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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E0529><colcolor=#fff> 눌차도왜성 [ruby(訥, ruby=ヌル)][ruby(次, ruby=チャ)][ruby(島, ruby=ド)][ruby(倭城, ruby=わじょう)] | Nulcha-do Japanese Fortress | |
이칭 | 가덕도왜성(加德島倭城) 가덕진(加德陳) |
형태 | 연곽식 산성 |
면적 | 미상 유적 범위 남북 약 500m · 동서 약 200m |
건설 | 1593년 (선조 26년, 추정) |
고바야카와 타카카게 등 4인 | |
폐성 | 1597년 |
위치 | 부산광역시 강서구 눌차동 635 |
[clearfix]
1. 개요
부산광역시 강서구 눌차도에 위치하는 일본식 산성. 임진왜란 당시 고바야카와 타카카게 등 왜장 4명이 쌓았다고 전한다.2. 역사
현재 머물고 있는 일본군의 수효는 서생포에 5천, 임랑포에 3천, 기장에 3천, 동래에 1천, 부산포에 1만, 양산의 구법곡에 3천, 좌수영에 3백, 김해에 1만 8천, 안골포에 2천, 가덕(加德)에 7백, 웅천 · 제포(薺浦)에 4천, 거제에 7천여 명인데 (...)
『조선왕조실록』, 1594년 3월 18일 기사
『조선왕조실록』, 1594년 3월 18일 기사
각 진영의 왜장 성명을 알리기 위해 모두 그 나라의 향담(鄕談)에 따라 글자를 맞추어 적겠습니다. (...) 가덕(加德)에는 지범지(之凡之)[1], (...)
『조선왕조실록』, 1595년 2월 10일 기사
『조선왕조실록』, 1595년 2월 10일 기사
'부산 등 육지에 있는 왜적은 비록 잠시 철회하였다고 하더라도 거제 · 가덕 · 천성(天城)에는 왜적이 아직까지 남아 있으니, 우리 나라는 성급하게 왜가 모두 물러갔다고 하여 갑자기 사은해서는 안 된다.'고 한 근수의 말은 옳습니다. 과연 그렇다면 도원수로 하여금 즉시 '해중(海中)의 왜적이 아직까지 모두 물러가지 아니하여 주문(奏聞)하기 어렵다.'는 내용으로 심 유격에게 전하게 하고, 그에게 다시 약속하여 남김없이 철회하게 하기를 바란다고 말한 다음 그 조처를 보아서 사실대로 치계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조선왕조실록』, 1595년 4월 19일 기사
『조선왕조실록』, 1595년 4월 19일 기사
각 진영의 왜병 수목(數目)은, (...) 가덕 풍신광문(豐臣廣門)[2] 및 통익(統益)[3] 2천, (...) 이것이 일본에서 원래 들어온 수목입니다. 그 뒤에 줄거나 늘어난 것이 일정하지 않으니, 행장의 한 영을 보면 그 밖의 것도 알 수 있습니다. 갖추어 아룁니다.
『조선왕조실록』, 1595년 6월 8일 기사
『조선왕조실록』, 1595년 6월 8일 기사
심안돈오(沈安頓吾)는 이름난 장수인데 철병하는 일을 전담한다. 각 진영을 순찰한 뒤에 그가 말하기를 「임랑포 · 두모포 · 부산 · 동래 · 구법곡 · 김해 · 덕교 · 안골포 · 거제 · 장문포(場門浦)는 금명간 먼저 들여 보낼 것이고, 그 밖의 6진(陣)과 죽도진(竹島陣)은 그대로 놓아둘 것이다. 행장은 부산으로 진을 옮겨 수로(水路)의 편리함을 취해 명나라 사신을 영접할 것이고, 의지는 어제 성자(城子)를 모두 부수어버렸으니 뒤따라 마땅히 군막(軍幕)을 불사르고 동래로 옮길 것이며, 가덕의 진영은 행장이 있던 옛 진영으로 옮기고, 청정은 복병장(伏兵將)으로서 양산 · 구법곡에 진영을 옮기고는 명사를 기다려 모두 바다를 건너갈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1595년 7월 8일 기사
『조선왕조실록』, 1595년 7월 8일 기사
고려수번장(高麗戍番將)으로 부산포는 소서진주수(小西津州守), 서생포는 하산주계수(賀散主計守), 죽도는 갈도가하수(鍻嶋加賀守), 가덕도는 진병고(津兵庫), 안골포는 일번(一番)에 삼이기(森伊紀), 이번(二番)에 흑전갑비수(黑田甲非守)이다.
『조선왕조실록』, 1596년 12월 29일 기사
『조선왕조실록』, 1596년 12월 29일 기사
거제 현령이 『너는 왜어(倭語)를 아니 적진에 들어가서, 우리 주사(舟師)가 처음 전쟁하려 할 때는 너희들이 화친을 청하며 전쟁하려 하지 않더니 지금은 어찌하여 항거하여 전쟁하는 것이냐?』고 물어보라는 분부를 받고 가덕에 있는 적진으로 들어갔더니, 적은 나를 잡아가지고 안골포에 있는 적진으로 보내어 가두었다.
『조선왕조실록』, 1597년 3월 20일 기사
『조선왕조실록』, 1597년 3월 20일 기사
3월 29일 전라좌수사 원균이 서장(書狀)을 올리기를, "신이 해진(海鎭)에 부임한 이후, 가덕도 · 안골포 · 죽도 · 부산을 드나드는 적들이 서로 거리가 가까워서 성세(聲勢)는 서로 기대고 있는 것 같으나 그 수가 수만에 불과하니 병력도 외로운 듯하고 형세도 약합니다. 그중 안골포 · 가덕도 두 곳의 적은 삼사천도 차지 않으니 형세가 매우 고단합니다. (...)"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하였다.
『조선왕조실록』, 1597년 4월 19일 기사
『조선왕조실록』, 1597년 4월 19일 기사
도원수가 비밀 장계 한 통을 올렸다. 【그 내용은 대강 안골포와 가덕도의 적세가 고단한 것은 원균이 말한 바와 같으나 섣불리 싸우는 것은 옳지 않다는 내용이었다. 】
『조선왕조실록』, 1597년 5월 8일 기사
『조선왕조실록』, 1597년 5월 8일 기사
혹 어떤 사람은 '적병이 현재 안골포와 가덕도에 주둔하고 있으니 우리 나라의 주사가 이곳을 지나 부산 앞바다를 가로막기는 어렵다.' 고 하니, 그 형세가 진실로 그렇기는 합니다.
『조선왕조실록』, 1597년 5월 12일 기사
『조선왕조실록』, 1597년 5월 12일 기사
마침내 적선에 육박하여 많은 숫자를 살상하니, 적은 마침내 버티지 못하고 간신히 해안 위로 도망하기에 인하여 타고 온 배 2척을 빼앗았다. 또 가덕도로 향했더니 가덕도의 적은 이미 안골포에서 내원(來援)했기 때문에 적들이 또 배를 타고 그들의 소굴로 들어갔다. (...) 전선(戰船)을 정제하여 해양을 출입하게 하되, 가덕도 · 안골포 등의 적진이야말로 출입하는 길목에 해당되니 그들과 서로 접전하게 하지 않을 수 없는데, 보성 군수 안홍국이 탄환에 맞아 죽은 것은 매우 놀랍고 참혹한 일입니다.
『조선왕조실록』, 1597년 6월 29일 기사
『조선왕조실록』, 1597년 6월 29일 기사
왜적은 서생포에서부터 부산 · 안골포 등까지 경상좌우도의 연해 요해지를 마음대로 점거하여 둔거지(屯居地)가 서로 연이었고, 수로는 또 죽도 · 천성(天城) · 가덕 등까지도 적의 군거지가 있어 여러 곳의 적들이 한창 진격하여 나올 적에는 수륙의 형세가 다 같이 급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597년 11월 10일 기사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모리 데루모토로 하여금 경상도 남해안 지역의 주요 포구에 축성을 명령한 1593년 4월 22일에 다른 왜성들과 함께 쌓기 시작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축성자는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다치바나 무네시게, 시마즈 이에히사 등 왜장 3명으로, 휘하 병력 500명을 이끌고 공사를 주도했다. 7월에 5000명 규모의 병력이 눌차도왜성에 주둔했고, 윤년 9월 25일에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가덕도의 축성을 마치고 귀국하겠다는 서계를 올린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때쯤 눌차도왜성의 본성과 데지로가 거의 완성된 것으로 추정하는데, 소요 기간은 약 5개월이 된다.『조선왕조실록』, 1597년 11월 10일 기사
1595년 강화 교섭이 무르익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허락하여 고니시 유키나가는 6월부터 각 왜성에서 병력을 물리기 시작했다. 철수는 총 3단계[4]로 계획되었는데 눌차도왜성은 가장 마지막에 철수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2단계에서도 가토 기요마사가 기장왜성을 크게 증축한 것이 발각되면서 마찰을 빚었고, 3단계는 조명연합군 측에서 독촉을 거듭해도 차일피일 이루어지지 않았다. 눌차왜성에는 1595년에 다치바나 무네시게가, 1596년에는 시마즈 이에히사가 주둔하며 굳건히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면서 눌차왜성의 시마즈 이에히사가 떠나고 그 자리를 다치바나 나오츠구와 츠쿠시 히로카도가 대신했다. 이후 계속해서 웅천왜성 및 안골포왜성과 연계하여 후방을 지원하고 부산포로 가는 가덕도 해협을 차단하는 역할을 수행하다가 1598년 히데요시의 죽음과 함께 일본군이 철수를 결정하면서 폐성된 것으로 본다.
3. 위치 및 구조
눌차도왜성 위치관계도 |
눌차도왜성 항공사진 (1967) |
거가 대교 공사 구간에 왜성이 위치한 눌차도 서북 지점이 포함되면서 2008년 7월 한국문물연구원 주도 아래 발굴 조사를 실시했다. ㄴ자로 꺾어진 눌차도의 서측 구릉지에 쌓아 서측에서 오는 조선 수군을 효율적으로 감시할 수 있도록 했으며, 본성을 중심으로 여러 부곽(副郭)이 능선을 따라 이어져 있는 연곽식 산성이다. 해발 약 70m의 구릉 정상부를 삭평하여 석축으로 제1곽을 쌓았는데, 둘레는 86m로 중심부에는 높이 2 ~ 3m의 석축이 남아있다. 남측의 할미당을 중심으로 남북 방향의 석축을 쌓았고, 할미당이 있는 부분이 제1곽의 출입구로 추정하며 제1곽의 서측은 석축에 굴곡을 주어 치(雉)의 역할을 하고 있다. 제1곽의 남측으로는 가늘고 긴 고시구루와(腰曲輪)가 이어지면서, 남쪽으로 갈수록 3 ~ 4단을 이루며 단의 동측과 남측 사면에는 1m 내외의 석축을 확인할 수 있다.
북측으로 연속된 해발 66.5m의 정상부도 독립된 부곽으로 연결해 축조하였으며, 서측으로는 수직 해자(竪堀)로 추정하는 골짜기가 있는데 길이 39m, 너비 1 ~ 3m, 깊이 63cm로 풍화암반토를 굴착하고 조성되었다. 또한 눌차도 최북단 항월 마을의 서측 고도 50m의 정상부도 왜성의 북측 부곽으로 추정되나, 석축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발굴 조사 결과 고우가이(笄)[8]를 수습하였으며, 성내에서는 조선 시대의 기와편이 출토되었다. 제1곽의 석축은 대부분 잔존하고 있는 편이지만 할미당을 두르고 있는 돌담을 두르면서 조금 교란된 것으로 보이고, 남측과 동측은 대부분 경작지로 변했다. 주곽부의 서측으로는 현재 묘역이 조성되어 있으며 왜성에서 이어진 북쪽 구릉지 끝부분은 눌차대교를 건설하면서 파괴된 상태이다.
3.1. 갈마봉산성
<colbgcolor=#315288><colcolor=#fff> 갈마봉산성 [ruby(渴, ruby=カル)][ruby(馬, ruby=マ)][ruby(峰, ruby=ボン)][ruby(山城, ruby=サンソン)] | Galma-bong Fortress | |
이칭 | 가덕산성(加德山城) 가덕도왜성(加德島倭城) 가덕도왜성지성(加德島倭城支城) 성북왜성(城北倭城) |
형태 | 포곡식 산성 왜성[일부 개축] |
면적 | 미상 |
건설 | 미상, 최소 고려시대 이전 초축 추정 1593년 (선조 26년, 추정) |
미상 고바야카와 타카카게 등 4인 | |
폐성 | 1597년 (선조 30년, 추정) |
위치 | 부산광역시 강서구 성북동 산 43 |
항공사진에 나타난 눌차왜성과 갈마봉산성의 위치 관계 (1967) |
갈마봉산성 항공사진 세부 (1967) |
눌차만으로 통하는 해협을 사이에 두고 눌차도왜성과 마주보고 있는 해발 155.7m의 갈마봉(渴馬峰)의 정상에서부터 북동측 사면운 둥글게 감싸고 있는 산성이다. 내성과 외성으로 이루어진 이중성인데, 내성은 총연장 350m 규모의 평면 타원형 석성이고 동측과 서측에 출입구가 있다. 봉수대로 구전되어 오고 있는 서문지 옆에는 적대(敵臺)로 상정할 수 있는 장방형의 축대가 있는데, 자잘한 쪼갠돌이 흩어져 있는 다른 구간의 성벽과는 다르게 왜성의 성돌 형태를 하고 있다.
성내 정상부와 동측 하단부에는 방형으로 다진 건물 축대가 있어 임진왜란 때 왜성으로 개축한 흔적으로 추정하고, 성외 동북측에는 해자를 두른 흔적도 보인다. 성벽의 축조 기법은 가로 40~50㎝, 세로 20~30㎝, 높이 20㎝ 크기의 장방형 깬 돌로 바른층쌓기를 하여 수직이 되게 쌓았다. 상부 너비 4m, 하부 너비는 5.7m, 잔존 높이는 1.5m 내외이고 성내에 우물 1개가 남아 있다.
외성은 내성의 동북측으로 길게 확장하여 불규칙하게 능선을 따라가는 부정형 원형의 모습인데, 40년대의 항공사진에서부터 이미 확인되지만 그 존재가 잊혀졌다가 최근에서야 재발견되었다. 아직 면밀한 조사가 더 필요해 보인다. 현재 서남측 성벽 안쪽은 등산로로 이용되고 있으며, 그 아래에는 간이 체육 시설이 들어서 있다. 곳곳에 잡초와 나무가 무성하게 우거져 있어 서측 일부 체성을 제외하고는 무너져 내린 석재를 보고 성벽 선 정도만 확인할 수 있는 상태이다.
갈마봉산성은 지금껏 왜성으로만 구전되어 왔기에 성북동에 있다 하여 성북왜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려 왔지만, 최근에 이루어지고 있는 조사에 의하면 왜성으로 개축된 부분은 일부에 불과하며 대부분의 체성 구간이 고식(古式)을 띠고 있어 최소 고려시대 이전에 축성했다고 여긴다. 실제로 『고려사(高麗史)』 권32 1279년 (충렬왕 5)의 기사에 "합포, 가덕, 동래 등 요충지에 군사를 파견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묘사된 가덕의 요충지가 갈마봉산성이었을 가능성이 있다.[9] 그래서 학자에 따라서는 고려 말, 멀게는 통일신라까지 소급의 가능성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왜성을 신축하기도 했지만 기존의 한반도 성곽을 최대한 활용하려 했다는 것을 잘 드러내 주는 유적이다.
4. 현황
제1곽 이시가키 원경 |
제1곽 이시가키 축조 상태 |
북측 돌출 석축 |
묘역 근방에 잔존하는 석축 |
제1곽 남측 할미당을 감싸는 돌담 |
인근 야산에 흩어져 있는 석재 |
5. 교통
도서지역 특성상 자차를 가지고 있다면 접근이 비교적 쉽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면 상당한 고생을 해야 한다. 눌차도로 통하는 유일한 버스는 강서구1-1번인데, 외눌 정류장에 하차해서 지금은 폐교된 눌차초등학교로 올라가면 학교 담장 앞에서 좌측으로 난 샛길이 나온다. 이 샛길을 타고 쭉 올라가면 현재 할미당이라는 지역 신당(神堂)이 나오고, 그 지점 일대가 눌차도왜성의 주곽부이다.갈마봉산성은 강서구1-1번을 타서 천가교입구 정류장에 하차할 수는 있지만 많이 걸어야 하고, 대신 강서구1번의 한전 정류장에 하차해서 장항교회 쪽으로 쭉 내려오면 갈마봉으로 통하는 등산로 입구가 우측에 있다.
6. 여담
- 특이하게도, 눌차도는 분명 지리적으로 가덕도와는 별개의 섬[10]이었지만 눌차도왜성을 곧 가덕도왜성이라고도 부른다. 또한, 후술할 눌차도왜성과 갈마봉산성의 애매한 관계 때문에 가덕도왜성의 이름을 혼동해서 쓰는 경우가 잦다.
- 눌차도왜성의 제1곽 구역은 2010년대까지만 해도 눈에 띄게 석축이 잘 남아있는 편이었으나, 2010년대 후반 어느 시점에 분재를 키우는 경작지가 들어서고 관리가 되지 않아 급속하게 덩굴과 수풀이 잠식하고 허물어져 현재는 잘 알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 본래 눌차도는 배를 타고 들어가지 않으면 접근이 쉽지 않은 동네였지만, 거가대교를 개통하면서 그 일부인 눌차대교가 눌차도의 북쪽 일부를 거쳐가도록 하고 가덕도 읍내로도 출구를 만들어 놓아 비교적 답사가 쉬워졌다.
- 갈마봉산성은 아이러니하게도,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 초까지 이 성을 운용했다면 가덕도 해협과 낙동강 하구로 동쪽에서 침입하는 왜구에 대응하기 위한 용도였을 가능성이 크나 임진왜란 때는 거꾸로 일본군이 서쪽에서 진입하는 조선 수군에 대응하기 위해 활용했다. 그만큼 가덕도가 한일 국경선에서 중요한 전략적 위치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 눌차도왜성과 갈마봉산성 사이의 본성-지성 관계에 대한 분석이 학자마다 엇갈린다. 눌차도왜성을 본성으로 보는 견해가 주류이지만, 갈마봉산성을 본성, 눌차도왜성을 지성으로 보는 견해도 소수 존재한다. 실제로도 눌차도왜성은 모양은 왜성의 형태를 갖추고 있지만 면적이나 규모는 갈마봉산성이 더 크다. 다만, 눌차도왜성의 역할이 바다 건너 안골포왜성을 지원하고 해협을 차단하는 것이었던 만큼 지금도 선창과의 접근성이 더 좋은 눌차도 쪽이 본진 역할을 했을 개연성이 충분하다. 눌차도왜성은 기존에 조선군이 쓰던 가덕진성이 너무 눌차만 깊숙히 들어가 있어 가덕도 서측을 조망하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앞쪽으로 불쑥 나온 입지를 택한 측면이 있어 보이는데, 거기서 더 조망권을 확보해 갈마봉에 가려 보이지 않는 서남측 외해를 감시하기 위해서 갈마봉산성을 개조했다고 하면 이치가 맞는다. 즉, 삼각형 모양으로 배치된 눌차도왜성, 갈마봉산성, 가덕진성이 임진왜란 당시에는 하나의 '가덕 일본군 진영'으로서 유기적으로 기능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11]
7. 외부 링크
- 한국어 위키백과 : 눌차왜성(訥次倭城)
- 한국고고학사전 : 가덕도왜성(釜山加德島倭城)
- 부산역사문화대전 : 가덕도 왜성 터(加德島倭城-)
- 부산역사문화대전 : 가덕도 성북 왜성 터(加德島城北倭城-)
- 부산역사문화대전 : 갈마봉성 터(渴馬峰城-)
- 부산역사문화대전 : 가덕도 왜성 지성 터(加德島倭城支城-
8. 관련 문서
[1] 츠쿠시 히로카도(筑紫広門)의 음차이다.[2] 쓰쿠시 히로카도(筑紫広門).[3] 한자는 統益과 統增으로 서로 다르지만, 발음이 통하기에 오기로 볼 수 있다.[4] 1차로 거제도의 영등포왜성, 장문포왜성, 송진포왜성과 웅천왜성, 명동왜성, 자마왜성, 농소리왜성, 구포왜성, 동래왜성, 제포진성 등 10여개소, 2차로 서생포왜성, 기장왜성, 임랑포왜성 등 3개소, 3차로 부산포왜성 및 그에 딸린 전진기지들과 죽도왜성, 안골포왜성, 눌차도왜성과 전진기지 등 4개 진영이었다.[5] 가덕도나 거제도의 외해(外海)를 크게 바깥으로 돌아가는 것은 전근대의 목선으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6] 지금에야 낙동강의 퇴적 활동이 활발해져 김해만은 거의 삼각주로 메워지다시피 한 수준이고, 진우도, 장자도, 신자도 등 연안사주가 많이 생겼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연안사주는커녕 김해 바로 앞의 죽도나 칠점산까지 발을 디딜 수 있는 섬이 아예 없는 수준이었다.[7] 2차 관문은 박문구왜성과 추목도왜성이 이루었다. 또한 정유재란 때는 최전방이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 견내량왜성, 남해왜성과 사천왜성, 곤양왜성과 광양왜성 등 주요 해협마다 추가적으로 왜성을 박아 놓았다.[8] 무사의 머리카락을 정리하거나 장식에 쓰이는 도구[9] 현재까지 가덕도에서 발견되는 성은 눌차도왜성, 가덕진성, 천성진성 등 몇 곳이 있으나 고려시대까지 연대를 올려 잡을 수 있을 만한 곳은 갈마봉산성이 유일하기 때문이다.[10] 현재는 '새비지들'이라는 이름의 육계사주가 퇴적되어서, 그 위로 동선방조제를 쌓아 올렸기 때문에 서로 이어져 있다.[11] 가덕도 서남부에 위치했던 천성진의 일본군 진영은 여러 기록에서 가덕 진영과 별개로 지칭하고 있기 때문에 논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