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1 13:40:23

파라과이/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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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식민지 시절과 독립까지3. 3국 동맹 전쟁4. 20세기 초 정국
4.1. 1908년 혁명4.2. 1911년 혁명4.3. 제브뤼헤 호 사건4.4. 1912년 혁명4.5. 1922년 파라과이 내전
5. 차코 전쟁6. 1940년대 군부7. 스트로에스네르 독재 정권8. 민주화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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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라과이 사람들은 자신들을 과라니족의 후손이라 하여 과라니라고 부르고 있으며 과라니어를 사용하면 물건 값을 깎아주기도 한다. 하지만 진짜 과라니족은 전체 인구에서 극소수이고 인구의 대부분은 스페인인 혈통 백인과 과라니족의 혼혈인 메스티소인데도 국민의 90%가 과라니어를 할 줄 안다. 이는 파라과이가 독립 당시 자국민의 혈통 전반에 섞인 과라니 부족들의 정체성을 국가 정체성으로 띄운 덕이다.

2. 식민지 시절과 독립까지

잉카문명이 발달한 안데스 산맥 일대가 아닌 대부분의 남아메리카 변방지역이 그렇듯 대항해시대스페인인들의 식민지 개척 이전에는 뭐하고 살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1536년경부터 스페인의 식민지화가 시작되었다. 이 때 스페인 왕실이 이탈리아인 탐험가들로 구성된 원정대를 과라니 부족 지역을 탐사하는데 활용했다. 그러나 과라니족은 백인들의 통치를 전면거부했으며 1607년에는 과라니족 인디언들의 계속된 반란에 지친 스페인 제국 정부는 가톨릭 수도회예수회에 파라과이의 통치를 맡겼다.
파라과이에 있는 에수회의 레둑시온(reduccion)들은 제국의 핵심적인 은 광산이 있던 페루의 안데스 산맥 지대와 경계를 맞댄 동부 지역을 지키는 과제를 수행했다. 스페인인들이 많이 거주하지 않는 이 지역을 특히 브라질 남부의 상파울루에서 온 팽창주의적인 노예사냥꾼(파울리스타; Paulista)에게서 지키는 임무였다.
하버드 C.H.베크 세계사 1350~1750

예수회는 1609년 가톨릭으로 개종해 정착한 원주민들의 마을인 '레둑시온(reduccion)'을 세우고, 원주민들의 강제 노역과 노예 제도를 폐지했다. 콩키스타도르와 노예무역 상인들의 반대를 극복한 뒤, 예수회의 레두시온은 강력한 원주민 민병대의 비호를 받으며 마테[1]의 수출로 국제무역의 강호로 떠올랐다.

이런 파라과이 경제의 번영은 차츰 지역의 독립성 강화로 이어졌고, 이런 경향이 달가울 리 없었던 스페인 정부는 1750년 레두시온 제도를 금지했다. 이에 과라니족이 맞서 반란을 일으키고 심지어 예수회까지 이에 동조하자, 스페인 정부 역시 무력진압으로 맞서 1756년까지 피로 점철된 전쟁을 치러야만 했고, 끝내 스페인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2]

비록 짓밟히긴 했지만 예수회에 의한 17세기~18세기의 레둑시온 체제는 신앙을 통해 토착민족인 과라니족을 보호하고 생존하고, 심지어 국제무역체제에서 한 몫을 챙길 수 있도록 만들었다. 토착민이 노예나 마찬가지였던 스페인의 다른 식민지 상황을 생각해 보면 매우 극적이며, 스페인 식민 역사상 매우 드문 예에 속한다.[3] 그래서 실제 주민들은 메스티소임에도 인디언 언어인 과라니어가 아직도 널리 쓰인다. 아즈텍, 마야 인디언이 원주민인 멕시코에서 주로 스페인어가 쓰이고 콜롬비아에서는 칩차어 등 원주민 언어들이 소멸했으며, 미국캐나다앵글로아메리카도 인디언 언어 대부분이 유실되고 영어가 국어로 쓰이는 걸 생각해보면 아메리카 대륙에서 보기 드문 사례이다.

이렇게 우여곡절을 겪으며 식민지 생활이 계속되던 중, 1811년 5월 14일 파라과이는 스페인에 대해 독립을 선언했다. 1814년부터 1840년까지 파라과이는 이른바 "영원한 독재자"라는 별명을 받은 호세 가스파르 로드리게스 데 프란시아 박사의 독재를 받게 되었다. 프란시아 박사는 파라과이가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에 종속되어선 안 된다는 생각에서 철저한 쇄국 정책을 고수하였다. 그의 재위기간 동안 파라과이와 외국 사이의 여행이나 우편은 상당한 수준의 통제를 받았다. 파라과이로 유입되었던 외국인 상당수가 마치 전근대 조선에 들어온 외국인들과 마찬가지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파라과이에 정착할 것을 강요받았다고 한다. 프란시아 박사는 독립 이전 파라과이에 절대적인 권위를 행사하던 예수회 시설 및 성당들을 공격하여 약화시키고 대신 프로이센을 모델로 삼아 군국주의 국가를 세우는데 성공하였다. 그가 프로이센으로부터 모방한 징병제는 삼국전쟁 파라과이가 아르헨티나나 브라질과의 체급 차이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초반 만큼은 군사력에서 우위에 설 수 있도록 하는 배경이 되었다.

3. 3국 동맹 전쟁

3국 동맹 전쟁 (Guerra de la Triple Alianza) (1864~1870)[4]은 해당 항목 참조. 이 작은 나라가 대담하게 브라질+아르헨티나+우루과이의 3국 동맹군과 치룬 전쟁이다. 예나 지금이나 앙숙인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파라과이를 공격하는 것에 적극 협조했을 정도로 파라과이가 노골적으로 두 나라를 자극하여 벌어진 자업자득이었고 당연하지만 국력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패배했다.

이 전쟁 후반기에 아순시온에 있는 파라과이 국립 기록 보관소가 브라질 제국군에게 약탈당하여 모든 문서, 역사서, 기록들이 리우데자네이루에 있는 브라질 국립도서관(Biblioteca Nacional do Brasil) 지하창고에 150년이 넘도록 보관되어 있다. 그렇다고 해서 브라질 측 역사학계가 이 역사서 기록들에 손대고 연구한다던가 하는 것도 아니다. 경제적, 사회적으로 낙후된 브라질 국내 사정으로 인해 타국의 역사 연구나 분석에는 관심을 쏟는 빈도가 높지 않았기에 훗날을 기약하고 역사 기록들을 대량으로 쌓아두기만 한 것. 이 때문에 스페인 식민지 이전 시절, 스페인 식민지 시절, 예수회의 레둑시온 체제, 파라과이 건국사, 3국 전쟁 이전 파라과이 정치사, 파라과이 최대 전성기, 파라과이 전쟁까지의 역사 기록이 꽤 부실하며 연구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파라과이 현지에서 배우는 파라과이사와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5]에서 배우는 파라과이사는 객관적이 아닌 각자의 입장에서 서술한 걸 감안해서 봐야 한다. 양쪽을 모두 비교해가면서 볼 경우 곳곳에서 역사 왜곡, 프로파간다, 흑색선전의 극치를 느낄 수 있다.

해결 방안으로는 현 브라질 정부에서 문서들을 공개하거나 파라과이 정부에게 반환하는 방법밖에 없는데 문제는 브라질 정부가 파라과이에게 돌려준 극히 일부 문서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문서들을 도무지 공개하지 않고 있어서 연구가 어렵다. 그나마 부분적으로는 용케 칠레 등으로 빼돌린 것들이 조금씩 있어[6] 칠레 대학들이나 멕시코 UNAM대학 등이 연구하기도 한다.

3국 동맹 전쟁 패전 이후 파라과이의 경제와 사회는 초토화되었으며 돈이 없었던 파라과이 정부가 재건을 위해 국가소유였던 토지를 팔아 넘기면서 불평등이 매우 심각해졌다.

전쟁 이후 파라과이에선 콜로라도당자유당의 양당이 등장하게 된다. 처음에는 보수당인 콜로라도당이 집권했으나 1904년 반란으로 자유당이 집권한 이후로는 자유당이 계속 집권하게 되었다. 다만 자유당 집권기 동안에도 내란이 빈발하면서 정치가 안정되지는 못하였다.

게다가 전후 파라과이는 인구구조도 막장이었는데 전국민의 90%가 여성인 엄청난 여초국가가 되었다. 인구학적으로 의미가 있는 가임기 인구에서는 실제로 더 극단적인 성비였을 것이라고 추측되고 있다. 살아남은 남성의 상당수가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노인이나 어린아이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길거리에서는 날이면 날마다 강간이 일상다반사처럼 벌어지고 있었으며[7] 파라과이가 정부차원에서 남성볼리비아 등 주변국 출신 노동 이민자들에게 자기네 나라로 귀화해 달라고 부탁할 정도였고, 이탈리아와 독일, 프랑스, 스페인, 오스만 제국 등에서 이민자들을 대대적으로 받아내려고 애썼으며, 적성국인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에서도 이민자들을 받아내려고 애썼다. 그 영향으로 파라과이 인구의 상당수는 이 당시에 유입된 이탈리아계, 독일계, 프랑스계 이민자들의 후예이다. 이후로 파라과이의 인구는 높은 출산율과 영아사망률 감소, 해외이민자들의 유입으로 증가하였지만, 정신적인 후유증은 여전히 강하게 남았었고, 이런 후유증으로 인해 파라과이는 1950년대까지 일부다처제해야만 할 수밖에 없었다.[8]

2018년 브라질 국립박물관 화재 사고로 과거 브라질이 가져간 파라과이의 유물들이 모두 소실되었고, 파라과이 입장에서는 대재앙같은 소식이다.

4. 20세기 초 정국

파라과이의 20세기 초는 혼란의 연속이었다. 당시 언론의 “파라과이보다 혁명이 많은 곳은 없을 것이다.”라는 자조적인 문구는 당시의 불안정한 정국을 묘사하는 문구였다. 이러한 혼란을 주동하는 이는 파라과이 정치계에 혜성같이 등장한 알비노 하라였다. 1904년 10월 발발했던 1904년 혁명은 콜로라도당의 30년 정권을 종결시키고 후안 안토니오 에스쿠라 대통령을 실각시켰으며, 자유당은 30년 간의 집권을 이뤘다. 물론 집권 후에도 자유당은 당내 파별 다툼으로 혼란을 빚었다.

1908년 7월 2일, 자유당의 시민파인 베니그노 페레이라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한 반란이 발발했다. 반란 며칠 전, 반란이 임박했음이 일간 신문에 실렸지만 정부에 의해 검열되었다. 한편 EL DIARIO 신문사는 1908년 6월 15일 ‘혁명?’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발간했다. 이 신문사는 오랫동안 반정부 운동을 계획했던 대표적인 반정부파 언론이었고, 반란에 대해 국민들의 무관심과 무지가 어느 정도 인지 실험하기 위해 "그런데 누가 선동적인 행동을 예상할까?" "콜로라도 당으로부터?" "현 정권에서 배제된 자유당원들로부터?" "군부으로부터?" "어떤 장관들로부터 어떤 불만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는가?" 등의 질문을 던지며 기사를 냈다. 하지만 놀라울 정도로 정부 및 국민들은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당시 EL DIARIO 신문사 소유주인 아돌포 리켈메는 반정부 혁명 운동의 핵심 인물이었다. 그는 비밀리에 민간과 군부의 인원들로 구성된 혁명 위원회를 발족했다. 혁명 위원회가 페레이라 정부를 전복시킨 이유는 1904년 혁명의 목적을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혁명 위원회는 군부와 민간 소속 위원들이 연합으로 구성되었다.

1) 주요 민간 위원 명단
2) 주요 군부 위원 명단
- 알비노 하라, 피델 페레이라, 토마스 멘도사, 라몬 베하라노, 파트리시오 에스코바르, 마누엘 로하스, 카를로스 고이부루, 마르시알 우르비에타 등

4.1. 1908년 혁명

1908년 당시 파라과이 육군은 약 2,000명 규모로 2개 보병 연대, 기병 연대, 포병 연대(2개 포대)로 편성되었다. 제1보병연대는 비야아예스에, 기병 연대는 파라과리에, 제2보병연대와 포병 대대는 아순시온에 주둔했다. 혁명군은 우선 아순시온의 군부대를 접수함으로써 이후 발발한 혁명에 결정적인 도움을 마련했다.

반란 날짜가 아직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발각 위기에 처해지자, 7월 2일 자정 알비노 하라와 6명의 주동자들이 아순시온의 포병 부대를 장악하여 두아르테 육군 대위와 부관인 베릴라 소위를 체포했다. 아메리코 베니테스가 지휘하는 또 다른 반군은 제2보병연대를 장악했다. 이로써 수도에 주둔한 군부대가 모두 반란군 측에 떨어졌다. 수도에 남은 정부측 세력은 이제 경찰과 소방대만 있었다.

새벽 3시, 경찰은 사건을 알아채고 페레이라 대통령, 두아르테 전쟁부 장관, 베니테스 내무부 장관에게 보고했다. 하지만 이미 경찰 내부에도 혁명 동조자가 있었고 아이작 두아르테 경위[9]는 뒤늦게 오는 두아르테 전쟁부 장관을 체포했다. 제2보병연대와 경찰 간에 소규모 교전이 진행되는 가운데, 반군은 중앙우체국, 국립 극장과 기타 전략적 요충지를 모두 점령했다.

파라과이 해군에서 가장 크고 강력한 함선인 LIBERTAD 무장 수송선 함장이 처음엔 두아르테 전쟁부 장관의 쿠데타로 착각하고 경찰측에서 교전을 벌이다가 이미 반란군이 승기를 잡은 것을 확인하자 배신하고 반란군 측에 합류했다.

경찰 측은 저항했지만 점점 전황이 불리해졌다. 새벽 6시, 페레이라 대통령이 대통령 궁에 도착하여 70명의 경비대와 합류했다. 반란군은 점차 세를 불렸고 7월 3일 오전 11시엔 경찰 본부를 점령했다. 정부군이 확보하고 있던 장소는 대성당, 교도소, 기차역, 세무서에 불과했다. 7월 4일, 외국 사절단에 의해 휴전이 제시되었다. 사절단의 대표이자 주 파라과이 미국 대사 에드워드 오브라이언은 대통령 궁에 방문하여 페레이라 대통령과 내전 종전을 논의했고 휴전 조건을 반란군 측에 전달했지만 거절당했다. 결국 1908년 7월 4일, 대통령은 사임했고 외국 대사관으로 피신하며 반란군의 승리로 끝이 난다. 정권을 잡은 혁명 위원회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의회를 해산했으며 이전 정부의 측근들을 해임했다. 또한, 부통령인 에밀리아노 곤살레스 나베로를 임시 대통령으로 임명했다.[10]

4.2. 1911년 혁명

1910년 11월 25일, 새롭게 선출된 마누엘 곤드라 정부는 2달도 되지 않아 전쟁부 장관인 알비노 하라의 군사 쿠데타로 전복된다. 당시 파라과이는 전국을 4개의 군구으로 나뉘었고, 각 군구 당 1개의 보병 대대, 기병 중대와 포대가 주둔했다. 알비노 하라는 이들을 이용하여 다시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고 곤드라 대통령은 유혈사태를 피하기 위해 사임했다. 다음 날 알비노 하라는 의회에 의해 임시 대통령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측근들은 하라를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고 계속해서 군사 혼란을 비밀리에 계획했다. 1911년 1월 말 내무부 장관직에서 물러난 아돌포 리켈메는 곤드라 대통령을 복위시키기 위해 비밀리에 콘셉시온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제1군구 사령관인 알프레도 메디나 소령과 협력하기 위해서였다. 한편 엔카르나시온에 주둔한 제4군구의 사령관 페드로 멘도사 대령은 별개로 곤드라 복위 운동을 결정했다.

이 사실을 알게된 알비노 하라 대통령은 임시 정부의 군사 고문으로 칠레군의 막시밀리아노 호프레(Maximiliano Jofré) 대위를 임명했다. 호프레는 파라과이군 중령 계급과 참모총장직을 받았다. 호프레는 반란군이 연합하기 전에 개별적으로 격퇴하기로 결정했다. 우선 페드로 멘도사가 이끄는 제4군을 Caí Puente 전투(지금의 Coronel Bogado 시)에서 격퇴했다. 또한, Ñandeyara 협곡에 주둔한, 도나토 알론소가 이끄는 교정 경비대대를 격퇴했다. 반란군 잔당은 로사리오로 후퇴했고 알프레도 리켈메 부대와 합류했다.

알비노 하라 대통령은 전쟁부 장관인 카를로스 고이부루 대령을 사령관으로 삼고, 기함인 LIBERTAD 호와 3,000명의 정부군을 이끌고 반란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반란군은 본부가 있던 로사리오로 공격이 집중될 것이라 예측하고 병력 대부분을 집결시켰다. 하지만 정부군은 일부만 로사리오 남쪽에 상륙시켰고 본대는 에스테로보네테 요새로 향했다. 당시 요새에는 180명의 수비대만 있었고 5시간만에 점령되었다. 허를 찌르는 전략으로 반란군의 사기는 무너졌고 리켈메의 군대는 더 이상의 저항없이 해산되었다. 리켈메와 8명의 부대원은 카누를 타고 강을 따라 밀림 속으로 도망쳤으나 3월 17일 발각되었고 결국 체포되었다. 하지만 1911년 7월 5일, 리켈메가 사망하자 주변국에서 비난이 쇄도하고 국내에서 산발적인 폭동과 시위가 발발했으며 결국 같은 날 무혈 쿠데타로 하라 정부가 전복되었다.

뒤를 이은 리베라토 마르시알 로하스 대통령은 하라를 체포하고 망명 여비로 3만 달러를 지급하기로 합의했다. 표면상의 이유로는 유럽에서 군사 전술 연구를 위한 것이라 발표했다. 우선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망명시킨 뒤 지급하는 것으로 합의되었지만 정작 하라는 바로 칠레로 도망가서 합의가 무효가 되어버렸다. 하라는 당시 혼란스러운 파라과이 정국을 보건데 조만간에 귀국하여 다시 대통령직에 복귀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실제로 이듬해 알비노 하라는 귀국하여 새로운 반란을 준비하게 된다.

4.3. 제브뤼헤 호 사건

1911년 10월 12일, 600톤급 증기선 제브뤼헤가 250톤의 화약, 7.5인치 포 1문과 3인치 포 3문, 기관총 1정, 소총 6000정을 싣고 벨기에 앤트워프 항을 출항했다. 배는 포클랜드 제도에 상륙 후 바로 남미로 향했다. [11] 사실 제브뤼헤 호는 자유당이 알비노 하라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지원을 요청하여 파견된 것이었다. 제브뤼헤 호는 라플라타 강에 도착하자 브라질 국기를 게양하고 선체 페인트 칠을 다시하고 이름도 COIMBRA 호로 바꿨다. 짙은 안개 덕분에 몬테비데오와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지났음에도 주의를 끌지 못했고 무사히 지나가는 데 성공했다. 선원들도 발각될 경우 해적 취급을 받을까봐 선장의 명령에 복종했다. 파라과이 국경에 도착하자 선장은 선원들에게 떠나고 싶으면 떠날 수 있다고 선포했고, 원정대에 합류를 거부한 선원들은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거쳐 벨기에 앤트워프로 귀국했다.

정작 약속 일자보다 8개월이나 늦게 파라과이에 도착했다. 이미 알비노 하라 정부는 전복된 뒤였기 때문에 제브뤼헤 호는 파라과이 해군에 편입되었다.

4.4. 1912년 혁명

1912년 2월 28일, 리베라토 마르시알 로하스 대통령은 경찰총장인 카요 로메로 페레이라에 의해 강제로 사임되었고 콜로라도당 대표였던 페드로 파블로 페냐를 임시 대통령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자유당의 급진파 세력의 에우헤니오 가라이 소령이 무력으로 개입했고, 의회는 로하스를 다시 대통령직에 오르도록 추진했다. 하지만 자유당의 나머지 세력은 로하스의 재선은 헌법적으로 타당성이 없다고 주장하며 이를 반대했다. 수도 방위군 대장인 이폴리토 누녜스(Hipólito Núñez)는 정부군의 세가 반란군에 비해 매우 불리함을 느끼고 반란군에 합류하면서 배신했다.

반란군은 북쪽과 남쪽에서 양동으로 아순시온을 향해 진군했다. 3월 1일, 정부군은 파라과리에서 폭발물을 실은 무인 기관차를 보내 사푸카이 역에서 북쪽 반란군 2000명과 75mm 산탄총 2대를 실은 열차와 정면 충돌해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12]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란군은 20문의 대포와 14문의 기관총을 확보하고 3월 8일 아순시온으로 향하는 철도를 따라 피라유에 집결했다. 반면 페냐 대통령이 이끄는 수도 방위대는 1300명에 불과했다. 3월 11일 하라 전 대통령이 정부군과의 교전 중 중상을 입자 페냐 대통령은 합의를 종용했지만 거절당했다. 3월 16일 루케(Luque) 전투에서 정부군이 패배한다. 파트리시오 에스코바르 소장과 아돌포 치리페가 지휘하는 반군은 3월 17일 아순시온 공격을 개시했다. 남동쪽 산로렌소의 반군은 3월 19일 새벽부터 아순시온 공격에 합류했다.

3월 21일 정부군의 방어선이 뚫리기 시작하자 그날 밤 페냐 대통령과 800명의 지지자들은 브라질 함선을 타고 아르헨티나 코리엔테스로 도망쳤다. 다음날 반란군은 아순시온을 점령하고 에밀리아노 곤살레스 나베로를 다시 임시 대통령으로 임명했다. 한편 이번 쿠데타로 다시 한번 군부의 핵심인사로 복귀한 알비노 하라는 같은 해 5월 8일에 있었던 전투에서 당한 부상을 이겨내지 못하고 5월 15일에 35세로 사망했다.

4.5. 1922년 파라과이 내전

1904년 혁명은 파라과이의 자유당 정권 수립을 위한 대중 운동으로 시작되었지만, 자유당의 통치는 급진파와 시민파 사이의 파벌 싸움으로 빠르게 변질되었다. 급진파는 이후 친 샤에레르파와 친 곤드라파로 분열되었다. 마누엘 곤드라는 1920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지만, 에두아르도 샤에레르는 친 곤드라파이자 내무장관 호세 파트리시오 구기아리의 사임을 요구하였다.

곤드라 대통령이 이 요구를 거부하자 1921년 10월 29일 무장한 30명의 샤에레르 지지자(Schaerista)가 아순시온 경찰 본부를 점령하고 250명의 교도대대의 지원을 받아 곤드라의 사임을 요구했다. 군사학교장 마누엘 루고 대령은 곤드라에게 충성함을 선언했지만, 곤드라는 유혈사태를 피하기 위해 스스로 대통령직에서 사임했다. 의회는 대통령의 사임을 거부했지만 곤드라의 태도는 완강했고 뒤를 이은 부통령 펠릭스 파이바도 10일만에 임시 대통령직을 사임하며 정국의 혼란은 계속되었다.

이후 대통령직은 자유당 소속의 상원의원이자 친 곤드라파였던 에우세비오 아얄라에게 돌아갔다. 에두아르도 샤에레르는 아얄라를 자기 뜻대로 조종할 수 있다고 믿었기에 아얄라의 대통령직 임명을 찬성했다. 문제는 친 샤에레르파 내부에서는 이를 반대하고 전직 전쟁부 장관이었던 아돌포 치리페(Adolfo Chirife) 대령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웠고 콜로라도당까지 치리페를 지지하면서 대선을 실시할 것을 주장했다. 아얄라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하며 무위로 돌아가자 친 샤에레르파는 강제로 의회를 점거해버린다.[13]

이후 치리페의 제2군구와 페드로 멘도사 대령의 제4군구가 처음 반군에 합류했고 이후 프란시스코 브리주엘라 중령의 제1군구까지 합류한다. 결국 수도와 그 주변 군대까지 합류하면서 반군은 스스로를 Constitutional Army로 칭하면서 내전의 발발이 점점 다가왔다. 반면 정부군은 보병 1개 중대, 중기관총 1개 중대, 호위중대, 기병 1개 중대, 공병대와 사관학교 생도 및 교관으로 구성된 중대, 그리고 3척의 경비정을 포함한 250명의 해군만을 소집할 수 있었다.

치리페 대령이 이끄는 반란군은 5월 27일 파라과리에서 아순시온을 향해 천천히 진격했다. 이는 대통령의 거부권을 철회시키기 위한 협상도 동시에 진행했기 때문이었다. 6월 9일 아침 아순시온 근교에 집결한 반란군은 정부군과 시민군으로 구성된 600명 규모의 군대에게 억류되고 만다. 반란군은 결국 6월 14일 파라과리로 후퇴하면서 1차 공세는 실패로 돌아갔다.

정부군은 외국인 용병 조종사를 고용[14]하여 6월 28일에는 공중 폭격을 했으나 큰 효과는 보지 못했다. 7월 3일에는 반군의 마차를 폭격했으나 이 마차가 군수품이 아닌 반란군에 합류하기를 거부한 파라과이 주둔군 포로들을 수용했던 것이라는 안타까운 기록도 있다. 7월 8일에는 정부군 소속의 전투기 1대가 격추되기도 했다.

정부군은 약 1500명 규모의 군대를 둘로 나눠 호세 훌리안 산체스[15] 소령과 호세 펠릭스 에스티가리비아 대위를 각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반란군의 주요 거점인 피라유(Pirayú)와 야과론(Yaguarón)을 수복했다. 7월 14일 치리페 대령의 반군은 비야리카로 후퇴한다. 이후 정부군은 7월 23일 이비티미(Ybitimí), 7월 27일 이타페, 동월 31일에는 비야리카까지 점령한다. 반란군은 기병 게릴라를 조직하여 후방 교란을 펼쳤으나 8월 2일 진압된다.

8월 한달 동안 정부군은 비야리카를 새로운 거점으로 삼고 공군을 집결시킨다. 지속적인 폭격을 가하며 11월에 완전히 제공권을 장악하게 된다. 10월 말 칸고(Cangó)와 이슬라알타(Isla Alta)까지 내준 반군은 최후의 보루인 엔카르나시온까지 후퇴한다. 카르멘 델 파라나 전투에서 승리한 에스티가리비아는 소령으로 진급했다. 하지만 이 지역은 밀림지역으로 진격과 방어에 어려움이 많은 곳이었다. 반군의 저항으로 전선은 고착화되며 정부군 역시 많은 피해를 입는다.

어려운 상황의 반군은 1923년 3월 18일 비야리카를 기습하여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3개월간 착실히 회복한 결과였다. 이후 정부군의 후안 아얄라 대위가 이끄는 정부군의 군수품 수송 마차 20대까지 격퇴하는 전공을 올린다. 하지만 반군 지도자인 치리페 대령이 폐렴에 걸리고 만다. 결국 1923년 5월 18일 사망하면서 반군 사령관은 페드로 멘도사 대령이 되었다.

1923년 4월 에우세비오 아얄라 대통령은 건강 문제로 사임하며 재무부 장관인 엘리히오 아얄라가 뒤를 이었다.[16] 승기를 잡은 정부군 대부분은 파라과리와 이파카라이(Ypacaraí)에 주둔했다. 한편 호세 산체스 소령이 질병으로 후방으로 물러나자, 야전 지휘권은 에스티가리비아에게 일시적으로 이양되었다.

1923년 7월 9일, 프란시스코 브리주엘라 중령의 반군은 아순시온을 공격하여 일시적으로 점령했으나 물자 부족으로 다시 후퇴하고 말았다. 이를 계기로 반군는 진압되었으며 브리주엘라는 아르헨티나로 망명한다.[17]

삼국 동맹 전쟁의 상처를 아직 회복하지 못한 상황에서 발발한 1922년 파라과이 내전은 파라과이 경제를 더욱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5. 차코 전쟁

이후 파라과이는 1932년~1935년볼리비아와 그란차코 지방[18] 일부인 차코 보레알 지방[19]을 두고 차코 전쟁을 벌이게 된다.

당시 국제적으론 볼리비아가 유리하다는 전망이 압도적이었다. 볼리비아는 인구도 3배가 더 많았으며 극단적인 여초국가가 되어버린 파라과이를 감안하면 병력은 아예 넘사벽으로 볼리비아가 더 많았으며 땅도 훨씬 넓고 파라과이의 강력한 지원 아래에 장비와 무기도 더 우수했으며 1차 세계 대전 및 여러 전투에서 경험이 많은 독일 장군 한스 쿤트가 군사고문으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파라과이군 지휘관인 호세 펠릭스 에스티가리비아는 차코 보레알 지방에 석유가 많은 것 같으니 해외 석유기업들의 자본 지원을 요청했고 바로 네덜란드 이 이 지역 석유 개발권을 가진다는 조건으로 장비 자금을 제공했다. 질세라 록펠러 그룹의 스탠더드 오일은 볼리비아를 지원하면서 같은 조건을 요구해 이른바 정유업체 전쟁이라는 비아냥까지 나왔다.

에스티가리비아는 우선 저지대 늪지가 많은 차코 보레알 지방 특성을 이용하여 현지에서 대대로 살아온 이들을 군인으로 고용했으며 지리적 특성을 이용한 전술로 전투를 벌여 큰 효과를 거뒀다. 또한 파라과이군은 볼리비아군의 무선 감청과 암호문 해독을 막으려고 스페인어 대신 과라니어로 무선 통신을 진행하고 암호문은 과라니어로 작성하며 심지어 병사들의 대화도 과라니어로만 쓰게 만들었다.

결국 3년이 넘는 전쟁 끝에 파라과이가 전술적 승리를 거둔다. 볼리비아도 고전했지만 전쟁 말에는 반격에 성공하면서 전쟁이 더더욱 길어질 가능성이 컸는데 전쟁을 피하고자 차코 보레알 지역 난민이 아르헨티나로 계속 오는 통에 신경쓰던 아르헨티나가 전쟁에 끼어들기 시작한다. 아르헨티나는 겉으론 전쟁을 중재하겠다고 나서면서 만약 전쟁을 안 끝내면 아르헨티나도 참전하겠다는 으름장을 내놓았는데 이 당시 아르헨티나는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으뜸가는 경제 및 군사 최강국[20]이기에 두 나라 모두 아르헨티나에 맞서 싸울 생각을 포기하고 휴전협정을 맺는다.

전쟁은 1935년에 끝났지만 여러 번의 회의 끝에 전쟁은 1938년 7월에서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종전선언 및 평화협정으로 완전히 종결된다.

파라과이는 차코 보레알의 3/4을 손에 넣었으며 볼리비아는 파라과이 강 유역 및 푸에르토카사도 지역을 얻어서 어느 정도 땅을 확보했지만 전쟁 피해가 훨씬 컸기에 전쟁 중에 살라망카 대통령이 쿠데타로 쫓겨나고 사령관도 여럿 교체될 정도로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전쟁이 끝나자 결국 전술적 승리 및 이득은 파라과이가 더 컸기에 볼리비아는 전후 처리에 골치를 겪는다. 볼리비아는 안 그래도 칠레에 안토파가스타 주를 뺏겨 내륙국으로 전락했고, 브라질에는 고무 생산지 아크레 주를 뺐긴데 이어, 최약체인줄 알았던 파라과이에까지 털려버려 싸움 더럽게 못 하는 나라로 완전히 낙인 찍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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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차례 전쟁으로 인한 파라과이의 영토 변화

웃기게도 전쟁이 끝나서 가장 좋아라하던 이들 중 하나인 쉘은 얼른 차코 보레알 지방에서 석유가 진짜 나오는지 탐사를 시작했지만 석유는 2012년이 되어야 발견되었다. 에스티가라비아가 원조를 얻고자 뻥을 친 것이었다.

6. 1940년대 군부

몇 번의 쿠데타 끝에 치러진 1939년 대통령 선거에서 차코 전쟁을 승리로 이끈 에스티가리비아가 자유당 소속으로 당선되었지만 겨우 1년만에 영토 순방 도중 비행기 추락사고로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고 만다. 파라과이에선 자국 화폐에 그의 얼굴을 넣으며 기렸다.

국방부 장관 이히니오 모리니고가 임시 대통령직을 승계했는데, 모리니고는 콜로라도당과 손잡고[21] 당시 전세계를 휩쓸고 있던 파시즘 또는 나치즘식 독재정치를 추구하여 자신의 집권을 위해서 헌법을 정지하고 자유당의 정당활동을 금지시켰다. 이에 모리니고 대통령의 독재에 저항하는 총파업과 학생들의 폭동이 전국에서 일어났다.

모리니고 대통령은 완화책으로 1946년 정치활동을 합법화하여 좌익 야당인 2월당과 여당인 콜로라도당으로 구성된 연립내각을 조직했다. 하지만 2월당은 1947년 초에 모리니고에 반발하면서 연립내각을 파기했고, 이에 격노한 모리니고 대통령은 콜로라도당만을 지지하면서 대대적인 탄압에 나서게 되었다. 이에 2월당원은 자유당 및 파라과이 공산당과 공동전선을 체결하여 라파엘 프랑코를 리더로 하는 반란군으로 내전을 일으켰는데 이를 1947년 파라과이 내전이라고 부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해군의 거의 전체와 육군 일부가 반란군으로 가담했다. 하지만 육군 사령관이던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가 콜로라도당을 지원하면서 모리니고는 반격에 나섰고, 결국 1947년 8월에 반란군을 해산시키며 정부측이 승리했다.

이후 파라과이는 야당이 불법화되면서 1당 독재 국가가 된다.

7. 스트로에스네르 독재 정권

그렇게 파라과이 내전은 끝나고, 콜로라도당의 집권체제가 이어졌는데 당시 최고 지휘자였던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1954년에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페데리코 차베스 대통령을 축출하고 콜로라도 당의 차기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그는 파라과이의 경제개발을 추진함과 동시에 반대자에 대한 인권탄압과 권력기반 유지를 위한 막대한 비용지출로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다. 후안 페론[22]아나스타시오 소모사와 친하게 지냈으며, 특히 소모사가 니카라과에서 축출되고 파라과이에서도 쫓겨나다시피 했을때 받아들이기도 했고 1970년대-1980년대 더러운 전쟁이 펼쳐졌을 당시에 파라과이 CIA와 적극적으로 협력하기도 했다.

경제 문제에 있어서는 명과 암을 동시에 보였다. 우선 국제 대출 기관을 통해 국가 부채를 갚았으며 미국, 서독, 일본 등으로부터 차관을 받아 고속도로, 교량, 송유관 등의 인프라를 정비하고 1971년부터 1984년까지는 세계 최대급 수력발전소인 이타이푸 댐과 아르헨티나 국경 인근에 있는 야시레타 댐(Yacyretá Dam)을 건설하는 등 파라과이의 경제 성장을 위한 정책을 취했고, 이 덕분에 1977년부터 1980년까지 파라과이의 경제성장률이 12%에 육박하는 등 성과를 거두기는 했지만 칠레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와 비슷하게 국가의 경제는 어느 정도 성장했으나 국민들의 생활 수준은 거의 그대로였다. 특히 토지개혁을 한답시고 부자들의 땅을 몰수한 뒤 자신의 지지기반을 다질 목적으로 지지자들에게 차별적으로 토지를 나눠준 일은 파라과이 경제에 큰 타격을 입힌 삽질이다. 결국 상당수의 빈농들과 원주민들은 외딴 곳으로 쫓겨나거나 해외로 이주를 가는 결과를 낳았고 이는 현재까지도 파라과이에 막대한 후유증을 남겼다.

그렇게 35년간 장기 집권을 이어가던 중, 1980년대 남아메리카 대륙 전역에서 민주화 열풍이 부는 가운데, 1988년에 8번째 대통령직에 오른 스트로에스네르는 1989년에 최측근인 안드레스 로드리게스 장군에 의한 쿠데타로 축출되어 브라질로 망명했고 거기서 죽었다. 2006년에 브라질에서 사망한 그의 시체는 파라과이 정부가 인도를 거부하여 지금도 브라질리아 공동묘지에 있다.

그러나 스트로에스네르의 폐해는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으며 파라과이의 대표적인 문제점 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소수의 지배계층이 토지를 거의 독차지하는 문제는 민주화 이후로도 해결이 전혀되지 않았다. 민주화 이후로 장기집권한 콜로라도당의 의원들 상당수가 이러한 토지문제와 관련이 있는데다가 그나마 토지개혁을 중점에 둔 페르난도 루고 대통령도 임기 1년을 앞두고 탄핵당하는 일까지 겹쳐져서 앞으로도 해결하기가 힘들 것으로 보인다.

콜로라도당의 횡포가 어찌나 심했는지 파라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의 과거 스타플레이어인 골키퍼 호세 루이스 칠라베르트[23]1999년 자국에서 코파아메리카가 열렸을 때 우리나라에는 미국의 거지보다 못사는 550만 인구가 살고, 미국 부자보다 잘 사는 20만명 부자가 산다. 그런 부자들 이득을 대변하는 오비에도 정권을 찬양할 결과를 만들고 싶지 않다.라며 보이콧을 선언해 출전조차 안 했을 정도였다.

8. 민주화 이후

1992년 6월 20일, 파라과이 신헌법이 채택되었다. 5년 단임제와 부통령제 부활을 주요 골자로 하여 민주주의 정부 체제와 기본권 보호를 확립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이후 1993년 5월, 후안 카를로스 와스모시가 대통령에 당선되며 실로 오랜만에 민간인 대통령이 탄생하였다. 와스모시 정부는 전임 정부의 자유 무역 정책을 이어서 수행하고 교통, 건강, 교육 분야에서 증가하는 문제에 대처할 것을 약속했다. 하지만 야당 연합이 상하원 총선에서 모두 과반석 이상을 확보하여 법안 시행이 제대로 되지 않았고, 아직도 강하게 영향력을 지녔던 군부가 와스모시 정부에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심지어 군부의 핵심 인물인 리노 오비에도 장군의 주도로 쿠데타까지 발발할 뻔 했다.[24] 이후 오비에도 장군은 관련 혐의로 징역 10년 판결을 받게된다.

1998년 5월 대선에서 라울 쿠바스 그라우가 차기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쿠바스는 리노 오비에도와 정치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가졌으며, 취임 3일 후인 8월 18일에 오비에도를 석방시켰다. 파라과이 대법원은 다시 복역시킬 것으로 명령했으나 무시하였고 1999년 2월 하원에서 대통령의 권력 남용 혐의로 탄핵 소추 투표를 진행했으나 부결된다. 하지만 같은 해 3월 23일 부통령 루이스 마리아 아르가냐가 교통사고로 사망하자[25] 쿠바스 대통령이 사주했다는 소문이 퍼지며 시위가 발발했다. 이 과정에서 학생 8명이 사망하였고, 하원에서 대통령 탄핵 소추안이 통과되자 3월 28일 그라우는 사임하고 브라질로 망명했다.[26][27]

한편 대통령과 부통령이 동시에 공석이 되자 상원의장 루이스 앙헬 곤살레스 마치가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마치 정부는 정치적 위기로 휘청거리는 경제를 회복하기 위해 연립 정부를 세웠으나, 2000년 2월 정통급진자유당이 탈당하면서 여소야대 형국이 되면서 제대로된 정책을 추진할 수가 없었다. 2000년 5월 19일에는 쿠데타 미수가, 2000년 8월 공석이었던 부통령직 선거에서 정통급진자유당의 훌리오 세자르 프랑코 후보가 당선되었고, 2001년 8월에 탄핵 시도까지 발생하면서 마치 정부의 영향력은 바닥을 기었다.

그럼에도 콜로라도당은 정권을 유지했다. 2003년 대선에서 니카노르 두아르테 후보가 정통급진자유당의 훌리오 세자르 프랑코를 꺾고 대통령에 취임했다. 두아르테는 콜로라도당 소속이었으나 핑크 타이드 성향으로 보이며 진보에 가까운 모습을 내비쳤다. 하지만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에 대한 지지 표명과 대통령 재선에 대한 헌법 개정 추진 등의 모습은 본인과 콜로라도당에 대해 부정적인 모습을 심어주었다.

2008년 대선에서 콜로라도당은 당 최초의 여성 대선 후보를 내세웠다.[28] 하지만 가톨릭 주교 출신의 페르난도 루고에게 일격을 맞으며 콜로라도당은 장장 61년간의 집권을 마무리한다. 이는 파라과이 헌정사상 최초로 평화적인 여야 정권 교체이기도 했다. 높은 기대를 받으며 취임한 루고 대통령은 정작 정파 대립과 경제난을 해결하지 못했고, 주교 시절 여성 성도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어 사생아까지 낳는 등 논란의 중심이 되어버렸다. 설상가상으로 2012년 6월 15일 경찰의 발포로 농민 10명이 사망하고 80여명이 부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하자, 야당인 콜로라도당은 국정운영 능력을 문제삼아 하야를 요구했다. 콜로라도 당이 다수를 점한 의회에서는 루고에 대한 탄핵을 추진했다. 2012년 6월 21일, 루고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하원을 통과한 데 이어 6월 22일, 상원에서도 통과되자 루고는 이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면서도 사임을 발표하였다. 후임으로 페데리코 프랑코 부통령이 승계했다.

2013년 대선에서 오라시오 카르테스 후보가 당선되며 콜로라도당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된다. 카르테스 대통령은 루고 전 대통령의 탄핵으로 인해 정지되었던 메르코수르 정회원국 지위를 다시 회복했다. 하지만 대통령 재선을 가능케하는 내용의 헌법 개정을 시도하다가 반대 시위와 야당의 반대로 인해 무산되었다. 이후 마리오 아브도 베니테스산티아고 페냐 대통령이 뒤를 이으며 콜로라도당이 계속해서 정권을 잡고 있다.

[1] 우려내서 마시는 찻잎을 말한다. 다이어트 차로 한국에서도 유명해졌다.[2] 영화 미션이 이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3] <최초 인류의 후예들> 63~64쪽에서 인용.[4] 파라과이 전쟁(Paraguayan War)이라고도 한다.[5] 특히 3국 동맹 전쟁 당사국인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6] 아르헨티나의 앙숙인 칠레는 파라과이에 유일하게 우호적인 나라였다.[7] 자세한 상황을 알 수는 없지만 남자가 거의 없어서 보이는 족족마다 젊은 남자를 잡아서 강제로 성관계를 하려 드는 여성들과 반대로 인구가 너무 없어 성범죄조차 범죄로 집어넣지 못하는 상황을 역이용해 아무 여성이나 강간하고 다니는 살아남은 남성들로 막장인 상황이었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단 참조.[8] 끔찍한 전쟁의 상흔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인구유지를 위해 감정이 좋지 않을 주변국가에서 노예출신 이민자를 받아들이려고 했을 정도이다.[9] 위 두아르테 장관과 성만 같을 뿐 아무런 혈연 관계가 없음[10] 페레이라 대통령의 원래 임기인 1910년 11월 25일까지 임시 대통령직을 수행한다.[11] 선원들은 이때가 되어서야 파라과이를 공격할 것이라 알아차렸다.[12] 민간인의 피해는 없었다.[13] 대통령 거부권을 막기위해서는 전체 의석의 3/2 이상의 동의가 필요했지만 친 샤에레르파는 이를 확보하지 못한 상황이었다.[14] 1920년 누과수(Nú Guazú)에 최초로 항공학교가 설립되었다.[15] 중령 시절인 1932년 12월22일, 차코 전쟁이 발발하고 바이아네그라에 주둔 중, 볼리비아 공군의 폭격으로 전사한다. 사후 대령 계급이 추서되었다.[16] 당시 부통령직이 공석이었다.[17] 하지만 몇 년뒤 귀국하여 군단장까지 진급하여 차코 전쟁에서 활약한다.[18] 그란차코 지방을 모두 합치면 60만 km²가 넘는다. 차코 보레알을 빼면 나머진 아르헨티나볼리비아의 땅이다. 그리고 그란차코 지방의 과반수가 아르헨티나의 영토이다.[19] 25만 9,000km² 넓이로 한반도보다 더 크다[20] 그 거대한 브라질 제국을 떡이 되도록 두들겨 패놨고 그래서 우루과이라는 나라가 건국된 바 있다.[21] 모리니고는 무소속이었다. 콜로라도당과 협력 관계였으나 당적을 갖지 않았다.[22] 국내에서는 좌파 표퓰리스트라고 알려졌지만 후안 페론 1기 집권기 이후부터 1990년대 이전까지는 페론주의 정당이 집권한 기간이 의외로 길지 않다. 여하튼 그래서 파라과이 내전 당시에 콜로라도당을 대놓고 지지하며 전함을 지원보내주기도 했다. 파라과이 내전이 끝나고 나서 자유당원들을 망명객으로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여하간 그러한 공적(?)덕택에 아르헨티나에서 강제로 내쫓기는 신세가 되었을때 파라과이에서 한 동안 망명생활을 보내기도 했다.[23] 현역 시절 골 넣는 골키퍼로 유명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이 돌아이 기행을 선보인 후 재미들려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한번 더 선보였다.[24] 미국과 미주기구의 도움, 결정적으로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며 미수로 돌아갔다.[25] 아르가냐 부통령은 오비에도의 출소를 반대하는 입장으로 그라우와 갈등을 빚었다.[26] 쿠바스는 2002년 2월 파라과이로 돌아왔고 즉시 체포되어 아르가냐 전 부통령 살해 음모로 재판을 받았으나 무죄로 확정되었다.[27] 한편 오비에도 역시 쿠바스와 같은 날 아르헨티나를 거처 브라질로 망명했다.[28] 당시 교육부 장관이었던 블랑카 오벨라르 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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