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38a9><colcolor=#fff> 파라과이 제8대 대통령 칸디도 파스토르 바레이로 카바예로 Cándido Pastor Bareiro Caballero | |
출생 | 1833년 10월 27일 |
파라과이 아순시온 | |
사망 | 1880년 9월 4일 (향년 46세) |
파라과이 아순시온 | |
국적 | 파라과이 |
임기 | 파라과이 제8대 대통령 |
1878년 11월 15일 ~ 1880년 9월 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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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라과이의 제8대 대통령이다.2. 생애
할아버지 페드로 후안 카바예로(Pedro Juan Caballero)는 독립서명서를 작성한 파라과이 건국의 아버지들의 일원이었다. 1858년 6월 2일, 유럽으로 유학을 떠나서 학교를 마치고 1863년 12월에 귀국했다.1864년 3월 21일, 런던과 파리에 주재한 파라과이 대사관에서 부대사를 맡았다. 1869년 2월, 귀국했으나 이미 파라과이는 삼국동맹군에 점령당한 상태였다. 1869년 3월 31일 공화당 연합 클럽을 설립했다. 이 모임은, 1878년 2월 17일에 자유 클럽(Club Libertad)으로 개칭되었다.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 전 대통령의 열렬한 지지자[1]였던 바레이로는 콜로라도당 소속의 호세 세군도 데쿠드와 갈등을 빚었다.
바레이로는 5대 대통령인 살바도르 호베야노스의 반대파로 그의 실각을 위한 반란의 주도했지만 오히려 1874년 2월엔 외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때 영국으로부터 2백만 파운드를 대출받는 협상을 담당했다. 1876년 8월부터 1878년 8월엔 재무부 장관도 역임했다.
1878년 12월 31일, 4대 대통령이었던 시릴로 안토니오 리바롤라가 암살당하자 이를 사주한 것이 유력해보였다.[2] 미국 대통령 러더퍼드 B. 헤이스의 중재로로 1879년 10월 15일, 차코 북부 지역에 대한 볼리비아의 영유권을 인정하는 데쿠드-키하로(Decoud-Quijarro) 조약이 체결되었으나 비준되지는 않았다.
1880년 9월 4일, 임기 중 사망했고 곧바로 베르나르디노 카바예로가 쿠데타를 일으키며 차기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1] 스페인어로 lopizta로 불린다.[2] 살인을 주동했던 베르나르디노 카바예로가 바레이로의 정치 동맹를 맺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