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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권/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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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초반(182~200)
1.1. 손견 시절1.2. 손책 시절
2. 오주 등극(200~208)
2.1. 형의 뒤를 이어2.2. 토로 장군이 되다2.3. 인재 등용2.4. 반란자들2.5. 조조의 인질 요구2.6. 황조와 반란군 진압2.7. 손익의 죽음2.8. 줄초상과 불안한 입지2.9. 감녕 등용과 황조 척살
2.9.1. 이것이 손권의 최초의 승리?
3. 천하의 한 축으로 서다(208~221)
3.1. 적벽대전3.2. 형주 점령과 1차 합비 공방전3.3. 교주의 사섭 복속3.4. 1차 유수구 전투3.5. 환성 정벌(2차 유수구 전투)3.6. 익양 대치3.7. 2차 합비 공방전3.8. 세 번째 유수구3.9. 노숙의 죽음3.10. 형주 정벌과 관우 처형3.11. 조조의 사망
4. 오왕 손권(221 ~ 229)
4.1. 위에 칭신하다4.2. 이릉대전4.3. 조비의 남정4.4. 위를 버리고 다시 촉과 연합4.5. 광릉 전투4.6. 고옹을 승상으로 임명하다4.7. 2차 광릉 전투4.8. 석양 공격4.9. 사섭 사망4.10. 조타의 묘 도굴4.11. 로마인을 만난 손권4.12. 석정 전투
5. 황제 손권(229 ~ 238)
5.1. 칭제5.2. 실책의 연속5.3. 무릉 문제5.4. 1차 공손연, 고구려 연계5.5. 마지막 연계
6. 말년과 죽음(238 ~ 252)
6.1. 2차 공손연과 고구려6.2. 여일의 참수6.3. 이궁지쟁(242~252)6.4. 붕어6.5. 손권의 죽음에 대한 징조

1. 생애초반(182~200)

1.1. 손견 시절

손권은 182년 음력 11월 11일에 하비승을 지내고 있던 아버지 손견 밑에서 태어났다. 이 당시 손권의 초기 생애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는데 손책이나 손권이나 아버지 손견을 따라서 전장을 누빈 건 삼국지연의나 연의를 기반으로 쓴 2차 창작물 얘기고, 원래 손견은 전장에 가족들을 데리고 나서지 않고, 가족들을 수춘에 살게 했다. 손책이 이 당시 주유와 교우 관계를 맺고, 주유의 추천으로 주유의 고향인 여강군 서현으로 이사하였다. 이런 서현에서의 주유와 손책의 교류는 훗날 손권이 손책의 권력을 계승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양인 전투 당시 손견호진, 여포, 화웅 등이 이끄는 동탁군과 싸워 크게 이기고 화웅의 목을 베었는데 이때 손권의 나이는 10살이었다. 이에 손견을 보고 공포에 질린 동탁은 손견에게 이각을 사신으로 보내서 손견의 아들들 중 10살 이상인 자들을 자사로 천거한다는 조건을 내걸어 화친을 시도하지만 손견이 상을 엎어버렸다. 실제로 동탁의 화친 시도는 결렬되었지만 만약 손견이 동탁의 화친 제의를 수락했더라면 손권은 자신의 형인 손책과 나란히 자사 자리를 얻어 일찌감치 관직 생활을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1.2. 손책 시절

손책이 강남을 재패하던 시절인 196년에 15살의 나이로 양성현의 장으로 임명되는데, 이때 손권이 한 기록 중에 남은 것은 공금횡령. 이 때문에 공조 주곡은 손권의 횡령 사실을 숨기기 위해 장부를 고쳐 적어야 했다.[1]

그후 효렴이 되며 곧 무재로 천거되고 봉의 교위를 겸하게 된다. 손책이 회계를 점령하고 난 뒤 손권은 주태를 보고 꽂혀서 그를 자신의 휘하로 임명해달라고 해서 얻는 데 성공한다.

그 뒤 손책이 6현을 점령하고 있을 때[2] 손권은 천 명도 되지 않는 군사들로 자신을 호위하게 하면서도 오히려 오만한 태도로 자신에 대한 호위를 늘리지 않는다.

도적들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수천 명을 동원하여 손권에게 공격을 가하는데[3] 손권이 말 위에 올라타자, 근접전이 벌어져 칼날이 손권의 말 안장에 적중하기도 할 정도로 위태로운 상황으로 많은 사람들이 혼란에 빠져있을 때 오직 주태만이 분격하여 몸을 날려 손권을 호위하는데[4], 담략과 기개가 남의 배나 되니, 손권의 병사들은 주태를 보고 사기가 올라 전투에 임하였다. 적들이 물러가고 나서 보니, 주태의 몸에는 12곳의 상처가 나 있고, 그 까닭에 주태는 잠시 정신을 잃었다가 잠시 뒤에 깨어났다. 손권으로서는 주태 덕분에 목숨을 건진 것이나 다름 없었으니 손책은 이런 주태를 춘곡현장에 부임시킨다.

199년, 여강에서 유훈을 격파하고 사선, 하구에서 뒤이어 벌어진 황조와의 전투에서 유호, 한희를 죽이고 황역, 황조를 격파하는 공을 세운다. 물론 이 전투는 손책이 직접 지휘했으며 당시 손책 휘하에서 현역으로 이름나 있던 장수들 대부분은 여기에 참전해 공을 세웠다는 기록이 보이기에 결코 손권의 단독 전공으로 보긴 어렵다. 손책의 동생으로 어린 나이에도 일군을 이끌며 참전했다는 의의가 있는 정도다.

200년, 손책이 허공의 식객에 의해 중상을 입어 오늘 내일 하는 상황이 된다. 이때 손권은 19세였다.

아직 한 것도 없으니 평이 있을 리가 없을 것 같지만 중앙에서 손책이 공물도 잘 바치고 예쁘게구니 손책한테 작위나 내리려고 보낸 유완이라는 자가 이 당시 손권에 대해 평을 내린다.
제가 보건대, 손씨 형제는 비록 각기 재능이 출중하고 사리에 통달했을지라도 모두 수명이 길지 못합니다. 오직 둘째 손권만은 모습이 기이하고 특이하며, 골상도 평범하지 않아 크게 귀하게 될 징조가 있으며, 수명 또한 가장 깁니다. 여러분들은 제 말을 기억해 두십시오.

손책은 일단 장소 등을 불러 후사를 손권에게 맡길 생각을 밝힌다. 그런데 장소는 손권의 동생 손익에게 후사를 맡기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손책은 장소에게 손권에게 맡기고 아니다 싶으면 당신이 나라를 맡으시오라고 하며 손권에게 후사를 맡기겠다는 뜻을 확실히 한다.

그후 손책은 손권을 불러 유언을 남기고, 그날 밤이 되자 세상을 떠난다.

2. 오주 등극(200~208)

2.1. 형의 뒤를 이어

손책의 뒤를 이어 손권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우는 것이었다. 이에 장소는 계속해서 통곡을 하는 손권에게 '효렴 이렇게 울고만 있을 때입니까? 그만하십시오!' 라고 일갈하여 손권의 울음을 그치게 한뒤, 옷을 고쳐입게 하고 말에 올라 군대를 순시하도록 한다. 또 동시에 장소 자신은 손권이 손책의 뒤를 이었음을 조정에 알린 다음, 장교들에게 각각 직무를 성실히 수행할 것을 명령한다. 참고로, 계속 울기만 하는 손권을 보다못한 손권의 어머니 무열황후 오씨마저 군사와 행정 관련 일을 도와줄 정도였다. 다행히도 손책의 사망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온 주유 또한 오에 머무르며 장소와 함께 여러 가지 일을 관장해서 일을 처리한다.

이렇게 주유와 장소가 힘을 다해 손권을 보좌하며 당시 손책의 영향권에 있던 각 지역에 손권을 믿고 따르라고 설득하니, 그제야 겨우겨우 손책이 남겨준 회계, 오군, 단양, 예장, 여릉의 땅이 손권에게 복종을 했다고 한다.

2.2. 토로 장군이 되다

이때 조조는 손권이 손책의 뒤를 이은 것을 보고 손권을 공격할 생각을 하나 일단 원소 문제도 있던 데다가 장굉이 남의 상사를 틈타는 것은 바르지 못한 일이며, 또 만일 성공하지 못하면 오히려 원수 사이가 될 뿐이라고 설득하자 조조장굉을 시켜 손권을 토로 장군에 임명한다. 그리고 장굉이 돌아오자 손권의 어머니인 무열황후 오씨가 장굉과 장소를 시켜 손권을 보좌하게 한다. 그리고 무열황후는 뒤이어 동습에게 강동을 어떻게 하면 지킬 수 있는냐고 물어보는데, 이에 동습은 “내정은 장소에게 맡기고 군무에 관한 것은 저와 같은 장수들에게 맡기십시오” 라고 답한다. 이 말을 듣고 주위 사람들은 모두 동습을 장하게 여겼다.

2.3. 인재 등용

누가보기에도 이 당시의 손권은 한심해보이던 상황으로 주유가 어렵게 모셔놓은 노숙조차 유엽의 추천을 듣고 정보라는 자를 따르려고 하니 주유는 이런 노숙을 극구 말리며 손권을 따르라고 한다. 여러 빈객들을 노숙과 함께 만나 본 손권은 노숙을 따로 불러 얘기하는데 여기서 노숙은 유표황조를 쳐서 없애 양자강을 점령한 다음 제왕을 칭하고 천하를 노릴 것을 제시한다. 장소는 노숙이 어리며 거칠고 막된 것을 비난했으나 손권은 듣지 않고 노숙에게 많은 재물을 내려 예전처럼 부유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한다.[5]

또한 여몽이 군무에 재능인 있는 것을 눈여겨 보고 일개 병사 출신인 그를 등용하고 낙통의 의견을 따라 연회를 열 때마다 참석한 인원 각각에게 그들의 생활 및 성장 환경까지 물어가며 인재를 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로 인해 제갈근 등이 손권 밑으로 들어가며 손권은 세력을 키우게 된다.

2.4. 반란자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손권을 못 미더워했다. 특히 손권의 사촌 손보는 손권이 강동 지역을 보존할 수 없을 것이라고 보고 조조에게 편지를 보내 강동을 바치려고 한다. 이를 알아챈 손권은 장소와 함께 손보를 찾아가 행복이 지겹냐면서 돌직구를 날리고 장소를 시켜 편지를 보여주니 손보는 아무 말도 못한다. 손권은 손보 일가[6]와 측근 등을 모두 목을 베고[7] 손보는 유폐시킨다.

비단 이런 뜻을 가지고 있던 것은 손보만이 아니어서 손권이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은 손권의 세력권을 도망쳐서 당시 엄상을 죽이고 승승장구하고 있던 손책의 부하 여강 태수 이술한테 몰려든다. 손권은 이술에게 도망자들을 송환할 것을 요구하지만 이술은 "네가 덕이 없어서 온 것인데 뭔 소리?"라 답을 하며 선전포고. 여강 땅이 조조의 세력권에 가까운 만큼 손권은 우선 조조에게 편지를 보내 조조님이 임명하신 엄상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이술을 친다면서 이술을 도와주지 말 것을 청하고서는 군사를 이끌고 환성을 포위한다. 이술은 조조의 원병을 기다리지만 결국 오지 않고 이술군은 진흙을 말아 먹을 정도로 굶주리게 되자 손권은 그제서야 성을 정복하여 도륙내고 이술을 처형한 다음에 부곡 3만여 명[8]을 옮기며 첫 친정 전투를 승리로 장식한다.

2.5. 조조의 인질 요구

손권이 이렇게 자신의 입지를 닦을 동안 조조는 이미 관도 대전에서 원소를 깨트리고 원소가 죽은 후 뒤를 이은 원담, 원상과 싸우고 있던 상황. 조조는 손권에게 임자[9]를 요구한다. 여기서 장소와 진송 같은 사람은 미적거리면서 결정하지 못하자 손권은 주유를 불러다 자신의 어머니 앞에서 의견을 말하게 한다.

주유는 주나라 성왕 때 초나라의 경우를 예를 들며 지금 우리의 힘이라면 충분히 천하를 노릴 수 있다고 설득하니, 이에 감명받은 무열황후는 주유의 말이 옳다며 인질을 보내지 않게 하고 손권에게 주유를 형으로 섬기게 한다. 하지만 202년 이렇게 국사를 아들 대신 돌보며 손권의 지지기반이 되어주던 손권의 어머니인 무열황후마저 명을 달리 하고 만다.[10]

2.6. 황조와 반란군 진압

203년 손권은 아버지 손견의 원수인 황조가 있는 강하로 쳐들어간다. 이때 능조감녕에게 죽고 서곤이 화살에 맞아 죽는 등 희생이 있었음에도 황조의 수군을 격파하고 강하 성 공성에 들어가지만 황조의 농성에 애를 먹는다. 그리고 때마침 산월족이 공격을 해오고 전국에서 반란이 일어나 손권은 결국 강하 공략을 포기하고 반란군 토벌에 나선다.

이때 얼마나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냐면
지리지 하나 펼치고 위치 찍어보면 거의 손권이 차지한 전역이라 장난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하제의 경우 토벌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있는데 궁금하면 하제를 보도록 하자.

죽은 서곤의 사망 시기가 정확히 이때를 말하는 것인지 207년인지 208년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사서상의 기록으로 볼 때 그 뒤의 기록이 없고 이술 정벌과 같이 기록되었으니 이때의 가망성이 높다는 것 정도다.

2.7. 손익의 죽음

형 손책이 죽은 지 2년 안에 어머니 무열황후마저 죽어버리는데 또 다시 2년도 안 된 204년 이번에는 동생 손익규람, 대원과 공모한 변홍에 의해 주살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거기다가 이 규람과 대원은 손견의 족자 손하마저 죽여버리고 유복과 연계하여 조조에게 땅을 바쳐버리려고 한다.

하지만 죽은 손익의 아내 서씨의 지략으로 규람과 대원을 군사 손실 하나도 없이 척결하는 데 성공했기에 손권은 초구에서 돌아와 잔당만 주멸하고 사촌 형 손유로 하여금 손익을 대신하게 하는 것으로 사태를 끝난다. 돌아오는 길에 손하의 뒤를 이은 손소의 역량을 시험해볼 목적으로 습격하기도 한다. 이렇듯 또 다시 내부의 반란자로 인해 곤욕을 치른 손권은 돌아와서 예전부터 자신을 따르지 않던 심우를 죽인다.

2.8. 줄초상과 불안한 입지

상기한 줄초상 이후 또 하나의 동생 손광 또한 20살에 병사. 이걸로 자신의 동복 형제와 직계가 전멸하고 남은 친족은 어린 나이의 이복 동생 손랑과 조카들. 그리고 백부 손강 쪽과 숙부 손정 쪽의 사람들밖에 없는데 그렇다고 해서 친족들이 손권 편이었냐면 그것도 아니어서 사촌이라는 손보라는 녀석은 조조에게 나라를 바치려고 하질 않나, 안팎으로 반란이 끊이질 않는 상황.

그나마 자신을 주위에서 도와주는 건 장소하고 주유밖에 없는데 주유는 밖에 나가 있고 장소는 손권 대신에 손익을 후사로 세우자고 했던 사람이다. 그나마 주유도 손권이 29살 되던 해에 죽었다. 이런 일신상의 스트레스 때문에 술에 취할 수밖에 없었다는 설이 있다.

2.9. 감녕 등용과 황조 척살

그 후에는 205년에 하제를 시켜 상요를 취하게 하거나 206년에는 주유, 손유와 함께 마와 보에 있는 산적을 쳐서 두 주둔지를 뺏기도 한다. 207년에는 오범이 내년에는 유표가 망할 테니까 참으라고 함에도 불구하고 공격해서 그냥 백성과 관리만 납치 해온다.

그리고 208년 운 좋게도 황조의 부당 대우에 참지 못한 감녕소비의 도움으로 손권군에 항복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런 그를 주유여몽이 적극 추천해서 손권은 감녕을 만나보는데 감녕은 여기서 황조를 먼저 죽이고 형주를 먹은 다음 서촉을 먹는 천하이분지계를 제안한다.

그렇게 황조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지만 이때 장소는 위험한 행위를 하지 말라고 말린다. 여기서 감녕은 소하의 예를 들며 장소의 말에 반박하고 이에 손권은 감녕에게 술까지 하사해가며 감녕에게 부탁을 하고 대규모 공격을 감행한다. 이렇게 어렵사이 이뤄진 황조 정벌전이었지만 황조가 강을 막기 위해 몽충 두 대를 엮어 가로로 놓고 돌에 새끼줄을 달아 으로 삼아 고정시킨 뒤에 몽충의 위에는 천여 명의 궁수를 둬서 쇠뇌화살을 퍼부어 진격을 하고 있지 못하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선봉 여몽진취를 직접 베고 오강 방면으로 진격한 능통장석을 죽인 것에 이어 동습이 백여 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몽충 안으로 돌입해서 닻줄로 쓰고 있던 새끼줄을 끊어 몽충을 표류시키는 전공을 세운다. 황조는 이런 상황을 보고 도망치려고 하지만 풍칙에게 죽고 만다. 손권이 어찌나 황조에게 울분이 쌓였는지 황조의 목을 베어서 가져오는 풍칙을 보자 풍칙의 이름을 사서에 기록시키고 큰 상을 내렸다.

이때 손권은 소비도 함께 죽이려고 하지만 감녕의 만류로 그만둔다. 또한 감녕이 자신의 아버지 능조의 원수가 되는 능통이 감녕을 미워하자 손권은 감녕을 다른 곳에 주둔하게 한다.

2.9.1. 이것이 손권의 최초의 승리?

많은 손권까들이 손권이 실제적으로 이긴 것은 황조를 상대로 한 마지막 전투밖에 없다고 하지만 손책 시절에도 유훈, 황조를 상대로 이긴 적도 있고 자신이 군주가 된 다음에도 환성의 이술을 상대로 한 승리와 성은 함락시키지 못했지만 황조를 상대로 두 번의 승리를 거둔 뒤였다. 거기다가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206년의 마와 보의 도적을 상대로 한 승리도 있기는 하다. 어느모로 봐도 결코 이 승리가 손권 최초의 승리는 아니라는 것. 정말 미미한 것까지 찾고 싶다면 손익이 죽은 후 규람과 대원의 잔당 처리도 있다.

물론 그렇다고 손권의 군사적 능력이 좋다는 것은 아니다. 자세한 내용은 손권의 군사적 평가로 가보자.

3. 천하의 한 축으로 서다(208~221)

3.1. 적벽대전

그리고 208년 유표가 죽고 조조가 쳐들어오자 유종은 항복하고 유비는 도망치고 결국 조조의 거친 진격과 불안한 유비와 그걸 지켜보는 손권의 상황이 된다. 항복하자는 사람들의 주장 때문에 흔들리고 있던 손권을 노숙, 주유, 제갈량이 설득해 결전으로 이끌게 된다.
적벽대전중 주유는 황개와의 공조를 통해 조조를 낚는데 성공, 결국 황개의 화공 등에 힘입어 조조군을 무찌르는 데 성공한다. 자세한 것은 적벽대전 참조.

3.2. 형주 점령과 1차 합비 공방전

그 후 주유의 주도로 유비와 합공해 강릉도 점령하고 형주 남부의 일부도 점령한다. 자세한 내용은 형주 공방전 참조. 그 와중에 손권은 합비를 공격하고 있었으나 장제의 거짓 편지에 속아서 물러나 버린다. 역시 자세한 내용은 합비 공방전 참조.

아직 주유가 강릉을 공격하고 손권이 합비에서 털린 뒤, 여강에서는 예전부터 조조에게 문제를 일으키던 진란매성, 뇌서가 반란을 일으킨다. 손권은 한당을 통해 이들을 지원하려고 하지만 완성에서 장패한테 격파당한다. 한당은 계속해서 병사를 보내 봉룡에서 싸웠으나 다시 한번 장패에게 패배. 한당이 재차 병력을 보내어 내석에서 장패를 영격하였으나, 장패는 더불어 싸워 이를 격파하고 귀환하여 서구에 주둔하였다.

이에 손권은 수만 병력을 배에 태워 서구에 주둔시키고 군세를 나누어 진란 구원을 시도했으나 장패의 군이 서구에 있다는 것을 듣고는 퇴각하였다. 장패는 오군을 추격하여 밤새 달려 새벽녘까지 백여리를 가 적을 맞아 전후에서 협격하였다. 손권군은 황망하여 배에 오르지도 못하였고, 많은 자가 익사한다.

주유가 강릉을 점령하자 자기의 동생 손부인을 유비와 결혼시킨다. 기타 이 당시 형주 빌려줄 때의 전황은 형주 공방전 참조. 논란이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그동안 주유가 죽고 노숙이 그 뒤를 잇는다.

3.3. 교주의 사섭 복속

210년 손권은 유표가 임명한 오거뇌공 등이 싸우고 있는 사섭의 교주에 보즐을 파견한다. 그때는 이미 뇌공이 오거에 의해 쫓아온 뒤였는데 손권의 전략은 딱 맞아 떨어져서 사섭과 동생 사일 등의 형제는 손권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보즐은 뒤이어 오거의 목을 베며 교주를 오나라의 땅으로 만든다.

손권이 사섭을 좌장군으로 임명한 뒤 사섭은 정말로 놀라울 정도로 손권에게 충성스러워서 자신의 아들 사흠을 인질로 보내고 익주의 호족 옹개들에게는 손권을 섬기라고 권하기까지하며 각종 향료와 촘촘한 갈포 수천 개, 명주, 대패, 유리, 비취, 대모, 무소의 뿔, 상아 등의 보물, 기이한 물건이나 진기한 과일, 파초, 야자, 용의 눈 등을 한 해라도 손권에게 이르지 않은 적이 없었다. 거기다가 사섭의 동생 사일은 오나라에서 언제나 부족한 말을 계절마다 총 수백 필씩 바친다.

한편, 그동안 손권은 211년 장굉의 제안과 옛날 유비가 이곳을 좋은 곳이라고 평한 것에 따라 말릉으로 수도를 옮기고 유비가 익주로 들어가는 틈을 타 유비 진영에 도사리고 있던 손부인유선을 납치하지만 조운장비의 방해로 인해 실패한다.

3.4. 1차 유수구 전투

그리고 212년 유수구로 조조군이 쳐들어온다. 여몽의 성공적인 유수오 건축과 방어. 그리고 화살에 대한 대처 등 몇 안 되는 손권의 지력 활용의 면면을 보여주며 조조에게 유표 같은 아들을 낳느니 손권 같은 아들을 낳아야지! 라는 칭찬을 들을 정도로 손권의 리즈 시절. 결국 손권의 츤데레 쪽지에 조조는 퇴각한다. 자세한 내용은 유수구 전투 212~213 문서 참조.

전투가 끝난 후 손권 입장에서는 쌍수를 들고 환영할 만한 상황이 일어나는데 손권의 인간 납치에 물려버린 조조는 장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장강 북쪽의 군과 현에 있던 군민들을 내지로 이주시키려고 한다. 그리고 이 소식에 놀란 여강, 구강, 기춘, 광릉의 백성들 10만 호가 장강을 넘어 동쪽으로 간다. 10만 명도 아니고 10만 다. 이렇게 사람들이 쏵쓸려나가니 합비 남쪽에 남은 성은 환성 하나밖에 없게 되었다. 뭐, 이때의 일은 나중과는 달리 훌륭한 사람 납치의 표본이었다.

3.5. 환성 정벌(2차 유수구 전투)

이렇게 환성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조조는 주광을 파견해서 개간을 하게 하는데 이를 보고 여몽이 공격할 것을 권한다. 손권은 이 말을 옳게 여겨 214년 윤 5월, 친히 여몽과 감녕 등의 제장을 이끌고 환성을 공격한다. 장수 들이 토산을 만들어서 공격 도구를 올려놓으려고 하자 여몽과 감녕의 활약으로 밥 한끼 먹을 시간 내에 환성을 정벌하니 장료가 구원군으로 오고 있었으나 협석에 도착했을 때 이미 함락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후퇴한다. 손권은 여몽을 여강 태수로 삼고, 돌아가서 심양에 주둔하였다. 자세한 전투 경과는 주광 문서 참고.

몇 안 되는 손권의 위나라 공격으로 얻은 승리이니 기억해두자.

이어서 214년 7월 조조는 부간 등의 발언에도 불구하고 공격을 했다가 별 소득 없이 돌아온다. 자세한 내용은 214년 유수구 전투 참고.

3.6. 익양 대치

유비가 서천을 먹자 손권은 제갈근을 보내 형주를 돌려달라고 요청하는데 여기서 유비는
나는 지금 양주(서량)를 취하려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양주(서량)를 취한 후에 곧바로 형주를 상여케 하겠습니다.

라고 한다. 그로 인해 빡친 손권은 여몽을 시켜 형주 남부의 세군을 취하게 하고 익양에서 대치했으나 조조가 한중으로 쳐들어오자 유비와 손권은 상수를 경계로 강하, 장사, 계양은 손권에 속하게 하고 강릉, 영릉, 무릉은 유비가 가지는 것으로 한다.

이 사건의 자세한 진행은 익양대치 문서 참조.

3.7. 2차 합비 공방전

215년 8월 손권은 감녕, 여몽, 주태 등 휘하 장수들과 10만 군사를 이끌고 위의 합비성을 공격하지만 결과는 장료를 전설로 만들어주며 대참패.

합비 공방전에 눈물겨운 손권의 패배가 잘 나와 있다.

3.8. 세 번째 유수구

216년(건안 21년) 10월 조조는 다시 군사를 일으켜 유수구로 공격해온다. 여몽, 장흠, 주태 등이 활약한 이 전투에서 여몽은 이번에도 유수오를 지켜내지만 조조와 손권은 또 투닥투닥, 게다가 역병이 퍼져서 제대로 전투를 할 상황이 아니게 된다. 결국 손권은 서상을 시켜 항복하겠다고 서신을 보내는데 조조는 사신을 보내 화의에 동의하고 혼인동맹을 맺기로 합의한다.

217년 3월, 조조는 장패, 하후돈, 조인, 장료 등을 거소에 남기고 돌아온다. 자세한 내용은 216~217년 유수구 전투 참고.

3.9. 노숙의 죽음

217년(건안 22년) 노숙이 죽자 손권이 노숙을 대신해 1만 명을 이끌고 육구를 이끌 인물로 선정한 것은 엄준. 주위 사람들은 모두 적절한 선택이라며 기뻐했지만 오직 엄준만이 자신은 책 읽는 사람이지 군사 일을 맡으면 안된다고 눈물을 흘리면서까지 고사하자 손권은 여몽에게 한창 태수를 겸하게 하여 그를 대신하도록 했다.

그리고 육손의 제안에 따라 산월들을 토벌하고 새로 날랜 병사 수만 명을 얻는다. 이를 보고 순우식은 육손을 비난했지만 육손은 오히려 순우식을 좋은 관리라고 칭찬하는 대인배스러운 모습을 보인다.[11]

218년(건안 23년) 10월에 손권은 오군 능정에서 호랑이를 만나 쌍극을 던져 상처를 입히고 그걸 장세가 창으로 공격해 사로잡는 사건이 발생한다.

3.10. 형주 정벌과 관우 처형

그 후 219년(건안 24년) 합비를 공격하지만 이곳을 지키고 있던 온회는 이 녀석 별다른 걱정거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조인 쪽이 위험하죠라고 주장하고 오히려 양양에 있는 조인에게 배잠을 재빨리 원군으로 보낸다. 그런데 이 뒤에 장료 등도 모두 양양으로 소집되었기에 이것을 보고 이미 손권과 밀약이 맺어져있고 손권은 합비를 공격하는 척만 했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 어쨌거나 이후 손권은 조조측과 밀약을 맺고 관우의 뒤를 노렸다.

219년 7월에 관우방덕우금을 쓰러뜨리고 방덕을 처치한 뒤 우금을 포로로 가둔다. 그런데 우금과 그 부하들이 먹어대는 군량이 정말 감당이 안되는 수준이었다. 관우는 어쩔 수 없이 촉-오의 경계인 상수에 있던 상관(湘關)에 있는 군량을 마음대로 취했다. 이 소식을 들은 손권은 기회라고 여겼다. 여몽의 말을 들어서 오래전부터 관우를 습격하려고 기회만 벼르고 있었다. 조조한테 굴종하는 서신을 이미 얼마 전 보냈던 손권은 여몽을 보내서 관우가 세운 관측소를 철거하고 형주를 침공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관우는 서황만총에게 번성 안팎으로 공격당해 포위를 풀었고 면수를 배로 장악하면서 양양을 굳게 포위한 상태였는데 오의 침공을 듣고 돌아갔다.
위(魏)에서 우금(于禁)을 시켜 번성을 구하게 했지만, 관우는 우금 등과 인마(人馬) 수만을 다 잡아 들이고, 양곡이 부족함에 기탁해 상관(湘關)의 미곡을 마음대로 취하였다. 손권이 이를 듣고 마침내 실행에 옮겼는데, 먼저 여몽을 파견해 선봉에 서도록 했다. 여몽이 심양(尋陽)에 이르러 그의 정병들을 모두 배 안에 숨겨두고, 백성들에게 노를 젓게 하여, 상인의 복장을 해 입고 밤낮으로 가서, 관우가 강변에 세워둔 둔영의 관측소에 이르러, 모두 잡아 포박해 버리니, 이 때문에 관우는 알지 못했다. 마침내 남군에 도착하자, 사인(士仁)과 미방(芳)이 모두 항복했다.
여몽전

10월, 손권은 조조에게 편지를 보내는데 손권이 사자를 보내 상서(上書)하여, 관우를 토벌하는데 스스로 힘을 다해 노력할 것이라 했다. 또 손권은 신하를 칭하고 천명에 관해 진술했다. 즉, 조조 보고 칭제를 하라는 것. 조조는 이를 두고 말하기를
손권이 나를 화로 위에 앉히려 하는구나![12][13]

이에 시중 진군, 환계 등이 한나라의 운수가 끝났으므로 더 높은 자리에 오르라 했지만[14] 조조는 나는 주문왕이 될 것이라고 거절한다.

그리고 손권 쪽에서는 유수를 지키라고 놔둔 주태서성주연이 복종하지 않자 주태의 상처를 보여주며 복종시킨 일이 있다. 자세한 것은 주태 문서 참고.

그후 여몽의 성공적인 공략으로 12월에 관우관평 부자를 처단하고 유비의 형주 전역을 얻게 된다. 자세한 경과는 형주 공방전의 관우 부분 참고. 하지만 여몽은 관우를 죽인지 얼마 안 되어 죽어버리고 이 덕분에 연의에서는 관우의 저주를 받아 죽었다는 소리까지 나오게 된다.

그후 조조는 손권을 표기 장군, 형주목, 남창후에 임명하고 손권은 이에 양우를 보내 한 황실에 공물을 바치고 환성 때 사로잡은 주광을 돌려보낸다. 그 와중에 왕돈을 시켜 말을 사들이도록 한다.

3.11. 조조의 사망

220년(건안 25년) 1월 조조가 죽는다. 조비는 손권이 서쪽으로 오는 것을 보고 지레 겁먹고 사마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양양번성을 태우고 조인의 군대를 완으로 옮긴다. 4월 손권은 공안에서 악성으로 천도하고 이름을 무창으로 고쳤으며, 무창, 하치, 심양, 양신, 시상, 사이(沙羨) 여섯 현으로 무창군을 만들었다. 8월에는 무창성을 수축하고, 장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손권은 빈땅을 진소를 보내 일단 점령하고 위나라의 장수 매부가 항복해온다. 손권은 뒤이어 남양군의 음, 찬, 축양, 산도, 중려 다섯 현의 백성 5천 호를 획득한다. 하지만 6월달에 조비가 직접 남정해오며 진소가 빼앗은 양양 또한 곧바로 조인과 서황의 공격에 뺏긴다. 7월달에 손권은 다시 조비가 원하는 물품을 공물로 바치며 환심을 산다.

한편 촉에서는 221년 유비가 황제로 오르자 손권은 별점을 잘 치는 자를 불러 자신의 구역에 해당하는 별의 기운이 어떠하냐고 물어보고는 스스로 칭제하려는 뜻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아직은 칭제할 때가 아니었다.

4. 오왕 손권(221 ~ 229)

4.1. 위에 칭신하다

유비가 칭제함과 동시에 관우에 대한 복수와 동맹파탄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기 위해 손오에 대해 군사를 일으킬 정황이 포착되자, 손권은 제갈근을 통해 촉에 편지를 보내 시간을 버는 한편, 육손을 대도독에 임명해 방어태세를 갖춘다. 또한 조비에게 허울뿐이지만 신하를 자처하며 화친과 더불어 원군을 청하였다. 이에 조비는 손권의 복속을 받아들이면서 형정을 보내 손권을 오왕에 봉하고 구석을 더하였다. 하지만 손권이 원하는 원군은 보내지 않았다.

4.2. 이릉대전

유비조운, 진밀, 제갈량[15]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오를 공격을 시작한다. 제갈근을 보내 화친을 청하지만 유비는 단호히 거부하고 계속해서 진격한다. 심지어 제갈근이 유비와 내통한다는 말까지 돌고 육손은 이런 제갈근을 변호하는 상황까지 벌어지지만 손권은 여기서 단호하게 제갈근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확답하고 육손을 대도독으로 삼아 5만 군사를 이끌고 이들을 막게해서 촉군을 궤멸시키는 엄청난 공을 세운다.

자세한 경과는 이릉대전 참고.

4.3. 조비의 남정

이제 촉의 공격도 물리쳤을 무렵, 위나라의 조비는 신비환계를 보내 손등을 인질로 보내라고 최후 통첩을 했지만 애초부터 진심으로 항복한 손권이 아니었던만큼 깔끔하게 거부한다.

이에 조비는 222년 9월 조휴, 장패, 장료에게 동구로 나아가게 하고 조인에게는 유수로 서황, 장합, 문빙, 조진, 하후상에게는 강릉으로 진격을 명한다.

손권은 일단 여범에게 군사를 주어 조휴를 막게 하고 주환을 유수독으로 삼고 제갈근과 반장 등에게도 군사를 주어 주연을 돕게 한다. 하지만 유비와의 싸움으로 병사들은 지쳐있었고 이민족은 또 다시 때는 이때다 하면서 날 뛰던 상황, 조비가 순순히 물러나주면 좋고, 아니더라도 시간이라도 벌 요량이었을 손권은 "제가 뭘 해드리면 돌아가 주실 건가요? 지적하면 시정하겠습니다."라는 공손한 편지를 보낸다. 조비는 이에 "유비 물리친 것도 잘했고 네가 보낸 공물도 잘 썼는데 닥치고 네 아들이나 얼른 보내 라."라는 답변을 하니 처음부터 순순히 항복할 뜻 자체가 없던 손권은 얼씨구나 즉답으로 연호를 바꾼 다음 장강에서 위를 맞아 싸운다.

10월, 손권은 유비가 백제성에 머문다는 것을 듣고 심히 두려워하여 사자를 보내 화친을 청했다. 위와 싸우고 있는 마당에 유비가 계속해서 백제성에서 기회를 노리는 듯하니 그로서는 두려워할만한 일이었던 것이다. 결국 손권은 먼저 화친을 청한다는 식으로 굽히고 들어 갈 수 밖에 없었다.

11월 여범의 군사는 태풍을 만나는 등 고생하지만 서성전종의 활약, 그리고 하제돈지랄을 보고 겁먹은 조휴군은 결국 퇴각한다. 강릉과 유수에서는 계속 싸움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

12월 화친을 청한 이후 유비가 보낸 편지를 보고 정천을 보내 유비와의 우호를 회복하지만 조비와도 의연하게 편지를 왕래하는 능구렁이 같은 모습을 보인다. 강표전에 따르면 이때 유비의 편지를 받아보고 손권이 말하길
"근자에 현덕의 글을 얻어 읽었는데, 대단히 깊이 있고 자신의 잘못을 탓하며, 예전의 좋았던 사이로 되돌리기를 바란다. 전에 서쪽에서 촉(蜀)이라고 하던 것은 한(漢)나라 황제가 아직 있었기 때문이고, 지금 한나라가 이미 폐하였으니 스스로 한중왕(漢中王)이라 할 만하구나."

사실 먼저 화친하자고 해놓고 이렇게라도 안하면 손권으로서도 주변에 체면이 서지 않으므로 이렇게 말하는게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1월 달에도 강릉에 대한 적의 공격은 계속됐고 3월 달에는 주환이 조인, 왕쌍, 상조 등을 격파. 강릉 쪽도 주연의 신출난 활약으로 적을 물리친다.

4월 주위 사람들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라고 했지만 이를 거부한다. 한편, 촉에서는 유비가 세상을 떠났다. 손권은 풍희를 보내 이를 위로한다.

4.4. 위를 버리고 다시 촉과 연합

그 와중에 5~6월에는 하제를 시켜 귀찮게 굴던 진종미방, 선우단, 유소와 함께 토벌하게 하여 진종을 사로잡는 전공을 세운다.

223년 촉에서는 오와 다시 동맹을 맺을 것으로 의견이 정해져 등지를 보내 말 2백 필과 비단 1천 필 및 특산물을 보내 10월 달에 오나라에 도착하게 된다. 아직 위와 단절하지 않은 손권인만큼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만나지 않자 결국 등지가 직접 표문을 올려 손권을 만난다. 등지가 오를 위해서도 화친해야 된다고 말하지만 손권은 촉 국내의 불안한 사정과 유선이 못 미더움을 말하며[16] 위가 이 기회를 틈타게 되면 오히려 나라를 잃는 것이 아니냐고 말하니 여기서 등지는 손권을 좀 빨아주고 두 나라의 장점을 합하자고 말하면서 마지막에는 우리가 공격하면 너넨 끝장이니 각오하라는 당돌한 말로 끝을 낸다.[17] 손권은 아무 말 없이 한참 있다가 등지의 말이 옳단 것을 인정하면서 위와는 단교하고 촉하고만 연합한다. 이로부터 공식적인 외교 관계가 수립되어 사신이 왕래하는 일이 일상적인 일이 되어 오나라 역시 224년 여름 장온을 시켜 특산물을 보내어 후의에 답례하였다. 그후에는 육손이 제갈량과 자유롭게 편지를 보낼 수 있게 하고 손권은 육손에게 도장을 주어 자신이 유선이나 제갈량에게 편지를 줄 때 육손에게 검열하게 시켰다. 그 후 등지는 다시 한 번 오나라를 방문하는데 거기서도 손권은 다시 한 번 등지를 칭찬하게 된다.

4.5. 광릉 전투

224년 7월, 손권이 위와의 교류를 끊자 조비는 손권을 공격할 계획을 세운다. 이때 신비는 조비에게 "님 아버지도 못한 일인데다가 그때보다 군사는 더 적어졌는데 어떻게 이기려고? 열심히 개간이나 해."라는 말에 조비는 저 호로 같은 놈들을 자손들에게 남겨주어야 되냐고 답문하는데 신비는 문왕주나라무왕에게 넘겼음을 상기시키지만 조비는 듣지 않고 8월에 수군을 만들게 하지만 어좌선을 건조하는 와중에 제갈탄은 죽을 뻔하고 두기가 어좌선을 건조하다가 죽는 등. 조짐이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비는 사마의를 남겨 허창을 지키게 하고 서선, 유엽, 조휴, 조엄, 위진 등을 이끌고 채하, 영수를 거쳐서 회하에 배를 띄워 수춘까지 간 다음 9월달에 광릉에 도착한다.

하지만 조비가 도착해서 본 광경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곳에는 울타리가 있는데 성벽은 수백 리나 뻗쳐져 있고, 배로 장강의 물이 가득 차 있으니 위가 비록 무장한 기병을 일천 군을 갖고 있다고 하여도 쓸데가 없고 아직은 도모해볼 수가 없다며 탄식하게 된다.

사실 이것은 서성의 계략이었는데, 그는 예전부터 계획을 세워 건업을 따라 울타리를 쌓고, 부락을 지으며, 울타리 위에는 임시 누각을 설치하며, 강에는 배를 띄워놓았다. 여러 장수들이 소용 없는 일이라고 했지만 서성은 듣지 않고 완고하게 세웠는데 그 결과가 이제야 나타난 것.

그후 조비는 용주에 탔으나 이번에는 폭풍을 만나서 표류하다가 거의 전복되어 물에 빠질 뻔하고 서선은 이곳에서 파도를 타며 앞으로 나아가는 기행까지 보여준다. 그럼에도 조비는 뜻을 굽히지 않고 사구에서 형주, 양주의 군사로 진격하게 하며 신하들을 불러 손권이 항복하러 오지 않겠냐며 설레발을 치는데 이때 주위에 유엽을 제외한 신하들은 당연히 예스맨 중, 물론 손권은 오지 않았다. 이에 조비는 유엽의 계책이 맞았다면서 내가 촉, 오을 멸망시킬 수 있도록 염두에 두었다면, 단지 그들의 사정을 아는 데 그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이때 조휴가 항복한 적을 잡아 손권이 이미 유수구에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며 보고한다. 여기서는 위진이 거짓말이라고 하는데 과연 이 내용은 지키는 장수가 지어낸 것이었다. 이렇게 시간이 지나 겨울이 다가온 10월, 조비는 장강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도모할 수 없겠다는 탄식을 하며 조엄을 정동군사로 남기고 쓸쓸히 퇴각한다.

여기서 손권이 한 일은? 서성의 위성계와 장강을 믿고 궁 안에서 편히 지내고 있던 것. 그리고 이 계책은 성공해서 조비는 3개월 만에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군사를 되돌린다.

4.6. 고옹을 승상으로 임명하다

물론 그 동안 궁에서 놀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유선에게 답례의 화신으로 갔던 장온이 제갈량과 친하게 지내더니 돌아와서는 촉한의 정치를 칭찬하고 있었는데 이게 손권의 눈에 영 거슬리는 것이었다. 때마침 장온과 같은 일파였던 글염서표와 함께 관리들에게 너무나도 엄격한 잣대를 적용해 불만이 점점 쌓이자 결국 그 둘은 자살하게 되는데[18] 손권은 이때 장온이 글염과 친했었다는 이유로 좌천시킨다.

225년이 되어 승상 손소가 죽자 사람들이 장소를 후임으로 추천하지만 손권은 장소가 너무 강직하다며 그리고는 6월에 고옹을 승상으로 임명한다.[19] 그 후 위에서 반란을 일으킨 당자가 토벌되면서 바닷길로 오나라에 도망쳐오는 사건이 일어난다.

4.7. 2차 광릉 전투

225년 윤3월 24일, 조비는 지난해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오나라를 칠 계획을 세운다. 이때는 포훈이라는 자가 반대하지만[20] 포훈은 이미 여러모로 조비에게 미움을 산 사람이라 곧바로 좌천된다. 8월 달에 수군을 가지고 초에서부터 내려와서 와수를 돌아 회하로 들어가는데 여기서 장제는 표문을 올려 물길이 통행하기 어렵다고 말했고, 또 삼주론을 올려 조비를 풍자했지만 조비는 듣지 않고 출병한다.

10월달이 되어서야 또 다시 광릉에 도착한 조비는 그곳에서 관병을 하는데 무장한 병력은 10여만 명이었고 정기도 수백 리에 이어졌기에 장강을 건너기로 뜻을 굳히지만 오나라 병사들은 강을 굳게 지키고 있었고 강변은 얼어붙은 상황이었다. 그것 때문에 아예 강에 배를 띄우는 것조차 불가능하고 강 중앙에서는 파도까지 심하니 조비는 하늘이 남북을 갈라놨다며 탄식하며 돌아오려고 하나 이때 손소가 보낸 고수가 500명을 이끌고 조비를 요격한다. 크게 놀란 조비는 도망치고 고수는 부차와 우개를 빼앗아 돌아온다.

조비는 퇴각하려고 했으나 과연 장제의 말대로 강의 사정으로 인해 군용 배 수천 척이 모두 멈춰 나가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군사들을 모두 남겨 둔전을 하게 하지만 장제가 이것이 위험하다고 하니 황제는 이번에는 장제의 말을 따라 퇴각한다. 중간에 물이 없어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자 배를 한데 모아두고 호수의 물을 막았다가 터트리는 방법으로 조비는 겨우겨우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한다.

4.8. 석양 공격

12월 파양의 도적 팽기가 도적 수만 명을 이끌고 군현을 함락시키는 사건이 일어나자 손권은 주방을 파양 태수로 삼아 호종과 협력해 이들을 토벌하게 한다.

이때 쯤, 손권은 법의 적용을 느슨하게 하는데 이때 육손이 표문을 올려 농경할 땅을 더 넓히라고 한다. 손권은 자신도 직접 개간을 하겠다며 육손에게 회보하고 자신이 이를 직접 실행하며 널리 실행하겠다고 한다.

그러던 도중 조비가 죽으니 226년 8월, 손권은 5만을 이끌고 직접 강하를 공격한다. 이에 조정에서는 강하의 문빙을 구원해야 된다고 말하지만 조예는 오나라에는 수전밖에 없다면서 무시. 거기다가 미리 파견해 둔 순우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모은 병사 1천명으로 산에 올라 불을 붙이니 손권은 놀라서 도망친다. 문빙은 그 뒤를 쫓아 적당히 손권을 격파해준다. 이때 반장을 후위로 삼았으나 그가 위험해지자 주연이 와서 구원해줘야 했을 정도다.

배송지는 본전과 상반된다고 하면서도 위략의 기록을 주석으로 달았는데 다음과 같다.

손권이 진격해 왔을 때 폭우가 쏟아져 성책이 붕괴한데다가 백성들은 논밭에 흩어져있어 성벽을 보수조차 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문빙은 손권이 도래하였다는 것을 들었으나, 성벽 상태도 이렇기에 침묵하며 그에게 의심을 품게 하는 방법 외에는 없다고 생각하고 성중의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지 않도록 한 다음 스스로 관사에 들어가 누워 밖으로 나가지 않으니 손권은 결국 의심을 품고 결국 군을 이끌고 철퇴한다.

그 후 도적 때가 날뛰니 동안군이라는 임시군을 만들어 전종을 보내 도적 토벌을 시키고 또 다시 육손의 말에 따라 세금의 부담을 낮춘다. 육손이 이때 자주 간섭해서 미안합니다라고 하니 손권은 "그게 너의 역할이다"라고 요약되는 말을 하고는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법령 조문을 잘 베끼도록 하고, 낭중 저봉에게 이것을 육손과 제갈근에게 보내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것은 삭제하거나 덧붙이도록 했다.

앞서서 행한 장온에게 한 행동에 비하면 너무나도 합리적인 서로간에 아직까지는 훈훈한 모습을 보여준다.

4.9. 사섭 사망

226년 손권에게 온갖 특산물을 바쳐, 말도 줘, 옆에 놈들에게 손권을 따르게 만드는 등 손권에게 절대 충성을 바치던 사섭이 사망한다.

손권은 사섭의 아들 사휘를 안원 장군으로 삼아 영구진 태수에 임명하고 진시에게 사섭을 대신하게 한다. 이때 여대가 교지 땅에 교주와 광주를 새로 만들 것을 건의하지만 이때도 사휘는 언급도 되지 않는다.

불만을 품은 사휘가 반란을 일으키지만 그 누가 봐도 화가 날 여대의 활약 아래 진압되어 사씨 일족은 사광을 제외하면 전멸당하고 만다. 손성은 이곳에 긴 말을 넣어 여대를 욕했을 정도.[21] 어찌됐든 비열한 여대는 구진을 토벌 해 1만 명을 붙잡고 부남(캄보디아), 당명(라오스 남부), 임읍(베트남 남부)에 사신을 파견하여 손권에게 조공을 바치게 한다.

이 사건에 대한 평을 보고 싶다면 사휘 문서 참고.

4.10. 조타의 묘 도굴

환우기(寰宇記) 157에서 인용한 남월지(南越志) 에서 이르길 조타의 묘는, 황무(黃武) 5년(226년) 손권이 교지치중종사(交趾治中從事) 여유呂瑜에게 조타의 묘를 찾아 파헤치게 해, 공정에 든 비용이 지극히 많았으나, 끝내 알 수 없었다. 조영제趙嬰齊의 묘를 팠는데, 바로 조타의 자손으로, 주유(珠襦)와 옥갑(玉匣) 장구(葬具), 금인(金印) 36개, 황제신새(皇帝信玺) 하나, 황제행새(皇帝行玺) 하나를 얻었는데, 천자란 문자가 남겨져 있었다. 또한 인끈 셋, 동검(銅劍) 3개를 얻었는데, 모두 용문(龍文) 같이 빛났으며, 그 중 첫 번째엔 순구(純鈎), 두 번째엔 간장, 세 번째엔 막야라고 새겨져 있었고, 모두 옥으로 꾸며져 궤에 담겨 있었다.

수경(水經) 은수주(泿水注) 에서 인용한 왕범(王範)의 교광춘추(交廣春秋) 에서 이르길 남월왕 조타를 장사 지낼 때, 산을 이용해 무덤으로 삼아, 그 무덤이 참으로 지나치게 컸고, 장사 지내며 진귀한 물건을 쌓았다. 오(吳) 때 사람을 파견해서 그 묘를 발굴하여, 관을 찾아내게 해, 산을 뚫고 돌을 부수며, 시간을 낭비하고 병사를 잃었으나, 끝내 얻은 바가 없었다.

굴대균(屈大均) 의 광동신어(廣東新語) 분어(墳語) 조타묘(越佗墓) 교광춘추에서 이르길 조타는 살아선 천자의 말을 받들며 칭번(稱藩)한 글을 가졌고, 죽어선 기이하고 매우 은밀한 묘를 가졌다. 손권이 일찍이 교주종사(交州從事) 오유(吳瑜)를 파견해 이를 찾게 하나, 소재지를 알 수 없었다. 오직 명왕(明王) 조영제의 묘를 알아내, 이를 파니, 옥갑과 주유는, 황금으로 꾸며져 있었고, 옥새와 금인 36개, 동검 3개가 있었는데, 용문 같이 빛났다. 그러나 문왕(文王) 조호(越胡)의 묘는 또한 위치를 알 수 없었다.

4.11. 로마인을 만난 손권

<양서> 권54 제이전(諸夷傳)에 따르면, 중천축(中天竺)에서 손권 황무 5년(226년), 대진(로마) 상인으로 진론이라 불리는 사람이 교지에 도착하여 교지 태수 오막(사휘 등을 몰아낸 뒤 여대에 의해 임명)이 (무창으로) 보내어 손권에게 이르렀다. 손권이 그곳의 문인과 민요, 풍속에 대해 문의하였는데 진론이 모두 사례로써 대답하였다. 이때 제갈각이 단양을 토벌하여 유와 흡의 키가 작은 사람들을 포획하였는데, 진론이 보고 답하기를 '대진(로마)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드물게 봅니다'라고 말하였다. 손권이 (잡아온 이들 중) 남녀 각각 10인을 골라 주고 회계의 유함으로 하여금 진론을 길안내해주도록 하였는데, 유함이 길에서 사고가 나서 진론이 이에 빨리 본국으로 돌아갔다.

4.12. 석정 전투

227년 1월, 팽기가 사로잡혀 무창으로 오는 등, 내부 상황이 정리되나 싶더니만 이번에는 한당이 죽는다. 죽는 것 자체는 큰 문제가 없지만 문제는 음란하고 궤도를 벗어난 한종이 벌 받을까봐 윤11월, 자기 아버지 한당의 시체를 수레로 끌고 가속들과 부곡을 거느리고 위나라에 항복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후 주방에게 거짓 항복의 계책을 시행하게 된 것이 크게 성공하여 조휴는 죽고 적의 병력 만여 명을 생포, 수많은 치중을 얻는 석정 전투가 일어난다.

5. 황제 손권(229 ~ 238)

5.1. 칭제

황룡 원년(229년) 봄, 공경과 백관들이 모두 손권에게 정식으로 황제를 칭하도록 권했다. 여름 4월, 하구와 무창에서 나란히 황룡과 봉황이 출현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같은 달 7일, 손권은 남쪽 교외에서 황제의 지위에 즉위하였으며, 이날 대사면을 실시하고 연호를 바꿨다.

오록에 손권이 하늘에 고하는 글을 실어 이르길 다음과 같았다.
황제 신 손권은 감히 검은 소를 바치며 상제에게 밝게 고합니다. 한조가 향국한 지 24세이고 보낸 해가 434년인데 기의 움직이는 수가 끝나고 복록의 운행이 다하여 천하가 진멸하고 영토가 무너져 내렸습니다. 불충한 신하 조비가 마침내 신기를 침탈하였고 조비의 아들인 조예는 세를 이어 간특한 짓을 벌여 명분에 넘치는 행동을 하고 제도를 어지럽혔습니다. 손권은 동남에서 태어나 시기가 움직이는 때를 당하여 하늘을 받들어 군대를 이끌고 뜻이 세상을 태평하게 하는데 있으며 견책과 형벌을 행하는 것이 모두 백성을 위함입니다. 군신, 장상, 주와 군(郡), 모든 성 그리고 자기의 일을 가진 백성들은 모두 하늘의 뜻이 한조에서 떠나고 한씨가 이미 하늘에 제사 지내기를 끊었으므로 황제의 자리가 비었고 제사를 지냄에 있어 주인이 없다고 여깁니다. 상서로운 징조가 앞뒤로 잇달아 발생하고 천명이 저에게 이르렀으니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손권은 천명을 두려워하여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으니 삼가 훌륭한 날을 택하여 단에 올라 요제(땔감을 쌓아두고 그 위에 불을 질러 하늘에 지내는 제사의 일종)를 드리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자 합니다. 오직 그대 신명께서 이를 흠향하시고 오나라를 도와 영원히 천록을 마치도록 해주십시오.

부친 파로장군 손견을 추존하여 무열황제라 하고, 어머니 오씨를 무열황후라고 했으며, 형 토역장군 손책을 장사환왕이라고 했다. 오왕의 세자 손등을 황태자로 삼았다. 장리들은 모두 작위가 올랐으며 상을 받았다.

손권은 황제에 즉위하며 모든 공을 주유에게 돌린다. 그러면서 장소에게는
만약의 장공의 계책대로 하였다면 오늘에는 이미 밥 빌어먹는 상태가 되었을 것이오.

라고 하니 장소는 그 자리에서 땀만 뻘뻘 흘렸다고 한다. 그 후 여러가지 관직 좀 분배하는데 여기서 손책한테 황제 안 줬다고 진수한테 졸라 까인다. 이 일로 인해 촉에서는 갑론을박하지만 제갈량의 주장으로 인해 진진을 보내 손권의 등극을 축하하고 "우리 나중에 천하 통일하면 이렇게 나눠먹자?" 라고 하며 천하를 둘로 쪼개자는 제안을 한다.

한편, 장소는 노병을 이유로 자리를 물러나나 이때 유선의 사신한테 오나라 문신이 발리는 사건이 일어난다. 덕분에 손권은 다시 장소를 찾아가고 서로 내가 더 미안을 시전 끝에 다시 자리로 돌아온다.

5월달에는 장강과 관독을 요동으로 보내 공손연과 접촉을 시도하고 9월 달, 무창에는 육손과 태자 손등을 남겨두고 건업으로 수도를 이전하지만 이때 옛날에 쓰던 관부를 그대로 사용하고 증개축을 하지 않는 대인배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손권은 황제위에 오르면서 토덕을 계승한다고는 했지만 조위 황실처럼 삼황오제 시절 신화적 인물들을 자신의 조상으로 칭하진 않았는데 오행설에 기반한 혈통 조작을 했을거라면 조비처럼 의 후손을 칭하거나, 순의 방계와 연관시켜서 혈통론을 펼쳤어야 한다. 당시 유행하던 오행상생에 따르면 그게 맞으니까. 손권은 그걸 못해서 도참을 둘둘 말고 주나라와 연관된 성서로운 일화를 연관시켜서 가화와 적오 등의 연호로 써먹었다. 손권은 왜 조비처럼 혈통을 조작할 수 없느냐? 이미 이 수법은 왕망이 한 번 써먹었던 수법이었다. 그러나 춘추좌씨전 《세본(世本)》에 따르면 '손씨는 위무공에서 나왔다(孫氏出於衛武公)'라고 되어 있기에 쓰지 못했던 것이다. 실제로 손권은 연호에 황룡을 갖다붙이는 등 연호상으로 토덕을 표방하긴 하지만 조비나 다른 위나라 황제들처럼 토덕이 어쩌고, 유우씨가 어쩌고 하면서 직접적으로 토덕을 운운하진 못한다.

5.2. 실책의 연속

230년 손권은 이주단주로 사람을 보내서 인간을 사냥할 계획을 세우게 되는데 자세한 내용은 손권/남방 개척 참고. 또 다시 합비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는데 이번에는 공격하는 척 하다가 다시 퇴각을 해 적군의 군령 체제가 망가진 사이 다시 공격할 계획을 세우지만 만총이 이를 간파. 결국 실패한다. 그 후 은번이 거짓 항복을 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자세한 내용은 은번 참고.

5.3. 무릉 문제

그 동안 한 동안 잠잠하던 무릉만이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손권은 먼저 어느 정도 안정된 교주에 있던 여대를 불러서 장사에 주둔하게 하고[22] 231년 2월에 반준종리목 등을 붙여주고 5만을 주어 이들을 토벌하게 한다. 이때 위정이 반준과 장완이 인척 관계를 이용해 밀통한다는 소리를 했다가 손권한테 면직당한다.

231년 10월 손권은 직접 손포를 통해 왕릉을 유인하려고 하나 만총한테 막혀서 실패, 700명을 죽이는데 그친다.[23] 232년 1월에 차남 손려가 죽으면서 서서히 불안한 낌새가 느껴지기 시작한다.

5.4. 1차 공손연, 고구려 연계

232년 3월 다시 한 번 주하배잠을 보내지만 전예의 말도 안 되는 예측에 9월달에 주하는 붙잡혀 목이 베인다. 다행인 것은 공손연이 여기서 손권에게 번국을 청했다는 것 정도. 또 232년에는 육손이 여강을 찔러보며 만총을 유인하려 한 것이 만총이 오히려 오군의 후방인 양의구를 공격한 바람에 도주한 바 있는데,이 계책은 오주전 육손전 어디에도 나오지 않을 만큼 사소한 해프닝으로 끝나 버렸다.

한편 우번은 손권이 신선을 논하고 있는 곳에서 괜히 끼어들어 어그로 끌다가 손권의 리미트 해제를 시켜버리면서 우번은 교주로 귀양간다. 거기다가 우번이 몰래 쓴 상소문이 우번을 싫어하는 자에 의해 보고 되면서 맹릉으로 귀양가게 된다. 뒤늦게 후회한 손권은 우번을 부르지만 우번은 이미 죽어서 영구만 돌아온다.

233년 공손연이 숙서손종을 파견해 칭신하니 손권은 기뻐하며 여러 신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장미, 허안, 하달을 보내 구석에 쓰일 물건등과 함께 공손연을 연왕에 봉하려고 한다. 3월, 숙서와 손종을 귀국시키고, 태상 장미, 집금오 허안, 장군 하달 등은 사자로 하여 병사 1만 명을 인솔하고, 금, 보물, 진귀한 물건과 구석의 모든 물품을 갖고 뱃길로 공손연에게 주었다. 이에 대해서 오나라 조정의 대신들은 승상 고옹 이하 모두 간언하여 공손연은 아직 믿을 만하지 못한데 오히려 총애와 대우가 지나치게 후하니, 단지 관리와 병사 수백 명을 보내 숙서와 손종을 호위하여 보낼 수 있다고 했지만, 손권은 끝까지 듣지 않았다. 장소가 반대했지만 서로 부둥켜안고 울기는 했지만 공손연에게 사신을 보내고 장소는 이에 집에 틀어박히고 손권은 이에 질세라 진흙으로 집을 봉쇄하나 결국 장소의 예측대로 결과는 절망적이어서 공손연은 장미와 허안을 목베 위나라에 보내는 짓을 한다.

배송지는 여기서 자신의 견해를 대길 손권이 자신의 견해를 고수하고 충고를 듣지 않으며 중론을 거슬렀고, 공손연을 믿으며 헤아림이 끝나서, 공격하여 정벌하는 책략과, 거듭 염려함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취지를 전달하고 조명(詔命)을 하사하며, 이에 만 명을 썼으니, 얼마나 백성을 사랑하지 않고, 어리석고 사리에 어두우며 포학함이 심한것이냐고 했고 이러한 징병은, 단지 우매하고 현명하지 못한 것일 뿐만 아니라, 진실로 도리에 어긋난 짓이라고 깠다.

손권은 이에 요동을 공격할 생각을 하나 육손과 설종, 육모의 설득에 결국 포기하고 만다. 뭐 여기에 대해 자국 내에 있는 사자들의 가족을 위로하기 위한 최소한의 정치적 방법일지도 모른다는 자치통감의 주석도 있다.

어찌됐든 모든 사신이 죽은 것은 아니어서 진단횡강은 여러 모험 끝에 고구려에 도달, 그들과 우호 관계를 맺게 된다. 그리고 이런 결과에 손권은 장소에게 사과하러 가나 장소가 나오지 않자 손권은 불을 지르고 그래도 나오지 않자 손권은 불을 끈 뒤 장소의 아들들과 함께 장소를 억지로 끌고 나와 다시 조정에 돌려놓는다.

5.5. 마지막 연계

233년 다시 합비신성으로 갔으나 역시나 만총에게 막히고 육안으로 보낸 전종도 패배한다.

234년에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제갈량, 손권과의 연계가 이루어져 손권은 합비신성으로 가고 육손과 제갈근에게는 형주로 나아가게 하는 한편 손소장승에게는 광릉과 회음으로 나아가게 하나 역시나 또 다시 만총과 전예의 뛰어난 전략과 조예의 남쪽 정벌 참여로 인해 망가진다. 조예는 내가 가기만해도 손권은 바로 튈 것이다라고 호언장담을 했는데 정말로 그렇게 되었다.[24]그 와중에 손태는 수성군에게 죽고 오나라 내부에는 질병이 퍼지기 시작해 GG 치고 귀환. 덕분에 후위대를 밭은 주연과 반장은 신나게 고생한다. 그리고 손소도 당연히 귀환을 타고 육손은 피해를 안 입고 귀환하면서도 약탈을 해가는데 덕분에 위의 많은 투항자를 얻었으나 배송지는 이 사건을 두고 두고두고 욕을 한다. 전문은 합비 전투(234년)위-오 전쟁 문서 참고.

그리고 이때를 틈타 일어난 이민족 들이 있었으나 산월의 마지막 활동으로 관측되는 이 행동은 제갈각에게 격파. 무릉만이는 반준에게 격파되고 팽단 또한 육손 등에게 격파된다. 도중에 당백전 류의 고액 화폐를 만들다가 대실패하고 3년 상을 금지하는 법률도 만들고 유명한 사치품은 나에게 필요없다는 발언을 하면서 말을 사오는 등의 내정 활동이 있었지만 문제는 여일이었다.

235년 강북에서 둔전을 하게 하지만 만총에게 격파당하고 곡식을 빼앗긴다.

6. 말년과 죽음(238 ~ 252)

6.1. 2차 공손연과 고구려

236년 손권은 공손연을 버리고 사신을 잘 대해준 고구려에 호위를 사신으로 보내지만 이번에 고구려는 호위를 목베 위나라로 보낸다.

어찌됐든 238년에 사마의의 주도 아래 공손연 토벌이 계획되자 공손연은 다시 손권하테 칭신하며 병사를 요구한다. 손권은 한 번 속지 두 번 속냐 하면서 사자를 죽이려 들지만 그 자리에서 양도가

"가서 도와줘서 이기면 명성을 드 높이고 공손연이 지면 주위 약탈하고 돌아오면 되니 손해볼 게 없음."

이라는 말에 정주를 보내지만 이미 공손연이 털린 뒤라 정주는 그냥 돌아온다. 그렇지만 약탈 기회를 놓칠 손권이 아닌지라 239년에 양도, 손이를 보내 요동을 약탈하고 돌아오게 한다.

6.2. 여일의 참수

결국 238년 손권의 대표적 실패 사례로 불리는 여일은 그가 처형되면서 끝이난다. 그에게 많은 권력을 주어 뭔가를 해보려고 했으나 여일 자신의 부도덕함과 너무나도 까다로운 기준 때문에 처절하게 실패하고 사람들은 이걸 손권의 노망의 증거라며 언급하기도 하는 사건이다. 자세한 내용은 여일 항목 참고. 어쨌든 정신차린 손권은 이건 자기의 잘못이라고 자책하며 신하들에게 꾸짖을 것을 부탁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며 사건은 끝이난다. 이에 대해서는 역사가도 평이 갈리는데 마음을 다잡는 손권으로 보는 해석도 있지만 몇몇 역사가들은 니가 그 꼴로 했으니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고 평한다.

그 후 이민족을 토벌했으나 요식이 거꾸로 반란을 일으키거나 개간의 명령을 내린다던가 큰 눈이 내린다던가 등의 일이 있었고 대사면도 하고 공사도 더럽게 많이 하고 큰 눈이 내려서 많은 사람이 죽은 일도 있었다.

241년 4월에는 전종에게는 육안을 공격하게 하고 주연에게는 번성을 공략하게 하지만 사마의의 지원에 의해 실패한다. 241년 5월에는 태자 손등이 죽는다.

243년에는 사마의가 서현으로 들어왔다가 열흘만에 나가기도 한다. 244년 정월에는 주연과 보즐 등이 촉이 배반하려고 한다고 말하지만 손권은 자신의 가족까지 걸면서 이것은 거짓이라고 말하고 이건 사실로 드러난다.

6.3. 이궁지쟁(242~252)

손권치세 말기의 궁정암투. 이 다음과 이 도중에 일어났던 후계자 문제와 손권의 죽음 등은 따로 분류해서 이궁지쟁에서 다루도록 한다. 이 이궁의 변이 사실상 죽기 2년 전까지 계속 일어난다.

6.4. 붕어

252년 음력 4월 26일(양력 5월 21일)에 손권은 붕어했다. 손권과 함께 삼국의 한축을 이루었던 조조나 유비의 최후가 워낙 유명해서 손권의 최후는 언급되지 않는 면이 강하지만 기록에 따르면 손권의 최후도 제법 볼만한 것이 있었다.

손권의 최후는 오주전 본전에는 나오지 않고 오나라 사서인 오서를 배송지가 본전 제갈각전에 붙인게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 당시 손권은 병상에 있게 되자, 뒷일을 누구에게 의탁하면 좋을지 논의하도록 했다. 당시 오나라 조정의 신하들은 모두 제갈각을 주목하고 있었는데, 손준이 표를 올려 제갈각의 기량은 군주를 보좌하여 정치를 하기엔 충분하므로 큰 일을 맡길 수 있다고 했다. 손권은 항상 제갈각이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여 일을 처리했으므로 그를 꺼리고 있었으나, 현재 조정의 신하들이 모두 그에게 미치지 못함이 확실하게 보증할 만하다고 여겼으므로 제갈각을 불렀다. 그후 상태가 악화되자 제갈각 등을 병상으로 불러 침대 아래에서 조서를 받도록 했다. 이때 손권은 조서에서 "나의 병세는 절망적이다. 아마 여러분과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이다. 모든 일을 여러분에게 부탁한다" 라는 공식적인 유언을 남겼다.

유언 자체는 평범하지만 손권의 비범함은 이 다음부터 나온다. 손권은 담당 관리들에게 조서를 내려 모든 일을 제갈각에게 결재를 받도록 했으며, 오직 살생의 큰일은 연후에 아뢰도록 했다. 이때 모든 법령에 불편한 사람이 있으면 조리 있게 손권에게 아뢰었고, 손권은 이를 매번 다 들어주었다. 이렇게 내외가 화합하니, 사람들에게 기쁨이 가득찼다고 한다. 이 다음날 손권이 세상을 떠났다. 즉 손권은 죽기 직전까지도 신하들의 의견을 접수하고 제갈각과 법령을 논의하면서 정사를 돌보았던 것이다.

6.5. 손권의 죽음에 대한 징조

수신기에 따르면 오나라 손권孫權 태원 원년 8년 초하루, 큰바람이 불었다. 강수와 바다가 솟고 해일이 일어, 평지에 밀려든 물이 8자 깊이나 되었다. 그리고 고릉(손견과 무열황후의 무덤)의 나무 이천 그루가 뽑혀 나갔고, 그 무덤 앞의 석비가 뒤틀려 버렸다. 그런가 하면 오나라 성문 두 곳이 바람에 날아갔다. 이듬해, 손권이 죽었다. 수신기는 오늘날로 치면 일종의 온갖 도시전설 모음집 에 가까우니 신뢰성은 떨어지지만 그 당시 벌어진 천재지변이나 자연현상 등에 관한 내용도 있기에 이궁의 변과 더불어 손권의 죽음과 오나라 멸망의 복선 아니냐는 추론이 있다.

[1] 그후 주곡의 취급에 관해서는 주곡 문서 참고.[2] 자치통감에서는 산월이라고 한다.[3] 역시 자치통감에서는 산월[4] 여기서도 자치통감은 기록이 또 달라서 주태가 몸을 날려 손권한테 날라오는 창을 막았다고 한다.[5] 노숙은 원래 부자였으나 주유의 설득으로 원술을 피해 도망갈 때 많은 재물을 잃었다.[6] 다만, 손보의 네 아들은 죽지 않고 훗날 손권의 휘하에서 관직을 지냈다. 그리고 넷 중 누구의 아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손보의 손자인 손기는 노왕 손패에게 붙어 조정을 어지럽히는 데 일조했다.[7] 점술가 유돈은 살아남는다.[8] 자치통감에는 2만 명이다.[9] 자신의 형제나 아들을 중앙의 관직으로 보내는 것이다. 지방으로 나간 사람한테는 그냥 인질이나 다름 없다.[10] 단 건강 실록에는 207년이라고 되어있다.[11] 자세한 발언과 내용은 육손 참고.[12] 한국식으로 해석하면 바늘 방석같은 걸로 해석할 수 있으며 실제로 그렇게 하는 사람이 많다. 제위가 그야말로 외롭고 가시 방석 같은 자리인 것을 감안하면. 그러나 더 깊은 속뜻은 따로 있는데, 오행(五行)에 따르면 나라를 다스리는 덕(德)의 성질이 있는데, 오행의 순리는 수 → 화 → 토 → 목 → 금의 순서로 흘러가서 왕조 역시 이에 따른다고 보았다. 중국 최초 통일 왕조인 진(秦)은 수덕(水德)을 표방하고 물을 상징하는 색깔인 검은색을 국색(國色)으로 삼았는데, 이를 이은 한나라는 화덕(火德)을 표방했고 이어서 오는 것은 토덕(土德)이므로, 조조가 토의 기운을 따라 허창으로 천도하였기 때문에 화로 위에 앉는다는 것은 곧 화덕을 지향한 한나라를 깔아뭉개고 새 나라를 세운다는 것의 은유적인 표현이다.[13] 이연걸, 견자단, 장쯔이 등이 출연한 영화 '영웅'에서 진나라의 복식은 모조리 검은색으로서 이에 따른 고증이라 할 수 있다. 조나라의 복식이 붉은 색인 것 역시 마찬가지 이유다.[14] 진서 선제기에는 이 일을 216~217년 경 유수구 전투로 보고 있고 사마의가 이런말을 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진서의 오류다, 위서를 보면 사마의는 이런말 하지도 않았다. 자치통감에서는 위서의 기록을 따른다.[15] 제갈량이 직접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법정이 있었더라면 망하지 않았을거라 탄식한 것에서 그의 속마음을 알 수 있다.[16] 이때 사섭으로 인해 오나라 편을 들게 된 옹개 등을 촉은 처리하고 있지 못하던 상황이었다.[17] 연의에서의 튀김 옷을 입히려는 문답은 창작이다. 만약 그 내용을 보고 싶다면 등지 문서로.[18] 자세한 내용은 글염 문서 참고.[19] 손권의 행동이 문제되는 거지 고옹이 모자란 인물이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20] 상소문의 전문은 포훈 참고.[21] 자세한 내용은 여대 참고.[22] 이때 설종이 엄청나게 긴 상소문을 올려 이 일에 대해 표를 올린다.[23] 자세한 내용과 이에 대한 평은 손포 참고.[24] 삼전에선 제갈량이 위협적인데 왜 우리 치느냐고 손권이 징징대는 장면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