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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 | → | 일본공산당 대만민족지부 | → | 타이완 민주자치동맹 |
일본공산당 대만민족지부 日本共產黨 臺灣民族支部 Taiwanese National Branch of the Communist Party of Japan | |
약칭 | 臺灣共產黨(대만공산당), 臺共, 台共 |
창당일 | 1928년 4월 15일 |
해산일 | 1931년 9월 |
본부 | 일본제국 타이완 다이호쿠주 |
서기장 | 林木順 謝雪紅 王萬得 |
기관지 | 신대만대중시보(新臺灣大眾時報) |
후계 정당 | 타이완 민주자치동맹 |
1. 개요
대만일치시기인 1928년,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일본공산당 소속으로 대만인들이 결성한 공산당 조직이다. 당시 대만의 대만인 정치 세력 중 가장 좌파 성향이 강했으며, 강령에 대만 독립과 대만공화국 성립을 내걸었다. "대만 독립"을 공식 주장한 최초의 정당이다#.2008년 중화민국(대만)에서 창당된 대만공산당(2008년)과는 상호 무관하다.
2. 결성
1927년 코민테른은 일본의 여러 문제에 관한 테제, 이른바 27년 테제에서 '식민지의 완전한 독립'을 규정하고 "일본공산당에 조선과 대만에서의 공산주의 운동을 지도할 것"을 중요 임무로 하달했다. 코민테른에서는 일국일당 원칙에 의거 일본공산당에 대만을 담당하도록 하면서, 이를 위해 1925년 1월부터 모스크바에 교육을 받고 있던 모스크바 손중산대학 유학생 林木順과 동방노동자공산주의대학[1] 유학생 謝雪紅 등 대만인 공산주의자들을 일본공산당으로 파견하였다. 코민테른의 지령을 받은 林木順과 謝雪紅은 11월 중국 상하이를 거쳐, 12월에는 일본 도쿄에 들어가서 일본공산당의 지도를 받았다.1928년 1월 일본공산당에서 지침을 받고 2월 상하이 조계지로 돌아온 이들은 대만공산당 조직 작업에 돌입했다. 일본공산당이 내린 조직/정치 테제는 (1) 일본공산당의 지부로 조직할 것, (2) 일본공산당이 선거 투쟁[2]으로 바쁘니, 설립과 관련하여 중국공산당의 원조 및 조력을 받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창립 멤버는 소수의 일본공산당 대만인 당원과 다수의 중국공산당 소속 대만인을 모아 충당하였다. 당시 대만인 공산주의자들은 주로 중국대륙에서 활동하며, 중국공산당에 입당해있었기 때문에 상하이 대만학생연합회에서 활동하던 중국공산당원 翁澤生은 중국공산당의 지부로 해야 한다며 반대했다. 그러나 "일국일당 원칙"을 표방하던 코민테른의 지침에 따라 일본공산당의 대만지부로 설립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1928년 4월 13일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에서 대만공산주의자적극분자대회를 열고, 조직 작업을 마무리했다. 이 적극분자대회에는 대만인 10명과 중국공산당 대표 彭榮 등 총 11명이 참가하여 4월 15일 창당대회 개최를 결정했다. 그리고 1928년 4월 15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결성대회를 열어 일본공산당 대만민족지부 성립을 선포했다. 수뇌부는 중앙위원 겸 서기 林木順, 후보위원 謝雪紅, 후보위원 翁澤生 등이었고, 이외 중앙위원으로 林日高, 蔣春火, 洪朝宗, 蔡孝乾 등이 선임되었으며, 대만문화협회와 농민조합 침투에 집중해서 이를 기반으로 대중당(大眾黨)을 조직한다는 전략을 채택했다. 결성대회에는 조선인 대표로 여운형이 참석했고, 중국공산당 대표인 彭榮도 자리했다고 한다. 이어 사흘 후인 4월 18일 제1차 중앙위원회를 개최하고 간부 인선을 발표했다.
대만민족지부는 대만 다이호쿠에 '도내중앙'(島內中央)을 두고, 도쿄에 '도쿄특별지부'(東京特別支部)를, 상하이에 주찰상해간부(駐札上海幹部)를 두었다.
3. 활동
결성 후 불과 열흘 밖에 지나지 않은 1928년 4월 25일 시작된 상하이독서회 사건으로, 상하이 일본총영사관 경찰에 의해 당 간부들이 대거 검거당했다. 상하이독서회는 林木順과 謝雪紅 등이 2월 창당 준비 작업의 일환으로 조직했던 것인데, 독서회가 일본 제국 경찰에 검거되면서 대만지부 간부진 또한 대거 체포되었던 것이다. 이때 서기 林木順은 잠행 후 중국공산당 지역(소비에트)으로 도주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후 국민당군과의 전투 과정에서 전사하였다 또는 체포되어 처형되었다는 증언이 엇갈리고 있다. 翁澤生은 상하이에서 잠행하였으며 검거를 피한 자들은 중국공산당으로 도주하였다.일제 경찰에 의해 대만으로 송환된 謝雪紅은 독서회 관계자들이 대만민족지부와의 연계성을 끝까지 부인한 덕분에 증거불충분으로 1928년 6월 석방되었고, 11월 일본공산당 본부의 지령을 받아 조직을 개편하였다. 이때 중국으로 도주한 간부들을 '기회주의자'로 비판하며 제명했다. 謝雪紅의 노력으로 일본공산당 대만민족지부는 1928년 농민조합, 1929년에는 대만문화협회에 각각 성공적으로 침투했다. 중앙연구원 대만사연구소 참조. 1930년 다이호쿠주 마쓰야마(松山)에서 일명 '송산회의'라 불리는 확대 중앙위원회를 개최하고 활동 방침을 명확하게 하였다.
그러나 1930년에는 중국공산당을 배후로 두고 있던 翁澤生 등의 반격으로 대만민족지부 내부에서 정치노선을 두고 갈등이 벌어졌다. 코민테른이 일국일당주의에 의거 대만은 일본제국 영토이므로 일본공산당 하에 대만공산당을 결성하도록 한바, 중국공산당은 코민테른의 방침에 따라 일공 대만지부 설립에 적극 협조했으나, 출범 직후 상하이독서회 사건(일명 타이코台共 사건)으로 주찰상하이간부 조직이 박살나자 1928년 10월 중국공산당 대만지부를 만들며 대만공산당의 주도권을 노리고 있었다. 상하이독서회 사건 당시 중공으로 도주한 翁澤生 등은 중공으로부터 개혁요구장을 받아들고 와서 개혁동맹을 조직한 후, 당내 주도권을 장악하고 5월 31일 임시 당대회를 개최하여 코민테른과 일본공산당의 지시를 받는 謝雪紅, 楊光黃 등 기존 리더십을 축출하였다.#
새로운 지도부, 속칭 신중앙(新中央)은 사회 각 계층과 연대하여 반제국주의 식민지혁명을 선취한다는 기존 방침을 폐기하고 반제국주의/반자본주의 동시 혁명을 진행하기로 하면서 급진적 정치강령을 채택하고 격렬한 투쟁에 나섰다. 특히 우서사건 당시 상황을 오판하고 공개적으로 파업에 참여해 구호를 게시하고 출판물을 파업 노동자들에게 배포하는 등 조직을 드러낸 결과 대만총독부 경무국이 1931년 3월부터 검거작전에 돌입하여 6월까지 지도부를 잇따라 검거하면서 조직이 붕괴되었다. 1931년 9~12월까지 주요 인물 전원이 체포되어, 謝雪紅은 징역 13년형을 선고 받았으나, 9년 만인 1940년 병 보석으로 출소하였다.
대만민족지부가 붕괴되자, 일본공산당 본부에서는 1931년 3월 17일자 기관지 <아카하타>에 처음으로 "조선, 대만 등 식민지의 독립"이란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하고 4월 정치국 테제에서 "조선 대만 등 식민지의 완전한 독립"을 슬로건으로 표방한 데 이어 5월 당 중앙상임위원회 직속으로 민족부(중앙위원장 風問丈吉이 민족부장 겸임)를 설치하고 예하에 조선부문, 대만부문을 두어 조선과 대만 내의 공산주의 세력을 직접 지도하기 시작했다.[3]
4. 이후
1945년 8월 일본 제국이 연합국에 항복하고 대만이 중화민국으로 귀속된 이후 謝雪紅 등은 대만인민협회(台灣人民協會)와 농민회를 조직해 공산당 시절과 비슷한 정책노선을 내걸고 대만 독립을 주장했다. 그러나 강경 반공 성향의 국민정부 통치하 대만에서 공산당이 활동하기는 극히 어려웠으며, 천이 주석 정권에 의해 강제해산 당하고 말았다.1947년 2.28 사건이 발생하자 3월 2일 타이중시청에서 열린 인민대회에서 당시 타이중시 부녀회 이사장이었던 謝雪紅이 타이중 인민대회 주석으로 추대되었다. 謝雪紅은 타이중시 인민정부를 수립할 것을 촉구하며, 무장 투쟁을 선언하고 무기고를 습격해 무장하고 저항군을 조직했다. 타이중지구 치안위원회 작전본부가 구성되고, 謝雪紅을 총지휘로 하고 공산당원들이 주요 직위에 앉아 민병대를 통합한 제8부대 및 학생부대인 제27부대 등을 지휘하며 중화민국에 대항했지만, 국민당군의 무차별 진압 작전으로 궤멸되었고, 3월 14일 저항군을 해산시킨 후 살아남은 당원들은 샤먼을 거쳐 홍콩으로 도주하였다.#
생존한 일본공산당 대만민족지부 인원들은 홍콩에서 주비위원회를 결성하고, 1947년 11월 12일 "대만민주자치동맹(台灣民主自治同盟)" 강령 초안 및 규정 초안을 통과시키고, "타이완 인민들은 단결하여 제국중이 침략과 중국국민당의 반동 통치에 반대한다"며 타이완 민주자치동맹을 창당했다. 대만민주자치동맹은 중화인민공화국 전국인민대표대회 및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에 참가하여 오늘날 중국공산당의 위성정당이 되었다.
1989년에 대만에서 창당된 노동당은 이 정당의 후신을 자칭한다. 그러나 독립된 대만 공화국을 주장한 대만공산당과 달리, 이 정당은 양안통일을 내세우고 있다.[4]
5. 같이 보기
[1] Коммунисти́ческий университе́т трудя́щихся Восто́ка имени И. В. Сталина, 약칭 КУТВ[2] 1925년 공포된 보통선거법에 따라 실시되는 최초의 보통선거인 제1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가 1928년 2월 20일에 치러졌다. 1928년 1월 21일 중의원 해산 이후 선거 정국에서 일본공산당은 대만지부 설립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3] 민족부 조선부문 지도자는 김치정으로#1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지도했다#2.[4] 2차대전 전후시기 당시 대만의 공산주의자들 중에서는 중국공산당의 통일노선에 각을 세우고 반제국주의적 대만민족주의를 표방한 이들도 있다. 아예 한때 중국공산당 당원이였고 장제스 암살시도까지 했고 반중 독립을 내세웠고 민주화 이후 민주진보당을 지지해온 스밍이 대표적이다. (다만 스밍은 대만공산당 당적은 가진 적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