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02 18:21:59

환석건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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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fff> 작당후(作塘侯)
桓石虔 | 환석건
시호 없음
작위 작당현후(作塘縣侯)
(桓)
석건(石虔)
아명 진악(鎮惡)
생몰 ? ~ 388년
출신 초국(譙國) 용항현(龍亢縣)
부친 환활(桓豁)
자녀 아들 - 환홍(桓洪), 환진(桓振), 환탄(桓誕)
딸 - 환씨(桓氏)
1. 개요2. 생애3. 기타

[clearfix]

1. 개요

동진의 인물. 자는 불명. 천민 출신의 첩 소생으로, 형주자사 환활얼자이다. 재간이 있어 몸놀림이 민첩한데다 힘까지 절륜한 맹장이었다고 한다. 형제들은 총 20여 명이나 있었고 모두 '석(石)' 자를 돌림자로 썼다.

2. 생애

태화 4년(369년) 7월, 큰아버지 환온이 제3차 북벌에 나설 때, 환석건은 비록 관직은 없었으나 함께 종군했다. 환온의 군대가 방두(枋頭)에 이르러 전연군의 습격을 받자, 작은아버지인 거기장군 환충이 적군에게 포위되어 사로잡히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환온의 좌우에는 선뜻 환충을 구하러 나서는 이가 없었다. 이에 환온이 환석건을 불러 말했다.
"너는 네 숙부가 적진에 떨어진 것을 알고 있느냐?"
환석건은 그 말에 격분하여 즉시 말 위로 뛰어올라, 수만 명의 무리 속으로 돌격해 포위망을 돌파하고 환충을 구출한 뒤 유유히 복귀했다. 그 모습을 본 아군은 모두 감탄해 마지 않았으며, 적들은 환석건의 용맹에 크게 놀라 두려워 했다고 한다. 이 일화는 하북에 널리 퍼져, 당시 학질을 앓던 자들 사이에서는 "석건이 온다!"를 외치면 병이 놀라 달아날 것이라는 민간신앙까지 생겼다.

태화 4년(369년) 11월, 대사마 환온이 제3차 북벌 실패에 대한 책임을 전부 예주자사 원진(袁真)에게 돌리고 조정에 상표해 그를 면직시킬 것을 종용했다. 당연히 원진은 불복하며 환온의 죄상을 폭로했으나 조정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수양(壽陽)을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환석건은 영원장군, 남돈태수에 제수받고 휘하 제장들을 지휘하여 무구(武丘) 남성(南城)에서 반란군을 도우러 온 전연군을 무찔렀다.

태화 6년(371년) 정월, 환온이 친히 출정해 원근(袁瑾)[1]을 격파하고 수양성을 포위한지 여러 달이 지난 때였다. 궁지에 몰린 원근은 전진의 선소제 부견에게 항복하면서 구원을 청하니, 부견은 그를 양주자사(揚州刺使)로 삼고 무위장군 왕감(王鑒), 전장군 장자를 파견해 20,000여 보•기로 구원하게 했다. 환석건과 회남태수 환이는 환온의 명을 받고 출진해 석교(石橋)에서 전진군과 싸워 크게 이기고, 말 500필을 빼앗았다. 왕감과 장자는 신성(慎城)으로 물러나 형세를 관망하다가, 며칠 뒤 환온이 수춘을 함락시키고 원근을 수도로 압송하자 다시 본국으로 돌아갔다. 반란 진압 후, 환석건은 경릉태수에 임명되었다.

영원 원년(373년) 5월, 익주의 촉 땅 사람 장육(張育)이 전진에 통치를 거부하며 반란을 일으키고, 동진에 사자를 보내 항복을 청했다. 부견이 진군장군 등강에게 중갑병 50,000명을 주고 장육을 토벌하게 하자, 동진에서도 위원장군 환석건과 익주자사 축요(竺瑤)를 보내 병력 30,000으로 장육을 돕게 했다. 하지만 성도(成都)를 공격하던 장육이 내분으로 인해 금방 진압당하자, 환석건과 축요는 점강(墊江)에서 요장이 이끄는 전진군을 격파하고 파동(巴東)에 주둔했다.

태원 2년(377년), 아버지 환활이 사망하여 부친상을 이유로 사직했다.

태원 3년(378년) 8월, 점점 천하통일의 야욕을 들어내던 부견이 마침내 회남(淮南) 지역을 침공해오기 시작했다. 동진 조정은 조서를 내려 얼른 환석건을 복직시키고, 분위장군, 남평태수로 삼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관군장군으로 승진시켰다.

태원 6년(381년) 11월, 전진에서 사마 염진(閻震), 중병참군 오중(吳仲) 등을 파견해 20,000여 병력으로 경릉(竟陵)을 침구했다. 환석건은 아우인 위군참군 환석민과 함께 20,000 군사를 이끌고 수륙으로 전진해 염진과 오중을 격파했다. 패배한 염진과 오중은 관성(管城)으로 들어가 오수(滶水)를 사이에 둔 채 저항했다. 환석건은 오히려 적들이 강에 지나치게 의존하면서 방심하고 있다는 점을 이용해 야밤에 몰래 강을 건넜다. 환석건의 군대가 다 넘어오고 나서야 이를 알아챈 적군들은 큰 혼란에 빠졌으며, 이내 환석건이 맹공을 개시하자 금세 전멸하고 관성은 무너졌다. 이 전투에서 적군 수급 7,000여 개, 적장 염진과 오중을 포함한 포로 10,000여 명, 말 수백 필, 소와 양 1,000두, 갑옷 3,000벌을 노획했다. 조정에서는 그의 공을 치하하고 영하동태수에 임명했다.

태원 8년(383년) 5월, 형주자사 환충이 전진에게 빼앗긴 양양(襄陽)과 촉 땅을 탈환한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환석건도 군대를 이끌고 번성(樊城)으로 들어간 뒤, 응양장군 곽전(郭銓)과 함께 무당(武當)을 공격했다. 부견은 연주자사 장숭(張崇)을 보내 무당을 구원하게 했으나, 환석건은 장숭을 격파하고 2,000여 호를 탈취해 돌아왔다.

태원 9년(384년) 2월, 환충이 사망하자 예주자사에 임명되었다. 사안이 북벌을 개시할 때, 사현 함께 하비(下邳)를 공격해 탈환했다. 이후 사안의 지휘 아래 낙양까지 탈환했으나, 오래지 않아 모친상을 이유로 사직하면서 주서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태원 12년(387년), 상을 마치고 다시 예주자사로 복직되었다. 환석건이 주둔지를 역양(歷陽)으로 옮기고 싶다 상소하니, 조정에서 이를 허락했다.

태원 13년(388년), 세상을 떠났다. 조정에서 그를 우장군으로 추증하고, 얼자 출신임에도 전공이 적지 않다 하여 작당후(作塘侯)로 추봉했다.

3. 기타

  • 《진서》에 환석건의 민첩함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하나 있다. 어느 날 환석건이 여러 장수들과 함께 사냥에 나섰는데, 맹수 한 마리가 아직 숨이 멎지 않은 채로 화살을 여러 발 맞고 엎드려 있었다. 장수들은 환석건의 용맹함에 대해 익히 들은 바가 있어, 그를 시험하고자 가서 화살을 회수해오라 시켰다. 환석건이 망설임 없이 맹수에게 다가가서 화살 한 발을 뽑으니, 맹수가 펄쩍 뛰어올라 도망치려 했다. 이에 환석건은 더 높이 뛰어올라 맹수를 제압하고는 화살 한 발을 더 뽑고 돌아왔다고 한다.


[1] 원진의 아들로, 아버지 사후 반란군을 이끌었다.