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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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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제5대 황제
옹정제 | 雍正帝
파일:Portrait_of_the_Yongzheng_Emperor_in_Court_Dress.jpg
출생 1678년 12월 13일
청나라 북경 자금성 동육궁 영화궁
(現 베이징시 둥청구)
사망 1735년 10월 8일 (향년 56세)
청나라 북경 원명원 구주청안전
(現 베이징시 하이뎬구)
능묘 태릉(泰陵)
재위기간 옹친왕
1709년 ~ 1722년 12월 27일
제5대 황제
1722년 12월 27일 ~ 1735년 10월 8일 (12년 27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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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어: 아이신기오로(ᠠᡳ᠌ᠰᡳᠨ ᡤᡳᡠ᠋ᡵᠣ)
중국식: 인쩐(胤禛)
만주어: 인전(ᡳᠨ ᠵᡝᠨ)
한국어 독음: 윤진
부모 부황 성조 인황제
모후 효공인황후
형제자매 35남 20녀 중 4남
배우자 효경헌황후 오랍나랍씨
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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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성헌황후 뉴호록씨, 돈숙황귀비 연씨
순의황귀비 경씨, 제비 이씨, 겸비 유씨, 영비 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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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상재, 상재 고씨, 상재 상씨, 상재 고씨, 길상재
답응 소씨, 영답응, 왕답응, 격격 소씨, 격격 장씨
격격 이씨, 격격 장씨, 궁인 난영, 궁인 운혜
자녀 9남 4녀
신장 169㎝[1]
한호 화랴순 톱 한(ᡥᡡᠸᠠᠯᡳᠶᠠᠰᡠᠨ ᡨᠣᠪ ᡥᠠᠨ᠌)[2]
칸호 나이랄투 톱 칸(ᠨᠢᠶᠢᠷᠠᠯᠲᠤ ᠲᠥᠪ ᠬᠠᠭᠠᠨ)[3]
묘호 세종(世宗)
시호 중국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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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천창운건중표정문무영명
(敬天昌運建中表正文武英明)
관인신의예성대효지성헌황제
(寬仁信毅睿聖大孝至誠憲皇帝)

만주어: 텀거투러허 황디(ᡨᡝᠮᡤᡝᡨᡠᠯᡝᡥᡝ ᡥᡡᠸᠠᠩᡩᡳ)
연호 1723년 ~ 1735년
중국식: 옹정(雍正)
만주어: 화랴순 톱(ᡥᡡᠸᠠᠯᡳᠶᠠᠰᡠᠨ ᡨᠣ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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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황자 시절과 후계자 다툼2.2. 숙청2.3. 업적
2.3.1. 군기처2.3.2. 문자의 옥2.3.3. 지정은제 확립2.3.4. 부정부패 근절2.3.5. 농업 장려2.3.6. 개토귀류(改土歸流)
2.4. 실책
2.4.1. 제방 건설과 황무지 개간2.4.2. 외치 및 군사
2.5. 사망
3. 가정 관계4. 평가5. 기타6. 대중매체에서
6.1. 드라마6.2. 소설6.3. 영화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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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나라 제5대 황제. 강희제의 넷째 아들로, 부황이 열어젖힌 청나라의 전성기를 이어나간 군주이다. 강희제의 치세가 워낙 길었기에 비교적 늦은 나이에 즉위하였고,[4] 이후 13년 동안 재위했다.[5]

부친과 아들의 재위기간이 길고 그들의 화려한 업적들에 비해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내치에 전념한 것과 독한 인상 탓에 근대까지도 비교적 존재감이 묻혀있던 군주였으나[6], 현대에 연구가 진행되면서 강희제의 오랜 치세 이후에 불안정할 수 있었던 제국을 있는 힘껏 통치하여 청나라의 전성기를 유지시킨 군주라는 재평가를 받고 있다.

2. 생애

2.1. 황자 시절과 후계자 다툼

강희 17년인 1678년 12월 13일, 성조 강희제의 4남이자 덕비 우야씨의 장남으로 자금성에서 태어났다. 당시 우야씨는 연식이 적은 서비(庶妃)라서 황4자 윤진(옹정제)을 기를 수 없었다. 이 시기에 황귀비이자 내궁을 관리하던 동가씨[7]의 경인궁에서 자랐고, 몇년 후 황8자 윤사가 경인궁으로 들어오면서[8] 함께 자랐으며 효의인황후 동가씨가 죽은 후에도 그들은 계속 경인궁에 있었다.[9]

청나라 시절 황자들의 교육은 상서방(上書房)이 맡았는데, 강희제는 직접 나라의 특급 인재들을 뽑아 황자들을 교육시켰다. 황4자 윤진(옹정제)을 비롯한 황자들은 상서방에서 만주어, 몽골어, 한어 등 세 가지의 언어를 배웠고, 역사책과 여러 경서들을 익힘과 동시에 말타기, 활쏘기, 심지어 수영까지 익히면서 시간을 보냈다. 또한 어린 나이에 춘일독서, 하일독서 등 시가를 창작했다. 나이가 들면서 황4자 윤진(옹정제)은 부황인 강희제의 일을 돕기 시작했다. 16세 때 공자의 고향인 곡부로 내려가서 공자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19세 때는 부황이 준가르의 갈단 칸을 공격하러 갈 때 따라가서 정홍기의 군영을 관장했다.

그러나 초기에는 강희제에게 그다지 신임을 받지 못해서 질타를 받은 기록이 여럿 있다. 강희 37년 황자 제1차 분봉을 할 때, 황3자 윤지까지만 군왕으로 책봉하고 그 이하는 패륵으로 책봉했는데, 대신들이 의아해하며 황자들을 모두 왕으로 책봉해달라고 주청하자 강희제는 황4자(윤진)는 경솔하고 희로애락이 오락가락하며, 황7자는 우둔하다고 이유를 설명하며 결정을 유지했다.[10][11]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Peking_Lamatempel_wanfuge-%24.jpg
옹정제가 살았던 옹친왕부, 옹화궁(雍和宫, 융허궁)[12]

강희 41년(1702), 강희제는 황4자 윤진(옹정제)과 황8자 윤사에게 왕부를 하사하며, 왕부 서쪽은 4패륵, 동쪽은 8패륵이 기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내무부가 흠천감에게 4패륵과 8패륵의 거처를 옮길 길일을 정하라고 지시하자 흠천감은 올해가 4패륵의 본명년이니[13] 다음해에 거처를 옮기고, 8패륵이 올해 이주하는 것이 좋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황8자 윤사가 황4자 윤진(옹정제)과 함께 왕부로 가길 자청해 두 사람은 다음해에 왕부로 이주했다. 이때 윤진(옹정제)이 하사받은 왕부가 훗날의 옹화궁이며, 윤사의 왕부는 현재 옹화궁의 일부가 되었다.

강희 48년, 황자 제2차 분봉 때 옹친왕(雍親王)에 올랐다.

강희제에게는 아들이 모두 35명이 있었는데, 어려서 죽거나 양자로 준 아들을 제외하면 26명이 있었다. 이 아들 가운데서 둘째 아거(阿哥)[14] 윤잉(1674년~1725년)만이 효성인황후가 낳은 아들이었다.[15] 적장자인 윤잉을 강희제는 몹시 귀여워했다.[16] 강희제는 그렇게 예뻐한 적장자인 윤잉을 빠르게 황태자로 만들고 후계자 수업을 시켰다.

강희 36년(1697년) 제3차 준가르 원정때 강희제는 직접 원정에 참전했고, 윤잉을 북경에 두어 정사를 대신 처리하도록 했다. 그러나 윤잉은 이때부터 강희제의 신뢰를 잃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윤잉은 자신의 심복들을 보내는 등 부황의 행동을 관찰하고 탐문했다. 강희 42년에는 외숙조 허서리 송고투가 반역 혐의로 처형되었다. 하지만 강희 47년까지 윤잉이 저지른 각종 비행에 속을 끓이다가 결국 참다 못해 윤잉을 한 차례 황태자 자리에서 폐위하고 감금시켰다.

윤잉이 황태자의 자리에서 쫒겨나자 황자들은 저마다 황태자가 되려고 애썼다.[17] 강희제는 이 중 황장자 윤제를 경계하여 윤잉을 폐위한 자리에서 윤제에게 황태자 자리를 주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그런데 강희 47년(1708년) 9월, 황장자 윤제가 이를 순순히 수긍하고, 관상가 장명덕이 황8자 윤사가 귀해진다고 한 말을 인용하며 부황이 손 쓸 필요없이 윤잉이 죽을 것이라는 발언을 하면서 새로운 파장이 일었다. 이전까지 강희제는 윤사를 나름대로 아꼈으나 이 사건 이후로 윤사가 반태자당의 진정한 당수임을 알게 되면서 윤사를 증오하기 시작했다. 강희제는 윤사가 폐태자 윤잉을 음해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구금하고 패륵의 작위를 삭탈했다.[18]

폐태자 윤잉을 복위시킬 마음이 있었던 강희제는 11월 14일, 여러 황족과 대신들을 불러서 황1자를 제외한 황자들 중에서 황태자를 추천하고,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황자를 차기 황태자로 봉하겠다고 명령했다.[19] 그러나 조정 대신들은 아무리 적장자라고 할지라도 5년 동안 역모죄로 처형당한 송고투와 당을 결성한 윤잉을 방치하다가 결국엔 역모죄로 폐위하고, 폐위한지 얼마 못가 다시 황태자로 복위시키고자 하려는 강희제의 결정을 납득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강희제의 건강 상태도 몹시 좋지 않았기에 만약 강희제가 급사한다면 이미 반쯤 미쳐버린 윤잉이 황제가 될 것이었다. 악륜대, 아령아, 규서, 왕홍서 등 강희제의 측근이자 황8자당에 속한 많은 대신들이 황8자 윤사를 추천했다. 황족들과 황실의 외척 가문 및 황실 직속기인 상삼기, 그리고 자신의 소속기인 정람기 등을 포함한 대부분의 만•한 대신들이[20] 황8자 윤사를 지지하자 강희제는 몹시 충격을 받고, 꿈에서 효장태황태후와 효성인황후의 계시를 받았다며(...)[21] 대신들의 지지를 받은 황자를 황태자로 봉하겠다는 명령을 취소했다. 강희제는 2일 뒤인 16일 폐태자 윤잉을 석방하면서 황태자 복위 의사를 밝혔다. 마제[22], 동국유[23] 등이 윤잉의 황태자 재옹립을 반대하며, 황8자 윤사를 황태자로 책립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강희제는 격분하면서 두 사람이 조정 대신들을 선동하여 윤사를 황태자로 옹립하려 했다고 비난을 퍼부었다.

강희 48년(1709년) 폐태자 윤잉을 다시 황태자로 책봉했다. 그러나 강희 51년(1712년) 윤잉은 보군통령 탁합제 등 병부와 형부의 중신들과 결탁하여 역모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다시 황태자 자리에서 쫒겨나 함안궁에 연금되고 말았다.

이렇게 황태자 윤잉은 다시 폐위되었고, 능력있는 황자들이 다시 황태자 자리를 노리며 황위 다툼을 벌이게 되었다. 황3자 윤지는 윤잉이 실각하자 사실상의 장자 역할을 하면서 세력을 모았다.[24] 또한 황8자 윤사가 강희제의 견제에도 불구하고[25] 이광지, 악륜대, 아령아 등의 지지를 받으며, 가장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황8자당의 또다른 일원인 황14자 윤정은 전장에서 많은 공로를 세우며 부황 강희제의 총애를 받아 황8자당에서 윤사의 대안으로 고려된 계승자 후보였다.[26]

하지만 황4자 윤진(훗날의 세종 옹정제)은 그저 강희제의 업무를 묵묵히 수행했고, 황8자당과 거리를 두며 강희제와의 관계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윤진의 이런 태도는 강희제의 마음을 잘 공략했다.[27]

20세기까지 황4자 윤진(옹정제)은 폐태자 윤잉의 미온적인 지지자였다는 설이 있었으나, 이 설은 옹정제 즉위 이후 황태자당의 잔여 세력과 협력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도출한 결론이었다. 그러나 2000년 경, 학자 양쩬(杨珍)은 황4자 윤진(옹정제), 황8자 윤사, 황9자 윤당의 접촉이 빈번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28] 그들의 왕부가 서로 이어져 있고, 창춘원 부근의 별장도 같이 지었다. 그리고 제1차 태자 폐위 후 유폐된 윤잉이 자신은 반역죄만은 저지르지 않았으며, 대신 상주해달라고 황장자 윤제, 황4자 윤진(옹정제), 황9자 윤당에게 호소하자 윤당은 윤진(옹정제)에게 같이 상주하자고 권했으며, 두 사람은 함께 강희제에게 상주했다.

강희 50년, 황8자 윤사의 생모였던 양비 위씨가 죽자 황9자 윤당이 장례를 돕던 중 음식을 나르는 일로 황4자 윤진(옹정제)을 부르기도 했다. 양쩬은 윤진(옹정제)이 원래 황8자당이었으나 윤사가 강희제의 노골적인 견제와 증오를 받자 그와 관계를 끊고, 황8자당에서 이탈했다는 결론을 내렸다.[29] 이후로도 양쩬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사료가 계속 발굴되고 있다.

옹정제의 즉위 과정은 중국사에서 손꼽힐 정도로 논란이 많았다.

옹정제는 황위 계승 쟁탈전에서 평범한 황자일 뿐이었다. 그런데 강희제가 옹정제에게 제천행사를 맡기고 곧 서거하더니 보군통령 롱코도가 이끄는 군사들이 황궁을 통제하고 옹정제가 강희제의 유조를 발표하며 황위에 오르자 모든 황자들과 대신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야사에서는 그가 아버지를 살해하고 조서를 위조했다고 주장했다. 강희제가 十四(십사), 즉 14번째 아들 윤정을 후계자로 지목했는데 十(십)자가 第(제)자로 고쳐졌다는 (혹은 십자가 지워졌다고) 설이다. 물론 옹정제는 정적들을 마구 패서 이런 논란을 잠재웠다. 이 이야기는 많은 문학작품에서 소재로 쓰였지만, 막상 역사학자들은 근거가 빈약하다고 평가하였다.

강희제의 유조는 구두 유조, 즉 유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 남아있는 강희제의 만문판 유조, 만문 유언 기록 사본 모두 완전하지 못하며 후계자의 이름조차 나와있지 않다. 한문판 유조 2부 중 한 부는 낙관조차 없다.

그렇기에 아직까지 강희제의 유조에 대해 논란이 남아있다. 강희제의 유언은 옹정제 시대에 기록되었고, 롱코도만이 강희제의 유언을 듣고 옹정제에게 전달했고, 옹정제가 뿌린 강희제의 유조의 내용이 지역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30] 또한 청실록과 대의각미록에는 강희제가 죽기 직전에 이미 7명의 황자들과 롱코도(융과다)에게 황4자 윤진의 즉위를 선포했다고 하는데 원본 기록물에는 이런 서술이 전혀 없는 점이 문제가 되었다.[31]

옹정제의 계승이 강희제의 의지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강희제의 유언을 옹정제에게 전한 롱코도가 강희 연간 내내 중립적인 입장이었던 점[32], 당시 옹정제와 롱코도에게 유조를 조작하고 다른 황자들과 대신들의 반발을 억누르면서 즉위할만한 권력이 없었다는 점, 비록 옹정제가 기록을 왜곡하거나 수정했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강희제의 유언으로 즉위했다는 기록을 놔둔 점을 근거로 삼는다. 한편, 현재까지도 강희제 생전에 작성된 유조가 발견되지 않아서[33] 강희제가 정말로 유조를 남겼는지 의문스러워하는 의견도 있다.

결국 롱코도만이 옹정제의 즉위 정당성을 증명할 유일한 증인이기에 논란이 끊이지 않는 것이다.

2.2. 숙청

옹정제가 황제에 올랐을 때 사정은 불안한 점이 많았다. 형제들과 대신들은 그가 정말로 강희제의 유조를 받아 황위를 계승했는지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옹정제는 스스로도 정사에 대해 아는 게 없고, 아는 사람도 많지 않다고 인정할 정도로 황자시절 중요한 정무를 도맡거나 조정대신들과 왕래가 많지 않아 자기 세력이 부족했다. 그렇기에 황13자 윤상, 황16자 윤록 등을 측근으로 삼고 자신에게 강희제의 유조를 전달한 융과다와 옹친왕 시절부터 속하에 있던 장수인 연갱요[34]도 측근으로 삼아 중용했다.

옹정제는 강희제가 서거하자마자 친동생 윤제에게 귀경하라는 명을 내리며 감주에 도달하면 대장군의 직위를 삭탈하고 윤제와 강희제가 주고받은 서신을 모두 압수하라는 밀지를 내린다. 파르냉 신부가 본회의에 보낸 서신의 내용에 따르면 옹정제는 강희제의 명의를 도용해 윤제에게 모든 서신을 자신이 지정한 사람에게 넘겨주고 많은 수행원들을 데리고 오지 말고 빨리 베이징으로 돌아오라고 명했는데, 윤제는 베이징에 돌아갈 날을 사흘 앞에 두고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35]

옹정제의 이복형제로 강희제의 황8자 윤사는 상삼기 대신들과 하오기 왕공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옹정제는 즉위하자마자 황8자당의 직위를 높여주고[36] 기회를 엿봤다. 이후 윤사를 제외한 황8자당인 형제들을 외지로 보내어 황8자당을 와해시켰고, 윤사의 권력 기반 중 하나이자 정람기의 세 기주 중 가장 강력한 안군왕부를 해체시키고[37] 정람기 이친왕 윤상에게 그 속하의 니루를 수여했다. 옹정제는 이렇게 자신의 권력을 강화했다.

때마침 서북 지역의 전쟁에 나섰던 옹정제의 신하 연갱요가 승리를 거두면서 옹정제의 입지는 탄탄해졌다. 만약 이 전쟁이 뜻한 바대로 끝나지 않았다면 공격받았을 수도 있지만, 승리를 거두면서 자신의 위상을 제대로 잡았다.

그런데 이제는 이 연갱요가 문제였다. 승리를 거둔 데다 옹정제에게 매우 좋은 대접을 받자 연갱요는 자신감이 넘쳐서 무례하게 굴기 시작했다. 사실 연갱요는 옹정제 즉위 이전에도 주군인 옹정제에게 안하무인으로 굴다가 질책을 받은 적이 있다. 그는 뼛속까지 군인이라 정치적인 감각이 전무했고, 황실 내부의 권력 다툼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옹정제의 또 다른 측근들인 윤상과 융과다도 연갱요를 몹시 싫어했는데 상식이 있다면 연갱요는 같은 옹정제의 측근으로서 윤상과 융과다와의 관계를 개선하려고 노력이라도 했어야 했지만 전혀 그리하지 않았다. 게다가 연갱요는 황8자당 소속의 황9자 윤당을 감시하라는 임무를 소홀히 하고 그와 가깝게 지냈다.

옹정제를 당혹스럽게 한 것은 군에서 연갱요가 가지는 영향력이었는데, 연갱요와 함께 군대를 둘러보던 옹정제는 병사들이 땀에 젖어 몹시 힘들어 하자 말했다.
날이 더운데 중무장을 하고 있으니 고생들이 많구나. 모두 갑옷을 벗고 쉬도록 하라.
하지만 놀랍게도 연갱요는 침묵을 지켰고, 병사들도 그저 가만히 있었다. 옹정제는 못들었나 싶어서 다시 한번 말했으나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옹정제가 속으로 경악하고 있을 때가 돼서야 연갱요가 느긋하게 말했다.[38]
황상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너희들은 옷을 벗고 쉬거라.
그때가 돼서야 병사들은 옷을 벗었다. 이 모습을 본 옹정제는 곧바로 손을 대진 않고 오히려 "쉬지 않고 일을 하려는 모습이 가상하다."라는 듣기 좋은 말로 많은 상을 내려주었다. 그리고 연갱요의 부하인 악종기의 위상을 높여주며 정보를 수집하고 기회를 엿보았다.

연갱요에 대한 옹정제의 태도가 돌변하기 시작한 것은 옹정 2년 11월 13일, 공부낭중 악주 사건을 거론하면서부터다. 이 사건은 염친왕 윤사와 관련이 깊다.
염친왕은 수많은 죄를 지었으나 짐은 모두 너그럽게 용서했다. 훈계하며 개과천선하기를 바라여 강등하지 않고 한 달 치 벌봉만 부여했는데도 조정의 대신들은 염친왕에게 미혹당해 오히려 짐을 가혹하다고 여긴다. 지난 1년 동안 많은 대소신료들이 염친왕 때문에 연루됐는데도 죄를 달갑게 받아들였고 염친왕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염친왕도 태연자약하여 부끄러움이 없고 국법을 업신여겼다. 그 당원은 결코 해산할 수 없다. 공부의 낭중 악주 때문에 땔나무와 숯이 지연되자 염친왕은 악주를 해임하고 그를 대신해 은 1700냥을 납부하고 그후에 그에게 은 1650냥을 빌려 완납했다. 악주는 결코 돈을 낼 여유가 없는 자가 아니고, 염친왕은 여유가 없는데도 이러다니 무슨 뜻인가. 염친왕이 악주를 대신해 밀린 돈을 완납한 까닭은 다른 사람은 가혹하고 나는 너그럽다는 것이다. 악주는 연갱요에게 은 2만냥을 주어 포정사로 삼아달라고 청탁했고, 연갱요는 사실대로 상주했다. 짐은 사람을 공평하게 쓰는 데 이런 소인배가 짐의 이름을 더럽히려고 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옹정제는 연갱요의 요구나 좋지 않은 소문을 언급하면서 그에 대한 불평하기 시작한다. 비록 연갱요가 사실대로 고하고 악주의 뇌물도 받지 않았지만, 윤사도 해고할 수밖에 없던 사람이 왜 연갱요에게 전향했는지 의문을 가진 것이다.

그렇게 이를 갈면서 기회를 엿보던 옹정제는 즉위 3년째인 1725년, 연갱요를 숙청하는 데 나서기 시작한다. 이 해의 2월에 해와 달이 동시에 뜨는데다 하늘에 좋은 길조가 나타나자 많은 신하들이 옹정제의 덕을 칭찬하며 아부하는 말을 올렸는데, 물론 연갱요도 그렇게 했다. 그런데 글을 쓸 때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일을 하신다."(朝乾夕惕)는 말을 "저녁부터 아침까지 열심히 일을 하신다."(夕惕朝乾)라고 바꾸어 적어버렸다.

연갱요가 실수한 것은 맞지만 보통 때 같으면 무릎 꿇고 싹싹 빌기만 하면 그렇게까지 큰일은 아니었을 텐데, 옹정제는 이 일을 꼬투리 삼아 연갱요를 마구 공격하고 비난했다. 그와 함께 동시에 연갱요의 영향에 있는 지방의 관리들을 경질하고 그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임명하며, 신하들에게는 "요새 연갱요가 너에게 안 좋은 소리를 하니 조심하라."는 식으로 정치질을 해서 그의 영향력을 없앴다. 옹정제는 연갱요의 92대죄를 공표하며 그를 사사한다.

이렇게 연갱요를 숙청한 다음 옹정제는 곧바로 칼날을 황8자당으로 돌린다. 약 3년 동안 지속적으로 황8자당을 억압하고 견제하다가[39] 옹정 4년 정월, 마침내 황8자 윤사, 황9자 윤당, 황10자 윤아, 황14자 윤제에게 역모 혐의를 씌워 숙청할 준비를 마친다.

정월 5일, 옹정제는 조정대신들 앞에서 윤사의 죄상을 열거하며 강희제의 어비(군주의 문서)를 태웠던 일을 번복했다고 비난했다.[40] 가만히 있던 윤사가 거짓말을 했다면 일가족이 죽을 것이라고 맹세했다.
감히 하늘에 대고 맹세하다니 천지귀신도 두려워하지 않고 이미 양심을 잃었도다! 그는 이전에도 짐 앞에서 일가족이 죽을 것이라는 맹세를 하였다.[41] 짐은 "일가족이라는 범위는 넓다. 짐은 생각지도 않느냐."라고 일렀다. 지금 제왕대신들 앞에서 다시 맹세하다니 저주의 뜻이 명백하다. 윤사는 속으로 조종과 군상을 업신여겼노라! 윤사는 하늘을 저버리고, 조종을 저버리고, 짐을 저버렸다!

윤사가 항명으로 도발하자 옹정제는 말그대로 격노했고, 윤사의 종적을 삭탈해버린다.[42]

이후 한달 동안 옹정제는 대신들이 자진해서 윤사의 죄를 고발하기를 기다렸으나 아무도 그러지 않았고, 결국 2월 7일, 옹정제는 직접 제왕 대신들을 모아 윤사를 처벌하는 상소문을 올리도록 유도했다.[43] 2월 24일, 의정대신이던 황17자 윤례는 강희연간에 황14자 윤제와 교제했음을 고백하며 윤제와 윤사가 결연을 맺었다고 고발했다.

3월 경, 옹정제는 온갖 꼬투리[44]에 말도 안 되는 듯한 죄명을 붙여 윤제와 그의 가족, 측근들을 때려잡았고 다른 형제인 윤사는 아키나(akina, 阿其那), 윤당은 서스허(seshe, 塞思黑)로 개명시켰다.[45] 옹정제가 이들을 숙청한 이유는 이들이 역모를 꾸며서도, 자신의 자리를 위협해서도 아니다. 황8자 윤사가 조정대신들 사이에서 인망이 드높았기 때문이다.[46] 옹정제는 이렇게 형제를 탄압하고 유배시키고 집안에 가두는 등 악랄해 보이기까지 하는 태도로 형제들을 잡았다. 이때 많은 황족들이 타격을 입었다. 제6대 정친왕이자 철모자왕 아이강아는 작위를 박탈당했고, 정람기의 세 기주 중 하나인 공친왕 상녕의 아들들은 강등당했고, 복전[47]을 대신해 유친왕을 계승한 조카 광녕은 종인부에 감금당했고, 이미 옹정 2년 종적을 박탈당하고 유배지에서 사망한 패륵 소노는 부관참시당했다. 황8자당이었던 수많은 대신들도 처형했는데, 이중에는 옹정제의 이종사촌이자[48] 뉴호록씨의 당주인 아이송아도 있었다.[49] 이러한 옹정제의 황8자당을 향한 편집증적인 증오와 견제는 옹정제를 다루는 중국 사극에서 단 한번도 빠지지 않고 나올 정도로 유명하다.

결국 이런 옹정제의 무자비한 보복을 버티지 못한 황8자 윤사는 종인부에, 황9자 윤당은 유배지에서 유폐되어 죄인취급을 받으며 살다가[50] 1년도 되지 않아 사망했다. 황10자 윤아와 유일한 동복형제인 황14자 윤제도 작위를 박탈당하고 유폐되었으나 옹정제보다 오래 살아 조카 건륭제의 즉위 후 유폐에서 풀려나고 작위도 복권되었다. 윤사와 윤당의 아들들도 건륭제 즉위 직후 유폐에서 풀려났다.

다음 대상은 바로 양외삼촌인 융과다였다. 융과다는 옹정제의 즉위에 공을 세웠지만 그 이전까지 옹정제와 친분이 없었기에 옹정제는 그를 신임하지 않았다. 그리고 융과다가 황8자당과 가까이 지내며 윤사의 아들 홍왕을 옹호한다는 사실도 문제가 되었다. 그의 가문은 황8자당이었고 특히 사촌 악륜대는 강희제에게 채찍형을 당하고도 윤사를 열렬하게 지지한 황8자당원이었다.[51] 이 때문에 옹정제와 융과다 사이에 황8자당의 처분을 놓고 의견마찰이 있었고 이는 융과다가 숙청당한 이유 중 하나가 된다. 융과다가 국경 문제 때문에 러시아 사신과 협상을 하러 떠난 사이, 융과다가 보국공 아포란과 함께 옥첩[52]을 은닉한 사실이 발각되었다. 옹정제는 러시아와의 협상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자는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융과다를 체포하고 베이징으로 압송하여 41가지의 죄를 묻고 그를 처리했다.[53] 융과다는 참수당할 뻔했지만 옹정제는 그를 작은 집에 연금시키고, 그의 아들들을 해임시키고 흑룡강에 유배보냈다. 융과다가 연금된 지 1년 만에 사망하자 장례도 치러주었다. 그리고 동가씨들이 죄를 지었지만 효강장황후효의인황후의 가문이라며 악륜대의 자식들을 비롯한 동가씨들을 사면하고 중용했다.

연갱요의 후임 천섬총독이었던 악종기도 옹정제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했다. 준가르는 티베트 쪽을 배회하며 청나라의 국경을 교란시켰기에 옹정제는 준가르를 물리치려고 했지만, 적의 상황을 잘못 판단한 옹정제는 예상 외로 막강한 준가르의 전력에 고전했다. 그러자 옹정제는 최전선 지휘관인 악종기를 희생양 삼아 크게 질책했고, 악비의 후손인 녹영 출신 그지깽깽이라고 악종기를 멸시하던 만주 관료들이 때맞춰 악종기를 탄핵했다. 악종기는 안절부절 못하며 필사적으로 지키고 수비하려 했지만 끝내 모든 관직을 잃고 감옥에 들어가야 했다. 악종기는 15년간이나 콩밥을 먹다 건륭제가 즉위한 후 금천 반란의 조기 진압에 실패하면서 사천 지역에서의 오랜 공적과 경험을 재평가받아 전선에 복귀할 수 있었다.

옹정제의 정적이 아닌 황족들도 숙청 대상이 되었다. 옹정 8년 황3자 성친왕 윤지는 황8자당으로 지목되어 작위를 빼앗기고 경릉에 유폐당한다. 실제로 윤지는 황8자당은 아니었지만 옹정제가 윤아의 집을 수색할 때 윤당이 윤아에게 쓴 "기회는 이미 지나갔고, 후회해도 소용없다."는 글귀가 담긴 편지를 감추며 동생들을 지켜주려고 애썼으며, 황자 시절 옹정제보다 강희제의 중용을 받았고 옹정제가 가장 아끼는 아들 복혜의 장례식에서 슬픈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옹정제가 원한을 품은 것이다. 그리고 황5자 항친왕 윤기와 황12자 윤도 등의 형제들도 본인이나 자식들이 강봉, 작위 삭탈을 당했다.

옹정제의 이러한 숙청으로 강화된 황권은 개혁의 원동력이 되었으나 만주사회와 황족들의 분열을 촉발시켰다.[54] 그렇기에 건륭제는 즉위 직후 숙청당한 황족들과 대신들의 신원들을 회복시키고 구금된 자들을 풀어줌으로써 이러한 분열을 봉합한다.

이처럼 자신에게 반항하는 자라면 그게 형제든 사촌이든 숙부든 고관대작이든 무자비하게 숙청했지만 그와 반대로 자신을 지지해준 이들은 온갖 특혜를 주며 우대해줬다. 가장 신임하는 이복형제였던 강희제의 황13자 애신각라 윤상은 강희제의 승하 직후 모든 작위를 박탈당했던 그에게 화석이친왕(和硕怡亲王)이라는 청황실 남자황족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작위를 내리고 자손에게로의 세습까지 허락했다. 이는 청나라에서 세습이 가능했던 12개의 철모자왕(鐵帽子王) 중 9번째였고 순치제 이후로 개국공신들을 제외하면 청 역사상 최초였다. 또한 윤상의 친모인 장가씨를 경민황귀비로 추존시키고 후궁으로는 청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황제인 강희제와 합장시켰으며 윤상의 외가인 장가씨도 포의에서 만군기 상삼기 중의 하나인 양황기로 올려주기까지 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윤상의 넷째딸을 자신의 양녀로 입적하여 화석화혜공주라는 봉호까지 주고 직접 데려다 양육할 정도로 매우 총애했다. 강희제의 황17자 과의친왕 윤례(果毅親王 允禮)는 옹정제의 신임을 얻어 친왕위에 오르고 이번원과 공부 등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윤례의 친모인 순유근비 진씨(純裕勤妃 陳氏)도 자신을 지지해준 동생들을 챙겨주려는 옹정제에 의해 친정이 진가씨로 사성받고 양황기로 대기되는 등의 우대를 받았다.

2.3. 업적

옹정제는 아버지 강희제가 문무가 비교적 균형을 이루었던 데 반해 철저할 만큼 문치(文治)에 비중을 두었다. 선제인 강희제가 삼번(三藩)의 난 평정, 대만 정복, 러시아와의 분쟁, 외몽골 정복 등을 감행하고 준가르와 전쟁을 치르는 등 외정에 직접 관여하여 성과[55]를 내면서 내치도 돌본 것에 비교하면 철저하게 평화주의나 부전(不戰)주의로 일관했는데, 즉위 초기에는 연갱요가 서북에서 군사 작전을 벌여 승리를 거두었지만, 1731년 티베트의 갈단 체링에게 청군이 대패한 뒤로는 군사적인 정복 활동을 벌이는 작업에서 거의 손을 놓았다.

그렇지만, 내치에서는 선제 때 마무리가 안 된 수준의 내정 체계를 크게 정비하여 강희제와 거의 동급의 찬사를 받는다. 팔기군 체제를 손보고 군기처를 설치하는 등의 개혁으로 권력을 황제에 집중시켰다. 또한, 하술되는 '본인 즉위 문제'에 영향을 받은 것인지, 황태자 밀건법[56]도 시행했다. 다만 만주족 후비에게서 난 소생이 본인 뿐이던 건륭제 등의 사례로 실제 이 법의 효과가 있었던 때는 적다.[57]

2.3.1. 군기처

본래 황제 중심의 정치에서는 황제가 모든 일을 알아야 했는데, 이런저런 관리를 거쳐서 올라오는 상소문(제본)은 비밀성이 뚝 떨어지다 보니 황제가 쉽게 휘어잡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옹정제는 황제에게 곧바로 바칠 수 있는 사적인 연락통인 주접[58]을 강화시켰다.

이를 통해 옹정제는 각 관리들의 생각과 행동을 알아냈는데, 아무래도 황제가 모두 하기엔 일손이 모자란지라 군기처라는 주접 전담 부서를 만들어 돕게 하였다. 이들은 황제의 최측근이었고, 황제 집무실 근처에서 숙직하며 필요할 때마다 바로바로 대응했다.

여담이지만 이 주접이 유명한 까닭은 '주비 유지'란 것 때문인데, 쉽게 말하면 빨간펜 선생님이었다. 다만 부정적이라서 문제였다. 황제와 사적으로 이야기하는 주접이다 보니까 당연히 황제가 직접 답장을 썼는데 그 답장이 '그래 잘 받았다'가 아니라 보낸 사람을 조목조목 지적하는 내용이 가득했다. '내용이 이게 뭐냐', '왜 긴 종이에다 적게 써서 종이를 낭비하냐' 등등. 오죽하면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이걸 두고 '세계에서 가장 양심적인 독재 군주'라고 평할 정도.[59] 이런 옹정제의 비밀 정치에서 주고받은 편지뭉치는 청나라가 망할 때까지 자금성의 구석진 곳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이들은 추리고 추려서 112권에 달하는 <옹정주비유지>라는 제목의 전집으로 정리, 출판되었다. 각종 욕설과 비난이 자유자재로 쓰이지만 악플만으로 일관하지 않고 열일하는 부하한테 선플도 달아주는 등[60] 정조 어찰첩의 대륙 스케일이라 볼 수도 있을 듯.

2.3.2. 문자의 옥

옹정제의 탄압은 측근과 형제들만 머물지 않았다. 이민족으로 중국을 통치한 만주족은 사상적인 면에서 많은 통제를 펴야 했기에 자주 문자의 옥(文字之獄)이라는 필화 사건을 일으켜 많은 책을 검열하고 분서시켰는데, 강희제 - 옹정제 - 건륭제 시기를 걸치며 더욱 강화시켰고 가경제 때부터 줄어들었다.

강서성에서 과거를 책임지는 관리 사사정은 유민소지(維民所止)라는 시제를 냈는데, 유(維) 자와 지(止) 자가 옹정제의 연호인 옹정(雍正)에서 위의 변만 뺀 것이라 해서 옹정제의 목을 베어버리겠다는 뜻으로 해석해 구족을 베어버렸다. 문제는 이게 창작이 아니라 사서삼경의 하나인 <시경>에 나오는 말이다.[61] 또 한림학사 서준이 '폐하'(陛下)의 '폐'(陛) 자를 들개를 뜻하는 '폐'(狴)자로 바꾸어 쓰자 그를 죽여 버리기도 했다.[62] 이렇게 무자비한 탄압에 옹정제의 권력은 커지기만 했다. 설령 형제나 아들이라도 황제인 자신 앞에서는 무릎을 꿇고 절해야 하는 신하임을 강조하여 사적으로는 형제나 아들이나 공적으로는 엄연히 군신지간임을 강조하였다.

전설의 무기인 혈적자가 이때 옹정제가 보낸 환관 무사들이 숙청 대상자를 암살할 때 썼던 무기라고 전한다.

2.3.3. 지정은제 확립

지정은제는 명나라 때의 일조편법(一條鞭法)에서부터 출발한다. 당시 지방에 세력이 컸던 향신세력(鄕紳勢力)이 소유한 땅을 속여 보고하고 탈세하는 일이 많았지만, 장거정은 이에 단호히 대처하여 관청 몰래 경작하는 대량의 땅을 적발하였다.

그때까지의 세제인 양세법은 항목이 너무 많고 복잡하여, 불공정한 점이 많았다. 일조편법은 그것을 일관화시켜 과세 대상을 토지로 옮기고, 당시 보급하던 은으로 납세시켰다. 이러한 개혁으로 명의 재정은 크게 호전되었고, 국고에는 10년분의 식료와 4백만 냥의 잉여금을 축적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전세, 노역을 대신 하는 정은, 잡세, 잡역 모두 은으로 내게 했는데, 이때쯤이면 민간에서는 화폐 경제가 활발해졌고(무협 소설이 그래서 배경으로 명나라를 쓰기가 편하다) 나라 입장에서도 가격이 요동치는 현물보다는 화폐가 편했다.

청나라 시기에도 이런 일조편법은 쭉 계승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가지 폐단이 나타났는데, 그 하나만을 꼽자면 지방의 유지들은 관리들과 유착해 자기들 세금을 일반 농민들에게 떠넘겼고, 못살겠다 싶은 농민들은 달아나서 나라는 안정적인 수입원을 못 얻었다. 특히 세금을 내지 않으려고 워낙 많이 도망쳐도 관리들이 책임을 피하려고 숫자를 속이고 하다 보니 정세(인두세)를 매기기가 힘들었다.

정역(征役), 즉 조세와 부역을 부과하려면 인구 조사는 필수인데 가난한 농민들은 대책이 없으니 도망가거나 납세를 안 하고, 부자들은 당연히 이를 피해버렸다. 나라의 재정은 엉망이었고, 관리들도 문책을 겪으니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청나라 강희제 50년인 1711년에 성세자생정(盛世滋生丁)이 실시되었다. 정세는 사람의 머리수만큼 걷는 것. 결국 사람이 늘어나면 더 걷어 들이는데, 바로 이 해인 강희제 50년에 인구를 조사한 다음 정세를 영원히 동결시켰다. 말 그대로 세금이 더 안 늘어났다.

이는 엄청난 뜻이 있는데 이때부터 인구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호구 수에 따른 세제 부담으로 호적 체계에서 벗어났던 농민이 그만큼 많았다가 그러한 부담이 사라지면서 이 체제에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애를 많이 만들어도 이젠 뭐 부담도 없고.

이 정책으로 전국의 정세 수취량은 고정했으나 정세 대상인 농민들이 도망쳐 정세 수취량은 다시 줄기 시작하였다. 강희제는 이러한 문제를 완전히 풀기 위해 지세 1냥당 약간의 정세를 부과하는 식의 탄정입묘(攤丁入畝) 방법을 고안하였고, 정세가 지세로 합쳐지게 되었다. 하도 큰 일이기에 우선 광동성에서 먼저 시험을 해보았고, 결과가 괜찮자 사천, 절강, 하남성에서 시행해서 효과를 보았다.

지정은제(地丁銀制)가 이렇게 시행되었다. 이 지정은제가 시행되기까지 엄청난 논란이 있었으나 옹정제 때 끝내 시작되었고, 이를 반대하는 세력에선 반대가 극심했다. 정세를 지세에 통합하면 토지의 소유자는 세금이 늘어나는데, 가난한 사람들은 세금이 사실상 면제였다. 당연히 땅 가진 부자들은 세금을 많이 내야하는터라 반대했다.

1726년, 향시에 응시한 천여 명의 응시생들은 단체로 시위하면서 항의했고, 상인들에게는 문을 닫으라고 협박했다. 지정은제에 찬성하던 순무 이위(李衛)[63]는 이들을 간단하게 때려잡아 처벌했다. 그 뒤 2년 동안 지정은제는 복건, 섬서, 감숙, 강서, 호북, 강소, 안휘성을 걸치고 산서성에서도 시행해 건륭 연간에는 완벽하게 정착했다.

옹정 5년, 계주의 지주 서리 진순예(秦順兒)는 지세를 납부하라고 재촉했지만 지방의 유력자들은 반발하고 거부하며 오히려 진순예를 탄핵했다. 하지만 옹정제는 진순예는 그대로 두고 지세 납부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때려잡았다.

당시 중국의 사회계층들인 향신(중국의 과거에 합격하고 임관하지 않은 채 향촌에서 사는 자 또는 향촌의 퇴직 관리나 대지주, 유력 인사 등)들은,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는 실질적인 향촌 지배자였다. 이들은 지세 납부에 반발하며 계속해서 저항했는데 1727년 동광현의 지현 정삼재(鄭三才)는 혀를 내두르면서 황제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이곳의 악랄한 향신들이 온갖 구실로 관을 위협하고 지세를 내지 않아 백성들에게 전가하고 있습니다.
격노한 옹정제는 진상 조사를 철저하게 하라고 명했다. 하지만 향신들은 영향력이 워낙 커 관리들도 다루기가 힘든 존재들이었기에, 순진한 지방관들은 오히려 이들에게 털리기 일쑤였다고…

당시에 얼마나 지세 납부에 대한 향신들의 반응이 나빴나 하면, 지세를 내면 대장부가 아니다라는 말까지 퍼져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이들은 아예 향시의 시험에 나가기를 거부하고, 누군가가 나가면 응시자들의 답안을 뺏어서 찢어버렸다. 호광 지역에서도 이들은 단합해서 지세 납부를 거부하며 관과 맞서면서 뻗댔다.[64]

옹정제는 이에 강력히 대응했다. 응시생들이 단체 활동을 한 번만 더 벌이면 영원히 응시 자격을 박탈하겠다는 조서(詔書)를 내리고, 산동 지방의 진사, 거인, 수재, 감생 등 1천 4백여 명의 공명을 모두 박탈시키는 등 불이익을 주거나 벼슬길 자체를 아예 막아버렸고, 지세를 미납한 사람은 모조리 체포하는 등의 강력한 대응 끝에 향신들은 모두 꿀 먹은 벙어리로 바뀌었고, 지정은제를 확립했다. 즉 현대 중국에서도 하기 어려운 일을 밀어붙여서 해낸 것이다. 심지어 이때 중국은 영토도 넓은 주제에 교통도 통신도 극악이라 각 행정 구역 경계에 숨어사는 사람을 못 잡아내던 때였고, 향신들의 힘이 지방관보다 강한 것도 당연한 데다, 이미 그놈의 '꽌시' 문화로 지방관과 향신이 결탁하기 쉬운 시대였다.[65] 이를 극복해 낸 것은 그야말로 조세 행정에 있어 몹시 철두철미했다고 볼 수 있다.

2.3.4. 부정부패 근절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20px-The_Yongzheng_Emperor_Offering_Sacrifices_at_the_Altar_of_the_God_of_Agriculture.jpg
중국 전설상의 고대 신 중 하나인 신농에게 제사를 올리는 옹정제의 모습
옹정제는 관리들의 부정부패 문제를 가장 많이 손봤다. 명·청 시대에는 모선(耗羨)이라는 공공연한 관행이 있었는데, 본래 지정한 세금보다 쌀이나 은을 조금 더 걷는 것이었다. 이 관행은 기본적으로 행정 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부가세의 필요성과 관리들의 봉급이 너무 적다는 문제 때문에 발생한 것이었다. 청나라 시대, 북경의 문무 관리들의 1년 봉은은 다음과 같았다.[66]
품계 봉급품계 봉급품계 봉급품계 봉급품계 봉급
1품180냥2품150냥3품130냥4품105냥5품80냥
6품60냥7품45냥8품40냥정9품33냥 1전종9품31냥 5전

관료에게는 봉은 외에 봉미도 지급했다. 봉은 1냥 당 봉미 10말을 추가했는데, 외직에 나간 문관들은 봉미가 없었고, 무관의 봉은은 북경에 있는 무관의 절반이었다. 이 계산으로 보면, 지방 최고의 수장인 총독은 연봉이 180냥, 포정사는 150냥, 안찰사와 염운사는 130냥, 도원과 지부는 105냥, 동지와 지주 80냥, 통판과 주동 60냥, 현령과 학부교수 45냥, 현승·교유·훈도 각기 40냥, 주부 33냥 1전, 전사와 순검 31냥 5전이었다. 재부는 12냥, 포병 8냥, 문자·마부·고사·옥졸은 연봉이 6냥이었다.[67] 청나라 시대의 소설인 홍루몽을 보면, 제법 무난하고 사는 농민이 1년에 20냥 정도를 버니 말단 관리들은 봉급만으로 생활하자면 사실상 빈민이었다. 더구나 상사의 접대, 지인과 자신을 추천해준 은인에게 주는 선물, 부족한 행정 비용 문제까지 겹친다면?

이런 상황에서 세금을 규정액보다 조금 더 걷는 "모선"은 관리들 입장에서는 생계와 임무 수행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었다.[68] 강희제도 이런 문제에 대해서 "1냥을 걷을 때 1할만 걷는다면 청렴한 관리"라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모선은 정규 세금이 아닌 부가세이고 필요할 때마다 걷는 것이다보니 내는 사람은 내고 안 내는 사람은 안 내는지라, 지방의 막강한 향신과 지주들이 갖은 수를 써서 내지 않으려 하여 다른 농민들에게 세금이 전가되는 폐단이 심했다.

옹정제는 현실적인 사람이었기에 부정부패를 막으면서도 이런 관행을 완전히 근절시키려고는 하지 않았다. 대신에 모선귀공(耗羨歸公)제를 실시해서 모선을 정규 세금화하여 모선의 징수 과정과 징수량을 국가에서 파악해 부정부패가 일어날 소지를 줄였다. 그리고 관료들의 모선 징수를 합법화하는 대신, 그 수치를 정해 놓고 그 범위 안에서만 징수하게 했다. 또한 관료들에게 양렴은을 지급해서 관료들에 대한 대우를 개선하면서 부정부패를 저지르는 관리들은 가혹하게 처벌했다. 양렴은은 말 그대로 '청렴을 기르는 은'이라는 의미인데, 명청대의 관료 봉급이 중국 역사상 역대급으로 낮았고, 관료가 현실적으로 부정부패를 저지르지 않고서는 생계는커녕 자비로 지출하는 경비조차 충당하기 힘든 구조를 감안하여 원래 녹봉의 최대 300배에 달하는 양렴은을 관료에게 지급하여 관료들에게 경제적인 안정을 제공하는 대신 부정부패에 대해서 엄단하는 정책을 취했다. 관료의 봉급이 지나치게 낮은 것 자체가 부정부패의 한 유인이라는 현실적인 문제를 인식했던 것이다.[69][70]

만약 모선귀공 제도를 했는데도 또 다른 부패가 있다면 오히려 새로운 제도는 부담만 늘어날 뿐이다. 그래서 옹정제는 각 성의 지세 보유량을 확실하게 파악하면서, 측근들을 모아 적자 상황을 관리시켰다. 적자가 나면 책임자가 사재로 채워야 했다. 그리고 조사해서 세금을 착복한 사람이 나오면 옹정제는 만주족이든 몽골의 귀족이든 한족 신사층이든 예외없이 모조리 처벌했고, 이들은 추징금을 납부하기 위해 사재를 털어 메워야 했다. 심지어 옹정제의 형제들까지 착복한 세금을 메우기 위해 가재 도구와 집까지 팔아 황제에게 돈을 바쳤다.[71]

중앙과 마찬가지로 지방에서도 이러한 조사는 철저했다. 옹정제는 심지어 몰수왕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각 부와 주현에서 세금을 횡령한 관리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모조리 국고에 집어넣고, 은닉한 재산까지 찾아내서 몰수해 경매에 붙여서 팔았다. 지주의 착취로 부당하게 천민이 된 사람은 확실히 조사해서 다시 원래 신분을 회복시키고, 못된 지주는 강력히 처벌했는데 심지어 사형까지 시켰다.

이전까지의 관행으로는, 횡령죄가 드러나도 횡령금을 채워놓으면 관직을 유지했다. 하지만 옹정제는 이러한 제도의 허점(횡령한 금액을 채워놓기 위해 관리들이 백성들의 주머니를 털어서 돈을 마련함)을 깨달았다. 옹정제는 즉위하자마자 횡령 사실이 드러나면 곧바로 관리들을 파직시켰고, 옹정제 3년에 호남성에서 조사를 시작하자 무려 호남성의 관원들 중 절반 이상이 부패혐의로 쫓겨났다. 허베이 성에서도 3년 이상인 고참 관리들 대부분이 파직으로 밀려났다.

관리가 백성들의 돈을 뺏어먹으면, 그 혜택은 관리만이 아니라 가족과 친구, 친척들까지 돌아간다. 그래서 옹정제는 횡령 사실이 드러나면 가족과 친구는 물론 이런 친척들까지 다 털어 재산을 뺏어갔다. 그러자 탐관오리들은 자기 가족, 친척, 친구들까지 연루시키지 않기 위해 꼼짝도 못했다.

또한 다른 사람이 대신 횡령금을 배상하는 제도도 없앴다. 그리고 죄를 추궁받아 자살한 사람마저도 철저하게 털어서 가족에게 책임을 물었기에, 탐관오리는 자살해도 그 죄를 벗어날 수 없었다. 특히 조금이라도 흠을 보이는 관리는 곧바로 파면하고, 후임자를 바로 임명했기에 많은 관리들은 얼마든지 자신을 대신할 존재가 있다는 생각에 두려움에 떨어야만 했다.

비리가 너무나도 심한 관리나 지주의 경우엔 배상이고 뭐고 할 것 없이 처형했다. 적자로 적자를 메우는 편법을 쓴 사람도 마찬가지였다.[72] 이러한 정책들은 끝내 성과를 내어, 옹정 10년차에는 원래 적자에 시달리던 하남성[73]이 70만 냥의 은을 보유하며 완연한 흑자로 돌아섰다. 뒷날의 역사학자 장학성(章學誠)은 이렇게 말했다.
옹정제가 관료 사회를 개혁하여 기강을 바로잡은 일은, 실로 천 년에 한 번 있을 만한 쾌거로다!
그러나 옹정제의 개혁에도 한계가 있었다. 모선귀공제와 양렴은은 물가 상승을 반영하지 않았기에 나중에 가면 점점 그 가치가 떨어졌고, 옹정제 사후의 청 조정이 물가 상승, 행정 비용 상승, 영토 확장, 인구 증가 등의 사회 변화에 맞춰 제도를 개정하지 않았기 때문에[74] 시간이 흐른 뒤에는 제도 자체가 거의 유명무실한 것이 되어버렸다. 결국 관료들은 다시 부가세인 누규를 추가로 징수해야 했고, 관료 사회의 기강은 다시 무너지고 부정부패가 퍼져나갔다.[75]

2.3.5. 농업 장려

옹정제는 매년 경작에 들어가기에 앞서 직접 농사를 지었는데, 보여주기 식이지만 일전의 제왕들은 한두 번 하다 마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옹정제는 이를 정례화해서 계속했는데, 옹정제 밖에 그런 인물로는 1900여 년 전의 검소한 황제 한문제 정도가 대표적. 옹정제는 자신뿐만 아니라 관리들에게도 강요했고, 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벌했다.

농업을 발전시키려는 옹정제의 생각은 파격적인 선택으로 이어졌다. 그 전부터 중국의 왕조에서 농업을 중시했으나, 이는 생산량과 수탈하는 문제의 이야기지 농민의 사회적 지위나 이익하고는 무관했다. 그런데 옹정제는 농민에게 벼슬을 내려주는 새로운 제도를 만들었다.

당시 지방에서는 세금을 징수하는 관리는 있어도, 생산을 지도하는 관리는 없었다. 옹정제는 경험 많고 모범적인 농민들을 8품의 벼슬에 임명하고, 농민들의 농사에 도움을 주게 했다. 물론 이런 제도도 금세 폐단이 나타나 가짜 농부들이 이 벼슬을 받고 행세하는 일도 있었지만, 옹정제는 이런 사람들을 탄압함과 동시에 자수를 하면 용서해주겠다고 말하여 이런 가짜 농부들을 없앴다.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잘 활용한 셈.

2.3.6. 개토귀류(改土歸流)

옹정제는 자신이 신임하던 삼총독 중 유일한 만주인인 시린기오로 오르타이를 운귀광총독에 기용하여 묘족의 반란을 제압[76]하고 서남지역 지방 행정제도 전반에 걸쳐 일대 개혁을 단행했는데, 그것이 바로 개토귀류 정책이다. 당시 서남지역에서는 토사제(土司制)가 실시되었는데 이 제도는 토착 소수민족들의 우두머리로서 대를 이어 세습되는 토사들이 지방 세력을 키우고 군벌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할거하는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예로부터 남명 잔당이 할거하고, 남명을 일소한 삼번왕에 의해 발발한 삼번의 난에서도 주요 전역이었을만큼 중원에 비해 청나라의 통제력이 미약했음에도 청나라에게 있어 서남지역이 갖는 가치는 막대했다.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풍부한 구리 광맥이었다. 청나라 중앙정부가 아무리 지정은제를 실시해도 은 어디까지나 세금 납부의 편의성을 위한 고액권이었을 뿐, 일상에서 통용되는 화폐는 구리로 만든 동전이었기에 화폐주조권의 지속을 위해서라도 청은 이 지역을 완전히 통제해야만 했다.[77] 동전의 유통량을 적절하게 조절하지 못하면 은 : 동전의 교환비가 불안정하여 국민들의 납세 부담이 커지거나 국가 재정이 불안정해지기 때문에 전 국토에 대한 통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실질적인 화폐인 동전의 주조에 필요한 구리가 많이 산출되는 서남 지역을 장악할 필요가 있었던 것.

게다가, 경제적인 문제와 맞물리는 정치-행정적인 문제도 있었다. 사실, 청나라의 통치 체제는 하나의 중앙정부가 여러 세력들을 각각의 방식에 맞춰 통치하는 시스템이었는데, 청나라의 황제는 만주와 몽골의 지배자이자 한족의 천자이며 티베트 불교와의 최왼 관계를 통한 티베트의 보호자, 서남지역 토사들의 우두머리를 겸하는, 동군연합과 유사한 다중 지배 통치 체제의 최정점에 있었다. 청나라가 괜히 키메라의 제국이라 불린 게 아닌 것.

각 직책들은 하나같이 모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1. 만주와 몽골의 지배자 자리는 청나라 황실의 강력한 지지기반, 특히 무력기반인 팔기군을 제공했는데, 이는 만주와 몽골의 귀족들이 많이 믿는 티베트 불교의 보호자라는 타이틀을 통해 정통성을 확보했고,
  2. 한족의 천자 자리는 청나라의 재정적 기반을 제공받는 기반인데, 여기서 징수하는 세금을 통해 만주와 몽골의 빈약한 경제력을 보완하여 귀족들을 실질적으로 통제함과 동시에 그들이 제공하는 무력으로 한족을 통제했으며,
  3. 티베트의 보호자 자리는 제정일치 체제인 티베트의 상징적 통치자인 달라이 라마와 최왼 관계를 맺어 한족에게서 비롯되는 경제력과 만주와 몽골에서 제공되는 무력으로 티베트의 보호자 역할을 하는 대가로 티베트의 실질적인 통치권, 그리고 티베트 불교를 믿는 만주-몽골의 귀족들에 대한 통치 정당성을 종교적으로 부여받았고[78],
  4. 서남지역 토사들의 우두머리 자리는 한족의 경제력과 만주와 몽골의 무력으로 통제하여 반란 세력을 통제함과 동시에 일정한 자치권을 부여하여 경제의 혈액과 같은 화폐, 그것도 실질적으로 많이 쓰이는 동전의 주조에 필요한 구리를 안정적으로 수급하는 등,
이처럼 청나라는 매우 정교하면서 유기적이고 다원적으로 작동되는 통치 체제로 운영되고 있었다.[79] 무력과 경제력을 확실하게 장악해야 이러한 통치 체제를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핵심인 화폐 주조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라도 서남지역에 대한 장악력을 높일 필요가 있었던 것.

따라서, 옹정제는 중앙집권제를 강화하고 서남지역의 토착 소수민족 세력을 견제하고, 나아가 이들을 중국화시키기 위해 중앙정부에서 파견한 관리인 유관으로 하여금 지방을 다스리게 하고 조정이 파견한 군대로 지방군을 대체하게 했으며 토지를 통일적으로 측량하고 세수표준을 통일시켰으며 세습적인 토사제를 폐지하고 부역제도를 개혁하는 등 일련의 조치를 취했으니, 이것이 큰 틀에서 "토사제를 폐지하고 유관제를 도입"한 개토귀류(改土歸流) 개혁의 골자였다. 이처럼 개토귀류 정책은 지방 할거 세력을 견제하고 변방을 공고히 했으며 서남 지역 소수민족의 점진적이지만 지속적인 한화, 그리고 경제적, 문화적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2.4. 실책

2.4.1. 제방 건설과 황무지 개간

강희 말년엔 강희제의 건강 악화와 노쇠함으로 인해 국정이 해이해지고 그 결과 여러 폐단이 발생했으며 국고가 부족했다. 옹정제는 이를 일신하기 위해 국고 지출을 최소한으로 줄였다.

옹정 원년(1723) 9월 17일, 염친왕 윤사 등의 총리왕사무대신들이 절민총독을 대신하여 제방을 쌓아야 한다고 주청했다. 그러나 옹정제는 강희 말년에 저장성 제방을 다년간 공사한 일을 거론하며 돈낭비라고 질책했다. 이렇다보니 제방 공사가 필요한 다른 지역의 총독들도 침묵했다.

옹정 2년 7월, 해일로 인해 강소성, 절강성 등의 제방이 범람하고 5만 명에 달하는 인명이 사망했으며 대부분의 민전이 침수되었다. 옹정제는 지방관리들과 백성들이 귀신을 존중하지 않아 천벌을 받았다고 말했다. 비록 이런 망언을 했지만 옹정제는 피해를 입은 지역에 다시 제방을 쌓고 세를 면제해주었다. 그리고 이후로는 태도가 바뀌어 제방 공사를 위한 예산을 충당하고 공사에 심혈을 기울였다.

옹정제는 장수성, 저장성 등 남부지역의 하천, 호수, 해변과 같이 척박한 땅을 개견하는 데 중점을 두었고, 북서 지역 등에도 황무지를 개간하고자 했다.

그러나 옹정제의 개간 정책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인구증가가 경작지 증가 속도를 초과하여 1인당 경작지 면적은 감소했다. 수자원이 풍부한 영화 등의 지역에서는 이러한 개척 사업이 성공을 거두었지만 수자원이 부족한 지역에선 손해가 막심했다. 이는 옹정제가 수자원이 부족한 지역에서도 벼농사에 집착했기 때문이었다. 북방 지역은 물이 적고 기후가 건조하며 토지의 물 소비량이 많기 때문에 벼를 심기 위해서는 하천과 호수를 관리하고 수로를 건설해야 했다. 옹정제는 이 정책을 추진하며 막대한 예산을 투입했고[80] 일부 지역에서는 하천 범람이 개선되면서 농업 생산의 피해가 줄었으나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실패했다. 수백만냥의 돈을 투입해도 물이 부족한 지역에서 저수지를 조성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옹정 9년 가뭄 이후 논농사는 불가능해졌고 개간지는 이미 밭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건륭제가 즉위한 후 논 개간 정책의 실패를 인정하고 뒷수습했으며 수자원 관리 조건이 좋은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개간지는 대부분 밭으로 바뀌었다.
순황제께서 즉위하시며 헌황제의 엄숙함을 물려받으셨으나 관대한 정치를 행하셨다. 개간을 중단하고 매관매직을 금지하며 농업과 양잠을 장려하고 승려와 도사를 추방하라는 조서를 내리시자 만민이 기뻐하며 칭송이 우레와 같았다.
<소정잡록>

2.4.2. 외치 및 군사

외치에서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727년 러시아캬흐타 조약을 맺으며 바이칼 호수 근방의 영토를 제정 러시아에게 할양했다. 청나라에게 손해인 조약이라 할 수 있으나 준가르에 집중해야 했던 당시 상황상 어쩔 수 없었다는 평도 있다.

그러나 옹정제는 연갱요가 서북면 전선에서 활약하던 즉위 초를 제외하면 준가르에게 타격을 주지 못했다.

옹정제는 연갱요 숙청 후 푸얼단에게 서북면 전선의 권한을 위임했는데 그 결과는 청나라 최대의 패배 중 하나라고 불리는 호톤노르 전투였다. 청군은 호톤노르 전투에서 병력의 약 80%를 잃었고 귀환한 병력은 이천 명에 불과했다. 다만 할하 몽골의 체렝이 준가르를 패퇴시키면서 옹정제는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고, 옹정제의 군사적 실패는 일시적인 현상으로 그쳤다.

2.5. 사망

옹정제는 즉위 초기까지 매우 건강해서 신하들에게 자랑하기도 하였으나 숙청 작업이 끝난 직후 건강이 나빠졌다. 이때 도교에 관심을 보이며 오르타이가 추천한 도사에게 받은 단약을 섭취했는데 중금속 중독으로 건강이 악화되었으나 자신은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오히려 몸이 회복되었다고 느꼈다.[81] 그리고 심각한 일 중독자다 보니 몸이 남아날 리가 없었고 말년엔 과로로 몸과 마음이 다 망가져 요양을 해야할 지경까지 되었다. 문제는 그 와중에도 손에서 일을 놓지 않아 이게 수명을 더욱 갉아먹고 만다. 1735년 8월 20일(음력)부터 상태가 나빠졌지만 21일에도 건천궁에서 평상시처럼 정사를 봤다고 한다. 그러나 22일에 가면 건강이 나빠져 결국 쓰러졌고 보친왕 등이 간호하였으나 위독해졌다. 결국 23일에 옹정제는 원명원에서 사망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58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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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서릉의 태릉(泰陵) 전경
황제의 유해는 허베이 성 바오딩시 이현에 조성된 청나라 황실의 능구(陵區)인 청서릉(淸西陵)의 첫 번째 황릉인 태릉에 안장되었다.

3. 가정 관계

3.1. 아내

  • 효경헌황후 오랍나랍씨(孝敬憲皇后 烏拉那拉氏)
    1679년 출생 ~ 1731년 사망
    옹정제와 생사를 건 황위쟁탈전을 같이 한 조강지처로, 13살 때 패륵이었던 옹정제의 적복진으로 간택되었다. 옹정제 즉위 후 황후로 책봉되었으며 옹정 9년에 붕어한 후 효경황후로 추봉되었다.
    • 황장자 단친왕 홍휘(弘暉) 1697년 ~ 1704년
      효경헌황후의 유일한 아이로 옹정제의 유일한 적자. 1704년에 홍역으로 인하여 향년 7세로 요절하였다. 사후 31년이 지난 1735년에 이복동생인 건륭제가 등극 후 단친왕(端親王)으로 추봉해 주었다.
  • 효성헌황후 뉴호록씨(孝聖憲皇后 鈕祜禄氏)
    1692년 출생 ~ 1777년 사망
    개국오대신 액역도의 사촌인 액역등의 증손녀로 1704년에 수녀 간택에서 옹친왕부의 격격으로 출가하였다. 그러나 시아버지인 강희제가 말년에 친아들 홍력을 귀여워하고 자주 챙겨주며, 그의 친모인 자신에게도 직접 아들을 잘 둬서 좋겠다고 칭찬한 이후로 입지가 상승곡선을 탔다. 또한 옹정제 연간 초부터 일어난 연갱요의 숙청, 그로 인한 연귀비의 병사 등의 치열한 궁중 암투 속에서도 꿋꿋이 존버에 성공했다. 결국 친아들 건륭제가 등극한 후 성모황태후에 올랐다. 건륭제는 생모에게 둘도 없는 효자였기에 아들의 황제 등극 이후에는 큰 호강을 누리며 살았다. 청의 전성기에 태어나 최전성기의 황태후로 살다가 나라가 기울어지기 전에 죽은 청조 역사상 가장 복받은 여성.

3.2.

  • 돈숙황귀비 연씨(敦肅皇貴妃 年氏)
    생년 미상 ~ 1725년 사망
    옹정제가 가장 사랑한 후궁. 또한 위에서 언급된 연갱요의 여동생이기도 하다. 원래는 포의 출신이었지만 조부인 연중륭이 과거에 합격하면서 양백기 한군에 편입되었고, 아버지 연하령이 자수성가해서 종2품 순무의 자리까지 올라가 옹정제의 측복진으로 출가하였다. 옹정제의 등극 이후 귀비로 책봉되었고 아이도 4명이나 낳았으나, 원래부터 몸이 허약하여 옹정 3년에 사망한 뒤 돈숙황귀비로 추봉되었다. 청초기 정실로 인정받던 동서궁황비의 예우를 받았으며 요절한 아이들까지 옹정제가 황실 종보에 등록했다. 옹정제가 복혜를 아낀 이유가 복혜가 적자이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다.
    • 황4녀 1715년 ~ 1717년
    • 7남 복의 1720년 ~ 1721년
    • 8남 화석회친왕 복혜 1721년 ~ 1728년
    • 9남 복패 1723년 ~ 1723년
  • 순의황귀비 경씨(純慤皇貴妃 耿氏)
    1689년 출생 ~ 1784년 사망
    황제의 사랑 따윈 됐고 미래의 황태후에게 잘 보이면 된다는 걸 보여준 후궁. 상삼기 포의 출신의 후궁이었으나 잠저 시절 때부터 희귀비 뉴호록 씨(훗날의 숭경황태후)와 자매처럼 지냈고, 그 공으로 건륭제 등극 이후 바로 귀태비로 승진하면서 평화로운 말년을 보냈다. 숭경황태후의 사후에는 황귀태비로까지 승급되어, 사망 당시 최종시호는 순의황귀비. 95세의 나이로 엄청나게 장수한 후궁이기도 하다. 다만 생존을 위해 아들의 야망까지 억누르느라 아들 홍주는 형 홍시의 죽음 이후, 제대로 비뚤어졌는지 조선의 양녕대군 수준의 개망나니로 살았다. 자기 장례식을 치른다거나 군기대신을 후드려 패는 등, 황자 신분으로 온갖 기행을 다 저지르고 다녔다. 그래도 건륭제와는 어릴 때부터 연년생 형제로 친하게 지냈기 때문에, 건륭제가 최대한 실드쳐주면서 사고를 치면서도 그럭저럭 무탈히 삶을 마쳤다.
  • 제비 이씨(齊妃 李氏)
    1676년 출생 ~ 1737년 사망
    시첩 출신의 후궁으로 옹정이 청년기에 가장 사랑한 후궁이었다. 처음에는 시첩의 신분이었다가 아이 넷을 낳고 나서야 측복진으로 진봉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러나 연귀비가 시집오면서 총애는 밀렸고 홍시 문제까지 겹쳐서 냉대 받게 된다. 원래는 포의 출신이었으나, 장자 홍시의 체면 때문인지 제비에 대한 정이 남은건지 포의에서 좌익기(양황기, 정백기, 양백기, 정람기)로 올려주기는 했다. 홍시는 위의 형들이 모두 어릴 때 죽어 실질적으로 장자였지만, 강희 연간이든 옹정 연간이든 장자 대우를 전혀 받지 못했다. 황8자당이 숙청된 옹정 4년, 홍시는 윤사를 옹호하다 옹정제의 분노를 직격으로 맞아 이미 황실 족보에서 제명된 윤사의 양자로 입적되어 황족의 지위를 잃고 황12자 윤도에게 보내진다. 이후 건륭제는 제위에 오른 후에 형을 다시 족보에 올려주기는 했다.
  • 겸비 유씨(謙妃 劉氏)
    1714년 출생 ~ 1767년 사망
    말년의 옹정제에게 가장 사랑받은 후궁. 1729년 궁녀를 뽑는 수녀 간택에 참여했다가 옹정의 눈에 들어서 한번에 답응이 되었고, 몇 달뒤인 1730년 1월에 상재로, 또 두 달 뒤인 3월에 귀인이 되는 초고속 승진을 했다. 3년 뒤 아들 홍염을 낳고 겸빈이 됐다가 건륭제가 즉위하면서 태비가 되어서 최종 품계는 겸비. 홍염은 강희제의 황17자이자 옹정제의 심복인 아우 과친왕이 아들을 낳지 못했기에 과친왕의 양자로 출계하여 과군왕작을 이어받았다. 홍염도 홍주처럼 이런저런 사고를 치고 다녔는데, 황자 신분으로 도적질을 했다. 물론 홍주에게 그랬던 것처럼 건륭제는 홍염에게도 관용을 베풀었다.
    • 황6자 다라과공군왕 홍염(果恭郡王 弘曕) 1733년 ~ 1765년

4. 평가

옹정제에 비해 상대적으로 외적인 측면에서 국력을 과시한 아버지 강희제나 아들 건륭제보다는 내치에 힘써 뭔가 겉으로 보여줄만한 건덕지가 적었고, 아우가 오를 제위를 빼앗아 자신이 대신 올랐다는 소문, 숙청, 문자의 옥, 즉위 초의 재난 때문에 민간에서는 폭군이라는 인상이 강해 평가가 그리 좋지 않았다. 동시대 조선에서도 옹정을 가혹하고 각박한 군주라고 평했다.

그러나 미야자키 이치사다를 필두로 한 일본 학계 등지에서 옹정제 재평가가 이뤄지며, 1980년대부터 옹정제가 외정(外征)을 철저히 삼가고 내치에 힘써 강희제의 60년 치세 뒤 동요할 가능성이 있는 청나라를 안정시키고 국력을 다져놓은 군주였다는 평을 받고 있으며, 이는 그의 아들 건륭제가 말년의 사치 등으로 평가절하되는 현상과 대비된다. 사실 강희제와 더불어 당대 유럽 일각에서 '청나라야말로 이 세상의 유토피아'라는 평가를 내리게 한 군주이기도 한걸 보면, 당대에도 평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던 모양이다. 요컨대 강희제에 의해 전성기에 진입한 청 제국이 옹정제의 치세를 거치며 더욱 탄탄한 반석 위에 올라서고, 건륭제 때 그 영화를 누렸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애당초 옹정제가 진짜 폭군에 불과했다면 그가 청 세종이라는 묘호를 받을 리도, 강건성세에 자가 들어가 건성세가 될 일도 없었을 것이다. 다만, 이처럼 옹정제가 성군인 것은 부정할 수는 없으나, 나중에는 옹정제 본인도 그런 자신을 보필하는 신하들의 피로도를 걷잡을 수 없이 치솟게 한 것은 옥의 티라고 할 수 있다. 즉 옹정제의 "시스템"은 지속 가능성이 낮았다는 것이 한계다.

실제로 일본의 동양사학자 중 한명인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옹정제를 세심하게 조명한 평전 <옹정제>에서 옹정제의 재위기간이었던 13년이 본인과 관료들이 버틸 수 있는 최대 한계라 봤는데, 충분히 일리가 있다. 오늘날 회사로 비유하면 야근 강요는 기본에 불법 사찰, 사내 정치질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관료들 피를 말리다시피 하며 그들의 역량을 쥐어짜낸 악덕 고용주였던지라 그 이상 했다가는 서로 뒷감당이 어렵다는, 즉 혹사당한 신하들이 황제를 몰아내려는 반정 내지 역성혁명을 모의하고는 더욱더 나아가면 내전까지 일어났을지도 모른다는 말. 따라서 옹정제의 재위 기간은 아버지 강희제나 아들 건륭제 재위 기간의 5분의 1에 불과한 결과로 나타났다. 그래도 미야자키는 옹정제를 '엄청난 권력을 휘두른 독재자라기보다 구도하는 수도자처럼 경건하고 치열한 자세로 정치에 임하며, 전제 군주제가 만들어낼 수 있는 극한의 선을 실천한 군주'라 호평했다. 한국판 위키백과도 참고.

한국의 도덕 교과서에 옹정제의 모토가 실리기도 했는데, 바로 "이 한 몸을 위해서 천하를 희생시키지는 않으리라(不以天下奉一人)."[83] 물론 그 대신 천하를 위한답시고 자신과 신하들을 나랏일에 갈아넣었다. 갈려나갔던 신하들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겠지만…. 하지만 옹정제가 전혀 사치를 하지 않았다는 건 과장이다. 원명원 개축은 엄연히 옹정제 자신을 위해 한 일이었다. 또한 조선기록에서 옹정제가 황9자 윤당 등을 질책하며 자신도 잠저시절 이기심을 버리지 못해서 관리들에게 뇌물을 받거나 협박으로 돈을 갈취한 적이 있다고 한 말이 나오는데[84], 실제로 건륭제가 자신의 동생 화친왕 홍주에게 옹정제의 잠저시절 자산을 모조리 주자 홍주는 황족들 사이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되었다.

한편으로 미야자키는 옹정제를 소심하고 내성적인 인물이라 분석하기도 했다. 옹정제한테 잘못 찍혀 목이 잘린 신하 귀신들이 들으면 없는 뒷목을 붙들고 쓰러질 말이겠지만, 단순히 옹정제의 천성이 나약하다는 말이 아니라 내성적이지만 자신이 원하는 건 사소한 거라도 이루고야 마는 강한 의지가 숨어있는 성격이라 본 것. 가령 옹정제는 순진무구한 촌뜨기 선비인 증정에 대해 듣고는 천자로서 반역도랍시고 그냥 목을 쳐버릴 수도 있었다. 실제로 아들인 건륭제는 비슷한 반청 사상가를 문답무용으로 다짜고짜 목을 날려버렸다. 허나 옹정제는 사상 개조해 보겠답시고 신하들의 만류를 뿌리치면서 직접 하나하나 반박하며 종국엔 증정의 승복을 받고 반성문까지 받아 귀향시킨걸 보면 확실히 독한 성격이었던 듯.

현재 역사학계에서는 옹정제에 대한 다각적인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옹정제 개인의 권력욕과 근면함이 청조를 부강하게 했다는 점에서는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으나, 강력한 황권과 개토귀류의 복잡한 사정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관점으로 갈리고, 중국 북서부 황무지 개간 사업에 대해서는 당대에나 현대에나 실패로 평가받고 있다.[85] 옹정제의 강력한 황권과 중앙집권화는 개혁의 원동력이 되었으나 법치를 무너뜨리고 관리들의 자주성을 훼손하는 독재정치의 전형적인 부작용을 가져왔다. 옹정제가 대표적인 사례가 즉위 초의 강남 지방의 제방 건설 문제로, 옹정제가 '돈낭비'라고 일축하자 인근의 다른 지역의 지방 관리들도 제방 건설에 대한 주청을 감히 하지 못했다. 그 결과 기록적인 수해로 수만 명이 사망했다. 또한 옹정제는 자신의 총신인 전문경과 이위가 부정부패를 저지른 것을 알면서도 면책하거나 자주 절차를 무시하고 관리를 직접 처벌하면서 법치의 일관성을 훼손시켰다.[86] 이렇게 황권이 법치를 무시할 정도로 강력하다 보니 이부의 업무가 경시되는 부작용을 낳았다.

5. 기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32px-Album_of_the_Yongzheng_Emperor_in_Costumes_8.jpg
희대의 악덕 고용주였다는 사실과 별로 안 어울리지만 이런 그림도 있다. 참고로 위의 그림은 서양 가발을 쓴 모습이다. 실제로 옹정제는 코스프레를 한 자신의 모습을 여러장의 그림으로 남길만큼 코스프레를 즐겨했다고 한다.#1#2 심지어 혼자만 하기 심심했던지 당시 보친왕이었던 자신의 아들 건륭제까지 불러다가 동반 출연을 한 모습으로 그림을 남기기도 했다.[87] 옹정제의 이런 코스프레에는 정치적인 계산도 같이 들어가 있었는데, 바로 자신이 서양을 비롯한 여러 이민족의 군주임을 선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위에 소개된 코스프레 그림들을 보면 아무리 중국 천자라도 남자의 주적은 피할 수 없었던 듯 보인다. 훈남이었던 옹친왕 시절 머리가 조금 자란 상태의 초상화#를 보면 중년에 황제에 오르고 격무에 시달리며 스트레스성 탈모가 심해진 것으로 보인다.[88]

청나라의 야사가 담긴 '청대야사필기대관'이라는 책에 따르면, 옹정제의 한족 신하들이 스스로를 '노재'(奴才)[89]라고 하는 걸 듣자 엄히 질책하면서 다시는 그런 말 실수를 하지 말라고 한 적이 있다. 이 일은 심지어 정사에서도 나온 기록이다. 옹정제가 왜 한족 신하들이 스스로 노재라고 칭하는 것을 금지시켰냐면 처음부터 그럴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다. 노재는 만주어로 노비라는 뜻의 아하(aha)다.[90] 즉 만주족 신하들은 대대로 청 황제의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표현을 써도 되지만, 한족 신하들은 피고용인이지 진정한 황제의 사람은 아니기에 노재라고 칭할 자격은 없다고 여겨 그리 일침한 것으로 보인다. 옹정제를 비롯한 청나라의 황제들은 모두 한인을 피지배층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옹정 5년 9월 형주장군 오납합이 쌀값 인상에 대해 상소문을 올리자 옹정제가 "쌀값이 조금 오르고 재해를 입는 것은 흔한 일이다. 비천한 한민처럼 놀라서 대중을 혼란에 빠지게 해서는 안된다."라고 답한 주필 대답에서 그 인식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다만 옹정제는 만한을 가리지 않고 관료들을 골고루 불신했으며[91] 기인들에게도 노재라고 칭하지 말고 신이라고 하라고 권했다. 그러나 기인들은 노재가 더 편하다며 계속 노재를 썼다.

선불교에 관심이 많았고 몸소 수행했으며, 스스로에게 원명거사(圓明居士)라는 호를 붙이기도 했다. 여러 화두를 타파할 정도로 상당히 높은 경지였다고 하나, 말년에는 도교연단술에 심취해서 단약을 과다복용한 부작용, 즉 수은 중독으로 사망했다고도 한다.[92] 실제 사인은 비소에 의한 독살이었음을 검시를 통해 밝혀낸 광서제의 예처럼 청서릉을 발굴해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지만, 솔직히 옹정제의 생활 습관으로는 단약이 아니었어도 딱히 오래 살았을 것 같지는 않다는 게 아이러니한 일이다.[93] 오히려 현대에 비해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의 상황을 감안하면 옹정제 정도만 해도 일찍 죽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옹정제의 치세(1722년 ~ 1735년) 기간은 조선 왕조의 경종(1720년 ~ 1724년)의 재위 기간과 영조(1724년 ~ 1776년)의 재위 초반 10년과 일치한다. 같은 시기 일본 에도 막부(1603년 ~ 1867년 / 1868년)의 쇼군은 8대 도쿠가와 요시무네(1716년 ~ 1745년)다.

그의 평가는 오늘날 세계사 교과서에서도 굉장히 좋다. 중학교 2학년 역사 교과서(미래엔)에서도 옹정제가 일 중독자로서 보낸 삶과 증정과 벌였던 쪼잔한 키배 등을 디테일하게 묘사한 것은 아니지만 황제권을 강화하고 새로운 화이사상을 제시하였다고 서술된다.

괴팍하고 기이한 행동을 자주 보이는 황제였다. 신하들이 강희제의 묘호를 올릴 때 옹정제는 성조(聖祖)라는 묘호를 보고 몹시 마음에 들어하며 손가락에 피를 내어 성조라는 글자에 동그라미를 치는 기행을 저질렀다. 신하들과 형제들을 감시하는 밀정의 보고문에도 주필을 다는 등 통제욕과 편집증이 심한 편이었다.

중국 역사에서 제갈량과 쌍벽을 이룰 법한 지독한 일 중독자였고 청 세종 옹정제 역시 조선 세종처럼 신하들도 자기처럼 일하길 원해서 이를 강요하다시피한 악덕 고용주였다.[94] 옹정제는 13년 통치 중 선제인 강희제를 본받아 정무에 주력했는데 이게 도가 넘어서 잠도 고작 4시간밖에 안 자는 정도로까지 심해졌다. 보통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정무를 보기 시작하여 늦은 밤까지 대신들조차 질릴 만큼 철저하게 집무에 임했다. 특히 제위에 오른 이후 죽을 때까지 한 번도 순행을 가지 않았고 그저 수도인 북경에서 일만 계속 했다. 아직 어린 아이였던 8세에 즉위해 16세에 친정을 시작한 아버지 강희제나 팔팔한 청년이었던 25세에 즉위한 아들 건륭제와 달리 인생의 장년기인 44세에 즉위해서 황제의 업무를 집행한 시점이 다른 황제들에 비해 늦었음에도 재위 13년 만에 57세로 사망한 것은 과도할 만큼 세심하게 정무를 집행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의견이 많다.

옹정제는 철저하게 지방관을 관리 감독하고 이중삼중으로 감시망을 펼쳐서, 늘 모반 가능성을 염두에 둬 세밀하게 관리들을 통제했으며 전국의 수많은 관리들이 보내는 보고서를 빠짐없이 읽고 모두 황제 전용의 붉은 먹으로 주석을 덧붙여 써서 돌려보내는 방식으로 업무를 보았다. 이를 주접(朱摺)이라 하며, 이후 청 황제 업무의 표준이 되었고 지금까지 남아있는 주접이 많아 청 연구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사실 이것은 선제인 강희제가 도입한 제도였는데 옹정제는 아버지가 만든 이 제도를 매우 적극적으로 써먹었다. 그야말로 신하들을 한계치까지 인정사정없이 쥐어 짜낸 공포의 황제. 오죽했으면 청나라의 어떤 문인이 '옹정제 때 관리들 평가를 보면 부지런하고 유능했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이건 칭찬할 게 못 된다. 그 시대에는 그러지 못했으면 관직 생활을 못 했으니까.'라는 말을 했겠는가. 신하에게도 부담이었지만 이 주접을 통한 정치는 옹정제 본인에게도 엄청난 신체적 무리를 주었다. 옹정제는 하루에도 수십 통씩 날아오는 주접에 모두 친히 답서를 작성했다. 이처럼 근면한 황제는 옹정제 이후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 중에는 정책 관련의 진지한 답변은 물론, 옹정제의 개인적인 이야기도 있다. 그 가운데는 형편없이 일하는 관리에게 '월급만 축내는 밥버러지'라는 등 대놓고 면박하는 글까지 있다. 원문에는 '無知(멍청한 놈)', '無識小人(무식한 소인배)', '覽, 笑之(쭉 훑어봤는데 웃기는구나)' 등의 표현들이 있다.[95] 이것들을 보면 옹정제는 상당한 독설가였다. 이 때문에 신하들 입장에선 죽어나는데 내용을 빼먹고 쓰면 나중에 귀신 같이 알아서 그걸로 까고,[96] 쓸데없이 장황하게 써서 진짜로 중요한 내용을 못 보고하면 또 그걸로 욕먹었다.[97] 그런데 어떤 관리들[98]은 정말 글 잘 쓰는 사람들에게 대필을 맡겨서 글을 적절히 꾸며 옹정제를 속이기도 했다니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는 듯하다.

이러한 관리의 철저한 감독, 감시에는 많은 이야깃거리가 있는데, 하루는 왕운금(王雲錦)이라고 하는 신하가 신나게 마작을 하고 놀았다. 그런데 마작패 하나가 사라져서 아무리 찾아도 안 보이자 퇴근해서 그냥 집에 돌아왔다. 다음 날 출근했을 때 황제가 그를 불러 "어제 뭐하고 놀았냐?"고 묻자 깜짝 놀란 그 신하는 감히 황제를 속일 엄두가 안 나서 마작을 하고 놀았다고 이실직고를 했다. 그러자 갑자기 황제가 사라진 마작패를 그에게 던지면서 솔직하게 말했으니 이번은 봐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에 그 신하는 공포에 질려서 그 뒤로는 도박할 엄두를 못 냈다는 이야기. 또다른 에피소드로는 형부의 신하가 옹정제를 알현했는데, 황제가 담당하는 부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물어보기에 그 신하는 대충 "잘 돌아갑니다."라고 대답했다. 조금 뒤 황제는 다시 "그래, 거기 부서에 걸린 현판도 잘 있더냐?" 하고 물어봤을 때도 신하는 "예, 제대로 걸려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황제가 그 관청 건물에 걸려있던 현판을 가져오게 해 그 신하 앞에 집어던졌다. 황제가 전날 밤에 측근을 시켜 관청의 현판을 떼어 가져오게 했던 것이다. 형부의 현판은 본보기 삼아 한동안 원위치에 돌아가지 못했다. 이쯤되면 전근대판 빅 브라더.[99]

옹정제가 그토록 일 중독자였던 까닭으로는 여러 설이 있는데, 그 하나로 옹정제가 제위를 계승할 때 강희제가 지목한 열넷째 아들(十四子)의 유언을 고쳐 넷째 아들(第四子)로 조작했기 때문에 관리들의 반대가 있을까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설[100], 삼번의 난이나 대만의 정씨(鄭氏) 일족의 저항처럼 한족의 반란을 경계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한족의 반청 여론을 크게 의식해서인지 옹정제는 주원장의 13남 대간왕 주계의 12대손인 주지련을 연은후에 봉하고 황제 직속의 정백기 한군으로 대기시켜 신분을 안정케 하고[101] 선조들의 제사를 돌보게 할만큼 한족의 반청 모의에 대해 전전긍긍하며 당근과 채찍을 수시로 꺼내들었다. 특히 옹정제의 치세에는 유명한 반청(反淸) 모의 사건이 일어났는데, 1728년 호남성 정주(靖州)의 수재(秀才) 증정(曾靜)이 자신의 문하생 장희(張熙)를 보내 천섬총독(川陝總督) 악종기(岳鍾琪)에게 반란을 권했던 것. 악종기는 악비의 후손이라는 소문이 있었기에[102] 악비처럼 한족을 위해 싸워주길 기대한 듯 싶지만 악종기는 이를 적절히 이용해먹으며 증거를 수집한 뒤 옹정제에게 보고해 버렸고, 옹정제는 사건을 세심하게 조사하여 모반자의 사상적 스승인 여유량(呂留良)을 부관참시하고 그 일족과 친구들을 처벌하였으며 저서들을 압수해 파기했다. 직후 만주족의 통치가 천명(天命)을 따라 올바르다는 식의 주장을 담은 '대의각미록(大義覺迷錄)'을[103] 직접 저술하여 널리 읽게 했다. 그러나 이 저술은 바로 다음 황제이자 아들인 건륭제가 금서(禁書) 처분을 하는 수모를 겪는다. 현대 연구자들에 따르면 이 책에 논리적인 허점이 많아 되려 한족 지식인들의 공박의 빌미가 될 우려가 있어 금서 처분시켰다고.[104] 또한 자신을 둘러싼 소문을 반박하려다 아버지를 죽이고 제위를 찬탈했다, 어머니를 핍박해서 죽였다, 형을 살해하고 동생들을 죽였다는 소문을 오히려 재점화시키는 역효과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이었다. 옹정제는 자신이 부모와 서모들의 사랑을 독차지 한 아들이라는 거짓말로 자신의 적법성을 강조했고, 자신은 천하 제일의 효자라며 부모와 형을 죽이다니 가당치 않은 일이라며 소문을 부정했다. 그러나 윤사와 윤당은 자기가 죽이기 전에 죽었으니 남들이 자기가 죽였다고 해도 부정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정적인 윤사를 디스하다 많은 형제들과 대신들이 그를 따랐다는 사실을 시인하고 당을 결성했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서였지만 그를 따르던 형제들이 얼마나 우애가 깊었는지 상세하게 묘사했다. 거기다 관리를 파견해 군중들 앞에서 낭독하게 해서 식자층만이 아니라 글을 모르는 백성들까지 대의각미록의 내용을 알게 됐다. 그러나 백성들이 보기엔 옹정제의 해명이 그리 설득력이 없었고, 오히려 우애가 깊은 형제들을 핍박한 악독한 폭군으로 여기며 황8자당에 대한 동정론이 더 강해졌다.[105] 저잣거리의 백성들은 당연히 사상 개조 따위에 관심을 두지 않고 황실의 자극적인 소문에 대해서만 떠들어댔다. 건륭제는 이 상황에 심각성을 느끼고 즉위하자마자 대의각미록을 금서 처분시켰다. 다행히 문자의 옥에서도 이 책은 여차저차 살아남아 오늘날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2021년에는 대의각미록의 한국어 번역판이 출간되었고, 중국사학자 조너선 스펜스는 대의각미록을 중심으로 옹정제를 조명한 <반역의 책(Treason by the Book)>에서 이 사건을 소개하기도 했다. 여기서 그는 옹정제의 이런 기행에 대해 옹정제의 의지나 통치철학과는 별개로 백성들이 해명은 잊고 유언비어만 기억하는데 건륭제가 책을 싹 회수해버리자 백성들은 더욱 유언비어가 진실인 줄 믿게 되었으니 언론플레이의 미숙을 지적했다.

6. 대중매체에서

원래는 아버지인 강희제, 아들인 건륭제에 밀려 영화나 드라마 등의 주인공인 횟수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러나 주인공으로 많이 안 나왔을 뿐이지, 강희 만년의 후계자 분쟁 과정의 논란이 해결되지 않았던 과거에는 흑막으로 나왔던 적도 많았었다. 결국엔 악역 그래도 최근에는 강희제, 건륭제 관련 사극이 원체 많이 나와서인지 대타격으로 옹정제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드라마도 나오고 있다.

6.1. 드라마

  • 《대내군영(大內群英, Dynasty)》[106] 배우: 만자량
    홍콩 RTV(現 aTV) 제작. 이 드라마는 애당초 무협 드라마에다가 여사낭과 옹정이 러브라인으로 맺어지는 막장 설정이니(결말은 배드 엔딩) 해당 드라마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매우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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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청십삼황조(滿清十三皇朝之雍正, The Rise and Fall of Qing Dynasty)》 배우: 위열(煒烈)
    만청십삼황조 역시 홍콩 aTV에서 만든 드라마로, 청나라 13명의 황제의 이야기를 그려냈다. 단, 1980년대에 제작했고 많은 부분에 있어서 야사를 참고했기 때문에 내용전개에 있어서 현재 새롭게 밝혀진 역사적 사실과 다른점이 많다.[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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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측이 옹정제.
* 《구왕탈위(九王奪位, Secret Battle Of The Majesty)》[108] 배우: 강화
이 드라마도 홍콩 aTV에서 제작했고, 옹정제를 '황위를 위해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성격의 캐릭터로 설정하였으며, 황제에 등극하고 자신의 절대 권력을 확립하는 피 튀기는 과정이 여과없이 나온다. 옹정제가 강희제의 유조를 위조하였다는 설을 채택하였고, 심지어는 강희제를 살해한 것이 옹정제 자신이라는 설정까지 곁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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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호기협전(江湖奇俠傳, Legend Of Yung Ching)》 배우: 정소추

    • 홍콩-대만 합작 드라마. 여사낭이 등장한 건 다르지 않으나 강희제의 유조를 위조했다는 설과 강희제 살해 or 독살설은 채용하지 않았다.
  • 《옹정왕조(雍正王朝)》 배우: 당국강[109]
    대륙 제작. 강화가 연기한 <구왕탈위>의 옹정제보다 잔인함은 줄어들었다. 성실하고 부지런한 훌륭한 행정가이자 황제인 옹정제의 모습을 그렸다. 폭군으로 묘사되기 일쑤인 다른 시리즈에서의 옹정제가 전혀 생각나지 않을만큼 불쌍하리만치 일만 하다 윤상, 홍시, 윤사 등의 소중한 사람들을 하나 둘 잃어가며 한 인간으로서 무너져가는 처연한 일 중독 황제를 잘 묘사한 당국강의 명연기가 일품이다. 짬이 날 때 코스프레를 하면서 어진 한 번 그려보라고 선교사들 불러다 놓고도 상소문 받아 읽다가 화딱지가 나서 다 내쫓아버리자 선교사들이 그림 언제 다 그리냐고 투덜대거나, 옹정 3총독 중 이위가 글자도 모르는 무식한 옹왕부 가노였는데 옹왕부의 다른 시녀와 눈이 맞아서 연갱요가 있는 사천으로 쫓겨나 글을 배우고 일도 배우기 시작했다는등 코믹한 설정도 눈에 띄는데, 이 설정이 인기가 있었는지 이위를 주인공으로 하는 스핀오프 코미디(!)물인 《이위당관》과 《이위사관》이 《옹정왕조》의 대부분의 배우들을 그대로 유지한채 제작되어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다만 이위역의 배우가 교체되기는 했다.) 《옹정왕조》에서는 염친왕 윤사가 실제보다 오래 살아서, 변경의 팔기군을 북경에까지 끌어들여 쿠데타를 모의했다가 다 죽어가는 윤상에 의해 가까스로 제지당한 후 아키나라고 개명당하며 유폐된다. 이 과정에서 어리바리한 철부지 홍주와 홍력에게 열등감을 가진 홍시를 끌어들인다고까지 설정했다. 홍시가 그 후에도 철없이 굴다 사사당한 것도 윤사의 충동질 때문이었다는 설정, 그리고 홍주는 아버지와 형제들 간의 권력다툼에 환멸을 느끼며 개망나니 행세나 하면서 몸을 낮춘다는 설정은 덤. 그래도 형제는 형제인지 윤상, 홍시를 잃으며 쇠약해진 말년의 옹정제에게 마지막 결정타를 먹인 사건 또한 윤사의 죽음이었다고 묘사된다. 당국강이 연기한 옹정제의 말년은 정말 눈물없이 볼 수 없을만큼 불쌍하고 불쌍하다. 아들 홍시를 자결하게 만들면서는 다리에 힘이 풀리고 피를 토하며 쓰러져 툴리션(圖理琛, 도리침)[110]에게 업혀 황궁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또한 황제가 아니라 심문관인 척 증정이라는 이상한 선비를 만나서는 황제가 밤마다 음주가무나 즐기며 엽색행각을 일삼는다는 말에 정말 서럽게 눈물을 흘린다. 생애 마지막밤에도 침침해진 눈으로 빨간 붓을 들고 열일하고 있었지만 먼저 사망한 윤사가 남긴 애증 어린 유서를 읽으며,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윤사의 환영을 보다가 끝내 산더미 같이 쌓인 밀지 위에서 피를 토하며 사망한다. 국내 p2p 사이트에서도 쉽게 드라마와 자막을 구할 만큼 옹정제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 중에서는 널리 알려졌다.
  • 《구오지존(九五至尊, The King of Yesterday and Tomorrow)》 배우: 강화
    TVB 제작. 위의 구왕탈위와 배우는 같지만 작품의 성격은 타임슬립물로 위와는 전혀 다르다. 현대 홍콩으로 여사낭과 함께 날아갔는데 현대 홍콩에서 이대하(李大蝦)라는 이름으로 활동한다.
  • 보보경심(步步驚心)》 배우: 오기륭
    대륙 제작. '냉면왕(冷面王)'이라는 별명이 있을 만큼 침착하며 감정을 좀체 드러내지 않는데다가 여자에게도 냉정한 나쁜남자 설정이다. 여주인공 마이태 약희를 일편단심으로 사랑하면서도, 황제에 등극하기 위해 물 밑에서 고군분투하고 끝내 최후의 승자에 올랐다. 그러나 공포 정치와 정적 숙청으로 약희와 틀어져 헤어지고, 끝내 약희의 진심과 죽음을 뒤늦게 깨달아 오열한다.
  • 궁쇄심옥(宮鎖心玉)》,《궁쇄주렴(宮鎖珠簾)》 배우: 하성명
    대륙 제작. 전반적으로 보보경심과 견환전의 옹정제를 섞어놓은듯 하다. 한 여자에게 빠지면 한 여자만 바라보는듯 싶다가도 정작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해주는 여자는 이용하려고만 하는등. 역사는 결국 4황자 손을 들어주지만 사랑은 쉽게 되지 않는 캐릭터로 나온다. 동생을 편애하는 친모와 그런 동생을 미워한다. 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지않는 성격이지만 황제가 되려는 야심이 크고 술수에 능하다. 어떤 문제가 생기면 해결책중 살인을 제일먼저 고려할 정도로 잔인한 성품을 지녔다.
  • 후궁견환전(后宮甄嬛傳)》 배우: 진건빈
    대륙 제작. 독재자에 정적에게 잔인하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에게는 일편단심이었던 대부분의 옹정제와는 달리, 특정 후궁을 편애하지 않고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황제의 면목을 보인다.[111] 그러나 끝내(드라마니까) 희귀비 견환을 총애하고, 견환과 자신의 동생의 사이를 의심하던 중 병으로 쓰러져 후환을 두려워한 견환이 독살시킨다.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싱크로율로는 역대 옹정제 역인 배우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 옹정제(옹정황제의 여인) 참고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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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소설

  • 2005년 로맨스 소설 《보보경심》: 드라마 보보경심의 원작 로맨스 소설로 동화(桐华) 작가가 썼다. 대한민국에서는 2013년 번역 출판되었다.

6.3. 영화

  • 〈옹정대파십팔동인〉[113]
    재위를 14황자에게 넘어갈 조서를 4황자라고 조작한 옹정제(황가달 분)가 업적을 남기기 위해 한족의 반만주족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신분을 위장하고 반만주세력의 본거지인 소림사에 직접 들어가 무공을 익혀 십팔동인진을 깨트린다는 이야기이다.
  • 쇼브라더스사에서 제작한 혈적자 1,2편
    본작의 최종 보스로 등장한다. 창작물을 통틀어 가장 악독하게 묘사된 옹정제라 할만 한데, 성군의 면모는 모조리 쳐내고 폭군의 면모는 몇 배로 불려 만들어 낸 희대의 폭군으로 묘사된다. 한족을 극히 싫어해서 자기에게 바쳐진 미녀가 한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직접 참살하고, 반란분자 찾는다는 명목 하에 무고한 양민들을 학살하려 들며[114], 자기에게 직언을 올리는 충신들도 못마땅하게 여겨 만만하면 대놓고 숙청하고, 대놓고 숙청하기 힘든 거물이면 암살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혈적자를 사용하는 황제 직속 암살 부대를 만들면서 본작의 스토리가 시작된다.
  • 화소소림사(한국개봉명 '불타는 소림사', 1976)[115]
    〈소림사십팔동인〉을 감독한 곽남굉 감독의 또다른 작품. 여기서 옹정제는 아예 소림사를 불태웠다. 이에 격분한 소림승들이 옹정제를 암살한다는 내용. 황궁에 5명의 가짜 황제를 두어 카케무샤로 삼는 치밀함과 악랄함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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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학자들의 연구결과에서 나온 키이다.[2] Hūwaliyasun Tob Han[3] Nayiraltu Töb Khaan[4] 1722년 즉위 당시 나이가 이미 44세.[5] 나중에 그의 아들인 건륭제가 87세로 장수하고 사망했을 때 태자 가경제의 나이가 35세로, 당시로서는 늦은 나이에 즉위했다. 그나마 가경제는 옹정제보다는 한참 젊은 나이에 즉위해서인지 24년간 재위했다.[6] 물론 예전부터 명군이라 평가받았다.[7] 강희 28년(1689년)에 황후로 진봉되었으나 이틀 후에 사망하여 효의인황후라는 시호를 받았다. 효의인황후 동가씨의 아버지 동국유(1643년~1719년)는 강희제의 외삼촌이었다. 따라서 강희제와 효의인황후 동가씨는 부부이자 사촌(외사촌/고종사촌) 관계였다.[8] 이전까진 혜비 나라씨의 연희궁에서 양육되었다.[9] 이는 2020년 경 청사 연구자들이 만주어 기록과 궁중 기록을 해석하면서 밝혀진 사실로, 황4자 윤진과 황8자 윤사가 양육자와 생모들의 관계부터 시작해서 대단히 복잡한 관계였음이 드러났다.[10] 강희 41년 황4자 윤진(옹정제)이 예전에 욕을 먹었던 기록을 지워달라고 요청하자 강희제가 들어준 기록이 《기거주》에 남아있다.[11] 기록 속의 황4자 윤진(옹정제)은 소심해서 사소한 원한을 잊지 않았고, 감정적이었으며 타인의 시선을 매우 의식했다. 이런 성격 때문에 인간 관계가 협소했고, 젊은 시절에는 부황 강희제의 신임을 받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내성적이고 예민한 성격이 제국의 군주로서는 큰 장점이 되었다. 그는 명군으로 기억되기 위해 쉬지 않고 부지런히 일했다. 하지만 문제도 있었는데 성조실록에서 다른 황자들의 기록과 마음에 들지 않는 대신들의 기록을 축소했다는 것이다. 옹정제가 곡부에서 제사를 지낸 것도 원래 단독으로 한 게 아니라 황3자 윤지, 황8자 윤사와 같이 한 일이다.[12] 현재 베이징 최대의 티베트 불교 사원이다.[13] 자신의 띠가 돌아오는 해로 본명년을 맞으면 안 좋은 일이 생긴다는 속설이 있었다.[14] 만주어로 왕자, 황자, 군주를 가리키는 단어이다.[15] 윤잉 이전에 승호(承祜)라는 아들을 두었으나 요절했다.[16] 윤잉이 겨우 한 살하고 7개월이 되었을 때 황태자에 책봉했을 정도였다. 위에도 서술했다시피 윤잉은 첫째 황자, 즉 서자까지 포함시키면 장자는 아니었다.[17] 이렇게 된 것은 강희제의 책임이 컸다. 강희제의 시대부터 서자인 황자들이 관료화되고, 친왕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리면서 적자인 윤잉에게 도전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18] 하지만 증거가 없어서 1개월 뒤 작위를 돌려주었다.[19] 본래 만주족은 부족회의에서 계승자를 선출했다. 그래서 태조 누르하치는 의정왕대신회의를 통해 후계자를 선출하라는 유조를 내린 바있었다.[20] 황8자 윤사는 강희제의 형인 유친왕 복전 등의 황실 어른들, 그리고 형제들 및 만주족 대신들 뿐만 아니라 강남의 한족 문인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좋았다.[21] 강희제는 이 꿈을 폐태자 윤잉의 광증이 곧 낫는다는 의미로 해석했다.[22] 제6대 고종 건륭제의 원후인 효현순황후의 백부였다. 처음엔 황8자 윤사를 지지했고, 강희제와 태자 문제로 대립해 대신들이 보는 앞에서 구타를 당했다.[23] 강희제의 외삼촌이자 장인이었다.[24] 이 때문에 옹정제의 시기를 사서 온갖 죄명을 뒤집어쓰고 숙청되었다. 그 전에도 옹정제의 추궁을 받은 황3자 윤지가 "황상께서 제가 황8자당이라고 하시니 받아들이겠습니다. 제발 자비를 베풀어주소서."라고 쓴 밀지에 옹정제가 조롱과 통쾌함이 담긴 답장을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윤지는 경민황귀비의 상중에 무례를 범해서 황13자 윤상의 원한을 샀다.[25] 윤사가 장티푸스 또는 말라리아로 보이는 병을 앓고, 사경을 헤맨 뒤 녹봉을 돌려주고, 윤사의 외아들이었던 홍왕을 황궁에 데려와 키우는 등 그럭저럭 화해를 하긴 했다.[26] 강희제가 윤사에게 황위를 물려줄 일은 없다고 선언했기 때문이었다. 윤사는 강희 말년에 황위를 포기하고 황9자 윤당, 황10자 윤아 등의 형제들과 여러 대신들과 함께 윤정을 지지했다.[27] 황4자 윤진(옹정제)의 4남 훙리가 조부 강희제의 총애를 받고, 많은 가르침을 받았으며 이 탓에 윤진이 차기 황위를 물려받았다는 설이 있으나 이는 고종 건륭제의 언플에 가깝다. 강희제가 붕어한 해가 되어서야 훙리는 조부를 만났는데 (미움을 받던 황8자 윤사의 후계자인 홍왕조차도 그보다 더 일찍 강희제를 만났다.) 다 죽어가는 늙은이가 어린 손주한테 이것저것 가르쳐줄 수 있었겠는가.[28] 이전에도 이런 의혹이 있었다. 옹정제는 《대의각미록》 등에서 황8자 윤사가 자신에게 불효한 마음을 털어놓았다며 비난했는데, 사실인지 아닌지는 둘째치고 원래 친했다는 전제가 깔려있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말이었다.[29] 윤진(옹정제)과 윤사가 반목한 건 강희 55년의 사건이 결정적이었다. 황8자 윤사가 창춘원에서 중병에 걸리자 황4자 윤진(옹정제)은 탕천 행궁에 있었던 강희제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고, 윤사를 돌보러 창춘원으로 돌아갔는데 곧바로 강희제가 윤진(옹정제)에게 서신을 보냈다. "다른 중요한 일을 제쳐두고, 이렇게 급히 떠나다니 넌 8황자의 사람이구나? 너는 어의를 데리고 가서 잘보도록 해라." 윤진은 부황 강희제의 불신과 의심을 피하기 위해 황9자 윤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위독한 상태의 윤사를 집으로 데리고 갔다. 이후 윤진(옹정제)과 윤사는 완전히 갈라졌다.[30] 예를 들어 조선에서 발표된 강희제의 구두로 남긴 유조에서 윤잉을 차기 황제로 지목하며 '윤진의 둘째 아들이 영웅의 기상이 있으니 그에게 황위를 물려주어라'고 했다는데 다른 지역에서 발표된 유조에는 이 내용이 없다.[31] 강희제의 죽음부터 옹정제 즉위의 상황을 설명하는 정사, 서양 선교사들의 기록, 옹정제가 훗날 저술한 대의각미록에서 밝힌 해명이 전부 통일이 되지 않고 모순적이라서 정황을 파악하기 힘들다.[32] 롱코도의 가문인 퉁갸씨는 황8자당 소속이었다. 롱코도는 어느 황자의 편도 들지 않으며 강희제를 묵묵히 보좌해서 강희제의 신임을 샀다.[33] 강희제의 유조는 옹정제 즉위 이후의 기록에만 나온다. 연구자들은 아직까지 만주 기록에서 옹정제 즉위 전에 작성된 유조를 발견하지 못했다.[34] 연갱요는 한군 양백기 세가 출신이자 납란 명주의 손녀사위였고, 강희연간에서도 승승장구하던 무관이었다.[35] 몇 개월 후, 옹정제는 윤제를 강희제의 능지기로 보내버렸다. 효공인황후가 서거한 직후 윤제를 군왕으로 봉하기는 했으나 군왕 대우를 해주지 않았고 계속 강희제의 능묘를 지키도록 명했다.[36] 황8자 윤사는 염친왕(廉親王)에 책봉되었는데 정작 윤사는 처가 식구들이 친왕 책봉을 축하하자 "황제가 오늘 은혜를 베풀었지만 내일 처형하려할지 누가 알겠는가? 눈앞의 은혜는 믿을 수 없는 것이다."라며 냉소적으로 반응했고 그의 적복진 곽락라씨도 "어찌 기뻐하고 축하할 수 있겠는가? 이 머리를 보존할 수 없을텐데."라며 자신들의 미래를 정확히 예견했다. 부부가 나란히 일말의 의심도 없이 자신들의 비참한 결말을 예상한 이유는 강희제 시절 바로 옆집 이웃으로 살던 옹정제의 뒷끝 하나는 장난 아닌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37] 당시 안군왕부는 작위 계승 때문에 내분이 있었고 옹정제가 이를 명분으로 삼았다.[38] 황제는 소위 천병의 소유자이며, 최종 군통수권자다. 병사들이야 명령체계를 따른다 쳐도, 연갱요는 두 번이나 군령을 씹은 것이다. 약간 더 부연하자면 황제는 최종 군통수권자이며, 팔기 중 상삼기(양황기, 정황기, 정백기)를 관장하는 기주이다. 이에 비하여 연갱요는 준가르 정벌을 위하여 파견된 대장군으로 옹정제로부터 지휘권을 이양받은 것이지 본인이 통수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일단 연갱요 본인도 양황기 한군 소속이다). 그런데 이때는 준가르 정벌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베이징으로 돌아와서 생긴 것으로 이양된 지휘권이 옹정제에게 돌아와야 하는 상황이었음에도 이같은 행태가 나타난 것이다. 비슷한 사례인 주아부 같은 경우에는 한 문제가 주아부가 통솔하는 군영으로 갔을 때에 생긴 것으로 이때는 북방의 흉노가 갑작스럽게 침공할 여지가 있는 상태에서 사전에 연락하지 않고서 황제가 진짜로 왔는지 판단되기 어려웠기에 용인되는 것이었다. 또한 연갱요 이전에 대장군직을 황제의 형제나 황자가 맡았기에 이러한 행태가 용인 되었을 지는 몰라도 옹정제로서는 이 지위를 가지고서 자신에게 대항한 동복동생인 황14자가 머릿속에서 떠올랐을 것이다. 물론 군대에서도 상관이 명령을 잘못 내릴 수 있고 이에 대해 하급자가 반대하는 상황도 발생할 수는 있다. 그래서 전쟁터에서는 장수가 황명을 따르지 않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허나 연갱요는 항명도 아닌 무시를 했다. 상급자가 명령을 했으면 따르든 안 따르든 관계없이 뭐라도 반응은 보여야 하는 것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군대의 예법이다. 그 군령을 따를 수가 없다고 생각되면 왜 그 명령이 부적절하다고 생각되는지 근거를 대서 설명을 해야 맞는 거지, 그냥 무시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런데 군통수권자로부터 군령이 두 번씩이나 내려왔는데 정면으로 무시한 데다 그 무시를 말리는 사람도 없게 만들었다는 것은 엄청나게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39] 옹정제는 약 3년 동안 지속적으로 황8자당에 속한 황자들을 감시하고 그중 핵심인 윤사에게 갖은 폭언을 퍼부으며 심리적 압박감을 주었다.[40] 강희 47년 9월, 윤사와 옹정제가 강희제의 명으로 베이징을 지키고 있을 때 강희제와 주고 받은 어비를 말한다. 강희 53년, 윤사가 바친 매 두 마리가 죽은 사건으로 강희제가 노발대발하여 윤사와 부자의 연을 끊겠다고 말한 후, 윤사가 병에 걸리자 만일을 위해 가족에게 연락하여 집안의 서신을 태우라고 했는데 가족이 실수로 강희제의 어비를 불태워버렸다. 그 직후 옹정제가 이 일을 윤사에게 묻자 윤사는 사실대로 답해주었다. 옹정제가 즉위한 직후 윤사는 종인부에 불려가 어비를 왜 불태웠는지 심문을 받았고, 그는 자신이 병으로 인해 정신이 없던 탓에 실수로 불태웠다고 진술했다. 그렇게 덮어두기로 암묵의 합의가 있었는데 옹정제가 다시 끄집어낸 것이다.[41] 윤당과 다시는 왕래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일을 말한다.[42] 이후 옹정제는 당혹감과 분노에 사로잡혀 있다가 성친왕 윤지가 윤사에게 관련 정보를 유출했음을 눈치채고 윤지를 타박+추궁했다.[43] 이는 옹정제와 성친왕 윤지의 만주어 밀주에서 밝혀진 사실이다.[44] 예를 들어 옹친왕 시절부터 예산 낭비에 대해선 봐주지 않는 옹정제의 까탈스러운 성격을 잘 알기에, 강희제의 능원 공사에서 돈을 아꼈더니 네놈은 선황을 능멸할 셈이냐며 질책했다. 그리고 돈을 빌려서 갚은 일도 죄를 물었다.[45] 예전에는 아키나가 개, 서스허가 돼지라는 해석이 있었으나 만주어에서 개는 인다훤(indahūn), 돼지는 울갼(ulgiyan)이다.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옹정제>나 옹정제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여러 중드를 계기로 이런 설들이 많이 퍼졌는데,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생몰년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다소 연식이 오래된 분석으로, 21세기, 2010년대의 연구에서는 이것과는 다른 설이 제기되기도 한다. 게다가 아키나는 옹정이 개명하라고 명령해서 윤사가 스스로 개명한 이름이었다. 현재 서스허는 '귀찮다, 증오하다'라는 뜻으로 밝혀졌고 아키나는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불명이다. 안 좋은 의미일 거라는 추측이 많았지만 최근 다른 만주인 중에도 아키나라는 이름을 사용한 기록이 발견되어 부정적인 의미는 아닐 거라고 보는 추세다. 아직도 전산화와 번역이 완료되지 않은 수많은 청대 만주어 사료들이 전문가들의 손을 타다보면 정확히 알게 될 날이 올 듯. 일각에서는 '(죄를) 갖고 가다'란 뜻의 아치나(acina)를 의미한다고 보기도 한다. 또한 도마에 올려진 생선 혹은 고기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주장도 있다.[46] 옹정 2년에도 옹정제는 자신이 대통을 이어받았음을 강조하며 조정대신들이 윤사에게 미혹당해서 자신을 가혹하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대신들을 질타했다.[47] 옹정 2년, 윤사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유친왕 작위를 박탈당했다.[48] 옹정제의 이모와 아령아의 아들.[49] 옹정제의 이모부인 아령아는 강희 55년에 죽었지만 윤사를 지지했기 때문에 그 일가는 모두 연좌되었고 장자 아이송아는 처형되고 나머지는 신자고에 들어가거나 유배되었다.[50] 특히 윤사의 적복진이자 만주팔대 명문가 출신으로 윤사가 정람기의 확고한 지지를 받게 해준 곽락라씨는 그녀의 대단한 위상을 경계한 옹정제에 의해 곽락라씨의 위세와 악랄함 때문에 윤사가 첩을 적게 들였고 그로 인해 대가 끊길 뻔했다는 이유로 강제로 이혼당하고 핍박받았다. <영헌록>에 따르면 옹정제는 곽락라씨를 자결하게 한 뒤 시신의 뼈까지 갈아버렸다고. 다만 정사에 곽락라씨가 처형당했다는 기록은 없다.[51] 융과다의 사촌 악륜대는 처형당했다.[52] 황족의 계보를 말한다. 어느 황족의 옥첩인지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53] 그 죄들 중에는 '자신을 제갈량에 비유한 오만함'이라는 죄명도 있다. 그가 강희제의 유조를 받들며 자신을 유비의 유조를 받든 제갈량의 처지로 빗댄 적이 있다.[54] 옹정제에게 탄압받은 대상들뿐만 아니라 옹정제의 측근인 장친왕 윤록도 건륭제 즉위 후 옹정제의 숙청에 대한 반감을 드러냈다. 윤루는 윤사를 옹호하다 종적을 박탈당한 옹정제의 황3자 홍시를 동정하여 가장 적극적으로 복권을 주장했다. 그리고 폐태자 윤잉의 장자 홍석, 옹정 원년에 옹정제에게 불만을 표출하여 아버지인 이친왕 윤상이 자진해서 감금한 홍창, 옹정제에게 처벌받은 적이 있는 항친왕 윤기의 장자 홍승 등이 그동안 억눌러왔던 반감을 표출했는데도 그들과 어울렸다. 건륭제는 이들의 작위를 삭탈하였으나 종신형을 받은 홍석을 제외하면 모두 나중에 복귀시켜주었다. 건륭 43년에 홍석도 용서해주었다.[55] 강희제 중반기까지의 외치는 외몽골 일대까지 안정시키는 등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지만, 강희제 말년에 이르면 준가르가 강화되었다. 그러나 황14자 윤정이 서북면 전선에서 군공을 세우며 활약했다.[56] 생전에 황태자를 발표하지 않고 적어서 상자 안에 봉해 두었다가 사후에 공개하는 방법. 생전에 황태자의 파벌을 형성하거나 선조처럼 황태자를 바꾼다고 신하들이 대립하는 경우가 없어지는 효과가 있었다.[57] 오히려 건륭제는 너무 장수하는 바람에 아들들이 요절하자 슬퍼하며 자신이 봉인해놨던 유조를 직접 꺼내보이는 일도 여러 번 있었고, 결국 죽기 전에 아들 가경제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상황으로 물러나기까지 했다.[58] 본래의 의미는 문안 인사나 하사품의 답례 등 그냥 개인 연락망이었다.[59] 명 홍무제 주원장이 처음 계획하고, 영락제가 체계를 구축한 황제가 모든 행정을 독점적으로 운영하는 시스템은 옹정제에 이르러서 더이상 발전할 수 없는 최고의 체제를 만들었다. 중국 전역의 지방관들과 직접적인 통교는 여럿 체계를 거쳐서 진행되는 행정적인 지연을 방지하고, 민생에 직접적으로 필요한 업무를 가장 빠르게 진행하는 등의 긍정적인 요소가 있었지만, 업무 과다로 황제의 수명 단축과 황제 측근의 총애받는 권신들이 모든 국정사무를 농단할 문제점들을 발생시켰다.[60] 옹정제가 신하들 중 가장 믿고 신임했던 3총독인 하남총독 전문경, 절강총독 이위, 운귀광총독 시린교로 오르타이 3명 중에서도 오르타이는 만주인이라 유달리 옹정제의 신임이 두터웠다. 오르타이에게 옹정제는 대략 "흐규흐규, 니 편지 읽으면서 야밤에 눈물이 난다. 너 같은 착한 놈은 조상님들도 9대조까지 극락왕생하실 거야", "니 글은 진짜 정성이 느껴진다. 한글자 한글자 읽을 때마다 각잡고 읽는중!", "천지신명이시여, 우리 오르타이 무병장수하고 자손만대 부귀영화 대박나게 해주세요. 우리 오르타이 하고 싶은거 다해" 같은 편지를 보내며 '주접을 떨었던' 기록이 있다. 하지만 옹정제가 자손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릴 거라던 오르타이는 사후 10년 만에 후손들이 문자의 옥에 휘말려 자기 위패까지 태묘에서 쫓겨났다는 게 아이러니하다.[61] 다만 사사정을 죽인 것은 최종적으로 그의 뒤를 봐주던 융과다를 제거하고자 하는 정치적인 의도도 있었다.[62] 사실 서준의 경우는 자업자득이라 볼 수 있는데, 서준은 이렇게 하고서도 뻔뻔스럽게 한자도 모르면서 문자를 마음대로 뜯어고친다며, 옹정제를 비꼬는 시를 짓기까지 했기 때문에 괘씸죄로 목이 베여서 효수되었다.[63] 중국 드라마 이위당관(李衛當官)에서의 이위가 바로 이 사람이다. 어릴 적에 고아가 되어 무술을 익혔지만 무관직에서는 출세하기 힘든 한인인지라 정작 벼슬살이에 필요한 글공부는 못해서 겨우 연납으로 호부에서의 말단 벼슬자리를 얻어 성실히 일하던 중 옹친왕의 눈에 띄었던 인물인데, 어지간한 매관매지션들이 백성에게서 본전을 뽑으려 쥐어짜는 탐관오리로 흑화하는 것과 달리 오히려 자신을 과거 합격자가 아니라고 깔보던 웬만한 과거급제 출신 기성 관료들보다 훨씬 나은 일처리와 청렴함(!)을 선보인 덕에 관료집단을 극혐하던 옹정제가 크게 신임했다. 사실 저학력은 어쩔 수 없었는지 일처리가 실제로 뛰어났다기보다는 불도저식 업무로 일관했다는 평가도 있긴 하나, 오히려 과거제의 학맥에 연연하며 썩어가던 관료사회의 고인 물을 정화하는 데에 꼭 필요한 강단 있는 성품이야말로 옹정제가 옹친왕 시절부터 아주 높이 평가하던 장점이었다.[64] 만주족이 산해관을 넘은지 얼마되지 않은 시기인 순치제와 강희 초년에는 사회지도계층인 향신들을 회유하고자 비교적 많은 양보를 하였다(이 양보라는 것이 엄청난 것은 아닌데, 이전 시기 향신들이 각 지방에서 가지고 있던 권리를 인정해주는 것이다). 강희제가 친정을 한 이후에는 황제가 천하제일의 유학자라는 것을 직함으로 삼아 한족을 통치하고자 하며 또한 많은 우대와 대화를 하였다. 이에 향신들은 몇십 년에 이르는 동안 각 지방을 예전처럼 장악하고, 중앙정계에까지 진출하여 강력한 계층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이 어리석은 서생들은 주원장 이후 편성된 황제독재체제로 구성된 행정체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유학은 周代 봉건이나, 宋代에 君臣共治라는 것을 이상적으로 생각하고 있음). 강희제의 양보와 배려를 마치 자신들이 원래부터 가졌던 권리인 마냥 생각하였기에 이딴 웃기지도 않는 일을 벌였다. 다만 옹정제는 어차피 만주인이건, 한인이건 고위관료들과는 원래부터 척을 지고 있었고, 자신들의 가신들(대표적으로 일 잘하는 3총독 전문경, 이위, 시린교로 오르타이)이 그들보다 훨씬 유능하였기에 그다지 문제될 것이 없었다.[65] 현대 중국에서도 지방 유력가들과 관료들이 꽌시 문화를 통해 결탁하고 카르텔을 형성하곤 한다.[66] 출처는 등예쥔, 치국[67] 참고로 은 1냥(兩) = 1200푼(이건 공식적인 시세이고, 실제로는 등락이 있었다)[68] 최하위 지방관인 지현조차도 1년 지출이 천 냥이 넘는데, 국가에서 받는 돈은 100냥이 안 되니 방법이 없었다.[69] 오늘날에도 금융업계의 연봉이 유달리 높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너무나 민감하고 돈 되는 정보를 많이 알고 있기에 사적으로 내부자거래가 성행하면 직업윤리 내지는 컴플라이언스(규율)가 무너지기 때문에 가족 및 친인척의 증권거래, 부동산거래 등이 상시 감시당하는 대신 높은 연봉과 쏠쏠한 성과급으로 입을 틀어막는 것이다. 이런 규율은 오늘날 공직사회에서도 청탁금지법 등의 여러 형태로 존재하지만 공적 영역의 한계상 내부자들의 부패를 틀어막기에는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은데, 이 폐단이 쌓이고 쌓이면 한국토지주택공사 직원 부동산 투기 사건 같은 일이 터진다. 근세 중국과 조선에서는 이 폐단을 끝끝내 근절해내지 못했는데, 옹정제는 자신의 치세에나마 이 적폐를 일신하려 노력한 보기드문 동양 군주였다.[70] 옹정제가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해낸 거냐면, 현대 한국의 국회도 특활비가 공개되어 있지 않고, 정보기관은 아예 공개하지 않는 걸 자랑으로 여기며, 오히려 신규 공채에 대놓고 홍보하는 짓거리(즉 우리 기관은 눈 먼 돈 써도 되며 오히려 그걸 권장한다는 의미)를 저질러도, 이를 지적하면 오히려 역으로 공안 몰이를 당한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도 이 지경인데, 이러한 특활비 투명화를 옹정제는 자기 대에서라도 자력으로 해낸 것이다.[71] 강희제도 자신이 근검절약하고, 근검절약하는 청렴한 관리들을 우대하여(고위직 임명과 자신의 내탕금으로 생활 보조 등) 부정부패를 처리하였다. 그러나 중반까지는 그런대로 흘러갔지만, 노년이 되면서 황제의 국정 장악력은 떨어졌고, 황자들이 후계자가 되기 위하여 여러 부정부패들을 자행하였다. 이러한 것들 중에 대표적인 것이 국고의 자금을 관료들이 빌리고서 계속해서 갚지 않는 것이었다. 이는 생활이 어려운 관리들에게 자금을 빌려주고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갚도록 하는 좋은 제도였는데, 문제는 기간이 정해져 있지 않았기에 갚는 것을 계속해서 미뤄버리면서 국고가 비게되었다. 강희제도 나중에 이것을 깨닫고 황4자 옹친왕에게 이 일을 맡겼는데, 그 뿌리가 깊고 거대하였기에 황제가 되고 나서까지도 이와 같은 부정부패 일소에 전력을 다하였다. 잘 알려진 김용의 소설 <녹정기>의 주인공 위소보의 모티브가 된 인물 중 한 명인 위동정이라는 인물도 국고에서 많은 금액을 빌렸는데, 옹친왕에게 혹독하게 당하였다. 그러나 이 사람이 국고에서 빌린 이유는 강희제가 강남에 원행을 갔다가 올 때에 최소금액으로 다녀오면서 총신이던 위동정의 집에 자주 갔었는데, 위동정으로서는 황제에게 극진히 대우하면서 많은 금액을 지출하였다. 강희제는 내무부에 이야기해서 내탕금을 받으라고 했지만, 황제가 집에 오신것으로 이미 황은이 망극하옵니다인데 받을 수 없기에 자신의 이름으로 국고에서 금액을 빌렸다. 이후 이 사실을 들은 강희제는 내탕금으로서 결손부분을 채웠는데,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옹정제는 즉위 후 베이징 밖으로 사적인 순행을 떠난 적은 없다.[72] 그에 반하여 그 아들인 건륭제 때부터는 이런 기강이 와르르 무너져버렸다. 황제 개인까지 뇌물을 받아서 재산을 착복했으니 말 다한 셈이다. 게다가 현대 중국도 민국, 중공 가릴 것 없이 부정부패와 비리가 끊이지 않아서 중국 정부에서 근절 시키려고 많은 노력을 해도 제대로 되지않는 상황이다. 이러니 재위 당시의 옹정제가 보통 위인이 아닌 셈.[73] 이곳이 옹정제의 믿을맨 3총독 중 전문경이 관장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전문경은 이미 강희 때부터 오랫동안 일한 고령의 관료였기에 건강을 많이 해쳐 틈만나면 사직을 청했으나, 옹정제는 전문경의 건강을 내심 걱정하면서도 사직을 끝끝내 허락하지 않다가 희대의 풍작을 일궈내어서야 유종의 미로써 사직을 허락했다. 결국 전문경은 옹정 10년 사직 이후 2년여만에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고, 옹정제는 하남성에 사당을 지어 기리도록 했다.[74] 개정을 안 하고 구제도로 회귀한 데에는 신하들의 불만 또한 크게 작용했다. 허구헌날 신하들을 두들겨패고 가산을 몰수하고 목을 치는 옹정제는 결과적으로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운 성군이었음이 역사적으로 평가가 굳어지고 있지만, 그거야 오늘날 중국사 교과서에 나올 평가일 뿐 당대에 그 밑에서 일하던 신하들의 입장에서는 살 떨리는 폭군의 치세였다. 옹정제에게 신임받은 장정옥, 오르타이 등의 총신들마저 건륭 연간에는 구제도로의 회귀를 추진한 것은, 아버지만큼 범인을 초월한 수준의 근면한 인물이 아니었던 건륭제의 성품 못지 않게 도저히 버틸 수 없다는 관료들의 원성 또한 크게 작용했다.[75] 가깝게는 이러한 관료제도를 만든 명 태조 홍무제에게 죄가 있고, 멀게는 봉건제를 가장 좋은 이상적 사회구조로 여기고 행하려던 유학 자체에서 이러한 문제점의 근원을 찾을 수 있다. 사실 청나라의 대부분의 제도는 명의 것을 이어받았는데, 홍무제는 과거 유랑하던 사람으로 반지식인층 사람에 가까웠다. 이에 금의위라는 감시기구를 통하여서 통제하며, 관료들의 급여도 매우 짜게 주었다. 그런데 이러한 방식이 사실 홍무제가 짜게 주려는 의도가 포함된 것이기는 하지만, 유학에서 이상적으로 생각하던 정부체계가 작은 정부를 지향하면서 생긴 문제이기도 했다. 유학에서 바라보는 가장 이상적 국가였던 주나라는 봉건제를 실시하면서 중앙의 관리 급여는 거의 무급이었다. 이게 가능한 것은 관료가 되는 것이 지방의 제후들로 이미 분봉을 받았고, 따라서 영지내에서 세금을 받는 조치만 취해도 자기 소득이 생겼기때문에 명예와 사회적 지위를 위해서 일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주나라 시대에는 중원에서도 미개척지가 많았기 때문에 관료들에게 토지를 넉넉하게 줄 수 있었지만, 인구가 이때보다 수십배 이상 늘어나고 중원괴 장강 일대가 개척될대로 개척된 명청대에는 시대상황이 완전히 달라졌고, 미개척지를 나눠줄려해도 만주처럼 봉금령이 지정된 지역이나 내몽골, 위구르, 티베트같이 농업생산성이 한참 떨어지고 인구도 적은 동네들이 아니라면 넉넉하게 힘들었다. 이에 지방에 자기 소유의 넉넉한 땅을 소유하고 있는 금수저가 아니고서는 청백리로서 먹고 살려면 고위직이 아닌 이상 힘들었다. 비슷한 제도를 가진 조선왕조 또한 500년 내내 중앙정부는 예산부족에 시달리고 자원봉사에 가까운 관리의 녹봉 때문에 생계형 부정부패가 만연할 수밖에 없었다.[76] 운귀광총독의 관할은 운남, 귀주, 광서 3성이었다. 원래 상설직 총독으로서는 운귀총독이 2개 성을 관장하는 형태였지만, 묘족 반란 평정에서 광서성에 대한 권한 역시 보장해줄 필요가 있었다. 옹정제는 이렇듯 주요 심복을 순무나 총독에 기용할 때 관할 구역을 쪼개거나 합병하여 실무에 최적화하는 일이 잦았다.[77] 유럽 국가들도 금본위제, 은본위제를 택했지만 실제로는 그에 가치를 엮은 지폐를 활용한 것과 같다.[78] 초기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로마 교황 간의 관계를 생각하면 된다.[79] 이전에도 중화제국의 황제와 유목민의 대칸 자리가 겸임된 적은 있었지만 그 때는 적어도 양쪽 자리 중 하나에만 주로 집중한 면이 강하다.[80] 현재 추산으로는 200만냥이다.[81] 심지어 자신이 직접 단약을 제조하고 총신들에게 단약을 나눠주기까지 했다...[82] 아들복은 그럭저럭 있지만 딸복이 없었던 옹정제의 딸 중 유일하게 장성한 딸이다. 강희 51년 7월에 화석군주로 책봉되고, 9월에 오랍나랍 성덕에게 하가. 옹정제 등극 뒤에 화석회각공주로 추봉.[83] 원전은 당나라 장온고가 지은 대보잠. 옹정제는 이 글귀를 대전 양 기둥에 적어 두었다.[84] 청나라 황자들 중에서 이런 식으로 축재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85] 오늘날에도 신강, 창해, 섬서, 감숙 등의 서북 지역은 생산력이 떨어지는 척박한 땅이다. 그나마 오늘날에는 제조업의 원료로 쓰일 천연자원을 바탕으로 가치가 재평가받고 있지만, 옹정제는 공업화가 이뤄지지 않은 농경사회에서 이 동네에 직접 가본 적도 없이 글로만 접하고서 아까운 땅 알뜰하게 활용하자며 농사를 지었으니 배보다 배꼽이 더 커졌을 수밖에...[86] 원래 털어서 먼지 나오지 않는 것이 정치판이다보니 아무리 청백리여도 언젠가는 티가 묻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전문경과 이위는 사적 부정부패와는 별개로 일 하나는 똑소리나게 잘하는 사람들이었고, 어차피 중앙정계에는 황제 외의 연줄도 없어서 지방 순무와 총독으로만 구르던 문관이었기 때문에 연갱요 등과 달리 바쁜 옹정제가 괜히 칼을 들이댈 필요가 없었다. 다만 만주족 총신인 오르타이는 이후 중앙정계로 진출하여 건륭 연간 초기에 중앙정계를 주름잡는 권신으로 성장하고, 옹정제가 신하들을 가혹하게 부려먹으며 만든 체계적이고 빡빡한 조정 규율을 되돌리는 반동을 주도한다.[87] 주세페 카스틸리오네가 그린 나름 의미심장한(건륭제가 강희제와 옹정제 모두가 인정하는 미래의 천자임을 상징하는) 부자간의 초상화인데, 건륭제가 늘그막에 이 그림을 다시 보고는 구석에 먼저 세상을 떠난 카스틸리오네를 그리워하는 감상평을 썼다.[88] 변발을 국시이자 민족 정신으로 규정한 청나라였기에 탈모 따위 무슨 의미가 있었겠냐마는, 아무리 만주족이라도 현실적으로 매일매일 대머리 깎으며 살 것도 아니고 빛나는 스킨헤드보다는 오늘날의 스포츠 머리 내지는 훈련병 머리로 지내는 기간이 당연히 더 많았다. 물론 대청 황제씩이나 되면 중요한 공식석상에서는 금전서미만 남기고 빡빡 민 후 관모를 쓰는 게 정석이었지만, 옹정제는 오덕이었던지라 관모를 쓰지 않은 엉뚱한 차림으로도 많은 초상화가 남았고 그 덕에 M자 탈모의 흔적마저 전해지고 말았다. 사실 변발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청나라에선 대머리도 가짜 변발을 붙여야 했기 때문에 황제가 대머리라면 문제의 소지가 있었을 법도 하다. 단지 옹정제 본인의 절대권력 탓에 같은 청나라 황족이라도 옹정제의 대머리에 대해 함부로 언급하지 못했을 뿐.[89] 조금 애매한 번역이긴 하지만 번역하자면 하인이 주인에게 소인이라고 하는 거라 보면 된다.[90] 기인들은 황제 앞에서 자신을 아하라고 하고, 한인 관료들은 자신을 신(臣)이라고 하였다.[91] 오히려 옹정제의 최측근 가신들 중에는 만인 못지않게 한인도 많았다. 강옹건 3대를 섬긴 장정옥이나 연갱요가 대표적. 또한 전문경이나 이위처럼 진사를 못 따고 연납으로 임용되어 진사 출신자들에게는 낙하산 취급을 받는 한인 부하들도 많았다. 연갱요는 한군기인이었다. 팔기에 편입된 한족도 엄연히 기인 취급을 해 줬기 때문이다. 기인내에서도 만족 몽골 한족 이런 식으로 서열이 존재했고 위에서도 설명되어 있지만, 연갱요 집안은 포의에서 한군으로 편입된 가문이다. 옹정제가 양백기 친왕으로 봉해지면서 연갱요가 그 속인이 되었고, 그 때문에 연갱요의 누이가 옹정제의 측복진이 된 것이다. 이 당시에는 청나라의 귀족이 아니면 궁녀가 될 자격조차 없었다. 상삼기 포의 중에서만 궁녀를 뽑았기 때문이다. 연갱요는 총독이었는데 총독조차 팔기 출신 기인들만 임명을 했다. 그리고 한군기인들도 하층 부류를 제외하면 자신들을 만주인이라고 인식했다. 이 당시 만주인의 정체성은 기인이라는 신분적 정체성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92] 이는 건륭제가 즉위하자마자 도사들을 자금성에서 내쫓은 일이 야사로 이어진 것으로 보기도 한다. 비슷한 예로 건륭제가 즉위하자마자 여유량의 일족을 주멸하고 증정을 포함한 다른 사상적 관련자들까지 목을 날려버린 일과 엮어 여유량의 딸(또는 손녀)가 궁녀로 자금성에 들어와 옹정제를 암살했다는 야사가 생긴 것을 들 수 있다. 사실 이런 야사들은 건륭제의 후속 조치 때문에 더 수상해보이는 지경이다.[93] 평균 수면시간이 위에 나온 것처럼 4시간일 정도로 업무에 몰두했다. 20~30대 한창 나이대의 청년이라도 이러면 건강 해치기 딱 좋은데, 옹정제는 즉위할 때 이미 쉰을 바라볼 시기였다.[94] 문제는 제갈량은 유비와 유선에게 권한을 일임받은 신하이지만 옹정제는 황제라는 점이다. 황제 본인이 제갈량처럼 일을 하면서 유능한 인물이었으니 당대 청나라가 얼마나 융성할 수 있는지 신하들이 얼마나 갈려나갔을지는 예상할 필요가 없다.[95] 다만 잘 하는 부하들은 낯뜨거울 정도로 칭찬했다.[96] 애초에 날아오는 주접이 하루에도 수십 통이기 때문에 남들 다 쓴 내용을 자신만 쓰지 않으면 꼼짝없이 걸릴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97] 전근대 중국은 당팔고주의라 하여 공문에 양식이 있듯 상소문은 기본적으로 장황한 황제 찬양을 깔고 들어가야 했다. 문제는 하루에 주접을 수십통씩 읽고 답장을 해야 하는 옹정제 입장에서는 바빠 죽겠는데 그런 쓰잘데기 없는 사족만 가득하고 본문 내용은 별게 없으면 열이 받을 수 밖에 없는 것.[98] 그냥 아무개도 아니고 옹정제의 삼총신 중 하나인 전문경도 했다![99] 여기까지 보면 조선의 태종, 세종, 정조를 보는듯 하다. 태종은 왕권 강화를 위해 공신들을 숙청한 데다가 신하들 머릿속과 행동양식을 꿰고 앉았던 인물이고, 세종은 과로는 기본에 신하들을 종신노예급으로 부린 인물인 데다가 신하들이 똘똘 뭉쳐 조작 및 은폐 공작한 사건에 대해 글 몇줄 읽고 수상한 점을 찾아낸 인물이며, 정조는 옹정제처럼 관료들을 불신하여 막후정치를 실시하며 수많은 욕설을 후세에 전한 독설가였다. 게다가 세 국왕들 모두 희대의 천재 군주들이었다. 태종은 조선 왕 중 유일한 과거 급제자 관료 출신, 세종과 정조는 희대의 책벌레로 말빨로는 이들을 당할 신하가 없었다. 그나마 태종은 숙청으로 악명높은 이미지와 달리 권력에 위협이 되지 않는 신료들이나 일반 백성들에겐 의외로 자비로운 편이었고, 세종은 능력만 있다면 인격 따위 상관 않고 등용했으며, 정조는 입은 걸걸해도 처벌까지 참혹하게 행하지는 않았음을 생각해 보면, 이들을 모신 신하들은 옹정제의 신하들이 겪은 고통에 비하면 훨씬 편하게 일한 것이다.[100] 조선왕조실록에서 중국에 갔다온 사신들이 경종에게 보고할 때 이런 루머에 대해 언급할만큼 세간에 널리 알려진 소문이었으나, 만몽한 3개 언어로 쓰인 강희제의 유조가 21세기에 공개되면서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101] 이 때문에 오늘날 이 후손들은 중국 행정상에서 만주족으로 분류된다. 단순히 기인의 후예라면 만몽한 불문하고 만주인으로 분류하는 중국의 주먹구구식 행정 탓이라 볼 수도 없는게, 장제스 등의 여러 한족 군벌들을 멀리하고 선통제를 마지막까지 따른 것을 보면 일리가 있다.[102] 바이두 백과에 따르면, 실제로도 악비의 21대손이며 악비의 셋째 아들 악림(岳霖)의 후손이라고 한다.[103] 즉 '황제가 대의(大義)를 통해, 명나라를 옹호하고 대청의 천명을 부정하여 잘못된 길에 든(迷) 증정을 깨우치게 한(覺) 기록(錄)'인 것이다.[104] 애초에 대의각미록은 저 악종기 사건의 주범으로 잡혀온 증정이라는 인물과 옹정제가 중심 인물인데, 이 둘의 토론을 통해 증정이 사상 개조되는 과정을 담은 책이다. 그런데 문제는 건륭제 즉위 이후 증정이 대역죄인으로 모가지가 날아갔다. 그 결과 증정과 옹정제의 토론이 주인 대의각미록도 같이 파묻혔다.[105] 옹정제는 재위 당시 각종 논란과 즉위 초의 재난, 수자원이 부족한 북방에서의 논 개간 정책의 실패 때문에 인기가 없었다. 그래서 여사낭 전설이나 혈적자 같은 부정적인 전설과 야사가 많은 것이다.[106] 속편도 있으며 이 속편은 국내에도 비디오로 출시되었다. 속편에는 장국영 출연.[107] 이점에 있어서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조선왕조 오백년과 비슷하다.[108] 해외 출품명은 군림천하. 한국에서도 이 제목으로 알려졌다.[109] 당국강은 뒷날 강산풍우정에서 홍타이지 역을 맡았다. 1994년 삼국지 드라마에서는 중국사의 또 한명의 과로사의 아이콘인 제갈량 역으로도 호연을 선보였다.[110] 정황기 출신의 이번원 고위 관료로 시베리아를 횡단하며 러시아에 사신으로 갔다오고 캬흐타 조약에 대표로 나서는 등, 대몽과 대러 외교에서 잔뼈가 굵은 청나라의 베테랑 외교관이었지만 드라마에서는 러시아와 외몽골 외교전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지라 옹정제가 신임하는 황궁 시위로만 나왔다.[111] 다만 이 작품에서도 일찍 죽은 첫 적복진 순원황후에게만 일편단심이긴 하다.[112] 국내 방송명은 요리왕 고천보.[113] 전작 〈소림사십팔동인〉에 나왔던 황가달, 전붕, 상관영봉이 그대로 나오고 플롯도 거의 비슷하여 한국에서는 소림사십팔동인 2라고 알려졌다.[114] 이 학살 미수 사건이 누가 반역자고 무고한 양민인지 몰라 일단 죽인다는 것도 아니고, 죄 없는 무고한 양민들을 계속 처형하다 보면 결국 반란분자들이 자수할 것이라는 정신나간 발상으로 저지른 짓이다.[115] 남기남 감독이 찍은 동명의 영화와는 관계없는 홍콩-대만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