 되면서 거품이 붕괴하여 집값이 3억엔으로 떨어지면서 5억엔의 빚이 생겼다고 한다. 한편 주간지에서는 아카시야 산마가 다른 여성들과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기사들을 자주 내보냈다. 결국 계속해서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한 부부관계는 파극으로 치달았고 결혼 4년만에 합의 이혼을 하게 되었다. 훗날 오오타케 시노부는 인터뷰에서 "50대가 된 지금의 두사람은 부부가 모든것을 똑같이 공유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당시에는 젊었기에 상대방이 원하는 모든것을 해주지 못한다면 차라리 헤어지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 헤어졌다."고 말했다.
전설의 바츠이치 기자회견. 밑에 여자는 오오타케 시노부.
- 이혼을 발표할 때, 두 사람은 기자회견을 따로따로 했는데 산마는 본인의 이혼 기자 회견장으로 가는 도중, 이혼을 하면 호적에 빨간색으로 "X"표시가 된다는 말을 듣고, 자신의 왼쪽 이마에 검은색으로 "X"자를 그려놓는다. 이는 바츠이치(X가 1개'라는 뜻.)라 불리며 언론에 대서특필 되었고 이후 일본내에서 "바츠(X)"가 이혼을 의미하는 속어로 퍼지게 된다. 참고로 아이들의 양육권과 친권은 시노부가 가져서 이마루의 姓은 스기모토가 아니고 오오타케이다.(산마의 본명=스기모토 타카후미.) 그렇지만 이혼했어도 산마는 아이들하고 자주 만나고, 기념일에는 4명 모두 모여서 식사를 하는가 하면, 매번 시노부의 무대에 산마가 보러오고, 심지어 정기적으로 쇼프로에 같이 출연해서 이혼네타까지 하는 사이이다.[15]
- 1990년대 초반에는 다운타운과 웃짱난짱 등 오와라이 3세대의 인기가 급상승하고 산마 본인의 이혼으로 인해 1985년부터 5년간 연속 1위였던 NHK의 「좋아하는 탤런트 조사」에서 1위를 뺏기는 등 일시적으로 인기가 하락세였다.
- 1995년 여름, 전년에 오토바이 사고로 다친 비트 다케시를 돕기 위해 제 9회 'FNS의 날 1억 2500만명의 슈퍼 꿈의 열도' 중 '어떻게든 ... 23시간'에 출연했다. 방송에서 비트 다케시는 가위를 들고 아카시야 산마의 대기실에 침입, 산마의 패딩 점퍼를 가위로 자르고 게임기를 망치로 박살내었으며 심지어는 막판에 아카시야 산마가 실제로 타고다니는 차를 부수었다. 그리고 이 광경을 보고 아카시야 산마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 앉아버렸다.[16] 이 장면은 일본 대중들에게 큰 화제를 일으켜서 비트 다케시는 개그맨으로서 성공적인 복귀를 할 수 있었고 아카시야 산마 또한 다시 대중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 결과 아카시야 산마는 1995년, NHK의 「좋아하는 탤런트 조사」에서 다시 1위를 기록했다. 그러나 훗날 산마 본인은 "이 때 자신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다케시의 보조였을 뿐이었다."고 회고했다.
- 1995년 9월 29일, 11년 반동안 레귤러였던 후지 TV의 프로그램 "모리타 카즈요시 아워! 웃어도 좋다고!(와랏테 이이 토모!)"를 공식적으로 졸업했다. 그러나 90년대부터 아카시야 산마는 타 프로그램에 출연하지 않고 본인의 칸무리 방송에만 주력하는 모습이었으며, 당시 주간지에서 타모리와 산마간의 불화설을 다룬 기사들을 많이 내보냈기 때문에 산마의 하차선언에 충격을 받은 시청자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고 한다. 무엇보다 이미 아카시야 산마는 와랏테 이이토모의 연말특집 '와랏테 이이 토모! 특대호'에 2년 연속으로(1993년, 1994년) 출연하지 않고 있었다.
4.4. 2000년대
- 2002년 한신 타이거스 감독과의 친분이 있었던 산마는 호시노 센이치가 취임했을 때, "우승하면 우승 퍼레이드에 참가하고 무릎을 꿇겠습니다"라고 밝혔다. 2003년 리그에서 한신 타이거스가 우승하자 요미우리의 팬이었던 산마였지만, 약속대로 11월 3일의 퍼레이드에 참가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호시노 감독이 사의를 표명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장난삼아 갈 수는 없는 노릇"이라며 참여가 무산되었다. 대신, 이 당시 산마가 사회를 맡은 한신 타이거스 우승 특별 프로그램이 아사히 방송·텔레비전 아사히 계열에서 전국 방송되었고 호시노 감독 외에 주력 선수들이 게스트로 출연했다. 이 특집의 간사이 지구 시청률은 33.4%로 높았다.
- 2004년 한국 드라마 '겨울 연가'의 주연 배우인 배용준이 "욘사마"라고 불리면서 큰 인기를 끈 것을 보고, 그의 머리 모양을 흉내낸 가발을 쓰고 미소를 보이며 스스로를 "산사마"라고 칭하며 웃음 자아냈다.(니혼tv 사랑, 연애의 헛소동의 "산마 사랑의 설교 방" 코너에서 "욘사마"의 코스프레를 한 것을 계기로 탄생하였다.)
- 2004년 '히코 하치 축제'에 실행 위원장 쇼후쿠테이 츠루베의 요청에 응하는 형태로 출연했다. 많은 인파들로 인한 혼란을 피하기 위해 출연 날짜는 공개되지 않았다. 그러나 출연하기 직전에 정보가 새나갔고 축제의 방문자는 예년의 2배인 10만명을 넘어서 역대 최다 기록을 경신했다.
- 2005년 50세 생일기념 프로그램으로서 '아카시야 산마의 축제'를 생방송. 후지 TV 계열의 25시간 TV(2005년 「FNS ALLSTARSあつい 25시간 TV 역시 즐거워야 텔레비전 아니야!」)의 한 코너 '산마 · 나카이의 오늘 밤도 잠들 수 없는'에서 시마다 신스케와 오래간만에 공동 출연을 하였다.
- 2006년, 이시하라 마리코의 자서전 <고르지 않은 비밀>에서 자신이 과거에 아카시야 산마와 연인관계였음을 폭로했다.[17] 이후 아카시야 산마는 스스로 연말 산마 X SMAP 특집에서 이 폭로를 네타로 써먹었다.
- 2006년 12월 16일 TBS에서 방영된 본인 주연의 드라마 <스무 살의 연인>의 마지막회가 끝날 즈음을 노려서 FIFA 클럽 월드컵의 총집편에 출연했다. 그러나 게스트로 출연한 AC밀란의 선수를 손가락질하고, 옷을 벗기려고 소란을 떨어서 비난을 받았다.
- 2008년 7월 26일부터 7월 27일까지 1989년 이후 19년만에 FNS 27시간 TV "FNS 27시간 TV!! 모두 웃는 얼굴의 꿈의 열도!!"의 종합 사회를 담당했다. 평균 시청률은 13.8%, 최고 시청률은 26.7%를 기록.[18]
- 2009년, 딸 이마루가 연예계 데뷔. 산마는 딸의 연예계 데뷔를 무척 반대했지만 이마루는 산마의 반대를 무릅쓰고 데뷔했다고 한다.
- 2009년 8월 6일 방송분의 텔레비전 아사히 계열 『아메토크』에, 아메아가리 결사대 결성 20주년 기획의 깜짝 게스트로 출연. 당초, 산마의 텔레비전 아사히 계열 방송 출연은 14년 만이라고 보도되었지만, 실제로는 1999년 4월 16일자 '뮤직 스테이션'의 생방송에 게스트로 출연한 적이 있다.
4.5. 2010년대
- 2011년 7월 2일, 치하라 쥬니어를 게스트로 맞이한 "산마노만마"에서 주니어는 "언제 (개그맨을) 그만둘 생각이십니까?"라고 질문했고 산마는 "60세 정도에 은퇴할 생각이야, TV는"라고 대답. 산마가 60세에 TV 은퇴를 표명했다로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2014년 4월 이를 철회했다.
- 2012년 7월 21일, 후지 TV에서 생방송 된 'FNS 27시간 TV 와랏테 이이 토모! 한여름의 초 단결 특대 호!' 밤새 열심히 해줘도 될까?에서 산마와 타모리, 비트 타케시의 공동 출연이 실현되었다. BIG3가 같이 텔레비전에 나온 것은 1999년의 「타모리, 타케시, 산마 BIG3 세기의 골프 매치」 이후 13년만이라고 한다. 또한 "27시간 TV (FNS의 날)"에 세 사람 모두가 같이 출연한 것은 1996년 이후 16년만이라고 한다.
- 2013년 2월 1일 NHK와 니혼 TV가 텔레비전 방송 개시 60주년을 기념 해 공동 제작한 대형 특별 프로그램 "60번 승부"의 니혼TV의 츠치야 토시오에게 제안을 받고 출연. 산마의 NHK 출연 자체는 1985년의 연속 TV 소설 '미오 쯔쿠시' 이후 28년만이라고 알려져있지만, 실제로는 1999년에 친구인 나카무라 칸쿠로가 주연을 맡은 대하드라마 "겐로쿠 요란"에 쇼후쿠테이 츠루베와 함께 게스트 출연한적이 있기 때문에 14년만에 출연이 옳다. NHK 제작의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출연은 산마 본인마저도 "퀴즈 재미 세미나" 1983년 2월 27일 방송분 이후 실로 30년만이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 후에도 이 프로그램에 여러 번 출연하고 있었다.
- 2014년 타모리의 대표방송이었던 모리타 카즈요시 아워 웃어도 좋다고!(笑っていいとも!)의 최종편인 그랜드 피날레에서, 산마와 타모리의 토크와, 옛날에 장기적으로 진행했던 코너였던 <타모리와 산마의 일본 최저인 남자>를 재현했다. 원래는 산마가 물러난 후, 그 다음에 다운타운이나 나인티나인 같은 전설급 게닌 콤비들이 순서대로 나오면서 진행자인 타모리와 덕담을 나눴어야 했는데, 산마와 타모리, 청중들이 신이 나버리는 바람에 10분 정도만 출연할걸 30분이나 진행해 버렸다. 결국 못 참은 다운타운과 웃짱난짱[19]이 화를 내며 난입해버렸고, 급기야 하마다 마사토시가 테이프를 들고 산마의 입을 강제로 막아버렸다.[20] 그럼에도 동작을 이용한 애드리브로 계속 웃겨서 마츠모토 히토시는 "(말하지 않아도 웃지 않아도) 계속 팔리는구만!"이라고 외쳤다. 그것에 적절하게 츳코미를 하는 하마다는 덤. 그 이후 톤네루즈, 폭소문제, 나인티나인이 한꺼번에 나오면서, 로얄럼블을 연상케 하는 전설들의 개판이 벌어졌다.[21] 결국 나카이 마사히로가 겨우겨우 수습하고 쇼후쿠테 츠루베가 같이 올라와서 마무리했다. 당연히 방송 관계자들이 화를 냈고 산마는 후에 사과하였다. 의도했다고는 보이지 않지만 서로 공연은 NG라는 설이 공공연히 돌았던 톤네루즈와 다운타운[22], 다운타운과 폭소문제가 같은 무대에 오른 장면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산마의 공일지도.[23]
5. 개그 스타일
- 아무리 사소한 소재라도 개그를 시도할 수 있는 부분이 있으면 그냥 넘기지를 못하고 한마디씩 해서 웃음을 만들어내는 스타일. 특히 섹드립에 강하고 토크의 템포가 무너졌을 때 재빠르게 상황을 판단헤서 적절한 츳코미나 보케를 넣는 것으로 유명하다. SMAPxSMAP에 출연 했을 때는 나카이 마사히로가 의자를 빼주자 "이 장면에서 4, 5개는 보케를 던질만한게 있는데 그냥 이렇게 빼주면 어떡하냐"는 말을 하기도 했다. 또 같은 방송에서 츳코미에 관해서는 "0.몇 초의 세계다. 시청자가 하고 싶은 말을 시청자가 떠올리기 바로 직전에 하는 츳코미가 가장 좋은 츳코미다"라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 사람을 웃기는데 있어서는 엄청난 장인정신을 가지고 있어서 웃기기만 한다면 뭐든 상관없다라는 자세를 가지고 있다. 아카시야 산마는 웃음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남들이 안좋게 보는 소재도 가리지 않고 토크의 소재로 쓰며 웃기기 위해서는 어떤 말도 서슴지 않는다. 덕분에 자신의 이혼 네타를 좋아한다. 아무리 못해도 평타는 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그런듯. 아카시야 산마는 자기의 약점이 상호 협의 없이 얘기될 때에도 그냥 넘어가지만 반대로 웃기기 위해 상대방의 동의 없이 상대의 비밀을 폭로해버리거나 치부를 드러내는 일이 잦다. 일례로 카고 아이가 미성년자임에도 흡연한 사실이 적발된 후 오랜 자숙기간을 거쳐서 겨우 연예계에 복귀했을 때 산마의 방송에 출연했는데 이 때 산마는 그녀에게 담배를 권하며 웃음을 이끌어냈다.[24] 이런 가차없는 면모와 수 많은 연애 스캔들 때문에 아카시야 산마는 게닌으로서 남을 웃기는 능력은 인정받지만 사적인 면에서는 평가가 별로 좋지 않은 연예인이다.
- 토크에서는 거짓말을 하거나 적당히 둘러대도 그걸 바탕으로 이야기를 넓혀갈 수 있으면 그만이라는 주의다. 대신, 자기가 질문을 던지면 게스트는 바로 대답을 해야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토크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해도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생각을 하고 있으면 화를 낸다. 실제로 일반인이 도저히 웃길 거리가 없는 이야기나 답변을 해도 그 속에서 뭔가를 캐치해 내 웃음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주 능하다. 덕분에 개그맨들은 산마의 방송에 출연할 때 애드립에 대한 엄청난 압박을 받는다. 압박을 줄 뿐만 아니라, 게스트가 막 던진 이야기도 어떻게든 살려서 주워먹게 해주려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이건 일반인한테도 마찬가지) 그런 부분에서 다소 엄격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마의 방송에 나오는 신인 개그맨들을 보면 그 사람의 대략적인 토크 실력과 순발력을 알 수 있다.
- 콤비 위주의 일본 예능계에서 솔로로 활동하는 핀 게닌이 프로그램 진행, 토크에서의 보케와 츳코미, 에드립, 콩트, 몸개그, 리액션, 성대모사, 유행어, 일본의 전통 희극인 라쿠고와 만자이까지 전부 커버가능한 능력을 가진 경우는 거의 없다. 산마의 요시모토 후배이자 전설적인 오와라이 콤비인 다운타운조차도 진행은 하마다, 웃음분량은 마츠모토 둘로 나뉘어서 할 정도. 특히 산마가 더욱 돋보이는 점은 여타 콤비들과 함께 방송에 출연했을 때 존재감이 묻히기는 커녕 가장 압도적으로 주목받고 분량을 뽑아낸다는 점이다. <모리타 카즈요시 아워 웃어도 좋다고! 그랜드 파이널> 당시에도 여러 거물급 게닌들이 총출동한 와중에 가장 큰 핵심 분량이랑 웃음은 산마가 계속 뽑아냈다. 또다른 천재적인 개그감과 애드립으로 유명한 마츠모토 히토시조차도 계속 웃음을 만드는 산마를 보고 "이 아저씨 계속 잘 팔리네"라며 반농반진으로 감탄했다. 같은 오와라이 BIG3로 군림하고 있는 비트 다케시조차도 웃음을 만드는 능력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산마를 도저히 당해낼 수 없다고 누누히 말했다. 한마디로 어떤 개그도 소화해 낼 수 있는 일본 개그계의 올라운더이자 혼자서 웃음과 분량을 만들어 내는 능력은 일본 개그맨들 중에서도 단연 톱인 개그맨이다.
이런 스타일 때문에 아메토크에 출연했을 때는 아메아가리 20주년 특집이었음에도 방송시간 대부분을 본인의 이야기로 채웠고, 본래 메인으로 준비되어있던 아메아가리 연표의 뒷부분은 방송시간 관계상 훌렁훌렁 넘어갔다. 이 방송에서 나온 에피소드로, 신칸센에서 말을 걸었던 일반인 아저씨가, 말이 끊기지 않는 산마에 질려 간식캐리어가 지나가는 틈을 타 자는척을 했다고 한다.물론 산마는 이 아저씨를 깨워서 대화를 이어나갔다고. 실로 오와라이 몬스터.
6. 일본에서의 인기
- 1980년대 중반부터 2024년 현재까지 일본 방송계의 탑으로 군림하고 있다.
- NHK가 1975년부터 2003년까지 매년 실시했던 좋아하는 연예인 조사에서 1985년, 처음으로 남성 1위에 선정 된 후 2003년 조사 종료까지 이 설문조사에서 남성 1위를 12번이나 차지했다.[25] 게다가 나머지 연도에서는 모두 남성 2위였다.
- 1999년에 일본에서 가장 노출이 많은 텔레비전 스타로 기네스북 세계기록 인증을 받았다.
- JNN 데이터 뱅크 조사에 의한 국민적 호감도 탤런트 지지율 조사에서는 1987년 10월 지지율 41.3 %, 1999년 5월에 지지율 43.1%를 기록했고, 1980년대와 1990년대에도 모두 1위를 기록하였다.
- 「닛케이 엔터테인먼트」의 「좋아하는 게닌」 순위에서 처음 시작된 2002년부터 2011년까지 10년 연속 1위를 차지했다. 3년만에 부활한 2014년의 랭킹에서도 1위, 2015년 2년 연속으로 1위를 차지해 랭킹 12연패와 함께 압도적인 인기를 얻고있다.
- 2012년 TBS 「퀴즈 탤런트 명감」 5000명에게 설문한 '정말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연예인 랭킹', '좋아하는 사회자 랭킹', '좋아하는 연예인 랭킹'의 모든 항목에서 1위를 차지했다.
- 오리스타 '좋아하는 사회자 랭킹'에서 2011년 첫 1위를 달성. 2014, 2015년 2년 연속 1위를 차지하고 있다.
- 매년 실시하는 비디오 리서치 인기도 조사에서도 상위권에 랭크하는 등 여전히 높은 인기를 유지하고 있다.
- 2015년 5월에 전국의 20대 이상의 일본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인지도조사[27]에서 인지도 96%로 1위를 차지했다.
7. 야나기야 킨고로와의 공통점
오와라이 평론가 사이조 조슈를 필두로 전쟁 전부터 전후에 걸쳐 코미디계 톱스타로 활약한 야나기야 킨고로와 현재의 산마의 공통점을 지적하는 이가 적지 않다. 이 둘의 공통점은 다음과 같다.- 두명 모두 라쿠고꾼(만담꾼)을 출발점으로 하여 라쿠고꾼의 틀을 뛰어넘은 슈퍼스타가 되었다. 킨고로는 타이쇼 시대 말에 <병대 라쿠고>로 한 시대를 풍미하였고, 그 후에는 영화나 경연극에 진출한 후에 1942년 라쿠고꾼으로서의 감찰을 반납한 후 희극 배우로서의 일에 전념한다. 세계 2차 대전 종료 후에는 <오토라상>, <제스쳐> 등에서 TV 탤런트로 인기를 끌었다. 산마는 쇼쿠후테이 마츠노스케의 문하생으로서 라쿠고꾼으로서의 삶을 시작했으나, 현재는 TV 탤런트, 사회자, 배우로 대활약하고 있다.
- 두명 모두 요시모토 흥업이 배출한 톱스타이다. 현재 산마가 요시모토를 대표하는 톱스타이고, 그 연수입도 톱 클래스인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이나, 킨고로도 세계 2차 대전이 발발하기 전에는 도쿄 요시모토에 소속하여 요코야마 엔타츠, 하나비시 야차코, 야나기야 미키마츠, 카와다 하루히사와 함께 요시모토의 5대 스타로 칭송받았다. 그리고 전쟁 전, 요시모토에서 가장 많은 급료를 받은 것 또한 킨고로였다.
- 두명 모두 오와라이계 빅3 중 한명이다. 킨고로는 희극 배우인 에노모토 켄이치, 후루카와 롯빠와 함께 빅3라고 불리곤 했다. 산마 또한 타모리나 비트 다케시와 함께 빅3으로 여겨진다. 어느쪽이든 그 시대에서 롱런한 예능인이다. 킨고로는 타이쇼 시대 말의 <병대 라쿠고> 이후로 기나긴 인기를 끌어모으며, 전쟁 후에는 인기를 잃어가는 에노모토 켄이치와 후루카와 롯빠를 남겨두고 TV 시대의 파도에 편승하여 만년까지 제 1선에서 활약했다. 산마도 1981년 <우리들은 익살족>을 시작으로 전국규모의 유명인이 된 이래로, 최근 젊은 예능인을 필두로한 개그 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기나긴 세월에 걸쳐 오와라이계 탑의 자리에 군림하고 있다.
8. 불화가 있었던 방송사
8.1. NHK
- 1980년대에 "퀴즈 재미 세미나", 연속 TV 소설 "미쯔오쿠시"에 출연한적은 있지만 1990년대 이후 출연은 거의 없다. 불과 1999년 대하 드라마 "겐로쿠 요란"의 카메오 출연과 2013년 'NHK 60주년 × 니혼 테레비 60 번 승부'에서 출연한 것이 전부이다.
- 1999년에 방송된 대하 드라마 「겐로쿠 요란」에서 산마가 갑자기 카메오로 출연을 한 까닭은 주연을 맡은 나카무라 칸쿠로가 산마에게 직접 요청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방송을 모니터한 산마가 본인의 촬영분이 제대로 실리지 않았다고 불만을 토로해서 둘 사이에 싸움이 났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 2013년 2월 1일 방송된 'NHK × 니혼테레비 60번 승부'에 출연했을 때, 함께 출연한 나카이 마사히로와 폭소문제로부터 「제64회 NHK 홍백 가합전」 사회자 진행을 요청 받았다. 산마도 홍백 사회자에 의욕을 보였지만 결국 실현되지 않았다. 산마는 "과거에 NHK로부터 홍백가합전의 백팀 사회를 맡아달라는 제의가 한 번 들어왔는데 거절한 적이 있었다. 다시 제의가 왔을 때는 받으려고 생각했지만, 그 이후 제안이 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 NHK 출연이 적어진 이유에 대해 아카시야 산마는 "퀴즈 재미 세미나에 출연했을 때 연필을 주제로 한 강의를 듣던 중, 내가 하품을 하는 모습이 그대로 방송되어 시청자들에게 불만이 접수되었기 때문이다."라며 방송에서 네타 소재로 쓰고있다.
- 2016년 말에 처음으로 NHK의 특별방송의 진행자로써 출연하였다. 이름하여 "제 1회 아카시야 홍백"(第1回明石家紅白). 홍백가합전이 열리기 전에 방영된 음악방송이며, 산마가 좋아하는 음악가들이 출연하였다. 도쿄 스튜디오하고 오사카 스튜디오에서 한번씩 녹화한것을 합쳐서 1시간 가량의 방송으로 진행되었는데, 여기서도 산마의 토크실력이 발군해 뮤지션들이 오히려 묻혀버릴 뻔해서, 출연자들에게 츳코미를 받았다. 참고로 방송되기 하루전에 출장 아티스트들 목록이 발표되었는데, 이키모노가카리나 케야키자카46는 실제로 그해의 홍백에 참가하게 되고, 피코타로[28]는 하프타임쇼의 게스트로써 출연하였다. 그 외 출연자들은 Little Glee Monster, 마키하라 노리유키 등.
8.2. 아사히
- '산마 뭐든지 더비'에서 발생한 자신과 테레비 아사히의 마찰로 인해 1995년 9월 프로그램이 갑자기 종영된 후, TV 아사히에서는 레귤러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지 않다. 심지어 방송국에 출연 자체를 거의 하지 않는 정도. 2009년, '아메 토크'에 출연하기 위해 처음으로 현 본사에 들어갔다고 한다.
- 그러나 계열국인 아사히 방송과의 관계는 나쁘지 않아서 레귤러 프로그램은 없지만 전국 특별 프로그램은 1년에 몇 번 출연하고있다.
8.3. TV 도쿄
- 사회를 맡은 '토요일 밤의 쇼'가 산마와 아와지 케이코와의 섹드립 토크로 호평을 받아서 최고 시청률이 13%라는, 당시 심야 방송 프로그램 중 최고 시청률을 획득했지만 "저런 야한 프로그램은 보기에 안좋다."라는 상층부의 판단에 의해 갑자기 종영되었고 이에 산마 본인은 엄청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지금도 산마는 TV 도쿄에서는 래귤러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공개적으로 "이 사건으로 인해 시청률이 높든 말든 더 이상 숫자에는 연연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개그맨으로서의 삶에서 엄청나게 도움이 되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 그러다가 2018년에 절친한 후배인 데가와 테츠로가 진행하는 <데가와 테츠로의 충전해 주셔도 괜찮겠습니까?>란 방송에 게스트 출연하면서 34년만에 TV 도쿄에 출연하게 되었다. 산마 본인은 "데가와의 방송이라 신경 안쓰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TV 도쿄의 방송이더라. 하지만 뭐, 34년이나 지났으니."라며 출연을 승락했고, 이에 TV 도쿄의 사장마저 감사의 코멘트를 남겼다.
9. 축구
- 본인에 의하면 고등학교 시절 학교내에서 인기 있는 축구 선수였다고 한다. 연예인으로서 최고로 인기가 있었던 1980년대에는 일본 축구 리그 캠페인 포스터의 모델로 선정되었으며, 비트 타케시와 모치즈키 미키야, 함께 연예인 축구팀 '더 미라'의 발기인이기도 했다. 2002 FIFA 월드컵이 개최되기 전에는 후지 TV 에서 「산마의 천국과 지옥」이라는 축구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았다.
- 월드컵과 클럽 월드컵 등의 관련 프로그램에서는 탤런트 필두 격으로 캐스터와 해설자를 맡는 일이 많다. 아카시야 산마는 감독과 선수에게 츳코미를 넣어 프로그램을 북돋어 주는 것에 정평이 나 있다.
- 2011년 12월 18일 일본에서 개최 된 축구 클럽 세계 제일을 결정하는 FIFA 클럽 월드컵 2011 결승전에서 우승 MVP로 선정 된 FC 바르셀로나(스페인)의 리오넬 메시를 사전 예고도 없이 현장에서 돌격 인터뷰를 실시하여[29] "노후 계획은 어떻게 되나요?"[30]라는 질문을 했다.
메시는 "아직 먼이야기라 생각해본적이 없다"라고 냉정하게 대답했지만 이에 대해 일본 내에서는 "큰 경기를 치른 직후여서 지쳐있고 한창 세레머니하고 있는 와중에 큰 무례였다"는 등 비판이 쇄도 하였다. 이 모습은 동영상 공유 사이트에 업로드 되었고, 스페인과 메시의 모국 아르헨티나의 미디어에서도 "이상한 인터뷰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지금까지 경험한 적이없는 이상한 인터뷰"라고 밝혔다. 또한 영국의 축구 전문 매체는 "일본의 개그맨 아카시야 산마에 의한 바르셀로나의 스타로 비참한 인터뷰는 일본이라는 나라의 축구 방송의 좋지않음을 보여주었다"고 보도했다. 스웨덴에서는 "독점 인터뷰에 실패"했다고 보도했다.
이러한 전세계 언론의 비판에 대해, 산마는 2011년 12월 24일 방송 된 MBS 라디오 "영 타운 토요일"에서 "메시는 출연 예정이 없는데 일본 테레비가 무리하게 날치기 같은 느낌으로 데려왔다"고 방송국의 지원으로 메시 선수가 시종 불만이었다는 것을 밝혔다. "두번 다시는 메시와 만날 수 없다"며 복잡한 심정을 밝혔다. 메시는 2011년 12월 31 일자 스포르트 종이의 인터뷰에서 은퇴에 대해 "가족과 친구들이 있는 로사리오에서 생활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아르헨티나의 저널리스트 레오나르도 화치오는 메시의 평전에 "공연히 메시의 은퇴 후를 걱정하는 경우가 있다"고 쓴데다가, 산마의 질문과 메시에 대답을 언급하고 있다.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팬이라고 한다.
10. 어록
※ 실제 아카시야 산마가 한 이야기를 올려주십시오- "내일은 오사카 악수회, 모레는 센다이 악수회에 와줘"라고 말해서 와주는 남자는 없어. 그게 남자친구든 남편이든 그런 남자는 없어. 팬 뿐이야. 그런 제멋대로에 맞춰주는 건. 그러니까 사랑은 반드시 숨겨야 해. 그게 팬에 대한 성의야.[31]
- 사랑에 공부란 없어. 공부했다고 생각해도, 새로운 연애가 시작되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또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이 있어. 그것이 연애(사랑)라는 것이야.
- 결혼은 목표가 아니다. 시작이다. 게다가 도중에 장애물 경주로 바뀐다.
-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과거는 그 사람의 역사다. 그것을 부인하지 마라.
- 여자는 매일 다시 태어난다.
- 이혼하고 위자료와 양육비를 줘야했는데, 일시금으로 내기에 액수가 너무 커서 할부로 내거든. 위자료는 어떻게 몇 년만에 끝났고, 양육비는 애가 스무살 될 때 까지 매달 줘야 했었어. 언제는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매월 다달이 월급 받듯이 양육비를 받는 입장에선 이 돈이 아주 익숙할테니까 스무살이 지나고나서 두세달 정도 양육비를 더 입금해준다면 '그 사람 깜빡했나봐.' 하면서 내심 좋아하지 않을까? (좌중 웃음) 그렇게 하면 왠지 나를 잊지 않을거 같기도 하고
- 아무것도 생각해주지 않는 것보다는 싫어라도 해주는 편이 나아. 좋아하게 바뀔 가능성이 남아 있으니까.
- 타인에게 친절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이상의 슬픔을 짊어지고 있다.
- 세상에 오해만큼 무서운것은 없다.
- 정답이 가장 사소하다.
- 만점은 별하늘만으로 좋아.[32]
- 개그는 개그일 뿐이다.
- 나는 행복한 사람을 감동시키고 싶은 것이 아니라, 울고 있는 사람을 웃겨서 행복하게 하고 싶어. 이것이 내 웃음의 철학이야.
- 어두운 사람이 조금이라도 웃을수 있게, 되도록 내가 나오는 한 밝은 화면을 전달하고 싶다는 그런 주의로 살고 있으니까.
- 예능에서 감동의 눈물은 필요없다. 개그맨이라면 웃겨서 눈물을 흘려야 한다.
- 개그는 싸우는 거 하고 달라. 그 사람이 가장 재밌다고 생각하면 그것으로 좋은 거야.
- 개그에 순위를 매기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 자신이 재밌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면 되는 것이다.
- 무슨 소리야. 우리들 웃기고 있잖아. 성실한 모습따위 보여서 어떡해.
- 승부는 노력의 요소로 좌우될 만큼 만만하지 않다.
- 궁지에 몰리지 않으면 안돼요, 뭐든 일은. 천천히 하면 제대로 되는 일이 없어요.
- 불안해 하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계속 노력하면 반드시 좋아진다.
- 하고자 하면 된다, 인간 같은 것은.
- 한번 꿈속을 살아봐. 매일이 꿈속이야.
- 20대때의 빚은 저금이다.
- 직장에 좋아하는 사람을 한명 만들어라. 그러면 출근하는 것이 즐거워진다.[33]
- 침체되기 쉬운 체질이란 감사의 자세가 부족한 원인.
- 나는 절대 침체되지 않아. 침울해지는 사람이란 자신을 지나치게 과대 평가하는 거야. 과대 평가하고 있으니 잘 안 돼서 풀이 죽는 거야. 인간이란, 오늘 된 것, 한 것이 전부야.
- 너는 정말 자신의 장점에 걸려넘어지는 타입일거야. 우리들 모두는 잘하는 것에 걸려 넘어지니까 말야.
-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이득.[34]
- 죽을 때 가슴이 설레고 싶어.
- 사람은 태어날 때는 알몸이다. 죽을 때에 바지(또는 팬티) 하나 걸치고 있으면 이긴 것 아닌가.
11. 출연 방송 소개
11.1. 현재 레귤러
- 통쾌! 아카시야전시대 (마이니치 방송, 월요일 23:53 - 24:59)
- 춤추는 산마저택 (니혼 테레비, 화요일 19:56~20:54)
- 혼마뎃카!? TV (후지 테레비, 수요일 21:00~21:54)
- 산마의 오와라이 웃음 향상 위원회 (후지 테레비, 토요일 23:10~23~40)
- MBS 영타운 (마이니치 방송, 토요일 22:00 - 23:30, 라디오)
11.2. 역대 방송 목록
- 열전!가요 더비 (TBS 테레비)
- 놀이 너무 하잖아!? (TBS 테레비)
- 과자 나? 산마! (TBS 테레비)
- 아카시야상 채널 (TBS 테레비)
- 영 오! 오! (마이니치 방송)
- 아카시야 다국적군 (마이니치 방송)
- 정글 TV ~ 타 모리의 법칙 ~ (마이니치 방송)
- 산마의 카라쿠리TV(텔레비전)((TBS 테레비), 1992년~1996년)
- 산마의 SUPER 카라쿠리 TV ((TBS 테레비), 1996년~2014년)
- 산마 · 타마의 세뱃돈 너의 꿈을 실현하는 타로 가지 스페셜 (1995년~연시 방송 / TBS 테레비 계열)
- 산마의 진짜 사랑 물린 소동 (2011년 - 비정기 특집 / TBS 테레비 계열)
- 아카시야 산마의 당신은 당신이 좋아! (2011년~비정기 특집 / TBS 테레비 계열)
- 아카시야 산마가 진심으로 내일이라도 살고 싶은 도시를 찾는 여행 (2011년 - 비정기 특집 / TBS 테레비 계열)
- 아카시야 산마의 유로 No.1! (WOWOW)
- Do-Up가요 텔레비전 (아사히 방송, 1984년 ~1985년)
- 생이다! 산마의 히트 매치 (아사히 방송, 1985년)
- 산마 미안 멋대로이고 (1986년 4월)
- 산마 뭐든지 더비 (1993년~1995년)
- 산마의 세계에서 하나 뿐인 노래 (2008년 - 비정기 특집 / 아사히 방송 제작)
- 산마의 연예계 와이드 쇼 가족 NO.1 결정전 (2011년 - 비정기 특집 / 아사히 방송 제작)
- Merry X'mas Show (후지 테레비, 1986년,1987년)
- 1억 명의 큰 질문!? 웃고가라 특기! (후지 테레비, 2004년~연말 연시 특집)
- 산마 & SMAP! 미녀와 야수의 크리스마스 스페셜 (후지 테레비, 1995년~연말 방송)
- 산마 대하 버라이어티! 초 근현대사! 인간은 여전히 바보냐!? (후지 테레비, 2007년~비정기 특집)
- 웃을 때입니다! (후지 테레비, 1980년~1982년)
- 모리타 카즈요시 아워! 웃어도 좋다고! (후지 테레비, 1984년~1995년 금요일 레귤러)
- 퀴즈 만담 그링프리 (후지 테레비, 1981년)
- 우리들은 익살족 (후지 테레비, 1981년~1989년 10월 14일)
- 아카시야 맨션 이야기 (후지 테레비, 1999년~2001년)
- 아카 시야 산마의 스포츠 할거야! 대 방송 (1993년~1997년)
- '장하다' 산마 시리즈 (후지 테레비, 1988년~2009년)
- FNS 대감 (후지 테레비, 1991년~1994년)
- 광고대상 (후지 테레비, 1991년~2011년)
- 산타쿠 (후지 테레비, 2003년~연말연시)
- 누가 하마 나 자지 않아 로큰롤 쇼 (칸사이)
- 사상 최대의 대망년회! 산마의 전일본 연회 연예 콘테스트 (후지 테레비, 2011년~연말연시)
- 타모리 & 산마의 폭소 태그 매치 (후지 테레비, 1987년 - 1992년 방송)
- 타케시·산마 유명인이 모이는 가게 (후지 테레비, 1997년~1999년)
- 아카시야 산마의 후지 테레비 대반성회 (후지 테레비, 2002)
11.3. 드라마
- 어머니의 보상 "제 1 화"(1978, TBS)[35]
- 용서하지 않습니다! "제 1, 2화"(1980, KTV) - 요시다 (형사) 역
- 천황의 요리사 (1980~1982, TBS) - 야마모토 죠우 역
- 해바라기의 노래 "제 15 화"(1981, TBS)
- 태평 군 1,2,3 (1983, 1984, 단막극, 후지 TV 월요일 드라마 랜드) - 첫 주연작.
- 바람안의 그녀석(1984, NTV)
- 이혼적령기 (1984, TBS)
- 마음은 론리, 기분은...시리즈 (1984~2003, 후지 TV)
- 봄바람 제일! (1986, NTV)
- 남녀 7명의 여름 이야기 (1986, TBS) - 주연 · 이마이 료스케 역[36]
- 남녀 7명의 가을 이야기 (1987, TBS)
- 아나운서 붓층 이야기 (1987, 후지)
- 방탄 낙오 시리즈 (1993~1994, TBS) - 주연
- 사랑도 두번째라면 (1995, NTV) - 주연
- 그런 기분이 될때까지 (1996, TBS) - 주연 · 다구치 겐이치 역
- 후루하타 닌자부로 (1996, 후지) - 게스트
- 사랑의 바캉스 (1997, NTV) - 주연
- 세상에서 아빠가 제일 좋아 (1998, 후지) - 주연
- 달콤한 생활 (1999, NTV) - 주연
- 하늘에서 내리는 1억개의 별 (2002, 후지) - 주연 · 도지마 간조 역
- 사탕 수수밭의 노래 (2003, TBS) - 주연
- 와다 아키코 살인 사건 (2007)
- 스무살의 연인 (2007, TBS 일요극장) - 주연
- 지옥 선생 누베 (2014) - 특별출연
11.4. 라디오
- MBS 영타운 토요일 (MBS 라디오, 1992년~, 토요일) - 업프론트 그룹/하로프로 계열 아이돌들과 공동 레귤러
- G1 Grouper (FM 도쿄, 1996년~1997년, 월요일)
- 아카시야 산마의 라디오 온 조! 도쿄 순회 윙윙 대 방송 (닛폰 방송, 1983년~1988년, 토요일)
- 롯데 얀스타 NO.1 (닛폰 방송, 1983년~1985년)
12. CM
レナウン「CHARGE」 (1984) | スズキ 「Hi PERSON 'S」 (1985) |
カルピス (1986) | キッコーマン (1986) |
興和「新コルゲンコーワ」 (1988) | カルビー「かっぱえびせん」 (1991) |
일본 텔레콤 (2000) | 일본중앙경마회 (2003) |
일본 코카콜라 | 토요타 ' 코롤라 아쿠시오' (2006) |
닌텐도 Wii (2007) | 키코망 (2009~) |
시오노기 제약 (2012~) | GREE 「낚시 ☆ 스타!」 (2012~) |
기린 「キリン濃い味デラックス」「キリン濃い味<糖質0>」 (2013~) |
13. 영화
- 만자이 다이코기 (1981)
- 지로쵸 청춘편 (1982)
- 사자주식회사 (1983)
- 팬티의 구멍 꽃밭에서 이븐트 (1985)
- 필살!브라운관의 괴물들 (1985)
- 골프 새벽 전 (1987)
- 이쿠카카에라 (1988)
- 꿈의 축제 (1989)
- 어디든 어디 (1990)
- 펑키 몽키 티처 (1991)
- 뺏겼어?! (1994)
- 해의 형제 (1997)
- 모두의 집 (2001)
14. 무대
- 비밀의 두 사람 (1991)
- 아카시야 산마 프로듀스 이번에도 꽁트뿐 (1992년~ )[37]
- 일곱명 정도의 병사 (2000, 2001, 2015)
- JOKER (2004)
- 카 이야기 (2006)
- 바르샤바코 (2009년)
- PRESS ~ 보도 ~ (2012년)
15. 저서
- 빅 기분 - 여러밤을 넘어 (1980)
- 스타의 객실배견 - 인기의 프라이버시의 침해 (1981)
- 이런 남자라도 괜찮다면 (1984)
- 리리가 본 친절한 무지개 (1992)
- 本人 vol.11 (2009, 공동)
16. 수상 경력
- 1982년 제 2 회 가오 명인 대상 신인상
- 1982년 제 10 회 일본 방송 연예 대상 호프 상
- 1983년 제 11 회 일본 방송 연예 대상 장려상
- 1985년 제 13 회 일본 방송 연예 대상 우수상
- 1985년 제 5 회 카오 명인 대상 대중 상
- 1985년 제 23 회 골든 애로 상 예능 상
- 1986년 제 14 회 일본 방송 연예 대상 특별상
- 1987년 제 15 회 일본 방송 연예 대상 대상
17. 이야깃거리
- 아카시야 산마와 시마다 신스케 두 사람은 서로를 가장 절친한 친구라고 공공연히 말해왔으며 시마다 신스케가 불명예 은퇴하기 전까지 두 사람은 각자가 진행하는 칸무리 프로그램에 단골 게스트로서 자주 출연했다. 실제로 두 사람은 아무 거리낌없이 서로의 집에 출입하는 사이일 정도로 친하다고 한다.
- 같은 게닌 Big 3인 타모리와도 10살이라는 나이차를 신경쓰지 않고 무척 친하게 지낸다. 오죽 친하면 타모리와 아카시야 산마 사이에 특집 프로그램 출연 문제로 오해가 생기자 타모리가 산마에게 실망한 나머지 자신의 대표 칸무리 방송이자 생방송인 모리타 카즈요시 아워! 웃어도 좋다고!에서 아카시야 산마가 레귤러로 출연하는 요일에 만취한 상태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방송 사고를 일으키기도 했고[38] 아카시야 산마와 오오타케 시노부의 결혼식에 타모리 부부가 하객으로 참석하기도 했다. 90년대에 잠시 두 사람의 불화설이 돌기도 했지만 이후로도 꾸준히 방송에 같이 출연하는 것으로 보아 불화설 자체가 사실 무근이거나 화해 후 최소한 일적으로는 계속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그밖에 기무라 타쿠야, 쇼후쿠테이 츠루베, 나카무라 칸자부로, 오오타 히카리, 코지마 카즈야(안잣슈)와 친하다. 후지 TV 「아카시야 산타의 사상 최대의 크리스마스 선물 쇼」에서 호흡하는 야기 아키코와도 친분이 깊다. 야기가 후지TV 퇴사를 생각하고 있던 시기에 산마에게 상담을 요청했는데 산마는 "자신에게 진짜 실력이 있으면 길은 열려 있다."고 조언했다.
- 2003년 와다 아키코(和田アキ子)와 가장 친한 연예인 1위를 한 적이 있다.
- 같은 게닌 Big 3이자 자신의 연예인 생활에 많은 도움을 준 비트 다케시를 은인으로 생각한다고 한다. 일례로 급료가 짜기로 유명한 요시모토 흥업이라 우리들은 익살족에서 자신과 버금가는 비중을 가진 아카시야 산마의 출연료가 터무니없을 정도로 낮은걸 알게된 비트 다케시는 산마의 출연료를 더 올리라고 제작진들에게 부탁했으나 이마저도 요시모토가 가로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결국 산마를 '프로그램 아이디어 작가' 포지션으로도 인정받게 한 다음 소속사를 거치지 않은 개인 급여를 더 챙기도록 도와줬다고 한다. 또한 비트 다케시는 프라이데이 습격 사건으로 방송을 쉬는 동안 자신의 빈자리를 채워넣을 개그맨으로 아카시야 산마를 방송국 PD들에게 적극 추천하였고 그 결과 산마는 많은 방송에서 대활약하면서 최전성기를 맞이하였다.
- 그러나 비트 다케시가 워낙 제멋대로라 다케시와는 중요한 약속을 안 한다고 한다. 산마가 이렇게 마음먹은 일화가 있다. 1990년대 후반에 다케시가 산마에게 둘이 같이 메인 MC로 활약하는 방송을 하자고 진지하게 제안해서 산마는 다케시의 말만 믿고 스케줄을 비워놓기 위해 하던 방송을 하차하고 다케시의 연락을 기다렸다. 그런데 다케시가 그 일을 깜빡 잊어버려서 계획이 백지화됐고 산마는 괜히 하던 방송만 날아갔다고 한다.
- 그 어떤 연예인이 나와도 기가 안죽고 분위기를 주도하는 산마가 어려워하던 몇 안되는 선배 개그맨이 있었는데 바로 시무라 켄이었다. 시무라 켄이 군기를 잡지는 않았지만 개그 스타일[39]과 고향[40]이 다르고 데뷔부터 전성기 심지어 나이까지 산마가 완전히 후배여서 그렇다. 그래서 두 사람이 방송에 같이 출연한 적도 아카시야 산마의 대표 칸무리 방송인 <산마노만마>에 시무라 켄이 게스트로 1번 출연한 것을 제외하면 전무하다.
- 프라이데이에 가장 많이 찍힌 연예인 중 한 명이다. 실제로 아카시야 산마는 2019년에 조사한 평생 독신일 것 같은 연예인 랭킹에서 2위를 차지했다. 1위는 시무라 켄.
- "IMALU가 20세 이후가 될때까지 재혼은 할 수 없다."고 했지만 이후 아카시야 산마는 "이제 결혼은 포기했다! 나는 결혼 부적합자."라며 재혼 포기 발언을 했다. 2010년 7월 24일 방송된 'FNS 26시간TV 2010'에서 산마 · 나카이의 오늘 밤도 잠들 수 없는에서 친구인 시마다 신스케가 "적당할 때 결혼해라! 고독한 죽음은 안타까움을 준다."고 말하기도 했다.
- 스포츠 관전을 취미로 삼고있다. 직장에서 집을 비울 때를 제외하고는 심야나 BS나 CS 스포츠 중계를 실시간으로 관전한다. 축구는 유럽 각 리그와 UEFA 챔피언스 리그, UEFA 유로파 리그 야구의 MLB · 미식 축구의 NFL · 농구의 NBA · 아이스 하키의 NHL · 테니스 4대 대회 · 골프 메이저 대회 등 보는 스포츠 종목이 매우 폭넓다. 올림픽과 FIFA 월드컵이 개최될때 TV 중계 캐스터를 맡기도 하며 현지에서 관전하는 것도 많아, 도요타 컵(현 FIFA 클럽 월드컵)에서는 중계 게스트로 매년 현지에서 관전하고 있다.
- 후지TV의 FNS 27시간 TV에서 언급하길 그날 본 꽃의 이름을 우리는 아직 모른다도 꽤 재미있게 본 듯 하며 특히 츠루미 치리코를 좋아한다. 해당 방송에선 서프라이즈로 치리코 성우인 하야미 사오리가 치리코 목소리로 보이스 메시지를 보내주기도 했고 본인 라디오에서의 언급을 보면 나중에 아예 하야미 본인도 만난 듯.
- 애니메이션 항구의 니쿠코짱!은 원작 소설을 보고 감명을 받은 아카시야 산마가 직접 투자하고 홍보를 담당해 제작이 성사되었다.
- 미술에 관심이 많고 직접 화가 활동도 한다. 뿐만아니라 재야에 묻힌 화가들을 발굴해 화랑을 열어 주기도 하기 때문에 일본 미술계에서 꽤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다.
- 좋아하는 여배우는 아야세 하루카, 나가사와 마사미, 고리키 아야메, 우에토 아야 등이 있다. 이중에서 나가사와 마사미와 아야세 하루카를 정말 좋아한다. 특히 나가사와 마사미에게는 끈질긴(?) 작품 러브콜까지 보내 드라마 스무살의 연인(2007)에서 공동 주연을 성사 시켰을 정도이다.[42]
- 건강 관련 에피소드가 꽤 있는데, 일화를 보면 지금 건강 상태가 의외일 정도로 몸을 혹사했다.
- 엄청난 골초다. 그래서 2009년 이전까지는 그의 간판 토크쇼 '산마노만마'에서 담배를 피우며 게스트와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하지만 시청자들의 항의 때문에 2009년부터는 해당 프로그램에서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 담배의 영향인지 점점 목소리가 악화되고 있다. 성대결절이나 심한 목감기에 걸린 것 같은 쇳소리로 집중해서 듣지 않으면 뭐라고 말하는지 들리지도 않는다. 심지어 칸사이벤이라 JLPT N1, N2급 취득자도 제대로 알아듣기 힘든 경우가 많다. 그나마 방송에 출연할 때는 들리기라도 하는 목소리지만, 자다 깬 상태에서는 도저히 알아듣기 어려운 목소리로 변한다. 산타쿠라는 특방에서 기무라 타쿠야가 전화를 걸었을 때 도저히 알아듣지 못할 목소리로 받았다.
- 잠을 자지 않는 연예인으로 유명하다. 의사한테 잠 자지 않는 병(숏 슬리퍼)이라는 진단까지 받았을 정도. 프로 정신 같은 게 아니고 그냥 유전적인 것으로 소학교 시절부터 이랬다는 듯. 어찌저찌 하루에 2-3시간 정도 잔다고 한다. 같이 지내본 작가에 따르면 산마는 "잠을 자는 사이 어떤 재밌는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자는 것이 아깝다. 잠 자고 싶지 않다"는 의식이 강하다고 한다. 빠듯한 스케줄에도 집에 돌아가서도 온갖 종류의 TV 프로그램을 다 챙겨보면서 최신 유행과 소재를 캐치하고, 후배 게닌들의 방송들도 전부 체크한다. 그러면서도 할 건 다 한다. 밤새 마작을 친 다음에도 아마추어 야구도 즐긴다고. 딸인 IMALU(예명)조차도 아버지의 자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한 번은 가족 여행 중에도 잠을 자지 않고 열심히 이야기를 나눈 산마에게 질려버려서, 가족이 담합하여 산마가 마실 술잔에 수면제를 타서 마시게 했는데, 그럼에도 약효를 안간힘으로 이기면서 계속 얘기하였다. 심지어 요시모토의 젊은 게닌들 사이에서는 산마의 자는 모습을 3번 보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
- 2024년 후지TV 토크쇼 ‘진짜로인가!? TV'(ホンマでっか!?TV)‘에서 밝힌바에 따르면 55년이 넘는 기간 동안 아무리 아파도 약이 아닌 과일을 먹었다고 한다. 컨디션이 나쁘면 멜론을 먹고, 감기에 걸리면 귤을 먹는다고 덧붙였다
- 본인의 호감도가 상승할까봐 방송에서는 울지 않는다고 한다.
- 특별 방송으로 진행되었던 새터데이 나잇 라이브 일본판 진행을 이마다 코지와 함께 맡았다. 그러나 일본판은 SNL 고유의 특징인 WEEKEND UPDATE 코너, 시사 풍자 요소가 전혀 없었으며 애초애 SNL이 지향하는 개그가 일본인들의 정서와 맞지 않았다. 결국 SNL 일본판은 지상파에서 6회분이 방영된 후 바로 케이블 방송으로 갈아탔으며 3회분이 더 방영된 후 그대로 종영됐다.
- 독립 방송국 프로그램 출연은 2번 밖에 없다. 비와코 방송에 출연 경험이 있지만, 이후는 독립 방송국에 출연은 없었다. 2015 년 3월에는 교우 관계에 있는 코지마가 출연하는 '시로쿠로 안잣슈'(치바 TV)에 월별 게스트로 출연했다. 이것은 관동 지방의 독립 방송국 제작 프로그램 첫 출연이다.[43]
- 걸프 전쟁 당시 자신이 지불한 거액의 세금이 전쟁 당사국인 미국을 위해 사용된다는 소리를 듣고 국세청에 가서 항의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 후배 방송에 자주 난입하는 편이다. 술자리나 마작하다 부탁받아 놀러가는 경우도 있고, 지나가다 재미있어 보인다고 뜬금없이 난입하는 경우도 있으며 정말 특이한 경우로 "나 목이 쉬어서 그러는데 네가 대신 좀 방송 뛰어주라."며 녹화중인 후배 찾아가서 교섭하는 장면도 있다. 어떤 상황이든 산마 월드를 만들어 버리는 건 동일하다. 가끔은 정말로 가볍게 놀러가려고 한 것 뿐인데 산마가 온다는 소릴 듣고 긴장한 제작진들이 사무소에 연락해서 결국 정식 출연이 되어 버리는 경우도 있을 정도라고 한다.[44] 사무소 측에선 뭔 소린가 하면서 확인하다 어영부영 정식 오퍼로 처리해 버리는 수순이라고.
- 대표적인 천연계 개그맨인 지미 오오니시의 능력을 알아보고 데뷔 초창기부터 꾸준히 도와준 사람으로 자신이 기획, 제작한 넷플릭스용 드라마 지미, 대체로 바보 어쩌면 천재에서 나온다.
- 사기 그룹과 연관된 야미에이교(闇営業)문제로 소속사 요시모토로부터 계약 해지당한 후배 미야사코 히로유키를 자신의 개인 사무소에 받아주기로 했다. 계약 해지 이후 소속사와 갈등을 빚은 만큼 소속사 복귀는 물론이고 이전도 여의치 않을 상황이다 보니 요시모토의 압력을 이겨낼 수 있는 산마가 맡아주기로 한 듯 하다. 실제로 소속사를 옮긴다고 하지않고 "그냥 잠시 맡아두는 것."이라며 어느정도 요시모토를 의식하는 발언을 했다. 원래 산마는 물의를 일으킨 후배들에게도 덕담을 하며 보호해 주는 스타일이다.
- 그러나 지금은 미야사코 히로유키와의 관계가 소원해 진 것으로 보인다. 아카시야 산마가 "미야사코의 유튜브? 전혀 안본다. 나갈 생각도 없다"라고 언급했기 때문. 산마는 기본적으로 "웃길 수만 있다면 뭘 하던 상관없다"라는 스텐스의 인물이라 방송계에서 별로 안좋게 보는 소재라도 그걸 이용해서 웃기기만 한다면 별 문제시하지 않으며 실제로 미야사코보다 먼저 유튜버로 성공한 카지삭크는 자신의 방송에 출연시켜 소개해 주기도 했는데 언론에서 대놓고 이런 발언을 할 정도면...
[1] 일본의 거물급 여배우로 대표적인 연기파 배우 중 한 명이다. 일본 정부에서 훈장까지 수여했을 정도이다.[2] 절세와 자기 관리가 목적인 개인 사무실은 따로 마련하였고 방송이나 개런티 관리도 그곳에서 하고 있다.[3] '산마'에는 꽁치라는 뜻이 있다. 아카시야 산마를 광고모델로 기용한 낚시 모바일 게임에서 기간 한정 레어 물고기로 뻐드렁니 꽁치가 나온 적이 있다.[4] 물론 세월이 지나면서 다운타운, 톤네루즈 등의 거물급 후배 개그맨들도 나타나긴 했다.[5] NHK까지 따지면 폭소문제가 있다.[6] 여담으로 한국 개그맨 중에서 90년대까지만 해도 잘나가던 서세원이 산마를 철저히 카피한 것으로 나름 유명했다. 특히 1990년대 들어서 서세원쇼를 비롯하여 서세원이 초창기 예능과 토크쇼 진행자로 거듭날 무렵, 서세원은 산마가 보여준 개그 패턴(특유의 돌출된 앞니를 이용한 자학개그와 상대방의 치부를 들춰내며 시청자들을 웃기는 것), 상대방이 웃기거나 분량을 따내면 자지러지면서 왁자지껄하게 웃는 리액션을 대놓고 카피했다. 그러나 산마는 지금도 잘 나가는 한편 서세원은 2000년대에 각종 악행이 탄로나며 몰락했다. 개그에도 차이가 있는데 원조격인 산마가 호불호는 갈린다고 할 지라도 안티들도 "정말 골때리게 웃긴다"라는 평을 내릴 정도로 웃기는 능력 자체는 인정할 정도인데 데드 카피인 서세원은 자신이 절대적인 갑이되어 상대를 일방적으로 비하하면서 시청자들에게 웃음을 줬기 때문에 "개그가 불쾌하다"는 여론이 전성기 시절에도 상당히 우위를 점했었다. 두 사람의 방송을 보면 순발력이나 치고 빠지는 센스에서 차이점이 뚜렷하게 보인다.[7] 산마 본인이 말하기를, 산마는 동생을 '치비(꼬마)'라는 애칭으로 불렀는데, 동생은 자신을 항상 따르고 존중해주고 자신에게나 남에게나 자기 자신을 솔직하게 나타내는 사람이었다고 한다.[8] 여담이지만, 집안이 꽁치가공업을 하고 있어서 산마(秋刀魚)라고 지었다고 말하고 다닌다. 이게 농담이 아닌 듯 한게 그의 사형은 자전거 가게를 하던 집안이라 사도루(サドル.새들, 즉 자전거 안장)라는 예명을 받았다는 듯. 동기이자 절친인 시마다 신스케에 의하면 24시간 밝고 명랑하던 산마가 이때는 꽤나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고. 이를 보면 처음엔 산마라는 예명이 별로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다.[9] 당시 아카시야 산마의 친가는 1층은 공장, 2층이 본가로 되어 있었는데, 동생은 화재가 발생한 1층 공장 중앙에서 변을 당한채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경찰의 수사 결과 시신이 입고 있던 옷에 등유가 잔뜩 묻어있었고, 이 외의 발연점을 찾을 수 없어 분신자살로 결론을 지었는데, 당시 동생은 축구선수를 꿈꾸고 있었으나 부모의 가업을 이으라는 강요에 굉장히 흔들렸다고 한다. 이는 동생과 친했던 친구들의 진술로, 아카시야 산마에게는 이런 얘기를 하지 않았던 듯, 산마는 울면서 "그 녀석은 그럴 사람이 아녜요. 만약 정말로 죽을 정도로 고통받았다면 나와 얘기를 했을 겁니다."라며 동생의 자살을 부정했다.[10] 이처럼 산마가 파파라치의 주 표적이었기 때문에 오오타케 시노부와의 연애를 들키지 않기 위해 고생을 많이했다고 한다. 파파라치를 피하기 위해 차 트렁크에 숨어있는 등 가히 첩보 작전을 방불케했다고.[11] 일본의 연예계는 대한민국의 연예계와는 달리 소속사 중심의 문화가 강해서 연예인이 갑자기 소속사를 옮기는 것을 일종의 배신 행위로 취급한다.[12] 산마는 FNS의 날 행사에서 유일하게 개근 출연한 연예인이다. 다만, 2007년까지 종합 사회로는 등판하지 않았다.[13] 당시까지 일본의 국민 개그맨 타이틀을 쥐고 있던 비트 다케시가 프라이데이 습격 사건을 일으킨 후 잠시 자숙의 시간을 가지게되었고 갑작스레 생긴 다케시의 빈자리를 아카시야 산마가 채움으로서 산마는 개그맨으로서 최전성기를 맞아하게 되었다.[14] 일본의 거물급 여배우로 대표적인 연기파 배우 중 한명이다. 일본 정부에서 훈장까지 수여했을 정도. 대한민국에서는 영화 철도원에서 타카쿠라 켄의 극중 아내 역으로 나온 것으로 유명하다.[15] [16] 이후 방송에서 산마가 밝히기를 비트 다케시가 차 키 꽂는 곳을 못 찾으니까 작은 목소리로 가르쳐 주고 말리는 척 하면서 기어 바꾸는 것도 다 가르쳐주는 등 다케시가 자신의 자동차를 완전히 박살낼 수 있게 도와줬다고 한다.[17] 그녀는 해당 자서전에서 산마 이외에도 안전지대의 보컬 다마키 코지, 타하라 토시히코, 쟈니스 소속의 모 아이돌과 사귀었다고 폭로했다.[18] 2000년대 27시간 테레비 평균 시청률 3위, 최고 시청률 4위[19] 2000년대에는 그다지 공연하지 않지만, 옛날에는 같이 나오는 방송들이 자주 있었기에 지금도 친한 사이이다.[20] 하마다는 예전에 27시간 테레비에서 HEY!x3의 MC로서 녹화를 하던 중에 산마가 갑자기 난입하자 겁도없이 산마에게 화를 냈다가 역으로 화가 나버린 산마에게 찍소리도 못할 정도로 꾸지람을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원래는 먼저 안 나가려고 했었는데 마츠모토, 우치무라, 난바라가 떠밀어 버리는 바람에 먼저 나와버리게 되었다.[21] 이 상황에서 몇몇 보케역 게닌들이 역대 출연자들로 이뤄진 청중들에서 랜덤하게 강제로 무대위로 올라가려고 했다. 옛날 외국인 탤런트로 유명했던 산콘을 자꾸 소환하려고 하는 마츠모토가 하이라이트.[22] 히가시노 코우지가 진행하는 와이도나쇼라는 방송에서 실제로 본인들은 "우린 상관 없는데.진짜로 그랬어요?"라는 마츠모토에게 이이토모 디렉터가 "약간 의도적으로 따로 배치했다"라고 답변하기도 했다.[23] 산마, 다운타운, 웃쨩난쨩, 나인티나인, 폭소문제, 톤네루즈 순으로 각 15분씩 시간이 배정되어 있었다고 하며, 한팀 나가면 한팀 들어오는 식으로 촬영하는게 원래 계획이었는데, 산마가 관객들에게 최고의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30분이나 써먹었다고 한다. 다운타운과 웃쨩난쨩은 선배가 하는 일이라 이걸 어쩌나 하다가, 과거 빅3들이 잘나가던 시기에 난입 개그를 자주 펼쳤던 걸 기억하고 "까짓거 함 해 보자"라며 뛰쳐나갔고, 톤네루즈도 "이래야 축제답지"라며 난입한 거라고 한다. 이에 대해 산마는 "우리세대 개그를 잊지 않아준 후배들에게 고맙다"라며 본인의 라디오에서 언급하기도 했다.[24] [25] 1985년~1989년, 1995년, 1998년~2003년. 19회 중 통산 12회[26] 산마저택이 2001~2006, 2011~2014년까지 10번, 혼마뎃카가 2011, 2013년 2번.[27] 좋아하는가 하는 질문이 아니라 알고 있느냐는 질문. 즉, 인기도가 아니라 유명도 조사.[28] 산마가 절찬했던 게닌들중 한명인 고사카 다이마오를 피코타로로써 만나게 되었다.[29] 특설 스튜디오에서 전화 인터뷰라고 알려져있었는데, 실상은 경기장 한쪽 구석에 임시 부스 같은 걸 만들어놓고 퇴장하려는 메시를 납치하듯이 붙잡아 와서는 즉석 인터뷰를 감행했다.[30] 은퇴후 계획이라고 알려져있는데, 원본은 "どうも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サッカーの質問はみんな聞いてるやろうから、老後はどうしはるんですか"(감사합니다. 축구에 대한 질문은 다들 했을 테고, 노후에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이다. 실제로 '은퇴 후'라고 하면 지도자의 길을 선택한다든지, 스포츠 해설위원이 되겠다든지 하는 제 2의 진로를 두고 하는 얘기가 되지만, 노후라고 해버리면 제 2의 진로조차 다 끝나고, 노후연금 받고 사는 시기를 의미하므로 은퇴 후라는 말보다 더욱 큰 실례다.[31] 본인의 라디오 방송에 출연한 모닝구 무스메 멤버들에게 한 이야기.[32] 시험 점수가 나빠서 고민하고있는 학생들에게. 만점(満点)과 하늘 가득하다는 뜻의 만천(満天)의 발음이 만텐(まんてん)으로 같다는 것을 이용한 말장난.[33] 明石家さんま 珠玉の名言[34] JAL 123편 탑승 예정이었다가 일이 일찍 끝나서 ANA로 비행기를 바꿨는데, 이때 JL123에서 520명이나 사망한 사고가 일어났고 충격을 받은 산마는 한동안 활동 중단을 한적이 있다. 이후 그의 좌우명인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이득"이 나왔다.[35] 드라마 첫 출연[36] 아카시야 산마, 오오타케 시노부 주연의 드라마로 일본 트렌디 드라마의 시초로 평가 받는다.[37] 거의 매년 오사카와 도쿄에서 아카시야 산마가 주최하는 콩트 라이브[38] 1988년 7월 1일자 방영분. 자세한 것은 모리타 카즈요시 아워! 웃어도 좋다고! 문서 참고.[39] 시무라는 콩트와 몸개그, 산마는 민자이와 토크.[40] 시무라는 칸토, 산마는 칸사이.[41] 기무라 타쿠야가 추천했다고 한다.[42] 극중 상대역은 당연히 아니고 나가사와의 어머니로 출연하는 첫사랑 코이즈미 쿄코와 러브 라인이다. 나가사와는 첫사랑과 꼭 닮은 20세 여성을 연기.[43] 이에 관한 에피소드가 재미있는데, 본 문서 마지막 항목에 있는 각주 내용이 바로 이 방송에서 벌어진 일이다. 원래는 코지마가 거의 7년여 가량을 출연해 달라고 졸랐지만 스케쥴 문제 등으로 미뤄만 오다가, 겨우 스케쥴이 비는날과 방송 녹화일이 맞아서 출연을 결정했고, 이때까진 어디까지나 "쉬는날에 친한 후배인 코지마의 방송에 놀러간다"라는 이유였기 때문에 게스트 출연이 아닌 지나가다 난입으로 하려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코지마에게 산마가 놀러온다는 소식을 들은 방송국의 높으신 분들이 생각지도 못했던 초 거물이 온다는 것에 당황해서 요시모토측에 안해도 되는 연락(산마는 어디까지나 후배 찾아 놀러오는 것 뿐이니까 업무관련이 아니기에 요시모토에 연락할 필요가 없었다.)을 해 버렸고, 난데없이 지방 방송국에 산마가 출연한다는 소식을 들은 요시모토 측에서는 확인 후 아예 정식 오퍼로 받아들여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결과적으론 정식 게스트 출연이 되어버렸다고.[44] 지방 방송 사장급 인사들이 산마가 들른다니 완전 패닉이 돼서 요시모토에 "이번에 신세지게 됐습니다."라고 인사 전화를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