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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자유주의 정당 | |||||
민주당 | → | 민진당 | → | 국민민주당 (흡수합당) | |
입헌민주당 (분당) |
※ 아래 정보는 당명 변경 당시를 기준으로 함 | ||
민진당 民進党 | ||
<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014099> 영문 명칭 | Democratic Party : DP | |
약칭 | 民進(민진), DP | |
한글 명칭 | 민진당 | |
창당일 | 1998년 4월 27일 (민주당)[1] | |
당명 변경 | 2016년 3월 27일 (민진당) | |
2018년 5월 7일 (국민민주당) | ||
해산일 | 2020년 9월 11일 | |
통합한 정당 | 유신당, 개혁결집회[2] | |
이념 | 자유주의 (일본)[3][4] 민주중도 공생주의 빅 텐트 | |
스펙트럼 | 중도[5] ~ 중도좌파[6][A] | |
당 색 | 파랑 (#014099) | |
주소 | 도쿄도 치요다구 나가타초 1초메 1-11 (東京都千代田区永田町 一丁目 1-11) | |
대표 | 오쓰카 고헤이 | |
간사장 | 마시코 데루히코 | |
정무조사회장 | 아다치 신야 | |
선거대책위원장 | 시노하라 다카시 | |
중의원 | 14석 / 465석 (3.0%) | |
참의원 | 41석 / 242석 (16.9%) | |
당원 수 | 242,907명 | |
기관지 | 민진 프레스 | |
공식 사이트 | ||
SN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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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10년대 중반 아베 내각이 독주하며 평화헌법 폐기를 위한 개헌을 추진하자, 민주당과 유신당, 그리고 개혁결집회에서 2016년 제24회 참원선을 앞두고 개헌저지선 확보를 위해 일부 야권 통합을 하면서 출범한 정당. 사실상 민주당에 나머지 정당들이 흡수된 형태다.2015년 12월 18일에 통일 회파 '민주 · 유신 · 무소속 클럽' 결성을 신고했으며, 회파 대표는 민주당 간사장인 에다노 유키오가 취임했다. 이 와중에 유신당은 하시모토 도루의 일본 유신회 출신 계파가 다른 회파를 만드는 등 당내 분열이 일어났다가 결국 당이 쪼개져 오사카유신회의 창당으로 이어졌다.[8]
2016년 2월 22일 민주당의 오카다 가쓰야와 유신당의 마쓰노 요리히사 두 대표가 민주당은 유지하며 유신당을 흡수하는 형태로 신당을 결성하기로 합의했다. 다만 합당 당시 구 유신당측 일부에서 "민주당"이라는 정당에 흡수되는 것이라는 관점에 거부감을 표명한 바 있어 3월 3일부터 민주당과 유신당이 국민을 대상으로 당명을 공모했으며, 입헌민주당, 민신당, 민주신당 등 여러가지 응모가 나왔지만 간추린 끝에 민주당 측이 제안한 '입헌민주당'과 유신당 측이 제안한 '민진당' 가운데에 협의와 여론조사를 실시하기로 했고, 양당간에 각각 여론조사를 별도로 실시한 결과 민진당이라는 당명이 2위인 입헌민주당을 5~6%차로 제치고 1위를 기록하여 최종적으로 3월 14일 당명이 민진당(民進党)으로 결정되었다.[9] 뜻에 대해선 제안자인 유신당측에서는 "쇄신 이미지를 강화하기 위해 '민주(民主)'라는 문자를 남기지 말고, 앞으로 국민을 향한 개혁을 진전시키는 당을 목표로 하자는 취지로 제안한 것"이라고 밝혔다.
2016년 3월 22일 개혁결집회 소속 의원 5명 중 4명이 민진당으로 합류했다. 3월 27일, 창당대회를 통해 정식 출범하였다. 대표 대행으로는 에다 겐지가 임명되었다. 그러나 당세가 눈에 띌 정도로 회복되진 못하고 부진한 모습을 보이다, 2017년 10월 제48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희망의 당과의 연대를 둘러싼 내부 이견 및 갈등으로 분당했다.
2. 당 강령
- 자유와 민주주의에 입거한 헌법을 지킨다.
- 공생사회를 만든다.
- 미래로의 책임 개혁을 미루지 않는다.
- 사람에 대한 투자로 지속 가능한 경제성장을 실현한다.
- 나라를 지키는 국제 사회의 번영과 평화에 기여한다.
3. 당 본부
민진당 본부(도쿄도 치요다구 나가타초 1초메 11-1)[10] |
4. 역대 대표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min-height: 26px;" {{{#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181818,#e5e5e5 | 초대 오카다 가쓰야 | 2대 무라타 렌호 | 3대 마에하라 세이지 | 4대 오쓰카 고헤이 |
대 | 대표 | 재임 기간 | 비고 |
1 | 오카다 가쓰야 (岡田克也) | 2016년 3월 27일 ~ 2016년 9월 15일 | 민주당 마지막 대표→민진당 초대 대표 |
2 | 렌호 (蓮舫) | 2016년 9월 15일 ~ 2017년 7월 27일 | 민진당(구 민주당 역사 포함) 최초의 여성 당대표 |
3 | 마에하라 세이지 (前原誠司) | 2017년 9월 8일 ~ 2017년 10월 30일 | |
4 | 오쓰카 고헤이 (大塚耕平) | 2017년 10월 31일 ~ 2018년 5월 7일[11] | 2018년 9월 경 임기 종료, 현 참의원 의원 |
5. 지지 기반
1998년 창당한 민주당이 2000년대 기준으로 보면 시즈오카현(静岡県), 아이치현(愛知県), 미에현(三重県), 홋카이도(北海道)가 민주당의 강세 지역이었고, 그 중에서도 아이치현, 미에현은 특히 더 강세 지역으로 꼽혔다. 그 외 야마나시현(山梨県), 나가노현(長野県), 니가타현(新潟県) 등 도카이 지역 외의 주부(中部)권에서도 비교적 세가 있는 편이었다.아이치현은 2000년대에 참의원 총 3석 중 2석을 차지하는 경우도 많았고, 심지어 민주당이 압승한 2009년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아이치현 총 의석을 석권한 적도 있었다. 미에현의 경우 중의원 5개 선거구 중 2구, 3구가 일명 민주당의 성지로 불렸으나, 2013년 제23회 참의원 선거에서는 근소한 차이로 의석을 잃었다.
다만 2010년대 들어 민주당의 당세가 원체 쇠락한 마당이라 지금도 위세를 발휘할진 미지수다. 애초에 이미 당이 쪼개질대로 쪼개진 유신당과 신당을 창당한 것 자체가 민주당이 찬밥 더운 밥 가릴 처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2014년 중의원 선거에서는 정말 망했던 2012년 중의원 선거에 비해 그나마 지지 기반을 회복했다. 2012년 중의원 선거가 어느 정도였냐면 지지 기반인 아이치, 미에, 홋카이도, 시즈오카 총 40석 중 고작 6석만 차지했을 정도로 망했었다.(...) 2014년 중의원 선거에서는 총 40석 중 13석을 차지했다. 아이치현 총 15석 중 6석, 미에현 총 5석 중 2석을 차지하였다. 홋카이도에서는 총 12석 중 3석을 차지하였다. 시즈오카현에서는 총 8석 중 2석을 차지하였다. 하지만 리즈 시절에 비하면 당연히 멀었다. 민주당 입장에선 정말 역사적인 선거이긴 했지만, 2009년 제45회 중의원 선거 땐 총 40석 중 무려 37석을 차지하기도 했다.
권역별로 나뉘어 있는 중의원 비례선거구에선 동해지역(아이치현, 기후현, 시즈오카현, 미에현 소속)에서 강세를 보였다. 홋카이도 비례선거구에서는 자민당과 근소한 차이로 2위를 차지했다. 2012년에 비해 득표율이 많이 상승했다는 점이 위안점. 하지만 41대 중의원 선거부터 2014년 47대 중의원 선거까지 7번의 선거 중에 5번 1위를 차지한 점(2012년, 2014년 2위)을 고려하면 아직 예전만큼의 당세는 아니다.
2016년 7월 치러진 제24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아이치, 미에, 홋카이도, 시즈오카 4개 현의 총 10개 선거구 중 5~6석을 얻는 것을 목표로 했고, 선거 결과 총 6석을 얻으며 목표치는 달성했다. 참고로 2013년 참의원 선거에서는 아이치, 미에, 홋카이도, 시즈오카 4개현의 8개 선거구 중 아이치, 홋카이도, 시즈오카에서 각 1석씩 총 3석을 차지했었다.
2010년대 중반 이후부턴 원전 등의 영향 때문인지 도호쿠 지역에서 어느정도 지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민진당의 문제는 소속 국회의원들간 스펙트럼이 너무 벌어지다보니 통일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자민당 역시 계파 갈등으로 말이 많지만 민진당은 때론 더 심한 모양새. 게다가 튼튼한 지역적 기반이 없는 것도 아쉬운 점이라고 볼 수 있다. 앞서 지지 기반을 적어놓긴 했지만 저 지역들도 철옹성 같은 텃밭 느낌과는 거리가 멀다. 물론 이론적으로 볼땐 한국 사례만 봐도 알 수 있듯 지역주의 정당이라는 것이 그다지 좋은 의미는 아니지만, 선거땐 그래도 제법 유용한 것이 현실이라 골 아픈 점. 게다가 민진당은 진성 지지층도 얕아서 명색이 제1야당인데 지방의원은 700명대로 2000명대인 자민, 공산(!), 공명당에 비해서도 턱없이 모자랐다. 이러다보니 민진당의 지지층은 부동층이 많아 지지기반이 지나치게 유동적이라는 문제점이 지적되었다.
6. 활동
6.1. 제24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전후
2016년 7월 10일 치러진 제24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를 앞두고 선거의 승패가 달려있는 32곳의 1인 선거구에서 야권 단일화를 이루어냈다. 민진당은 그 중 15개 선거구에 출마한다.(무소속 단일 16개, 공산당 1개(카가와현)) 1인 선거구에서 자민당 후보와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으며 32곳 중 6개 지역은 우세 및 경합우세 지역, 8개 지역은 경합 및 경합열세 지역으로 분류된다.[12] 비례대표에선 11석~12석 정도를 얻을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선거 결과 그나마 체면치레는 했는데, 이번 선거에서 과거 강세지역이었던 시즈오카, 홋카이도, 미에, 아이치 현(총 10개 의석)에서 목표로 했던 5~6석 중 6석을 획득했다. 그 밖에는 예상 외로 1인 선거구에서 선전해서, 아오모리, 야마가타처럼 자민당세가 강한 편인 지역에서도 민진당 및 야권단일화 후보가 당선되기도 하였다. 2010년 통상선거와 2016년 통상선거 사이에 있었던 초대형 자연재해인 도호쿠 대지진의 영향도 일부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2016년 통상선거 전에 센다이시와 야마가타의 경우에는 시장, 현지사가 각각 민진당 및 혁신계열 후보로 당선되어 높은 지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전반적인 선거결과가 예상보다 선전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개헌선 저지에는 실패한지라 참으로 미묘한 결과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이트 스피치 금지법의 제정을 주도한 아리타 요시후 참의원 의원이 재선되는 등의 성과는 있었다. 실제로 이 법의 시행 이후 법무성에서도 주요 도시를 중심으로 헤이트스피치 금지법을 홍보하고 있으며, 가와사키시에서 혐한시위가 경찰에 의해 중단, 해산되기도 했다. 또 같은 날 치른 가고시마 현지사 선거에서 현직 보수계열 이토 유이치로[13] 지사를 물리치고 사회민주당과 공동으로 후보 추천을 한 테레비 아사히 기자, 해설위원 출신의 미타조노 사토시가 당선되는 등 적지 않은 소득을 안기도 했다. 실제로 가고시마는 메이지 유신과 같은 역사적 사건에서 보듯 일본에서 보수성향이 강한 선거구들 중 한 곳이라 오랫동안 자민당 지원을 받은 후보가 당선되었다는 것을 감안할 땐 주목할 만한 성과.
정당비례투표에선 20.98%를 득표해 자민당 다음가는 제2당으로서의 위치는 굳힌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민진당이 비례득표에서 20%대를 넘긴 것은 과거 민주당 시절인 2010년 22회 참의원 선거 이래 6년만이다.[14]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는 끝났지만 아직 다른 선거가 끝난 것은 아니다. 7월31일 펼쳐지는 중앙정치의 중심인 도쿄도지사 선거가 남았기 때문이다. 호헌 4개 야당(민진, 공산, 사민, 생활당)은 2016년 7월 10일에 치러진 제24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처럼 야당간 공조를 통해 단일 후보를 출마시킨다는 계획이다. 결국 2016년 7월 12일 민진당이 최종적으로 내세운 후보는 언론인 도리고에 슌타로이다. 다음 날, 우쓰노미야 겐지 후보가 대국적인 관점에서 후보에서 사퇴하겠다고 밝힘에 따라 도리고에 슌타로가 호헌파 야권 단일 후보로 출마하게 되었다.# 하지만 선거 도중 도리고에 슌타로 후보의 과거 제자 성추행 의혹이 불거지며 지지율이 급락했고 선거 결과 3위로 낙선했다.#
같은 날, 오카다 가쓰야 대표는 차기 대표선거에 불출마를 선언했으며, 한 강연에서 '일본 헌법은 미국이 만든 것'이란 취지의 발언을 한 조 바이든 미국 부통령에 대해서도 부적절한 발언이었다고 비판했다.
9월 2일부터 새 지도부 선출을 위한 경선이 시작되었는데, 이번 경선은 당 대표 후보로 렌호 대표대행, 마에하라 세이지 전 외무상, 다마키 유이치로 국회대책부위원장이 후보로 나왔으며, 오카다 가쓰야 대표와 호소노 고시 전 환경대신도 지지한 렌호 대표대행의 당 대표 당선이 확실시되고 있는 상황이다. 15일 임시당대회에서 선출될 것으로 보인다. 다만 대만인 아버지를 둬 대만 국적도 유지하고 있던 렌호의 이중국적 논란이 문제가 되기도 했는데,# 큰 변수는 아니었는지 예상대로 렌호 대표대행이 당 대표로 선출되었다. 총 득표점수 849점 중 대표 선출에 필요한 절반을 넘은 503점을 얻었다. 물론 민주당 시절을 포함해 첫 여성 대표이다.[15]# 다만 기사에 여성 트로이카라고 칭하면서 고이케 유리코 도쿄 도지사가 쓰여있는 것은 흠. 차기 간사장엔 노다 요시히코 전 총리가 기용되었다.#
다만 진보층 입장에서 봤을땐 이 선거 결과가 좀 묘할 수도 있는게, 향후 민진당도 상당히 보수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대표와 간사장 모두 민진당에서 최우측에 있다고 평가받는 우익 회파인 화제회 소속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노다는 화제회의 영수다. 렌호가
6.2. 렌호 대표 체제
2016년 10월 23일 야권 연대로 많은 기대를 모았던 도쿄도 제10구 중의원 보궐선거를 결국 연립여당에 내주고 만다. 이후 당 내에서 선거에 입후보할 수 있는 연령을 중의원 의원 · 각 지자체 의회 의원 · 기초자치단체장은 20세 이상으로, 참의원 의원 · 광역자치단체장은 25세 이상으로 각각 5세 낮추는 방안을 담은 관련 법안들을 국회에 제출하기로 방침을 추진하기로 했다.#차기 중의원 선거 공약으로 유치원 등 취학 전 교육비, 초·중학교 급식비, 대학 입학금 및 수업료 등을 무료로 제공하는 교육 무상화를 내걸기로 했다.# 그리고 황실전범(皇室典範 · 황위 계승 방식을 규정한 법률)을 개정하는 방식으로 아키히토 덴노의 중도 퇴위를 인정하자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2017년 1월 20일까지 4개의 후보 중 민진당을 상징하는 캐릭터 총선거를 실시했다.# 투표 결과는 D안이 민진당 캐릭터로 결정되었다. 이름은 민신(ミンシン).# 2017년 3월 12일에는 첫 정기 당대회를 개최하였다. 2030년대 원전 제로의 목표를 가지고 원전 제로 법안을 표명하였다.
2017년 7월 2일 치러진 도쿄 도의회 선거를 앞두고 구 민주당과 구 유신당 연대(도쿄 개혁 의원단)를 하였다. 하지만 민진당 입장에선 씁쓸한게 구 민주당 시절부터 주요한 지지기반이자 조직이였던 연대(連合,노조총연합회 비슷한 포지션)가 반자민당을 내세우며 민진당에서 고이케 세력으로 갈아탔다.
결국 도쿄 도의회 선거에서 민진당은 5석밖에 못얻으며 참패했다. 물론 자민당도 같이 참패한 선거라 상대적으로 묻힌 감은 있지만 전국 제1야당이 제대로 된 존재감조차 드러내지 못한 상황. 특히 도쿄에 지역구를 둔 렌호 대표 입장에선 영 기분 내키지 않는 선거를 치렀다. 이는 역시 상당수의 민진당 지지층이 신당인 도민퍼스트회로 지지를 옮겼기 때문인데, 물론 도의회 선거일 뿐이긴 하지만 만약 전국 선거에서도 이러한 양상이 전개될 경우 민진당은 제1야당 위치마저 흔들릴 수도 있다.
한편, 아베 정권의 지지율이 최악으로 떨어지면서 자민당에 맞서 오랜만에 선거에서 승리했다. 2017년 7월 23일 벌어진 센다이시장 선거에서 민진당, 공산당, 사민당, 자유당 야4당이 지원한 무소속 고리 가즈코 후보가 자민당과 연립여당 공명당이 밀었던 스가와라 히로노리 후보를 누르고 당선된 것이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는지 2017년 7월 27일 렌호 대표가 도쿄도의회 선거 참패, 국적 문제 등 구설에 책임을 지고 자진사퇴했다. 그리고 얼마 안가 당 중의원 6선 중진이자 민진당 간판주자 중 하나인 호소노 고시 전 환경대신이 신당창당을 이유로 탈당했다. 아마 고이케 세력으로 갈 모양. 그를 따르는 일부 계파 의원의 추가 탈당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고, 언론에선 그뿐만 아니라 다른 의원들의 민진당 엑소더스 설도 나오고 있다. 이래저래 차기 대표가 수습해야 될 과제가 산더미처럼 쌓이는 상황.
6.3. 마에하라 세이지 대표 체제
2017년 9월 1일 당대표선거 결과 마에하라 세이지가 에다노 유키오와의 경선에서 170표 차이로 승리하며 신임 당대표로 취임했다.취임하자마자 자신을 비롯한 주변에서 스캔들이 마구잡이로 터지며 먹구름이 끼고 있다. 취임 직후 간사장으로 내정되어 있던 야마오 시오리 중의원이 불륜 구설수에 휘말려 낙마 후 탈당했으며, 그 뒤에는 주간문춘을 통해 마에하라 당대표 본인의 북한 여성과의 스캔들이 터지면서 취임 직후부터 삐걱거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학원 스캔들로 궁지에 몰렸던 아베 총리와 자민당은 이 틈에 국회 해산 후 재선거를 통해 국회를 장악하자는 이야기까지 나오는 상황.
또한 지난 제24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꽤 재미를 본 민진-사민-공산-자유 선거연대를 파토내고 독자노선이나 우파 성향이 강한 정당인 유신회 또는 고이케 신당과의 연대를 모색하고 있어 일본 좌측 진영에서 엄청나게 까이는 중이다. 일부 계파(호소노 그룹 또는 좌파쪽 계파)의 탈당 도미노가 멈추지 않아 그냥 당을 해산하자는 이야기도 나오는 판국.
2017년 9월 26일 밤 고이케 유리코와 마에하라 세이지가 만나 합당을 논의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합당 자체는 코이케가 합당에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여 무산되었지만, 일단 민진당은 차기 중의원 선거에서 당내 공천을 포기하고 소속 중의원들의 희망의 당 공천 신청을 허용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많은 민진당 소속 중의원들이 희망의 당에 공천 신청을 했는데, 정작 대표인 마에하라는 무소속 출마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한다.
6.4. 분열
2017년 9월 30일에는 보수 성향의 의원들은 자율적으로 희망의 당으로 이동하고, 리버럴 성향의 의원들은 에다노 유키오 중심의 신당(입헌민주당)을 구성하는 방향으로 사실상 분당 수순에 돌입하게 되었다. 흡수통합 및 분당 방향이 명확해진 이 시점부터는 비례 투표 여부를 묻는 여론조사의 항목 자체도 없어졌다.일단 민진당은 참의원들은 남아있는 상황. 그리고 이들 중 다수는 희망의 당 지지를 거부하고 사실상 입헌민주당 지지를 선언했다.[16] 그리고 마에하라 대표는 야권 분열로 자민당이 대승하고, 입헌민주당은 기어코 희망의당을 꺾은 선거 결과가 나온뒤, 새벽에 기자회견을 열어 지역 조직과 참의원들의 거취 문제를 정리한 후에 당대표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10월 27일에는 무소속으로 당선된 중의원들과 기존의 참의원들을 합친 중참 양원총회가 열렸는데, 마에하라가 선택한 결정이 결국에는 야권 분열로 이어져 선거에서 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마에하라에 대해 책임을 묻는 목소리가 많았다. 당장 그만두라는 목소리가 주를 이루었으며, 한 의원은 '희망의 당에 갈 사람이 민진당의 뒷일을 수습한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며 감정섞인 반응도 나올 정도로 분위기는 상당히 험악했다고 한다.
10월 31일, 전당대회에서 오쓰카 고헤이 전 후생노동부대신이 단독 입후보해 당대표가 되었다. 사실상 오쓰카 고헤이 대표 체제는 수습반의 성격이 강하지만 대외적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실제로 희망의 당은 우당, 입헌민주당은 공당[17]이라고 표현하는 등 두 당 모두와 공동노선을 펴겠다는 식의 언급을 하였다.
새로운 지도부가 구성이 되었지만 당을 해체하라는 등의 당내이견이 해소가 되지 않았던지 2017년 12월 7일 당대표와 참의원 의원회장(한국의 원내대표격)의 기자회견에 따르면 민진당을 해산하여 희망의당과 입헌민주당으로 나눠서 가는 방안은 전혀 검토되지 않았고 다만 당명을 바꾸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라며 야당으로서 새롭게 거듭나기 위해 당명개정을 포함하여 모든 가능성에 대해 검토하겠다고 함에 따라 민진당의 미래가 과연 어떻게 나아갈지 지켜봐야 할 것 같다.
그러던 2017년 12월 12일 오쓰카 대표는 회합 자리에서 당을 재건하는 방법으로 당 해체나 당명 변경하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한편, 지난 총선에서 일명 '배제' 발언으로 역풍을 당한 희망의당은 적극적으로 민진당과 연대 또는 합당을 주장하였고, 상대적으로 민진당 내에서 진보성향에 가까운, 혹은 진보성향인 참의원 의원들을 중심으로 결사반대의 뜻을 표명하여[18] 민진당 전체적으로 혼란에 빠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한도 끝도 없는 벼랑 끝으로 몰리던 중, 지난 중의원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던 오카다 가쓰야 外 의원들이 끝내 2017년 12월 26일 민진당 양원의원총회에서 희망의당과 통일 회파를 구성해야한다는 요구를 했지만 이를 시작으로 렌호 前대표가 이전의 예고대로 2017년 12월 26일 민진당 지도부에 탈당계를 제출하여 입헌민주당에 입당하였고,[19] 그 이후에도 탈당을 감행하는 의원들이 속출하고 있어[20] 이전의 집단탈당으로 인한 당이 붕괴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현실화되고 있다.
하지만 당지도부는 이러한 당내의 극심한 이견에도 불구하고 2017년 연말에서 2018년 연초로 넘어갈 무렵 이후에는 입헌민주당까지 포함시켜 3당간 통일회파의 결성을 꿈꾸는 듯 보였지만 입헌민주당에서 희망의당 때문인지 "이미 끝난 이야기"라면서 거부의사를 표명했고, 2018년 1월 현재에는 이전부터 러브콜을 보내오던 희망의당과 상호간의 간사장·국회대책위원장이 참여하는 합의체를 구성하여 통일회파의 결성을 위해 적극적으로 협의하고 있다고 한다.
근데 과연 희망의당과 합쳐진다고 하더라도 민진당의 미래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결론이 나올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협상이 결렬된다고 하면 더 크나큰 블랙홀로 빠져드는 것은 마찬가지이겠지만 민진당이 저렇게 당내거취에 대하여 결론을 내지못하고 사분오열하는 이유는 무려 700억엔대의 정당보조금과 지방의 하부조직과 지방의원의 기존 조직 유지 및 향후 당적과 관련한 거취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이다. 입헌민주당은 현재 민진당과 희망의당과는 별개로 독자노선을 펼치려고 하기 때문에 민진당을 탈당하고 입헌민주당으로 가면 700억엔 규모의 정당보조금 중 자기 몫을 못받게 되며 자신의 지역기반조직을 상실하는 위험이 있어 섣불리 행동에 나설수가 없다. 렌호 같이 대중의 인기가 상당한 정치인도 탈당에 많은 고민을 하는 마당에[21] 일반 의원들이 쉽게 탈당을 결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민진당을 해산하자는 주장도 있으나 당을 해산하면 정당보조금을 국고에 반환해야하므로 대다수가 결사반대 상태다.
그리고 1월 15일이 되어서 민진당과 희망의당 간사장끼리 양당간의 통일회파를 구성하기로 합의, 17일에 열린 민진당의 양원의원총회에서 격론이 있는 끝에 "3당간의 통일회파의 구성을 목표로 한다는 것을 전제로 희망의 당과 지금까지의 통일회파의 협상을 결론짓고 향후 구체적인 세부조건에 관해서는 무소속 모임[22]과 집행부의 뜻에 맡기며 입헌민주당과는 향후 끈질기게 교섭을 이어나가도록 한다"는 내용이 가까스로 승인되었지만, 이번엔 희망의당 측에서 이 내용만 봤을땐 통일회파를 구성한다는 것을 승인한다는 내용은 없지 않느냐며 이럴거면 협상을 끝내자고 선언하여 협상이 최종적으로 결렬되었다.#
이후 오쓰카 고헤이 대표의 말에 따르면 야당간의 통일회파 구성을 위해 희망의당과 1차적으로 잠정합의를 이루어냈지만 협상이 중단된 것을 사과한다면서 앞으로도 통일회파 결성은 아니더라도 범야권의 연합을 위하여 희망의당을 포함하여 입헌민주당까지 연계를 해야할 필요성은 있지 않겠느냐며 다만 희망의당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한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향후 희망의당과 신뢰관계를 재구축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는 했다.
그리고 2월에 접어들면서 민진당과 희망의당의 합당 움직임이 조금씩 커지고 있다. #
2018년 4월 8일 열린 교토부지사 선거에서 자유민주당, 공명당, 입헌민주당, 희망의 당과 니시와키 다카토시 전 부흥청 고문을 지지했고, 니시와키 후보는 일본공산당의 지지를 받은 전직 변호사였던 후쿠야마 가즈토 후보에게 이겨 교토부지사에 당선되었다.
6.5. 합당
결국 4월 25일에 희망의 당과 통합해 국민민주당(약칭 국민당)으로 새 출발을 한다.오쓰카 고헤이(大塚耕平) 민진당 대표와 다마키 유이치로(玉木雄一郞) 희망의당 대표는 이같이 의견을 모았다. 두 사람은 양당 인사들로 구성된 신당협의회에서 당 강령안과 기본정책안을 확정하고 양당 내부절차를 거쳐 이번 주내에 이런 방안에 공식 합의할 계획이다.그러나 양당에는 벌써부터 민진당을 선도탈당하여 희망의 당에 입당했던 구 민진당 우파와 희망의 당과의 합당에 반대하는 민진당 내 잔류 리버럴 세력들이 합당에 반대하여 불참하겠는 의사를 밝히고 있어, 야당 제1당이 되기는 곤란하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일단 각 당 내 반발에도 무릅쓰고 골든위크가 끝난 뒤인 5월 7일 공식 출범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5월 7일에 합당하였는데, 예상대로 두 당의 많은 의원들이 합당에 합류하지 않았다. #
6.6. 역대 대표 선거
6.6.1. 2016년 대표 선거
2016년 제2대 민진당 대표 선거 | ||||
<rowcolor=#fff> 후보 | 국회의원 | 지방의원 | 총합 | 비고 |
<rowcolor=#fff> 계파 | 후보여정자 | 당원 | 백분율 | 당락 |
무라타 렌호 | 160표 | 126표 | 503표 | 1위 |
50표 | 167표 | 59.24% | 당선 | |
마에하라 세이지 | 84표 | 50표 | 230표 | 2위 |
44표 | 52표 | 27.09% | 낙선 | |
다마키 유이치로 | 25표 | 30표 | 116표 | 3위 |
24표 | 12표 | 13.67% | 낙선 |
오카다 가쓰야 대표의 사임으로 치러졌으며, 예상대로 인기가 높은 정치인이었던 렌호가 60%에 육박하는 득표율로 압승했다. 당내 보수파가 마에하라 세이지와 다마키 유이치로로 갈라진 것 역시 렌호의 압승을 견인했다. 당원 투표에서 렌호는 72%의 득표를 얻었다.
6.6.2. 2017년 9월 대표 선거
2017년 제3대 민진당 대표 선거 | ||||
<rowcolor=#fff> 후보 | 국회의원 | 지방의원 | 총합 | 비고 |
<rowcolor=#fff> 계파 | 후보여정자 | 당원 | 백분율 | 당락 |
마에하라 세이지 | 164표 | 115표 | 502표 | 1위 |
84표 | 137표 | 60.19% | 당선 | |
에다노 유키오 | 102표 | 94표 | 332표 | 2위 |
, | 42표 | 94표 | 39.81% | 낙선 |
무라타 렌호 대표가 도쿄도지사 선거 참패를 이유로 사퇴하였고, 당내 보수파였던 마에하라 세이지와 중도파였던 에다노 유키오가 맞붙었고 마에하라 세이지가 큰 표차로 승리하였다. 마에하라는 민진당과 희망의 당의 신설합당을 결정하였고 이에 반발해 에다노 유키오가 입헌민주당을 창당하기에 이른다.
6.6.3. 2017년 10월 대표 선거
오쓰카 고헤이가 단일출마하여 무투표로 당선되었다.7. 계파
민진당(일본)의 계파 분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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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계파 오카다 가쓰야 나카가와 마사하루 하라구치 가즈히로 마쓰바라 진 시모조 미쓰 |
8. 역대 포스터
역대 포스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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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참의원 선거용) 우선 2/3을 내주지 않는 것 | 2016년 6월 국민과 나아간다 | 2016년 3월 국민과 함께 나아간다 | |
9. 여담
대만 제1의 진보 계열 정당이자 약칭이 같은 "민진당"이 되는 대만 민주진보당의 당 대변인은 "동명의 정당이 증가함에 친근감을 느낀다. 축복한다"고 의견을 밝혔다.창당하면서 일본을 건강하게 하는 모임 · 개혁결집회 · 생활당 등 일본 민주당 출신의 무소속 의원에게도 참가를 호소했는데, 결과적으로 개혁결집회만 오자와 사키히토(小沢鋭仁) 1명을 제외하고 합류를 결정했다. 오자와 사키히토(小沢鋭仁)는 오사카유신회로 이당했다.
예상대로 2ch 챤넬러, 극우 파시즘, 넷 우익은 민진당을 공산당이라고 색깔론을 퍼부었고, 심지어 민진당 로고에서 トンスル라는 글씨를 찾아내서 反日トンスル으로 맘대로 해석을 하기도 했다.#
민주당 정권 시절 받은 정당보조금의 액수가 어마어마했다. 일본의 정당보조금은 중의원-참의원 선거 전국 비례대표 정당득표수로 계산하여 분배해주는데, 당시엔 150억엔 정도 됐다. 이후 당세가 쪼그라들며 1/3 수준으로 떨어진듯. 문제는 저 보조금을 소속 국회의원+낙선한 전직 의원과 지역당협위원장들이 1/n을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지에서는 '민진당 사람들은 선거에 떨어져도 월급을 받는 샐러리맨' 이라고 비판을 받기도 했다. 때문에 일부 쇄신파 사이에선 당명을 민진당으로 바꿀때 '일단 해당 후 보조금을 국고에 환수하고 다시 창당하자'라는 주장도 있었으나 쿨하게 씹혔다. 물론 당 운영엔 돈이 든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부분도 이해는 되지만, 민주당의 국고보조금을 계속 갖고 있는 이상 민진당과 민주당은 법적으로 같은 정당인데, 마치 자신들은 민주당과 다르다고 내세우는 격이니 웃픈 일.
당명이 발표되었을 때 "대만 민진당에서 당의 이미지가 나빠진다며 불쾌함을 드러냈다."는 웹기사가 버젓이 올라온 적이 있는데, 알고보니 2ch에서 날조한 기사였으며 당사자인 대만 민진당은 상술한 것처럼 친밀감을 느낀다고 밝혔다. 애시당초 직접 연관도 없는 타국 정당에 대해서 외교상의 트러블도 고려하지 않고 뜬금없이 근거도 없는 비난을 해댈 이유도 없다.
10. 역대 선거결과
10.1.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의석 증감은 선거 공시 당일 의석 수와의 비교임.※ 48회 총선 당시 민진당은 이미 분열 수순을 밟고 있었기 때문에 당 차원에서 선거에 후보자를 내지 않았다. 아래 자료는 무소속으로 출마한 민진당 당적을 가진 후보들의 결과이다.
연도(회차) | 후보자 | 당선자 | 정당투표 | |||||
지역구 | 비례 | 합계 (중복 제외) | 지역구 | 비례 | 합계 | 득표수 | 득표율 | |
2017(48회) | 30 | - | 30 | 18 | - | 18 | - | - |
10.2.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연도(회차) | 후보자 | 당선자 | 비개선 의석 | 총 의석 | 정당투표 | |||||
지역구 | 비례 | 합계 | 지역구 | 비례 | 합계 | 득표수 | 득표율 | |||
2016(24회) | 33 | 22 | 55 | 21 | 11 | 32 | 17 | 49 | 11,751,015 | 20.98% |
[1] 법률상 창당일은 舊 민주당시절인 1996년 9월 29일이다.[2] 해산 후 개별 합류[3] "Minshintō" 民進党(みんしんとう). kotobank.jp (in Japanese). The Asahi Shimbun Company. Retrieved September 9, 2020.[4] 보수계 정당을 흡수했기 때문에 사회자유주의 정당이라고 보긴 어렵다.[5] Blair, Gavin (22 October 2017). "With a landslide win, Shinzo Abe could be ready to rewrite Japan's pacifist constitution". Retrieved 11 December 2017.[6] "Japan's Democratic Party chooses a new leader". Public Radio International. 15 September 2016.[A] 다만 보수계열 정당인 유신당과 개혁결집회를 흡수했기 때문에 당 내에 온건 보수주의 세력이나 중도우파(Centre-right)로 분류되는 계파가 존재한다. #, #,#[8] 유신당 내부를 들여다보면 내셔널리즘을 추구하는 우익 진영과 자유주의, 개인주의를 추구하는 진영이 뒤섞여있었는데, 결국 이들이 갈라져서 자유주의 진영이 민주당과 합당했다고 보면 이해하기 편할 것이다.[9] 동명의 대만 민진당은 민주진보당의 줄임말이고 일본은 그냥 줄임말이 아니고 민진당이 정식명칭이다.[10] 국민민주당을 거쳐 현재는 입헌민주당의 본부로 사용 중이다.[11] 국민민주당으로 계승[12] 분류된 지역엔 민진당 출마, 무소속 출마 지역구가 섞여있다.[13] 이토 지사는 센다이 원자력발전소 재가동 문제를 두고 원자력사고 발생시 후쿠시마와 같은 문제는 발생되지 않는다는 발언 및 여성에 대한 차별적 발언을 했다가 욕을 먹었다. 실제로 이토 지사는 상하이와의 직항노선 개설을 위해 연수 차원에서 직원을 보내려다 주민소환 직전까지 가기도.[14] 그러나 민진당은 여당 시절 무능함으로 인하여 처참히 망해버렸던 민주당의 후신으로 2012년부터 선거 때마다 이전 때 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기에 이러한 결과가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15] 참고로 일본 최초의 여성 당대표는 사회당/사회민주당의 도이 다카코(1928-2014)이다.[16] 렌호 전 대표도 선거 후반 입헌민주당 지지 유세를 나서서 마에하라 대표와 고이케 대표를 강하게 비판하는 연설을 했다. 귀를 의심했다고 발언하는 등[17] 우당은 친하게 지내는 정당, 공당은 공동 노선을 피거나 공조하는 정당이다.[18] 이전부터 이들은 희망의당과 통일회파를 구성할 시 탈당할 수도 있음을 강력하게 시사했었다.[19] 표면적으로 내세운 이유는 민진당이 내세운 정책이 속빈강정이여서, 나의 정치적인 뜻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입헌민주당이 최선(=정책을 분명히 하고 있는 곳이 입헌민주당)이라는 것이지만 민진당 내 잔여보수파의 독단적인 통일회파 구성추진이 탈당의 결정타였다는 것이 세간의 중론이다.[20] 카와다 류헤이 의원은 이미 입헌민주당에 입당했으며, 아리타 요시후, 카자마 나오키, 에사키 타카시 의원은 민진당 탈당 후, 입헌민주당에 입당계를 냈다.[21] 이 보조금 때문에 민진당에서 렌호의 탈당을 처리하지 않아 그녀는 일시적으로 이중당적 상태에 있기도 하였다.[22] 자당 소속 전임대표 오카다 가쓰야 의원이 중심이 된 중의원 내의 회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