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04 23:18:24

효성인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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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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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강희제의 황후
효성인황후 | 孝誠仁皇后
파일:효성인황후.jpg
출생 1653년 11월 26일
사망 1674년 6월 6일 (향년 21세)
북경 자금성 곤녕궁
(現 베이징시 둥청구 징산첸제4호)
능묘 경릉(景陵)
재위기간 청 황후
1665년 8월 17일 ~ 1674년 6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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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86a><colcolor=#FFD700> 성씨 혁사리(赫舍里)
부모 부친 혁사리 갈포라
배우자 성조 강희제
자녀 승호, 황2자
관저 곤녕궁(坤寧宮)
시호 효성공숙정혜안화숙의각민여천양성인황후
(孝誠恭肅正惠安和淑懿恪敏儷天襄聖仁皇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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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자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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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나라의 제4대 황제 강희제의 첫 번째 황후이자 정실부인이며 만주 정황기(正黃旗) 허서리 할라 출신이다. 강희제의 보정대신 색니(索尼)의 손녀이자 갈포라(褐布剌)의 딸이며 숙부는 색액도(索額圖)이다.

2. 생애

1653년(순치 10년) 11월 26일 출생했다.

1665년(강희 4년) 9월에 입궁하여 강희제와 대례를 치르고 황후에 책봉되었다. 강희제의 할머니 효장문황후는 손자며느리를 기존처럼 몽골부족에서 고르지 않고 수석 보정대신인 색니의 손녀를 선택했다. 효장은 본인이 수렴청정을 하는게 아니라, 강희제가 직접 통치를 하고 보정대신이 보좌하는 방식으로 나아갔기 때문에 보정대신의 손녀가 황후 자리에 적합하다고 본 듯하다. 색니 또한 손녀가 황후가 되었으니, 강희제에게 충성할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 효성인황후는 성격이 유순하고 현명하였으며 남편인 강희제를 성실히 보좌하여 강희제와 시조모인 효장태황태후의 총애를 받았다. 1669년(강희 8년) 아들 승호(承祜)을 낳았으나 불행히도 1672년(강희 11년) 4살에 죽고 만다.

1674년(강희 13년), 다시 임신하여 자신의 소생 중 둘째를 낳았으나 산후병으로 붕어하니 향년 20세였다. 강희제는 책문에 "짐을 돕는 것이 미치지 않은 데가 없었으며, 짐은 그녀로부터 많은 것을 얻었도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렇게 효성인황후를 매우 사랑하였던 강희제는 그 아들을 황태자로 삼으니 이가 애신각라 윤잉(胤礽)이다.

할아버지 색니와, 아버지 갈포라, 숙부 색액도 모두 영시위내대신을 지내며 오랫동안 권세를 누렸지만, 색액도는 본인의 종손자 윤잉을 이용하여 강희제를 시해하고 자신의 세력을 더 늘리려 했다는 이유로 1703년(강희 42년) 사사당한다. 그리고 효성인황후가 죽기 전 낳은 아들 윤잉은 황태자로서 총명하였으나 외종조부 색액도의 꼬드김과 형제들의 괄시로 점차 탈선하여 결국 황태자에서 폐위당하고 말았다.

3. 자녀들

  • 애신각라 승호(承祜) (1669~1672)
    강희제의 차남으로 4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 이밀친왕 애신각라 윤잉 (1674~1724)
    강희제의 7남으로 자질이 뛰어난 황자였으나 두 살 때 황태자로 책봉된 탓에 형제들의 질시를 받았고, 그로 인하여 황제의 자리를 놓고 벌어진 골육상쟁의 가장 큰 희생양이 되었다. 특히 형제들의 질시와 부황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지나친 압박으로 인하여 점점 난폭한 행동을 일삼았다. 그 결과 아버지 강희제는 자신의 아들들 중 가장 총애한 그를 황태자에서 폐위시켰고, 다시 복위시켰으나 또다시 폐위하여 생전 다시는 관작을 회복하지 못하고 연금된 채 생을 마감하는 등, 굴곡진 삶을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