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7 14:38:38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

파일:파라과이 국장.svg
파라과이 공화국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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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8a9><colcolor=#fff> 파라과이 제2대 대통령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 카리요
Francisco Solano López Carrillo
파일:Francisco_Solano_Lopez_Carrillo.jpg
출생 1827년 7월 24일
파라과이 아순시온
사망 1870년 3월 1일 (향년 42세)
파라과이 세로코라(Cerro Corá)[1]
국적 파일:파라과이 국기.svg 파라과이
임기 파라과이 제2대 대통령
1862년 9월 10일 ~ 1870년 3월 1일
배우자 엘리사 알리시아 린치(1833–1886)
복무 파라과이 육군
1844년 ~ 1870년
서명
파일: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 서명.svg

1. 개요2. 생애3.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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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대 파라과이 대통령이자 군인.

2. 생애

파라과이 아순시온에서 초대 대통령인 카를로스 안토니오 로페스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영국과 프랑스에서 교육을 받고 파라과이군 사령관과 외교 사절로 활동했으며 프랑스 주재 파라과이 대사를 역임하던 동안에는 영국 출신의 엘리사 린치[2]와 결혼했다. 1862년 아버지 카를로스 로페스가 사망하자 군부의 도움으로 대통령이 되었다. 대통령 취임당시 파라과이 헌법에 적혀있는 대통령직 세습금지를 위반한거라 논란이 있었고 이걸 대통령직을 10년만 한다는걸로 무마했다.

일명 남아메리카의 나폴레옹을 자처했고 1864년 영토 확장을 위해 콜로라도당과 블랑코당의 다투던 우루과이의 내분을 틈타 블랑코당을 지원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허락도 없이 아르헨티나 영토를 침범하는 큰 실수를 저질렀고 이로 인해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브라질3국 동맹 전쟁을 치렀다. 이 과정에서 정말 황당한 행동을 했는데 아르헨티나에게 길을 빌려달라고 하자 아르헨티나 쪽에서 거절했다. 그러자 파라과이군을 무단으로 아르헨티나 영토로 행군시켰는데 이에 대해 아르헨티나가 항의하자 아르헨티나를 공격해 버렸다. 이것 때문에 아르헨티나는 결국 브라질 및 우루과이와 동맹을 맺고 파라과이와 맞서 싸우게 되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승산이 아예 없는 전쟁이었고 투유티 전투에서 크게 패하면서 밀리기 시작하여 1869년 1월 1일 수도 아순시온이 함락당하고 1870년 3월 1일 보좌관과 단 둘이 남은 상태에서 항복을 거부하다가 파라과이 북부 세로코라 밀림에서 결국 전사했다. 이 전쟁으로 인해 파라과이는 남성 인구의 90%가 전사하거나 행방불명되거나 포로가 되는 등 사라졌으며 국력이 엄청나게 날아가서 거의 멸망 일보직전까지 갔다.

3. 평가

로페스에 대한 평가는 남미 국가별로 매우 상이하며 자국에 유리하게 선전되어 적당히 걸러들을 필요가 있다. 현재까지도 브라질이 관련 사료를 공개하지 않아 일부 유출되거나 약탈되지 않은 자료에 한해 제한적으로 연구되기 때문에 각 국의 주장이나 사료를 비교하며 중립적인 자세로 볼 필요가 있다. 2019년 브라질 국립박물관 화재 사고 이후로 약탈이후 돌려주지도 않고 가지고 있던 이웃 나라 핵심 사료들이 전부 싸그리 불타면서 이제 뭐 공개할 자료도 안 남아버렸다.

우선 파라과이 입장에서, 로페스 대통령은 파라과이 민족주의, 침략자의 압제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운 저항정신, 애국심의 상징으로 현재도 파라과이에서 국부로 추앙받고 있다. 1천과라니 주화에 그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고[3], 아순시온 전쟁 박물관 입구에는 유언인 "조국과 함께 죽으리라(¡Muero con mi patria!)" 는 말이 크게 새겨져있다. 박물관 안에는 로페스 대통령과 엘리사 린치 영부인의 시신이 안치된 관이 박물관 한복판에 위치해있다. 또한 로페스가 전사한 3월 1일은 파라과이 독립 기념일 다음으로 중요한 국경일로 "국가 영웅절" 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영부인 엘리사 린치도 파라과이에서는 파라과이의 왕비, 여걸, 국모로 추앙받는다.

사실 3국 동맹 전쟁이 종식된 이후에는 로페스는 그야말로 국민을 전쟁에 몰아넣고 위대한 파라과이를 한순간에 3류 국가로 전락시킨 미치광이라는 인식이 생겼었다. 이는 내정간섭을 당했고 패배의식이 국가 전체에 팽배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4] 아르헨티나의 헌법을 도입하고 친아르헨티나 인사들로 파라과이 정부 인사들이 꾸려지며 교과서에도 위와 같은 내용이 삽입되었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볼리비아와의 차코 전쟁[5]에서 승리를 거둔 후 급변하게 되는데 당시 차코 전쟁의 영웅인 라파엘 프랑코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로페스는 운이 따라주지 않았을 뿐, 파라과이의 자주성을 드높인 위대한 지도자다."라는 주장을 펼치면서부터였다. 이런 기조는 역시나 차코 전쟁에 참가했었던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가 대통령이 되면서 이어졌다. 스트로에스네르의 재임 35년 간(1954-1989) 파라과이는 반공과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분위기로 흘러나갔다. 여기서 로페스는 파라과이의 저항정신을 상징하는 인물로 선전되었고 그 결과 현재 파라과이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등극하게 된 것이다.[6]

반대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에서는 자신의 욕심으로 나라를 파멸까지 끌고간 미치광이 독재자라는 부정적 평가를 보인다. 또한 영부인 엘리사 린치는 악녀로 묘사된다. 3국 동맹 전쟁에서 동맹국은 파라과이를 먼저 공격하지 않았다. 로페스가 국가를 강하게 만들겠다는 야심만 가지고 무턱대고 브라질에게 선전포고한 것도 모자라 영토 열어달라는 요구를 거절했다는 이유로 아르헨티나에게도 전쟁 거는 바보짓을 저지르면서 전쟁이 발발했다. 중요한 사실은 예나 지금이나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사이는 좋지 않다. 심지어 500일 전쟁으로 인해,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손을 잡을 것이라는 상상은 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로페스의 잘못된 판단으로 결국 3국동맹이 체결된 것은 사실이기에 수많은 국민을 사지로 몰아넣은, 심지어 먼저 전쟁을 일으켰던 로페스 대통령을 매우 나쁘게 선전할 수 밖에 없다.

[1] 브라질군과 교전 중 전사[2] 지금의 아일랜드의 코크(Cork) 출신이다. 당시엔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이었다.[3] 아버지의 초상화 역시 5천과라니 지폐에 그려져 있다.[4] 파라과이는 삼국동맹전쟁의 패배로 인하여 이과수 폭포의 대부분을 잃었으며 파라과이 남성의 90%가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되었다.[5] 1932년 9월 9일~1935년 6월 12일[6] 반대 사례는 유고슬라비아 국왕 페타르 2세와 아프가니스탄 최고지도자였던 아슈라프 가니. 그야말로 국민을 전쟁에 몰아넣은 주제에 침략자의 압제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긴 고사하고 죽는 것이 겁이나 재산 들고 외국으로 도망이나 쳤다. 그 덕택에 적들에겐 자신의 욕심으로 나라를 파멸까지 끌고간 주제에 재산이나 들고 도망간 한심한 겁쟁이요, 자국에선 국민을 전쟁에 몰아넣고 위대한 조국을 한순간에 3류 국가로 전락시킨 찌질한 겁쟁이 취급이나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