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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비 전투(2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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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8년 겨울부터 209년까지 조조군손권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며 또한 손권이 합비를 공격한 최초의 전투이다.

2. 전개

208년 적벽대전으로 조조가 손유연합에 대패함으로써 천하를 움켜쥘 듯 보였던 그 기세도 한풀 꺾인다. 이 틈을 타 손권은 세력 확대를 위해 주유를 남군성으로 보내 형주를 차지할 계획을 추진하게 된다. 장소는 구강군의 당도현(當塗縣)을 공격하게 하고 자신은 대군을 이끌고 합비를 포위하기 위해 출발하나 이는 실패로 끝난다.

당시 합비 공격은 손권 자신이 대규모 군사를 이끌고 나온 친정이었다. 조조군은 거의 대부분이 남쪽 지방의 풍토와 역병 때문에 제대로 힘조차 영 못 쓰고 있는 상황이었다.

허나 손권은 한 달이 넘도록[1] 맹공을 퍼부었으며 비까지 내려 성이 무너질 상황이었지만 유복전에 따르면 유복 사후임에도 그의 인망으로 모인 백성들이 자진해서 미리 유복이 준비했단 거적으로 성벽을 덮거나 물고기 기름을 태워 성 밖을 감시하는 걸 돕는 등 민초들이 대대적으로 나서서 치열하게 저항하며 시간을 끌었다.

이 공방전에서 조조가 보낸 원군은 고작 장희와 그가 이끄는 기병 천 명뿐이었지만 장제는 의도적으로 '보병과 기병 혼합된 4만 명이 벌써 도착해가니 찾아와라'라는 거짓명령문을 보내 의도적으로 손권군에 흘리게 만들었고 여기에 합비로 세 조의 사자를 보내 2조가 잡히자 손권이 퇴각하게 된다. 장제의 의도대로 손권은 이 거짓 정보에 당황하여 그 정보가 사실인지 확인하지 않고 없이 퇴각하였다. 10만 명이 4만 명이 온다고 하니 급히 퇴각한 것이다.(...)

결정적으로 퇴각시킨 건 장제의 꾀였지만 그 꾀를 부릴 때까지 버텨준 합비 군민들의 노력의 결과이기도 하며 결국 이는 이미 죽은 유복의 준비성과 인망이 손권을 패퇴시킨 셈으로 합비의 백성들은 공방전에서 승리를 거둔 후 유복을 더욱 그리워했다고 한다.

양주의 관원과 백성들은 더욱 유복을 추모하였고, 동안우(董安宇)[2]가 진양(晋陽)을 지켰을지라도 유복을 뛰어넘을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삼국지 유복전)

3. 창작물

3.1. 삼국전투기

역대 삼국지 2차 창작물중 합비 전투에 대해 가장 상세하게 그려내고 많은 공을 들였다고 봐도 무방하다. 총 5차례의 합비 전투가 그려진다. 애초에 삼국전투기 자체가 최훈이 밝히듯 '장료가 주인공인 삼국지'인데 그 장료가 맹활약하는 전투니까 소홀히 그릴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합비1 전투라는 제목으로 나오고 1차 합비 전투에서는 장제가 손권으로부터 합비를 사수해내는 정사 루트를 따라가는 듯하였으나, 장제의 계략에 속아 돌아간 뒤 한동안 공격을 가하지 않는 정사와 달리 장제에게 속은 것을 깨달은 손권이 직접 선두에 서서 합비를 공격하던 중 장료가 지원군으로 도착하여 손권을 격퇴하는 연의 루트를 섞어내었다.

1차 합비 전투에서 장료가 송겸에게 중상을 입히고 손권을 사로잡는 위업을 달성했으나 태사자주태가 손권을 구출해낸다.

이후 태사자가 계략을 이용해 합비를 점령하려하자 장료가 이를 역이용해 태사자를 죽이고 손권이 물러가며 1차 합비 전투가 마무리된다.

3.2. 삼국지조조전 Online

태사자가 합비성 안에 병력들을 잠입시켜 불을 지르도록 했으나, 장료가 소란을 벌이는 자는 많지 않다면서 이들을 제압하고 태사자가 들어올 수 있도록 일부러 서문을 열어놓는다. 태사자가 합비성으로 들어갔지만 장료의 지시대로 매복한 군사들이 태사자의 군사를 격파하고 장료는 태사자를 직접 죽인다.

태사향은 겨우 살아서 도망치고 장료는 일부러 합비성의 남문을 열어두고 손권은 노숙, 장굉, 정보와 함께 태사자의 작전이 성공한 줄 알고 합비성으로 갔다가 장료의 군사에게 패해 퇴각한다.


[1] 유복전에는 100일이라 표기되어 있고 그 외의 자료엔 단지 한 달 이상이라 적혀있다.[2]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인물. 진(晉)나라육경내전을 겪을 때. 진양성을 다스리며 조간자(趙簡子)를 섬겼으며 성벽을 튼튼히 수축하고 군수품을 비축하는 등 방어준비를 튼튼히 해서 훗날 내전기에 조양자가 진양성을 거점으로 3년 간 수성할 수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조간자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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