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5 23:30:23

제비 이씨



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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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청 황제 · 역대 청의 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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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옹정제의 후궁
제비 | 齊妃
생몰년도 <colbgcolor=#fff,#1f2023>1676년 ~ 1737년 4월 8일(62세)
시호 제비(齊妃)
지위 시첩[1]⇒측복진⇒제(齊)비
이씨
가계 부친 지부 이문엽(李文燁)
부군 옹정제
자녀 황2녀, 황2자, 황3자, 황4자

1. 개요2. 생애3. 미디어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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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나라 세종 옹정제의 후궁이다.

2. 생애

강희 15년 (1676년)에 태어났다. 이씨는 내무부 수녀선발에서 패륵 윤진의 시첩으로 지목되었다. 보통 황자들이 적복진과 측복진과 예식을 치르기 전 성교육 목적으로 시첩부터 먼저 받았는데, 이씨는 무빈 송씨(황장녀, 황3녀의 생모)와 함께 성교육 목적의 시첩이었을 것이라고 추측되고 있다.

강희 34년 (1695년) 7월 6일, 패륵 윤진의 차녀인 화석회각공주를 낳았다. 회각공주는 옹정제의 모든 황녀 중 유일하게 성년이 된 딸이다.

강희 36년 (1697년) 6월 2일, 이씨는 패륵 윤진의 아들인 홍분을 낳았지만, 홍분은 강희 38년 2월 29일에 일찍 요절했다. 강희 39년 8월 8월 7일, 윤진의 둘째 아들인 홍윤 (강희 49년 병사, 향년 11세)을 낳았다.

강희 43년 (1704년) 2월 13일, 패륵 윤진의 3남 홍시를 낳았다. 이씨의 세 아들 중, 홍시만이 성년이 될 때까지 살았고, 옹정제가 즉위할 당시, 희비의 아들 홍력보다 형인 유일한 사람이자, 사실상 옹정제의 서장자였다. 홍시의 어렸을 적 계몽선생이 윤진에게 양백기 기하속인 하청은 홍시의 학업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옹정제는 하청이 입만 놀려 황자의 공부를 다 그르쳤다고 원망했다.

강희 45년, 옥첩에는 이씨에 대한 기록이 「시첩 이씨, 이문엽의 딸」이라는 기록 외에는 거의 없다. 이문엽은 지부의 직함을 달지 않고, 당시 그가 아무런 직함이 없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애신각라종보』에 기록된 이문정의 지부 직함은 옹정제가 친왕의 자리에 오른 후 받은 것일 수 있다.

강희 50년 돈숙황귀비 연씨가 옹친왕의 측복진[2]이 되었는데, 이때 시첩 이씨는 이미 측복진의 신분이었다. 강희 45년 이씨가 일개 3남 1녀를 낳았음에도 그저 시첩의 신분이었던 것과는 대조적이며, 이를 통해 강희 45년에서 49년 사이 측복진으로 진급했음을 알 수 있다.

강희 61년 11월 (1722년)에 남편 윤진이 옹정제로 즉위한다. 옹정 원년 정월 26일 태감 정진충(郑进忠)은 밖으로 나가 자신이 궁궐의 이마마가 파견한 사람이라고 떠들고 다니면서 몇 군데 지역을 가서 사원으로 가 참배를 하며 기도를 올렸고 옹정은 여러번 정진충을 잡으려고 했는데 도주해버려 옹정제는 단단히 화가 났다. 정진충이 제비모자의 사주를 받고 밖에 나가서 그짓을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게 화근이 된다.

옹정 원년 2월 갑인일, 옹정제는 예부에 적복진 오랍나랍씨를 황후로 봉한다고 전했다. 같은 달 갑자일에는 측복진 연씨는 귀비, 측복진 이씨와 격격 뉴호록씨는 비, 격격 송씨와 경씨는 빈으로 봉해졌다. 이씨의 봉호는 제비(齊妃)이다. 내무부는 17일, 제비의 처가 식구인 출기 (기를 고치는 것)를 포의 기적에서 나와 기인으로 승격시키는데 양황, 정백, 양백, 정람 4개의 기 중 하나를 옹정제에게 골라달라고 요청했다. 내무부 대신 아래는 황제의 유지를 잘 따르는 것 외에 세종 상지순좌가 거느린 한가한 이매도 제비의 친정식구로써 이탄의 족속을 기정할 것인지를 일깨워 황제의 회답을 기다렸지만, 옹정제는 포의 기적에서 일반 기인으로 올리는 내무부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주필로 이 대목을 호되게 그었다.

옹정 원년 12월, 나랍씨를 정식으로 황후로 책봉하였다. 측복진 이씨는 같은 날 제비로 정식 책봉되었다. 제비의 지위는 홍력 건륭제의 생모인 희비 뉴호록씨보다 낮다. 제(齊)자의 만문은 "멋있다"와 "염려하다"는 뜻을 갖고있다. 이는 훗날 가경제의 화비가 갖고 있는 봉호의 만문의 의미와 같다.

옹정 2년 (1724년) 겨울, 제비의 아들 홍시는 스승 왕무가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연갱요의 집에서 은 1만냥을 빌려 죗값을 치르게 한 후, 옹정제 5년 (1727년)에 더 많은 잘못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옹정제에 의해 황실 종적이 박탈되고 옥사하였다. 제비는 그의 생모이기도 하지만, 그의 누명을 벗기지 못했다.

옹정 13년 (1735년) 10월, 건륭제 홍력이 즉위하자, 홍시의 황실 종적을 되찾았다. 건륭 2년 (1737년) 4월 1일, 제비는 병이 깊어 오룡정으로 이주했다. 이날 건륭제는 황태후의 의지를 받들어 오룡정을 찾아 제비의 병문안을 했다. 4월 8일, 제비가 병사하자 건륭제는 직접 오룡정 제비의 영구를 안치하기 위해 술을 올렸다.

3. 미디어믹스


[1] 흔히 격격(格格)이라고 칭해지는 존재. 본래 격격은 황실 종친들에게 주로 쓰는 표현이지만, 황실 종친들의 첩 중 일부에 대한 호칭으로도 쓰였다. 이들은 주로 포의 중에서 뽑았으며(궁녀들도 포의 중에서 뽑았다.) 황실 종친들의 적복진과 측복진과는 달리 정식 책봉도 받지 못했고 실질적인 취급은 궁녀와 같았다.[2] 정식 첩. 시첩이 주로 포의에서 선발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적복진 및 측복진은 포의가 아닌 8기에 속한 숙녀들 중에서 뽑았다. 돈숙황귀비 연씨는 한군 양백기 출신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측복진으로 시집올 수 있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제비는 양백기 포의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측복진으로 들어오는 게 아닌 시첩의 신분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