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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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桓石民(? ~ 389)
동진의 인물. 예주 초국(譙國) 용항(龍亢) 출신으로 환온의 동생인 환활의 아들이다. 인망과 재능을 겸비해 여러 사람들의 존경을 샀다고 한다.
2. 생애
약관의 나이에 이름이 알려져 위장군 사안의 참군으로 징소되었다. 이후 형 환석건을 따라 전진의 형주자사 도귀(都貴)의 사마 염진(閻震) 등을 격파하면서 공을 세웠다.태원 8년(383년) 7월, 숙부인 형강이주자사(荊江二州刺使) 환충의 상소에 의해 독형강예삼주지십군군사(督荊江豫三州之十郡軍事), 진무장군, 영양성태수로 임명되고 하구(夏口)에 주둔했다.
태원 9년(384년), 장구(漳口)에서 수군태수 하후징(夏侯澄)과 함께 부견의 장수 모용수, 강성(姜成) 등을 격파하니, 조정으로부터 영초국내사, 양군태수에 임명받았다.
태원 10년(385년) 2월, 환충이 사망하자 조정에서 환석민을 서중랑장으로 삼고 환충의 형주자사 직책을 잇게 했다. 환충은 생전에 경릉태수 조통(趙統)을 보내 전진에게 빼앗긴 양양성을 공격하게 했는데, 환석민도 그 뒤를 이어 양양으로 계속 파병하면서 조통을 도왔다. 결국 형주자사 도귀는 마침내 패해 양양을 포기하고 노양(魯陽)으로 달아났다.
태원 10년(385년) 7월, 환석민은 도귀를 쫓아 노양까지 점령하고 하남태수 고무(高茂)를 산릉(山陵)으로 보내 진나라 황릉을 보위케 했다.
태원 11년(386년) 10월, 장군 안겸(晏謙)을 파견해 홍농(弘農)을 치니, 전진의 동중랑장 모용기(慕容夔)가 투항했다. 홍농을 접수한 환석민은 호(湖), 섬(陜) 두 지역에 수자리를 설치하고, 관중에서 전진에게 빼앗겼던 휘장과 악사들을 일부 되찾아 태악을 세웠다. 그때 전진의 애평제 부비가 내려와 무리하게 낙양을 침공하자, 장수 풍해(馮該)를 보내 전진군을 전멸시켰다. 환석민은 애평제 부비를 포함한 좌복야 왕부(王孚), 이부상서 구조(茍操) 등을 참수하고 그 수급을 수도로 보냈다.
태원 12년(387년) 정월, 정령족의 적요(翟遼)가 산릉을 침구하니, 환석민은 하남태수 풍준(馮遵)을 보내 물리쳤다. 걸활족의 황회(黃淮)가 병주자사를 자칭하며 동진에 대항하고, 패주하던 적요와 세력을 합쳐 장사(長社)를 공격했는데 그 무리가 수천에 이르렀다. 이에 환석민은 남평태수 곽전(郭銓), 송자태수 왕하(王遐)를 파견해 토벌하고 황회를 참했다. 적요는 또 패배해 하북으로 도망쳤다. 이후 공을 인정받아 좌장군으로 승진했다.
태원 14년(389년),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자식이 없어 후사가 끊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