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2. 8.15 광복 이전
2.1. 국내
국내에서는 일제의 극심한 감시로 독립운동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으나, 여운형 주도로 1944년 조선 건국동맹이라는 비밀 결사가 세워져 있었다.이후, 조선총독부 측에서는 엔도 류사쿠 정무총감을 대표로 여운형과 교섭을 시도했으며, 여운형은 일본인의 무사 귀환을 보장하는 대신 5개조 요구를 들어 행정권, 치안권의 이양 등을 약속받았다.[1] 조선총독부는 성급하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여운형의 요구를 사실상 전부 수락했다.[2]
2.2. 국외
제2차 세계 대전 막바지에 들어가던 시기, 추축국 패배가 서서히 다가오자 연합국 측은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3]에서 일본 제국을 해체하고 '적절한 시기에(in due course)' 한국을 독립시키기로 결정했으며, 1945년 7월 포츠담 회담[4]에서 이를 재확인하였다. 이보다 5개월 전인 1945년 2월에는 얄타 회담[5]이 이루어져 독일 항복 이후 2 ~ 3달 안에 소련이 일본 전선에 개입할 것을 약조하였다.한편, 1945년 8월에 들어가면서 일본 제국은 말 그대로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태평양 전쟁을 사실상 정리한 미국은 일본 본토 폭격에 들어갔고 종전을 앞당기기 위해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였다. 한편, 소련은 8월 8일 대일본 선전포고를 하고 파죽지세로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을 점령한 다음 한반도 북부까지 진입했다.[6]
전쟁 말 처절한 혈투를 벌이며 겨우 오키나와 진입에 성공하여 주둔하고 있던 미국은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 지 사흘도 채 되지 않아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을 멸망시키고[7] 한반도 북부로 진입하는 것을 보면서 불안감을 느꼈다.[8]
여기에 소련군이 정해진 곳에서 멈추지 않고, 청진과 함흥을 지나 평양에까지 계속해서 내려오게 되면서 한반도 전체를 소련이 점령하지 않을까 걱정한 미국은 1945년 8월 10일, 한반도 분할론을 소련 측에게 제시하였다. 미국은 한반도를 분할하더라도 반드시 수도인 서울은 포함해야 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마침 서울 북쪽을 지나고 있던 38선을 그 기준으로 삼았다. 미국의 이런 제안에 대해 소련은 생각 외로 이를 흔쾌히 수락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소련이 전쟁을 유럽 지역에서만 하였고 동아시아, 태평양 전역에서 연합국의 승리에 기여한 정도가 매우 적었으므로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발언권이 없다고 생각하여서 이러한 합의가 쉽게 이루어졌다.[9]
미국 입장에서는 소련이 "우리가 먼저 들어와서 다 먹었으니 이거 다 내 거야" 라고 할 줄 알았지만, 반대로 소련 입장에서는 미국이 "우리는 태평양에서부터 일본 아작냈고 니네는 숟가락만 얹었으니 이거 다 내꺼야" 라고 할 줄 알았던 것이다. 따라서 서로의 예상보다 훨씬 양보된 입장을 표명하니 양쪽 모두 놀란 것이다.
3. 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군정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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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군정청#s-|]]번 문단을#!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군정청#|]] 부분을 참고하십시오.4. 미군정의 군사적 상황
원래 남한에 배치될 미군은 당시 오키나와에 주둔하던 스틸웰 육군 대장이 지휘하는 미 육군 제10군이었고 초기 계획에서는 하지 중장의 제24군단(예하 3개 보병사단)을 주력으로 야전군 직할로 공병, 전차, 방공여단, 전투지원 부대, 근무 부대가 배속되어 총합 11만명의 병력이 수송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 병력 계획은 폐지됐고 무려 12번이나 계속 변경되었는데 그만큼 당시의 상황과 변수가 매우 유동적이었고 미군은 최초 계획대로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게 명백했다. 가장 중요했던 3가지의 변수는 해군 선박의 부족, 소련군의 진격 상황, 종전 직후 바로 시작된 미군의 군축이다. 최종적으로는 미군의 선발대가 조선총독부의 항복과 서울을 접수하고 후속 부대가 지방 곳곳으로 배치될 때인 1945년 가을이 돼서야 확정되었는데 이 때쯤 되면 크게 축소되고 많이 달라진다.먼저 남한 군정을 담당할 사령부가 10군에서 24군단으로 격하되었는데 미군 수뇌부에서는 원래 10군에 배속된 각종 부대들을 그대로 24군단으로 전환시켜 크게 증강된 군단급 부대로 기능 유지를 도모하려고 한 듯하다. 그러나 블랙리스트 작전의 진행 과정에서 우선순위에서 밀린건지, 각지의 미군 부대를 싣고 수송할 해군 수송선단의 집결 및 도착이 계속 지연되었고 설상가상으로 만주 지역에서의 소련군의 진격이 매우 빨라서 한반도 전체를 금방 석권할 조짐이 포착되자 미군은 일단 24군단 본부와 일부 직할대(제24군수지원사령부, 제1특별공병여단의 분견대) 휘하 1개 사단(제7사단) 등 2만 5천명의 병력을 1차 제대로 편성하여 9월 4일까지 승선을 완료하고 5일에 출항하여 8일에 인천에 도착했다. 선박의 부족으로 각 부대에 편제된 중무기, 중장비는 대부분 남겨둬서 거의 전부가 사실상 보병 차림이었는데 그들의 장비는 후속 선단이 싣고 올 예정이었다. 그러나 9월 15일 맥아더 원수는 하지에게 무전으로 훈령을 보내어 미국 본토에서 전시 동원의 해제가 진행 중이며 태평양 전구에서 가용한 점령군의 규모를 60만명 이하로 축소시켜야 하는 관점에서 점령 작전의 진행에 중장비의 사용을 최소화하고 장비가 많은 부대를 점령군 부대 목록에서 삭제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하지는 오키나와에서 대기하던 군단 직할부대 중 3개 대공포대대와 1개 포병대대, 1개 전차대대와 제20기갑단 본부를 임시로 헌병 부대로 전환시켜 후발 제대로 남한으로 이동시켰고 떠나기 전에 부대들이 편제했던 중무기, 중장비와 관련 부속, 기자재들은 섬의 창고로 이관시켰다. 그외 다른 3개의 포병대대는 점령군 목록에서 지워졌고 잔여 방공, 기갑, 포병부대의 이동은 취소시켰다. 선발대로 남한에 온 제7사단 포병대는 야포를 가져왔지만 제24군단 포병대는 모든 야포를 오키나와에 두고 왔다.
1차 제대의 주력 부대인 제7사단은 태평양 전쟁에 1943년 4월 해외파병되어 북태평양 알류샨 열도의 에투 섬 전투를 시작으로 1944년 2월과 10월에 각각 마셜 제도의 남부 콰잘린 환초 전투와 필리핀 중부의 레이테 섬 전투(지상전)를 치렀고 1945년 4월 오키나와 전투로 4개의 전역(Campaign)에 참전했다. 전쟁 기간 동안 총합 9,212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매 전투마다 계속 보충되었지만 그럼에도 사단에는 그간의 전투 경험이 누적된 다수의 베테랑 장병들이 많이 포진했다. 대부분의 장교들은 최소 2차례 이상의 전역을 치렀고 사단의 장병들 중 35%(5,200명)는 즉시 제대가 가능했던 전역 점수 85점 이상[10]을 획득한 상태였다. 그들은 제7사단보다 더 뛰어난 부대는 없다고 자부했는데 비록 전후 군축으로 훗날 한국 전쟁 초기의 미 7사단은 많이 열악했지만 이 당시만 해도 베테랑 사단이었다.
1945년 11월 1일경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77,000명으로 가장 최고치였지만 군축의 영향으로 감소하여 1946년 4월경에는 44,000명으로 감소했는데 그 직후 교대 병력의 도착으로 일시적으로 60,000명까지 증가했지만 1947년부터 군정 종료까지 3만명 정도로 유지된다. 상당수의 미군 장병들은 기준에 부합하는 전역 점수와 그에 상응하는 복무 기간을 이미 달성한 상태였고 군에 잔류하려는 극소수를 제외하면 장교[11]와 사병을 가리지 않고 모두들 전역하여 집에 가고 싶어했다.[12] 제7보병사단에서만 점수제의 완화된 기준에 힘입어 1945년 가을부터 1946년 중반까지 최소 7,500명 이상의 사단 장병들이 본국으로 돌아갔고 대부분은 전역했다.
제7사단의 예하 연대(제17, 32, 184보병연대) 중 제184보병연대도 동원해제되어 1946년 1월 20일 제7사단의 부대 서열에서 방출되며 캘리포니아 주 방위군으로 복원갔고 대타로 태평양 전쟁 초기, 1942년 필리핀 방어전의 바탄 전투에서 소멸한 제31보병연대가 재창설되어 제7사단의 3번째 보병연대로 편제되었다. 기존의 184연대원들 중 점수미달 장병은 31연대로 편입되었으며 제31보병연대는 최초 창설부터 미국령 필리핀에 기반을 둔 현지 미군의 정규 전투부대로 필리핀 방어전에서 필리핀 군이 밀릴 때 전선의 소방수 역할을 담당했으나 바탄 전투의 암울한 상황과 맞물려 결국에는 항복했고 부대의 재창설에는 GHQ의 맥아더 원수가 영향력을 발휘했는데 31연대는 훗날 한국 전쟁의 장진호 전투에서 괴멸적 타격을 받게 된다. 제24군단 휘하 사단들 중 먼저 제40사단이 철수했는데 40사단은 남한에 상륙한지 1달만에 전시 동원의 해제 예정을 통보받아 미 본토로 철수하여 원래의 역할이었던 주 방위군 사단으로 캘리포니아 주에 복귀할 예정이었다. 1945년 겨울부터 6, 7사단에 담당 구역을 순차적으로 인계하고 1946년 2월 20일부터 사단 본대의 철수가 예정되었고 사단의 각급 부대에서 인원을 추려서 300명 규모로 사단 후발대가 편성되어 철수 전 행정 작업을 완료하고 3월 중순 철수한다. 그동안 1946년 연초부터 40사단의 장병들 중 전역 점수가 미달되는 장병들은 24군단 휘하의 다른 부대로 내보냈고[13] 점수를 충족되어(45점) 전역을 희망하는 장병들은 일시적으로 사단에 편입되어 미 본토로 가는 철수 행렬에 합류했다.[14]
군사고문단을 제외한 주한 미군정의 전술 부대 중 최후로 철군한 부대는 제5보병연대 전투단으로 연대의 역사를 보면 나폴레옹 전쟁 시기인 1808년 처음 창설된 유서깊은 부대인데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1939~1943년 시기에 파나마 운하 경비대로 주둔하다 미 본토에서 제71보병사단이 신설되면서 휘하 연대로 편제되었다. 연대는 1945년 1월에 유럽 전구로 파병되어 라인란트 전투를 겪었으며 이후 남부 독일과 오스트리아로 진격했고 그 곳에서 종전을 맞이했다. 전후 점령군으로 지내다 군축의 영향으로 1946년 11월에 해산되었다가 1949년 1월 1일에 한국에서 다시 창설되었다. 부대의 기간 장병과 장비는 일본으로 철수하던 제7보병사단에서 추려내어 편성했으며 미 군정의 철수가 진행되는 동안 후위대로 몇 달을 더 주둔했는데 이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요청에 의한 것으로 그는 신생 한국군이 질적으로 향상될 때까지 전쟁 억지력 차원에서 미군이 계속 주둔하기를 바랬지만 미군은 이를 거부하고 대신 내놓은 생색내기적 방안이었다. 제5보병연대는 1949년 6월 30일에 한국을 떠났으며 하와이 주둔군이 되어 지내다 한국 전쟁의 발발로 다시 한국에 오게 된다.
5. 모스크바 3상회의와 신탁통치 오보사건
이후, 1945년 12월 12일, 정부 수립과 이를 위한 신탁통치안이 포함된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안이 전달되면서 남한 지역의 정치판은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타국에게 정치를 맡긴다는 신탁통치안은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는 견딜 만한 것이었을지 모르나 감정적으로는 35년의 식민 통치를 겨우 벗어난 한국 시민들에게 악몽의 재림처럼 다가왔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으니, 이러한 전달이 미국과 소련 측 입장이 뒤바뀌어 전달된 것이다. (신탁통치 오보사건)이후 우익 측(이승만, 김구, 한민당 등)은 반탁 운동에 나서면서 나섰고, 좌익 측(박헌영 등)은 본래 대개 반탁 혹은 중립적 행보를 보였으나 박헌영 등이 소련에 갔다온 이후에는 찬탁으로 선회하였다.[15] 반면 중도 세력 측은 신탁통치안을 보류 혹은 수용하려는 반응을 보이되 한반도 안의 임시정부 수립안에 주목하였다. 그러나 시민의 지지는 우익 측으로 향했으며 좌익 측의 세력은 급격히 축소되었다. 한편 좌우파 대립이 격해지면서 중도파(여운형, 김규식, 안재홍 등)의 세력 또한 위축됐으며, 우익의 대표 인사였던 송진우마저도 신탁통치에 대해 (다른 우익층에 비해 비교적) 호의적인 발언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암살당했다.
한편 임시정부 인사들을 비롯한 우익에서는 신탁통치 문제를 협의하고 미군정 내에서라도 주도권을 잡자는 심산으로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의 설치를 건의하여 1946년 2월, 정식으로 발족한다. 하지만 국민 대다수의 지지를 받던 좌익 계열이 배재되었고 미군정사령관의 자문기관으로 실질적인 권한이 없었다는 점이 큰 한계였다.
6.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와 정읍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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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6년, 제1차 미소공위에 참여한 이승만, 김구, 테렌티 시티코프, 안재홍 (순서대로) |
이후 1946년 3월, 모스크바 3상 회의에 따라 한반도 임시정부를 논의하기 위하여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다. 위원회는 초기에는 그럭저럭 잘 진행되는 듯 보였으나, 참여할 정치 세력을 놓고 미소 양측이 대립하면서 결국 결렬되었다. 소련 측은 3상회의안에 반대하는 반탁 세력은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미국 측은 3상회의 안에서 한반도 세력이 직접 참여하지 못했으므로 이를 들어 한반도 안 정치 세력을 배제할 것을 논하는 것은 옳지 못하고 모든 정치 세력을 포괄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5월에 회의가 결렬되자, 이승만은 1946년 6월 3일 정읍에서 한 연설에서 남한 지역만이라도 독자적인 정치 세력을 구축할 것을 주장하였는데(정읍발언), 이는 사실상의 단독 정부 수립안이었다. 정읍발언은 38선 그어진지 1년이 채 되지 않았을 때 벌어졌기에 엄청난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중도파에서는 협상에 진척이 없다고 하나의 나라를 둘로 쪼개는게 가당키냐 하냐며 매우 분노했다.
7. 9월 총파업과 대구 10.1 사건
사실 미군정은 공식적으로는 정치적 중립을 유지하고 공산당 활동을 합법화하였으나 1946년 초부터 국방경비대, 경찰 등을 창설하거나 강화하며 좌익 측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다.[16] 대표적인 사건이 남한 최대 정당인 조선공산당을 강제해산시킨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었다. 정확한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증거물이 불충분하고 증언이 모순되는 등 판결이 정당했다고 보기 어려웠다. 이 사태로 이관술을 비롯한 지도부들이 체포되었고 위폐 사건의 주범으로 몰린 간부들은 사형 판결을 받았다.이에 대한 반발로 조선공산당은 쟁의 활동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1946년 9월 30일, 부산에서 철도기관사들이 일으킨 파업부터 시작한 9월 총파업이었다. 여기서 경찰의 민간인 발포로 우발적으로 터진 대구 10.1 사건이 겹치게 되었다. 두 사건은 모두 미군정의 잘못된 경제 정책에 대한 불만이 누적된 상태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노동자, 농민들의 강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렇기에 조선공산당은 실력투쟁으로 강력 항의하면 미군정도 협상에 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미군정은 격렬한 항쟁에 더 큰 폭력으로 진압했고 경찰과 정치깡패들의 공격으로 파업은 와해되었고 대구에서 강경 진압으로 참여자들이 수배되어 산악지대에 숨어들며 빨치산으로 전락했다.
8. 좌우합작운동
한편 격화된 좌우 대립과 단독 정부 수립안에 위기감을 느낀 중도 세력은 좌우합작운동을 시작하였으며, 1946년 10월에는 좌우합작 7원칙을 내놓았다.이 당시 좌우합작 7원칙에 대한 여론의 지지는 대단했었으나, 정치적으로는 극좌와 극우 모두에게서 배척받는 중도의 한계점을 보였다. 가령 '무상 / 유상 / 유조건 몰수 → 무상 분배' 안의 경우 우익 측에서는 무상 분배를, 좌익 측에서는 유상 / 유조건 몰수를 반대하였다. 그리고 양측 모두 '돈 주고 사서 돈 없이 배분하면 재정이 파탄난다'는 반대 의견을 냈으며 이 또한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다.
판단은 알아서 해야겠지만, 어쨌거나 좌우익 모두를 수렴하려는 노력이 결국 좌우익 모두의 반발을 받을 수밖에 없었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이러는 동안 미군정 측은 중도 세력과 교섭하여 1946년, 남조선과도입법의원과 남조선과도정부를 세웠다.
9. 입법의원과 남조선과도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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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조선과도정부 南朝鮮過渡政府 | South Korean Interim Government | ||
| 1947년 6월 3일 ~ 1948년 8월 15일 | ||
| 성립 이전 | 이후 | |
| 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군정청 | 이승만 정부 | |
| 군정장관 | <colbgcolor=#fff,#191919>아서 러치 ,/ 제2대 (~1947.9.11.), | |
| 윌리엄 프리시 딘 ,/ 제3대 (1947.10.30.~), | ||
| 민정장관 | 안재홍 | |
1946년 12월에는 민선의원과 관선의원 45명씩으로 구성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이 설치되었는데 이는 일종의 과도기적 국회의 역할을 하였다. 다음 해인 1947년 2월에는 명칭을 남조선과도정부로 바꾸고 한국인 안재홍을 민정장관에 임명하였다.[17]
10.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와 유엔 총회 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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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7년, 제2차 미소공위 당시 사진 오른쪽부터 여운형, 김규식, 이묘목(영어 통역관), 야코프 말리크, 테렌티 시티코프, 허헌 |
1947년 3월,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되면서 이전까지의 정책이 좌익 측에 대해 비우호적일지언정 '민주주의'라는 명분을 지키려 했다면, 이 이후의 정책은 아예 반공 정권을 세우려는 성향이 강해져 좌익 측의 활동은 불법화되었다. 이에 맞춰 좌우합작운동 등에 대한 지원 또한 약해졌다.[18] [19][20] 한편, 1947년 5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다. 제2차 미소공위는 초기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참가단체 선정문제를 놓고 제1차 미소공위 때와 같은 문제를 넘지 못하고 끝내 1947년 10월에 결렬되었다.
때문에, 1947년 10월,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넘겼고, 유엔 총회는 한반도에서 인구비례에 따른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이를 감시하기 위해 1947년 11월 14일 8개국[21]으로 구성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조직되었으며, 감시단은 1948년 1월 한국에 도착했다.
하지만, 소련이 38선 이북 지역에서의 선거를 거부하면서 전 한반도 선거는 무산되었고[22], 위원단 내부에서도 남한만이라도 선거를 진행할지를 두고 의견이 엇갈렸다. 결국 위원단은 자체적으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유엔에 자문을 구했다.
1948년 2월, 유엔 소총회에서는 격렬한 논의 끝에 "가능한 지역에서라도 선거를 감시하라"는 결정을 내린다. 해당 결정을 받아들인 위원단은 논의를 거쳐 5월 선거를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 1947년 서울에서의 좌-우 대립 모습을 찍은 영상 |
김구와 김규식 등은 이에 반발하고 1948년 4월경 남북 회담을 열었으나 이미 북한 단독 정부 수립안을 차근차근 진행해 나가던 김일성 등에게 형식상의 합의를 얻었을 뿐이었으며, 이는 이후 북한의 선전에 이용되는 불행만을 낳았다. 한편 무장 좌익 세력에 의해 제주도에서 제주 4.3 사건이 일어나 총선거를 방해하였고 미군정은 이를 진압했으나, 이에 대한 토벌 작전이 벌어지면서 무고한 민간인이 다수 학살당했다.(한편 여수·순천 10.19 사건이 4.3 사건에 연동하여 벌어지면서 군내 좌익 숙청 작업이 벌어졌다.)
11. 5.10 총선거와 대한민국 정부 수립
남한 지역에서 진행된 5.10 총선거로 제헌 국회가 수립되었는데, 여기에는 김구 세력이나 중도 세력 등이 대거 불참하였다.[23] 남로당 봉기가 일어난 북제주군 2개 지역구를 제외하고 198명이 선출되었다. 이 선거에서는 100석을 공석으로 남겨두었는데, 이는 북한 지역 또한 대한민국의 관할에 있다는 상징성을 위해 남겨둔 것이다. 국회의장에는 이승만, 국회부의장에는 신익희, 김동원이 선출되었다. 같은 해 7월 12일, 제헌 국회는 대한민국 헌법을 제정하고 같은 달 17일에 공포했으며, 7월 20일에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이승만, 부통령으로 이시영을 선출하고 본래 이승만이 맡았던 국회의장직에 신익희를 선출하였다.[24]1948년 8월 15일, 이승만 내각 수립 이후 이름만 남아있던 남조선과도정부가 정식 해체되고, 공식적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하였다. 이에 미군정은 행정, 입법, 사법, 외교권 등의 각종 권한들을 대한민국으로 이양하여 해산되었으며, 남아있던 미군정 관리하의 토지와 공장 등 적산 또한 대한민국 정부 소유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군정장관인 찰스 핼믹은 1949년 1월 11일까지 군정장관으로 재임했고, 6월까지 정치, 군사고문을 맡았다.[25]
이 무렵 김구와 이승만은 정부 수립 문제로 대립했는데 김구는 남북 공동 정부를, 이승만은 남한 단독 정부를 수립하자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김구는 남북 단일 정부를 수립하려고 끝없이 이승만과 김일성을 설득했으나 둘 다 거절했는데 김일성은 이오시프 스탈린보다 훨씬 과격하고 난폭한 성격의 소유자였는지라 김구의 설득을 듣기조차 싫어했으며 오히려 힘으로 부수고 남북 적화 정부를 수립할 생각을 소련군정이 들어설 때부터 갖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김일성이 암살 등으로 죽어야만 남북 공동 정부 수립의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었다. 그래도 김구는 악착같이 매달려서 어떻게든 김일성을 설득해보려고 했다.
[1] 여기에 송진우 선 교섭설이 존재하나, 신빙성을 놓고 말이 많다. '한국현대사 박사 1호' 연구자인 서중석은 '총독부의 송진우 접촉까지는 사실이나, 이는 명백히 여운형의 경우와는 다른 하급 수준의 것이었으며, 송진우가 총독부의 정권담당의뢰 또는 치안담당의뢰를 거절했다는 설은 한민당 측에서 자신들의 일제시기 행위를 은폐하고 건준과 여운형을 공격하기 위한 수단으로 집요하게 주장했다'고 규정지었다.[2] 일례로 정치범 석방의 경우 엔도 정무총감은 최소한 연합군이 행정권을 이양한 뒤에 이행할 것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고(같은 시기 일본은 10월 GHQ의 인권 지령에 의거하여 치안유지법이 철폐될 때까지 정치범과 사상범이 그대로 수감되어 있었다.) 결국 여운형의 안대로 즉시 석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포츠담 선언 수락에 관하여 조선총독부에는 어떠한 훈령도 내려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는 당연히 이미 함경북도에서 조선주차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던 소련군이 결국 한반도 전체를 접수할 줄 알고 급하게 신변이나마 보장받고자 했던 것. 같은 시기 이미 점령당한 만주국의 일본인들은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물론 조선총독부가 자기 발등을 찍었다는 사실을 안 것은 일본이 항복하고 난 뒤였다.[3] 미국, 영국, 중화민국 참여[4] 미국, 영국, 소련 참여[5] 미국, 영국, 소련 참여[6] 원래부터 소련군의 일본군 무장해제 지역에 두만강 하류의 함북지역이 포함되어 있었다.[7] 만주 전략 공세 작전[8] 미국 측도 태평양 전쟁을 조기에 끝내면서 미군의 피해를 경감시키는 효과를 누리고자 소련의 참전을 요구하였던 것인데 현실은 일본의 마지막 카드였던 만주의 관동군은 이미 규모만 컸지 종이호랑이였으며,[26] 이 때문에 소련군은 만주에서 고전하긴커녕 많은 물자들이 소련의 전리품으로 그냥 넘어가게 되었다.[9] 참고로 이 제안을 소련에서 불복할 시에는 37도선까지로 합의를 보려고 했다는 기밀 문서의 내용도 존재한다. 북위 37도선은 아산만부터 울진 앞바다까지를 가른다. 즉, 서울특별시를 포함한 경기도와 강원도 전 지역이 소련 치하에 들어가는 것이다.[10] 2차대전에서 해외파병된 미군들은 점수제를 통해 전후 순차 전역하는데, 각종 복무 요소(복무기간, 해외파병기간, 훈장획득개수, 전역참가횟수 등)를 점수로 계량화하여 특정 점수를 획득한 장병을 제대시켜주는 것이었다. 종전까지는 전역 기준 점수는 대개 85점이었으나 전후 기준을 낮춰서 1945년 연말에는 일반적으로 장교와 사병은 각각 70, 50점과 또는 공통으로 복무 기간이 4년이면 귀향할 수 있었고 미국의 전시동원체제가 최종 해제된 1947년 6월까지 이 제도에 의한 소집 해제와 전역이 계속된다. 제7사단의 경우, 오키나와 전투 도중 5월에 사단의 최초 점수 획득자들이 본토로 돌아갔고 전투 종료 후 6~8월에 2번째 행렬, 사단이 남한에 진주하면서 1945년 겨울부터 1946년 가을까지 다시 전역 장병의 전출 행렬이 이어진다.[11] 확인된 사례로는 소령 계급 이하의 장교들이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했다. 배경상으로는 전쟁 전에는 생업이 있던 민간인이었고 전시임관으로 참전했던 이들이 대다수였던 집단이어서 그런 듯하다. 물론 중-대령과 장성들도 전후 전역을 택한 자들이 적지 않게 있었으나 본래 직업군인들 출신들이 많아 상대적으로 적기는 하다. 전역이 결정된 장교들은 그들의 최후 보직에서 이임되어 개별적으로는 미국 본토로 복귀하는 장병 행렬에 편입되어 일시적으로 각급 인솔자가 되어 본토에서 전역 절차를 밟을 때까지 사병들을 관리했고 함께 전역했다.[12] 최근 기록으로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45년 하반기에 전세계 곳곳에 파병되고 구 추축국의 점령군으로 있던 연합군 장병들(미국, 영국, 호주)의 일부가 연달아 시위를 일으키는 일련의 사건이 있었다. 각국의 국민 여론도 이에 호응해서 전시 동원을 빨리 해제하라고 정계에 압력을 가했고 그 영향으로 군축의 속도가 빨라진 점이 있다. 미군은 이에 점수제를 개편, 전역 기준을 낮춰갔고 46년 시점에선 파병기한을 최소 15개월을 채운 장병들이 (이들의 경우, 파병시작시점이 빨라도 44년 연말이며 전쟁 중 대규모 작전을 고작 1번 겪고 전쟁이 끝남) 기록상으론 46년 여름까지 전역했고, 전쟁 끝 시점에 배치된 전투경험이 아예 없는 보충 징집병도 47년에 전역했다.[13] 이것은 전후 해외 점령군으로 주둔 중인 미군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된 인사 정책으로 현지에서 미국으로 돌아가는 부대엔 부대 자체의 점수 고득점자 + 타 부대들의 고득점자들로 정원을 맞춰 귀국시켰고 점수가 낮은 장병들은 기존 부대에서 방출돼 점령군으로 잔류하는 부대에 남아서 점수를 마저 채우고 귀국하는 식으로 병력 및 부대 구조조정을 감행했다. 점령군의 많은 부대들은 현지에서 해산했고 부대 귀국 스케줄이 안맞을 땐 각지의 전역예정자이 특정 항구에 모여 귀국행 선박을 기다렸다.[14] 주일미군의 경우, 제43보병사단 (뉴잉글랜드 주방위군) 이 45년 9월에 가장 먼저 귀국하는데 사단은 필리핀에서 점령군으로 9/13에 요코하마에 상륙했고 불과 2주가 지난 9/28에 일본을 출항, 미국으로 항해한다. 귀국 준비 당시에 사단엔 주일미군의 온갖 부대에서 가장 점수가 높았던 장병들이 전입왔다. 다른 예로 점령군으로 잔류해 6.25전쟁에 참전한 제1기병사단은 45년 7월부터 47년 여름까지 사단을 거쳐 미국으로 돌아간 연 인원이 3만명을 넘었는데, 이 중 점수저점자의 비율이 많았을 것이다.[15] 여기에 존스턴의 왜곡보도도 커다란 한몫을 했다.#[16] 국립 경찰을 강화하는 부분은 좌익 측뿐만 아니라 민심에도 상당히 부정적인 여론을 초래시켰다.[17]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미국인 군정장관이 우위에 있었다.[18] 동북아에 대한 미국의 정책 또한 뒤바뀌게 되었다.(정책의 역전, Reverse Course)[19] 또한, 이 트루먼 독트린을 바탕으로 미국에서는 매카시즘 열풍이 불게 된다. 그리고, 이는 한반도뿐만이 아닌 일본 GHQ에서도 상당히 영향을 미쳤다. 일본GHQ의 '레드퍼지'(특히 역코스 정책) 이전까지가 일본의 사회주의자들의 활동이 왕성했던 시기였다.[20] 한편 한반도 북부에서는 1946년 초부터 북조선인민위원회 주도의 토지 무상몰수, 무상분배, 산업 국유화 등 '반제 반봉건 민주주의 혁명'을 위한 정책으로 인해 많은 월남민들이 발생하였다. 이들은 비록 북한에서는 공산주의와의 연관성은 부인했으나 공산당이라는 이름을 내건 사람들이 이 정책을 주도하고 우익을 우선적인 숙청 표적으로 삼았기에 대개 공산주의에 대한 반발 심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때문에 서북청년단 등의 정치 세력 등으로 연결되기도 하였다.[21] 호주, 캐나다, 중국, 엘살바도르, 프랑스, 인도, 필리핀, 시리아[22] 인구 비례에 따른 의석 수 배정에 반대했기 때문이다.[23] 이는 당대에는 신념에 따른 일종의 보이콧이었을지 모르겠으나 제헌 국회가 이승만을 위시로 한 대한독립촉성국민회과 한국민주당 위주로 편중되는 결과를 낳았다. 다만 이들은 제2대 국회에서 참여했고 중도파가 한국 정치에서 사라진 것은 6.25 전쟁 중 상당수 납치되었고 반공분위기가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제헌 국회에서 중도파의 보이콧이 가장 큰 문제를 일으킨 것은 반민특위 해체와 국회 프락치 사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것이다.[24] 본래 신익희가 맡았던 부의장직은 김약수가 선출되었다.[25] 이 문제는 제헌국회 내에서 큰 갈등을 야기했다. 임정 계열과 소장파 의원들은 당초 유엔총회 결정대로 미군이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승만계와 한민당 의원들은 미군이 주둔해야 남한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소수의 소장파 의원들이 미군철수결의안을 발의하고 이에 맞서 다수의 보수파 의원들이 미군 주둔 찬성 결의안을 통과시키는 등 이런 갈등은 1950년 초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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