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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니콜로 마키아벨리 Niccolò Machiavelli | |
[1] | |
본명 | 니콜로 디 베르나르도 데이 마키아벨리 (Niccolò di Bernardo dei Machiavelli) |
출생 | 1469년 5월 3일 |
피렌체 공화국 피렌체 (現 이탈리아 피렌체) | |
사망 | 1527년 6월 21일 (향년 58세) |
피렌체 공화국 피렌체 (現 이탈리아 피렌체) | |
국적 | [[피렌체 공화국|]] 피렌체 공화국 |
학파 | 르네상스 인문주의, 고전적 공화주의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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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피렌체 공화국의 외교관, 정치학자, 역사가, 극작가. 《군주론》의 저자로서 근대 정치철학의 기틀을 만든 사상가이다.[2] 고대 철학이 '정치는 어떻게 되어야 할 것인가?'라는 당위적인 목표를 두고 도덕적 관점에서 정치를 서술했다면,[3] 마키아벨리는 '정치가 실제 세계에서 작동하는 방식은 무엇인가?'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관점에서 근대 정치철학을 개시했다.[4]'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된다'[5]는 마키아벨리즘으로 비판받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오늘날 마키아벨리의 사상이 중요하게 평가받는 까닭은, 그 정치적 목적이 민중의 자유를 보장해야 달성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6] 다수의 민중이 정치의 핵심이라는 마키아벨리의 주장은 이후 근대 유럽의 공화주의 담론 부활의 계기가 된다.
2. 생애
2.1. 초년기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1469년 5월 3일 피렌체에서 아버지 베르나르도와 어머니 바르톨로메아의 2남 2녀중 셋째로 태어났다. 마키아벨리의 조상들은 나름 사업에 재간이 있어 은행업과 양모업 등으로 제법 많은 재산을 비축했었지만, 아버지 베르나르도는 학자 스타일의 법률지식인이었기 때문에 재산을 불리는 데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7] 마키아벨리도 이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릴 때부터 고대 철학과 역사와 시에 관심을 두었다. 12살에 파올로 다 론시글리오네의 학교를 다녔고, 20대 초중반에는 피렌체의 대학교인 스투디오(Studio)에서 공부했다. 이때의 마키아벨리는 당시 격변의 피렌체를 목격하게 된다.당시 피렌체는 메디치 가문의 '위대한 로렌초'의 아들 '피에로 데 메디치'가 다스리는 군주국이었다. 하지만 피에로는 무능했던 데다가 1494년엔 프랑스의 침공으로 당시 피렌체의 영토이던 피사를 빼앗겼고, 영토상실은 피렌체 사람들의 자존심을 건드려 그들을 분노케 만들었다. 이 때문에 메디치 가문은 졸지에 민중의 야유를 받으면서 쫓겨나게 되었다.
피렌체에 정치적 공백이 생기자, 산마르코 수도원의 원장 지롤라모 사보나롤라가 나섰다. 그는 종교적 카리스마와 종말론을 앞세워 귀족들을 제압하곤 민중들의 손을 들어주면서 피렌체에 공화국을 세웠다. 즉, 피렌체는 당시 한 명이 지배하는 군주국에서 다수가 지배하는 공화국으로 정치체제가 바뀌는 격변을 겪게 된 것이다. 하지만 당시 지도자였던 사보나롤라는 스스로를 예언자라 부르면서 금욕을 통한 구원을 내세우고 지나친 도덕주의를 강요하면서 민중들의 반감을 샀고, 게다가 부패한 교황 알렉산데르 6세를 비판하면서 프랑스 편에 섰기 때문에 교황의 분노마저 사는 등의 악수를 거듭했다. 교황은 피렌체에 교회와 관련된 모든 일들을 금지시키는 성무금지령을 내렸고, 이에 피렌체 사람들은 사보나롤라파와 교황파로 갈라서서 서로를 비난하였다. 교황파의 수도자들은 "사보나롤라가 예언자임을 증명하려면 직접 불길을 통과하는 시험을 치러야 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 주장은 단번에 피렌체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주최측의 사정으로 이 시험 자체가 무산되자 성난 군중들은 사보나롤라를 권좌에서 끌어내렸고 결국 사보나롤라는 광장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2.2. 외교활동
이후 피렌체 공화국은 온건중도파인 피에로 소데리니를 지도자로 내세운다. 그리고 이런 상황 속에서 29살의 마키아벨리는 마침내 피렌체 공화정의 외교 실무를 담당하는 제2서기장에 발탁된다. 공식적인 직함은 '10인 전쟁위원회의 비서관'으로, 임무는 공화국의 군대를 감독하는 기관의 통신문을 처리하는 것이었다. 비록 마키아벨리는 중요한 정책 수립에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는 없었지만, 정책을 집행하고 상관을 보좌하는 과정에 있어서 정보를 취합하고 요약하여 전달하면서 공화국의 외교정책에 간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마키아벨리는 여러 대사들이 급하게 보내온 공문서들을 처리하면서도 그 본질을 파악하려고 항상 노력했기 때문에, 상관들은 그가 보낸 공문서를 높게 평가했고 마키아벨리는 그 자신의 일을 즐겼다.1499년 마키아벨리는 피사 재정복 작전에 가담한 용병대장 야코포의 주둔지로 파견되었다. 야코포는 피옴비노의 영주이기도 했는데, 그는 피렌체 정부로부터 자금과 병력을 추가로 지원받지 못하면 작전에서 이탈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마키아벨리는 야코포를 잘 설득해 애초 합의된 조건을 따르도록 했지만, 한 나라가 용병들에 의존하는 근시안적 방침을 따르게 되면 그 나라는 결국 위험해지게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피렌체의 북동부에 위치한 소국 포를리로 가서, 그곳의 여군주 카테리나 스포르차를 만났다. 마키아벨리는 그녀가 피렌체에 힘이 되어 주기를 바랬고 그녀는 긍정적인 답변을 했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에 그녀는 피렌체의 적대국인 밀라노에 힘을 보태주겠다고 말을 바꾸었다. 카테리나는 "피렌체 사람들의 말은 언제나 만족스럽지만 행동은 항상 실망스러웠다"고 변명했다. 이 사건은 마키아벨리에게 참을 수 없는 조롱으로 느껴졌고, 심한 굴욕감을 심어줬다. 그 이후로도 여러 번 느끼게 되는 피렌체의 현실적 무능력은, 훗날 《군주론》이 자라나는 씨앗이 되었다.
2.3. 체사레 보르자와의 만남
한편, 프랑스의 루이 12세는 아버지와는 다르게 교황과 편을 먹고, 교황의 아들 체사레 보르자와 함께 피렌체 북쪽에 위치한 밀라노를 점령했다. 피렌체는 친프랑스 정책을 펼치고 있었기에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었지만, 문제는 체사레 보르자였다. 체사레 보르자는 포를리를 집어삼킨 뒤 아드리아 해안의 페사로와 리미니를 손에 넣으면서, 점차 피렌체의 북부 지역에 그 자신의 영토를 야금야금 확장했고, 이에 피렌체는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1500년, 결국 피렌체는 위기를 타개하고자 프랑스에 마키아벨리를 파견한다.마키아벨리는 낡은 복장으로 화려한 프랑스 궁전을 돌아다니면서 최선의 결과를 얻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감정과 논리만으로 호소하기에는 한계가 있었고 프랑스인 동조자를 뇌물로 매수하는 것이 최선의 판단이라고 피렌체 정부에 보고했다. 마키아벨리는 한쪽이 다른 쪽의 목을 조르는 상태에선, 양심이나 공정한 태도, 또는 주장의 정당성에 호소한들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통찰은 정확했고 결국 피렌체 정부가 돈을 보내오고 나서야 프랑스 국왕은 체사레 보르자에게 해당 지역을 간섭하지 말도록 지시했다. 피렌체의 여러 고위 인사들은 마키아벨리의 외교활동을 성공적으로 평가하고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1501년, 32살의 마키아벨리는 8월의 어느 날, 명문가에서 자란 마리에타 코르시니와 결혼했다.
한편 마키아벨리의 성공적인 외교활동으로 체사레 보르자는 이제 프랑스의 왕 루이 12세를 자극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1502년 6월, 피렌체 동쪽 산악 요충지인 우르비노 공국을 기습 점령하면서 피렌체에 다시금 긴장을 조성했다. 그는 이 지역에서 자신이 확립한 패권을 인정해 달라는 내용의 협정을 맺기 위해 피렌체 정부에 대표단을 파견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마키아벨리가 사절로 파견되었다.
마키아벨리는 우르비노에 도착한 뒤, 자정이 넘어서야 궁전의 새 주인인 체사레 보르자를 접견할 수 있었다. 횃불이 어른거리는 음산한 분위기에서 마키아벨리는 다른 누구보다도 야릇한 매력을 발산하는 사람, 그리고 훗날 《군주론》에 나오는 무자비한 참주의 본보기가 될 사람을 대면했다. 이 첫번째 만남이 얼마나 강렬한 인상을 남겼는지는 마키아벨리의 저작에서 체사레 보르자의 경력에 할애된 분량으로도 판단할 수 있다. 피렌체 정부의 우유부단함과 다르게 체사레 보르자의 단호하고 당당한 모습은 마키아벨리에게 두려움과 존경심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마키아벨리는 체사레 보르자를 경외의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속으로 감탄했다. 그러나 자신의 본분은 잊지 않았다. 체사레 보르자가 피에로 데 메디치의 복귀를 거론하면서 너무 멀리나가자[8] 그 주제넘은 말에 마키아벨리는 발끈하며 피렌체의 일은 피렌체 사람들이 알아서 한다고 응수하였다.
그의 노골적인 협박에도 불구하고 마키아벨리와 피렌체 정부는, 일단 루이 12세가 체사레 보르자의 꿍꿍이를 알아차리기만 하면 더는 약자를 괴롭히지 못하도록 막을 것이라고 판단했고 시간을 벌기 위해 꾸물거렸다. 마키아벨리는 그 비굴한 게임을 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안타까웠지만 달리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는 모호한 대응으로 일관하면서 시간을 벌었고 다행히 루이 12세가 체사레 보르자의 영토확장에 깜짝 놀라 개입하면서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였다. 그러나 이는 단지 시간을 번 것에 불과했고 그 누구도 체사레 보르자의 야심을 막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운명의 여신은 이 모든 상황을 한순간에 반전시켰다. 1503년, 교황 알렉산데르 6세와 그의 아들 체사레 보르자는 연회를 갔다온 후 구토를 동반한 고열에 시달렸고, 교황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이로서 체사레 보르자의 세력확장에 대한 교황의 비호가 갑작스레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물론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한 상태였고, 그가 1달 넘도록 병으로 고생하면서 자리를 비우고 있어도 그의 부하들은 감히 반란 일으킬 생각을 하지도 못했을 정도로 그의 입지는 탄탄했다.
그러나 체사레 보르자는 여기서 결정적인 실수를 하고 말았다. 다음 교황이 되려는 율리오 2세가 계속해서 그를 예전처럼 비호해 주겠다고 한 약속을 순진하게 믿었던 것이었다. 체사레 보르자는 율리오 2세가 교황이 되는 것을 충분히 방해할 수도 있었고 이를 통해 가장 큰 경쟁자이자 장애물이 성장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지만, 그는 순진하게 그 약속을 믿고 율리오 2세를 가만히 내버려 두었고, 결국 다음 교황으로 선출된 율리오 2세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채 적당한 핑계를 대며 체사레 보르자를 체포하곤 감옥에 가둬버렸다. 그리고 체사레 보르자가 이끌던 군대의 잔당들은 자연스레 괴멸당하면서 피렌체는 다시금 안정을 되찾았다.
2.4. 몰락과 말년
외세와 용병들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피렌체 외교를 겪으면서, 마키아벨리는 자국 시민군의 필요성을 더욱더 절감하게 되었다. "오로지 돈을 위해 싸우는 용병에게 국가의 안위를 맡길 수 없다"는 것이 마키아벨리의 생각이었다. 따라서 그는 피렌체 시민군의 창설에 앞장섰으며, 많은 노력을 통해 시민군을 육성하고 이를 이용하여 피사를 재탈환하는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피렌체를 둘러싼 상황이 녹록지 않았다. 새로운 교황 율리오 2세는 호전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었고, 체사르 보르자가 몰락하고 남긴 땅을 베네치아가 손쉽게 접수하자, 교황은 신성 로마 제국(독일), 스페인,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1509년 베네치아를 공격했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단 하루만에 잿더미로 변했다. 베네치아가 외국인들에 의해 너무나 무자비하게 짓밟히자 교황 율리오 2세는 민족적 아픔을 느꼈는지[9] 돌연 태도를 바꿔, 베네치아와 스페인과 손을 잡고는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을 내쫓기로 결심한다.피렌체는 이런 갑작스런 대결구도 변화에 무척 불편해졌다. 피렌체 공화국의 전통적 우방인 프랑스가, "무슨 일이 있어도 피렌체가 이 전쟁에 참여해야 된다"며 압박을 가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피렌체는 전쟁에 소규모 분대를 보냈고 그 분대는 당연하게도 교황의 분노를 샀다. 피렌체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러한 상황을 피하려고 했지만 더이상 외교술은 한계에 봉착했고, 자국의 군인들에게 기대를 거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하지만 피렌체 공화국은 1512년 메디치 가문의 두 형제를 앞세운 스페인군의 가벼운 공격에 어이없이 함락되었다.
이후 공화국은 해체되었고, 피렌체의 체제는 메디치 가문에 의해 다시 군주국으로 되돌려졌다. 이 과정에서 마키아벨리는 반-메디치 인물로 낙인찍혔고 결국 15년간 있었던 공직에서 쫓겨난다. 그리고 직후 메디치 가문 암살 모의에 휘말려 감옥에 갇히면서 날개꺾기 고문[10]을 6번이나 당하기까지 했다. 실제로는 그 암살 모의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키아벨리는 끝까지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는데, 운이 좋게도 율리오 2세가 갑자기 말라리아열에 걸려 죽고, 뒤를 이어 조반니 데 메디치가 교황 레오 10세가 되면서, 기분이 좋아진 동생 줄리아노 데 메디치가 대규모 사면을 실행하였다. 이에 마키아벨리는 가까스로 풀려나게 되었다.
감옥에 갇히면서 대부분의 재산을 몰수당했지만, 다행히 아버지가 물려주었던 산트 안드레아의 작은 농장이 있어 그곳에서 가족과 함께 은거하였다. 하지만 부과된 벌금을 갚아야 했고,[11] 동시에 가족들을 부양했었기 때문에 힘겨운 시간들을 보냈다. 이때 마키아벨리는 생계를 위해 농장 일은 물론 귀족 자제들의 강사 일까지 맡았다.
그럼에도 피렌체를 위하여 공직에서 일하기를 원했던 그는, 메디치 가문의 햇병아리 군주 로렌초에게 《군주론》을 저술하여 바치려고 했다.[12] 하지만 실제로 군주론을 바쳤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마키아벨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공화국을 추종하는 젊은 귀족들의 모임인 '오르티 오리첼라리'[13]에 참여하며 코시모 루첼라이, 차노비 부온델몬티, 필리포 스트로치 등과 교제를 나누었다.[14] [15] 그리고 그들과 토론에서 나눈 얘기들을 바탕으로 훗날 공화주의의 고전이 되는 《로마사 논고》를 지었다. 《전술론》과 《피렌체사》를 집필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이렇게 10여 년간을 저술활동에 힘썼다. 하지만 당장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그의 희극 《만드라골라》 덕분이었다. 이 희극은 크게 성공해서 작가로서 마키아벨리의 명성은 이탈리아 전체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한편 마키아벨리는 희극으로 얻은 자신의 명성과 인맥을 이용해 새로운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신임을 얻었고, 성벽 공사를 총괄하는 감독관에 임명되었다. 비록 그가 원하는 고위공직은 아니었으나 마키아벨리는 충실히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피렌체에 인민 봉기가 일어나고, 때마침 독일의 황제 카를 5세가 용병들을 내세워 로마를 약탈하고 교황을 포로로 삼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져서 힘의 공백이 생기자, 피렌체의 공화주의자들은 다시 메디치 가문을 쫓아내고 공화정 정부를 수립했다. 이에 마키아벨리는 다시 고위공직에 오를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원하던 제2서기관 선거에 도전하였지만 실패한다.[16] 희망이 무너진 그는 상심한 나머지 병을 얻고 얼마 못 가 1527년 6월 21일,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망 당시 그는 조그만 가족묘에 묻혔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의 명성은 점점 높아져만 갔고, 결국 18세기엔 그 명성에 걸맞게 피렌체 산타 크로체 성당의 웅장한 묘로 이장되었다.[17] 그의 묘비명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져 있다. "그 어떤 찬사로도 부족할 만큼 위대한 이름"
3. 사상
공화정을 설명한 『로마사 논고』에서는 ('군주의 역량'이 아니라) '시민들의 역량(비르투)'이 중요해진다. 그 역량은 시민으로서 나라의 그 어떤 일도 발벗고 나서게 만드는 일종의 애국심이라는 감정에 기반하고 있다. 이러한 애국심은 이른바 시민들을 '억누르지 않았을 때' 그 자유의 기쁨을 지키기 위해 생겨나는 것이다. 즉, 공화국에서 '시민들의 역량'은 '시민의 자유'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자유로운 시민은 서로 지배받지 않고자 하기 때문에 도리어 파벌 간에 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필연적이다. 여기서 역량을 가진 시민들이 파벌 간 갈등의 균형을 잘 이루어낼 때, 파벌들은 서로를 견제하는 새로운 법과 제도들을 끊임없이 신설해내고, 신설된 법과 제도는 특정파벌이 모든 권력을 움켜쥐는 것을 막아 '시민의 자유'를 다시 보장하므로써 '시민들의 역량'이 부패하는 것을 막는다. 이런 순환이 이루어질 수 있으므로 공화국은 그 자신의 정치체제를 군주국보다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마키아벨리는 주장한다. 또한 이러한 자유는 개인의 욕망을 긍정하는 것이기에, 공화국은 그 욕망을 충족시키 위한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대외적 팽창 정책'은 필수적이다.
3.1. 군주론
마키아벨리는 모든 국가를 군주국과 공화국으로 나누는데, 『군주론』에서는 군주국에 대해서만 언급한다. 그리고 세습으로 지위를 얻은 군주의 경우는 유지하기 쉽기 때문에 간략하게만 설명하고, 그 지역에 새롭게 군주가 된 경우(신생군주)를 집중적으로 탐구한다. 마키아벨리가 보기에 신생군주에게는 민중들의 호의가 매우 중요하며 그것은 일종의 기회다. 힘없는 약한 민중들은 그동안 자기들을 지배하던 세력에 불만을 품고 기꺼이 새로운 권력과 연합하려 하므로 신생군주는 크게 공을 들이지 않아도 그들의 호응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군주가 민중에게 증오와 경멸을 받는다면 외세의 침략이나 내부 유력경쟁자의 음모가 있을 때 민중들은 방관하거나 군주를 해치려고 할 것이지만, 민중이 군주에게 호의적이라면 위기에 처했을 때 민중들은 오히려 군주를 적극적으로 도와줄 것이다. 그러므로 군주는 민중에게 경멸과 증오를 받는 것을 반드시 피해야 한다.우선, 군주는 민중들의 증오를 피하기 위해서, 그들의 재산과 여자에 손대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은 아버지의 죽음보다 재산을 잃는 것을 더 오래 기억한다. 만약 누군가의 생명을 빼앗아야 한다면 명백한 이유와 적절한 명분이 있을 때 실행해야 한다. 마찬가지 이유로 군주는 후하다는 평판 보다는 인색하다는 평판을 받는 것이 낫다. 후하다는 평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민중들에게 가혹하게 굴면서 과도한 부담을 줄 수밖에 없고, 그러다 보면 군주는 민중들에게 증오를 받기 시작하기 때문이다.[18] 이런 일만 조심한다면 평범한 사람들은 재산이나 명예를 빼앗기지 않는 한 언제나 만족하며 살아갈 것이기 때문에, 군주는 오직 야심 있는 소수와 싸우게 된다. 그런 사람들은 군주가 변덕스럼고, 경박하고, 여성스럽고, 소심하고, 우유부단하다고 여겨질 때 그 군주를 경멸하므로, 군주는 그들에게 위대함, 용기, 중후함, 강인함을 인정받도록 노력해야 하며, 이를 통해 그들의 경멸을 피하고 자신의 평판을 유지함으로서 그 누구도 자신을 속이거나 기만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래서 어떤 결정을 일단 내리고 나면, 이후에 그 결정이 자신에게 불리하다고 여겨 번복하는 모습은 보여주지 말아야 한다.
군주는 믿고 행동할 때 신중해야 하고, 자기 자신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며, 신중함과 인간애로 절제 있게 나아가야 하지만, 사람은 사악하기 때문에 대체로 감사할 줄 모르고, 변덕스러우며, 위선적인 데다 위험을 피하려 하면서, 탐욕스럽게 이익을 얻으려고 하므로, 군주의 혜택을 얻는 동안에는 그들 모두 군주에게 재산과 생명을 바치겠다고 엎드리지만 막상 일이 닥치면 매몰차게 등을 돌릴지도 모른다. 그런 까닭에 군주가 만약 사랑을 얻지 못한다면 증오는 피하면서 사람들이 자신을 두려워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두려움은 처벌에 대한 공포로 유지되므로 절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19]
즉, 나라를 유지하려면 군주는 좋은 모습만 보여줄 수 없으며, 종종 신의와 반대로, 자비로움과 반대로, 인간애와 반대로, 경건함과 반대로 행동해야 한다. 기만이 당연한 사람들 사이에서, '실제로 할 일'보다 도덕적으로 '해야 할 일'을 지향하는 사람은 파멸하기 마련이므로,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고 싶은 군주라면 누구나 착하게 굴지 않는 법을 배워야만 하는 것이다. 신중한 군주는 신의를 지키는 것이 자기에게 불리하거나 신의를 약속한 이유가 사라졌을 때, 신의를 지킬 수 없을 뿐더러 지켜서도 안 된다. 더 나아가, 자비롭고 신의가 두텁고 인간적이고 정직하고 경건한 자질을 갖춘 것처럼 보이는 것은 경멸을 피하기에도 유용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신의를 지키지 않았더라도 신의를 잘 지켰다고 뻔뻔하게 둘러댈 줄 알아야 하며, 이로써 능숙한 사기꾼이자 위선자가 되어야 한다.[20]
또한 신생군주는 국가와 자신의 안전을 확고하게 다지기 위해 새 제도와 통치법을 도입할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했을 때 옛 제도에서 혜택을 받던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빼앗길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에, 그 군주를 적으로 생각하고 힘껏 공격한다. 하지만 새 제도에서 혜택을 누릴 사람들은 새로운 변화를 실제로 직접 확인하지 않는 이상 그것을 믿지 못하는 까닭에, 그들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며 미온적으로 군주를 방어할 뿐이다. 그러므로 단지 민중의 호의만 믿고 그 법의 실행을 계획한 군주는 쉽사리 위험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민중들의 호의'도 물론 중요하지만, 새 제도와 통치법을 도입하는 자들은 자신이 가진 무력을 통해서 그들이 그 법을 믿도록 강요할 수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즉, 좋은 군대 없이는 좋은 법률을 가질 수 없다. 따라서 군주는 우선적으로 좋은 군대를 가져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파멸하게 된다. 그렇다면 좋은 군대란 무엇인가? 좋은 군대는 용병과 지원군에 의존해서는 이뤄질 수 없는데, 용병은 돈에만 관심이 있어서 충성스럽지 않으며, 지원군은 외부 세력을 끌어들여 외세 침략의 빌미만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행운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역량으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자국 민중들로 구성된 자국 군대를 가져야만 하고, 마키아벨리는 바로 이 자국 군대를 좋은 군대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군대를 직접 사용할 수 있게, 군주는 평화로운 시기에도 게을리 지내지 말고 근면하게 그 시간을 활용해서 군사 관련 기술을 연마해야 한다. 병사들을 잘 조직하고 전투 기술을 익히며 사냥을 하게 해서 그들의 몸을 단련시키면서 지형에 대한 지식을 배우게 하고, 역사서를 통해 탁월한 인물들이 전쟁에서 어떻게 행동했는지, 승리와 패배의 원인은 무엇인지 검토하면서 그들의 훌륭한 점을 모방하는 것은 실제 전투에도 많은 도움을 준다.
군주는 이런 무력을 통해 약한 자들을 보호하고 그 지역의 강한 자들을 억눌러야 하며, 혹시라도 자기만큼 강한 이방인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경계해야 한다. 강한 자들이 혼란을 일으키는 것을 결코 방관하지 말고, 불리한 일을 미리 짐작해서 혼란의 초기에 전쟁을 시작하는 것이 좋다. 전쟁은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지연될 뿐이기 때문이다. 무력 행사에 있어서도 잔인함이 필요하다면 피하지 말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강자를 억누르는데 무력이 행사되어야 하지만, 부득불 민중들에게 무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을 때에도, 그들의 증오를 최소한으로 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필요에 의해서 단번에 악을 저지르고 훗날 계속하지 않아야 잔인함을 잘 활용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시간이 흐르면서 오히려 민중들이 느끼는 잔인함이 점점 더 커진다면 분명 잘못 활용한 것이다.[21] 물론, 사악한 군주가 있어 민중들의 증오와 경멸을 아랑곳하지 않고 민중들을 잔인하게 죽이고 억압해서 통치권을 획득할 수야 있겠지만, 마키아벨리는 이 부분에 있어서 군주편을 들지 않고, 그것은 결코 영광스럽지 않기 때문에 군주의 역량(virtu)이 될 수 없다면서, 민중편을 든다. 이런 주장은 마치 군주가 최우선이 아니라 민중이 최우선인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22]은 마키아벨리의 이런 면을 두고, "군주론은 군주를 위해 지어진 것이 아니라 진짜 속내는 군주를 파멸로 이끌고 사람들을 공화정으로 넘어오게 만들려는 일종의 계략"이라고 보기도 한다.[23]
3.1.1. 마키아벨리즘에 대한 오해
모든 인간, 특히 이의를 제기할 여지가 없는 군주의 행동에 대하여 민중은 그 결과로써 그 수단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니콜로 마키아벨리, 군주론 18장 중
흔히 마키아벨리즘하면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선 어떤 수단, 방법도 가리지 말아야 한다[24]는 사상 정도로만 인식되는게 현대의 일반적인 인식이다. 마키아벨리와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대부분의 사람들도 마키아벨리즘은 '이기적이며 교활하고 도덕적으로 잘못된 행위를 정당화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평화보다는 전쟁을 촉구하는 그의 끔직한 사상을 극도로 혐오했었다. 물론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잔인함, 거짓말, 위선과 반종교적 행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그러한 혐오는 기존 도덕 정치를 꿈꾸는 사람의 입장에서 봤을 때 전혀 일리없는 감정이 아니었다. 그러다보니 한편에선 결과를 위해 더러운 수단을 사용하는 사람을 '마키아벨리스트'라고 비하하는 지경까지 갈 정도로 마키아벨리에 대한 인식이 나빠졌고, 심지어 유럽에서 마키아벨리는 종종 악마의 대명사처럼 취급되었다.니콜로 마키아벨리, 군주론 18장 중
다만 군주론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런 비도덕적 행위에 마키아벨리는 항상 조건을 달아놓아 한계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인 경우에 마키아벨리는 민중(시민)들을 배신해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 부하[25]나 그 지역의 유력자들[26]을 배신하거나 속이라고 주장한다. 즉 권력을 지닌 사람, 귀족, 부자들 중에 자신의 권력에 경쟁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억눌러야 된다고 주장한다. 소수의 강자보다는 다수의 약자들의 지지를 받는 것이 군주에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또한 마키아벨리는 "민중들은 억눌리지만 않으면 만족하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민중들을 억압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도 말한다. 군주가 어쩔 수 없이 민중들을 억누를 수밖에 없을 때에도, 잔인한 행동은 '일시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때의 잔인함은 민중들의 안전을 보다 더 보장할 수 있는 것이어야 민중들은 그 행동을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불필요하면서 길게 지속되는 잔인함은 민중들로 하여금 군주를 증오하게 만들며, 이러한 민중들의 증오는 군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다시 매우 부정적으로 되돌아오기 때문에, 장기적인 잔인함은 군주가 절대적으로 피해야 될 행동이라고 마키아벨리는 단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악한 군주가 있어서 민중(시민)들을 잔인하게 죽이고 억압하는 것을 통해서 통치권을 획득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영광(gloria)"스럽지 않기 때문에 군주의 역량(virtu)이 될 수 없다면서, 마키아벨리는 군주의 입장이 아니라 민중의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보려고 한다.[27]
정리하자면, 잔혹하고도 비열한 수단과 방법은,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28]에서 필요에 의해서 쓰되, 민중의 안전과 자유라는 공익을 증진시키는 '결과'가 반드시 따라와야 하며, 그 행사는 '일시적'이어야 한다. 따라서 결과론적으로 '민중의 안전과 자유를 보장하지 않고', '어쩔 수 없이 사용하는 것도 아닌' 소위 '마키아벨리즘'이라 불리는 식의 더러운 정치수단은, 현대의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애초 마키아벨리의 의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이 공익이라는 것이 한 사람의 도덕관념에 있어서 공적인 부분과 사적인 부분으로 명확하게 나눠질 수 없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29] 또한 사람마다 공익에 대한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선택에 다분히 주관적인 판단이 개입될 수도 있다. 다만 실제로 벌어진 사실, 즉 현실적 케이스를 기준으로 결과론적인 공익을 파악한다는 점에서 주관적 판단의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 마키아벨리의 입장이다. 그리고 마키아벨리는 사람들마다 공익에 대해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더라도, 서로간의 합의가 이루어지는 공적인 선택의 영역에 있어서는 그 주관적 기준의 문제가 훨씬 덜 일어난다고 보았다.[30] 따라서 마키아벨리는 군주국(한사람)보다는 공화국(다수)을 더 선호하며, 그 공익을 보장하는 '법'의 제정을 매우 중요시 여겼다.[31] 다만 한사람의 판단도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닌게, 급박한 상황에서 과단성있게 결단하는 것은, 다수보다 한사람이 더 잘할 수 있으며,[32] 그런 결단이 종종 '결과론적인 공익'을 성취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한사람이 언제나 결과론적인 공익을 추구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으며 사람마다 공익을 정의하는 것도 달라 개인의 사적 판단은 항상 자의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마키아벨리는 급박한 상황이 아닐 경우 최대한 공익을 보장할 수 있는 법과 공화국을 선호한 것이다.[33]
자기 조국의 안전이 절대적으로 걸린 문제일 때, 수단이 정당한가 정당하지 않은가, 자비로운가 잔혹한가, 칭찬을 받을 만한가 치욕스러운가 하는 것은 전혀 고려할 필요가 없다. 모든 양심의 가책을 제쳐 놓고, 어떤 계획이든지 간에 조국의 생존과 조국의 자유를 보존할 수 있는 방안을 최대한 따라야 한다.
『로마사 논고』 3권 41장
또한 '권력을 위협하는 유력자, 귀족, 부자들을 처치함에 있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모술수를 펼쳐라'는 것도, 보통은 도덕적인 행위로 공익을 얻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최선이지만 현실이 기만으로 가득 차있을 때는 자신도 기만을 해야 권력을 유지할 수 있고, 이런 기만적 상황에선 기만을 통해 권력을 잡는 것이 도덕적 행위로 권력을 잡지 못하는 것보다 결과론적으로 시민들에게 안전과 이익을 보장할 수 있기 때문에 기만적인 행동을 해야 된다는 것이 마키아벨리의 생각이다.[34] 따라서 어떤 정치가나 정치 지지자가 더러운 정치수단을 사용하면서 이를 마키아벨리즘으로 합리화한다고 하더라도, 그가 속한 사회가 위기에 처해있지 않거나 기만과 거짓으로 가득찬 사회가 아니라면, 그가 행한 기만은 도덕적 부정직으로 간주되어 그 행동은 결과론적으로도 인정받지 못하고 이로 인해 수많은 적들을 만들어내어 방법론적으로도 유효하지 않는 것이 된다.[35] 마키아벨리는 평화로운 시기에 '더러운 수단'을 사용하여 목숨을 잃었던 여러 군주들의 실패를 자신의 책에 열거하기도 했다.『로마사 논고』 3권 41장
3.1.2. 군주론에 대한 비판
마키아벨리 스스로가 "속이는 사람은 언제나 속는 사람을 찾는다(18장)"고 말했듯이, 속이는 사람은 '약속을 믿는 사람'을 배반하는 것이다. 체사레 보르자가 자신의 적들을 용서해주겠다고 해놓고선 그들이 한자리에 모이자 바로 몰살시켰던 것처럼, 마키아벨리는 상황에 따라 약속을 어기는 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마키아벨리의 다른 예시에서 알 수 있듯이 이러한 기만은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으며, 마키아벨리는 아군이라도 필요에 따라 꼬리자르기를 해라고 권유한다.[36]그런데 상대방의 믿음을 이용해 그 믿음을 배신하고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얻는 이러한 방법은, 도덕적인 부분을 굳이 건드리지 않더라도 과연 개인적으로 이익이 되는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학자들이 많다. 어떤 군주라도 '약속을 믿는 부하'를 거느려야 자신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데, 군주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어느 누가 그의 말을 믿고 그 군주에게 충성을 맹세하겠냐는 얘기다. 물론 단 한번의 선택으로 상황이 완전히 끝난다면[37] 배신하는 것이 이익이겠으나, 문제는 인생은 수많은 선택으로 이루어져 있고, 어떤 선택에서의 기만은 다른 선택을 할 때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것을 팃포탯 전략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팃포탯 전략이란, 일단 '믿는 것'이 우선이고 상대방이 배반할 경우만 그에 맞는 확실한 응징을 하겠다는 전략이다. 그런데 이 전략은 '교활하게 기만해서 배반을 우선시하는 전략'보다 항상 더 성공적이었다는 것이 학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사실, 신뢰가 성공에 미치는 영향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신뢰의 문제'를 교묘하게 단 한번의 선택으로 결정되는 '생존의 문제'로 끌고 가서 의미없게 만들려고 하지만, 그가 드는 예시들은 정작 수많은 선택을 통해 성공과 실패를 하는 군주들을 다루고 있다.[38]
또한, '현실'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서 잔인한 행동과 기만이 용인된다고 치더라도, 마키아벨리의 논리는 사익과 공익이 일치되었을 때 비로소 합당한데, 현실은 사익과 공익이 일치되지 않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는 것이 문제다.[39][40] 게다가 마키아벨리도 스스로 지적했듯이, 사람의 성격은 쉽사리 변하지 않으며,[41] 사익을 우선적으로 추구하는 사람이 공익을 우선적으로 추구하게 될 경우는 극히 드물다.
3.2. 공화주의
모든 고대의 좋은 것들은 자유로운 삶으로부터 나왔고, 지금의 무질서는 노예적 삶에서 비롯되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모든 부문에서 자유로운 땅과 지방은 크게 번성했다. 왜냐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결혼이 더욱 자유롭고, 남성들에게 결혼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한 것이며, 이들은 각자가 키울 수 있다고 믿는 자녀들을 기꺼이 낳아서 기른다. 그는 자신의 유산이 빼앗길까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그의 자녀들이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알 뿐만 아니라, 그의 자녀들이 그들의 능력을 통해 우두머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농업과 제조업 모두로 인해 도시의 부는 크게 증가한다. 왜냐하면 각자는 그와 같은 것을 기꺼이 증대시키고, 한 번 획득하면 자신의 것으로 향유할 수 있다고 믿고 재화를 취하고자 노력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경쟁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개인적이고 공적인 이익들을 생각하게 되고, 사익과 공익 모두가 놀랍게 성장한다.
《로마사 논고》 2권 2장
『로마사 논고』에서 마키아벨리는 '군주 한명의 비르투'보다 '시민 다수의 비르투'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시민적 영광과 위대함을 획득하기 위해 필요한 일이라면 그 행위의 본질이 선하든 악하든 기꺼이 하려는 마음가짐이 바로 '시민의 비르투(역량[42])'인데, 시민의 비르투는 절대적으로 자기 조국의 안전이 걸린 문제일 때, 정당하거나 정당하지 않거나 자비롭거나 잔인하거나 칭찬받을 만하거나 치욕스럽거나를 고려하지 않고, 모든 양심의 가책을 제쳐 놓은 채 시민들로 하여금 조국을 구하고 조국의 자유를 지킬 수 있는 계획을 최대한 따르도록 만든다. 도시가 강력해지고 위대해지기 위해서는 이러한 '비르투'를 가진 시민들이 많아져야 되는데, 시민의 비르투는 '그 시민의 자유'가 보장될 때 가장 크게 향상된다. 이는 역사적으로 도시들이 자유로운 상태에 있을 때 영토와 부를 증가시켰고, 거꾸로 자유로운 공동체가 전제정이 되었을 때는 국력과 부가 더 이상 증진하지 않았던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따라서 시민의 자유가 보장되는 공화국이 시민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군주국보다 더 뛰어난 정치체제라는 것이 마키아벨리의 주장이다.《로마사 논고》 2권 2장
즉, 시민의 자유를 억누르면, 시민의 비르투는 곧 부패하기 시작한다. 부패는 두 가지 방식으로 전개된다. 하나는 시민 공동체가 정치에 관심을 잃어버림으로써 자신의 비르투를 잃고 공공선에 대한 관심마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힘 있는 자들이 공공의 자유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 정책을 제안할 때, 공직은 더 이상 가장 위대한 비르투를 가진 사람들로 충원되지 않고 반대로 그들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달성하는 데 가장 확실히 도움을 줄 수 있는 자들로 충원된다. 물론, 적어도 10년에 한 번씩, 공동체의 법률을 쇄신하여 공동체가 파멸로 치닫는 것을 막는 탁월한 비르투를 지닌 지도자가 도시에 나타난다면, 그 도시는 결코 타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영향력으로 사람들을 고무시키는데, 선한 사람들은 그를 본받고자 하며 악한 사람들은 그에 반하는 삶을 부끄럽게 여겨, 그 도시의 비르투를 전체적으로 향상시키고 도시의 타락을 막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지도자가 도시에 나타나는 것은 전적으로 운에 달려 있으므로, 그것이 영원히 계속되리라는 보장을 할 수 없다.
그래서 공화국은 도시의 시민정신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시민들에게 자유를 주고 갖가지 야심을 추구하도록 허용하여 사람들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끔 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그 도시는 곧 분열되고 이는 언제나 자유에 치명적이게 되는 딜레마에 빠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거나 당파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지지를 하게 되며 이로서 파벌이 정권을 장악하고 파벌은 항상 전제정으로 넘어갈 위험이 생긴다.
또 신중함과 안정성에 대해서도, 인민이 군주보다 더 신중하고, 더 안정적이고, 더 잘 판단을 내린다고 말하고 싶다. 인민의 목소리를 하느님의 목소리에 비유하는 것은 결코 근거 없는 얘기가 아니다. 인민의 의견은 그 예측하는 능력이 아주 뛰어나다. 그래서 인민은 어떤 신비한 힘의 지원을 받아 그 자신의 좋은 운명과 나쁜 운명을 미리 예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든다. 판단을 내리는 데에도 인민은 탁월하다. 그들은 똑같은 능력을 가진 연설자가 서로 다른 편을 위해 찬반 연설을 하는 것을 들으면, 거의 언제나 그중에서 제일 좋은 의견을 선택하며 또 그들이 듣는 연설의 진실을 곧바로 알아본다. 인민이 이렇게 하지 않은 적은 거의 없다. 물론 진정한 용기와 외면적 유용성의 문제와 관련하여,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인민도 실수를 한다. 그러나 이에 비하여 군주는 그의 흥분 때문에 실수를 저지르기 때문에, 인민들에 비하여 실수의 빈도가 훨씬 높다. 행정관을 선출하는 데에도 인민은 군주보다 더 나은 선택을 한다. 타락한 습관을 가진 악명 높은 인사를 공직에 추천할 때, 인민은 결코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 반면에 군주는 아주 손쉽게 그것도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그런 부패한 인사의 임명에 동의한다. 인민은 어떤 것을 싫어하면 몇 백 년이 흘러가도 동일한 의견을 유지하는 데 비하여 군주는 그렇지가 못하다. 이 2가지 사항에 대하여 로마인들은 아주 훌륭한 증인이다. 4백 년 동안 4백 번에 달하는 집정관과 호민관의 선거가 있었지만 로마인들이 나중에 후회한 선택은 불과 4번 미만이다.
《로마사 논고》 1권 58장
따라서 오랫동안 나라를 유지하기 위해선, 자유를 보장함으로써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그 갈등을 이용할 줄 알아야 하고, 공화국에서는 법과 제도(ordini)를 비르투 간의 갈등을 통해서 만듬으로써, 그 갈등을 지혜롭게 이용할 수 있다. 평민 파벌과 부자 파벌의 갈등은 견제와 균형을 통해 서로는 서로를 빈틈없이 감시하기 때문에, 공화국에서는 나라의 영광을 드높일 수 있는 새로운 법과 제도가 상황과 시대에 맞게 끊임없이 신설될 수 있고, 그렇게 제정된 법과 제도는 다시 시민의 자유를 보장함으로써, 시민의 비르투를 높은 수준으로 유지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제도(ordini)는 시민들이 비르투를 획득하고 자신의 자유를 유지하게끔 강제되는 방식으로 확실하게 제정되어야 한다. 그래서 이 제도는, 갈등으로 인한 무차별적인 중상모략을 막을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줘야 하며, 유력자가 시민의 자유를 증진시켜 인기를 얻더라도 그 인기가 다시 시민의 자유에 위해를 가하지 않도록 감시할 수 있어야 하며, 절대적 명령권은 종신이 아닌 제한된 기간에만 위임되도록 정해야 하고, 사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부자들의 야심을 분쇄하여 국고를 넉넉히 하고 시민들은 검소한 생활을 하게끔 만들면서, 정치 제도가 크게 변화할 때는 구체제를 지탱하던 소수의 인사들을 과감히 처단할 수 있어야 한다.[43]《로마사 논고》 1권 58장
도시 '내부'의 일이 훌륭한 법과 제도의 확립에 있는 것처럼, 도시 '외부'의 일인 군사 외교적 관계도 마찬가지로 일련의 제도를 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인간은 자기 자원에만 의존해서 사는 데에 만족하지 않으며, 타국을 지배하여 그걸 만족시키고자 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에, 한 국가는 다른 국가들과 기본적으로 적대적인 관계에 놓여 있다. 물론 평화를 통해 만족할만한 자원을 얻을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따라서 평화적 행동 노선을 추구하는 도시는 그 자신의 미래를 운에 맡기는 것이랑 다를 바 없다. 따라서 이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공격을 최선의 방어로 간주해 도시의 위대함에 도전하는 자는 누구든지 격파할 수 있도록 팽창 정책을 취하는 것이다. 이로써 대외적 패권의 추구는 도시 내에서 자유를 유지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간주된다.
대외적 패권 추구를 하기 위해서는 첫번째, 군사에 이용 가능한 시민 수를 최대한으로 유지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 이민 유입을 촉진하여 인력을 확보하고, 동맹국을 주변에 두고 그들을 종속적 위치에 묶어두되 그들에게 군사적 원조를 요청하는 대가로 그들을 법률로써 보호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두번째는 병력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법으로 '단기적으로, 그리고 대규모로'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로마는 언제나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적을 향해 군대를 진격시켰고, 지체 없이 전투에 들어갔다.' 이러한 전략은 최소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보는 것이기 때문에 어떠한 정책도 이보다 더 유익할 순 없다. 덧붙여, 전쟁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군과 적군의 비르투를 살피는 일이다. 나라에 돈이 많다고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며, 대포 등의 화기에 전적으로 의존한다고 해서 전쟁에서 이기는 것도 아니다. 또한 성채를 짓는다고 방어가 튼실해지는 것이 아니고, 원군이 있거나 용병을 고용한다고 해서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다. 전쟁의 승패는 상대적인 비르투의 차이, 즉 자유롭고 싶어하는 열망과 역량이 얼마나 있는지에 달려 있다.
요약하자면, '지배받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욕구'는 필연적으로 갈등을 일으키는데, 그 갈등이 좋은 법과 제도를 통해 파벌간의 상호 견제와 균형을 이루어서 '시민의 자유'를 보장하는 '새로운' 법과 제도를 끊임없이 신설해낸다면, 이로 인해 '시민의 비르투'는 향상되고 나라는 번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필립 페팃은 시민들이 지니는 '비지배의 욕구'가 바로 공화주의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즉, 자유는 이사야 벌린이 주장한 '간섭의 부재'가 아니라, '비지배의 욕구로 만들어진 법'이 제대로 기능할 때 보장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주인의 간섭이 없는 노예'는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롭지 않다. 언제든지 주인의 변덕에 의해서 노예 상태로 되돌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유란, '다른 사람의 지배를 받지 않게 해주는 법'[44]이 시민들의 요구로 언제든지 만들어지고 지켜질 수 있을 때, 비로소 완전한 개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4. 사상에 대한 평가
키케로, 아리스토텔레스, 토마스 아퀴나스 등의 기존 서양 철학자들이 현실과 동떨어진 도덕 정치를 말했던 것과는 달리, 마키아벨리는 현실에서 정치가 어떻게 실제로 작동하는가를 적나라하게 말하여 역사와 현실에 근거한 근대 정치철학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즉, 군주나 공화정부가 자신의 안전과 이익을 위해서 어떤 행동을 선택해야 하느냐는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서 논했다는 점에서 마키아벨리는 서양 정치철학사에서 매우 높게 평가받는다. 지금의 용어로 치면 '현실정치'[45]를 말하는 것이 된다.마키아벨리의 방법론은 오류가 많고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으며 제시한 자료도 부정확하거나 불완전하다는 비판을 많이 받기도 한다. 따라서 지금의 학술자료들로 마키아벨리를 바라보면 허술한 부분이 많이 발견된다. 다만 그러한 결함은 미지의 영역을 처음 개척하는 모든 사람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그의 방법론을 무조건적으로 배척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무조건적으로 따르지는 말아야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에서 어떤 점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것은 마키아벨리가 그 전시대의 철학자들과 달랐던 그 지점, 즉 도덕적 당위가 아니라 '현실의 사례'에서 정치를 살펴볼 것을 요구한다는 점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마키아벨리의 정치학에서 중점적으로 살펴야 될 것이 있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정치적 행동은 '고귀한 동기'가 아니라 '좋은 결과'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마키아벨리에 따르면, 전통적 도덕 관념에 부합하는 행동을 했던 권력자들이 종종 재난을 초래했던 반면, 도덕 규범을 어겼던 권력자들은 도리어 시민의 삶을 개선시키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거느리는 지도자는 반드시 그 행동의 동기보다 그 행동의 결과를 주의깊게 살펴봐야 한다. 이런 결과지향적 태도가 비록 '성공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마키아벨리즘으로 비판받기도 하지만, 마키아벨리즘은 일단 아무 생각없이 비열한 행동을 한 뒤 그걸 합리화하기 위한 변명으로서 사용되어선 안되며, 행동하기 전 그 현실적인 결과를 예측한 뒤, 보다 더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한 선택으로서의 확신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현실적인 근거를 가진 상태에서, 그것이 시민들의 자유와 공공의 이익을 가져온다는 확신을 이루기 위해서 행사하는 일시적인 비도덕적 행동은, 마키아벨리에 있어서 용납되는 정치적 행위가 된다.
이런 까닭에 비록 마키아벨리에게 빚을 지고 있음을 공공연하게 인정하는 학자들은 드물지만, 그가 근대 정치사상의 발전에 미친 영향을 과소평가하기는 어렵다. 사실 근대 정치학은 주로 마키아벨리에 대한 반응으로 발전해왔다고 볼 수 있으며, 마키아벨리를 논박하는 과정에서 마키아벨리를 비판하는 학자들의 철학도 뚜렷하게 정립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한편 아돌프 히틀러, 베니토 무솔리니 같은 폭군들도 하나같이 마키아벨리를 찬미했다. 또한 그의 저작에서 권력의 획득 및 유지 방법에 관한 비결을 발견하기도 했다. 그러나 폭군이 마키아벨리에게서 자기 입맛에 맞는 부분을 많이 찾아내려면 마키아벨리의 사상을 대부분 부정하고 좁은 범위의 전술적 쟁점에만 집중해야 한다. 여러 독재자들은 무자비한 행위와 기만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관용적 태도를 자신의 죄악을 감추는 수단으로 삼으려 하겠지만, 마키아벨리가 남긴 더 중요한 교훈은 무자비한 행위와 기만 같은 전술들이 결국 공익에 보탬이 되는 일시적인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체사레 보르자의 잔인함은, 그가 '순간의 잔인함'을 통해서 로마냐 지방의 주민들에게 안보를 제공했기에 상쇄될 수 있었다. 그런 공익을 실현하지 못했거나 그 잔인함이 장기적으로 행사되었다면 아마 그는 하찮은 폭군에 불과했을 것이다.[46]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에 대한 해석은 서양 정치사상사에서, 플라톤의 정치사상에 대한 해석에 버금갈 정도로, 굉장히 다면적으로 나타난다.
- 프랜시스 베이컨은, "우리는 인간의 당위적 활동 대신에 현실적 활동에 대해 쓴 마키아벨리 같은 사람들에게 큰 신세를 지고 있다"고 말하였다.
- 볼테르는 "언젠가 당신의 신세를 망쳐놓을지 모르는 이웃을 해치우는 것"으로 마키아벨리의 핵심적인 가르침을 표현했다.
- 장 자크 루소는 그를 공화주의자의 친구라고 평하였다. 이러한 루소의 사상은 프랑스 혁명으로 이어져 자코뱅의 사상적 근원이 되었다.
-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은 군주론을 "대단히 위대하고 고결한 심정을 갖춘 참으로 정치적인 두뇌의 더할 나위 없이 위대하고 진실로 가득 찬 착상"이라고 평가했다.
- 베니토 무솔리니는 마키아벨리를 “정치학의 모든 스승 가운데 가장 훌륭한 스승”으로 격찬했다.
- 안토니오 그람시는 마키아벨리를 <옥중수고>에서 많이 언급하며, 그를 중요한 인물로 보고 있다.
- 리콴유는 마키아벨리의 사상에 대해 "국민의 사랑을 받는 존재가 될지,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존재가 될지 사이에서 나는 늘 마키아벨리가 옳다고 믿었다"라고 했다.
- 한나 아렌트는 "근대적 의미에서 혁명의 정신적 아버지"로 평가했다.
- 프로이센 왕국의 계몽군주인 프리드리히 2세는 스스로 <반마키아벨리론>을 저술하여, 군림하는 군주가 아닌 봉사하는 군주의 소임을 강조했으나, 프리드리히 2세가 왕위에 오른 후 유럽은 그가 일으킨 전쟁 때문에 쑥대밭이 되고 만다. 하지만 이를 통해 프로이센의 국력은 크게 신장되었으며, 프리드리히 2세는 현대 독일에서 가장 존경받는 위인 중 한 명이 되었다.
- 레오 스트라우스는 그를 "악의 교사"(teacher of evil)이라고 칭하면서, 기독교의 가르침에 대항하여 '영적 전쟁 (spiritual warfare)'을 수행하는 용감한 인물이라고 평하였다.
- 버트런드 러셀은 "그는 어떤 정치적인 논증이든 결코 그리스도교나 성경에 근거하여 풀어가지 않았으며, 권력은 자유로운 경쟁 속에서 권력을 잡을 만한 기술에 능통한 자를 위해 존재한다. 마키아벨리는 대중의 인기를 얻은 정부를 선호하는데, 이는 ‘권리’의 개념에서 비롯되지 않고 대중의 인기를 얻은 정부가 전제 정부보다 잔인성, 비도덕성, 변덕의 정도가 덜하다는 현실적인 관찰에서 나온 결론이다."라고 평가했다.[47]
- 로버트 달은 군주론을 극단적으로 편향되어 있으며 비체계적인 책으로 평했다. ("extremely one-sided and unsystematic")
- 헨리 키신저는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거나 활용할 수 있는 마키아벨리의 사상이란 실제로 매우 드물다"고 평하였다.
5. 어록
나는 내 나라(피렌체)를 내 영혼보다 더 사랑한다. [48]
인민들이 호감을 느끼고 부자들이 적대감을 느끼는 참주들은 훨씬 더 확고한 지위를 누린다. [49]
인간들은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기꺼이 그들의 지배자를 갈아치우려고 하며, 이런 믿음이 그들로 하여금 지배자에게 무기를 들고 봉기하게 만든다. [50]
비록 강력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어떤 지방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항상 그 지방 거주민들의 지지가 필요하다. [51]
다른 사람에게 그가 장악한 권한을 유산으로 남겨서는 안 된다. 인간은 선보다는 악에 기울기 십상이므로 그의 후계자는 그가 고귀한 목적에 따라 사용한 것을 자신의 야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사용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국가의 건국(과 개혁)에는 한 인물이 적합하다 해도, 일단 조직된 정부는 그것을 유지하는 부담이 단지 한 사람의 어깨에만 걸려 있다면 오래 지속될 수 없다. [52]
군주는 어떻게 야수의 방식을 사용해야 하는지를 잘 알아야 할 필요가 있기에, 그는 여우와 사자를 선택해야 한다. 왜냐하면 사자는 함정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할 수 없고, 여우는 늑대들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군가는 함정을 알아보기 위해 여우가 될 필요가 있고, 늑대를 겁먹게 만들기 위해 사자가 될 필요가 있다. 단순히 사자에 머무는 사람들은 이것을 이해햐지 못한다. [53][54]
공화정들에는 더 많은 생명, 더 많은 증오, 복수에 대한 더한 열망이 있다. 그들의 옛 자유에 대한 기억은 그들을 잠잠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래서 가장 안전한 길은 공화정들을 제거하거나 그곳에 사는 것이다. [55]
이곳과 같은 도시에서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 가치인지 숙고해보셨습니까? 어떤 폭력으로도 굴복시킬 수 없고, 어떤 이익으로도 대체할 수 없으며, 아무리 긴 시간이 지나도 소멸하지 않는, 자유라는 이름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 생각해보셨습니까? [56]
군주가 가질 수 있는 최선의 요새는 인민에게 미움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요새를 가지고 있더라도 인민이 당신을 미워한다면 그 요새는 당신을 구원하지 못할 것입니다. [57]
용병을 기반으로 국가를 통치하는 군주는 안전하지도 평화롭지도 않다. 용병은 분열되어 있고, 야망을 품었으며, 규율이 없다. 이들은 신을 두려워하지도 않으며, 동료에게 충성스럽지도 않다. [58]
군주는, 특별히 신생 군주는 사람들이 선하다는 평판을 갖는 그러한 모든 것들을 준수할 수 없다는 점을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그는 종종 신의를 저버리고, 자비롭지 않고, 인간적이지 않고, 반종교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기 때문이다. [59]
전쟁은 누가 원할 때 시작되지만, 누가 원할 때 끝나지는 않는다. [60]
다스림을 받는 이들이 동의하지 않는 지배는 결코 지속될 수 없다. [61]
운명의 바람과 사태의 변화가 그에게 지시하는 바에 따라, 그는 정신을 바꿀 필요가 있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가능하면 선한 것으로부터 떠나지 않아야 하겠지만, 필요한 경우 어떻게 악해질 수 있는지도 알아야 한다. [62]
6. 저서
<rowcolor=white> 제목 | 집필 연도 | 발간 연도 |
《군주론》 II Principe | 1513년 | 1532년[63] |
《로마사 논고》 [64] Discorsi sopra la prima deca di Tito Livio | 1518년 | 1531년[65] |
《만드라골라》 Mandragola | 1518년 | 1526년 |
《전술론》 Libro della arte della guerra | 1520년 | 1521년 |
《피렌체사》 Istorie fiorentine | 1525년 | 1532년[66] |
저서로는 티투스 리비우스의 로마사를 참고하여 작성한 공화정 논고인 《로마사 논고》[67], 《전술론》[68], 《피렌체사》 등의 역사서와 《군주론》으로 대표되는 정치서적, 그리고 희곡 《만드라골라》 등이 있다. 그가 살아 있을 때는 《만드라골라》가 큰 인기를 모아 마키아벨리의 가계에 상당한 도움이 되었으며 이 때문에 그를 정치저술가 보다는 희곡작가로 아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이후 죽고 나서는 군주정에 대한 마키아벨리 자신의 정치론을 당시까지의 유럽 역사를 인용하여 증명한 《군주론》이 출판되어 유명해졌고 이는 곧 마키아벨리를 대표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책으로 인해 그는 이후 수백년 동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교활한 자'의 아이콘으로서 부정적으로 인식되게 된다. 반면, 학계에서는 그의 저서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근대 공화주의 이론의 체계를 성립한 《로마사 논고》를 높게 평가하는 편이다. 《군주론》은 마키아벨리가 그 당시 메디치 가문에게 등용되기 위해 보여주기식으로, ㅡ 마키아벨리 자신의 진짜 의견은 최대한 자제하고 ㅡ 군주정에 치우쳐서 얘기를 한 면이 있으며, 그의 진실된 생각은 공화정을 주장한 《로마사 논고》에 있다는 것이다.
7. 대중 문화에서
-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에서 등장한다. 니콜로 마키아벨리(어쌔신 크리드 시리즈) 참조.
- 창세기전에서 등장한다. 마키아벨리(창세기전 시리즈) 참조.
- 대항해시대 5의 이벤트에서 교역능력치가 높은 SR급 항해사로 잠깐 나온 적이 있다. 멜빵모자를 쓴 젊은 꽃미남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이벤트 당시 비중있는 조연으로 나오기도 했지만 메인 퀘스트에서 등장한 적은 없다.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포가튼의 스포르차 캠페인의 화자로 등장했다. 마지막에서야 그의 본명과 그가 쓰고 있던 것이 군주론이었음이 밝혀진다. 결정판에서는 다른 화자로 바뀐다.
- 리코리스 리코일 시리즈에서 악역인 마지마의 입을 통해 등장한다. 사회의 치안 유지라는 공익을 위해 고아를 모아 소년병 조직을 만들지만 그 아이들은 시민권을 갖고 있지 않고(여권을 만들 수 없다는 언급 등장) 테러현장에 투입돼서 임무 중 사망할 경우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처리된다.
- 이탈리아에서 살아남기에서는 유료화 이후 첫 화에서 등장한다. 밀라노 공국의 관료 모집 글을 보고 관심이 생겨 지원을 했으며 9급 관료에 재수되어 저수지 공사 감독직을 맡게 된다.[69] 다만 본인은 이런 곳에서 썩고 싶지 않아서 행정개혁에 대한 개선사항을 적은 논문을 주인공에게 보내고 이를 인상깊게 본 주인공이 그를 불러 일종의 테스트를 본 뒤 그를 외교 자문관직에 앉힌다. 이 만남 이후 마키아벨리는 주인공에게 깊은 인상을 받아 원역사에서는 이 책을 메디치 가문에 바친다고 한 군주론의 서문을 밀라노 공작인 주인공에게 바친다고 쓰게 된다.
8. 기타
- 마키아벨리의 정치이론은 현대에 이르러서도 좌·우파 가리지 않고 폭넓게 사용된다. 좌파에서는 그람시가 대표적이다. 그람시는 마키아벨리의 정치이론을 응용해서 '노동자의 무력 혁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식인 사회의 헤게모니를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우파에서는 스트라우스가 대표적이다. 스트라우스는 군주론에서 군주의 입장만 고려하는 방식으로 이론을 전개해 나가면서, 마키아벨리의 정치이론의 핵심은 '국가의 체제(레짐)를 유지'하는 것에 있다고 보고, 그러기 위해서 엘리트들은 우매한 민중들을 속여서, 개인에 대한 자유와 관용을 말하는 대신에 국가이익을 우선하는 정치를 펼쳐야 한다고 주장해서 네오콘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학자들은 마키아벨리가 체제(레짐)만큼이나 민중의 자유를 중요하게 여겼다고 비판한다. 또한 민중을 기만하는 스트라우스의 정치관은 중국과 북한 같은 독재국가도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에 엘리트주의적 국가주의와 다를게 없다는 비판을 하기도 한다.
- 근대 정치사상의 선구자이며 대중에게는 냉혹한 정치가란 이미지가 있지만, 사실 그의 말년은 이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가진 모든 야망이 좌절된 이후, 피렌체의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성벽 보수일을 하는 하급공무원으로 삶의 후반기를 지내다가 생을 마감하였다. 당대의 천재이자 야망가에게 이러한 삶은 모진 고문보다 견디기 힘든 일이었을 텐데 마키아벨리는 독특한 방법으로 이를 극복했다. 성벽 보수 일을 하러 출근할 때는 대충 작업복을 입고 일을 하였으나 퇴근하고 밤이 깔리기 시작하면 집으로 돌아와 진흙과 오물로 더럽혀진 작업복을 벗고 세안을 깨끗이 한 다음 제일 좋은 옷을 입은 후에 식사를 하고 서재로 가서 그리스 로마시대의 고전을 읽었다. 이는 마키아벨리가 겸허하게 과거의 대가들을 만나며 그들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시간에 대한 즐거움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그가 친구였던 프란체스코 베트리에게[70] 보낸 편지에 잘 나타나있다. 식음에 대한 생각을 잊고 모든 고통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마저 잊는 시간이라고 말했다.
- 동성애자라는 주장이 있는데 그것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동성애 행위는 젊은 시절에 할 수 있는 일탈 아니겠느냐" 하는 식의 내용이 있어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이 문제는 이미 학술적으로나 문헌학적 관점에서도 동성애자라는 증거가 없다는 것은 증명된 사실이다.
- 공화정 시절의 마키아벨리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만난 적이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피렌체가 방어만 하는 피사를 점령할 수 있는 방법으로, 피사로 흐르는 물줄기의 상류를 막아서 한번에 터뜨리는 작전을 마키아벨리에게 제시하였다. 피사가 물에 잠기면 그들은 성 바깥으로 나올 수 밖에 없고 그러면 전력이 상대적으로 강한 피렌체군이 쳐들어가 이길 수 있다는 심산이었다. 이 작전은 피렌체 정부의 승인을 받아 진행되었지만, 피사 사람들이 댐공사를 극렬하게 방해해서 시간이 지체되었고, 그로 인한 예산부족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 투팍의 별칭 중 하나가 마키아벨리에서 따온 "마카벨리(Makaveli)"다. 이는 투팍이 마키아벨리의 사상에 심취해서 마키아벨리를 소리가 비슷한 마카벨리로 바꾼 것이다.
- 심리학계에서는 마키아벨리식의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을 하나의 성격유형으로 분류한다. 마키아벨리적 성격(Machiavellianism)이 바로 그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어둠의 삼원 문서 참조.
[1] 16세기 후반에 그려진 산티 디 티토의 상상화. 산티 디 티토는 마키아벨리 사후에 태어난 화가이기에, 그는 마키아벨리를 본 적이 없으며 따라서 이 그림은 전적으로 화가 자신의 상상으로 그린 그림이다. 그는 이 그림에서 마키아벨리를 동그란 형태의 얼굴을 지닌 원숭이상으로 묘사했는데, 이러한 원숭이상은 그 시대에 유행했던 골상학에서 '교활한 자'의 얼굴상이라고 한다. 이를 통해 산티 디 티토는 '권모술수에 능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그 시대의 편견을 그림으로 표현했다.[2]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현실적인 '통치술'(statecraft)을 제시했지만, 정치학을 학문으로서 전문적으로 연구했던 학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경제학도 애덤 스미스의 철학적 목적의 저술로 시작된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통치 이론은 토머스 홉스 및 존 로크, 장 자크 루소의 사상과 더불어 근현대 정치학의 계보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3] 여기서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키케로가 말하는 도덕적인 정치철학을 말한다.[4] 이 점은 그의 대표작인 《군주론》15장의 '어떻게 사는가'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는 매우 다르다. 라는 문장에서 단적으로 나타난다.[5]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 라는 문장으로 잘 알려진 문장이다.[6] 그의 주장을 한 마디로 요약해 보자면, '다수의 민중은 지배받지 않으려 할 때 가장 건강하고, 지배하려는 본성을 지닌 소수의 가진 자는 스스로의 본성을 억누르고 다수의 민중이 지배받지 않도록 하려는 목적에 헌신할 때 가장 훌륭하다'는 것이다. ( "정치 변동과 관련된 그의 기술들을 읽다보면, 한 가지 유독 강조되는 사실을 알게 된다. '시민' 또는 '다수'는 지배하려하기보다 지배받지 않으려 할 때 가장 건강하고, '가진 자'와 '소수'는 '다수' 또는 '시민'이 지배받지 않도록 하려는 목적에 헌신할 때 가장 훌륭하다는 점이다." ㅡ 곽준혁 『마키아벨리 다시 읽기』 민음사, 2014, p.158)[7] 이런 영향인지 마키아벨리는 종종 스스로를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고 낮춘다. 사실 그의 친구들이 다 귀족출신이었기 때문에 그가 가진 돈은 '상대적'으로 적었다고도 볼 수 있다. 단, 마키아벨리는 동시대의 평민보다는 부유한 생활을 했었다.[8] '피에로 데 메디치'의 복귀란, 피렌체 공화국이 다시 메디치 가(家)가 지배하는 군주국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9] 이때 교황이 내건 구호가 "야만인들을 쫓아내자!" 였다. 여기서 야만인은 바바리안, 즉 이탈리아 북쪽에 사는 프랑스인과 독일인을 가르킨다.[10] 스트라파도(Strappado; 매달기)라고 한다. 손을 뒤로 묶어 매달고, 높은 곳에서 갑자기 떨어뜨려 어깨 탈구를 일으키는 고문으로,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연이어 하면 한시간 이내에 죽음에 이를 정도로 심한 고문. 단, 체중이 가벼운 사람은 상대적으로 데미지가 덜하다. 중세 종교재판에서 특히 많이 사용되어 악명을 떨쳤다.[11] 마키아벨리가 공직에 있었을 때의 봉급 10년치에 해당되는 액수였다. 다행히 친구들의 탄원과 보증으로 유예되어 벌금을 천천히 납부하여 나중에는 다 갚았다.[12] 마키아벨리는 원래 줄리아노에게 《군주론》을 바치려고 했으나, 마음을 바꿔 피렌체의 새로운 군주 로렌초에게 바치겠다고 마음을 바꾼다. 하지만 실제로 군주론을 바쳤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마키아벨리가 주고 받은 편지를 보면, 친구들이 마키아벨리에게 《군주론》을 메디치 가문 사람들에게 전달하지 않도록 설득하고 있어서, 메디치 가문은 애초에 《군주론》을 못봤을 것이라는 추측이 지배적이다. (에리카 베너 『여우가 되어라』 이영기 옮김, 책읽는수요일, 2018, p.497 참조)[13] 오르티 오리첼라리는 루첼라이 가문에서 주최하는 지식인 모임이었다. (더 정확히는 그 모임의 장소 이름이 '오르티 오리첼라리'.)[14] 결국 '오르티 오리첼라리'의 젊은 귀족들은 피렌체 군주정을 뒤집고 다시 공화정을 수립하고자 음모를 꾸미다가 들켜서 사형당했다.[15] 그래서 《군주론》은 공화주의적 관점에서 읽어야 된다는 주장이 대세이다. 반면, 《군주론》은 철저히 군주의 시각에서 저술한 책이기 때문에 공화주의적 관점에서 해석하면 안 된다는 의견도 있다. 이 주장을 따르는 사람은 '시민(다수)'과 '법'을 따르는 공화주의적 관점은 《군주론》을 읽는 제대로 된 방법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레오 스트라우스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군주론》 안에서도 공화주의적 관점을 찾아볼 수 있으며, 비슷한 시기의 저술, 편지, 활동 등이 마키아벨리가 공화주의자라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어서, 단순히 '마키아벨리가 그 순간만큼은 철저히 군주의 입장에서 《군주론》을 저술했다고 주장하는 것에는 많은 무리가 있다.[16] 사보나롤라파가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그들이 미는 후보가 서기관 선거에 당선되었다.[17] 이곳에는 갈릴레오 갈릴레이, 미켈란젤로, 엔리코 페르미 등의 묘도 있다.[18] 단, 아직 군주가 되지 않은 상태라면 '후함'은 군주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고 마키아벨리는 단서를 단다.(16장) 즉, 군주가 되기 전에는 '후하다'는 평판을 유지할 필요가 있으나, 군주가 되고 나서는 '후하다'는 평판을 유지할 필요가 없다는 것.[19] 군주는 본보기로 극소수를 처벌하여 신민을 충성스럽게 유지할 줄도 알아야 하며, 많은 병사를 통솔하기 위해서 평판에 신경 쓰지 않고 잔인할 줄도 알아야 한다(17장)고 마키아벨리는 주장한다.[20] 여기서 마키아벨리는 소수만이 군주가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알고 다수는 군주가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모르므로, 다수의 지지를 통해 소수의 경멸을 잠재울 수 있다는 논리를 펼친다.(18장)[21] 새로운 모욕이 계속해서 지속되면 민중들은 절대로 안심할 수 없기 때문에 그 군주를 증오하게 되고 군주는 이로 인해 항상 손에 칼을 들고 있어야 하므로, 모욕을 주어야 한다면 그 맛을 덜 느끼고 기분이 덜 상하도록 단번에 가해져야 하는 것이다.[22] 대표적으로 미국 정치이론 교수 Mary Dietz가 있다.[23] 분명 마키아벨리는 『군주론』 서문에서 자신이 "군주의 입장"에서 책을 썼다고 밝혔는데, 8장 '사악한 군주에 대해서' 설명할 때는, 군주의 입장이 아니라 "민중의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또한 군주는 후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데, 이전에 피렌체에서 벌어졌던 친공화주의 쿠테타가 메디치가(군주)의 후함으로 인한 사람들의 무관심 때문에 좌절되었다는 것을 마키아벨리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마키아벨리는 경멸을 피하기 위해 민중들을 무장시켜야 된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군주에게 매우 위협이 되는 정책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24] 라틴어로는 Exitus acta probat.[25] 마키아벨리는 체사레 보르자를 군주의 이상적인 본보기라고 칭찬하는데, 특히 체사레 보르자가 자신의 부하를 내세워 지역 사람들에게 엄격한 질서를 따르게 만들고, 이로 인해 백성들의 불만이 많아지자 부하를 죽여 꼬리 자르기한 행동을 극찬(!)한다.[26] 마키아벨리는, 그 지역의 유력자들(강자, 부자, 귀족)이 세력을 키우지 못하게 미리 그 싹을 잘라야 된다면서, 수많은 예시를 들면서 이를 강조한다.[27] 마키아벨리는 『군주론』 서문에서 자신이 "군주의 입장"에서 책을 썼다고 밝혔지만, 8장 '사악한 군주에 대해서' 설명할 때는, 군주의 입장이 아니라 "민중의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본다. 즉 군주의 권력을 위해서가 아니라, 민중의 입장에서 군주의 행위를 평가한다. 물론 그것이 민중의 입장이 아니라 종교적 입장을 위한 것이지 않느냐고 반박할 수도 있는데, 문제의 핵심은 해당 장의 내용이 종교적 입장을 위한 것이든 아니든 간에, 어쨌든 민중의 이익(안전과 자유)을 대변하고 있다는 점이다.[28] 자신이 마주하는 현실이 기만적인 사람들로 가득차 있어서, 자신도 상대방을 기만하지 않으면 자신이 위태로워지는 상황. 즉, 국가가 심하게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새로운 국가를 건국할 필요가 있을 때를 말한다. 반대로, 국가가 평화로우며 서로 간에 신뢰로 뭉쳐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잔혹하고도 비열한 수단'을 사용한다면, 결국 실패하게 됨을 마키아벨리는 강조한다.[29] 다만 마키아밸리는 '사람들은 모두가 사익을 욕망한다'는 것을 기본 전제로 했기에, 그 행동이 사익을 충족하는 행위라 하더라도 공익이 보장된다면 용인하는 입장이다.(《마키아벨리 : 르네상스 피렌체가 낳은 이단아》 김경희 저.)[30] "물론 진정한 용기와 외면적 유용성의 문제와 관련하여,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인민도 실수를 한다. 그러나 이에 비하여 군주는 그의 흥분 때문에 실수를 저지르기 때문에 인민들에 비하여 실수의 빈도가 훨씬 높다." 《로마사논고》[31] 물론 공화국도 엄연히 리더가 있기에 최종 판단은 결국 리더가 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군주국에서는 권력이 집중되지만 공화국에서는 "권력의 분열"이 일어나며, 이런 분열을 잘 조정하는 것이 나라를 오랫동안 영광스럽게 한다는 점에 있다. 군주국에서는 분열이 없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그 군주가 죽거나 잘못된 선택을 하면 영광은 사라지며, 따라서 지속성도 짧다. 하지만 분열이 있는 공화국에서는 자연스레 "견제와 균형"이 이뤄지기 때문에 나라의 영광을 드높일 수 있는 새로운 법과 제도가 상황과 시대에 맞게 끊임없이 신설된다. 즉, 소수파(귀족)와 다수파(민중)간의 균형과 견제를 요구하는 법과 제도를 추구하므로써, 이런 "영광"을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32] 건국을 해야되는 시점을 말한다. 즉, 창업과 수성 중에 '창업'을 말하는 것이다. 건국의 시기에 우유부단하면 그 나라가 세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때는 다수의 우유부단한 결단보다 한 사람의 단호한 결단이 더 유용하다는 것이 마키아벨리의 생각. 하지만 유지력(수성) 면에 있어서 군주제는 공화국을 넘어서지 못한다고 보았다. 예를 들면, 로마가 초기에 군주국으로 나라를 세웠지만 한동안 정체기에 머물렀다가, 이후 공화국이 되면서 급격하게 세력을 확장했다는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로마제국은 다시 군주국으로 되면서 현상유지를 하기에도 급급했고, 그래서 간혹 나타나는 뛰어난 역랑(비르투)의 명군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33] 마키아벨리는 《로마사 논고》에서 "국가를 세우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 할 때에는 세베루스의 방법(권모술수)을 모방하고, 이미 확립된 국가를 보존하기 위해 적합하고 영광스러운 조치를 취해야 할 때에는 마르쿠스(도덕정치)를 모방하라"고 말한 바 있다. 즉, 국가의 건국 시기나 위기 상황에서는 과단성 있는 한 명의 역량(군주제)이 필요하고, 국가가 안정되었을 때는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 사회적 합의를 이룰 수 있는 시민들의 역량과 공정한 법(공화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34] 즉, 정치지도자는 상황에 따라 비도덕적 행위를 해서라도 공익을 성취해야만 한다고 본 것이다.[35] 어찌됐든 정치 지도자가 허구한날 소위 '배신'의 정치나 '더러운 수단'의 정치를 한다면, 그 정치 지도자에 대한 '믿음과 신뢰'는 떨어질 수 밖에 없어서 다른 정치 지도자들과의 약속과 합의도 신뢰할 수 없으며, '더러운 수단'을 사용한 자신 스스로도 야심있는 자신의 신하들에게 그 '더러운 수단'을 당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마키아벨리는 '더러운 수단(dirty hands)'은 나라의 존망이 걸린 급박한 상황에서 자유와 안전을 지키기 위해 일시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며, 이후 나라가 안정되었을 때 그 '더러운 수단'을 사용하면 상황은 더 악화된다는 것을 강조했던 것이다. 그래서 상황에 따라 그 수단을 쓰는 것이 그 사람의 역량(virtu)이 되지만, 사람마다 정해진 성격이 있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그 수단을 사용한다는 것은 무척 힘들다는 게 마키아벨리의 생각이었다.[36] 마키아벨리는 체사레 보르자가 자신의 집사(레미로 데 오르코)에게 엄격하게 법을 집행하라고 명령을 내리고선, 민심이 흉흉해지자 바로 그 집사의 목을 잘라 민심을 잠재웠던 것을 칭찬한다.[37] 또는 모두를 완벽하게 속일 수 있다면.[38] 군주론의 대표적인 모델로 꼽는 체사레 보르자 역시도 마키아벨리가 평가하기를, 거의 모든 선택에서 다 잘해놓고 마지막 선택에서 실수했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수많은 선택 앞에서, 체사레 보르자처럼 마지막 죽을 때까지 철저하게 상대를 기만하는 선택을 해야 된다는 것이 『군주론』의 본 뜻이라면, 『군주론』은 군주를 해치기 위한 공화주의자 마키아벨리의 계략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39] 마키아벨리는 『군주론』 8장에서 아가토클레스의 예를 들어 이 문제(사익과 공익의 불일치)를 조명한다. 하지만 다른 곳에서는 '현실적'인 이유를 들던 마키아벨리가, 이 문제에 있어서는 '비현실적'인 이유를 들면서 아가토클레스의 '사악함'을 까내린다. 아가토클레스의 사악함은 "영광"이 없기 때문에 군주의 비르투라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민중에게는 유리한 해석이긴 하나, 그로 인해 마키아벨리는 비도덕적 현실 논리라는 자신의 주장의 일관성을 깨뜨려 버리고 만다.[40] 물론 이러한 문제는 군주국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고 공화정에서는 해결된다. 공화정에서는 사익들 간의 상호 견제로 인해 균형을 유지하여, 사익과 공익의 조화가 훨씬 쉽게 이루어진다. 그래서 마키아벨리는 군주국 보다는 공화국을 선호한다. (근데 이런 것들을 『군주론』에서는 밝히지 않는다)[41] 군주론 25장 참조.[42] virtu는 군주론에서 보통은 '역량'으로 번역되지만, 로마사 논고에서 virtu는 능력이라기 보다 마음가짐에 더 가까워서 '미덕'에 가깝다. 즉, 좀 더 여러 의미를 나타나기 때문에 로마사 논고를 번역한 강정인 교수는 virtu를 '역량'이나 '미덕'으로 번역하지 않고 원래 의미를 충분히 표현하기 위해서 발음 그대로 '비르투'라고 번역했다고 한다.[43] 이 부분이 바로 마키아벨리가 생각한 공화주의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똑같이 계급 간의 갈등이 벌어졌음에도, 로마 공화정은 그 갈등을 통해 영광을 얻었고 피렌체 공화정은 그 갈등으로 분열되었던 이유는, 바로 제도(ordini)의 차이에 있었다는 게 마키아벨리의 생각이다. 그 로마의 제도는 피렌체와는 다르게, 중상모략을 막을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주었고, 지도자는 종신이 아닌 기간제로 허용했으며, 사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유력자들이 딴 마음을 먹지 못하게 감시하면서, 정치가 크게 변화할 때는 구체제를 지탱하던 소수의 인사를 과감히 처단했었다는 것이다.[44] 이 법은 갈등이 상호감시를 통해 균형이 맞춰지도록 조정되어, 상황과 시대에 맞게 끊임없이 신설되는 법이다[45] Realpolitik: 이념이나 도덕적인 전제보다는 권력 및 실제적인 물질 요소를 더 고려한 정치적 혹은 외교적 견해를 의미[46] 마일즈 J. 웅거 『마키아벨리, 군주론의 탄생』, 미래의창, 2019, p.436 참조[47] 《러셀 서양철학사》, 버트런드 러셀 지음, 서상복 옮김, 을유문화사. p.660~661[48] 그야말로 공화주의적 애국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표현이다. 언뜻 보자면 개인을 말살하는 전체주의적 표현으로 오인될 수 있으나, 원문에서 마키아벨리는 '나라'를 patria라고 표현한 게 중요하다. 그는 그냥 지역을 뜻하는 국가는 nazione라고 쓰고 '공동의 이익과 공동의 자유를 추구하는 나라'라는 의미에선 patria를 사용했다. 즉, 마키아벨리의 시각에서는 시민의 이익과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최적의 체제가 공화주의정이었던 것이며 이는 체제 그 자체나 지도자에 대한 충성과는 다른 차원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마키아벨리는 시민들의 자유를 그 누구보다도 사랑했던 위인이라고 평가받고 있다.[49] 『로마사 논고』 제1권 제40장 / 『로마사 논고』 강정인, 김경희 옮김 p.231[50] 군주론 3장[51] 군주론 3장[52] 『로마사 논고』 中[53] 『군주론』 18장[54] 일반적으로는 '군주는 여우의 두뇌와 사자의 심장을 가져야 한다'로 축약되어 알려져 있다.[55] 군주론 5장[56] 니콜로 마키아벨리 『피렌체사』 2권 34장.[57] 『군주론』 中[58] 『군주론』 中[59] 『군주론』 18장[60] "Comincionsi le guerre quando altri vuole, ma non quando altri vuole si finiscono." (『피렌체사』 제3권 제2장)[61] 니콜로 마키아벨리 『피렌체사』 2권 34장. (김상근 『붉은 백합의 도시, 피렌체』, 시공사, 2022, p.105 에서 확인)[62] 『군주론』 18장[63] 사후에 출간[64] 원제목은 《리비우스 로마사 첫 10권에 대한 강의》이다. 이것이 일본에 번역되면서 "로마사 논고"로 이름지어 졌다.[65] 사후에 출간[66] 사후에 출간[67] 한길사 판은 로마사 논고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어 있다. 반면 동서문화사 판은 일본의 한 출판사의 번역명을 따라해서 '정략론'이라는 이름으로 군주론과 합본으로 발간되어 있다.[68] 제목대로 당시의 군사전술과 군대 운용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다. 사실 마키이벨리의 지식은 주로 역사, 정치 등에 집중되었고, 그 연장선상에서 군사 부문의 중요성은 알고 있었지만, 실전적 측면의 이해는 부족했다. 때문에 이 책은 로마사 논고와 군주론 등 그의 다른 저서들보다는 평가가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다. 그래도 이 책의 서문에 나오는 "전쟁터에서 싸우는 군인들이야말로 평화의 소중함을 가장 잘 아는 이들"이라는 문장은 종종 인용되는 편이다. 그러나 사실 이 말은 마키아벨리 본인의 사상을 담은 건 아니며 다른 군사전문가 1명이 마키아벨리와 다른 손님들에게 군대의 운용과 전술에 대해 설명하며 대화하는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69] 마키아벨리급 인재가 왜 9급부터 시작하냐면 주인공이 마키아벨리의 구체적 활동 시작 시기를 몰라서(...)였다. 주인공은 이럴줄 알았으면 특채로 뽑을 것이었다며 아쉬워하지만 자신이 만든 원칙을 깰수도 없고 어차피 능력이 있으면 알아서 올라올 것이라며 일단 지켜보기로 한다.[70] 당시 피렌체의 외교관이자 정치인, 작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