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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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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B0000><colcolor=#ece5b6>
손오 초대 황제
손권 | 孫權
파일:손중모.jpg
출생 182년 12월 22일
후한 양주 오군 부춘현
(現 저장성 항저우시 푸양구)
즉위 229년 5월 17일
조위 형주 무창군 무창현 남교
(現 후베이성 어저우시)
사망 252년 5월 21일 (향년 69세)
손오 양주 단양군 건업
(現 장쑤성 난징시)
능묘 장릉(蔣陵)
재임기간 후한의 장군
200년 ~ 220년[1]
재위기간 후한의 남창후
219년 12월~ 221년 11월
조위의 오왕
221년 11월 ~ 229년 5월 14일
손오의 황제
229년 5월 17일 ~ 252년 5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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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B0000><colcolor=#ece5b6> 본관 부춘 손씨
권(權)
부모 부황 시조 무열제
모후 무열황후
형제자매 5남 3녀 중 차남
배우자 정실 사부인, 서부인, 보황후, 반황후
후궁 대의황후, 경회황후
자녀 7남 4녀
신장 180cm[2]
중모(仲謀)
종교 불교
작호 남창후(南昌侯) → 오왕(吳王)
묘호 태조(太祖)
시호 대황제(大皇帝)
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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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무(黃武, 222년 ~ 229년)[3]
황룡(黃龍, 229년 ~ 232년)
가화(嘉禾, 232년 ~ 238년)
적오(赤烏, 238년 ~ 251년)
태원(太元, 251년 ~ 252년)
신봉(神鳳, 252년 ~ 25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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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시호3. 외모4. 생애5. 평가6. 가족 관계7. 기타8. 대중매체에서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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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삼국시대 삼국의 하나인 손오창업군주. 손견의 차남이자 손책동생으로, 자는 중모(仲謀)다.

삼국시대에 벌어진 거의 대부분의 사건이 일어날 때 생존하였던 군주로, 손권이 죽은 지 불과 11년 후 촉한멸망하면서 삼국 체제가 무너졌고, 28년 후 손권이 건국한 오나라가 멸망하면서 삼국이 통일되었다. 더군다나 관도대전 와중인 200년 5월부터 오의 지배자가 되었으니 자그마치 반세기 가량을 지도자로 군림한 셈이다. 덕분에 생몰년 하나만 따지면 가장 삼국지주인공에 부합하는 인물이지만, 말년에 여러가지 실책을 저질렀기에[4] 손권을 삼국시대의 진주인공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5] 그래서인지 안 그래도 비중이 가장 낮은데 인기도 더욱 없다. 여러 창작물에서도, 독자들의 인식으로도 유비, 조조와 다르게 손권은 어디까지나 서브 주인공 자리를 차지하며 전체적인 삼국지 팬덤의 여론도 손권에게 취급이 박한 편이다. 게다가 아버지요절한 바람에 손권의 비중 부족은 삼국지에서 의 비중이 보다 현저하게 적은 문제를 낳는다. 다만 저지른 실책과 별개로 조조, 유비와 더불어 천하의 한 축을 차지했던 삼국시대군주였던만큼 손권이 강남에서 이룬 업적 자체는 상당하다. 그는 재위 시절에 안휘호남을 비롯한 각 지방의 산월 소수 민족과 그 밖의 이민족들을 토벌하고 대만해남도 방면에 원정군을 보냈으며, 동연과 접촉을 시도하는 등 국내 • 외 경영에 노력한 군주였다. 또한 손권은 후반에 촉나라와 동맹을 맺되 위나라와 촉나라의 싸움에 웬만하면 참가하지 않으려 했고, 덕분에 오나라는 그의 재위 시절 삼국 가운데 가장 안정적인 사회를 유지했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던 말년의 큰 실책들과 비중 탓에 조조 이상으로 호불호가 심하게 갈리는 인물이기도 하다.

2. 시호

시호로서는 안 쓰이는 글자고, 흔히 대황제라고 하면 시호가 아니라 단순히 황제를 더 높여 부르는 보통명사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 시호는 유교적 예법을 따졌을 때 제대로 지은 시호라고 보기 힘들다. 그래서 '대황제'라는 시호는 후대에 오나라가 기본적인 예절도 모르는 촌동네라고 비난당하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실제로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위나라를 정통으로 보아 조조를 무제(武帝), 조비를 문제(文帝), 조예를 명제(明帝) 등으로 호칭했고, 자기가 한때 섬겼던 촉한은 유비, 유선을 각각 선주(先主), 후주(後主)로 어느 정도 권위있게 존중해서 표현했다.

반면 오나라의 경우 손권은 오주(吳主)전, 이후의 황제들은 삼사주전으로 일괄처리했고, 손견, 손책도 추숭된 시호를 부르지 않고 다 생전 관직인 '파로토역'으로 전을 처리한 걸로 봐선 아무래도 손권만 특별 대우를 받은 듯 싶다.

그러나 막상 내용으로 들어가면 촉서 선주전에서는 "선주의 성은 유, 휘는 비, 자는 현덕이다."라고 소개하고[6] 유비를 계속 선주라고 부르는 반면, 오주전(손권전)은 그냥 다짜고짜 "손권은 자가 중모이다."로 시작한 이후 그냥 계속 손권이라고 부르고 있다.

3. 외모

적벽가에는 손권의 풍모를 벽안자염(碧眼紫髥)이라고 묘사하는데, 그의 눈이 푸른빛이었다는 것은 연의의 창작이며 자색수염은 헌제춘추의 기록이다. 참고로 중국 고서에서 눈이 푸르다(碧眼)고 하는 것은 서양인처럼 진짜 홍채가 파란 것이 아니라 잡티가 없고 붉거나 누런기가 없이 깨끗한 흰자위를 푸른빛이 돈다고 빗대 표현하는 것이다. 자색 역시 붉은색을 뜻하는 표현. 인간은 염색을 한 게 아닌 이상 보라색 털은 자연적으로 발생하지 않는다. 한문에서는 진한 흑발을 녹발, 햇볕에 비추면 색이 붉게 비춰보이는 옅은 흑발을 자색이라고 빗댓기 때문에 실제 손권 역시 옅은 흑발이었을 것이다. 벽안자염이란 표현은 풍채가 당당한 사람의 모습을 표현한 말로 이해해야한다.

태평어람에 나오는 원희지(袁希之)의 <한표전(漢表傳)> 기록에 따르면 손견이 하비승일 때 손권이 태어났는데 턱은 네모나고 입이 크고 눈빛이 반짝반짝해서 손견이 기이하게 여기고 귀한 상이라 했다고 한다. 그 외에 상체는 길고 하체는 짦았다는 <헌제춘추>의 기록과 턱은 네모나고 입은 크고 눈의 총기가 남달랐다는 <강표전>의 기록이 남아있다. 손권의 풍모를 두고 설화나 연의에서 '벽안'을 강조하며 눈빛의 기이함을 강조한 것은 이런 손권의 눈빛이 남다르게 빛나고 총기가 있어 기이하다는 기록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건강실록에서 인용한 강표전에 묘사된 손권의 외모는 넓은 이마를 가졌다고 쓰여 있다. 그의 아버지인 손견의 미추에 대한 자세한 묘사는 없으나, 그의 외모는 평범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보아 손권의 생김새는 이국적인 모습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여지가 있다. 형 손책은 특이한 외모에 대한 언급은 없고 대단한 미남이라고만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그의 어머니 쪽의 영향이 컸을지도 모른다. 그 외 후대 인물 환온의 평가 중에서는 환온의 눈은 자주빛 석릉(石棱, 자수정의 모서리) 같고, 수염은 고슴도치의 털이 빳빳하게 선 듯하며 어렸을적부터 기골이 남달라 사마의와 손권의 풍모와 비견된다는 기록이 있는데 사마의도 꽤나 풍채가 좋은 인물이었기에 손권 역시 남자답고 풍채가 좋은 인물이었다고 볼 여지가 있다. 손권이 기이한 눈빛을 가진것과 똑같이 환온의 눈빛이 기이하다는 표현도 닮은 면이 있는데 손권이나 환온이나 후대 사람의 기록에 남을 만큼 눈빛이 대단히 특이한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파일:손권.jpg

파일:external/i3.ce.cn/W020100703475471729418.jpg

주연의 무덤에서 황제의 연회를 묘사한 그림이 하나 발굴되었는데, 만약 이 그림에 그려진 황제가 손권이라면[7], 삼국시대의 인물들 가운데 유일하게 당대에 그린 초상화가 남아있는 셈이다.[8] 아마 가운데 있는 인물인 듯 한데 실제로 상당히 이국적이다.

손권의 신체적 특징도 상기한 <헌제춘추>에도 기록되었는데, 장료합비에서 손권을 격파 후 항복한 오나라 장수들에게 "오나라 퇴각 후미에 남아서 싸운 장수가 자줏빛 수염에 상체가 길고 하체는 짧은데, 말을 잘 타고 궁술에 능했소. 그 장수는 누구요?"라고 묻자 그들이 "그 사람이 손회계(손권)입니다."라고 대답해 악진과 서로 멍하니 바라보다 뒤늦게 쫓았지만 잡을 수 없었다고 나온다.

4.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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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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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가족 관계

7. 기타

  • 손권은 죽은 뒤 장릉에 묻혔다. 이곳은 당시 남경(南京, 난징시)의 종산(鐘山)을 가리킨다. 그는 자신의 할아버지 손종(孫鐘)의 이름자를 피해 종산을 장산(蔣山)으로 바꾸고 자신의 무덤을 장릉이라 했다. 명말청초의 문인 장대(張岱)의 저서 도암몽억(陶庵夢憶)에 따르면 훗날 명 태조(明太祖) 주원장이 종산에 자신의 무덤인 효릉(孝陵)을 만들 때 담당관이 손권의 무덤을 이장하자고 건의했지만 주원장은 "손권은 영웅호한(英雄好漢)이니 그대로 두라, 그를 남겨두어 문을 지키게 하라"고 했다고 한다. # 때문에 오늘날에도 손권과 주원장의 무덤은 묘역 하나에 같이 있다. 손권의 무덤은 원래 손릉강(孫陵崗)이라 불렸는데, 이곳에 매화가 많기 때문에 1940년대에 매화산(梅花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산에는 그의 부인인 보씨(步氏), 반씨(潘氏) 및 선명태자(宣明太子) 손등 등이 함께 묻혀 있다. 매화산은 자금산(紫金山)의 일부로, 자금산에는 손권, 주원장, 쑨원의 무덤이 있다. 주원장의 명효릉과 쑨원의 중산릉, 손권의 장릉은 같은 구역에 있는 셈이다.# 일단 해당인들의 무덤은 묘자리가 명당이라고 하여 풍수지리설에 따른 배치라고 한다.#

파일:손권묘_ama217.jpg
파일:손권동상.jpg
파일:손권묘유지_안내판.jpg
  • 손권의 무덤 터 근처에 조성되어 있는 손권의 상. 유비의 무덤을 생각하면 좀 쓸쓸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유비의 무덤은 혜릉이라 칭하며 한소열묘(廟: 제왕의 사당)와 함께 아직도 보존되어 있지만, 위 사진 속 안내판을 보면 손권의 무덤은 능으로도 취급 안하고 그냥 손권이라는 성명과 함께 '묘(墓: 일반 무덤)'라고 부르고 있으며, 그나마 무덤 자체의 위치도 유실되었는지 손권묘유지(遺址, 옛 자취가 남아 있는 터)라고 공지하고 있다. 현재 비석만 남아 있고, 2006년 조사 당시 인근 지하에서 '갑(甲)'자 형태의 인공 구조물을 확인하기는 했다고 하나 발굴하지는 않은듯 하다.#
  • 삼국지연의에서는 정사와는 이미지가 꽤 다르다. 술을 좋아하고 무예를 즐겼던 호탕인 이미지는 거의 없으며 아버지나 형과는 큰 차이가 있는 맹장형보다는 견실한 타입의 군주로 묘사된다. 술을 좋아해 자주 문제를 일으켰던 내용도 연의에선 죄다 애꿎은 장비에게로 옮겨갔다. 그래도 합비 대전에서 장료가 도발해오자 몸소 창을 들고 싸우려는 대목이 있다. 이 점에서 손책에 못지않은 장재가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정확히는 신하들이 경솔하다며 주의하고 손권도 이를 수긍해 반성하는 대목이라 장군보다는 군주로서의 이미지가 강하다. 그러나 작중에서 툭하면 결정을 미루다가 주유나 장소 같은 책사들의 의견을 따르는 등 우유부단하게 구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손권 나오는 장면을 보다보면 '손권이 대답을 않고 있는데~'라는 대목이 진짜 많이 나온다. 아예 들을 줄은 아는 원소라고 봐도 못지않다. 그러다보니 개성이 강한 유비와 조조는 물론이고, 자기보다 출연이 적은 형 손책보다도 인기가 떨어지는 편이다. 그래도 제갈량과 장소를 비롯한 손오 신하 일당들과의 설전을 판정하며 칼로 책상을 내리치는 씬은 살려놔서, 결단력이 아예 없지는 않은 것으로 묘사한다. 그래도 전체적으로는 수혜를 받은 편. 젊은 나이에 수성의 달인으로 불리는 것은 우유부단하다는 소리를 들을지언정 앞의 두 영웅(유비, 조조)에 비해 '젊은 나이에 한 나라의 운명을 짊어진 책임감 있는 군주'라는 이미지를 확실하게 가져간 편이다.[10] 또한 위연의 됨됨이를 알아보는 등 통찰력도 나름대로 있고, 조조의 '세 개의 해' 꿈 이야기 등의 일화를 통해 유비와 조조에 꿇리지 않도록 비중을 확실히 줬다. 게다가 이궁지쟁이라는 손권의 대표적 흑역사 중 하나는 아예 언급도 안 됐다.
  • 흔히 손권이라고 하면 삼국지에서의 이미지만 떠올리지만 중국 강남 불교사에서 나름대로 중요한 역할을 한 지도자이다. 그는 일찍이 한나라 말 중원의 난리를 피해 강동으로 이주한 서역승 지겸을 후원해 불경을 번역할 수 있도록 도왔고, 강승회의 영향을 받아 불교를 숭배하여 강남에 건초사(난징시), 보은사(쑤저우시), 용화사(상하이시), 감로사(전장시)[11] 등을 지었다. 보은사는 적오 연간에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어졌고, 강승회의 설득을 통해 불교에 귀의한 기념으로 적오 10년(247년)에 건초사를 지었다. 용화사는 적오 5년(242년)에 부처의 사리를 모시기 위해 지어졌다. 이로 인해 중국의 강남 지역에 불교가 전파되기 시작했다.출처
  • 진나라 최표가 지은 고금주에 기록되기를 손권은 여섯 자루의 보검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하나는 백홍(白虹)이고, 둘은 자전(紫電)이며, 셋은 피사(辟邪)이며, 넷은 유성(流星), 다섯은 청명(靑冥), 여섯은 백리(百里)이다.
  •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신라의 유명한 문장가 최치원이 지은 토황소격문에 짤막하게 등장한다. 최치원의 당나라 유학시절 주군이었던 회남절도사 고병의 군세가 "손권이 후위를 맡고 두예가 선봉을 선 것과 같다" 라고 묘사한 것. 삼국지연의 이전의 손권에 대한 평가에 대해 알 수 있는 부분으로 이미 이때(9세기 말)부터 "수성형 장군"의 대명사로 쓰였다.
  • 삼국의 황제들 중에서 제일 장수했다. 반대로 제일 단명한 황제는 아들인 손량이다.

8.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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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둘러보기

오서(吳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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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견 ,주준, · 손책 손권 ,호주 정천 풍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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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량 · 손휴 ,이형, · 손호 ,장제, 유요 ,착융 유기, · 태사자 · 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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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토로장군 200년 ~ 209년
거기장군 209년 ~ 219년
표기장군 219년 ~ 220년
[2] 키가 7척 6촌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당시 척단위인 23.7cm로 계산하면 180cm가 나온다.[3] 독자 연호를 선포하기 이전에는 후한과 위의 연호를 사용했다. 참고로 손권이 황무라는 연호를 썼을 때는 손권이 아직 황제를 칭하기 전이다. 본래 연호는 천자가 선포하는 것이니, 독자 연호를 선포한다는 것은 향후 적절한 시기에 위나라에 대한 신종(臣從)을 철회하고 스스로 황제가 될 것이라는 신호를 보낸 셈이다. 더불어 222년에는 조비가 태자 손등을 인질로 보내라는 요구를 해오자, 손권이 이를 거부하여 위나라와 오나라가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었다. 손권이 명목상 위나라의 신하를 칭하면서도 독자적인 연호를 선포한 것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기인하는 것이다.[4] 이궁지쟁, 합비 공방전, 동연.[5] 사실 흔히 묻히는 삼국지 후반부의 주인공으로서는 손권이 가장 적합한 인물이기는 하다. 실제로 손권이 망가지는 것도 이 시기이니 그동안 뿌려놨던 떡밥을 회수하기도 좋은 시점이다.[6] 라는 말은 일단 황제급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말.[7] 주연이 모신 황제는 손권밖에 없다. 손권 시대에 활동하여 손권이 죽기 2년 전에 사망했기 때문이다.[8] 위의 초상화(역대제왕도권)는 실제 손권을 보고 그린 것이 아니라 당나라 시기에 손권을 추정해서 그린 것이다.[9] 손익의 아내다.[10] 길게 보면 위촉오 셋 중에 오나라가 가장 간을 보면서(?) 오래 살아남다가 멸망하는 후반부 전개를 염두에 뒀을 수도 있다.[11] 삼국지연의에서 손권과 유비가 칼질로 만들었다는 십자문석으로 유명한 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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